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 발진

 

1941년 12월 6일에 거추장스러운 급유대를 떼어버린 진주만 공격부대는 20노트의 속력으로 남하했다.

경순양함 아부쿠마가 앞장섰으며 제17구축대의 구축함 4척이 넓게 펼쳐져 뒤따랐다.

5km 뒤에는 전함 히에이와 기리시마가 나란히 항진했고 전함의 좌우로 6km 떨어진 해상에는 중순양함 도네와 치쿠마가 항진했다.

전함의 5km 후방에서는 6척의 항공모함이 2열로 항진했다.

기함 아카기가 오른쪽 선두에 섰고 1.5km 후방에 카가가 뒤따랐으며 왼쪽에는 소류가 선두에 서고 히류가 뒤따랐다.

쇼가쿠와 즈이가쿠는 카가와 히류의 뒤를 따랐다.

제18구축대의 구축함 3척이 항공모함의 후방을 지켰으며 잠수함 3척은 뒤처져 따라갔다.

 

하와이 시간으로 1941년 12월 7일 오전 2시에 군령부로부터 마지막 정보가 도착했다.

진주만에는 방공기구가 떠있지 않았으며 전함 주변에 어뢰방어망도 없었고 항공기에 의한 장거리 초계도 이루어지지 않고 있었다.

정박 중인 함정은 전함 9척, 경순양함 3척, 수상기모함 3척, 구축함 17척이었으며 경순양함 4척과 구축함 9척은 건선거에 들어가 있었다.

항공모함과 중순양함은 없었다.

 

항공정비병들은 제1차 공격대를 비행갑판에 올려 발진준비를 시작했다.

제2차 공격대는 아직 격납갑판에 있었다.

 

12월 7일 새벽에 미해군의 소해함 콘도르와 크로스빌은 진주만 입구를 초계하고 있었다.

오전 3시 42분에 콘도르의 당직사관 러셀 맥클로이 소위가 뱃머리에서 왼쪽으로 50m 떨어진 해상에서 뭔가를 발견하고 조타하사 로버트 우트릭을 불러 의견을 물었다.

쌍안경을 들여다 본 우트릭은 잠망경이라고 대답했다.

맥클로이 소위는 오전 3시 57분에 주변에 있던 구축함 워드에게 발광신호로 잠항 상태의 잠수함을 발견했다고 보고했다.

 

이틀 전인 12월 5일부터 구축함 워드의 함장을 맡고 있던 35세의 윌리엄 아우터브리지 대위는 총원 전투배치 명령을 내렸다.

워드는 소나로 주변을 수색했으나 아무것도 찾지 못했고 아우터브리지 함장은 오전 4시 35분에 전투배치를 해제했다

 

오전 4시 58분에 진주만 입구의 대잠망이 열리면서 소해정 2척은 항 내로 들어갔다.

당시 잠수함 오인 사건이 많았기 때문에 이 사건에 대해 콘도르나 워드 모두 일지에 기록했을 뿐 보고하지 않았다.

이때 맥클로이 소위가 본 것은 아마도 갑표적 중 1척이며 이 갑표적은 소해정들을 따라 항 내로 잠입했을 가능성이 크다.

대잠망은 오전 8시 40분까지 열려있었다.

 

진주만 공습에 참가할 조종사들의 기상 시간은 오전 5시였으나 일부 조종사들은 3시 30분에 일어나 배 안에 만들어 놓은 신사에 참배하고 마음을 가다듬었다.

아침식사를 마친 조종사들은 마지막 브리핑을 듣기 위하여 비행대기실에 모였는데 칠판에는 최종 확인된 미국함정들의 정박 위치가 그려져 있었다.

아카기의 비행대기실에서는 후치다 미츠오 중좌가 수평폭격에 대하여, 무라타 시게하루 소좌가 뇌격에 대하여, 그리고 이타야 시게루 소좌가 전투기 조종사들에게 요점만 추려 짧게 설명했으며 마지막으로 나구모 주이치 중장이 간단하게 격려사를 했다.

격려사가 끝나자 후치다 중좌는 모두 기립시켜 아카기의 함장 하세가와 기치 대좌에게 경례를 했다.

하세가와 대좌는 경례를 받은 다음

 

"계획에 따라 이함하라."

 

는 명령을 내렸다.

소류를 비롯한 다른 항공모함에서도 비슷한 광경이 벌어졌다.

 

오전 5시 30분에 중순양함 도네와 치쿠마가 각각 1대씩의 수상정찰기를 사출했다.

도네의 정찰기는 라하이나 정박지로, 치쿠마의 정찰기는 진주만으로 향했다.

 

진주만에서 북쪽으로 370km 떨어진 발진해역에 들어선 항공모함들은 5시 58분부터 호위함정들과 함께 바람이 불어오는 동쪽으로 변침하여 24노트의 속력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후치다 중좌는 탑승하기 전에 정비장교로부터 '필승' 이라고 적힌 하얀 머리띠를 받아 헬멧에 둘렀다.

풍속은 50km/hr 였으며 해상에는 2m 높이의 파도가 일고 있었고 항공모함의 비행갑판은 아래위로 5도씩 흔들렸다.

 

오전 6시 5분부터 발진이 시작되었다.

가벼워서 활주거리가 짧은 제로기가 먼저 발진했고 이어서 수평폭격기 또는 급강하폭격기, 마지막으로 뇌격기가 발진했다.

제1차 공격대의 숫자는 원래 뇌격기 40대, 수평폭격기 50대, 급강하폭격기 54대, 제로기 45대로 총 189대였다.

그러나 카가의 수평폭격기 1대, 쇼가쿠의 급강하폭격기 1대와 즈이가쿠의 급강하폭격기 2대는 마지막 점검에서 엔진고장으로 제외되어 7일 새벽에 비행갑판에 올려진 함재기는 185대였다.

이들 중 소류의 제로기 1대는 이함 직후 바다에 추락했으나 조종사는 구축함에 구조되었다.

쇼가쿠의 제로기 1대는 이함 직후 엔진이 고장나서 돌아가야만 했으므로 최종적으로 공격에 참가한 항공기는 183대였다.

제1차 공격대는 15분 만에 발진을 마치고 6시 20분에 대형을 갖추어 오아후로 날아가기 시작했는데 이는 기록적으로 빠른 발함시간이었다.

 

(1941년 12월 7일 아침에 진주만을 공격하기 위하여 아카기에서 이함하는 제로기. http://en.wikipedia.org/wiki/Attack_on_Pearl_Harbor)

 

제1차 공격대가 발진을 마치자 진주만 공격부대는 다시 남쪽으로 변침하여 20노트의 속력으로 항진했다.

항공정비병들은 제2차 공격대를 비행갑판에 올려 발진준비를 했으며 비행대기실에서는 조종사에 대한 브리핑이 실시되었다.

오전 7시 5분부터 항모들이 다시 동쪽으로 변침하여 바람을 안고 달리기 시작했고 제로기를 필두로 제2차 공격대가 이함했다.

제2차 공격대는 수평폭격기 54대, 급강하 폭격기 81대, 제로기 36대 등 총 171대로 이루어져 있었으나 카가와 소류의 급강하폭격기 각 1대와 히류의 제로기 1대가 엔진 이상으로 빠져 168대가 비행갑판에 올려졌다.

이들 중 히류의 급강하폭격기 1대가 이함 직후 엔진 고장으로 탈락하여 총 167대가 공격에 참가했다.

 

그리하여 제1차 공격대가 이함을 시작한지 90분 만에 350대에 달하는 전체 공격대가 발진을 마쳤다.

항공모함의 승조원들은 발진이 진행되는 동안 계속 손을 흔들며 제2차 공격대의 마지막 항공기가 완전히 시야에서 사라질 때까지 만세를 불렀다.

 

전함 히에이와 기리시마, 중순양함 도네와 치쿠마에서는 오전 6시 30분에 수상정찰기를 사출하여 남쪽으로 파견했다.

이들은 오아후 방면으로부터 진주만 공격부대를 향하여 북상하는 미군의 항공기나 수상함정이 있는지 감시했다.

Posted by 대사(P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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