16. 발진

 

1941년 12월 6일에 거추장스러운 급유대를 떼어버린 진주만 공격부대는 20노트의 속력으로 남하했다.

경순양함 아부쿠마가 앞장섰으며 제17구축대의 구축함 4척이 넓게 펼쳐져 뒤따랐다.

5km 뒤에는 전함 히에이와 기리시마가 나란히 항진했고 전함의 좌우로 6km 떨어진 해상에는 중순양함 도네와 치쿠마가 항진했다.

전함의 5km 후방에서는 6척의 항공모함이 2열로 항진했다.

기함 아카기가 오른쪽 선두에 섰고 1.5km 후방에 카가가 뒤따랐으며 왼쪽에는 소류가 선두에 서고 히류가 뒤따랐다.

쇼가쿠와 즈이가쿠는 카가와 히류의 뒤를 따랐다.

제18구축대의 구축함 3척이 항공모함의 후방을 지켰으며 잠수함 3척은 뒤처져 따라갔다.

 

하와이 시간으로 1941년 12월 7일 오전 2시에 군령부로부터 마지막 정보가 도착했다.

진주만에는 방공기구가 떠있지 않았으며 전함 주변에 어뢰방어망도 없었고 항공기에 의한 장거리 초계도 이루어지지 않고 있었다.

정박 중인 함정은 전함 9척, 경순양함 3척, 수상기모함 3척, 구축함 17척이었으며 경순양함 4척과 구축함 9척은 건선거에 들어가 있었다.

항공모함과 중순양함은 없었다.

 

항공정비병들은 제1차 공격대를 비행갑판에 올려 발진준비를 시작했다.

제2차 공격대는 아직 격납갑판에 있었다.

 

12월 7일 새벽에 미해군의 소해함 콘도르와 크로스빌은 진주만 입구를 초계하고 있었다.

오전 3시 42분에 콘도르의 당직사관 러셀 맥클로이 소위가 뱃머리에서 왼쪽으로 50m 떨어진 해상에서 뭔가를 발견하고 조타하사 로버트 우트릭을 불러 의견을 물었다.

쌍안경을 들여다 본 우트릭은 잠망경이라고 대답했다.

맥클로이 소위는 오전 3시 57분에 주변에 있던 구축함 워드에게 발광신호로 잠항 상태의 잠수함을 발견했다고 보고했다.

 

이틀 전인 12월 5일부터 구축함 워드의 함장을 맡고 있던 35세의 윌리엄 아우터브리지 대위는 총원 전투배치 명령을 내렸다.

워드는 소나로 주변을 수색했으나 아무것도 찾지 못했고 아우터브리지 함장은 오전 4시 35분에 전투배치를 해제했다

 

오전 4시 58분에 진주만 입구의 대잠망이 열리면서 소해정 2척은 항 내로 들어갔다.

당시 잠수함 오인 사건이 많았기 때문에 이 사건에 대해 콘도르나 워드 모두 일지에 기록했을 뿐 보고하지 않았다.

이때 맥클로이 소위가 본 것은 아마도 갑표적 중 1척이며 이 갑표적은 소해정들을 따라 항 내로 잠입했을 가능성이 크다.

대잠망은 오전 8시 40분까지 열려있었다.

 

진주만 공습에 참가할 조종사들의 기상 시간은 오전 5시였으나 일부 조종사들은 3시 30분에 일어나 배 안에 만들어 놓은 신사에 참배하고 마음을 가다듬었다.

아침식사를 마친 조종사들은 마지막 브리핑을 듣기 위하여 비행대기실에 모였는데 칠판에는 최종 확인된 미국함정들의 정박 위치가 그려져 있었다.

아카기의 비행대기실에서는 후치다 미츠오 중좌가 수평폭격에 대하여, 무라타 시게하루 소좌가 뇌격에 대하여, 그리고 이타야 시게루 소좌가 전투기 조종사들에게 요점만 추려 짧게 설명했으며 마지막으로 나구모 주이치 중장이 간단하게 격려사를 했다.

격려사가 끝나자 후치다 중좌는 모두 기립시켜 아카기의 함장 하세가와 기치 대좌에게 경례를 했다.

하세가와 대좌는 경례를 받은 다음

 

"계획에 따라 이함하라."

 

는 명령을 내렸다.

소류를 비롯한 다른 항공모함에서도 비슷한 광경이 벌어졌다.

 

오전 5시 30분에 중순양함 도네와 치쿠마가 각각 1대씩의 수상정찰기를 사출했다.

도네의 정찰기는 라하이나 정박지로, 치쿠마의 정찰기는 진주만으로 향했다.

 

진주만에서 북쪽으로 370km 떨어진 발진해역에 들어선 항공모함들은 5시 58분부터 호위함정들과 함께 바람이 불어오는 동쪽으로 변침하여 24노트의 속력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후치다 중좌는 탑승하기 전에 정비장교로부터 '필승' 이라고 적힌 하얀 머리띠를 받아 헬멧에 둘렀다.

풍속은 50km/hr 였으며 해상에는 2m 높이의 파도가 일고 있었고 항공모함의 비행갑판은 아래위로 5도씩 흔들렸다.

 

오전 6시 5분부터 발진이 시작되었다.

가벼워서 활주거리가 짧은 제로기가 먼저 발진했고 이어서 수평폭격기 또는 급강하폭격기, 마지막으로 뇌격기가 발진했다.

제1차 공격대의 숫자는 원래 뇌격기 40대, 수평폭격기 50대, 급강하폭격기 54대, 제로기 45대로 총 189대였다.

그러나 카가의 수평폭격기 1대, 쇼가쿠의 급강하폭격기 1대와 즈이가쿠의 급강하폭격기 2대는 마지막 점검에서 엔진고장으로 제외되어 7일 새벽에 비행갑판에 올려진 함재기는 185대였다.

이들 중 소류의 제로기 1대는 이함 직후 바다에 추락했으나 조종사는 구축함에 구조되었다.

쇼가쿠의 제로기 1대는 이함 직후 엔진이 고장나서 돌아가야만 했으므로 최종적으로 공격에 참가한 항공기는 183대였다.

제1차 공격대는 15분 만에 발진을 마치고 6시 20분에 대형을 갖추어 오아후로 날아가기 시작했는데 이는 기록적으로 빠른 발함시간이었다.

 

(1941년 12월 7일 아침에 진주만을 공격하기 위하여 아카기에서 이함하는 제로기. http://en.wikipedia.org/wiki/Attack_on_Pearl_Harbor)

 

제1차 공격대가 발진을 마치자 진주만 공격부대는 다시 남쪽으로 변침하여 20노트의 속력으로 항진했다.

항공정비병들은 제2차 공격대를 비행갑판에 올려 발진준비를 했으며 비행대기실에서는 조종사에 대한 브리핑이 실시되었다.

오전 7시 5분부터 항모들이 다시 동쪽으로 변침하여 바람을 안고 달리기 시작했고 제로기를 필두로 제2차 공격대가 이함했다.

제2차 공격대는 수평폭격기 54대, 급강하 폭격기 81대, 제로기 36대 등 총 171대로 이루어져 있었으나 카가와 소류의 급강하폭격기 각 1대와 히류의 제로기 1대가 엔진 이상으로 빠져 168대가 비행갑판에 올려졌다.

이들 중 히류의 급강하폭격기 1대가 이함 직후 엔진 고장으로 탈락하여 총 167대가 공격에 참가했다.

 

그리하여 제1차 공격대가 이함을 시작한지 90분 만에 350대에 달하는 전체 공격대가 발진을 마쳤다.

항공모함의 승조원들은 발진이 진행되는 동안 계속 손을 흔들며 제2차 공격대의 마지막 항공기가 완전히 시야에서 사라질 때까지 만세를 불렀다.

 

전함 히에이와 기리시마, 중순양함 도네와 치쿠마에서는 오전 6시 30분에 수상정찰기를 사출하여 남쪽으로 파견했다.

이들은 오아후 방면으로부터 진주만 공격부대를 향하여 북상하는 미군의 항공기나 수상함정이 있는지 감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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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 기습 전야

 

일본해군은 1941년 12월 1일 0시를 기하여 함대호출부호를 바꾸었다.

11월 1일에 바꾼 후 1달 만에 다시 바꾼 것이었다.

이전까지 함대호출부호는 6개월 이상 사용했기 때문에 이례적인 일이었다.

 

불안해진 태평양함대 사령관 허즈번드 킴멜 제독은 다음날인 12월 2일에 정보참모 에드원 레이튼 중령을 불러 보고를 들었다.

이 자리에서 레이튼 중령이 최소한 15일 이상 일본제1 및 제2항공전대의 행방이 묘연하다고 말하자 킴멜 제독은 깜짝 놀랐다.

 

"뭐라고! 제1항공전대와 제2항공전대가 어디 있는지 모른다고?"

("What! You don't know where Carrier Division 1 and Carrier Division 2 are?")

 

"예. 모릅니다. 저는 그것들이 본국 수역에 있다고 생각하지만 어디에 있는지 모릅니다."

("No, sir, I do not. I think they are in home waters but I do not know where they are.")

 

레이튼 중령이 대답했다.

 

킴멜 제독이 다시 물었다.

 

"자네 말은 그것들이 지금 다이아몬드 헤드(오아후 섬의 화산) 부근을  돌아다니고 있는데 그걸 모르고 있을 수 있다는 소리인가?"

("Do you mean to say that they could be rounding Diamond Head and you wouldn't know it?")

 

레이튼 중령이 기어 들어가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것들이 지금이라도 발견되길 바랄 뿐입니다."

("I hope they would be sighted before now.")

 

킴멜 제독은 불안감을 느꼈으나 뾰족한 수가 없었다.

또한 이런 일이 처음도 아니었다.

지난 6개월간 태평양 함대가 일본항공모함을 추적한 것은 134일에 지나지 않았다.

일본항모를 연속하여 추적할 수 있는 기간은 짧게는 9일, 길어도 22일이 한계였으며 그 이후에는 사라졌다가 다시 나타나고는 했다.

지난 6개월 간 일본항모들은 그런 식으로 12번이나 사라졌다가 다시 나타났다.

따라서 이번 경우만 예외적이라고 볼 근거는 없었다.

 

12월 2일 오후 8시에 미드웨이 북방 1,500km 해상을 지나던 진주만 공격부대는 도쿄로부터 

 

"니이가타 산을 오르라. 1208"

 

이라는 무전을 받았다.

이는 도쿄 시간으로 12월 8일 0시를 기하여 미국 및 영국에 대하여 개전한다는 뜻이었다.

몇 시간 후 진주만 공격부대는 날짜변경선을 통과했다.

(진주만 공격부대의 모든 일지는 도쿄 시간에 맞추어 작성했지만 여기서부터는 하와이 현지 시간을 적용한다. 도쿄 시간은 하와이 시간보다 19시간 30분 빠르다. 따라서 도쿄 시간 12월 8일 0시는 하와이 시간으로 12월 7일 오전 4시 30분이다.)

 

(진주만 공격부대 항적도. http://en.wikipedia.org/wiki/Attack_on_Pearl_Harbor)

 

12월 3일에 미해군참모총장 해럴드 스타크 대장은 런던, 홍콩, 싱가포르, 마닐라의 일본대사관 및 영사관에서 퍼플 암호 기계를 파괴하고 있다는 보고를 듣고 이 소식을 태평양함대를 비롯한 일선 사령부에 통보했다.

해럴드 총장으로서는 단안을 내린 것으로 당시 일본의 외교암호를 해독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사람은 워싱턴에서도 손에 꼽을 정도였으며 일선 사령관들은 아무리 고위 장교라도 모르고 있었다.

실제로 태평양함대 사령관 킴멜 제독은 이때 퍼플이라는 용어를 처음 들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전문은 킴멜 제독에게 경각심을 불러 일으키지 못했다.

킴멜  제독은 일본해군이 아시아의 영국 영토를 노리고 대규모로 남하 중인 사실을 알고 있었으며 미국이 언제 영국 편을 들어 일본에 선전포고를 할지 모르는 상황에서 일본대사관과 영사관에서 암호기계를 파괴하는 것은 당연하다고 보았다.

 

12월 4일 오후 2시에 도쿄에서는 도고 시게노리 외상이 이토 세이치 군령부 차장 및 참모본부 제1부장인 다나카 신이치 중장과 회의를 갖고 최후 통첩을 미동부 시간으로 12월 7일 오후 1시에 전달하기로 결정했다.

미동부시간 7일 오후 1시는 하와이 시간으로 오전 7시 30분이며 오전 8시로 예정된 공격 30분 전이었다.

오후 1시라는 최후통첩 시간은 마지막 순간에 주미 대사관에 알려주기로 했다.

 

12월 4일 오전에 진주만 공격부대는 해상급유를 마치고 제2급유대를 분리했다.

제2급유대는 구축함 아라레의 호위를 받으면서 진주만 공격부대의 퇴로에 자리잡았다가 공격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합류할 것이었다.

 

같은 날 킴멜 제독은 항공모함 렉싱턴에게 미드웨이에 버팔로 전투기를 파견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렉싱턴은 다음날인 5일에 중순양함 시카고, 애스토리아, 포틀랜드 및 구축함 5척과 함께 진주만을 출항했다.

5일에는 또한 중순양함 2척(인디애나폴리스, 미네아폴리스)과 구형 구축함을 개조한 소해함 5척으로 이루어진 제3기동부대가 진주만을 떠나 존스턴 섬으로 향했다.

 

12월 5일에 히컴 비행장에는 미본토에서 필리핀으로 파견되는 B-24 폭격기 1대가 착륙했다.

사진촬영용으로 사용될 이 폭격기는 최소한의 승무원만 태우고 비무장인 상태로 태평양을 건넜다.

진주만에서는 이렇게 비무장 상태의 폭격기를 파견하는 것은 전쟁성에서도 하와이가 공격을 당하지 않으리라고 믿고 있다는 증거로 받아들였다.

 

하와이에 먼저 접근한 것은 일본잠수함들이었다.

일본잠수함들은 3일 저녁까지 하와이 근해 560km 이내로 진입했고 6일에는 하와이를 둘러쌌다.

12월 5일 저녁까지 I-71 함은 마우이 섬과 카훌라웨 섬 사이의 알랄라케이키 해협에, I-72함은 몰로카이 섬과 라나이 섬 사이의 칼로히 해협에, I-73함은 마우이, 카훌라웨, 그리고 라나이 섬 사이의 케알라이카히키 해협에 도달했다. 

 

(하와이 제도. http://en.wikipedia.org/wiki/Outline_of_Hawaii)

 

12월 5일 오후에 구축함 셀프리지와 랠프 탤벗은 진주만 바깥에서 초계중이었다.

오후 3시경 셀프리지가 수중물체를 발견했다가 놓쳤다.

잠시 후 진주만에서 8km 떨어진 해상에서 랠프 탤벗이 잠수함을 발견했다면서 전대 기함인 셀프리지에게 폭뢰공격 허가를 요청했다.

셀프리지에서 고래라면서 공격을 불허하자 랠프 탤벗의 함장 랠프 얼 중령은 부하들에게

 

"만약 이놈이 고래라면 꼬리에 모터보트를 단 모양이지!"

("If this is a black fish, it has a motorboat up its stern!")

 

라면서 비아냥거렸다.

 

6일 오전 10시 40분에 존 위넌트 주영대사가 국무성에 전문을 보내왔다.

크라 지협에서 14시간 거리에서 서진 중인 2개의 선단이 발견되었다는 것이었다.

큰 선단은 수송선 25척, 순양함 6척, 구축함 10척으로 이루어져 있었고 작은 선단은 수송선 10척, 순양함 2척, 구축함 10척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영령 말레이 반도로 향하는 곤도 중장과 오자와 중장의 함대였다.

해군성은 이 정보를 태평양함대와 제14해군관구를 비롯한 일선 사령부에 보냈다. 

 

육군항공대는 12대의 B-17 폭격기를 하와이를 경유하여 필리핀에 파견하기로 했다.

B-17 폭격기는 6일 밤에 캘리포니아의 해밀튼 비행장을 이륙하여 하와이 시간으로 7일 오전 8시에 오아후 섬의 히컴 비행장에 도착할 것이었다.

중량을 줄이기 위하여 승무원은 5명으로 줄이고 기총은 12.7mm 1정과 7.62mm 2정만 남겼으며 총탄은 싣지 않았다.

 

6일 오전 5시 30분에 진주만 공격부대는 오아후 북서쪽 960km 해상에서 1시간 동안 마지막 급유를 받은 후 제1급유대를 분리했다.

제1급유대는 구축함  가스미의 호위를 받으면서 진주만 공격부대의 퇴로에 대기하다가 공격을 마치고 돌아가는 길에 합류할 것이었다.

 

오아후 섬에서는 6일 오전  8시 15분에 킴멜 대장이 정보참모 레이튼 중령으로부터 보고를 받았다.

일본항모의 위치는 여전히 오리무중이었다.

 

킴멜 제독은 이어서 참모들과 함께 회의를 열었다.

워싱턴에서는 전쟁이 임박했으니 킴멜 제독이 당연히 주말동안 함대 주력을 출항시킬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회의에서는 다른 결론이 나왔다.

무엇보다 항공모함이 없어서 공중엄호를 받을 수 없는 상황에서 전함  중심의 주력 함대를 해상에 내보내는 것은 위험하다는 의견이 다수였다.

엔터프라이즈가 돌아와서 같이 출항할 수 있는 월요일까지는 육군 항공기들이 지켜주는  항구 내가 안전했다.

또 한 가지는 급유함의 부족으로 당시 태평양 함대의 급유함 세력으로는 한번에 함대의 1/8만 급유할 수 있었다.

전쟁이 임박한 상태에서 명확한 목적도 없이 함대를 내보냈다가 해상에 나가있는 함정들의 연료가 떨어졌을 때 전쟁이 터지면 기민한 대응이 불가능할 수도 있었다.

 

회의가 끝나갈 때쯤 호놀룰루의 일본영사관이 서류를 소각하고 암호기계를 파괴했다는 보고가 들어왔다.

서류 소각이야 이전에도 몇 번 있었으니 특별한 일은 아니지만 암호기계를 파괴한 것은 주의를 끌만한 일이었다.

그러나 킴멜 제독은 일본의 영령 말레이 침공이 임박한 상황에서 일본영사관이 암호기계를 파괴하는 것은 있을 수 있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6일 아침에 급유대를 떼어내 버리고 홀가분해진 진주만 공격부대는 오전 11시 30분에 남쪽으로 변침하여 속력을 20노트로 올렸다.

10분 후인 11시 40분에 쓰시마 해전 당시 도고 제독의 기함인 미카사에 올랐던 Z 기가 나구모 제독의 기함 아카기에 올랐다.

이어서 야마모토 제독의 훈시가 전해졌다.

 

"황국의 흥폐가 이 일전에 달렸다. 각자 최선을 다하라."

 

6일 오후 7시 3분에 라하이나 정박지가 비었다는 I-72함으로부터의 보고가 군령부를 통하여 진주만 공격부대에 전달되었다.

이제 모든 전력을 진주만에 집중해야만 할 것이었다.

 

6일 해가 지자 진주만 공격부대의 항공정비병들은 다음날 출격할 항공기들에 대한 최종 정비 및 점검에 들어갔다.

조종사들은 일찍 자라는 명령을 받고 오후 10시까지 잠자리에 들었다.

 

6일 밤에 특별공격대의 일본잠수함 5척은 갑표적을 발진시켰다.

I-24 함의 갑표적을 지휘하는 사카마키 가즈오 소위는 자이로컴퍼스가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다는 걸 발견했다.

이 상태로는 진주만까지 항해하기 어려웠으므로 I-24 함의 함장 하나부사 히로시 소좌는 걱정스럽게 물었다.

 

"어떻게 할 건가?"

 

사카마키 소위는 승조원인 이나가키 기요시 병조와 함께 잠시도 망설이지 않고 힘차게 대답했다.

 

"진주만으로 가겠습니다."

 

미군은 다가오는 위험을 모르고 있었다.

진주만을 관장하는 제14해군관구 사령관 클로드 블로크 소장은 6일 오후 8시 30분에 잠자리에 들었다.

토요일 오후를 맞아 골프를 치느라 피곤했던 것이다.

 

진주만의 해군항공대 사령관 패트릭 벨린저 소장은 5일째 침대 신세를 지고 있었다.

화요일에 심한 독감으로 쓰러진 그는 일요일 아침까지는 꼼짝말고 침대에 누워 쉬라는 군의관의 명령을 받은 처지였다.

 

많은 수병들은 상륙하여 추수감사절에서 크리스마스를 지나 신년으로 이어지는 연말 분위기가 달아오르기 시작하는 12월의 첫째 주말을 즐기고 있었다.

전함 애리조나 곁에 정박한 수리함 베스탈의 경우 수병의 절반 가량이 상륙했다.

 

하와이 육군사령관 월터 쇼트 중장은 하와이 군관구의 정보참모인 켄달 필더 중령, 참모장 타이지 필립스 대령 및 제24사단장 듀란드 윌슨 소장과 함께 스코필드 병영 장교 클럽에서 열린 연례 자선 디너-댄스 파티에 참석했다.

파티가 끝나고 오후 10시 30분에 집에 돌아온 쇼트 중장은 11시쯤 잠자리에 들었다.

다음날 아침에는 태평양함대 사령관 킴멜 대장과의 골프 약속이 잡혀 있었다.

 

하와이 육군항공대 사령관 프레드릭 마틴 소장과 참모장 제임스 몰리슨 중령도 히컴 비행장 장교 클럽에서 열린 파티에 참석했다.

오후 10시 30분에 멀리 샌프란시스코로부터 몰리슨 중령에게 전갈이 왔다.

필리핀으로 향하는 B-17 폭격기 12대가 이륙했으며 하와이 시간으로 다음날 오전 8시경 히컴 비행장에 도착하리라는 내용이었다.

몰리슨 중령은 당직 장교를 찾아 내용을 전달해 주고 자신도 다음날 아침에 관제탑에서 폭격기를 맞이하기 위하여 파티장을 빠져나와 집으로 가서 잤다.

 

태평양함대 사령관 허즈번드 킴멜 대장은 전투부대 사령관 윌리엄 파이 중장, 전투함대 구축함 사령관 마일로 드레멜 소장과 함께 리어리 제독 부부의 초청을 받아 할레쿨라니 호텔에서 저녁을 먹었다.

킴멜 제독은 편안한 마음으로 즐겁게 식사를 하고 와인을 마시며 담소를 나누다가 오후 9시 30분에 집으로 돌아와 10시에 잠자리에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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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개전 결정

 

진주만 공격부대가 동진하는 동안 제1항공함대 사령장관 나구모 주이치 중장은 미국잠수함의 출현에 가장 신경을 썼다.

따라서 많은 수병들이 잠수함 감시에 투입되었다.

하와이로 가는 항로의 절반 동안은 전 병력의 1/4이 항상 전투배치 상태에 있었으며 나머지 절반에서는 1/2이 전투배치 상태에 있었다.

항해 동안 조종사들은 진주만의 모양과 적 함정의 모양을 숙지했으며 특히 뇌격기 조종사들은 진입 및 이탈 경로를 숙지했다.

 

항공참모 겐다 미노루는 일개 중좌에 지나지 않는 자신의 어깨에 드리워진 엄청난 책임에 짓눌려 신경질적인 반응을 보였다.

그는 아카기의 수평폭격대장인 후루카와 이즈미 대위에게 전함의 주포탑을 직격하여 그 아래에 있는 탄약고를 유폭시키라고 말했다.

후루카와 대위는 3,000m 높이에서 떨어뜨리는 수평폭격으로는 그토록 정밀한 폭격이 불가능하다고 반박하자 겐다 중좌는 정신력으로 극복가능한 일이라고 말했다.

그러자 후루카와 대위는 말도 안 되는 일을 강요하지 말라면서 화를 내었다.

 

(제1항공함대의 항공참모 겐다 미노루 중좌. 자세한 내용은 여기로)

 

일본해군 내에서 최고의 폭격수로 불리던 소류의 가나이 노보루 비조는 매일 오전과 오후 한 차례씩 비행복을  갖추어 입고 격납갑판에 주기한 97식 함상공격기의 폭격수석에 올라 눈 아래 펼쳐진 진주만의 광경을 상상하면서 폭격 연습을 했다.

 

진주만 공격부대는 선두에 구축함 4척을 10km 간격으로 나란히 세우고 그 뒤를 항공모함 6척이 2줄로 따랐다.

그 뒤에는 급유함들이 따라갔으며 마지막으로 전함과 중순양함들이 역시 2열로 뒤를 따랐다.

경순양함 아부쿠마와  구축함 5척은 좌우 경계를 맡았다.

잠수함 3척은 원래 함대의 앞쪽을 정찰하도록 되어 있었으나 나구모 중장은 연락이 끊어질까 우려했다.

결국 잠수함들은 하와이를 향해 가는 동안 아카기의 오른쪽 1km 거리에서 항진했다.

밤이나 안개가 끼면 함정 사이의 거리를 줄였다.

 

나구모 중장은 하와이로 가는 도중 안절부절했다.

그는 해상급유와 진형 유지를 걱정했으며 급유함의 검은 연기나 적의 잠수함에 의하여 발견되거나 또는 적이 미리 알고 기다리는 사태를 두려워했다.

하지만 가장 큰 걱정은 막판에 외교교섭이 타결되어 도쿄로부터 공격중지명령이 떨어졌는데 그 명령을 받지 못하고 진주만을 공격하여 나라를 멸망의 구렁텅이로 빠뜨리는 경우였다.

 

제1항공함대의 참모장 구사카 류노스케 소장은 나구모 중장의 걱정을 덜어주려고 애썼으나 효과가 없었다.

구사카 참모장이 작전의 위험이 크긴 하지만 논리적으로 보아 걱정할 이유는 없다는 식으로 말하면 나구모 중장은 고개를 저으며 이렇게 말했다.

 

"자넨 지나치게 낙관적이야."

 

(제1항공함대 사령장관 나구모 주이치 중장. 자세한 내용은 여기로)

 

진주만 공격부대의 조종사들은 낮에는 반복적인 학습과 토론으로 힘든 시간을 보냈지만 밤에는 일반 수병들과 달리 자유시간을 만끽했다.

이들은 저녁 식사 이후에는 장기를 두거나 카드를 치거나 거의 매일 제공되는 술과 안주를 즐기면서 이야기를 나누었다.

 

나구모 중장의 걱정과 달리 태평양 함대의 전투정보실은 일본의 기만작전에 휘둘리고 있었다.

11월 30일 보고에서 전투정보실은 항공모함 아카기와 급유함 간의 통신을 포착했다고 적고 있는데 당시 아카기와 급유함은 전혀 전파를 발신하지 않았으므로 이는 옛날 통신을 다시 틀고 있던 일본의 기만작전에 속고 있다는 증거였다.

 

겐다 중좌는 나구모 중장과 구사카 소장이 히도카프를 떠나기 전에 이미 2번의 공습으로 진주만 기습을 마무리짓기로 결정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는 나구모 중장에게 사고를 유연하게 해야하며 필요에 따라 3번 이상의 공습을 가할 가능성을 염두에 두라고 주장했으나 반응이 시원찮았다.

 

겐다 중좌는 결정적일 때 내놓기 위하여 계획 하나를 작성했다.

진주만 기습 이후 북쪽으로 물러가는 것이 아니라 하와이 남서쪽으로 내려와서 마셜 제도 쪽으로 철수한다는 것이었다.

이럴 경우 진주만 공격부대는 월요일, 화요일은 물론 어쩌면 수요일까지도 진주만에 반복적인 공습을 가할 수 있었으며 만일 미함대가 추격해 올 경우 마셜 제도의 지상발진 항공기들로부터 지원을 받기 쉬웠다.

 

군령부에서는 매일 오전 11시에 진주만 공격부대의 항로에 대한 일기예보를 포함하여 최신 정보들을 전송했다.

전송은 2시간 간격으로 오전 11시, 오후 1시, 오후 3시 하는 식으로 홀수 시각마다 반복되었으며 다른 정보로 바뀔 때까지 지속되었다.

일본항공모함들은 특유의 낮은 아일랜드 때문에 수신 기능에 문제가 있었으나 진주만 공격부대에는 위험하게 보일만큼 높은 함교를 가진 덕분에 수신기능이 뛰어난 전함 히에이와 기리시마가 있어서 수신에 문제는 없었다.

군령부는 또한 일본라디오의 일기예보에도 미리 약속된 문구를 집어넣는 방법으로 진주만 공격부대에 정보를 제공했다.

진주만 공격부대는 엄격한 무선침묵을 실시하고 있었다.

 

도쿄에서는 어전회의를 앞두고 1941년 11월 28일 오후 4시에 연락회의가 열렸다. 

여기서 도고 시게노리 외상은 나가노 오사미 군령부 총장에게 개전  날짜를 알아야 대미 외교를 할 수 있다고 말했다.

나가노 총장은 망설이면서 12월 8일이 예정일이라고 말했다.

도고 외상은 최소한 노무라 주미대사에게는 개전 날짜를 알려야한다고 주장했으나 군령부는 반대했다.

군령부는 노무라 대사가 개전 날짜를 몰라야 마지막 순간까지 미국을 상대로 진지하게 외교적 문제들을 다룸으로써 미국의 주의를 외교적 문제에 붙잡아 두어 비밀을 지키는데 도움을 줄 수 있다고 말했다.

 

진주만 공격부대가 히도카프만을 떠난 이후 날씨는 예상 외로 좋아서 매일 구축함에 대한 급유를 실시할 수 있었다.

하지만 함대 전반에 걸쳐 연료 절약이 엄격하게 실시되었다.

연료 절약을 위하여 난방을 하지 않아 장병들은 함내에서도 모두 두꺼운 옷을 입고 생활했으며 전기 사용도 최소한으로 억제했다.

더운 물도 나오지 않아  모두 찬물로 샤워했으나 연료 적재량의 여유가 있던 쇼가쿠와 즈이가쿠만은 예외적으로 더운물 샤워를 즐길 수 있었다.

 

1941년 12월 1일 오후 2시에 도쿄의 황궁 동실에서는 1941년의 마지막 어전회의가 열려 미국과 영국에 대한 개전을 결의했다.

남방작전에 참가하는 함대들은 이미 움직이고 있었다.

 

괌 침공부대는 11월 29일에 세토 내해를 떠나 오가사와라 제도에 정박했다.

이들은 12월 4일에 오가사와라 제도를 떠나 괌으로 향했다.

 

곤도 노부다케 중장이 지휘하는 제2함대 또한 11월 29일에 세토 내해를 떠나 12월 2일에 타이완의 펑후 제도에 도착했다.

제2함대는 필리핀, 말레이 및 네덜란드령 동인도제도의 연합군 해군 세력을 제거하고 상륙을 지원할 임무를 띄고 있었다.

 

말레이 반도 침공을 지원할 오자와 지사부로 중장의 남파함대는 11월 20일부터 소규모 단위로 출항을 시작했다.

 

남방 작전에 참가한 함대 중에서 가장 규모가 큰 것은 제3함대 사령장관 다카하시 이보우 중장이 지휘하는 필리핀 침공부대로 수송선을 포함하여 100 척에 달했다.

필리핀 침공부대는 11월 22일에 세토 내해를 떠나 25일에 펑후 제도에 도착한 후 12월 8일의 진주만 기습을 기다렸다.

 

다카기 다케오 소장이 지휘하는 남부필리핀지원부대는 11월 24일에 내해를 출발하여 팔라우에 도착했다.

남부필리핀지원부대는 팔라우를 12월 6일에 출발하여 다바오를 침공했다.

 

미군은 이러한 일본해군의 움직임을 주시하고 있었으며 미군이 이들에게 주의를 집중하는 동안 진주만 공격부대는 들키지 않고 하와이까지 갈 수 있었다.

 

11월 28일에는 구축함 우시오와 사자나미, 그리고 급유함 시리야로 이루어진 고니시 가나모 대좌의 미드웨이 파쇄대가 다테야마 항을 떠났다.

미드웨이 파쇄대는 미드웨이를 포격함으로써 비행장에 타격을 입혀 진주만 공격부대의 퇴로를 확보하고 미군의 관심을 진주만 공격부대로부터 떼어놓는 임무를 맡았다.

급유함 시리야의 함장 도고 미노루 대좌는 쓰시마 해전 당시 일본함대를 지휘했던 도고 헤이아치로 제독의 아들이었다.

 

고가 미네이치 중장의 지나방면함대는 중국 작전에 전념하고 있었다.

이들은 육군의 작전을 지원하고 진주만 기습 이후에는 홍콩 점령을 지원했다.

 

호소가야 보시로 중장의 제5함대는 오가사와라 제도를 포함하여 일본의 동쪽 바다를 지켰다.

 

연합함대 사령장관 야마모토 이소로쿠 대장이 직접 지휘하는 연합함대 주력은 전함  6척, 경항공모함 2척, 경순양함 2척 및 구축함 13척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이 강력한 세력은 세토 내해에 머무르면서 일본 본토와 남방 작전의 측면을 방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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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전쟁경고

 

1941년 11월 26일에 미국의 코델 헐 국무장관은 노무라 기치사부로 주미일본대사와 구루스 사부로 특사에게 강경한 내용의 헐 노트를 수교했다.

진주만 공격부대는 전날 이미 히도카프 만을 떠나 하와이로 다가오고 있었다.

 

11월 27일 오전에 진주만에 있는 태평양함대 사령부에서는 허즈번드 킴멜 대장이 미드웨이와 웨이크의 방어강화를 위해 육군과 회의를 가졌다.

해군 측 참석자는 항모기동부대 사령관인 윌리엄 헐지 중장과 윌슨 브라운 중장, 제14해군관구 사령관 클로드 블로크 소장, 해군항공대 사령관 패트릭 벨린저 소장 및 태평양 함대의 전쟁계획장교(war plan officer)인 찰스 맥모리스 대령이었다.

육군 측에서는 하와이 육군사령관 월터 쇼트 중장, 하와이 육군항공대 사령관 프레드릭 마틴 소장, 그리고 마틴 소장의 참모장인 제임스 몰리슨 중령이 참석했다.

 

(허즈번드 킴멜 제독. 자세한 내용은 여기로)

 

킴멜 대장이 미드웨이와 웨이크에 P-40 전투기를 25대씩 모두 50대를 파견하자고 제안하자 몰리슨 중령은 오아후 섬의 방어를 이유로 반대했다.

몰리슨 중령은 일본의 항모기동부대가 진주만을 공습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고 말했다.

그러자 킴멜 대장은 어처구니가 없다는 반응을 보였다.

 

"능력이야 있지, 하지만 가능성은?"

("Capability, yes, but possibility?")

 

하더니 킴멜 대장은 불쑥 맥모리스 대령에게 물어보았다.

 

"자네는 일본의 항공공격 가능성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나?"

("What do you think about the prospects of a Japanese air attack?")

 

"없습니다, 절대로 없습니다."

(None, absolutely none.)

 

맥모리스 대령이 대답했다.

 

결국 회의에서는 P-40 전투기 대신 미드웨이에는 해병대의 버팔로 전투기 12대, 웨이크에는 역시 해병대의 와일드캣 12대를 보내기로 결정이 났다.

하지만 이건 쇼트 중장이 미드웨이와 웨이크에 파견될 P-40 전투기에 대한 지휘권을 유지하겠다고 고집을 부려서 해군 측이 포기한 것이지 결코 진주만에 대한 일본군의 항공공격을 의식한 것이 아니었다. 

실제로 회의 참석자 중에서 몰리슨 중령을 제외하고는 아무도 진주만에 대한 항공공격의 위험성을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점심 시간이 되어 회의는 파하였지만 킴멜 대장의 사관학교 동기생이자 친구인 헐지 중장은 오후 6시까지 남아 이런저런 이야기들을 나누었다.

이때 킴멜 대장이 항모기동부대에 구형전함을 포함시키면 어떠냐고 물어보자 헐지 중장은 거절했다.

이로써 미국의 항모기동부대 지휘관들은 진주만 기습 이전부터 항모기동부대에 속력이 느린 구형전함을 포함시키지 않으려 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실제로 진주만 기습 이후 미함대총사령관 어니스트 킹 대장은 대서양함대의 구형전함들을 급히 미본토 서해안으로 불러모았다.

그래놓고 신임 태평양함대 사령관인 체스터 니미츠 대장에게 미본토 서해안에서 대기 중이던 구형전함들을 항모기동부대에 포함시키라고 권고한 적이 있으나 니미츠 제독은 거절했다. 

 

11월 27일 오후 2시 30분에 쇼트 중장이 회의를 마치고 사령부로 돌아오니 참모장 타이지 필립스 대령이 마셜 장군의 서명이 들어간 전쟁성 전문 제472호(War Department Message No.472)를 내밀었다.

요지는 다음과 같다.

 

1. 일본과의 외교가 성공할 가능성은 거의 없으며 언제든지 적대행위가 발생할 수 있다.

2. 적대행위는 반드시 일본에 의하여 시작되어야 한다.

3. 방어에 필요하다고 생각하면 정찰을 하거나 기타 조치를 취해야 하지만 지역 주민들을 놀라게 하거나 방어를 강화하겠다는 의도를 들키지 않아야 한다.

4. 이 전문에 대해 아는 장교의 수를 최소한으로 하라.

 

전문을 읽어본 쇼트 중장은 전쟁성이 무슨 일이 있어도 전쟁을 피해야 한다고 생각하며 하와이에서 일본을 자극할 수 있는 일이 터지는 것을 두려워한다는 느낌을 받았다.

쇼트 중장은 방어 강화 이야기는 필리핀에 하는 말이며 주민들에 대한 이야기는 하와이를 염두에 두고 하는 말이라고 생각했다.

실제로 주민들에 대한 내용은 하와이에 보낸 전문에만 들어 있었으며 필리핀이나 카리브 해에 보낸 전문에는 빠져 있었다.

쇼트 중장의 경험상 공습의 위험이 있다면 전쟁성이 전문에서 언급할 것이라고 보았으며 오전 회의에서 맥모리스 대령이 보여준 확신은 쇼트 중장에게도 영향을 끼쳐 공습 가능성을 낮게 보았다.

 

그로서는 공습을 막기 위하여 해군의 임무인 장거리 초계를 독자적으로 실시할 자원도 없었다.

가용한 B-17 폭격기는 6대 뿐이었는데 이것으로는 승무원 훈련에도 모자랐으며 장거리 초계는 어림없는 일이었다.

 

또한 공습에 대비하려면 명령에 대해 아는 장교가 늘어날 수 밖에 없었다.

전투기 조종사들을 비상대기 상태로 두고 더 자주 공중에 띄우려면 왜 그래야하는지 설명해야만 했다.

 

쇼트 중장의 주의는 자연히 파괴활동을 막는데 집중되었고  결국 그는 파괴활동으로부터 전투기들을 지키기 위하여 분산배치하지 말고 경비하기 쉽도록 활주로에 한데 모아놓으라는 치명적인 명령을 내렸다.

쇼트 중장은 설사 공습을 당해도 30분 전에만 경고를 받으면 전투기들을 다시 분산시킬 수 있으니 문제없다고 생각했으나 일본군은 30분의 여유를 허용하지 않았다.

 

쇼트 중장의 조치 중 의미가 있는 것은 레이더의 가동시간을 늘린 것이었다.

레이더 훈련은 아침 7시 - 11시, 정오 - 오후 4시까지 실시했으며 토요일에는 오후  훈련이 없었고 일요일에는 쉬었다.

쇼트 중장은 오전 훈련 시작을 새벽 4시로 당겼으며 일요일에도 오전 4시 - 7시까지 훈련하도록 명령했다.

일요일 새벽 훈련을 하던 오파나 스테이션의 레이더가 진주만 공습 당일 일본기들을 발견했다.

 

문제는 하와이의 미육군이 레이더를 중시하지 않았다는 점이었다.

진주만  기습 이후 쇼트 중장은 자신이 레이더를 신뢰하지 않았으며 단지 앞날을 위하여 훈련에 중점을 두었다고 말했다.

실제로 진주만 기습 당시에는 레이더에서 요격사령부를 거쳐 전투기와 대공포를 통제하는 보고 및 명령체계도 존재하지 않았다.

 

같은 날인 27일에 태평양함대 사령관 킴멜 대장도 해군성으로부터 쇼트 중장이 받은 것과 비슷한 전문을 받았다.

해럴드 스타크 해군참모총장의 서명이 들어간 이 전문은

 

"이것은 전쟁경고로 생각하라."

("This dispatch is to be considered a war warning.")

 

는 문장으로 시작하여 킴멜 대장을 놀라게 했으나 사실 내용은 이틀 전인 24일에 받은 내용과 별다른 차이가 없었다.

킴멜 대장이 생각하기로 전쟁경고란 일본이 어딘가를 공격할 수 있다는 소리였고 그건 지난 몇 개월간 계속 들어온 소리였으며 이틀 전에도 비슷한 전문을 받았다.

이번에도 일본군이 필리핀, 타이, 크라반도, 북보르네오에 상륙할 가능성이 있다고 언급했을 뿐 이틀 전의 전문과 마찬가지로 하와이는 공격대상에서 빠져 있었다.

해군성의 전쟁계획국장으로 전문에 전쟁경고란 용어를 넣은 장본인인 리치먼드 켈리 터너 소장은 진주만 기습 이후 킴멜 대장이 전쟁경고란 용어를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는 사실에 분통을 터뜨렸다.

 

킴멜 제독으로서는 실제로 전문을 받고 장거리 초계를 강화하려 해도 어려움이 많았다.

태평양 함대가 보유한 카탈리나 정찰비행정은 81대로 적은 수는 아니었으나 실상은 달랐다.

81대 중 27대는 구형의 PBY-3이고 54대는 신형 PBY-5 였는데 신형  카탈리나들은 늦게 도착했다.

즉 18대는 10월 28일, 12대는 11월 8일, 그리고 24대는 11월 23일에야 도착하여 승무원들이 시험비행 중이었다.

그나마 구형 카탈리나 중 12대는 미드웨이에 파견되어 있었으며 제대로 운용가능한 카탈리나들은 함대 훈련에 따라나가 정찰해야 했다.

 

오늘날의 상식과는 다르게 당시 태평양함대가 중시했던 것은 항구 내에 정박한 함대의 안전이 아니라 전쟁이 벌어지면 얼마나 신속하게 전투에 투입되어 제대로 싸우느냐였다.

따라서 당시 태평양함대는 훈련을 최우선으로 했으며 항구에 정박한 함대의 안전을 위한 장거리 초계는 우선 순위가 떨어졌다.

결국 킴멜 대장은 전문을 받고 장거리 초계를 실시하긴 했으나 그때그때 형편이 되는대로 가끔씩 실시하는 정도였다.

장거리 초계보다는 신형 카탈리나 승무원의 훈련에 우선권을 두었던 것이다.

 

대신 킴멜 대장은 공습보다 가능성이 크다고 생각했던 잠수함의 위협에 집중했다.

지금까지 미국 함정들은 잠수함으로 의심되는 경우에도 공격하지 않았지만 이후 하와이 근해의 모든 함정은 잠수함으로 의심되는 경우 폭뢰 공격을 가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돌이켜 보면 킴멜 대장은 27일의 전문을 받고서도 적절한 조치를 취하지 않은 책임을 면하기 어려우며 진주만 기습에 가장 큰 책임이 있다고 지목된 것도 불가피하다.

그는 장거리 초계를 성실하게 실시하지 않았으며 심지어 해군항공대 사령관인 벨린저 소장에게 전문을 보여주지도 않았다.

쇼트 중장 또한 하와이의 미국 정보기관들이 일본계가 파괴 활동을 일으키려 한다는 증거를 잡지 못했음에도 불구하고 그 생각에 매몰되어 전투기를 활주로에 집결시키는 큰 실수를 저질렀다.

 

하지만 해군성과 전쟁성 또한 잘못이 없다고 보기는 어렵다.

우선 하와이의 방어가 해군과 육군이 밀접하게 협조해야 하는 특성상 비슷한 내용을 따로 보낼 것이 아니라 해군참모총장과 육군참모총장이 공동으로 작성한 하나의 전문을 보내는 것이 옳았다.

 

전문의 내용이 명확하지 못한 점도 문제이다.

진주만 기습 후에 터너 소장은 전쟁 경고란 용어를 쓴 이유를 설명하면서 킴멜 제독이 잠수함을 일본군의 예상 접근 경로에 파견하고 항공기로 장거리 초계를 실시하며 항모기동부대를 외해로 내보내어 하와이로 접근하는 일본군을 공격하기에 적절한 위치에서 대기하도록 하고 함대 주력은 비상을 걸고 교전에 대비할 것을 기대했다고 말했다. 

그러나 해군성이 실제로 이것을 원했다면 그렇게 두리뭉실한 전문을 보낼 것이 아니라 킴멜 제독에게 레인보우5 작전의 해군 부분인 WPL46 에 규정된 H 임무를 수행하라고 명령하면 간단한 일이었다.

H 임무는 태평양 지역의 미국 영토를 침공하려는 적의 원정부대를 격퇴하는 임무이기 때문에 해군성이 하와이에 대하여 H 임무를 수행하라는 명령을 내렸다면 킴멜 대장은 싫어도 터너 소장이 말한 것 같은 일을 해야만 했을 것이다.

 

해군성이 H 임무를 수행하라는 명령을 내리지 못한 이유는 간단하다.

그만한 확신을 가질 수 있는 정보가 없었기 때문이며 따라서 H 임무 명령을 내리지 못했다고 하여 해군성이 비난받을 일은 아니다.

그렇다면 해군성도 확신하지 못하여 모호한 전문을 발송할 수 밖에 없었는데 그 일을 휘하의 현지부대인 태평양함대가 실시하지 못했다고 하여 책임을 묻는 것이 과연 정당화될 수 있는지 하는 의문이 남는다.

 

쇼트 중장도 마찬가지로 전쟁성의 전문을 받은 다음날인 11월 28일에 육군항공대는 쇼트 중장에게 일본계에 의한 파괴활동을 제1의 위협으로 보고 대비할 것을 요청하는 전문을 2개나 보냈다.

물론 이때는 전투기들을 한곳에 모아 경비한다는 결정을 내린 뒤였지만 이 전문들이 그러한 결정에 정당성을 부여한 것은 틀림없다.

만일 쇼트 중장이 반복적인 경고를 받고도 적극적으로 대응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가 파괴활동에 의하여 항공기의 일부라도 파괴되었다면 엄청난 비난과 처벌을 피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킴멜 제독과 쇼트 중장은 27일의 전문을 받고 자신들이 조치한 사항을 보고했지만 해군 및 육군참모총장은 보고를 받고도 별다른 언급을 하거나 후속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

육군참모총장 마셜 장군은 27일의 전문에 대한 맥아더 대장과 쇼트 중장의 조치 사항을 거의 동시에 보고받았다.

당시 마셜 장군은 맥아더 장군의 보고서에는 서명을 했으나 쇼트 장군의 보고서에는 그의 서명이 없다.

마셜 장군은 진주만 기습 이후 의회에 출석하여 쇼트 중장의 보고서를 보았는지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면서 자신이 개입할 수 있는 기회였는데 그렇게 하지 못했다고 솔직하게 시인했다.

 

(미육군참모총장 조지 마셜 장군. 자세한 내용은 여기로)

 

그리하여 1941년 11월 27일에 보내진 전쟁성과 해군성의 전문은 진주만 기습을 막는데 아무런 역할을 하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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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진주만 공격부대

 

출항을 몇 시간 앞둔 1941년 11월 25일 밤에 제1항공함대 사령장관 나구모 주이치 중장은 히도카프 만에 정박한 기함 아카기의 선실에 누워 걱정에 휩싸여 있었다.

 

'만일 진주만에 적 함대가 없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적이 우리의 계획을 미리 알고 매복해 있으면?

오늘 히도카프 만처럼 날씨가 나쁘면 해상급유가 불가능한데 항해 내내 이런 날씨가 이어진다면?

안개가 끼면 진주만을 공격하고 돌아온  함재기들의 착함이 어려울 것이다.

반면 날씨가 맑다면 진주만 공격부대는 새하얀 설원의 검은 소처럼 눈에 띌 것이다.

기습에 성공해도 살아남은 B-17 이 대규모로 역습해 온다면 어떻게 될 것인가?'

 

이리저리 뒤척이던 나구모 제독은 잠들기를 포기하고 26일 0시 경에 일어나 진주만의 상황을 브리핑했던 스즈키 스구루 소좌를 불렀다.

스즈키 소좌는 잠옷으로 갈아입었다가 갑작스런 호출을 받자 복장을 갖추고 나구모 중장의 선실로 갔다.

 

나구모 중장은 스즈키 소좌가 들어오자 질문을 퍼부었다.

스즈키 소좌는 나구모 중장이 듣고 싶어하는 답을 말해줄 수는 없었지만 그의 걱정을 덜어주려고 노력했다.

 

"오랫동안 관찰한 결과 미함대는 주말에는 항상 항구에 들어오며 그걸 갑자기 바꿀 이유는 없어 보입니다."

"현재까지 미국은 우리의 의도를 모르고 있는 것이 거의 확실하며 모든 상황이 우리에게 압도적으로 유리합니다."

 

는 식이었다.

 

어차피 나구모 중장도 스즈키 소좌가 자신이 원하는 대답을 해 줄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나구모 중장은 술과 간단한 안주를 들여오게 해서 스즈키 소좌에게 권했다.

스즈키 소좌는 중장과 단 둘이 앉아 술을 마시는 흔치 않은 경험을 한 후 26일 새벽 2시에 자기 선실로 돌아왔다.

침대에 누운 스즈키 소좌는 대함대를 지휘하는 사령장관이자 중장인 사람도 일개 소좌처럼 큰 작전을 앞두고 걱정 때문에 잠을 설친다는 사실을 알게 되자 묘한 기분이 들었다.

 

다음날인 1941년 11월 26일 오전 6시에 진주만 기습부대는 히도카프 만을 떠났다.

(일본 시간은 미동부보다 14시간 빠르며, 하와이보다는 19시간 30분 빠르다.따라서 진주만 공격부대가 히도카프 만을 떠난 26일 오전 6시는 워싱턴 시간으로는 25일 오후 4시이며 하와이 시간으로는 25일 오전 10시 30분이다. 앞으로 별도의 언급이 없는 한 시간은 현지 시간을 따르며 진주만 공격부대는 날짜 변경선을 넘기 전에는 일본 시간, 넘은 이후에는 하와이 시간을  따른다.)

 

스즈키 소좌는 히도카프 만에 정박한 포함 구나시리에서 진주만 공격부대를 배웅했다.

장병의 사기는 높았으며 젊은 장교들은 자신들의 앞에 무엇이 기다리고 있든지 개의치 않았다.

 

총 30척으로 이루어진 진주만 공격부대의 구성은 다음과 같다.

 

1. 공습부대 - 제 1 항공함대 (사령장관 : 나구모 주이치 중장, 참모장 : 구사카 류노스케 소장)

제 1 항공전대 (나구모 중장) - 항공모함 아카기, 카가

제 2 항공전대 (야마구치 다몬 소장) - 항공모함 소류, 히류

제 5 항공전대 (하라 주이치 소장) - 항공모함 쇼가쿠, 즈이가쿠

 

2. 지원대 - 제 3 전대 (미카와 군이치 중장) - 전함 히에이, 기리시마

제 8 전대 (아베 히로아키 소장) - 중순양함 도네, 치쿠마

 

3. 경계대 - 제 1 수뢰전대 (오모리 센타로 소장) - 경순양함 아부쿠마

제 17 구축대 (스기우라 가주 대좌) - 구축함 다니카제, 우라카제, 요코카제, 이소카제

제 18 구축대 (미야자카 대좌) - 구축함 시라누이, 카스미, 아키쿠모, 아라레, 카게로

 

4. 초계대 - 제 2 잠수대 (이마이즈미 키지로 대좌) - 잠수함 I-19, I-21, I-23

 

5. 보급부대 - 제1보급대(오토 마사나오 대좌) - 교쿠토마루, 겐요마루, 고쿠요마루, 신고쿠마루

 제2보급대(니미 가즈타카 대좌)- 도요마루, 니혼마루, 도에이마루

 

(http://blog.naver.com/mirejet/110083057166, <At Dawn We Slept : The Untold Story of Pearl Harbor> Gordon W. Prange, McGraw Hill, 1981, P.394, <제2차세계대전해전사> 이정수. 남영문화사, 1981년, P.119)

 

함정들의 제원은 다음과 같다.

 

 함종

함명 

표준배수량 

최고속력 

항속거리 

연료량

 항공모함

아카기 

 41,300톤

 31노트

 18노트로 14,800km

 6,000톤

 카가

 42,500톤

 28노트

 18노트로 18,500km

 8,200톤

 쇼가쿠,즈이가쿠

 29,800톤

 34노트

 18노트로 18,000km

 5,000톤

 소류,히류

 20,250톤

 34노트

 18노트로 14,100km

 3,500톤

 전함

 히에이,기리시마

 37,000톤

 30노트

 18노트로 18,100km

 6,300톤

 중순양함

 도네,치쿠마

 11,000톤

 36노트

 18노트로 14,800km

 2,600톤

 경순양함

 아부쿠마

 5,500톤

 35노트

 14노트로 9,300km

 1,600톤

 구축함

 카게로 급

 2,000톤

 36노트

 18노트로 11,100km

 600톤

 카스미, 아라레

 2,000톤

 35노트

 18노트로 9,300km

 600톤

 잠수함

 I-19, 21,23

 2,200톤

 23노트

 16노트로 25,900km

 800톤

 급유함

 겐요마루급

 20,000톤

 18노트

 16노트로 16,700km

 2,000톤

 도호마루급

 8,000톤

 16노트

 14노트로 13.000km

 450톤

(<At Dawn We Slept : The Untold Story of Pearl Harbor> Gordon W. Prange, McGraw Hill, 1981, P.416, 일부 수정 및 편집)

 

제1항공전대사령관을 겸하고 있던 제1항공함대 사령장관 나구모 주이치 중장은 항공전에 대해서는 책으로만 배웠으므로 항공참모 겐다 중좌와 아카기의 항공대장 후치다 미츠오 중좌에게 의존했다.

제2항공전대 사령관 야마구치 다몬 소장은 항공전에 익숙했으나 그도 실전경험이 없기는 나구모 중장과 마찬가지였다.

제5항공전대 사령관 하라 주이치 소장 또한 1941년 9월에 항공전대 사령관이 되기 전까지는 항공전에 문외한이었다.

 

제1항공전대를 이루고 있는 아카기와 카가는 각각 전투기 18대, 함상폭격기 18대, 함상공격기 27대, 합계 63대를 운용했다.

제2항공전대를 이루고 있는 소류와 히류는 각각 전투기 18대, 함상폭격기 18대, 함상공격기 18대, 합계 54대를 운용했다.

제5항공전대를 이루고 있는 쇼가쿠와 즈이가쿠는 각각 전투기 18대, 함상폭격기 27대, 함상공격기 27대, 합계 72대를 운용했다.

 

(일본항공모함 카가. 자세한 내용은 여기로)

 

일본 군령부는 태평양함대의 미국항공모함을 최대 4척으로 추정하고 있었으나 실제로는 3척이었으며 그나마 새러토가는 오버홀을 위하여 미본토 서해안의 푸젯사운드 조선소에 들어가 있었다.

따라서 중부 태평양에서 활동 중이던 미국항공모함은 렉싱턴과 엔터프라이즈 2척이었다.

CV-2 렉싱턴은 표준배수량 34,000톤에 최고 속력 35노트로 약 80대의 함재기를 운용했으며, CV-6 엔터프라이즈는 표준배수량 20,000톤에 최고 속력 34노트로 약 85대의 함재기를 운용했다.

 

전함 히에이와 기리시마는 속력이 30노트에 달해 21노트에 불과한 태평양함대의 전함들보다 빨랐으며, 무장도 14인치 주포 8문으로 약한 편은 아니었다.

그러나 태평양함대는 16인치 주포 8문을 가진 메릴랜드와 웨스트버지니아를 포함한 8척의 전함을 가지고 있어서 전함 전력은 진주만 공격부대를 압도했다.

 

(일본전함 히에이. 자세한 내용은 여기로

 

중순양함  도네와 치쿠마는 8인치 주포 8문을 가지고 있어서 9문을 가진 미국 중순양함 샌프란시스코보다 1문이 적었으나 대신 강력한 산소어뢰 발사관 6문을 가지고 있었다.

게다가 표준배수량 10,000 톤에 33노트인 샌프란시스코보다 더 크고 더 빨랐으므로 일본해군은 자신들의 중순양함이 미군 중순양함을 압도한다고 생각했다.

 

(일본중순양함 도네. 자세한 내용은 여기로)

 

경순양함 아부쿠마는 5,500톤에 140mm 주포 5문을 보유하고 있어서 7,000톤에 6인치 주포 10문을 가진 미국 경순양함 롤리에게 주포 화력은 밀렸다.

그러나 아부쿠마는 어뢰발사관 2문과 산소어뢰 8발을 보유하고 있어서 결코 얕잡아 볼 수 없는 전력을 가지고 있었다.

 

(일본경순양함 아부쿠마. http://en.wikipedia.org/wiki/Japanese_cruiser_Abukuma, 자세한 내용은 여기로)

 

진주만 공습부대에 배치된 9척의 일본구축함 중 7척은 최신형인 가게로 급이었으며 2척은 아사시오 급이었는데 모두 5인치 주포 6문과 산소어뢰 및 폭뢰를 갖추고 있었다.

일본구축함들은 전반적으로 미국구축함보다 강력했으나 태평양함대는 진주만 공격부대의 3배가 넘는 29척의 구축함을 보유하고 있었다.

 

(가게로급 구축함 시라누이. 자세한 내용은 여기로)

 

I-15 급 잠수함인 I-19, I-21, I-23함은 미국잠수함보다 훨씬 컸으며 수상정찰기 1대를 싣고 다녀  정찰능력이 뛰어났다.

수상정찰기는 170km/hr 의 속력으로 3시간 동안 비행할 수 있었다.

 

(I-15 급 잠수함. 자세한 내용은 여기로)

 

제1보급대의 급유함들은 최고 18노트를 낼 수 있었고 제2보급대는 최대 16노트를 낼 수 있었다.

진주만 공격부대는 하와이를 왕복하면서 대부분 12 - 14노트의 속력으로 항해했다.

 

히도카프 만을 떠난 이후로 나구모 중장은 일본해군의 일개 중장이 아니었다.

그가 진주만 기습을 성공으로 이끌면 국가의 영웅으로 승리의 상징이 될 것이었다.

설사 그가 진주만 기습에서 전사한다 해도 길이 추앙받을 것이며 에타지마 병학교에서는 이후 수십년간 그의 전술을 가르치고 연구할 것이었다.

하지만 만약 실패하는 날이면 천길의 땅을 파도 그 수치를 파묻지 못하고 태평양의 바닷물을 다 쏟아부어도 씻어내지 못할 것이었다.

 

나구모 중장의 어깨에 걸린 책임은 막중했다.

그가 이끌고 있는 진주만 기습부대는 일본해군의 전통과 오랜 시간 미해군에 대항하기 위하여 확립해 온 계획들을 모두 쓰레기통에 처넣어 버리고 함대항공력의 집중적인 운용을 통하여 적의 함대 주력을 격파한다는 새로운 방식의 전투를 치르려 하고 있었다.

이제 나구모 중장은 누구도 가보지 못한 미지의 바다로 나아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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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공습 계획

 

1941년 11월 23일 아침에 제1항공함대 사령장관 나구모 주이치 중장은 히도카프 만에 정박 중인 기함 아카기 함상으로 진주만 공격부대의 지휘관, 참모 및 함장들을 모두 불러 모은 후 기동부대 명령 제1호를 발령했다.

이로써 진주만 공격부대의 장병 전원이 진주만 기습에 대해 알게 되었다.

 

(히도카프 만에 정박 중인 제1항공함대의 기함 아카기. http://commons.wikimedia.org/wiki/File:Akagi_Hitokappu_Bay.jpg)

 

이 자리에서 제1항공함대의 항공참모 겐다 미노루 중좌는 진주만 기습의 개요에 대하여 설명했다.

목표는 진주만에 정박 중인 항공모함 전부와 전함 4척 이상을 격침하고 오아후의 항공기들을 최대한 많이 파괴하는 것이었다.

 

제1파는 오아후 북쪽 370km 거리에서 발진하며 제2파는 320km 거리에서 출격할 것이었다.

후치다 미츠오 중좌가 지휘하는 제1파는 뇌격기, 수평폭격기, 급강하폭격기 및 전투기가 모두 참가하며 적의 항공모함과 전함을 공격하는 것이 주요 임무였다.

시마자키 시게카즈 소좌가 지휘하는 제2파는 뇌격기는 빼고 수평폭격기, 급강하폭격기 및 전투기로 이루어져 제1파가 공격한 함정들을 추가로 공격하여 마무리짓고 적의 항공력을 말살하여 반격을 불가능하게 만드는 임무를 맡았다.

공격을 마친 항공기들은 오아후 북서쪽 30km 공역에 집결하여 귀함할 것이었다.

 

하와이를 향해 가는 도중 발견되지 않는 것이 중요하므로 제1항공함대는 진주만 기습부대가 이함하기 전에는 함재기를 띄우지 않을 것이었다.

다만 진주만 기습 전날까지 비상사태에 대비하여 해가 뜬 직후부터 해질녘까지 각 항공모함의 비행갑판에 전투기 6대와 급강하폭격기 3대를 즉시 출격이 가능한 상태로 유지할 것이었다. 

 

적이 공격일 이전에 진주만 공격부대를 발견하면 함대는 돌아갈 것이었다.

공격 당일 발견당하면 싸울 것이었다.

 

진주만의 상황에 대한 최종정보는 오아후의 일본영사관과 하와이 해역에 미리 전개한 잠수함이 알려주기로 되어 있었다.

이 최종 통고를 받지 못할 경우에 대비하여 제1차 공격대의 출격 30분 전에 중순양함 도네와 치쿠마에서 정찰기 1대씩을 사출할 것이었다.

정찰기 1대는 라하이나 정박지를, 다른 1대는 진주만을 정찰하고 무전으로 보고할 것이었다.

 

공습이 진행되는 동안 함대 방공을 위하여 각 항모에서 6대씩 총 36대의 전투기를 전투초계에 투입할 것이었다.

전투초계기들은 18대씩 2시간 간격으로 교대로 초계를 담당하며 나머지 18대는 비행갑판에 즉시 출격가능한 상태로 대기할 것이었다.

공중에 뜬 18대의 전투기 중 9대는 4,000m, 나머지 9대는 2,000m 고도를 담당할 것이었다. 

항해 중 함대는 무전신호를 일체 보내지 않으며 신호는 낮에는 깃발 신호, 밤에는 발광  신호를 사용할 것이었다.

제1파 공격대가 기습에 성공하면 후치다 중좌가 '도라-도라-도라'(호랑이-호랑이-호랑이) 라는 무전을 치기로 했다.

나구모 중장은 공격을 마친 함재기들이 귀환 도중에 엔진이 고장나는 사태 이외에는 무전을 금지했다.

그러자 조종사들이 항모의 안전을 위하여 엔진이 고장나도 무전을 치지 않기로 결의하고 나구모 중장의 승인을 받았다.

오전 회의가 끝나자 지원부대 및 경계부대의 지휘관, 참모 및 함장들은 각자 위치로 돌아갔다.

 

나구모 중장은 11월 23일 오후에 제1항공함대 수뇌부와 조종사 전원이 모인 가운데 다시 회의를 열었다.

여기서는 주로 후치다 중좌가 공습에 대한 세부 내용을 설명했다.

 

공격대가 이함할 때 쇼가쿠와 즈이가쿠의 함재기들은 함대 뒷쪽 400m 상공에, 카가와 히류의 함재기들은 함대 상공 200m 고도에, 아카기와 소류의 함재기들은 함대 앞쪽 400m 상공에 집결할 것이었다.

후치다 중좌 자신은 함대 가장 앞쪽에 15대의 수평폭격기를 이끌고 500m 고도로 집결할 것이었다.

 

진주만을 향해 날아가는 동안 수평폭격기들은 중앙 3,000m 고도, 뇌격기들은 오른쪽 2,800m 고도, 급강하폭격기들은 왼쪽 3,500m 고도로 날아갈 것이었다.

순항속도가 빠른 전투기들은 3,800m 고도로 폭격기들 상공을 왔다갔다하면서 비행할 것이었다.

제2차 공격대도 비슷한 방식으로 이함하여 비행할 것이었다.

 

오아후 북쪽에 도달하면 후치다 중좌가 권총으로 신호탄을 발사할 것이었다.

동시에 전투기들은 폭격기들을 앞지르면서 튀어나와 제공권을 장악할 것이었다.

이때 전투기들은 2개로 나뉘어 이타야 시게루 소령이 지휘하는 27대는 3,800m 고도를 유지하고 오카지마 기요구마 대위가 지휘하는 18대는 2,000m 고도로 내려올 것이었다.

그동안 수평폭격기들은 3,000m 고도를 유지하고 급강하폭격기들은 4,000m 고도로 상승하며 뇌격기들은 하강할 것이었다.

신호탄이 1발만 발사되면 뇌격기들이 가장 먼저 진입하고, 2발 발사되면 급강하폭격기, 수평폭격기, 그리고 뇌격기의 순서로 진입할 것이었다.

 

(진주만 기습 상황도. http://en.wikipedia.org/wiki/Pearl_Harbor_attack)

 

뇌격대는 2개로 나뉘어 포드 섬의 양쪽으로부터 진입할 것이었다.

무라타 시게하루 소좌가 지휘하는 아카기와 카가의 뇌격기 24대는 포드 섬의 남동쪽으로부터 진입하면서 전함들을 공격할 것이었다.

나가이 츠요시 대위가 지휘하는 소류와 히류 소속 16대는 포드 섬의 북서쪽으로부터 진입하면서 항공모함을 공격할 것이었다.

하지만 기습 당시 항공모함이 없었으므로 소류와 히류의 뇌격기들은 표적함 유타와 순양함 롤리를 공격했으며 일부는 포드 섬을 건너 전함 캘리포니아, 오클라호마 및 웨스트버지니아를 공격했다.

뇌격 대상은 중대장이 정했으나 목표의 최종 식별 및 공격은 조종사가 스스로 결정했다.

 

(진주만 기습 당시 뇌격기의 공격 경로. http://www.freeinfosociety.com/media.php?id=807)

 

후치다 미츠오 중좌가 지휘하는 아카기, 카가, 소류 및 히류의 수평폭격기 50대는 800kg 짜리 폭탄으로 2열로 정박한 전함군의 안쪽에 정박한 함정들을 공격할 것이었다.

뇌격대와 마찬가지로 폭탄 투하의 최종 결정은 개별 조종사 및 폭격수의 몫이었다.

후치다 중좌는 만일 진주만 바깥으로 도망치려는 함선을 발견하면 입구 근처에서 격침하여 진주만을 폐쇄하라고 말했다.

 

뇌격기와 수평폭격기가 함정들을 공격하는 동안 250kg 폭탄 1발을 장착한 쇼가쿠와 즈이가쿠의 급강하 폭격기 54대는 비행장을 공격할 것이었다.

다카하시 가쿠이치 소좌가 이끄는 쇼가쿠의 급강하 폭격기 27대는 포드 섬의 해군항공기지와 히컴 비행장을, 사카모토 아키라 대위가 이끄는 즈이가쿠의 급강하폭격기 27대는 휠러 비행장을 공격할 것이었다.

 

전투기들은 제공권을 장악하고 이후에는 히컴, 휠러, 에바, 카네오헤, 벨로우즈 비행장의 미군기들과 관제탑을 기총소사할 것이었다.

 

제1차 공격대에 참가할 항공기는 뇌격기 40대, 수평폭격기 50대, 급강하 폭격기 54대, 전투기  45대로 총 189대였다.

이들 중 수평폭격기 1대, 급강하폭격기 3대 및 전투기 2대가 기계적 결함으로 빠져서 실제로 공습에 참가한 항공기는 183대였다. 

 

시마자키 시게카즈 소좌가 이끄는 제2차 공격대는 제1차 공격대가 시작한 함정 공격 임무를 완수하고 비행장을 공격할 것이었다.

제2차공격대의 핵심은 에구사 다카시게 소좌가 지휘하는 아카기, 카가, 소류 및 히류의 급강하폭격기 81대였다.

겐다 중좌는 제2차 공격대가 도달할 때 쯤이면 미태평양함대의 항공모함들이 제1차 공격대의 뇌격을 받아 전복되어 있을 것으로 기대했다.

250kg 짜리 폭탄 1발을 장착한 제2차 공격대의 급강하폭격기들이 전복된 항공모함에 달려들어 함체를 걸레짝으로 만들어 버리면 미군이 감히 수리할 엄두를 내지 못할 것이었다.

그러나 공습 당일 항공모함이 없었기 때문에 제2차 공격대의 급강하폭격기들은 전함을 포함한 다양한 함정들을 공격했다.

일부 폭격기들은 해군공창을 공격했으며 마키노 사부로 소좌가 지휘하는 카가의 급강하폭격기들은 진주만 바깥으로 도망치려던 전함 네바다를 집중폭격하여 입구 근처에서 침몰시키려 했으나 실패했다.

 

시마자키 시게카즈 소좌가 이끄는 쇼가쿠와 즈이가쿠의 수평폭격기 54대는 비행장을 폭격할 것이었다.

54대의 수평폭격기 중 36대는 250kg 짜리 폭탄 1발과 60kg 짜리 폭탄 6발로 무장했으며 나머지 18대는 250kg 짜리 폭탄 2발로 무장했다.

이치하라 다츠오 대위가 지휘하는 쇼가쿠의 수평폭격기 27대 중 18대는 포드 섬 비행장, 9대는 카네오헤 비행장을 폭격하고 시마자키 소좌가 지휘하는 즈이가쿠의 수평폭격기 27대는 히컴 비행장을 폭격하여 일본항공모함에 대한 미군의 반격능력을 분쇄할 것이었다.

 

신도 사부로 대위가 지휘하는 전투기 36대 역시 제공권을 장악하고 비행장의 항공기와 관제탑을 기총소사할 것이었다.

제2차 공격대에 투입될 항공기는 수평폭격기 54대, 급강하폭격기 81대, 전투기 36대로 합계 171대였으나 공습시에는 급강하폭격기 1대가 불참하여 실제 공격에 투입된 숫자는 170대였다.

1차와 2차 공격대를 합쳐 진주만 기습에 참가한 일본함재기는 353대였다.

 

진주만 공격의 주역은 뇌격기였는데 겐다 중좌와 후치다 중좌는 만일 어뢰방어망이 있을 경우 선두 뇌격기가 자폭하여 망을 찢기로 하고 뇌격기 조종사들의 동의를 받아둔 상태였다.

하지만 나구모 제독이 허가하지 않을 것이 뻔했기 때문에 후치다 중좌는 꼼수를 썼다.

뇌격대의 공격에 대하여 설명하던 무라타 소좌가 어뢰방어망이 있을 경우에 관하여 말할 때가 되자 후치다 중좌가 슬쩍 끼어들어 무라타 소좌를 밀어내고 자신이 설명했다.

 

"어뢰방어망이 있을 경우 선두 뇌격기가 어뢰방어망을 폭격하여 돌격로를 열 것입니다. 만일 선두가 실패하면 다음 뇌격기가, 또 실패하면 다음 뇌격기가..이런 식으로 폭격하여 돌격로를 엽니다."

 

예상대로 나구모 중장이 말을 끊고 질문했다.

 

"어뢰방어망을 폭격하여 돌격로를 연다는 것이 정확하게 무슨 뜻인가?"

 

후치다는  미리 준비한 대로 능청스럽게 대답했다.

 

"그것은 대단히 기술적이고 특별한 형태의 공격으로 조종사들은 무슨 말인지 압니다."

 

그러자 나구모 제독은 더 이상 묻지 않았다.

 

회의는 이어서 진주만에 미함대가 없을 경우 어떻게 할 것인지로 옮겨갔다.

그럴 경우 진주만 공격부대는 함재기를 회수한 후 남하하면서 하와이 주변을 수색하여 미함대와 대결할 것이었다.

이때는 수평폭격기도 모두 어뢰를 장비하고 뇌격기로 운용할 것이었다.

미함대를 발견하는데 실패하면 진주만 공격부대는 마셜제도로 물러가 다음 명령을 기다릴 것이었다.

수색 도중 미함대가 진주만에 돌아와도 진주만을 공습하지는 않을 것이었다.

기습의 잇점이 사라진 상태에서는 위험이 너무 컸다.

 

저녁 식사를 마치고 조종사들은 26개 공격대 별로 나뉘어 토론에 들어갔다.

겐다 중좌와 후치다 중좌는 공격대를 돌아다니면서 조종사들의 질문에 대답하고 모든 조종사가 자신의 임무를 숙지하도록 격려했다.

아카기의 주방에서는 술과 음식을 준비했다.

밤늦게 토론회를 마친 조종사들은 히도카프 만에 심한 폭풍우가 이는 가운데 야식을 즐기면서 떠들썩하게 놀다가 잤다.

 

1941년 11월 24일 아침부터 조종사들은 토론과 학습을 재개했으며 오전에 나구모 중장이 들러 조종사들을 격려했다.

아카기의 해도실에서는 진주만의 대형 모형을 만들었는데 새로운 정보가 들어옴에 따라 모형은 점점  정교해졌다.

 

이날 야마모토 제독으로부터 26일 아침에 하와이를 향하여 출항하라는 명령이 내려왔다.

함정들은 24일과 25일에 걸쳐 급유를 받고 기관을 점검하는 등 출항준비에 들어갔다.

카가는 싣고 온 100 발의 신형어뢰를 아카기, 소류 및 히류에 분배했으며 기술자들이 항모에 올라 신형어뢰를 마지막으로 점검하고 정비병들에게 취급 방법을 설명했다.

 

사기는 높았다.

제2항공전대 사령관 야마구치 다몬 소장은 부하들을 비행갑판에 모아놓고 출항명령이 내려왔다는 사실을 알리고 연설을 했다.

그는 연설에서 좋은 철로 뛰어난 장인이 만든 명검인 자신의 칼 이야기를 꺼냈다.

검술이 뛰어난 야마구치 소장은 그 칼을 휘둘러 일본 투구를 반쪽으로 가를 수 있었다.

야마구치 소장은 제2항공전대를 칼에 비유하자면 자신의 칼보다 훨씬 좋은 천하제일의 명검이라며 다음과 같은 말로 연설을 맺었다.

 

"자, 이제 적을 반토막내러 가자!"

 

그리고는 당시 해군 내에서 가장 인기가 높던 군가를 불렀다.

야마구치 소장과 부하들은 목청높여 군가를 부른 후 만세삼창을 했다.

 

25일 저녁이 되자 각 함정마다 만들어 놓은 신사에는 조종사와 승조원이 몰려들어 기원했다.

모두들 미군 몰래 하와이에 접근하여 최소한의 희생으로 적 함대를 박살내고 무사히 일본으로 돌아올 수 있기를 기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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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스즈키 소좌의 브리핑

 

히도카프 만에 도착한 제2전대의 기함 히에이 함상에는 스즈키 수구루 소좌가 손님으로 타고 있었다.

스즈키 소좌는 불과 2주일 전에 오아후로부터 돌아온 참이었다.

 

1달 전인 1941년 10월 22일에 일본우선회사 소속 14,500 톤급의 여객선 다이요마루가 요코하마를 떠나 호놀룰루로 향했다.

이 배에는 3명의 해군장교가 신분을 숨기고 타고 있었다.

항공장교인 스즈키 수구루 소좌, 잠수함 장교인 마에지마 도시히데 소좌, 그리고 갑표적 장교인 마츠오 게이우 대위였다.

스즈키 소좌는 선원인 사무장보, 마에지마 소좌는 선박회사 소속의 의사, 그리고 마츠오 대위는 승객으로 가장했다.

의사로 위장한 마에지마 소좌는 만약을 대비하여 의학 용어를 익히고 이름도 츠카다라는 가명을 썼으나 스즈키 소좌와 마츠오 대위는 본명을 썼다.

 

(다이요마루. http://commons.wikimedia.org/wiki/File:Taiyo_Maru_in_Mitsubishi_Nagasaki.JPG)

 

다이요마루는 군령부의 요청을 받은 일본정부의 명령에 따라 무선침묵을 유지한 채 진주만 공격부대가 사용할 북방항로를 따라 하와이로 향했다.

항해 기간 동안 스즈키 소좌와 마에지마 소좌는 시계, 풍향, 풍속같은 날씨와 해상상태를 매일 점검하고 기록했으며 접근하는 항공기나 배가 있는지 쌍안경으로 관찰했다.

다이요마루가 미드웨이 북쪽을 지날 때 미군의 정찰기가 보이지 않았으므로 진주만 공격부대는 더 멀리 북쪽으로 돌아갈 이유는 없었다.

스즈키 소좌가 배나 비행기를 처음 본 것은 다이요마루가 진주만 북쪽 320km 지점에 이르러 미군의 정찰기에 발견되었을 때였다.

이로써 오아후 북쪽에 대한 미국의 정찰반경은 320km 이며 그 이전에는 배나 비행기를 만날 확률이 낮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다이요마루는 토요일인 1941년 11월 1일 오전 8시 30분에 호놀룰루 항의 8번 부두에 도착했다.

곧 하와이 총영사인 기타 나가오가 찾아와 스즈키 소좌와 면담했다.

스즈키 소좌는 군령부가 작성한 100 여 가지의 질문을 전달했고 기타 총영사는 다이요마루가 출항할 때까지 매일 찾아와 답변했다.

가장 좋은 방법은 오아후 섬의 정보 수집을 책임지고 있던 요시카와 다케오가 다이요마루에 직접 와서 답변하는 방법이었으나 군령부나 일본영사관 모두 정보수집의 핵심인물인 요시카와를 위험에 빠뜨리고 싶어하지 않았다.

같은 이유로 요시카와가 작성한 답변서를 기타 총영사가 전달하는 방법도 위험했다.

결국 기타 총영사가 요시카와와 함께 답변을 만들어 기억했다가 다이요마루에 와서 스즈키 소좌에게 말해주었다.

기타 총영사는 꽤 정확하게 정보를 전달했으나 몇몇 정보는 잘못 전달되었으며 어떤 정보는 요시카와가 잘못 알고 있었다.

 

스즈키 소좌, 마에지마 소좌 및 마츠오 대위는 다이요마루가 호놀룰루에 정박해 있는 동안 배를 떠나지 않고 쌍안경으로 북서쪽에 보이는 진주만을 관찰하고 날아다니는 항공기들도 관찰했다.

항공기를 관찰하면서 스즈키 소좌는 단발기인지 쌍발기인지 4발기인지 구분해서 기록했다.

다이요마루는 11월 5일에 호놀룰루를 출항하여 진주만 기습부대가 돌아올 항로를 따라 17일 오전에 일본으로 돌아왔다.

돌아오는 길에도 하와이 근해를 벗어나자 일본 근해에 도달할 때까지 비행기나 배를 만나지 않았다. 

다이요마루가 요코하마 항에 접근하자 해군성이 보낸 보트가 스즈키 소좌, 마에지마 소좌 및 마츠오 대위를 데리러 왔다.

보트를 타고 해안에 도착한 세 사람은 즉시 도쿄로 가서 해군성 건물 2층에 마련된 방으로 들어갔다.

그곳에는 나가노 군령부 총장, 이토 차장, 후쿠도메 제1부장, 도미오카 작전과장, 미요 항공참모 등 군령부의 주요 인사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스즈키 소좌는 이들에게 기타 총영사로부터 들은 답변 내용과 자신이 관찰한 내용을 설명한 후 질문을 받고 대답했으며 이어서 마에지마 소좌와 마츠오 대위도 같은 과정을 거쳤다.

 

이렇듯 중요한 모임에서 나가노 총장은 열성이 없었다.

나가노 총장은 처음에 반짝하다가 이내 관심을 잃었으며 날카로운 질문과 대답이 오가는 긴장된 분위기 하에서도 대부분의 시간을 꾸벅꾸벅 졸았다.

군인으로서 최고의 지위인 군령부 총장에 오른 이후 나가노 제독은 목표를 잃고 도전을 싫어하며 현실에 안주하려 했다.

나가노 총장의 이러한 무기력한 태도 덕분에 연합함대 사령장관 야마모토 대장이 상급기관인 군령부를 상대로 번번이 자신의 의사를 관철시킬 수 있었다.

 

군령부와의 모임을 마치고 나니 밤늦은 시간이었다.

도쿄에 집이 있던 스즈키 소좌는 자기 집으로 갔으며 마에지마 소좌는 잠수함 부대에 설명하기 위하여 요코스카로, 마츠오 대위는 갑표적 승조원들에게 설명하기 위하여 구레로 갔다.

 

스즈키 소좌는 다음날인 11월 18일에 군령부로 가서 정보분석관들과 함께 자신이 기타 총영사에게서 들은 내용과 스스로 관찰한 내용을 다시 한 번 반복했다.

이후 그에게는 더 중요한 임무가 주어졌다.

스즈키 소좌는 히도카프 만으로 가서 제1항공함대 수뇌부에 브리핑하라는 명령을 받고 18일 저녁에 제2전대 사령관 미카와 구니치 중장의 기함 히에이에 올랐다.

 

쿠릴열도 에토로푸 섬의 동해안 중간 쯤에 있는 히도카프 만은 일찌기 해적들의 근거지였다.

9km x 9km 크기로 내륙으로 움푹 들어간 히도카프 만은 좋은 정박지로 진주만 기습부대가 함대가 외부의 눈을 피해서 숨기에 안성맞춤이었다.

대부분 어부인 주민들은 만 북쪽의 도시모이와 남쪽의 우엠베츠에 모여 살았는데 집 이외에는 건물이랄 것이 없는 오지였다.

진주만 공격부대는 1941년 11월 21일부터 히도카프 만에 도착하기 시작했으며 22일에 신형어뢰를 싣고 온 카가가 마지막으로 도착했다.

 

(에토로프 섬. 동해안 중간에 잘록하게 들어간 것이 히도카프 만이다. http://en.wikipedia.org/wiki/Iturup)

 

제1항공함대 사령장관 나구모 중장은 11월 22일 오후 8시에 기함 아카기에서 제1항공함대의 참모들 및 후치다 중좌와 함께 스즈키 소좌의 브리핑을 들었다.  

스즈키 소좌는 군령부에서와 마찬가지로 기타 총영사에게서 들은 것과 자신이 호놀룰루 항에서 관찰한 내용을 설명했다.

 

미태평양함대가 주말마다 항구로 돌아온다는 정보는 아직 유효했다.

이어서 스즈키 소좌는 오아후 섬의 미군 항공력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미해군은 포드 섬에 약 60대, 그리고 카네오헤 기지에 약 50대의 카탈리나 정찰비행정을 보유하고 있다.

오아후 남서쪽의 바버즈 곶에서는 언제나 함재기 약 80대가 훈련중이다.

미육군은 히컴 비행장에 4발 중폭격기 약 40대, 쌍발폭격기 약 100대를 보유하고 있다.

미육군의 전투기는 P-40, P-38, P-36 이 약 200대이고 기타 약 70대를 보유하고 있다.

 

이것을 보면 당시 스즈키 소좌가 오아후 섬의 미군 항공력을 상당히 과대평가하고 있었다는 점을 알 수 있다.

우선 미해군이 보유한 카탈리나 정찰비행정은 110대가 아니라 포드 섬에 45대, 카네오헤에 36대로 합계 81대였으며 그중 12대는 미드웨이에 파견나와 실제로는 69대였다.

스즈키 소좌가 보고한 '바버즈 곶에서 훈련 중인 함재기 80대' 는 에바 비행장에 전개하고 있던 해병항공대로 보이는데 진주만 기습 당시 오아후 섬의 해병항공대가 보유한 항공기는 와일드캣 10대, 돈틀레스 22대, 빈디케이터 급강하폭격기 7대, 쌍발초계기 3대, 그리고 연습기 1대로 합계 43대였다.

 

육군항공대의 경우 과대평가는 더 심했다.

4발 중폭격기인 B-17D 는 40대가 아니라 12대 밖에 없었으며 그나마 부품부족으로 6대 만이 가용한 상태였다.

쌍발폭격기 또한 100대가 아니라 B-12 3대, B-18 33대, A-12 2대, A-20 12대로 총 50대였으며 부품부족으로 B-12 1대, B-18 21대, A-12 2대, A-20 5대 등 29대만이 가용한 상태였다.

그나마 A-20 을 제외한 쌍발폭격기들은 모두 구형이었다.

 

전투기 또한 270대가 아니라 P-40 99대, P-36 39대, P-26 14대로 총 152대였으며 역시 부품부족으로 P-40 64대, P-36 20대, P-26 10대 등 94대만이 가용한 상태였다.

P-40 을 제외한 기종들은 구형이었으며 강력한 신형 쌍발전투기인 P-38 은 배치되지 않은 상태였다.

 

스즈키 소좌는 오아후 섬의 육군 항공기 세력을 폭격기 140대, 전투기 270대, 기타 45대로 보아 455대로 추산했으나 실제로는 폭격기 62대, 전투기 152대, 정찰기 13대, 훈련기 4대 등 231대였으며 그나마 가용한 것은 폭격기 35대, 전투기 94대, 정찰기 11대, 훈련기 3대 등 143대에 지나지 않았다.

일본군은 오아후에 배치된 미육군의 항공력을 3배 이상 과대평가했으며 이렇게 과대평가된 오아후의 미국 항공력에 대한 공포가 진주만 기습에서 나구모 중장이 3차 공습을 포기한 가장 큰 이유였다.

 

(히도카프 만에 정박 중인 제1항공함대의 기함 아카기. http://commons.wikimedia.org/wiki/File:Akagi_Hitokappu_Bay.jpg) 

 

스즈키 소좌는 이어서 항공정찰에 대해 설명했다.

항공정찰은 오아후의 남쪽과 남서쪽으로는 활발하지만 북쪽으로는 뜸했다.

미해군의 카탈리나  정찰비행정들은 아침에 이륙하여 정찰한 후 점심에 돌아오며 오후에 다시 이륙하여 해질때까지는 돌아왔다.

따라서 미군 정찰기들은 해뜨기 전이나 해가 진 이후에는 활동하지 않았으며 이는 진주만 기습의 성공율을 높여주는 중요한 정보였다.

 

설명이 끝나자 겐다 중좌는 가장 중요한 항공모함에 대하여 물었다.

스즈키 소좌는 잠시 망설이더니 자신은 항공모함을 보지 못했지만 항모들은 다른 함정들과 같이 행동한다고 말했다.

 

이것은 틀린 말이었다.

실제로 오아후의 정보 수집을 책임지고 있던 요시카와 다케오는 진주만을 드나드는 항모의 행동 패턴을 파악하려고 골머리를 앓았으나 도통 알 수가 없었다.

당연한 것이 당시 태평양함대의 항공모함들은 전방 기지에 항공기를 파견하러 사방으로 돌아다니고 있었다.

따라서 항모들은 전함을 중심으로 한 태평양함대 주력의 훈련 스케줄과는 상관없이 항공기를 파견하러 다니는 도중에 따로 훈련하고 있었으므로 입출항 시기를 예측할 수 있는 행동 패턴이 없었다.

 

겐다 중좌는 기습을 가했을 때 진주만 내에 항모가 없을 수도 있다는 사실에 불안감을 느꼈으나 항모가 있건없건 공습을 감행하기로 결정했다.

항모가 없을 경우 주목표는  전함과 항공기가 될 것이었다.

 

스즈키 소좌가 히도카프 만에 정박한 아카기에서 브리핑하고 있을 때 미태평양함대의 전투정보실은 마셜 제도에 일본이 가진 전체 잠수함의 1/3 가량이 몰려있는 것을 알아내었으나 이들이 하와이를 목표로 하고 있다는 사실은 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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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출항

 

진주만 기습에 참가하는 세력 중에서 가장 먼저 출항한 것은 제6함대 소속 잠수함들이었다.

제6함대 사령장관 시미츠 미츠미 중장은 휘하 지휘관들을 1941년 11월 10일에 히로시마 만의 사에키 앞바다에 정박한 기함인 연습순양함 가토리 함상에 소집하여 작전 명령을 하달했다.

 

다음날인 1941년 11월 11일 오전 11시 11분에 미와 시게요시 소장의 제3잠수전대 소속 8척의 잠수함이 히로시마 만을 떠났다.

이들은 도중에 콰절린 환초에 들러 급유를 받은 후 존스턴 섬과 팔미라 섬 사이를 통과하여 7척은 오아후 섬 남쪽에 전개하고 I-74 함은 니하우 섬 부근에 전개할 것이었다.

I-74 함은 진주만 기습 당일 니하우 섬 부근에서 물에 떨어진 조종사들을 구조하고 공습으로부터 달아나려는 미함정들을 공격할 것이었다.

오아후 남쪽에 전개할 7척 중에서 I-72 함와 I-73 함은 마우이 섬의 서해안에 자리잡은 라하이나 정박지와 라나이 섬에 미함정들이 정박하고 있는지를 확인하여 통보해 주게 되어 있었다.

 

1941년 11월 16일에는 야마자키 시게키 소장이 지휘하는 제2잠수전대 소속 6척의 잠수함이 요코스카를 출항했다.

제2잠수전대는 미드웨이 북쪽을 통과하여 하와이의 북쪽에 도달한 다음 남하할 것이었다.

이들중  제7잠수대(I-1, I-2, I-3)는 오아후-카우아이 사이, 그리고 제8잠수대(I-4, I-5, I-6)는 오아후-몰로카이 사이에 전개하여 태평양함대의 움직임을 감시하고 공습 이후에는 해당 해역을 통과하는 함정들을 공격할 것이었다.

 

(진주만 기습 당시 일본잠수함의 전개 상황. http://www.i-16tou.com/stlou/stlou5.html)

 

같은 16일에 가야하라 야스차가 중좌가 지휘하는 I-10 함이 요코스카를 떠났다.

I-10 함은 남동쪽으로 가서 피지의 수바 항을 관찰하고 북동쪽으로 꺾어 사모아와 크리스마스 섬을 정찰한 후 하와이 동쪽, 샌프란시스코에서 남서쪽으로 1,700km 떨어진 해역에 잠복할 것이었다.

이곳에서 I-10 함은 하와이와 미서해안을 오가는 미국함정들의 움직임을 감시하고 공습을 받아 망가져서 미서해안으로 수리를 받으러 가는 함정들을 격침할 것이었다. 

 

17일에는 진주만 공격부대의 전방에서 정찰하면서 나아갈 제1잠수전대 제2잠수대(I-19, I-21, I-23)가 이마이즈미 키지로 대좌의 지휘 아래 히도카프 만으로 출발했다.

 

18일 아침에는 갑표적을 싣고 갈 특별공격대의 잠수함 5척(I-16, I-18,  I-20, I-22, I-24)이 사사키 한쿠 대좌의 지휘 아래 구레 군항을 떠나 가메가쿠비로 가서 갑표적 5척을 사령탑 뒤에 싣고 붕고수도를 빠져나갔다.

 

마지막으로 11월 19일에 요코타 미노루 중좌가 지휘하는 I-26 함이 출항했다.

I-26 함은 2주 전인 11월 6일에 완성되었으며 그를 비롯한 승조원들은 아직 함을 완전히 알지 못하는 상태였다.

해군에 들어온 이래 잠수함에서만 근무해왔던 요코타 중좌에게도 완성된 지 2주 밖에 되지 않은 잠수함을 타고 작전에 투입된 경우는 처음이었다.

I-26 함은 알류샨 열도로 나아가 미군 함정들의 움직임을 보고하고 진주만 기습 이후에는 미군 함정들을 공격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진주만 기습에 참가한 잠수함은 갑표적 5척을 포함하여 29척이었다.

 

1941년 11월 13일 오전 9시에 연합함대 사령장관 야마모토 이소로쿠 대장은 연합함대의 주요 지휘관들을 참모들을 모아 회의를 열고 연합함대 명령 제1호를 발령했다.

 

4일 후인 17일 오후 3시, 야마모토 대장은 히로시마 만에 정박 중인 아카기 함상에 올라 제1항공함대 및 예하 항공전대 수뇌부, 그리고 항공대의 장교 등 약 100 명에게 출항을 앞두고 마지막 연설을  했다.

연설문은 남아있지 않으나 사람들의 기억에 의하면 짧고 힘이 있으면서 감동적인 연설이었다고 한다.

야마모토 대장은 미해군을 얕보지 말 것을 당부하면서 적은 멍청이가 아니며 우리 계획을 탐지하고 기다릴 수도 있으니 이에 대해서도 대비해야 한다고 말했다.

적이 미리 알 수도 있다는 언급은 겐다 및 후치다 중좌에게 감명을 주었다.

야마모토 제독의 연설이 끝나자 일동은 만세삼창을 했다.

 

이어서 진주만 공격부대의 함정들이 출항하기 시작했다.

17일 오후 4시에 항공모함 소류와 히류로 이루어진 제2항공전대가 구축함 4척의 호위를 받으면서 히로시마 만을 출항했다. 

제2항공전대는 세토 내해로 나와 붕고 수도를 통과한 후 시코쿠 남단을 돌아 북쪽 쿠릴열도 에토로프 섬의 히도카프 만으로 향했다.

사령관 야마구치 다몬 소장은 히도카프 만으로 가는 동안 대공포 연습을 시켰다.

또한 미군의 통신을 감청한 결과 미군 잠수함들이 필리핀 북방으로 진출한 것으로 보인다는 군령부의 경고에 따라 많은 수병들이 견시 임무에 투입되었다.

 

같은 날 항모 쇼가쿠와 즈이가쿠로 이루어진 제5항공전대는 규슈 북서부의 벳푸를 출발하여 역시 히도카프 만으로 향했다.

항공모함 아카기는 17일 저녁에 구축함 2척의 호위를 받으면서 히로시마 만을 떠나 북쪽으로 향했다.

 

항모 카가는 사세보로 가서 신형어뢰 100발을 실은 후 동료 항모들보다 하루 늦은 18일 오후에 구축함 2척의 호위를 받으면서 히도카프 만으로 출발했다.

수뢰국장인 츠치다 히사오 중좌가 혹시 있을지 모를 신형어뢰의 문제점을 해결하기 위하여 기술자들과 함께 동행했다.

 

제1 및 제2항공전대의 항공모함 4척에는 이들 이외에도 기술자들이 타고 있었다.

미국전함의 장갑판을 뚫기 위한 800kg 짜리 신형폭탄은 기존의 폭탄투하기와 맞지 않았는데 새로운 폭탄투하기를 만들어 공급할 시간이 없었으므로 기술자들이 항모 내에서 기존의 폭탄투하기를 개조했다.

어뢰와 폭탄투하기 문제 해결을 위하여 항모에 탑승했던 기술자들은 진주만 공격부대가 히도카프 만을 떠날 때 급유함에 옮겨진 다음 함대가 돌아올 때까지 히도카프 만에 머물러야 했다.

 

이외에 제3전대(히에이, 기리시마), 제8전대(도네, 치쿠마) 및 제1수뢰전대가 모두 18일 저녁까지 출항을 마쳤다.

야마모토 제독의 기함 나가토를 비롯하여 히로시마 만에 정박 중이던 연합함대의 함정들은 건투를 빈다는 발광신호를 보내면서 출항하는 진주만 기습부대의 함정들을 배웅했다.

 

진주만 공격부대에 앞서 포함 구나시리가 에토로푸 섬에 도착하여 통신장교에게 모든 통신을 차단하라고 명령했다.

이로서 에토로푸 섬의 전화, 전보 및 우편 서비스가 중단되었다.

연락선도 끊겼으며 개인적인 출입은 물론 어부인 현지 주민이 고기잡이 나가는 것마저 막았다.

진주만 기습 떄까지 에토로푸 섬의 주민들은 죄수처럼 옴짝달싹할 수 없었다.

 

야마모토 제독은 보안을 위하여 심혈을 기울였다. 일본을 떠날 때 항공모함들이 육상기지에서 훈련 중이던 함재기들을 싣고 빠져나가는 것과 동시에 인근의 항공기지에서 항공기들을 하루에 몇번이고 내보내어 비행횟수가 줄어든 것을 사람들이 느끼지 못하게 했다.

또한 시내에 수병들이 줄어들었다는 걸 눈치채지 못하도록 지상의 해군부대에서는 많은 수병들에게 외박을 허용했다.

진주만 공격부대는 출항과 동시에 무선침묵상태에 들어갔으므로 줄어든 통신량을 보전하기 위하여 가짜 통신을 내보냈으며 함대호출부호도 변경했다.

 

보안은 히도카프 만으로 향하는 진주만 공격부대 내에서도 철저하게 지켜졌다.

모든 함정에게는 통신을 내보내서는 안 된다는 엄격한 명령이 내려와 있었다.

많은 함정에서는 실수로 건드리는 일이 없도록 통신기의 키를 봉인했으며 일부 함정에서는 아예 키의 단자를 뽑아버렸다.

진주만 공격부대 내에서도 진주만 기습에 대해 알고 있는 것은 제1항공함대의 지휘관들과 참모들, 공습에 참가할 조종사들 뿐이었으며 호위부대나 경계부대에서는 사령관인 미카와 중장과 오모리 소장, 그리고 참모들만이 알고 있었다.

그외의 승조원들에게 행선지는 비밀이었으며 어디로 가는지 헷갈리도록 하기 위하여 하복과 동복이 동시에 지급되었다.

일본의 노력은 목적을 달성했다.

 

(조셉 로슈포트 중령)

 

미태평양함대의 전투정보실장 조셉 로슈포트 중령은 제1항공함대의 첫 리허설이 있던 1941년 11월 4일에 일본군의 암호통신에게서 '제1항공함대' 란 단어를 뽑아내었다.

태평양함대의 정보참모 에드윈 레이튼 중령은 이 단어를 보는 순간 지난 몇 개월간의 의문이 풀렸다.

원래 일본의 제1함대와 제2함대에는 항상 항공전대가 하나씩 붙어있었는데 1941년 여름부터 사라졌다.

일본인의 작명 성향에 비추어 볼 때 제1항공함대는 항공전대의 집합체이며 이는 제1 및 제2함대에서 사라진 항공전대들이 제1항공함대를 이루고 있음을 암시하고 있었다.

레이튼 중령은 또한 제1항공함대의 창설은 일본해군이 앞으로 항공모함을 집중운용하겠다는 의지를 보여주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레이튼 중령을 비롯한 누구도 제1항공함대가 1달 후에 진주만을 공격할 줄은 몰랐다. 

 

태평양함대의 전투정보실은 1941년 11월 13일 현재 제1항공함대가  세토 내해에 머물러 있으며 별다른 활동을 보이지 않는다고 평가했다.

이후 일본군이 함대호출부호를 바꾸면서 전투정보실은 제1항공함대를 놓쳤으나 일본 측에게서 별다른 변화를 느끼지 못했으므로 항공모함들이 여전히 세토 내해에 머무르고 있을 것으로 예측했다.

 

이외에도 전투 정보실은 진주만 공격부대에 편성된 함정들이 다른 부대에 배속되었다고 해석하는 실수를 저질렀다.

전투정보실은 11월 15일에 전함 히에이와 기리시마로 이루어진 제3전대가 제1구축대와 함께 남파함대에 배속되었다고 보고했고, 다음날인 16일에는 뜬금없이 항공모함 즈이가쿠가 마셜제도에 있는 것 같다는 보고를 올렸다.

 

한편 히도카프로 향하는 아카기 함상에서 겐다 중좌와 후치다 중좌는 야마모토 제독의 연설이 마음에 걸렸다.

미군이 미리 알고 있을 때를 대비한 대책이 필요했다.

그들은 뇌격대를 지휘할 무라타 시게하루 소좌와 함께 해답을 만들었는데 기습 여부에 따라 제1차 공격대를 지휘할 후치다 중좌가 권총형 신호탄을 발사하기로 했다.

기습에 성공하면 1발, 실패하면 2발을 쏘기로 했으며 여기에 따라 공격순서가 달라질 것이었다.

 

진주만 기습의 주역은 뇌격으로서 기습에 성공하든 실패하든 공격순서는 뇌격의 효과를 극대화하는 방향으로 결정했다.

기습을 달성하여 신호탄이 1발만 발사되면 뇌격대가 가장 먼저 공격에 들어가 기습의 효과를 극대화하면서 뇌격을 가할 것이고 급강하폭격기와 수평폭격기가 그 뒤를 따를 것이었다.

만일 기습이 실패하여 신호탄이 2발 발사되면 먼저 급강하 폭격기가 공격에 들어가고 이어서 수평폭격기가 공격하여 적의 요격기와 대공포화를 끌어당긴 후 뇌격대가 마지막으로 들어가서 뇌격을 가할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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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훈련

 

진주만 기습을 위한 제1항공함대의 훈련은 1941년 6월부터 시작되었다.

제1항공함대의 항공참모 겐다 미노루 중좌는 뇌격 훈련을 위하여 규슈 남단의 가고시마 만을 골랐다.

육지로 길게 들어간 만으로서 주변을 산이 둘러싸고 있고 만 가운데 섬이 있는 가고시마 만은  진주만을 닮았다.

 

(가고시마 만. http://en.wikipedia.org/wiki/Kagoshima_Bay)

 

(진주만. http://en.wikipedia.org/wiki/Pearl_Harbor)

 

진주만을 공격할 3가지 방법인 뇌격, 수평폭격, 급강하폭격 중에서 가장 문제가 되는 것은 뇌격이었다.

대형함을 공격하는데는 뇌격이 가장 효과적이었으나 문제는 진주만의 수심이 15m 정도로 얕다는 것이었다.

겐다 중좌는 위치에 따라 수심이 12m 정도인 곳도 있을 것으로 보았으며 따라서 항공기에서 떨어뜨리는 어뢰는 10m 이내로 가라앉아야 성공을 보장할 수 있다고 믿었다.

 

일반적인 생각과 달리 일본해군은 진주만 기습 때문에 항공어뢰가 얕게 주행하도록 하는 연구를 시작한 것이 아니다.

1939년 이전까지 일본해군의 항공어뢰 운용방식은 100m 높이에서 떨어뜨리는 것이었다.

그럴 경우 어뢰는 최소한 30m, 최대 100m 까지 가라앉았다가 상향으로 조정한 수평 방향타에 의하여 급격하게 부상하면서 적함에 명중했다.

이럴 경우 항주 거리와 부상 각도, 그리고 최초에 가라앉는 깊이에 따라 어뢰가 적함에 명중하기 전에 해면으로 튀어오르거나 아니면 적함 아래로 통과해버리는 일이 많았다.

따라서 일본해군은 어뢰를 얕게 가라앉힌 다음 천천히 부상시키면 명중율이 높아질 것으로 보고 연구를 시작했다.

 

1939년 중반에 일본해군의 기술자들은 착수시 떨어져나가는 나무판을 어뢰에 붙이면 가라앉는 깊이를 줄일 수 있다는 걸 알아내었다.

1940년 2월에 실시한 실험에서 100m 높이에서 떨어뜨릴 경우 어뢰가 가라앉는 깊이는 18m 까지 얕아졌다.

만일 항공기가 30m 높이에서 280km/hr 의 속력으로 어뢰를 떨어뜨릴 경우 70% 의 어뢰가 12m 밖에 가라앉지 않았다.

문제는 이렇게 얕게 가라앉은 어뢰는 똑바로 나아가지 못하고 비틀거린다는 것이었는데 기술자들은 이 문제를 해결하지 못했다.

1941년 중반에 겐다 중좌가 해군 기술자들에게 10m 이내로 가라앉는 어뢰를 요구했을 때 여기까지 진척되어 있었다.

 

겐다 중좌는 초저공에서 투하하는 방법을 제시했다.

2대의 뇌격기가 12m 라는 기록적인 저공으로 비행하면서 어뢰를 떨어뜨린 결과 1발은 10m 이내로 가라앉았으나 1발은 좀 더 깊이 가라앉았다.

 

일본해군의 기술자들은 혼신의 힘을 다하여 20m 높이에서 190km/hr 의 속력으로 떨어뜨릴 경우 12m 까지만 가라앉으면서 안정적으로 주행하는 91식 2형 항공어뢰를 개발했다.

겐다 중좌는 10m 를 고집했으나 여기까지가 한계였다.

 

문제는 새로운 어뢰의 생산 일정이 촉박하다는 점으로 해군함정본부는 첫 30발은 1941년 10월 15일, 다음 50발은 10월 31일, 마지막 100 발은 11월 30일이 되어서야 인도가 가능하다고 말했다.

연합함대와 군령부의 참모들이 매일같이 해군함정본부에 몰려가서 아우성을 친 결과 마지막 100발의 인도 시점을 11월 17일까지 앞당겼다.

 

수평폭격도 문제였는데 기존 폭탄으로는 미국 전함의 장갑판을 뚫기 어려웠다.

해군 기술자들은 나가토 급의 16인치 주포탄을 개량하여 22.8kg의 작약을 가지고 무게가 796.9kg 에 달하는 99식 80-3형 폭탄을 개발했다.

이 폭탄을 3,000m 높이에서 떨어뜨리면 미국 전함의 장갑판을 뚫을 수 있었다.

 

수평폭격의 낮은 명중율도 문제였다.

1941년 초반까지 일본해군의 폭격 대회에서 우승한 항공대의 수평폭격 성공율은 10% 정도였는데 이 정도로는 곤란했다.

 

돌파구를 뚫은 것은 아카기의 제3함상공격기 중대장인 후루카와 이즈미 대위였다.

1941년 4월에 9대로 이루어진 후루카와의 중대는 표적함으로 히로시마 만 내에 정박 중인 낡은 군함 셋츠를 3,600m 높이에서 수평폭격하여 모의탄 9발 중 4발을 명중시켰다.

모두들 처음에는 우연이라고 생각했으나 2번째 폭격에서는 3발, 세번째는 무려 5발을 명중시켰다.

후루카와 대위는 비결을 물어보는 겐다 중좌에게 이전에는 폭격수가 주도하는 폭격 과정에서 수동적인 역할에 머물렀던 조종사를 폭격에 적극 참여하도록 훈련시키는 것이 요점이라고 대답했다. 

훈련 방법을 바꾼 이후 수평폭격의 성공율은 극적으로 높아져 33%에 달했다.

미해군에 따르면 진주만 기습에서 수평폭격의 명중율은 24% 로서 비록 기습에다가 고정 표적들이지만 실전임을 고려하면 대단한 명중율이었다.

 

1941년 8월 25일에 겐다 중좌는 친구인 후치다 미츠오 중좌를 아카기의 항공대장으로 끌어들였다.

이후 후치다 중좌는 제1항공함대 조종사들의 훈련을 총괄했으며 진주만 기습시에는 공격대를 총지휘했다.

이때를 전후하여 진주만 기습에서 공격대를 이끌 지휘관들이 결정되었으며 이들이 현장에서 훈련을 이끌었다.

 

(후치다 미츠오. 자세한 내용은 여기로)

 

제1항공함대의 함재기들이 모두 가고시마에서 훈련한 것은 아니었다.

가고시마에서 훈련한 것은 아카기 및 카가의 뇌격기 24대와 수평폭격기 30대, 합계 54대였다.

소류 및 히류의 뇌격기 16대와 수평폭격기 20대는 이즈미에서 훈련했으며 다른 항공대도 도미타카, 카사노하라, 사에키, 우사, 오이타, 그리고 오무라 기지에서 항공대 별로 훈련했다. 

(뇌격과 수평폭격에 쓰인 기체는 모두 97식 항상공격기로서 뇌격기와 수평폭격기는 진주만 기습 당시 임무에 따라 붙인 호칭이다. 하나의 기체를 뇌격과 수평폭격에 모두 사용한 것은 미해군도 마찬가지이다.)

 

(나카지마 B5N 97식함상공격기. 자세한 내용은 여기로)

 

1941년 10월 2일에 제1항공함대 사령장관 나구모 주이치 중장은 제1항공함대의 항공모함 함장들과 항공대장들을 임시 기함으로 쓰고 있던 항공모함 카가로 불러들여 진주만 기습 계획을 공개했다.(아카기는 수리를 위하여 잠시 요코스카 해군기지의 건선거에 들어가 있었다.)

중좌들이던 항공대장들은 진주만 기습 계획을 모두 열렬하게 환영했으며 대좌들인 항공모함 함장들도 대부분 기뻐했다.

 

이날 이후 제1항공함대의 훈련은 진주만 기습에 특화되어 실시하게 되었으며 그 과정에서 후치다 중좌가 점점 큰 역할을 맡게 되었다.

10월 10일까지 신예 항공모함 쇼가쿠와 즈이가쿠로 이루어진 제5항공전대의 조종사들이 모두 훈련에 합류했다.

 

후치다 중좌는 1941년 10월 초에 97식 함상공격기 9대로 이루어진 함상공격기 중대들을 뇌격기 4대와 수평폭격기 5대로 분리했다.

기준은 뇌격으로 뇌격 실력이 뛰어난 4명을 뇌격대에 우선 배정하다보니 유능한 조종사들이 모두 뇌격대로 몰렸다.

그리하여 수평폭격을 담당한 조종사들은 낙담했으나 전쟁에서 그런 것까지 일일이 고려할 여유는 없었다.

 

제1 및 제2항공전대의 함상공격기 90대 중 40대가 전함 및 항공모함에 대한 뇌격을, 50대가 전함에 대한 수평폭격을 담당했다.

실력이 떨어지는 제5항공전대의 함상공격기들은 모두 수평폭격기로 비행장 폭격에 투입되었다.

제5항공전대의 급강하폭격기에게도 표적의 크기가 작은 함정 공격 임무 대신 비행장 폭격 임무가 부과되었다.

제1 및 제2항공전대의 급강하폭격기들은 원래 항공모함을 담당했으나 진주만 기습 당시 항공모함들이 없었으므로 주로 전함을 비롯한 함정을 폭격했으며 일부는 해군공창을 공격했다.

제로기들은 공격기들을 미군 전투기로부터 보호하는 이외에 비행장에 주기된 미군 항공기들이나 관제탑을 비롯한 비행장의 주요 시설물을 기총소사했다.

 

1941년 10월 초에 함상공격대가 뇌격대와 수평폭격대로 분리되면서 가고시마에서 훈련 중이던 제1항공전대의 뇌격훈련은 난이도가 부쩍 높아졌다.

포드 섬 주변에 정박한 함정들을 어뢰로 공격하려면 뇌격기들은 기중기를 비롯한 각종 장애물이 널린 부두나 육지를 지나 해면으로 20m 고도까지 급강하하여 해안에서 500m 떨어진 해역에 정박하고 있는 전함이나 항공모함에게 어뢰를 발사해야 했다.

가고시마에서의 뇌격 훈련은 이 상황을 가정하여 실시했다.

 

(진주만 기습 당시 뇌격기의 공격 경로. http://www.freeinfosociety.com/media.php?id=807)

 

뇌격기들은 우선 중대장기를 선두로 500m 간격으로 만의 남쪽에서부터 진입하여 만 가운데 사쿠라지마의 서쪽 기슭을 200m 높이로 통과했다.

만의 북쪽에 도달한 뇌격기들은 고도를 50m 로 낮추어 시코츠 강 하구에서 남서쪽으로 빙 돌아 가고시마 시가지의 서쪽에 도달한다.

여기서 동쪽으로 변침한 후 가고시마 시내를 40m 높이로 가로지른다.

해안에 인접한 야마가타야 백화점 상공를 통과하면 커다란 물탱크가 나타나고 이어서 해안이다. 

뇌격기는 해안에 도달하면 300km/hr 의 속력을 유지하면서 20m 고도까지 급강하한 다음 해안에서 500m 거리에 설치한 부표를 향해 어뢰를 발사한 후 고도를 높여 남쪽으로 이탈한다.

깜빡 실수하면 바다에 추락하여 사망할 수 있는 위험한 훈련이었다.

가고시마 시민들은 40m 의 저공으로 차례차례 시내를 가로지르는 뇌격기의 폭음에 기겁했으며 양계장에서는 닭들이 놀라서 알을 낳지 않았다고 전해진다.

 

소류와 히류로 이루어진 제2항공전대의 뇌격대는 이즈미에서 훈련했는데 역시 실전을 상정하여 강도높게 훈련했다.

미해군에 따르면 진주만 기습에서 뇌격의 명중율은 55% 로 상당히 높다.

 

뇌격에 대한 커다란 걱정 중 하나는 함정 부근에 어뢰방어망이 쳐져 있는 경우였다.

겐다 중좌와 후치다 중좌가 아무리 머리를 쥐어짜도 어뢰방어망이 있을 경우 뇌격을 성공시키기 어려웠으나 그렇다고 뇌격을 포기하자니 수평폭격만으로는 충분한 전과를 기대할 수 없었다.

결국 두 사람은 어뢰방어망이 있을 경우 선두의 뇌격기가 돌입하여 자폭함으로써 방어망을 찢고 뒤따르던 뇌격기들이 어뢰를 발사하기로 결정했다.

그러나 태평양함대 사령관 킴멜 제독은 진주만에서 항공기에 의한 뇌격은 불가능하며 항행에 지장을 준다는 이유로 어뢰방어망을 치지 않았다.

 

급강하폭격기들도 역시 맹훈련을 하고 있었다.

일본해군의 교리에 따르면 급강하폭격기들은 4,000m 높이에서 강하를 시작하여 600m 높이에서 폭탄을 분리했다.

그러나 제1항공함대의 급강하폭격대장 에구사 다카하시 소좌는 명중율을 높이기 위하여 폭탄 분리 고도를 450m 로 낮추자고 제안했다.

이 제안이 받아들여짐으로써 급강하폭격의 정확도가 올라갔다.

Tora!Tora!Tora! 를 지은 마크 스틸에 따르면 진주만 기습에서 함정들을 노린 급강하폭격의 명중율은 약 20% 로서 실망스러운 수준이었는데 가장 큰 원인은 진주만 상공에 구름이 낮게 끼어 있었다는 것이었다.

 

전투기에 대해서는 상대적으로 훈련에 신경쓸 일이 적었으나 당시까지 생산량이 충분하지 못한 신예 전투기인 제로기와 뛰어난 조종사를 충분히 확보하는 것이 중요했다.

야마모토 대장이 제3항공전대(호쇼, 즈이호) 및 제4항공전대(류조)를 쥐어짜서 제로기와 조종사들을 제1항공함대에 배속하는 바람에 제3 및 제4항공전대는 전투기가 거의 없는 상태가 되었다. 

이것으로 모자라자 요코스카 항공대에서 최고의 제로기 조종사들을 차출하여 제1항공함대에 배속하는 바람에 요코스카에서는 늘어난 조종훈련생들을 가르칠 교관이 부족하여 고생했다.

제로기 조종사의 배속 우선 순위는 제1, 제2 및 제5항공전대였으며 필리핀 공격을 지원할 제11항공함대는 그 다음이었다.

제1항공함대의 제로기는 1941년 11월 초에 정수를 맞추었다.

 

(제로기. 자세한 내용은 여기로)

 

1941년 10월 중순에 후치다 중좌는 진주만 공격 시간을 겐다 중좌가 정한 12월 7일 오전 6시 30분에서 오전 8시로 늦추었다.

하와이의 일출 시간은 6시 6분이었으므로 6시 30분에 진주만 상공 도달하려면 함재기들은 어둠 속에서 발진하여 오아후 섬까지 날아와야 했는데 후치다 중좌는 미숙한 제5항공전대 조종사들의 야간 이함 및 항법 능력을 신뢰하지 않았다.

겐다 중좌는 흔쾌히 동의하고 나구모 중장에게 허가를 받았다.

 

해상급유문제도 골칫거리였으나 1941년 10월 말에 돌파구가 열렸다.

일본해군은 북방항로를 해상급유없이 왕복할 수 있는 함정은 항공모함 카가, 쇼가쿠 및 즈이가쿠, 전함 히에이와 기리시마, 그리고 중순양함 도네, 치쿠마 등 7척이었으며 항공모함 아카기, 소류, 히류, 경순양함 아부쿠마 및 구축함들은 해상급유가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일본해군의 해상급유는 급유함이 앞장서고 전투함이 뒤따라가면서 호스를 연결하여 급유를 받았는데 문제는 적의 잠수함이 나타나서 급히 변침해야 할 경우였다.

이럴 경우 구축함이나 경순양함같이 작은 함정들은 호스를 연결한 채 급유함을 따라 변침할 수 있었다.

그러나 아카기같은 대형함은 선회반경이 급유함보다 크기 때문에 그럴 경우 호스가 끊어질 것이었다.

 

제1항공함대의 참모장 구사카 류노스케 소장이 이 문제를 해결했다.

아카기, 소류 및 히류의 설계도를 검토하고 실무자들과 이야기를 해 본 구사카 소장은 함 내의 공간에 연료를 추가로 실으면 해상급유 없이도 하와이까지 왕복할 수 있다는 결론을 얻었다.

문제는 이것이 함정의 안전규정에 어긋난다는 것이었다.

 

구사카 소장은 해군성의 안전담당관들을 압박해 달라면서 군령부에서 군비를 담당하는 제2부를 집요하게 물고 늘어졌다.

제2부는 구사카 소장의 요구를 거절했으나 10월 18일에 나가노 군령부 총장이 진주만 기습을 승인하자 태도가 바뀌었다.

군령부는 만일 문제가 생기면 책임을 질테니 예외를 인정해 달라고 해군성에 요청하여 동의를 받아내었고 이로써 구사카 소장은 연료를 항공모함 내부에 실을 수 있었다.

함 내부의 공간이라는 공간에 모두 드럼통을 꽉꽉 채우자 700톤의 연료가 더 들어갔다. (아카기의 연료 탱크에는 6,000톤, 히류와 소류는 3,500톤의 연료를 실을 수 있었다.)

여기에 함저의 균형탱크(trim  tanks)에도 연료를 가득 채우자 아카기, 소류, 히류도 해상급유없이 하와이를 왕복할 수 있게 되었다.

 

그래도 경순양함 아부쿠마나 구축함들은 해상급유를 받아야만 했다.

구사카 소장은 1941년 10월 말까지 구축함 2척이 급유함 양옆에서, 그리고 1척이 뒤에서 급유를 받아 3척이 동시에 급유받는 방식을 시험하여 성공시켰다.

이로써 해상급유에 필요한 시간이 획기적으로 줄어들어 거친 북태평양에서 날씨가 반짝 좋아지면 재빨리 급유할 수 있게 되었다.

 

제1항공함대 사령장관 나구모 주이치 중장은 1941년 11월 3일 오후 1시 30분에 제1항공함대의 지휘관과 참모들, 그리고 조종사 모두에게 진주만 기습 계획을 공개했다.

모두들 기뻐했으며 특히 조종사들은 자신들이 맹훈련을 해야했던 이유를 알게되어 더욱 기뻐했다. 

 

다음날인11월 4일부터 제1항공함대는 3회에 걸쳐 최종 리허설을 실시했다.

지금까지는 항공모함의 연료를 아끼기 위하여 지상에서 발진했으나 이날은 제1 및 제2항공전대의 함재기들이 항공모함에서 이함하여 대형을 짠 후 30km 전방까지 날아갔다가 돌아오면서 진주만의 미전함들처럼 줄을 맞추어 정박 중이던 연합함대의 전함 및 항공모함들을 상대로 모의 공격을 실시했다.(당시 제5항공전대의 함재기들은 규슈 북서부의 벳푸 부근에서 훈련 중이었으므로 리허설에 불참했다.)

다음날인 11월 5일에는 도중에 미군 전투기의 요격을 받는 상황을 가정하여 리허설을 실시했는데 제1항공함대는 9월의 전쟁연습 때와는 달리 요격을 받아도 만족스러운 전과를 올릴 수 있다는 결론을 내렸다.

11월 7일에는 마지막 리허설이 있었고 이후 평가가 이어졌다.

 

후치다 중좌는 여러 대의 항공기가 특정 함정에게 지나치게 몰리는 경향이 있다는 점을 발견하고 각각의 조종사들에게 보다 구체적인 목표를 지정했다.

 

가장 큰 문제는 20m 고도에서 떨어뜨린 어뢰의 40% 만이 12m 이하로 가라앉았다는 것이었다.

나머지는 대부분 15m 까지 가라앉았으며 몇몇은 20m 까지 가라앉았다.

겐다 중좌는 뇌격대를 지휘할 무라타 시게하루 소좌에게 문제 해결을 지시했고 무라타 소좌는 부하들을 이끌고 가고시마로 돌아가서 11월 11일부터 실험했다.

 

마침내 11월 13일에 무라타 소좌는 비결을 알아내었다.

투하고도 20m 는 맞았으나 속력이 너무 빨랐다.

투하 속력을  300km/hr에서 190km/hr 로 낮추자 82% 의 어뢰가 12m 까지만 가라앉아 안정적으로 주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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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승인

 

1941년 9월의 전쟁연습 이후 군령부는 연합함대의 진주만 기습 계획에 대하여 명확한 목표를 가지고 대처했다.

즉 가능하면 취소시키고 취소가 불가능하면 규모를 최소화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목표에 따라 군령부는 1941년 9월 말에 소류와 히류의 항속거리가 짧다는 구실로 제2항공전대를 남방작전으로 돌렸으며 오버홀이 예정되어 있던 아카기마저 빼돌렸다.

군령부는 이 사실을 연합함대와 제1항공함대에 통보했으나 제2항공전대에는 알리지 않았다.

 

1941년 10월 초에 이 사실을 알게 된 제2항공전대 사령관 야마구치 다몬 소장이 제1항공함대의 기함인 아카기로 쳐들어왔다.

당시 겐다 중좌는 나구모 사령장관의 선실에서 나구모 중장 및 구사카 참모장과 함께 진주만 기습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는데 야마구치 소장이 노기등등한 얼굴로 문을 벌컥 열고 들어오자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야마구치 다몬 제독. 자세한 내용은 여기로)

 

겐다 중좌는 평소 야마구치 제독을 무조건 공격만을 주장하는 무식한 지휘관으로 여겨 싫어했다.

그러나 최소한 6척이 필요한 진주만 공격부대가 3척으로 쪼그라든 비상 사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야마구치 소장처럼 제독이면서 진주만 기습을 열정적으로 지지하고 또한 성격이 불같은 사람과 손을 잡아야 했다.

진주만 기습에 소극적인 나구모 사령장관이나 구사카 참모장은 믿을 수 없었고 계급 사회인 군대에서 일개 중좌에 불과한 겐다 자신은 힘이 없었다.

 

(제1항공함대의 항공참모 겐다 미노루 중좌. 자세한 내용은 여기로)

 

야마구치 소장은 나구모 중장에게 으르렁거리듯 물었다.

 

"도대체 2전대가 빠진 이유가 뭡니까?"

 

나구모 중장을 대신하여 야마구치 소장의 에타지마 병학교 1년 후배인 구사카 참모장이 조심스럽게 말했다.

 

"상부에서 결정한 겁니다."

 

그러자 야마구치 소장은 소리를 질렀다.

 

"왜 항의하지 않습니까? 정말로 하와이를 공격하고 싶다면 항공모함 6척이 필요하다는 걸 모릅니까? 항속거리가 짧다고? 그건 제가 걱정할 문젭니다. 공격하고 돌아오다가 연료 떨어지면 그냥 바다에 떠 있을거요. 2전대는 신경끄고 먼저 가면 됩니다."

 

야마구치 소장은 겐다 중좌를 돌아보며 물었다.

 

"자네는 어떻게 생각하나?"

 

겐다 중좌는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제독님 생각에 전적으로 찬성입니다. 군령부가 어떻게 이런 멍청한 계획을 세웠는지 이해를 못하겠습니다."

 

나구모 중장은 야마구치 소장의 기세에 눌려 쩔쩔매다가 겨우 한마디했다.

 

"아, 군령부에서 명령이 그렇게 내려온 걸 난들 어떡하나?"

 

야마구치 소장은 그 소리를 듣자 나구모 중장을 한 번 노려보더니 인사도 안하고 문을 쾅 닫고는 나가버렸다.

 

(제1항공함대 사령장관 사령관 나구모 주이치 중장. 자세한 내용은 여기로)

 

며칠 후인 1941년 10월 9일에 일본연합함대 사령장관 야마모토 이소로쿠 대장은 히로시마 만에 정박한 기함 나가토 함상으로 휘하의 주요 지휘관들을 소집했다.

연합함대 명령 제1호의 발령을 앞두고 부하들의 의견을 마지막으로 듣고 연합함대 전체의 의견을 통일시키기 위한 것이었다.

 

그리하여 10월 9일부터 11일까지 나가토 함상에서는 남방작전 전반에 걸쳐 토론이 벌어졌는데 그동안 제1항공함대 수뇌부는 전함 무츠에 머물렀다.

무츠에서의 저녁 회식 자리에서 나구모 중장은 부하들에게 술을 적당히 마시라고 당부했지만 야마구치 소장은 과음했다.

회식을 마칠 때쯤 잔뜩 취한 야마구치 소장이 나구모 중장에게 다가와 옷을 붙잡더니 유도로 메다 꽂으려고 했다.

깜짝 놀란 나구모 중장이 안 넘어가려고 버둥거릴 때 구사카 참모장이 끼어들었다.

몸집이 큰데다 무술이 뛰어난 구사카 참모장은 어렵지 않게 야마구치 소장을 떼어낸 다음 옆방으로 데려가 눕혔다.

 

(제1항공함대 참모장 구사카 류노스케 소장. 자세한 내용은 여기로)

 

10월  9일부터 11일까지 3일간의 토론이 끝나고 12일 오전 9시부터 나가토 함상에서는 진주만 기습에 대한 전쟁연습이 실시되었다.

9월 16일의 전쟁연습과 달리 이번에는 진주만 기습에 직접 관계없는 지휘관들도 참관했으며 군령부를 대표하여 항공참모 미요 다츠기치 중좌와 우치다 시게시 중좌도 참관했다.

 

이번 전쟁연습은 9월과 비교하여 몇 가지가 달라졌다.

우선 잠수함에서 발진하는 소형 잠수정인 갑표적이 포함되었으며 쿠릴열도의 어느 지점이라고만 되어있던 집결 장소가 에토로푸 섬의 히도카프 만으로 결정되었다.(히도카프 만을 고른 것은 중좌 시절 쿠릴 열도에 대해 깊이 공부했던 구사카 소장이었다.)

가장 큰 차이점은 군령부의 의도에 따라 청군으로 참가한 항공모함이 카가, 쇼가쿠, 그리고 즈이가쿠의 3척이라는 것이었다.

 

결과는 실망스러웠다.

청군함대는 오아후에 완전한 기습을 가했음에도 불구하고 항공력 부족으로 미함대에 치명적인 타격을 주지 못하고 중간 정도의 타격만을 입혔다.

비록 재빠른 퇴각으로 청군함대의 피해는 가벼웠지만 전체적으로 받아들이기 힘든 결과였다.

겐다 중좌나 야마구치 소장, 그리고 야마모토 대장은 항공모함 3척으로 오아후를 공격한다는 것은 큰 의미가 없다는 사실을 확신하게 되었다.

잠수함에서 출격한 갑표적의 전과도 보잘것 없었다.

 

전쟁연습이 끝난 후 토론이 벌어졌다.

나구모 중장은 하와이에 전개하는 잠수함들이 미해군에게 발견될까봐 두려워했다.

그리하여 잠수함들은 항공공격 이전에는 낮에는 반드시 잠수하고 밤에만 부상하기로 결정했다.

야마모토 제독은 갑표적을 신뢰하지 않았으나 잠수함대인 제6함대의 강력한 요청을 받아들여 반드시 생환한다는 조건으로 참가를 허용했다.

 

비밀유지와 관련하여 말레이에 상륙할 선단 상공에 나타나는 연합군 정찰기를 어떻게 처리할 것인지가 문제가 되었다.

선단을 호위할 제2함대 사령장관 곤도 노부다케 중장은 선단 상공에 나타나는 정찰기를 무조건 격추할 생각이었지만 나구모 중장은 그럴 경우 하와이의 미군이 경계를 강화할 것이라며 반대했다.

결국 곤도 중장은 진주만 기습 이전에는 정찰기에 발견되면 격추하지 않고 선단의 방향을 바꾸어 적의 눈을 속이기로 했다.

 

제3전대 사령관 미카와 구니치 중장은 9월에 이어 또다시 전함 공고와 하루나를 제3함대에서 뺴내어 히에이 및 기리시마와 함께 진주만 기습에 참가시켜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번에는 야마모토 대장이 직접 나서 공고와 하루나는 영국해군에 대항하기 위하여 반드시 필요하므로 제3함대 휘하에서 남방작전에 참가해야 한다고 못을 박았다.

 

다음날인 10월 13일 오전 9시부터 나가토에서는 전술적인 토론이 벌어졌으며 전술토론이 끝난 오후 4시부터 연합함대의 주요 지휘관들과 고급 참모들은 특별 회의를 가졌다.

야마모토 제독은 회의 참가자들에게 다가오는 전쟁에 대해 기탄없이 의견을 말하라면서 좋은 의견을 반영하기 위하여 개인 자격으로 기록할 뿐 공식 기록은 남기지 않으니 어떤 내용이든 발언해도 좋다고 말했다.

대신 회의 마지막에 자신이 결론을 내리면 더 이상의 논쟁은 허용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연합함대 참모장 우가키 마토메 소장의 개회사에 이어 제3전대 사령관 미카와 구니치 중장이 발언했다.

미카와 중장은 순전히 항해라는 면에서 보았을 때 12월 중순 이후에는 북태평양에서의 해상급유가 사실상 불가능하므로 아무리 늦어도 12월 초순에는 진주만을 공격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따라서 개전일은 하와이 현지 시간으로 1941년 12월 7일, 미군 함정이 진주만 내에 가장 많이 모이는 일요일로 결정했다.

 

제11항공함대 참모장 오니시 다키지로 소장은 진주만을 기습하기에는 계절적으로 이미 늦었으며 항공모함들은 하와이를 공격하는 대신 필리핀을 공격하는 제11항공함대를 지원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제2함대 사령장관 곤도 노부다케 중장은 하와이는 물론 필리핀, 괌, 웨이크 등 미군 기지에 대한 공격을 일체 배제하고 말레이만 공격함으로써 미국의 즉각적인 참전을 막고 일단은 영국과 네덜란드만을 상대로 개전하자고 주장했다.

제1항공함대 사령장관 나구모 주이치 중장과 참모장 구사카 류노스케 소장도 곤도 중장의 의견에 찬성했다.

제2항공전대 사령관 야마구치 다몬 소장은 진주만 공격을 강력하게 지지했다.

 

마지막으로 연합함대 사령장관 야마모토 이소로쿠 대장이 일어섰다.

 

"여러분들의 훌륭한 의견을 잘 들었다. 몇몇 의견은 내가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점을 일깨워 주었으며 그 내용은 앞으로 함대명령에 반영될 것이다."

 

그리고 명확하게 결론을 내렸다.

 

"하와이 작전은 국가 대전략의 핵심적인 부분이다. 내가 연합함대 사령장관으로 있는 한 하와이를 공격할 것이다. 나는 여러분이 충심으로 나를 지지해 주길 바란다. 이제 여러분은 각자 위치로 돌아가 전쟁의 승리를 위하여 매진하도록. 행운을 빈다!"

 

이로써 결론이 났다.

야마모토 제독의 결단력과 카리스마에 대항할 인물은 연합함대 내에는 없었다.

이후 연합함대 내에서는 나구모 중장을 위시하여 누구도 하와이 공격에 대해 논쟁하거나 반대하거나 불평하지 않았다.

 

(연합함대 사령관 야마모토 이소로쿠 대장. 자세한 내용은 여기로)

 

겐다 중좌는 이제 군령부에 의하여 항공모함 3척으로 쪼그라든 진주만 공격부대를 6척으로 늘리는 일에 집중했다.

제1항공함대 참모장 구사카 소장도 일단 하와이 공격을 수용하자 항모를 6척으로 늘려야 한다는 겐다 중좌를 지지했다.

 

야마구치 소장은 나가토 함상에서의 특별 회의에서 제2항공전대를 진주만 기습에 참가시키려고 노력했으나 실패했다.

회의에서 제2항공전대의 항공참모 스즈키 에이지로 소좌는 야마구치 소장을 대변하여 제2항공전대가 하와이 공격에 참가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스즈키 소좌는 소류와 히류의 항속거리가 결코 짧지 않으며 북방항로를 사용해도 해상급유없이 하와이까지 왕복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회의 참석자들은 모두가 알고 있는 뻔한 사실을 가지고 야마모토 대장을 비롯한 기라성같은 제독들이 앉아있는 회의 석상에서 막무가내로 우겨대는 스즈키 소좌를 기가 막힌다는 표정으로 쳐다보다가 직속상관인 야마구치 소장에게 어서 제지하지 않고 뭐하냐고 눈치를 주었다.

그러나 야마구치 소장은 스즈키 소좌가 말을 마칠 때까지 모두의 시선을 무시함으로써 그를 지지했다.

회의를 마치고 야마구치 소장은 스즈키 소좌에게 이렇게 말했다.

 

"자네는 틀렸어. 그리고 스스로 틀렸다는 것을 알면서 그랬다는 것도 아네. 잘했어. 배짱이 마음에 들어."

 

나가토 함상의 회의가 끝난 직후 야마구치 소장은 다시 한번 나구모 중장의 선실에 쳐들어가 행패를 부렸다.

사실 제2항공전대의 진주만 기습 배제 문제는 야마모토 대장에게 따질 일이었으나 야마구치 소장에게는 그런 생각이 떠오르지 않았다.

대신 그의 분노는 항공전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 주제에 제1항공함대 사령장관 자리를 꿰차고 앉아서는 처음부터 진주만 기습에 반대하더니 이제는 3척의 항공모함만 가지고 하나마나한 히트앤드런 작전이나 수행하려는 나구모 중장에게 향했다.

이번에는 야마구치 소장의 지나친 언행에 화가 난 나구모 중장이 도중에 말을 끊고 나가라고 명령했다. 

야마구치 소장은 쫓겨나면서 문을 쾅하고 닫기 전에 들으라는 듯이 큰소리로 중얼거렸다.

 

"(제1항공함대의) 사령장관이고 나발이고 똑바로 안하면 내 손으로 죽여버릴 거야."

 

겐다 중좌는 이런 식으로는 해결이 안되며 누군가 군령부와 직접 부딪혀야 한다고 생각하고 구사카 참모장을 설득했다.

구사카 소장은 나구모 중장에게 이제 하와이를 공격해야만 하는 현실을 직시할 때며 공격은 다른 사람이 아닌 나구모 중장 자신이 이끌어야 한다는 점을 상기시켰다.

그리고 하와이를 공격하려면 3척이 아닌 6척의 항모를 이끌고 가야만 성공할 수 있다고 설득하여 항모 6척을 얻어내기 위하여 군령부에 가도 좋다는 허락을 받아내었다.

 

구사카 소장은 1941년 10월 17일에 군령부를 방문하여 제1부 작전과장 도미오카 사다토시 대좌와 이야기를 나누었다.

도미오카 대좌는 6척의 항모는 커녕 하와이 공격 자체를 반대하면서 한마디도 지지않고 꼬박꼬박 대꾸했다.

더 이상 이야기해 봤자 시간낭비라고 생각한 구사카 소장은 군령부를 떠났다.

 

이제 하와이 공격의 열렬한 신봉자가 된 구사카 소장은 어깨를 늘어뜨리고 아카기로 돌아가는 대신 나가토로 가서 야마모토 대장을 만났다.

야마모토 대장은 불과 며칠 전만 해도 진주만 공격을 반대하던 구사카 소장이 이제는 열렬한 신봉자가 되어 항모 6척이 꼭 필요한데 군령부의 멍청이들이 말귀를 못 알아먹는다면서 울분을 토하는 모습을 흡족하게 바라보았다.

이야기를 듣고 난 야마모토 대장은 자기가 알아서 처리할테니 걱정말라고 구사카 소장을 달랜 다음 아카기로 돌려보냈다.

 

야마모토 대장도 이제 승부수를 띄워야 할 때가 왔음을 깨달았다.

그날 저녁 야마모토 대장은 선임참모 구로시마 가메토 대좌를 불러 다음날 군령부로 가라고 말했다.

구로시마 대좌의 임무는 두 가지로서 첫째는 하와이 공격에 대한 승인을 얻는 것, 둘째는 하와이 공격에 6척의 항모를 투입한다는 약속을 받아내는 것이었다.

타고난 승부사였던 야마모토 대장은 구로시마 대좌의 손에 군령부가 버텨내지 못할 강력한 무기를 쥐어 주었다.

 

다음날인 10월 18일 아침에 구로시마 대좌는 군령부로 날아가 작전과장 도미오카 대좌를 찾았다.

미요 항공참모와 함께 나가토 전쟁연습에 대하여 토의하고 있던 도미오카 대좌를 찾아낸 구로시마 대좌는 하와이 작전에 대한 군령부의 명확한 태도를 즉시 확인하라는 연합함대 사령장관의 명령을 받고 왔다고 말했다.

구로시마 대좌는 개전과 동시에 미함대에 강력한 타격을 가해야만 할 이유를 나열하고 진주만을 반드시 공격해야 하며 공격에 참가할 항공모함은 6척 이상이어야 한다고 말했다.

 

도미오카 대좌는 눈도 깜짝하지 않았다.

8월의 토론 때와 마찬가지로 도미오카 대좌는 논리정연하게 하와이 공격이 부당한 이유를 조목조목 들이댔다.

구로시마 대좌는 도미오카 대좌의 반론을 꾹 참으면서 다 듣고난 후 야마모토 제독이 준 폭탄을 터뜨렸다.

 

"야마모토 대장은 그의 작전이 받아들여지기를 바라고 있다. 나는 만약 이 작전이 받아들여지지 않으면 연합함대 사령장관은 제국을 보위할 임무를 수행할 수 없다고 선언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그럴 경우 그는 자신의 모든 참모들과 함께 사임할 수 밖에 없을 것이다."

 

도미오카 대좌는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옆을 돌아보니 항공참모 미요 중좌도 충격을 받아 멍청한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 순간 도미오카 대좌는 문제가 자신의 능력을 벗어났다는 사실을 깨달았으나 정신을 가다듬고 불타버린 식량창고에서 온전한 낱알을 찾아내는 심정으로 연합함대에 3가지 약속을 요구했다.

 

1. 공격에는 오로지 6척의 항모만 투입하며 더 이상 요구하지 않는다.

2. 6척의 항모에 배치된 함재기 이외에 추가로 해군 항공력을 요구하지 않는다.

3. 공격이 끝나면 제1항공함대는 최대한 빨리 남방작전을 지원한다.

 

도미오카 대좌의 반응을 보며 여유를 찾은 구로시마 대좌는 웃으면서 알았다고 말했으나 도미오카 대좌는 문서로 만든 다음 한사코 서명을 요구했다.

우울한 표정으로 구로시마 대좌의 서명이 들어간 문서를 받아든 도미오카 대좌는 구로시마 대좌를 제1부장 후쿠도메 시게루 소장에게 안내했다.

 

제1부장실로 안내된 구로시마 대좌는 사임 이야기는 빼고 후쿠도메 소장을 설득하려 했으나 실패했고 다시 폭탄을 터뜨릴 수 밖에 없었다.

후쿠도메 소장의 반응도 도미오카 대좌와 비슷했다.

그는 구로시마 대좌를 데리고 3일 전인 10월 15일에 중장으로 진급한 이토 세이치 군령부 차장의 사무실로 갔다.

후쿠도메 소장의 설명을 들은 이토 차장은 즉시 도미오카 대좌를 부른 다음 셋이서 나가노 오사미 군령부 총장의 사무실로 갔다.

구로시마 대좌는 이토 차장의 사무실에서 결과를 기다렸다.

 

나가노 총장의 사무실에서는 후쿠도메 소장이 먼저 말했다.

그는 진주만 계획에 대한 연합함대와 군령부 사이의 토론 과정과 의견이 충돌하는 사안, 자신이 생각하는 진주만 계획의 문제점을 말한 후 연합함대 사령장관이 계획을 받아주지 않으면 사임하겠다며 위협하고 있다고 말했다.

이어서 이토 차장이 이제 결단을 내려야 할 시점으로 연합함대 사령장관이 사임하겠다며 위협하고 있는 사실을 중시해야 한다고 말했다.

도미오카 작전과장에게는 아무도 물어보지 않았으므로 잠자코 있었다.

 

말없이 후쿠도메 소장과 이토 중장의 말을 듣고난 후 나가노 총장이 무겁게 입을 열었다.

 

"야마모토는 이 문제에 대해 누구보다 깊게 연구했네. 그 친구가 그렇게 확신이 있고 성공을 자신한다면 승인하는 것이 최선이라고 생각하네. "

 

이어서 나가노 총장은 두 가지 조건 즉

 

1. 진주만 공격이 남방작전을 방해하지 않고

2. 남방작전에 필요한 해군 항공력을 약화시키지 않는다

 

는 조건을 붙여 작전을 승인했다.

야마모토 제독을 깊이 신뢰하던 나가노 총장으로서는 야마모토가 아닌 다른 사람을 연합함대 사령장관 자리에 앉혀놓고 개전한다는 것은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었다.

 

(군령부 총장 나가노 오사미 대장. 자세한 내용은 여기로)

 

세 사람은 총장실을 나와 차장실로 돌아왔다.

이토 차장이 작전이 승인되었다고 말하자 구로시마 대좌는 뛸듯이 기뻐했다.

구로시마 대좌는 들뜬 목소리로

 

"이제 연합함대 사령장관과 참모들이 모가지를 내놓지 않아도 되겠습니다."

 

라고 떨떠름한 표정을 짓고 있는 후쿠도메 소장에게 말했다.

이렇게 진주만 기습은 실행 50일 전인 1941년 10월 18일에야 최종 승인을 받았다.

 

구로시마 대좌가 승인 소식을 나가토에 알리자 연합함대 참모들은 환호성을 질렀으며 야마모토 제독도 기뻐했다.

야마모토 제독은 구로시마 대좌에게 수고했다면서 도쿄 올라간 김에 좀 쉬고 22일에 복귀하라고 말했다.

 

진주만 기습이 승인됨과 동시에 연합함대 참모들 사이에서 제1항공함대 사령장관 나구모 중장에 대한 비판이 일어났다.

연합함대 참모장 우가키 마토메 소장은 나구모 중장을 경질해야 한다고 주장했으나 야마모토 제독은 받아들이지 않았다.

 

교체하고 싶어도 마땅한 인물이 없었다.

제1항공함대를 이끌만한 인물은 오자와 지사부로 중장 밖에 없었는데 그는 진주만 기습의 최종 승인이 났던 10월 18일에 남견함대 사령장관으로 발령이 난 상태였다.

게다가 나구모 제독은 나가토 회의 이후 아무런 불평불만없이 진주만 기습 준비에 묵묵히 최선을 다하고 있었다. 

 

사실 야마모토 제독은 진주만 기습부대를 직접 지휘하고픈 마음이 굴뚝같았으나 불가능했다.

일본해군의 실전부대를 총지휘하는 연합함대 사령장관으로서 그는 남방작전의 최종 준비 상황도 소홀히 다룰 수 없었을 뿐 아니라 일촉즉발의 긴장된 상황에서 하와이로 몰래 접근하느라 2주일 이상 무선침묵 상태를 유지할 수 있는 지위가 아니었다.

전시도 아닌 상황에서 2주일 이상 연합함대 사령장관같은 중요한 인물의 행방이 묘연하면 즉시 미군의 주의를 끌 것이었다.

결국 진주만 기습의 현장 지휘는 나구모 제독에게 맡길 수 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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