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 개전 결정

 

진주만 공격부대가 동진하는 동안 제1항공함대 사령장관 나구모 주이치 중장은 미국잠수함의 출현에 가장 신경을 썼다.

따라서 많은 수병들이 잠수함 감시에 투입되었다.

하와이로 가는 항로의 절반 동안은 전 병력의 1/4이 항상 전투배치 상태에 있었으며 나머지 절반에서는 1/2이 전투배치 상태에 있었다.

항해 동안 조종사들은 진주만의 모양과 적 함정의 모양을 숙지했으며 특히 뇌격기 조종사들은 진입 및 이탈 경로를 숙지했다.

 

항공참모 겐다 미노루는 일개 중좌에 지나지 않는 자신의 어깨에 드리워진 엄청난 책임에 짓눌려 신경질적인 반응을 보였다.

그는 아카기의 수평폭격대장인 후루카와 이즈미 대위에게 전함의 주포탑을 직격하여 그 아래에 있는 탄약고를 유폭시키라고 말했다.

후루카와 대위는 3,000m 높이에서 떨어뜨리는 수평폭격으로는 그토록 정밀한 폭격이 불가능하다고 반박하자 겐다 중좌는 정신력으로 극복가능한 일이라고 말했다.

그러자 후루카와 대위는 말도 안 되는 일을 강요하지 말라면서 화를 내었다.

 

(제1항공함대의 항공참모 겐다 미노루 중좌. 자세한 내용은 여기로)

 

일본해군 내에서 최고의 폭격수로 불리던 소류의 가나이 노보루 비조는 매일 오전과 오후 한 차례씩 비행복을  갖추어 입고 격납갑판에 주기한 97식 함상공격기의 폭격수석에 올라 눈 아래 펼쳐진 진주만의 광경을 상상하면서 폭격 연습을 했다.

 

진주만 공격부대는 선두에 구축함 4척을 10km 간격으로 나란히 세우고 그 뒤를 항공모함 6척이 2줄로 따랐다.

그 뒤에는 급유함들이 따라갔으며 마지막으로 전함과 중순양함들이 역시 2열로 뒤를 따랐다.

경순양함 아부쿠마와  구축함 5척은 좌우 경계를 맡았다.

잠수함 3척은 원래 함대의 앞쪽을 정찰하도록 되어 있었으나 나구모 중장은 연락이 끊어질까 우려했다.

결국 잠수함들은 하와이를 향해 가는 동안 아카기의 오른쪽 1km 거리에서 항진했다.

밤이나 안개가 끼면 함정 사이의 거리를 줄였다.

 

나구모 중장은 하와이로 가는 도중 안절부절했다.

그는 해상급유와 진형 유지를 걱정했으며 급유함의 검은 연기나 적의 잠수함에 의하여 발견되거나 또는 적이 미리 알고 기다리는 사태를 두려워했다.

하지만 가장 큰 걱정은 막판에 외교교섭이 타결되어 도쿄로부터 공격중지명령이 떨어졌는데 그 명령을 받지 못하고 진주만을 공격하여 나라를 멸망의 구렁텅이로 빠뜨리는 경우였다.

 

제1항공함대의 참모장 구사카 류노스케 소장은 나구모 중장의 걱정을 덜어주려고 애썼으나 효과가 없었다.

구사카 참모장이 작전의 위험이 크긴 하지만 논리적으로 보아 걱정할 이유는 없다는 식으로 말하면 나구모 중장은 고개를 저으며 이렇게 말했다.

 

"자넨 지나치게 낙관적이야."

 

(제1항공함대 사령장관 나구모 주이치 중장. 자세한 내용은 여기로)

 

진주만 공격부대의 조종사들은 낮에는 반복적인 학습과 토론으로 힘든 시간을 보냈지만 밤에는 일반 수병들과 달리 자유시간을 만끽했다.

이들은 저녁 식사 이후에는 장기를 두거나 카드를 치거나 거의 매일 제공되는 술과 안주를 즐기면서 이야기를 나누었다.

 

나구모 중장의 걱정과 달리 태평양 함대의 전투정보실은 일본의 기만작전에 휘둘리고 있었다.

11월 30일 보고에서 전투정보실은 항공모함 아카기와 급유함 간의 통신을 포착했다고 적고 있는데 당시 아카기와 급유함은 전혀 전파를 발신하지 않았으므로 이는 옛날 통신을 다시 틀고 있던 일본의 기만작전에 속고 있다는 증거였다.

 

겐다 중좌는 나구모 중장과 구사카 소장이 히도카프를 떠나기 전에 이미 2번의 공습으로 진주만 기습을 마무리짓기로 결정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는 나구모 중장에게 사고를 유연하게 해야하며 필요에 따라 3번 이상의 공습을 가할 가능성을 염두에 두라고 주장했으나 반응이 시원찮았다.

 

겐다 중좌는 결정적일 때 내놓기 위하여 계획 하나를 작성했다.

진주만 기습 이후 북쪽으로 물러가는 것이 아니라 하와이 남서쪽으로 내려와서 마셜 제도 쪽으로 철수한다는 것이었다.

이럴 경우 진주만 공격부대는 월요일, 화요일은 물론 어쩌면 수요일까지도 진주만에 반복적인 공습을 가할 수 있었으며 만일 미함대가 추격해 올 경우 마셜 제도의 지상발진 항공기들로부터 지원을 받기 쉬웠다.

 

군령부에서는 매일 오전 11시에 진주만 공격부대의 항로에 대한 일기예보를 포함하여 최신 정보들을 전송했다.

전송은 2시간 간격으로 오전 11시, 오후 1시, 오후 3시 하는 식으로 홀수 시각마다 반복되었으며 다른 정보로 바뀔 때까지 지속되었다.

일본항공모함들은 특유의 낮은 아일랜드 때문에 수신 기능에 문제가 있었으나 진주만 공격부대에는 위험하게 보일만큼 높은 함교를 가진 덕분에 수신기능이 뛰어난 전함 히에이와 기리시마가 있어서 수신에 문제는 없었다.

군령부는 또한 일본라디오의 일기예보에도 미리 약속된 문구를 집어넣는 방법으로 진주만 공격부대에 정보를 제공했다.

진주만 공격부대는 엄격한 무선침묵을 실시하고 있었다.

 

도쿄에서는 어전회의를 앞두고 1941년 11월 28일 오후 4시에 연락회의가 열렸다. 

여기서 도고 시게노리 외상은 나가노 오사미 군령부 총장에게 개전  날짜를 알아야 대미 외교를 할 수 있다고 말했다.

나가노 총장은 망설이면서 12월 8일이 예정일이라고 말했다.

도고 외상은 최소한 노무라 주미대사에게는 개전 날짜를 알려야한다고 주장했으나 군령부는 반대했다.

군령부는 노무라 대사가 개전 날짜를 몰라야 마지막 순간까지 미국을 상대로 진지하게 외교적 문제들을 다룸으로써 미국의 주의를 외교적 문제에 붙잡아 두어 비밀을 지키는데 도움을 줄 수 있다고 말했다.

 

진주만 공격부대가 히도카프만을 떠난 이후 날씨는 예상 외로 좋아서 매일 구축함에 대한 급유를 실시할 수 있었다.

하지만 함대 전반에 걸쳐 연료 절약이 엄격하게 실시되었다.

연료 절약을 위하여 난방을 하지 않아 장병들은 함내에서도 모두 두꺼운 옷을 입고 생활했으며 전기 사용도 최소한으로 억제했다.

더운 물도 나오지 않아  모두 찬물로 샤워했으나 연료 적재량의 여유가 있던 쇼가쿠와 즈이가쿠만은 예외적으로 더운물 샤워를 즐길 수 있었다.

 

1941년 12월 1일 오후 2시에 도쿄의 황궁 동실에서는 1941년의 마지막 어전회의가 열려 미국과 영국에 대한 개전을 결의했다.

남방작전에 참가하는 함대들은 이미 움직이고 있었다.

 

괌 침공부대는 11월 29일에 세토 내해를 떠나 오가사와라 제도에 정박했다.

이들은 12월 4일에 오가사와라 제도를 떠나 괌으로 향했다.

 

곤도 노부다케 중장이 지휘하는 제2함대 또한 11월 29일에 세토 내해를 떠나 12월 2일에 타이완의 펑후 제도에 도착했다.

제2함대는 필리핀, 말레이 및 네덜란드령 동인도제도의 연합군 해군 세력을 제거하고 상륙을 지원할 임무를 띄고 있었다.

 

말레이 반도 침공을 지원할 오자와 지사부로 중장의 남파함대는 11월 20일부터 소규모 단위로 출항을 시작했다.

 

남방 작전에 참가한 함대 중에서 가장 규모가 큰 것은 제3함대 사령장관 다카하시 이보우 중장이 지휘하는 필리핀 침공부대로 수송선을 포함하여 100 척에 달했다.

필리핀 침공부대는 11월 22일에 세토 내해를 떠나 25일에 펑후 제도에 도착한 후 12월 8일의 진주만 기습을 기다렸다.

 

다카기 다케오 소장이 지휘하는 남부필리핀지원부대는 11월 24일에 내해를 출발하여 팔라우에 도착했다.

남부필리핀지원부대는 팔라우를 12월 6일에 출발하여 다바오를 침공했다.

 

미군은 이러한 일본해군의 움직임을 주시하고 있었으며 미군이 이들에게 주의를 집중하는 동안 진주만 공격부대는 들키지 않고 하와이까지 갈 수 있었다.

 

11월 28일에는 구축함 우시오와 사자나미, 그리고 급유함 시리야로 이루어진 고니시 가나모 대좌의 미드웨이 파쇄대가 다테야마 항을 떠났다.

미드웨이 파쇄대는 미드웨이를 포격함으로써 비행장에 타격을 입혀 진주만 공격부대의 퇴로를 확보하고 미군의 관심을 진주만 공격부대로부터 떼어놓는 임무를 맡았다.

급유함 시리야의 함장 도고 미노루 대좌는 쓰시마 해전 당시 일본함대를 지휘했던 도고 헤이아치로 제독의 아들이었다.

 

고가 미네이치 중장의 지나방면함대는 중국 작전에 전념하고 있었다.

이들은 육군의 작전을 지원하고 진주만 기습 이후에는 홍콩 점령을 지원했다.

 

호소가야 보시로 중장의 제5함대는 오가사와라 제도를 포함하여 일본의 동쪽 바다를 지켰다.

 

연합함대 사령장관 야마모토 이소로쿠 대장이 직접 지휘하는 연합함대 주력은 전함  6척, 경항공모함 2척, 경순양함 2척 및 구축함 13척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이 강력한 세력은 세토 내해에 머무르면서 일본 본토와 남방 작전의 측면을 방어했다.

Posted by 대사(P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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