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9. 제3차 공습

 

진주만 기습을 둘러싼 오래된 신화의 하나가 일본군이 제3차 공습을 실시하여 진주만의 해군기지 자체를 타격하지 않은 것이 큰 실수라는 주장이다.

일부는 기지타격이 함정공격보다 더 큰 효과를 가져와 태평양함대를 미본토로 물러나게 만들고 전쟁을 상당히 연장했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결론부터 말하면 아무리 진주만 기습이 전략적으로 실익이 없었고 결국에는 일본에게 엄청난 재앙이 되었다지만 제3차 공습을 실시하지 않았다고 일본을 비난할 수는 없다.

 

먼저 알아두어야 할 것은 제3차 공습을 실시할 시간 여유가 없었다는 점이다.

제2차 공격대의 마지막 함재기가 착함한 시간은 12월 7일 오후 12시 15분이었는데 그날 하와이 근해의 일몰 시간은 오후 5시 12분이었다.

사전 계획이 없는 상태에서 각 항공모함에 연락하여 제3차 공격에 가용한 기체 수를 확인하고, 거기에 맞추어 목표를 결정하여 할당하고, 제3차 공습에 대한 사전 준비나 학습이 전혀 되어 있지 않던 조종사들에게 브리핑을 하여 임무를 숙지시키고, 함재기에 재급유하고 재무장시킨 다음 예열하고 발진시켜 제3차 공습을 실시하고 일몰 전에 귀함시킨다는 것은 시간적으로 불가능했다.

 

제1항공함대의 항공참모인 겐다 미노루 중좌도 이 사실을 알고 있었다.

겐다 중좌도 철수에 반대했지만 제3차 공습을 요구한 것은 아니었다.

놓쳐버린 미국 항공모함에 집착하던 그는 하와이 북방에 며칠이고 머무르면서 미국 항공모함을 끌어들여 격멸하자고 주장했다.

물론 제1항공함대 사령장관 나구모 주이치 중장은 이 주장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제1항공함대의 항공참모 겐다 미노루 중좌. 자세한 내용은 여기로)

 

나구모 중장의 기함인 아카기 함상에서 후치다 미츠오 중좌와 나구모 중장 사이에 제3차 공습을 둘러싼 치열한 논쟁이 있었다는 이야기는 후치다가 1963년에 미국의 역사학자 고든 프렌지와의 인터뷰에서 진술한 일방적인 주장일 뿐이다.

그날 아카기 함상에 있었던 사람들 모두 그러한 논쟁이 있었다는 사실을 부정했으며 후치다 자신도 종전 직후 미군에게 심문받을 때는 그러한 논쟁이 있었다는 말을 하지 않았다.

 

(후치다 미츠오 중좌. 자세한 내용은 여기로)

 

당시 조종사들 사이에 제3차 공습을 하자는 주장이 있었던 것은 사실이나 여러 사정을 알고 있는 좌관급의 선임 조종사들은 대체로 옳고 그름을 떠나 제3차 공습이 시간적으로 불가능하다고 생각했다.

하물며 공격대 전체를 지휘했던 후치다 중좌가 이런 명백한 사실을 모르거나 무시하고 나구모 중장에게 제3차 공습을 요구하면서 논쟁을 벌였을 가능성은 희박하다.

 

설사 시간적으로 제3차 공습이 가능했다고 쳐도 나구모 중장이 받아들일 이유가 없었다.

일본군은 하와이의 미군 항공력을 실제보다 훨씬 강하다고 믿고 있었으며 공격대가 미군 항공력에 큰 피해를 입혔음에도 불구하고 충분히 반격을 가할 능력이 있다고 보았다.

공습을 피한 미국 항공모함의 위치는 여전히 오리무중이었으며  미국 잠수함 또한 눈에 불을 켜고 일본함대를 찾고 있을 것이었다.

이미 충분한 전과를 올린 나구모 중장이 커다란 위험을 무릅쓰고 일몰 때까지 하와이 근해에 머물면서 제3차 공습을 실시할 까닭이 없었다.

 

(제1항공함대 사령장관 나구모 주이치 중장. 자세한 내용은 여기로)

 

제3차 공습을 실시하기에는 함정들의 연료도 부족했다.

미국 항공모함 격멸에 집착하던 겐다 중좌는 급유대를 남하시켜 해상급유를 받으면서 미국항모들을 기다리자고 말해 나구모 중장을 경악하게 만들었다.

 

제3차 공습에 나설 전력 자체도 강력하지 못했다.

후치다 자신의 주장에 따르면 그는 미군의 치열한 반격이 예상되는 제3차 공습에는 움직임이 둔한 함상공격기는 빼고 제로기의 호위 하에 급강하폭격기만 투입할 생각이었다.

편제상 제1항공함대는 총 144대의 급강하폭격기를 보유하고 있었으며 공습에 실제로 참가한 것은 130대였다.

이들 중 15대가 격추되고 58대가 피해를 입었다.

따라서 단순 계산으로 제3차 공습에 참가할 수 있는 급강하 폭격기는 71대이며 일부가 급히 수리를 마치고 참가한다고 해도 제3차 공습에 참가하는 급강하폭격기의 숫자는 제2차 공습에 참가했던 79대를 넘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준비를 갖춘 미군은 제3차 공격대가 접근하면 레이더로 탐지한 다음 아직 50대가 넘는 가용 전투기들을 모두 띄워 요격했을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제3차 공격대가 충분한 전과를 올릴 것으로 믿기는 어렵다.

 

해군공창같은 지상기지는 폭장량이 적은 함재기의 공습으로 큰 피해를 입히기 어렵다.

일본은 미드웨이 해전에서 36대의 급강하폭격기와 36대의 수평폭격기를 동원하여 손바닥만한 미드웨이를 폭격하면서 이렇다 할 피해를 입히지 못했으며 하나뿐인 활주로의 기능을 정지시키는 데도 실패했다.

해군공창같은 거대한 지상목표는 폭장량이 많은 4발 중폭격기를 대량으로 동원하여 반복적으로 폭격해야 제대로 피해를 입힐 수 있다.

 

제3차 공습의 목표로 가장 많이 거론되는 것이 진주만의 중유 저장소이다.

당시 진주만에는 27개씩 두 곳, 합계 54개의 탱크에 중유를 저장하고 있었다.

 

휘발유나 천연가스와 달리 중유는 탱크 1개가 파괴된다고 순식간에 주변의 모든 탱크가 유폭을 일으키지 않는다.

중유는 끓는점이 350도에 달하는 불이 붙기 어려운 물질이며 실제로 전함 중에서는 어뢰를 막는 수선하 방뢰구역에 중유를 채우는 경우도 있다.

따라서 급강하폭격기들은 중유 탱크마다 일일이 폭탄을 명중시켜야 했다.

 

제2차 공격대의 명중율을 생각해보면 제3차 공습에 투입된 급강하폭격기를 모두 중유 저장소 폭격에 투입해도 미군기의 요격과 지상의 대공포화를 뚫고 중유 탱크 54개를 모두 명중시킬 것이라고 장담하기는 어렵다.

저장된 중유의 절반만 건져도 태평양함대는 어떻게든 진주만에 머물 수 있었을 것이다.

 

(진주만의 중유 저장소. http://karbuz.blogspot.kr/2006/10/oil-logistics-lesson-from-wwii-2.html)

 

만일 급강하폭격기들이 놀라운 명중율을 과시하여 중유를 모두 불태워버리면 아시아함대 사령관 토머스 하트 대장의 지적처럼 태평양함대는 일시적으로 미본토 서해안으로 물러나야만 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럴 경우라도 이들이 진주만으로 돌아가는데는 그리 긴 시간이 필요치 않았다.

 

기습 당시 진주만에는 많은 중유가 저장되어 있지 않았다.

진주만의 중유 저장량은 56만 3천톤으로 부피로 환산하면 350만 배럴 정도였다.

 

진주만 기습 당시 태평양함대 기지사령관이었던 윌리엄 칼훈 소장의 증언에 따르면 진주만 기습 직후 9일 동안 함대에 75만 배럴, 즉 하루 평균 83,000 배럴을 급유했다고 한다.

이건 기름을 많이 퍼먹는 전함 8척이 움직이지 못하는 상태에서의 소비량이므로 전함들이 건재하면서 활발하게 훈련을 하던 진주만 기습 직전에는 중유 소비량이 더 많았으면 많았지 적지는 않았을 것임을 유추할 수 있다.

즉 기습 당시 진주만의 중유 저장량은 최대한으로 잡아도 40일치 남짓한 분량이었다.

 

원래 전방 기지의 중유 비축량은 그렇게 많지 않다.

진주만의 중유 비축량은 태평양전쟁 당시 최고로 올랐을 때에도 약 140만톤으로 880만 배럴 정도였다.

오키나와 전투 초기 중유를 가장 많이 쓰던 1945년 4월 4일부터 24일까지 3주일 동안 제58기동부대와 오키나와 침공함대가 평균적으로 하루에 약 22만 배럴을 소모했으니 진주만의 중유 저장량은 40일 치에 불과했다.

 

오키나와 침공 당시 태평양함대는 첫달에만 600만 배럴 이상의 중유가 필요할 것이라고 보았는데 발진기지인 울리시의 중유 저장량은 10만 배럴에 지나지 않았다.

사이판, 괌, 콰절린에 저장된 중유가 90만 배럴이었으며 진주만에 500만 배럴이 있었다.

오키나와 전투에서 태평양함대는 900만 배럴에 달하는 중유를 소모했는데 함정들은 대부분 민간 유조선이나 해군 소속의 급유함으로부터 직접 급유를 받았다.

 

함대가 울리시에 정박해 있을 때에는 진주만 또는 미본토에서 중유를 싣고 온 민간 유조선이 함정들에게 직접 급유했다.

작전이 시작되어 함대가 출동하면 미본토나 진주만에서 중유를 싣고 온 민간 유조선들은 울리시에서 해군 소속의 급유함에 중유를 옮겨 싣었고 해군 급유함들이 해상으로 나와 함대에 급유하러 다녔다.

태평양함대는 오키나와 전투 당시 함대에 급유하는 용도로 급유함 39척을 동원했다.

 

울리시까지 중유 수송을 맡았던 민간 유조선은 대부분 T2-SE-A1 급으로 전쟁 기간 중 무려 481척이 건조되었으며 약 12만 배럴의 중유를 수송할 수 있었는데 해군의 급유함들 또한 용량이 비슷했으므로 1:1로 중유를 주고 받을 수 있었다.

미국 해사국은 전쟁 기간 중 705척의 유조선을 건조했는데 이들 중에는 리버티선을 개조한 유조선 62척도 있었다.

리버티형 유조선은 약 64,000 배럴의 중유를 수송할 수 있었다.

 

진주만 기습 당시 진주만의 중유 저장량이 적었다는 것 이외에도 또하나 생각할 점은 미국이 그 정도 양은 금방 채울 능력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이다.

기습 이전의 몇 달 동안 태평양함대는 활발하게 훈련을 하면서 하루에 최소한 83,000 배럴, 1달에 250만 배럴 이상을 소모하고 있었지만 진주만의 중유 저장량은 줄어들지 않았다.

이 말은 유조선들이 미본토로부터 매달 250만 배럴 이상의 중유를 하와이로 수송하고 있었다는 뜻이다.

여기에 더하여 진주만 기습 당시 진주만의 중유를 꺼내 함대에 급유할 수 있는 급유함들의 용량이 76만 배럴이었다고 한다.

하와이와 미본토의 거리를 생각하면 급유함이 1달에 1번은 충분히 왕복할 수 있다.

 

즉 진주만 기습 당시 미국은 매달 최소한 300만 배럴 이상의 중유를 미본토에서 하와이로 수송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었으며 진주만의 중유가 홀랑 타버린다고 해도 넉넉잡고 2달이면 원래 있던 350만 배럴보다 훨씬 많은 양을 보충할 수 있었다.

만일 미본토 서해안의 유조선을 약간만 추가로 동원하면 1달 이내에 보충하는 것이 가능했다.

따라서 제3차 공격대가 진주만의 중유를 홀랑 태워버린다고 해도 미본토 서해안으로 물러났던 태평양함대는 1942년 1월 이후에는 언제든지 진주만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이렇듯 제3차 공습은 시간적으로 불가능했으며 설사 가능했다고 치더라도 예상되는 공격대의 피해에 비하여 별다른 효과를 기대할 수 없었다.

 

- 참고 문헌 및 웹사이트

 

<History of U.S. Naval Operations in World War II, Vol. III: The Rising Sun in the Pacific, 1931--April 1942> Samuel Eliot Morison, 1953

<The Organization and Order of Battle of Militaries in World War 2, Vol.4 - Japan> Charles D. Pettibone, Trafford publishing, 2007

<At Dawn We Slept :: The Untold Story of Pearl Harbor> Gordon W. Prange, McGraw Hill, 1981

<Guarding the United States and Its Outposts>Stetson Conn, Rose C. Engelman, Byron Fairchild, University Press of the Pacific, 1964

<Tora!Tora!Tora! Pearl harbor 1941>,Mark Stille, Osprey Publishig, 2011

<Pearl Harbor, FDR Leads the Nation into War> Steven Gillon, Basic Books,2011

<Why Air Forces Fail> Robin Higham & Stephen Harris, The University Press of Kentucky, 2006

<Pearl Harbor, wy, How Fleet Salvageand final Appraisal>Homer Wallin, Naval History Division, 1968

<Battleship Arizona> Paul Stillwell, Naval Institute Press, 1991

 

<휴맨카인즈 승리와 패배- 2. 펄 하버>A.J. Barker 지음, 이창록,박대련 옮김, 동도문화사, 1982년

<타임라이프북스 - 회오리치는 일장기> 한국일보-타임라이프사, 1981년

<제2차세계대전해전사> 이정수. 남영문화사, 1981년

<니미츠 전기> E.B 포터 지음, 김주식 역, 신서원, 1997년

<연합함대 그 출범에서 침몰까지> 박재석, 남창훈 지음, 가람기획, 2005년

<대동아전쟁비사-제1권 태평양편> 한국출판사, 1971년

<대동아전사-제6권 태평양전쟁> 오바다 마츠시로 지음, 유준수 옮김, 한양문화사, 1974년

<실록대하소설 태평양전쟁 1 - 진주만 기습과 미드웨이 해전> 이호원 지음, 한림출판사, 1975년

 

http://www.wikipedia.org/

http://blog.naver.com/mirejet (도위창님 블로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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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 의의

 

진주만 기습은 전술 및 작전술적 수준에서 보았을 때 해전사에 길이 남을만한 성공적인 대규모 기습이었다.

일본연합함대 사령장관 야마모토 이소로쿠 대장은 여러 척의 항공모함으로부터 발진한 다수의 함재기를 집중 운용하여 전력을 극대화한다는 새로운 개념으로 대담한 기습을 구상하고 계획을 수립한 후 기밀을 유지하면서 현실화시켰다. 

일본함대는 5,600km 에 달하는 북태평양 항로를 들키지 않고 항해하는데 성공했으며 중유를 채운 드럼통을 항공모함 내부에 싣는 창의성을 발휘하여 짧은 항속거리를 극복했다.

일본군은 진주만의 얕은 수심을 극복하기 위하여 어뢰를 개량했으며 조종사들, 특히 뇌격기 조종사들은 맹훈련을 통하여 지형상의 어려움을 극복하고 실전에서 뛰어난 명중율을 보였다.  

 

(진주만 공격부대의 항로. http://en.wikipedia.org/wiki/Attack_on_Pearl_Harbor)

 

일본함대는 어려움을 뚫고 공습 가능 거리까지 몰래 접근하여 결정적인 일격을 가했다.

공격대는 기습에 성공하여 가벼운 피해만 입으면서 미태평양함대의 주력을 단번에 무력화시켰다.

진주만 기습이 성공하면서 일본군은 측면의 위협을 걱정하지 않고 남방작전에 전념할 수 있었으며 예정보다 훨씬 빠른 3개월 만에 제1단계를 마무리지었다. 

 

하지만 진주만 기습을 전략적 수준에서 바라보면 다른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

야마모토 제독은 남방작전의 측면 위협을 제거하기 위하여 진주만 기습을 단행했다.

그러나 사실 태평양함대는 진주만 기습이 없었더라도 남방작전을 방해할 수 없었다.

 

미군의 오렌지 계획에 따르면 일본과 전쟁이 벌어질 경우 태평양함대는 즉시 출격하여 마셜제도를 공격하게 되어 있었다.

그러나 1941년 5월에 태평양함대 세력의 상당 부분이 대서양으로 빠져 나가자 태평양함대는 약화된 상태로 연합함대와 정면대결을 할 수 없다고 판단하여 계획을 수정했다.

전쟁 발발시 마셜제도를 공격한다는 점은 그대로지만 즉시 출격하지 않고 대서양에서 증원 함대가 도착하기를 기다려 함께 출격한다는 것이었다.

수정된 계획에 따르면 마셜 제도 공격은 아무리 빨라도 개전 이후 3개월이 지나서야 실시하게 되어 있었는데 일본은 3개월 만에 남방작전의 제1단계를 마무리지었다.

 

실제로 진주만 기습이 성공한 데에는 이러한 사실이 영향을 끼쳤다.

태평양함대가 연합함대에 정면으로 도전할 수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던 미군 지휘관들은 일본이 위험을 무릅쓰고 진주만까지 찾아와서 허약한 함대를 공격할 것이라고 생각하지 못했다. 

 

일본은 진주만 기습을 통하여 해전의 패러다임을 바꾸었다.

전함은 함대 주력의 지위에서 물러나고 항공모함이 그 자리를 물려받았다.

해전의 패러다임을 바꿈으로써 일본은 스스로 진주만 기습의 의미를 퇴색시켰다.

 

집중운용되는 함재기의 무시무시한 위력을 겪어본 미해군은 진주만의 연기가 채 걷히기도 전에 전함 중심 교리를 미련없이 버리고 항공모함 중심 교리로 갈아탔다.

항공모함은 피해를 면한데 비해 전함은 쓰고 싶어도 쓸 수가 없었기 때문에 교리의 급격한 전환이 별다른 저항없이 하루아침에 이루어졌다.

그리하여 1941년 12월 7일 아침까지만 해도 함대의 꽃이자 주력이었던 전함들, 특히 속력이 느린 구형전함들은 순식간에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인 2선급 전력으로 추락했다.

 

실제로 1942년 6월 초의 미드웨이 해전 당시 태평양함대는 최대 7척(메릴랜드, 테네시, 펜실베이니아, 콜로라도, 뉴멕시코, 미시시피, 아이다호)의 구형전함을 동원할 수 있었다.

그러나 태평양함대 총사령관 체스터 니미츠 대장은 항공모함 기동부대에 구형전함을 포함시키라는 미함대총사령관 어네스트 킹 대장의 권고를 무시하고 순양함과 구축함의 호위를 받는 항공모함 기동부대로 미드웨이 해전을 치렀다.

속력이 느리고 어뢰에 취약한 구형전함은 항공모함 기동부대에 없는 것이 낫다고 본 것이었다.

구형전함은 1943년 이후 상륙작전시 함포사격을 담당하는 새로운 역할을 찾았지만 함대의 주력이라는 옛 영광을 되찾지는 못했다.

 

미해군의 항공모함 중심 교리는 철저하여 항모기동부대와 같이 행동할 수 있는 고속전함도 찬밥신세를 면하지 못했다.

태평양 함대가 사보섬 해전에서 중순양함을 4척이나 상실하자 킹 제독은 대신 고속전함들을 보내 주었다.

그러나 니미츠 제독은 고마워하기는 커녕 가뜩이나 급유함이 모자라는데 고속전함이 중순양함보다 기름을 많이 퍼먹는다고 타박했다.

 

진주만 기습에서 살아남은 태평양함대의 항공모함은 1942년 초에 중부 태평양의 일본군 기지를 공격했고 4월에는 도쿄를 공습하여 일본인에게 진주만 기습에 버금가는 충격을 안겨 주었다.

1942년 5월 초에는 산호해 해전에서 개전 이후 최초로 일본군의 전진을 막아내었으며 6월 4일에는 미드웨이 해전에서 일본의 주력 항공모함 4척을 격침하여 연합함대에게 치명타를 먹였다.

 

항구에서 공격을 받았기 때문에 숙련된 승조원이 대부분 살아남았다.

진주만 기습으로 미해군은 3,000 명 가까운 사상자를 기록했지만 그나마 다행이었다.

미함대가 마셜 제도로 출격하여 일본함대와 해상결전을 벌였다면 당시 전력 차로 보아 진주만 기습보다 훨씬 큰 피해를 입었을 것이다.

니미츠 제독은 진주만 기습 당시 일본함대의 접근을 알고 태평양함대가 진주만을 떠나 해전을 벌였으면 대부분의 함정이 침몰하고 사상자가 20,000 명에 달했을 것이라고 추산했다.

다행히 항구에서 공격당했기 때문에 숙련된 승조원이 대부분 살아남아 이후 무섭게 팽창하는 미함대의 기간 요원이 되었다.

진주만에서 숙련된 승조원이 대부분 살아남았음에도 급팽창한 미함대는 1943년 후반기부터 승조원의 미숙함 때문에 고생했다.

만일 전쟁 초기에 태평양함대의 숙련된 승조원 20,000명을 상실했다면 어려움은 훨씬 컸을 것이다.

 

진주만 기습 당시 태평양 함대의 가장 큰 관심사는 승조원의 훈련이었다.

이는 함대의 전투력 증강에도 직결되지만 앞으로 급팽창할 미함대의 기간 요원을 육성한다는 의미가 컸다. 

따라서 당시 태평양함대는 승조원의 훈련에 가장 높은 우선 순위를 두고 있었으며 정박 중인 함대의 안전 확보나 초계 등은 우선 순위가 떨어졌다.

카탈리나 정찰비행정도 훈련을 위하여 초계 비행을 늘리지 않은 면이 있으며 이는 진주만 기습의 성공에 중요한 요인이 되었다.

해상결전 대신 항구에서 공격을 당함으로써 태평양함대는 그렇게 애지중지하던 승조원을 대부분 구할 수 있었다.

 

격침된 전함 4척 또한 항구에서 격침된 관계로 2척은 인양하여 재취역할 수 있었으나 승조원에 비하면 부차적인 이익이었다.

미국은 태평양전쟁 기간 동안 정규항공모함 17척, 경항공모함 9척, 호위항공모함 76척, 고속전함 8척, 중순양함 12척, 경순양함 33척, 구축함 347척, 호위구축함 417척, 잠수함 205척을 취역시켰다.

이런 엄청난 전력증가에 2선급 전력인 구형전함 2척이 추가되었다고 한들 큰 의미는 없었다. 

 

항공기 또한 마찬가지로 전쟁 중 30만대가 넘는 군용 항공기를 생산한 미국에게 200대가 채 되지 않는 항공기의 손실은 큰 타격이 아니었다.

실제로 미군은 진주만 기습 직후 하와이에 항공기들을 대거 파견했다.

따라서 하와이의 항공기 숫자는 진주만 기습이 있은지 2주일 만에 기습 이전의 수준에 도달했고 이후 증강되었다.

전략적으로 보아 진주만 기습은 일본에게 별다른 군사적 이익을 안겨주지 못했다.

 

국가 대전략의 견지에서 보면 진주만 기습은 일본에게 엄청난 재앙이었다.

진주만 기습으로 격노한 미국인들은 하나로 똘똘 뭉쳐 전쟁에 임했으며 일본에게 무조건 항복을 받아낼 때까지 전열이 흐트러지지 않았다.

 

(진주만 기습 다음날 의회에서 연설 중인 루스벨트 대통령. http://en.wikipedia.org/wiki/Infamy_Speech)

 

일본이 미군을 공격하지 않고 영국과 네덜란드만 상대로 전쟁을 벌였어도 결국 미국이 참전했을 가능성이 높다.

하지만 그럴 경우 진주만 기습을 당했을 때처럼 거국적인 일치단결을 이루지 못했을 것이며 전쟁이 길어지면 피로감 또한 빨리 나타났을 것이다.

그랬다면 적당한 때에 협상으로 전쟁을 끝낼 수 있었을지 모르며 어떤 경우라도 실제 역사보다는 일본에게 좋은 결과로 끝났을 가능성이 많다.

그러나 진주만 기습 이후에는 일본에게 살아남을 기회가 없었다.

 

미국의 참전은 소련의 생존과 더불어 제2차 세계 대전의 승패를 결정한 사건이었다.

일본은 진주만을 기습함으로써 미국의 참전을 초래하여 제2차 세계대전의 승패를 결정지었다.

전쟁의 승패를 가르는 중요한 전투를 결전이라고 부른다면 진주만 기습이야말로 제2차 세계대전의 승패를 가른 결전이었다.

진주만 기습의 진정한 의의는 그것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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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7. 선전포고

 

1941년 12월 7일 오후 2시 25분, UP(Unired Press) 통신사는  방송국과 신문사에 다음과 같은 긴급 전문을 발신했다.

 

"워싱턴 - 백악관에서 일본이 진주만을 공격했다고 발표하다."

("Washington - White House announces Japanese have attacked Pearl Harbor.")

 

루스벨트 대통령이 프랭크 녹스 해군장관으로부터 진주만 기습을 알리는 전화를 받은지 37분 후, 백악관의 언론비서관 스티브 얼리가 3대 통신사에 진주만 기습을 알리는 대통령의 성명을 읽어주려고 동시 전화를 연결한 지 3분 후였다.

 

1분 후인 오후 2시 26분에 라디오 방송국인 WOR 이 다저스 대 자이언츠의 풋볼 경기 중계 방송을 중단하고 UP 통신사의 전문을 그대로 읽었다.

이로써 WOR 은 대중 매체 중 처음으로 진주만 기습 소식을 전했다.

2분 후인 2시 28분에는 NBC 방송국이, 2시 31분에는 CBS 방송국이 정규 프로그램을 중단하고 진주만 기습 소식을 전했다.

 

신문사들은 호외를 찍어내기 시작했다.

가장 먼저 호외를 발간한 신문사는 애틀랜타 저널로 오후 4시 40분에 나왔다.

진주만 기습의 소식은 하와이와의 지리적 거리와는 반대로 워싱턴이 있는 미동부에서 시작하여 서부로 퍼져나가는 양상을 보였다.

실제로 미서부에서 가장 먼저 호외를 발행한 것은 로스엔젤레스 타임즈였는데 오후 2시 20분에 나왔다.

미서부 시간은 동부보다 3시간이 늦으므로 동부시간으로는 오후 5시 20분이었다.

라디오나 지인의 전화를 통하여 진주만 기습 소식을 접한 사람들이 거리로 뛰쳐나와 앞다투어 호외를 사 보았다.

일요일에 평균적으로 25,000 부 정도 판매하던 로스엔젤레스 타임스는 이날 오후에 150,000 부를 판매했다.

 

(진주만 기습을 알리는 로스엔젤레스 타임즈 호외. http://edpadgett.blogspot.kr/2011/12/los-angeles-times-headline.html)

 

덕분에 신문팔이 소년들은 평생에 다시 없을 횡재를 했다.

이들은 평소 신문을 1부당 3센트에 공급받아 5센트를 받고 팔았는데 이날은 25센트, 심지어 더 불러도 순식간에 팔리는 바람에 신문 보급소로 달려가 다시 받아와야 했다.

많은 소년들이 3개월 동안 한푼도 쓰지 않고 매일 부지런히 일해야 겨우 만질 수 있을만한 목돈을 이날 오후 반나절만에 벌었다.

 

진주만 기습의 뉴스는 해외로도 퍼져나갔다.

1941년 12월 7일 일요일 저녁에 영국수상 윈스턴 처칠은 주영 미국대사 존 위넌트, 루스벨트 대통령의 특사인 애버럴 해리먼 및 그의 부인과 함께 관저에서 저녁 식사를 하고 있었다.

 

(영국수상 윈스턴 처칠. 자세한 내용은 여기로)

 

오후 9시가 가까워오자 급사가 라디오를 켰다.

이 15달러짜리 라디오는 루스벨트 대통령의 보좌관인 해리 홉킨스가 특사 자격으로 영국을 방문했을 때 선물한 것으로 처칠 수상은 이 라디오로 항상 저녁 9시 BBC 뉴스를 들었다.

런던은 미국 동부시간보다 5시간 빠르므로 런던의 오후 9시는 워싱턴의 오후 4시이며 하와이의 오전 10시 30분이다.

 

9시 뉴스가 시작되고 몇 분 후 아나운서가 정규 뉴스를 중단하고 속보를 전했다.

 

"루스벨트 대통령은 일본군이 진주만에 있는 미함대의 하와이 기지를 폭격했다고 발표했습니다."

("President Roosevelt has announced that the Japanese have bombed the Hawaiian base of the United States fleet at Pearl Harbor.")

 

해리먼이 놀라서 소리쳤다.

 

"맙소사, 그들이 진주만을 공격했다."

 

그러자 누군가 말했다.

 

"아니, 그것은 펄 리버였습니다."

 

처칠 수상이 말했다.

 

"맞아, 맞아, 우리도 들었소. 그들이 진주만의 미군을 공격했어."

 

처칠 수상은 일어나 라디오 앞에 가서 잠시 듣더니 위넌트 대사에게 말했다.

 

"우리는 일본에게 선전포고할 것이오."

 

당시 일본은 말레이도 공격했지만 아직 그 뉴스는 수상에게 도달하지 않은 상태였다.

수상의 말에 놀란 위넌트 대사는 그를 말렸다.

 

"이런, 라디오 뉴스를 듣고 선전포고를 할 수는 없습니다."

 

위넌트 대사는 수상에게 루스벨트 대통령과 전화를 연결해 주겠다고 말했다.

몇 분 내로 수상과 위넌트 대사는 관저의 작전실(war room)로 들어가 루스벨트 대통령과 통화했다.

 

"대통령 각하, 일본이 뭐 어쨌다는 겁니까?"

 

처칠 수상이 말문을 열자 방금 참모회의를 마친 대통령이 대답했다.

 

"틀림없는 사실이오. 그들이 진주만에서 우리를 공격했습니다. 우리는 이제 한배를 탄 거요."

("It's quite true. They have attcked us in Pearl Harbor. We are all same boat now.")

 

대통령은 다음날 의회에 선전포고를 요청할 것이라고 말했다.

처칠 수상은 전율했다.

그는 목소리가 들뜨지 않도록 조심하면서 루스벨트 대통령에게 신의 가호를 빈다고 말하고 전화를 끊었다.

수상은 훗날 회고록에 이렇게 적었다.

 

"이로써 일이 확실히 단순해졌다. 미국이 우리 편에 섰다는 것이 나로서는 가장 큰 기쁨이었다. 나는 바로 그때 그 순간부터 미국이 전쟁에 뛰어들었으며 끝장을 볼 때까지 철저하게 싸울 것임을 알았다. 그때 이미 우리가 이긴 것이다!...히틀러의 운명은 결정되었다. 무솔리니의 운명은 결정되었다. 그리고 일본인들은, 갈려서 가루가 될 것이었다."

("This certainly simplifies things. To have the Unite States at our side was to me the greatest joy. Now at this very moment I knew the United States was in the war, up to the neck and in to the death. So we had won after all!.. Hitler's fate was sealed. Mussolini's fate was sealed. As for the Japanese, they woud be ground to powder.")

 

반면 영국 국민들은 진주만 기습 소식에 처칠 수상처럼 기뻐하지 않았으며 담담하게 받아들였다.

가장 큰 이유는 대부분의 영국인들이 하와이를 중요한 군사기지라기보다 단순히 휴양지로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에 진주만 기습이 미국인에게 안겨준 엄청난 충격과 거기에 따르는 극심한 분노를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또한 미국이 일본과 전쟁을 하게 되면 영국의 생명선인 해상 교통로를 지켜주던 대서양의 함정을 태평양으로 가져가 버리고 영국과 소련에 대한 렌드리스를 줄일지 모른다는 걱정도 있었다.

물론 이것은 기우에 지나지 않았으며 역사는 처칠 수상이 옳았음을 증명했다.

 

독일 총통 히틀러는 베를린에서 북서쪽으로 720km 떨어진 숲 속에 자리잡은 지하벙커인 늑대소굴에서 진주만 기습 소식을 들었다.

그가 늦은 저녁을 먹고 장군들과 함께 동부전선에 대하여 토의를 하고 있을 때 통신장교가 뛰어 들어와 진주만 기습을 알렸다.

히틀러는 기뻐했다.

 

"전환점이다! 이제 우리에겐 지난 3,000년간 한번도 정복당하지 않았던 동맹국이 생겼다."

 

히틀러는 미국이 유대인들의 지배를 받고 열등한 흑인들로 더럽혀진 주제에 터무니없이 과대평가된 국가라고 생각했다.

그는 미국이 일본과 전쟁을 벌이게 되면 대서양의 함정이 태평양으로 전환배치될 뿐 아니라 유보트가 미국함정인지 영국함정인지 구별한 후에 공격할 필요가 없어짐으로써 대서양 전투에서 독일이 유리해질 것이라고 지엽말단적으로 생각했다.

히틀러는 거대한 잠재력을 가진 고도 공업국가인 미국의 참전이 가지는 무시무시한 의미를 이해하지 못했다.

 

이탈리아 총리 무솔리니 또한 진주만 기습 소식을 듣고 기뻐했다.

무솔리니도 히틀러와 마찬가지로 미국을 과소평가했는데 그는 특히 루스벨트 대통령의 신체적 결함을 들어 그와 그가 이끌던 국민을 폄하했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역사상 어떤 국민들도 마비 환자에게 통치를 받은 적이 없다. 역사를 돌이켜 볼 때 왕들 중에는 대머리도 있었고 뚱보도 있었고 미남도 있었고 심지어 바보도 있었다. 그러나 화장실에 가거나 식사를 할 때마다 남의 도움을 받아야 하는 왕은 결코 없었다."

 

일본에서는 8일 오전 6시에 대본영이 미국 및 영국과 전투에 들어갔다는 사실을 짤막하게 발표했다.

 

"대본영 육해군 발표. 제국 육해군은 금8일 미명 서태평양에서 미영군과 전투 상태에 들어감"

 

미국은 이 발표를 선전포고로 간주했다.

도쿄의 8일 오전 6시는 미동부시간으로 7일 오후 4시, 하와이 시간으로 오전 10시 30분이었다.

 

진주만 기습 다음날인 12월 8일 월요일 오전 7시에 위넌트 주영 미국대사가 백악관으로 전화를 걸어왔다.

영국의 처칠 수상이 하원에 가서 대일선전포고를 하려 한다는 것이었다.

긴급 사안이라고 판단한 교환수는 루스벨트 대통령을 깨웠다.

대통령은 영국의 선전포고가 오후 12시 30분으로 예정된 자신의 양원합동회의 연설 이후로 미루어지기를 원했으나 이미 늦었다.

 

처칠 수상은 런던 시간으로 오후 3시에 열린 의회에 출석하여 영국과 일본 사이에 전쟁상태가 존재한다고 선언했으며 의원들은 우레와 같은 박수로 대일선전포고를 승인했다.

런던의 오후 3시는 위싱턴의 오전 10시이다.

 

대통령은 오전 8시부터 밤새 들어온 보고를 살폈다.

홍콩, 웨이크, 미드웨이가 공격을 받았다.

가장 놀라운 것은 마닐라 인근의 클라크 비행장이 일본기의 기습을 받아 큰 피해를 입었다는 보고였다.

대통령은 진주만 기습을 이미 알고 있던 상황에서 또다시 기습을 허용한 클라크 비행장 피격 소식에 격노했다.

진주만에서는 공습 당시 이륙하여 요격을 실시한 미군 전투기는 불과 10대 정도이며 전함 애리조나의 승조원 대부분이 전사한 것을 비롯하여 사상자가 약 2,800 명에 달한다는 우울한 소식이 들어와 있었다.

 

국내 뉴스를 살펴본 대통령은 기분이 나아졌다.

언론들의 논조는 우호적이었다.

기사들은 대통령을 중심으로 뭉치자고 호소하고 있었으며 그의 실책을 지적하거나 비난하는 기사는 없었다.

정치권도 마찬가지였다.

민주당은 물론 지독한 고립주의자를 포함한 공화당 소속 주지사와 의원들도 대통령에게 전보를 보내어 충성을 맹세하고 초당적인 협력을 약속했다. 

미국은 루스벨트 대통령을 중심으로 단결했다.

 

아침 식사를 마친 대통령은 오전 11시부터 옷을 입기 시작했다.

정상인이라면 늦어도 5분 내에 끝날 일이었지만 대통령은 단단한 판자 위에 누운 상태로 집사 아서 프랫티만의 도움을 받아 45분이 걸려서야 힘겹게 옷을 입을 수 있었다.

 

이후 대통령은 오전 11시 55분부터 10분 간 백악관 내의 진료실에서 주치의 로스 맥킨타이어 소장으로부터 비점막을 축소시키는 치료를 받았다.

대중 매체의 힘을 잘 알고 있던 루스벨트 대통령은 전 세계에 전달되고 역사에 길이 남을 중요한 연설에서 코맹맹이 소리를 내기 싫었던 것이다.

 

잠시 후 그를 의회로 싣고 갈 자동차가 도착했는데 처음 보는 차량이었다.

당시 미국법에 따르면 정부 차량의 가격이 1대당 750달러를 넘길 수 없었기 때문에 대통령이라도 방탄차량을 탈 수 없었는데 진주만 기습 이후 대통령의 경호를 강화한 재무성 비밀경호국(Secret Service)은 방탄차량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비밀 경호국이 급히 준비한 방탄차량이 하필이면 재무성이 압수하여 보관 중이던 시카고의 악명높은 갱 두목 알 카포네의 방탄 리무진이었다.

경호를 책임진 마이크 라일리로부터 자초지종을 들은 대통령은 가벼운 농담으로 라일리의 마음을 편하게 해 주었다.

 

"카포네 씨도 이해해 주겠지."

("I hope Mr. Capone doesn't mind.")

 

대통령을 태운 리무진은 삼엄한 경호를 받으며 의사당에 도착했다.

루스벨트 대통령은 대중의 시선에서 벗어난 의사당 남쪽 입구 아래의 지하차도에서 내려 휠체어로 옮겨탔다.

비밀경호국 요원들이 경사로를 따라 휠체어를 밀어 대통령을 하원 회의장 바로 뒤에 있는 의장실로 옮겼다.

1933년에 루스벨트 대통령이 취임하자 비밀 경호국은 주요 관공서에 나무로 경사로를 만들어 대통령을 태운 휠체어가 다닐 수 있도록 했다.

 

의사당의 경비는 삼엄했다.

비밀경호국 요원 200명 이상이 배치되어 있었으며 착검한 해병대원들이 출입구를 지키고 있었다.

통행 허가증 없이는 누구도 들어갈 수 없었다.

비밀 경호국 요원들이 통행 허가증 없이 기자실에 들어가려던 몇몇 기자들을 쫓아냈다.

 

대통령이 연설할 하원 회의장은 의원과 취재진으로 발 디딜 틈이 없었다.

하원의원은 상원, 내각, 군사령관, 그리고 대법원을 위하여 앞줄 좌석을 비워두고 그 뒤에 앉아 있었다.

몇몇 의원은 역사적인 순간을 보여주기 위하여 자녀를 대동했다.

그 이외의 공간에는 기자가 바글거렸다.

기자들은 기자실 의자 위에 올라가고 통로에 늘어서고 벽에 기대어서 대통령을 기다렸다.

기자실에는 86개의 의자가 준비되어 있었으나 기자는 590명에 달했다.

 

12시 15분부터 부통령 헨리 월래스를 선두로 상원지도부가 입장했으며 이어서 코델 헐 국무장관을 선두로 내각의 각료들이 들어왔다.

각료들 뒤에는 정복을 갖추어 입은 육군참모총장 조지 마셜 대장과 해군참모총장 해럴드 스타크 대장이 들어왔으며 마지막으로 검은 법복을 입은 대법원 판사들이 들어와 앉았다.

 

12시 29분에

 

"미합중국 대통령 각하십니다."

("The President of United States.")

 

라는 방송이 울렸다.

그와 동시에 루스벨트 대통령이 연단 뒤에서 모습을 드러내자 우레같은 박수가 터졌다.

 

대통령은 아들 제임스 루스벨트 대위의 팔을 꽉 붙잡은 채 힘겹게 연단을 향해 걸어가기 시작했다.

그들 주위를 상원과 하원의 대표 6명이 둘러싸고 같이 걸었다.

이는 대통령 연설의 초당파적인 의미를 강조함과 동시에 연단으로 걸어가는 동안 대통령의 불편한 다리를 전 세계의 시선으로부터 숨기는 역할을 했다.

 

연단으로 향하는 대통령의 표정을 살펴본 기자들은 그가 중요한 연설에 대하여 깊은 생각에 잠겨 있다고 보았다.

그러나 사실 루스벨트 대통령은 연단까지 넘어지지 않고 걸어가는데 온 정신을 쏟고 있었다.

전 세계가 지켜보는 가운데 미군 최고 사령관이자 사실상 연합군을 대표하게 될 미국의 대통령이 연단까지 그 짧은 거리도 제대로 걸어가지 못하고 볼썽사납게 자빠져서 주변 사람들이 우루루 달려가 일으켜 세워야 하는 상황이 벌어지면 그 자체로 참사가 될 것이었다.

미국과 동맹국의 사기는 꺾일 것이고 적은 최고사령관의 비참한 모습을 마음껏 비웃으면서 두고두고 절호의 선전거리로 삼을 것이었다.

모든 사람들이 우레와 같은 박수로 힘겹게 연단으로 향하는 대통령에게 힘을 실어주었다. 

 

대통령이 연단에 도착하자 환호성이 터지면서 박수 소리가 더욱 커졌다. 

하원 의장 레이번 의원이 검지를 입술에 갖다대어 조용하라는 표시를 한 후 대통령을 소개했다.

 

루스벨트 대통령은 연단의 가장자리를 단단히 잡고 안경을 고쳐 쓰더니 실내를 천천히 둘러보았다.

연단 아래 앉아있는 상원의원들, 내각 각료들, 군 사령관들, 대법관들을 훑어본 대통령은 뒷쪽에 앉은 하원의원들을 거쳐 사진촬영용 조명까지 훑어보았다.

 

그러고 나서 대통령은 연설문을 넣어둔 노트의 가죽 표지를 펼쳤다.

연설문은 넘길 때 사각거리는 소리가 나지 않는 고급 종이에 타이핑되어 있었다.

 

오후 12시 33분, 대통령은 확신에 넘친 단호하고 낭랑한 목소리로 연설을 시작했다.

 

"어제, 1941년 12월 7일 - 치욕으로 남을 날 - 미합중국은 일본제국의 해군 및 항공 세력으로부터 의도적인 기습 공격을 받았습니다."

("Yesterday, December 7th, 1941 - a date which will live in infamy - the United States of America was suddenly and deliberately attacked by naval and air forces of the Empire of Japan.")

 

(의회에서 연설 중인 루스벨트 대통령. http://en.wikipedia.org/wiki/Infamy_Speech)

 

대통령은 화난 목소리로 일본정부의 비열한 자세를 성토했다.

 

"미합중국은 일본과 평화 상태에 있었으며 일본의 애원에 따라 일본정부 및 천황과 태평양의 평화를 유지하는 방안을 토의하고 있었습니다. " 

 

대통령은 일본이 미국 영토인 오아후 섬을 폭격한 지 1시간이 지난 후에 일본대사를 시켜 어떤 위협이나 전쟁 또는 무력 공격의 힌트도 없는 문건을 전달했다면서 일본의 목적은 오로지 평화에 대한 사탕발림을 늘어놓음으로써 미국을 속이려는 것이었다고 말했다. 

그는 진주만의 피해에 대해서는 얼버무리고 넘어갔다.

 

"미국의 해군과 군대는 큰 피해를 입었습니다. 유감스럽게도 많은 미국인들이 목숨을 잃었습니다."

 

이어서 대통령은 초고 작성 이후 추가된 내용을 말했다.

 

"미국함정들이 샌프란시스코와 호놀룰루 사이의 공해에서 어뢰공격을 받았다는 보고가 들어왔습니다. 어제 일본정부는 말레이를 공격했습니다. 어젯밤에 일본군이 홍콩을 공격했습니다. 어젯밤에 일본군이 괌을 공격했습니다. 어젯밤에 일본군이 필리핀 제도를 공격했습니다.어젯밤에 일본군이 웨이크 섬을 공격했습니다. 그리고 오늘 아침에 일본군이 미드웨이 섬을 공격했습니다."

 

분위기는 가라앉고 박수도 사라졌다.

이때 대통령이 선언했다.

 

"어쨌든, 시간이 얼마나 걸리든, 미국은 절대적인 승리를 쟁취할 것입니다."

 

잠잠해졌던 박수가 다시 터졌다.

이어서 연설은 클라이맥스에 도달했다.

 

"우리 군대의 대담함과, 우리 국민의 활달한 투지로 우리는 반드시 승리를 쟁취할 것입니다. 신이여, 저희를 도우소서."

("With confidence in our armed forces-with the unbinding determination of our people-we will gain inevitable triumph-so help us God.")

 

이제 사람들은 일어서서 미친듯이 박수를 쳤으며 근엄한 대법관들까지 일어나 박수를 쳤다.

대통령은 다음의 말로 연설을 끝맺었다.

 

"저는 의회가 12월 7일, 일요일에 일본이 자행한 부당하고 비열한 공격 이후 미합중국과 일본제국 사이에 전쟁상태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선포해 주실 것을 요청합니다."

("I ask that the Congress declare that since unprovoked and distardly attack by Japan on Sunday, December 7, a state of war has existed between the United States and the Japanese Empire.")

 

모든 사람이 일어나 박수를 쳤다.

일어나지 않은 사람은 공화당 소속의 하원의원인 저넷 랭킨과 클레어 호프만 뿐이었다.

 

연설을 마쳤을 때는 오후 12시 40분으로 6분 30초 밖에 걸리지 않았으나 대단히 성공적이었다.

반응은 폭발적으로 당시에도 언론의 찬사가 쏟아졌으며 오늘날까지 가장 유명한 연설의 하나로 남아있다.

 

상원은 12시 51분부터 선전포고를 위한 토의에 들어갔다.

제1차 대전 당시 상원은 4일 간의 치열한 논쟁을 거쳐 참전을 결정했으나 이번에는 달랐다.

발언을 요청한 사람은 상원에서 고립주의자들을 이끌던 공화당의 아서 반덴버그 의원 뿐이었다.

그는 전쟁을 앞둔 이 시점에서 미국에서 공화당이니 민주당이니 하는 것은 사라졌고 총사령관 밑에 결집한 하나의 미국만이 존재한다면서 고립주의를 버리고 대통령에게 절대적으로 협조할 것을 천명했다.

이후 투표는 일사천리로 진행되어 1시 6분에 끝났다.

결과는 82대 0으로 96명의 상원의원들 중 병석에 누웠거나 멀리 떨어져 있어 표결에 참가하지 못한 14명을 제외하고 참석자 82명 전원이 찬성표를 던졌다.

상원에서는 15분 만에 선전포고를 가결했다.

 

하원에서는 상원처럼 매끄럽게 진행되지는 않았다.

의원들은 토론을 생략하고 표결에 들어가자면서

 

"투표, 투표, 투표"

("Vote, vote, vote")

 

를 외쳤다.

 

하원의 공화당 대표인 조셉 마틴은 마이크를 잡고

 

"적이 저지른 비겁한 짓에 대한 응징이 이루어질 때까지 평화는 없습니다. 우리가 하나로 뭉친 나라라는 걸 세계에 보여줍시다."

 

라고 말한 다음 하원에서 고립주의자들의 대표로서 렌드리스를 가장 심하게 비난했던 해밀튼 피시에게 마이크를 넘겼다.

피시는 다음과 같은 말로 자신의 정치적 입장을 포기하고 대통령에게 적극 협조할 것임을 동료 의원들에게 약속했다.

 

"전쟁을 일으킨 일본 악마들을 요절내기 위해서라면 저는 어떤 희생이라도 마다하지 않을 것입니다."

 

이때 지독한 반전주의자인 랭킨 의원이 발언권을 요청했다.

하원 의장 레이번은 그녀를 무시하고 다른 의원 2명에게 발언 기회를 준 후 오후 1시 4분에 투표를 시작했다.

랭킨은 계속 발언권을 요구하면서 표결을 방해하려 했으나 모두들 그녀를 무시했다.

오후 1시 26분에 하원은 388:1로 선전포고안을 통과시켰는데 반대 1표는 랭킨이 던진 표였다.

그녀는 제1차 세계대전에서도 반대표를 던졌었다.

 

오후 1시 32분, 루스벨트 대통령이 연설을 마친지 52분 후에 의회는 선전포고안을 가결했다.

오후 3시 14분에 하원 의장 레이번이 하원을 대표하여 선전포고문에 서명했다.

오후 3시 25분에는 부통령 월래스가 상원을 대표하여 선전포고문에 서명했다.

선전포고문은 백악관으로 보내졌고 오후 4시 10분에 루스벨트 대통령이 서명했다.

그가 연설을 시작한 후 3시간 37분 만이었다.

 

일본과의 선전포고를 끌어낸 루스벨트 대통령은 이후 국민의 관심이 독일을 떠나 일본에게만 집중되지 않도록 신경을 썼다.

대일선전포고 다음날인 12월 9일에 방송된 노변담화에서 대통령은 독일과 일본의 친밀한 관계를 강조하면서 진주만 기습의 배후에는 독일이 있다면서 독일을 집중적으로 비난했다. 

 

히틀러가 루스벨트 대통령의 고민을 덜어 주었다.

1941년 12월 11일에 독일과 이탈리아는 미국에 선전포고를 했다.

이번에는 연설을 할 필요도 없었다.

대통령은 서면으로 의회에 선전포고를 요청했으며 의회에서는 두말없이 통과시켰다.

이번에는 랭킨 의원도 찬성표를 던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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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 루스벨트의 대응

 

1941년 12월 7일은 일요일이었다.

오전 10시에 프랭클린 루스벨트 대통령의 해군보좌관인 존 비어달 대령이 헐-노무라 회담의 결렬을 통보하는 일본군의 외교전보 중 마지막 14번째 전보를 해석한 것을 들고와서 보고했다.

대통령은 전쟁이 임박했다고 느꼈다. 

비어달 대령이 떠난 후 대통령은 정오까지 주치의인 로스 맥킨타이어 해군소장과 일본과의 전쟁에 대해 이야기했다.

 

(프랭클린 댈러노 루스벨트 대통령. 자세한 내용은 여기로)

 

그날 대통령의 첫 공식일정은 오후 12시 30분에 시후 중국대사를 접견한 것이었다. 

대통령은 시후 대사에게 자신이 일본천황에게 보낸 전문에 대해 설명한 후 일본이 타국에 대한 간섭을 중단하고 군사적 긴장을 완화시키지 않는 한 미국과 일본은 전쟁을 피할 수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오후 1시 10분에 시후 대사가 물러가자 대통령은 보좌관인 해리 홉킨스와 함께 점심을 먹은 다음 집무실의 책상에 앉아 취미인 우표 정리를 시작했다.

홉킨스는 소파에 앉아 우표 정리를 하는 대통령과 일본과의 전쟁 가능성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다.

잠시 후 전화가 울렸다.

 

진주만 기습 당시 하와이 해군항공대 작전참모였던 로건 램지 소령은 태평양함대 총사령관 허즈번드 킴멜 제독 명의로

 

"공습, 진주만 - 이것은 훈련이 아니다."

(Air raid, Pearl Harbor - This is no drill.)

 

라는 방송을 내보냈다.

샌프란시스코의 해군 기지에서는 이 방송을 듣자 즉시 워싱턴으로 전문을 보냈다.

전문이 해군장관 프랭크 녹스의 손에 도달했을 때 그는 해군참모총장 해럴드 스타크 대장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맙소사, 이건 사실이 아닐거야, 틀림없이 필리핀을 뜻하는 것이겠지."

("My god, this can't be true, this must mean the Philippines.")

 

녹스 장관은 스타크 제독에게 전문을 보여주며 중얼거렸다.

스타크 제독은 방송이 태평양함대총사령관(CINCPAC) 명의로 나온 것을 보고는 말했다.

 

"아닙니다, 장관님, 이건 진주만입니다."

("No,sir, this is Pearl.")

 

녹스 장관은 즉시 백악관에 전화를 걸었다.

미동부시간으로 1941년 12월 7일 오후 1시 47분, 최초의 폭탄이 휠러 비행장에 떨어진 지 26분 후에 루스벨트 대통령은 점심을 먹고 휴식 시간에 취미인 우표 정리를 하다가 진주만 기습을 알리는 녹스 장관의 전화를 받았다.

(미동부시간은 하와이보다 5시간 30분 빠르다. 따라서 휠러 비행장에 처음으로 폭탄이 떨어진 7일 오전 7시 51분은 워싱턴에서는 7일 오후 1시 21분이다.)

 

"대통령 각하, 호놀룰루로부터 그 지역의 우리군 총사령관 명의로 우리의 모든 기지가 항공공격을 받고 있으며 '이건 훈련이 아니다.' 라는 내용의 방송을 청취했습니다. 일본이 진주만을 공격한 듯합니다."

("Mr. President, they had picked up a radio from the Commander-in-Chief of our forces there advising all our stations that an air raid attack was on and that it was 'no drill.' It appeared as if the Japanese have attacked Pearl Harbor.")

 

녹스 장관이 말을 마치자 대통령이 소리질렀다.

 

"노!"

("No!")

 

대통령은 전화를 끊고 홉킨스에게 내용을 말했다.

홉킨스는 잘못된 정보라고 생각했으나 대통령은 직감적으로 사실이라는 걸 알았다.

 

대통령과 홉킨스는 외부로 전화를 걸기 시작했고 이어서 외부에서 사실확인과 보고를 위한 전화가 폭주하면서 백악관의 전화교환대가 불난 호떡집 마냥 바빠졌다.

당시 백악관에는 외부와 연결된 직통 전화가 없이 모두 교환대를 거쳐야 했는데 그날은 일요일이고 한가할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여자인 교환수 2명 중 제시 길이라는 이름의 신참 교환수만이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1933년부터 백악관에서 교환수로 일한 고참 루이스 핵마이스터는 백악관에서 지척인 자신의 집에서 휴일을 즐기고 있었다.

홉킨스는 길에게 몇 명의 보좌관에게 전화하여 빨리 백악관으로 달려오도록 전하라고 말했으며 대통령은 외교정책에 대한 몇 명의 고위급 조언자와 연결해 달라고 말했다.

순식간에 엄청난 전화 연결 요청이 초를 다투어 밀려드는 상황에서 길은 결단을 내렸다.

그녀는 핵마이스터에게 가장 먼저 전화를 걸어 도와달라고 요청했다.

길의 판단은 정확했다.

오후 2시에 핵마이스터가 달려와서 합류했음에도 두 사람은 쏟아지는 전화를 처리하느라 오후 11시까지 9시간 이상 자리에서 일어날 수 없었다. 

핵마이스터의 회고에 따르면 나중에 일어서려 하자 다리가 풀려 제대로 일어설 수가 없었다고 한다. 

 

자신의 아파트에서 쉬고 있던 루스벨트 대통령의 비서 그레이스 털리는 전화를 받고 즉시 옷을 차려입고 백악관으로 출근했으며 집에서 낮잠을 자고 있던 대통령의 아들 제임스 루스벨트 해병대위도 전화를 받고 백악관으로 달려왔다.

 

대통령이 최초로 전화를 건 사람은 육군장관 헨리 스팀슨으로 시간은 오후 2시 5분이었다.

아침에 육군성에 출근했다가 집으로 가서 점심을 먹고 있던 스팀슨 장관은 전화를 받을 때까지 진주만 기습을 모르고 있었다.

스팀슨 장관은 전화를 받은 후 서둘러 식사를 마치고 육군성으로 돌아갔다.

 

대통령은 이어서 국무장관 코델 헐에게 전화를 걸어 진주만 기습을 알렸다.

헐 장관은 전화를 끊고 나서 사무실 밖에서 대기하고 있던 노무라 기치사부로 일본대사와 구루스 사부로 특사를 접견했다.

 

대통령은 이때쯤 이미 언론에 대한 대책을 생각하고 있었다.

그가 다음으로 전화를 건 상대는 언론비서관 스티브 얼리였다.

얼리가 전화를 받았을 때 그는 느지막히 일어나 샤워를 하고나서 목욕 가운만 걸친 채였다.

대통령은 진주만 기습에 대해 간단하게 설명하고 지시를 내린 다음 전화를 끊었다.

 

얼리는 전화를 끊자마자 백악관의 전화교환대에 요청하여 미국의 3대 통신사인 AP(Associated Press), UP(United Press), 그리고 INS(International News Service) 와 동시 통화를 요청했다.

UP와 INS 는 1958년에 합병하여 UPI 가 된다.

 

오후 2시 22분에 동시 통화가 연결되자 얼리는 3대 통신사에 진주만 기습을 알리는 대통령의 짧은 성명을 발표한 후 추가로 정보가 들어오는 대로 즉시 알려주겠다고 약속했다.

3대 통신사는 경악하면서 이 놀라운 정보를 서둘러 전파했다.

이로써 루스벨트 대통령은 사건 초기에 정보의 흐름을 통제하겠다는 목적을 달성했다.

 

3대 통신사는 진주만 기습 이후 불과 1시간 만에 이런 놀라운 뉴스를 신속하게 알려준 백악관에 커다란 신뢰를 느꼈다.

나아가 극도로 혼란한 진주만 기습 직후 상황에서 스스로의 힘으로 뉴스를 찾아내고 신빙성을 평가하여 보도하는 힘들고 어려운 과정을 감수하는 대신 백악관이 제공하는 정보를 경쟁사보다 늦게 받아보는 일이 없도록 백악관의 발표에 온 신경을 곤두세우게 되었다.

루스벨트 대통령은 이런 식으로 언론이 다루는 뉴스의 원천을 대부분 공급하는 3대 통신사의 기선을 제압하여 백악관만 바라보도록 만듦으로써 언론 검열 준비가 갖추어지기 전의 며칠 동안 정보의 흐름을 통제하는데 성공했다.

 

오후 3시가 넘어가자 루스벨트 대통령의 핵심 참모들이 백악관 2층의 대통령 집무실(Oval Study)에 모이기 시작했다.

(미국 대통령의 집무실은 오늘날에는 Oval Office 또는 Oval Room 으로 부른다.)

오후 3시 5분에 녹스와 스팀슨 장관이 도착했고 잠시 후 조지 마셜 육군참모총장과 헐 장관이 도착했다.

이외에 참석자는 비서 그레이스 털리, 언론비서관 스티브 얼리, 그리고 인사비서관  마빈 매킨타이어 등이었다.

주치의 로스 맥킨타이어 소장은 허겁지겁 달려들어와 대통령의 건강 상태를 관찰했으며 대통령을 그림자처럼 따라다니는 해리 홉킨스도 물론 참석했다.

 

대통령 집무실에서 회의가 진행되는 동안 해군성에 머무르고 있던 해군참모총장 해럴드 스타크 대장은 새로 들어온 사항들을 전화로 계속 보고했다.

스타크 총장의 전화는 대부분 비서인 그레이스 털리가 받아 메모한 다음 타자로 쳐서 대통령에게 전달했다. 

털리는 회의를 방해하지 않고 주변의 소란을 피하여 대통령의 침실에서 전화를 받았다.

 

시간이 갈수록 스타크 총장이 보고하는 피해 규모는 눈덩이처럼 불어났고 참석자들은 충격을 받았다.

루스벨트 대통령은 털리가 건네준 메모를 읽을 때마다 입을 꽉 다물고 침묵을 지켰다. 

이런 침묵은 루스벨트 대통령이 충격을 받거나 커다란 분노를 느낄 때 보여주는 전형적인 반응이었다.

 

회의는 무거운 분위기에서 시작되었다.

스팀슨과 녹스 장관은 일본군이 하와이에 상륙하거나 미본토 서해안을 공격할 수 있다고 말했다.

 

대통령은 충격과 분노 속에서도 침착하게 회의를 이끌어 나갔다.

그는 마셜 장군에게 미군의 배치 상태를 물은 다음 필리핀의 맥아더 장군에게 일본의 위협에 대비하도록 단단히 일러두라고 명령했다.

마셜 대장은 백악관으로 오기 전에 이미 맥아더 장군에게 그런 명령을 내리고 출발했었다.

 

대통령은 이어서 헐 장관에게 라틴 아메리카 국가들에게 사실을 알리고 우호 관계를 유지하라고 명령했다.

실제로 대통령은 이때 라틴 아메리카에 대해 상당한 시간을 들여 토의했다.

 

루스벨트 대통령은 집권 이래 파나마 운하의 안전과 직결된 라틴 아메리카에 대해 공을 많이 들였다.

그는 라틴 아메리카 국가들에 대해 관세를 50% 나 깎아 주어 미국과 라틴 아메리카 사이의 교역을 늘렸다.

유럽에서 전쟁이 발발하자 대통령은 라틴 아메리카에 더욱 신경을 썼다.

라틴 아메리카 국가들과 협상을 벌여 군사기지를 확보했으며 군사고문단을 파견하고 라틴 아메리카 국가의 장교들을 미국의 군사학교에 유학시켰다.

또한 라틴 아메리카 국가의 주요 인물들 중 나치스와 관련된 자들의 목록을 만들어 이들을 공직에서 추방하도록 요구했다.

 

진주만 기습 이후에도 미국은 라틴 아메리카에 렌드리스를 나누어 주면서 공을 들였다.

렌드리스를 받은 38개국 중에 라틴 아메리카 국가가 절반인 19개로 아르헨티나를 제외한 모든 라틴 아메리카 국가들이 많건 적건 미국이 나누어 주는 렌드리스를 받아 챙겼다.

라틴 아메리카에서 가장 많이 받은 브라질은 3억 3천만 달러가 넘는 렌드리스를 받았는데 이는 대영제국, 소련, 프랑스, 중국에 이어 5번째로 많은 것이었다.

 

이어서 대통령은 다음날 의회에 선전포고를 요청할 것이라고 말했다.

회의는 오후 4시 15분에 끝났다.

 

회의가 끝난 직후 영국수상 윈스턴 처칠로부터 전화가 왔다.

루스벨트 대통령은 처칠수상에게 진주만 기습이 사실이라고 확인해 주고 다음날 의회에 선전포고를 요청할 것이라고 말했다.

 

대통령은 이후 연설문을 구상하기 시작했다.

일요일이라 연설원고작성자가 워싱턴에 없었기 때문에 그는 자신의 연설문을 직접 작성해야만 했으나 문제는 없었다.

루스벨트 대통령은 대학 시절  교지인 하버드 크림슨의 편집장을 맡았으며 자신이 항상 작가라고 생각했다.

그는 자신이 무엇을 이야기하고 싶은지 알고 있었으며 그것을 어떻게 표현할지도 정확하게 알고 있었다.

 

구상을 마친 대통령은 오후 4시 50분에 비서 털리를 불러 구술을 시작했다.

 

"어제 쉼표 12월 7일 쉼표 1941년 줄 은.."

("Yesterday comma December 7th comma 1941 dash a day which will live..")

 

털리가 타자기를 두드리자 500 단어도 채 되지 않지만 역사상 가장 유명해진 연설이 처음으로 모습을 드러내었다.

 

연설문 작성을 마친 대통령은 오후 5시 30분에 백악관 내의 진료실에 가서 주치의 매킨타이어 소장으로부터 70분간 축농증 치료를 받았다.

치료의 상세한 내용은 루스벨트 대통령의 진료 기록이 서거 직후 사라졌기 때문에 정확하게 알 수는 없지만 코카인을 사용했을 가능성이 있다.

19세기 말까지 코카콜라에도 들어가는 등 널리 사용되던 코카인은 20세기 들어오면서 마약으로 규정되어 강력한 제재를 받았으나 1940년대에도 마취과 및 이비인후과에서는 광범위하게 사용하고 있었다.

1959년까지도 미국의 이비인후과 교과서에는 1%로 희석한 코카인이 비점막 부종 치료제로 올라 있었다.

 

루스벨트 대통령이 코카인 사용을 알았을 가능성은 희박하다.

당시는 환자가 의사에게 치료에 사용하는 약물이 무엇인지 묻는 시대가 아니었으며 루스벨트 대통령도 예외가 아니었다.

물론 비점막의 부종을 가라앉힐 목적으로 1% 로 희석한 코카인을 소량 비내에 분무하거나 면봉에 묻혀 비점막에 문질렀다고 해서 코카인이 대통령의 판단이나 행동에 영향을 끼쳤을 가능성은 없다.

 

치료를 마친 루스벨트 대통령은 집무실에서 아들 제임스, 보좌관 홉킨스, 그리고 비서 털리와 함께 저녁을 먹었다.

아무도 진주만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

모두들 대통령이 식사 시간이나마 느긋하게 쉴 수 있기를 바랬다.

 

오후 8시 30분부터 루스벨트 행정부의 각료들이 모여 회의를 시작했다.

정식 각료가 아니면서 참석한 사람은 홉킨스 뿐이었다.

대통령은 다음과 같은 말로 회의를 시작했다.

 

"이것은 1861년 이래로 가장 중요한 내각 회의입니다."

("This is the most serious meeting of the Cabinet that had taken place since 1861.")

 

회의에 참석한 각료 중에는 일본이 진주만을 기습했다는 사실만 들은 상태로 달려온 사람도 있어서 대통령은 처음부터 상황을 설명했다.

이때 대통령은 자신이 받은 최신 정보까지 포함하여 알고 있는 바를 그대로 전달했다.

 

'오전 8시경에 일본의 비행기가 진주만의 함정과 모든 비행장을 폭격했다...유감스럽게도 인명피해는 매우 크다..전함 8척이 모두 피해를 입었으며 3척은 가라앉았고 어쩌면 1척이 더 가라앉을지 모른다.구축함 2척은 건선거 안에서 폭격을 받아 대파되었으며 건선거 자체도 피해를 입었다. 다른 함정들도 일부 격침되거나 피해를 입었다. 살아남은 함정들은 해상에 나와 일본함대를 수색 중이다.'

 

는 내용이었다.

 

이어서 루스벨트 대통령은 다음날 상하원이 모두 모이는 양원합동회의 개최를 요청할 것이라고 말했다. 

회의가 진행되는 동안 밖에서는 의회 지도자들이 모여 회의가 끝나기를 기다리면서 서로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대통령은 다음날의 의회 연설에서 일본에 대한 선전포고를 요구할 것이라면서 털리가 타이핑한 연설문을 꺼내 읽어주었다.

헐 국무장관은 너무 짧다고 주장했고 스팀슨 육군장관도 동조했다.

헐 장관은 연설에서 일본과의 교섭 과정을 상세히 설명해야 한다고 주장했으며 각료들은 대부분 동조했다.

스팀슨 장관은 일본 뿐만 아니라 독일과 이탈리아에 대한 선전포고도 요구해야 한다고 주장했으나 이번에는 각료들이 대부분 반대했다.

독일과 주고받은 일본의 외교암호를 해독한 결과 일본과 미국이 개전하면 독일 또한 미국에게 선전포고를 할 가능성이 높았으므로 굳이 먼저 선전포고를 할 이유가 없다는 것이었다.

루스벨트 대통령은 헐의 주장이든 스팀슨의 주장이든 받아들일 생각이 없었다.

 

내각 회의는 피해에 대해 언급하지 말아야 하며 언론과의 접촉은 백악관에 맡겨야 한다는 당부를 마지막으로 오후 9시가 조금 지나 끝났다.

루스벨트 대통령과 월래스 부통령, 녹스 및 스팀슨 장관, 그리고 홉킨스는 집무실에 남았고 다른 각료들은 집무실을 떠났다.

 

이어서 기다리던 의회 지도자들이 집무실로 들어갔다.

상원에서는 상원의장 알벤 바클리, 공화당 대표 찰스 맥네리, 외교위원장 토마스 코날리, 공화당 외교위원 하이람 존슨 등이 참석했다.

하원의장 존 맥코믹은 시간 내로 도착하지 못해 제이 쿠퍼 의원이 대신 참석했으며 공화당 대표 조셉 마틴도 참석했다.

하원에서는 이외에도 외교위원장 솔 블룸, 민주당 원내 총무 리스터 힐, 하원 대변인 샘 레이번 등이 참석했다.

원칙대로라면 하원 외교위원회의 공화당 선임위원인 해밀턴 피시도 참석해야 했으나 그는 강경한 고립주의자로서 렌드리스 법안을 지독하게 비난했다.

루스벨트 대통령이 피시를 백악관에 들이고 싶어하지 않았으므로 홉킨스는 그를 제외하고 대신 외교위원회에서 공화당원으로 두번째 서열인 찰스 이튼을 초대했다.

 

의원들이 집무실로 들어가자 루스벨트 대통령은 심각한 얼굴로 앉아 있다가 모두들 자리를 잡고 앉자 시가를 꺼내더니 홉킨스를 시켜 의원마다 일일이 1대씩 돌렸다.

시가에 불을 붙여 입에 물자마자 대통령은 벌컥 화를 내며 일본대사가 마지막까지 협상하는 척 했다면서 국가 간에 이런 식으로 뒷통수를 친 예는 일찌기 없었다면서 핏대를 올렸다. 

의원들은 같이 시가를 물고 앉아 일본에 대한 분노를 터뜨리는 대통령을 보면서 그가 진심으로 자신들을 대하고 있다고 느꼈다.

 

그러나 이것은 루스벨트 대통령의 노림수였다.

대통령은 각료들과는 달리 의원들에게 한 말은 몇 시간 내로 언론에 퍼지리라는 걸 알고 있었다.

그는 의원들의 입을 통하여 진주만의 피해 사실이 낱낱이 언론에 보도되어 대중들에게 충격을 주는 상황을 원하지 않았다.

따라서 그는 일단 의원들을 안심시켜 진실을 말하고 있다고 믿게 만든 다음 피해 사실을 교묘하게 숨겼다.

대통령은 의원들에게 거짓말을 하지는 않았지만 진실을 다 말하지도 않았으며 해군의 준비 태세를 강조하고 피해를 얼버무리는 방식으로 진주만에서 벌어진 참상의 느낌을 실제보다 약하게 만들어 전달했다.

그렇게 신경을 썼음에도 불구하고 의원들은 상당한 충격을 받았다.

 

진주만 기습에 대한 보고를 마친 대통령은 다음날 12시 30분에 상하양원합동회의를 소집해 달라고 요청했다.

의원들은 소집 요청을 받아들이면서 대통령에게 어떤 내용의 연설을 할 것인지, 의회에 선전포고를 요청할 것인지, 만일 요청한다면 일본에 대해서만 요청할 것인지 아니면 독일과 이탈리아도 포함할 것인지 물었다.

루스벨트 대통령은 아직 연설문을 준비하지 못했다면서 자세한 것은 연설문을 만들어 봐야 안다고 말했다.

당시 대통령은 양복 안주머니 속에 타이핑된 연설문을 가지고 있었으며 불과 몇 십분 전에 그걸 각료들에게 읽어주고 의견을 물은 후였다.

하지만 대통령은 의원들의 입을 통하여 자신의 연설 내용이 미리 대다수 의원들과 대중에게 새어나가 극적인 효과가 떨어지는 걸 원하지 않았다. 

 

이제 의원들을 불러 다음날 양원합동회의를 소집한다는 목적을 달성한 루스벨트 대통령은 회의를 끝내고 싶어했지만 상황은 그렇게 돌아가지 않았다.

회의 내내 충격과 분노에 휩싸여 있던 상원 외교위원장 토머스 코날리가 다시 진주만 이야기를 꺼냈다.

코날리는 대통령에게 어떻게 이런 일이 벌어졌으며 일본군에게는 어떤 피해를 입혔는지 물었다.

대통령은 일본군에게 큰 피해를 입혔다는 정보는 없으며 일본잠수함을 공격한 것 같은데 역시 정확한 사실은 알 수 없다는 식의 원론적 대답 밖에 할 수 없었다.

루스벨트 대통령의 대답에 만족하지 못한 코날리는 대신 녹스 해군장관을 몰아 세웠다. 

 

"당신은 지난달 우리가 일본을 2주 만에 해치울 수 있다고 말하지 않았습니까? 당신은 우리 해군이 잘 준비하고 있으며 일본이 절대로 해치지 못하는 곳에 자리잡고 있다고 말하지 않았나요? 당신은 단지 일 잘하는 해군장관이라는 걸 자랑하려고 공식석상에서 그런 말을 한 것입니까?"

 

불쌍한 녹스 장관은 고개를 푹 숙이고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루스벨트 대통령은 무표정한 얼굴로 앉아있을 뿐이었다.

대통령에게 향할 비난을 대신 짊어지는 것도 각료의 임무 중 하나였다.

코날리는 녹스 장관을 계속 몰아붙였다.

 

"당신은 왜 함정들을 모두 그렇게 좁은 진주만에 몰아 넣었습니까? 당신은 왜 진주만 입구에 쇠사슬을 쳐서 함정들이 드나들지 못하게 했습니까?"

 

코날리는 대잠망을 쇠사슬로 잘못 알고 있었다.

 

"적의 잠수함을 막으려던 겁니다."

 

녹스 장관은 겨우 대답했다.

 

"항공공격은 예상하지 못했습니까?"

 

"예."

 

녹스 장관은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코날리는 분통을 터뜨렸다.

 

"저는 해군에게 일어난 일에 대해 경악을 느낍니다. 그들은 모두 방심한 채 잠들어 있었어요. 우리의 초계기들은 어디에 있었습니까? 해군은 일본과의 협상을 알고 있었습니다."

 

초계기가 어디 있었냐는 코날리의 질문은 녹스 장관 자신도 알고 싶은 것이었다.

 

회의는 오후 11시가 되어서야 끝났다.

대통령은 회의가 끝난 직후 언론에 내보낼 짧은 성명을 구술했다.

다음날 12시 30분에 그가 양원합동회의에서 연설한다는 내용이었다.

 

헐 국무장관은 회의가 끝나자 집무실로 들어와 몇 분간 루스벨트 대통령을 만났다.

그는 대통령의 연설이 길어야 한다고 다시 주장했다.

헐 장관은 대통령에게 일정한 영향력을 가진 국무차관 섬너 웰레스와 함께 설득했으나 소용이 없었다.

 

피곤해진 대통령은 상투적인 수법을 썼다.

그는 헐 장관에게

 

"알았네, 검토해 보겠네." 

 

하고는 집무실 밖으로 쫓아내었다.

 

백악관 밖으로 나온 의원들은 취재진에 둘러 싸였다.

대부분 다음날 대통령이 양원합동회의에서 연설한다는 내용 외에는 말을 아꼈으나 한 가지는 분명했다.

고립주의 경향이 강하여 전쟁을 반대하던 공화당도 대통령을 지지하리라는 것이었다.

상원의 공화당 대표인 맥네리는 말했다.

 

"내 생각에, 공화당은 대통령이 어떤 결정을 내리든 지지할 겁니다." 

 

대통령은 마지막으로 유명한 기자인 CBS 의 에드워드 머로우와 만나 이야기를 나누었다.

머로우는 영국 특파원으로 목숨의 위험을 무릅쓰고 취재를 하다가 잠시 귀국한 상태였다. 

그는 폭격에 신음하면서도 히틀러에 맞서 용감하게 싸우는 영국 국민들의 소식을 매일 2번씩 전하여 미국 국민들 사이에 영국에 동정적인 여론을 불러 일으키는데 크게 기여했다.

루스벨트 대통령 부부는 원래 그날 저녁을 머로우 부부와 함께 먹을 생각이었으나 진주만 기습으로 대통령이 바빴으므로 영부인 엘레노어 루스벨트 여사만이 머로우 부부와 함께 저녁을 먹었다.

대통령은 저녁을 먹은 후 호텔로 돌아가려는 머로우에게 남아 달라고 요청했고 자정이 약간 지나 마침내 시간이 생기자 집무실로 불렀다.

 

머로우와 루스벨트 대통령은 야식으로 나온 샌드위치를 씹으면서 이야기를 나누었다.

대통령은 머로우에게 의회 지도자들에게는 비밀로 했던 진주만의 피해 사실을 솔직하게 말해 주었다.

얘기 도중 대통령은 미군 비행기들이 지상에서 당했다는 말을 하면서 분통이 터지는 듯 책상을 주먹으로 내려치며 소리쳤다.

 

"땅에서 말일세, 맙소사, 땅에서!"

("On the ground, by God, on the ground!")

 

CIA 의 전신인 전략사무국(Office of Strategic Service)의 윌리엄 도노반 대령이 대화 도중에 슬쩍 들어와 앉았으나 대화는 곧 끝났다.

12시 30분이 되자 대통령은 머로우와 도노반 대령을 내보냈다.

 

머로우는 호텔에 돌아오자 잠을 이루지 못하고 창밖을 바라보면서 생각에 잠겼다.

그가 대통령에게 들은 내용을 지금 보도하면 그야말로 특종이 될 것이었다.

대통령을 포함하여 누구도 그에게 명시적으로 비공개(off the record)를 요청하지 않았다.

 

그러나 머로우는 알고 있었다.

대통령이 비공개를 요청하지 않은 것은 자신의 양식을 믿은 것이지 보도를 해도 좋다는 뜻이 아니었다.

자신에게 보여준 대통령의 신뢰를 지키기 위하여 머로우는 일생일대의 특종을 포기하고 아쉬움을 달래면서 잠자리에 들었다. 

 

대통령의 아들 제임스 루스벨트 대위는 머로우가 나가자 집무실로 들어가 아버지를 모시고 침실로 가서 뉘였다.

아들은 침대에 누운 아버지와 눈 앞에 닥쳐온 전쟁에 대해 잠시 이야기를 나눈 후 침실을 나왔다.

1941년 12월 7일은 루스벨트 대통령에게도 무척 긴 하루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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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 피해

 

태평양함대의 함정들은 진주만 기습으로 큰 피해를 입었다.

기습 당시 진주만에는 전투함정 70척과 보조함 24척등 총 94척의 함정이 있었다.

전투함정은 전함 8척, 중순양함 2척, 경순양함 6척, 구축함 29척, 잠수함 5척, 포정 1척, 기뢰부설함 9척(8척은 구축함을 개조한 것, 나머지 1척은 오글라라), 소해함 10척(4척은 구축함을 개조한 것)이었다.

보조함은 각종 모함 10척, 수리함 3척, 급유함 2척, 대양예인함 2척, 병원함, 수로측량함, 식량보급함, 표적함, 탄약보급함, 잠수함구난함 각 1척씩 그리고 태평양함대 기지사령관 윌리엄 칼훈 소장의 기함인 아르곤이었다.

 

94척의 함정 중 6척(전함 4척, 표적함 1척, 기뢰부설함 1척)이 격침되었다.

격침된 함정들은 다음과 같다.

 

 함종

 함명

 복귀

 전함

 애리조나

 미복귀

 오클라호마

 미복귀

 웨스트버지니아

 1944년 7월

 캘리포니아

 1944년 1월

 표적함

 유타

 미복귀

 기뢰부설함

 오글라라

 1944년 2월

 

격침된 6척의 함정들 중 3척은 나중에 복귀했으므로 미해군은 진주만 기습 당시 격침된 함정을 3척으로 본다.

 

진주만 기습 당시 피해를 입은 함정들은 12척(전함 4척, 경순양함 3척, 구축함 3척, 수상기모함 1척, 수리함 1척)으로 상세는 다음과 같다.

 

 함종

 함명

 피해

 복귀

 전함

 네바다

 중파

 1943년 6월

 테네시

 소파

 1942년 2월

 메릴랜드

 소파

 1941년 12월

 펜실베이니아

 소파

 1941년 12월

 경순양함

 헬레나

 대파

 1942년 9월

 롤리

 대파

 1942년 7월

 호놀룰루

 소파

 1941년 12월

 구축함

 캐신

 대파

 1944년 2월(재건조)

 다운즈

 대파

 1943년 11월(재건조)

 쇼

 중파

 1942년 6월

 수상기모함

 커티스

 소파

 1941년 12월

 수리함

 베스탈

 소파

 1942년 2월

 

미군의 항공기 손실은 기록마다 차이가 있어 정확한 숫자를 파악하기 어렵다.

합동의회조사보고서(Joint Congressional Investigation)에 따르면 진주만 기습에서 손실된 오아후의 육군항공기 세력은 다음과 같다.

 

 종류

 기종

 공격 이전

 공격 이후

    손실

 

 가용

 비가용

       합계

     가용

 비가용

           합계

 폭격기

 B-17

 6

 6

 12

 4

 4

 8

 4

 

 

 

 B-12A

 1

 2

 3

 1

 2

 3

 0

 

 

 

 B-18

 21

 12

 33

 11

 10

 21

 12

 

 

 

 A-12

 2

 0

 2

 0

 0

 0

 2

 

 

 

 A-20

 5

 7

 12

 5

 5

10 

 2

 

 

 

 합계

 35

 27

 62

 21

 21

 42

 20

 

 

 

 전투기

 P-40

 64

 35

 99

 36

 30

 66

 33

 

 

 

 P-36

 20

 19

 39

 16

 19

 35

 4

 

 

 

 P-26

 10

 4

 14

 4

 4

 8

 6

 

 

 

 합계

 94

 58

 152

 56

 53

109

 43

 

 

 

 정찰기

 11

 2

 13

 9

 4

 13

 0

 

 

 

 훈련기 및 잡용기

 3

 1

 4

 1

 1

 2

 2

 

 

 

 합계

 

 143

 88

 231

 87

 79

 166

 65

 

 

 

 

미공군의 공식전사도 231대 중에 64대를 상실했다고 기술하여 거의 비슷한 숫자를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칼 스미스는 '진주만 1941' 에서 상실된 육군항공기가 74대라고 주장했으며 마크 스틸은 'Tora!Tora!Tora! Pearl Harbor 1941' 에서 77대라고 주장했다.

차이는 주로 P-36 전투기의 상실 숫자인데 의회보고서는 4대로 기술한 반면 마크 스틸은 20대라고 주장했다.

 

합동의회조사 보고서에 따르면 해군 및 해병대의 항공기 손실은 다음과 같다.

 

포드 섬 해군비행장 : 77대 중에 33대

에바 해병대비행장 : 49대 중에 33대

카네오헤 해군비행장 : 35대 중에 26대

 

이에 따르면 해군 및 해병대는 총 161대 중에 92대를 상실했다.

또한 엔터프라이즈가 10대를 잃었다.

 

합동의회조사보고서에 따르면 진주만 기습 당시 항공기 숫자는 육군 231대, 해군 및 해병대 161대, 합계 392대에 엔터프라이즈에서 상실한 10대를 합쳐 402대 중 육군 65대, 해군 및 해병대 102대로 합계 167대를 상실한 것이 된다.

그러나 로빈 하임과 스티븐 해리스는 공저 'Why Airforces fail, The Anatomy of Defeat' 에서 미군이 402대의 항공기 중에서 188대를 상실하고 159대에 피해를 입었다고 주장했으며 다른 역사학자들 중에서도 미군기의 손실을 188대, 피해를 157대 또는 159대로 기술한 사람이 많다.

 

전사자는 2,402명으로 해군 2,004명, 해병대 108명, 육군 222명, 민간인 68명이다.

부상자는 1,178명으로 해군 710명, 해병대 69명, 육군 364명, 민간인 35명이다.

 

일본군의 피해는 훨씬 가벼웠다.

2번의 공습 과정에서 상실된 일본기의 숫자는 29대에 지나지 않았다.

항모별로 상실한 함재기의 종류 및 숫자는 다음과 같다.

 

 

 항공모함

 전투기

 함상폭격기

 함상공격기

 합계

 아카기

 1

 4

 0

 5

 카가

 4

 6

 5

 15

 소류

 3

 2

 0

 5

 히류

 1

 2

 0

 3

 쇼가쿠

 0

 0

 0

 0

 즈이가쿠

 0

 1

 0

 1

 합계

 9

 15

 5

 29

 

 

제1차 공습은 기습의 효과로 상실된 항공기는 9대에 지나지 않았다.

함정들을 공격하다가 격추된 항공기는 카가의 97식 함상공격기 5대가 전부였으며 비행장을 공격하다가 급강하폭격기 1대와 제로기 3대가 격추되었다.

제1차 공습에서 피해를 입은 항공기는 제로기 11대, 급강하폭격기 17대, 그리고 함상공격기 18대로서 합계 46대였다.

따라서 제1차 공습에서 파괴되거나 피해를 입은 일본항공기는 55대였다.

 

제2차 공습에서는 기습의 충격에서 깨어난 미군의 반격으로 제로기 6대와 급강하폭격기 14대, 합계 20대가 격추되었다.

피해를 입은 항공기 숫자도 제로기 8대, 급강하폭격기 41대, 함상공격기 16대로 65대에 달했다.

따라서 제2차 공습에서 상실하거나 피해를 입은 항공기는 85대로 제2차 공격에 참가한 167대의 절반이 넘었다.

 

일본군의 갑표적 5척은 별다른 전과를 올리지 못하고 모두 침몰했다.

 

일본군 전사자는 64명(조종사 및 항공승조원 55명, 갑표적 승조원 9명)이며 포로는 1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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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 철수

 

일본함대는 12월 7일 오전 10시부터 제1차 공격대를 수용하기 시작했으며 제2차 공격대는 오전 11시 15분부터 착함하기 시작했다.

마지막 함재기가 착함한 것은 12시 15분이었다.

바다는 이함 당시보다 더 거칠어져 착함이 어려웠다.

일부 기체는 착함하지 못하고 부근 해상에 착수했으며 일본항모의 정비병들은 공격 및 착함 과정에서 심하게 망가진 기체를 바다에 밀어넣었는데 이런 식으로 상실하거나 폐기한 기체가 약 20대에 달했다.

 

공격대가 돌아오면서 전과 집계가 시작되었다.

아카기의 항공장 마스다 쇼고 중좌가 함교에 가까운 비행갑판에 커다란 칠판을 걸어놓고 제1항공함대 뇌격대장인 무라타 시게하루 소좌의 도움을 받아 전과를 표로 만들었다.

제1항공함대의 항공참모 겐다 미노루 중좌가 가끔 비행갑판에 내려와 집계 중인 표를 살펴보고는 함교로 가서 제1항공함대 사령관 나구모 주이치 중장과 참모장 구사카 류노스케 소장에게 보고했다.

 

(일본해군의 항공모함 아카기. 자세한 내용은 여기로)

 

공격대 전체를 지휘했던 후치다 미츠오 중좌의 97식함상공격기는 정오가 약간 지나 착함했다.

나구모 중장은 즉시 후치다 중좌를 호출했으나 후치다 중좌는 자신의 관찰을 동료 조종사와 비교해 보기를 원했다.

후치다 중좌는 칠판 쪽으로 다가가서 표를 살펴보고 주로 중대장급인 15명 정도의 조종사와 대화를 나누었다.

그 결과 후치다 중좌는 자신이 관찰한 바와 동료 조종사들의 의견이 비슷하다는 것을 알았다.

자신의 관찰에 자신감을 가진 후치다 중좌는 나구모 중장을 만나러 갔다.

 

함교에는 나구모 중장, 구사카 소장 및 겐다 중좌 이외에도 아카기의 함장인 하세가와 기치 대좌와 제1항공함대의 선임참모 오이시 다모츠 중좌를 비롯한 몇몇 장교들이 후치다 중좌를 기다리고 있었다.

후치다 중좌는 정식 브리핑 방식으로 시간별로 설명을 시작했으나 나구모 중장이 끼어들었다.

 

"그래서 결과는 어떻게 되었는가?"

 

"전함 4척을 격침하고 4척에 피해를 입혔습니다."

 

후치다 중좌가 대답했다.

그는 이어서 함정에 입힌 피해를 정박 중이던 선석과 함종을 들어가며 하나하나 열거하기 시작했다. 

그때 나구모 중장이 다시 끼어들었다.

 

"자네는 미국함대가 6개월 이내에 바깥으로 나올 수 있다고 보는가?"

 

후치다 중좌는 짜증이 밀려왔으나 꾹 참고 공손하게 대답했다.

 

"미국 태평양함대의 주력은 향후 6개월 동안 밖으로 나오지 못할 것입니다."

 

그러자 나구모 중장은 얼굴이 밝아지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이어서 구사카 소장이 미군의 반격 위험성에 대해 언급하자 후치다 중좌와 겐다 중좌는 오아후와 주변 해상의 제공권은 현재 일본함대가 쥐고 있다며 안심시키려 했다.

그러자 오이시 중좌가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적은 우리 기동부대에 반격할 능력이 없다는 뜻인가?"

 

"적의 비행기를 많이 파괴했지만 전부는 아닙니다. 아마도 적은 기동부대를 공격할 능력을 아직 가지고 있을 것입니다."

 

후치다 중좌의 대답을 들은 오이시 중좌는 입을 다물었지만 불안한 낯빛을 감추지 못했다.

 

이때 나구모 중장이 토론으로 돌아왔다.

 

"자네는 우리가 놓친 적의 항공모함들이 어디에 있다고 생각하는가?"

 

후치다는 솔직하게 대답할 수 밖에 없었다.

 

"아마 해상에서 훈련 중일 것입니다. 그리고 지금쯤은 틀림없이 공격소식을 듣고 기동부대를 찾고 있을 것입니다."

 

대답을 들은 나구모 중장은 크게 걱정했으며 오이시 중좌는 다시 적의 반격 가능성을 거론하면서 겐다 중좌의 의견을 물었다.

 

"올테면 오라지요. 몽땅 격추해버릴 겁니다."

 

겐다 중좌는 호기롭게 대답했다.

 

나구모 중장은 후치다 중좌에게 칭찬을 하고는 내보냈다.

침모들과의 간단한 회의를 거친 나구모 중장은 철수를 결정했다.

 

제2항공전대 사령관 야마구치 다몬 소장은 제3차 공습 준비를 하다가 철수 명령을 받았다.

야마구치 소장은 실망했으나 적극적으로 반대 의견을 내지는 않고 명령에 따랐다.

 

제5항공전대 사령관 하라 주이치 소장과 선임참모 오하시 교조 중좌는 나구모 중장이 제3차 공격명령을 내리지 않을 것이라고 짐작하고 있었다.

미군의 반격을 두려워하던 하라 소장은 철수 명령이 떨어지자 군말없이 따랐다. 

 

공격대의 착함에 이어 전투초계기들이 착함하자 일본함대는 제1급유대와 만나기 위하여 330도로 침로를 바꾸어 26노트의 속력으로 북상했다.

이로써 진주만 기습이 끝났다.

오후 1시경에 나구모 중장은 무선침묵을 깨고 일본에 정박 중이던 야마모토 제독의 기함 나가토에 기습이 성공했다는 사실과 미군에게 입힌 피해를 타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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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 요격 및 수색

 

오아후의 북쪽에 있는 할레이와 비행장은 주로 훈련에 사용되는 예비 비행장으로 일본군은 그 존재를 모르고 있었다.

진주만 기습 당시 할레이와 비행장에는 제47전투비행대대 소속의 P-40 및 P-36 전투기 7대가 주기되어 있었다.

 

(진주만 기습 상황도. http://aerotoons.com/blog/2010/12/)

 

제47전투비행대대의 조지 웰치 소위와 케네스 테일러 소위는 12월 6일 밤에 휠러 비행장에서 벌어진 파티에서 술을 잔뜩 마신 후에 동료들과 함께 7일 아침까지 밤새 카드를 쳤다.

최후의 승자가 판돈을 쓸어담고 있을 때 일본기들이 휠러 비행장을 공격해 왔다.  

웰치 소위와 테일러 소위는 할레이와 비행장에 전화를 걸어 발진준비를 시킨 다음 뷰익 자동차를 타고 달렸다.

 

일본기들이 날아다니는 가운데 시속 160km 에 달하는 엄청난 속력으로 도로를 달린 웰치 소위와 테일러 소위는 오전 8시 30분에 할레이와 비행장에 도착하여 발진 준비를 마친 P-40 전투기를 타고 이륙했다.

그들은 휠러 비행장으로 돌아갔으나 이미 일본기들은 떠난 이후였다.

더 남하한 그들은 에바 해병대 비행장 부근에서 수많은 일본기를 만났다.

 

(커티스 P-40 전투기. 자세한 내용은 여기로)

 

이곳에서 웰치 소위는 아카기와 히류의 급강하폭격기 1대씩 2대를 격추했다.

테일러 소위도 히류의 급강하폭격기 1대를 격추했다.

 

웰치 및 테일러 소위는 휠러 비행장에 내려 무장과 연료를 채운 다음 다시 이륙했다.

두번째 출격에서 그들은 휠러 비행장을 다시 공격해 온 일본기를 요격했다.

웰치 소위는 급강하폭격기 2대를 추가로 격추했으며 테일러 소위 또한 급강하폭격기 1대를 추가로 격추했다.

이날 웰치 소위는 4대, 테일러 소위는 2대를 격추했다.

 

사실 할레이와에서는 해리 브라운 소위가 웰치 및 테일러 소위보다 먼저 P-36 전투기를 타고 이륙하여 역시 P-36 전투기를 타고 휠러 비행장에서 이륙한 제46전투비행대의 말콤 무어 소위와 짝을 이루어 일본기들을 요격했다.

브라운 소위는 이 과정에서 테일러 소위보다 먼저 오아후 섬 북쪽에서 일본기 1대를 격추하여 태평양전쟁에서 미군 조종사로서 최초의 격추를 기록했다.

이날 할레이와 비행장에서는 이외에도 존 데인스 소위, 로버트 로저스 소위, 그리고 존 웹스터 소위가 출격했는데 데인스 소위는 3번째 출격 때 스코필드 병영 상공에서 아군의 대공포화에 맞아 격추되면서 전사했다.

 

(커티스 P-36 호크 전투기. 자세한 내용은 여기로)

 

휠러 비행장에서는 8시 50분에 제46전투비행대대 소속의 P-36 전투기 4대가 이륙했다.

이들은 카네오헤 기지 상공에서 제로기 8대와 교전하여 루이스 샌더스 중위와 필립 라스무센 소위가 각각 제로기 1대씩을 격추했다.

미군 측에서는 고든 스털링 소위가 격추되었다.

휠러 비행장에서는 이날 약 25회에 걸쳐 전투기들을 출격시켰다.

 

(진주만 기습 당시 격추를 기록한 육군항공대 조종사들. 왼쪽부터 루이스 샌더스 중위(1대), 필립 라스무센 소위(1대), 케네스 테일러 소위(2대), 조지 웰치 소위(4대), 해리 브라운 소위(1대). 이들 중 테일러 소위와 웰치 소위는 수훈십자장을 받았다.

 http://ww2db.com/image.php?image_id=6333)

 

벨로우즈 기지에 일본기가 공격해 왔을 때 제44전투비행대대 소속의 P-40 전투기 12대 중 3대만 발진준비가 갖추어진 상태였다.

조지 화이트맨 소위는 이륙하다가 격추되어 전사했다.

한스 크리스티안 소위는 전투기에 탑승하다가 기총소사를 받아 전사했다.

새뮤얼 비숍 소위도 이륙 직후 제로기의 공격을 받아 격추되었다.

비숍 소위의 전투기는 바다에 추락했으며 비숍 소위는 다리에 부상을 입었으나 해안까지 헤엄쳐 돌아오는데 성공했다.

 

하와이 육군항공대는 일본함대에 대해 반격을 시도했으나 수색 방향을 남쪽으로 잡아 일본함대를 포착하는데 실패했다.

오파나 레이더 기지에서의 보고 사항이 아직 전파되지 않은 상태에서 일본기들이 대부분 남쪽으로부터 진주만으로 진입한 것이 이러한 오판을 불러온 원인이었다.

 

오전 11시 27분에 히컴 비행장으로부터  A-20 쌍발폭격기 4대가 발진하여 일본함대를 찾아 남쪽을 수색했다.

오전 11시 40분에는 B-17 폭격기 2대가 역시 남쪽으로 날아가 일본함대를 찾았다.

이들은 남쪽에서 일본함대를 찾지 못하자 북쪽으로 방향을 바꾸어 수색했으나 역시 일본함대에 이르지 못했다.

오후 1시에는 3대의 A-20 쌍발폭격기가 남쪽을 수색했으며 오후 1시 30분에는 2대의 B-18 쌍발폭격기가 역시 남쪽을 수색했다.

육군항공대에서는 일본함대를 찾기 위하여 오후 3시 20분까지 총 48회의 출격을 실시했으나 찾는데 실패했다.

 

해군항공대도 일본함대를 수색했다.

1941년 12월 7일 아침이 되었을 때 제24초계비행대대(VP-24) 소속의 카탈리나 정찰비행정 4대가 잠수함과 합동훈련 중이었다.

제14초계비행대대의 카탈리나 정찰비행정 3대는 오아후 인근을 초계하고 있었으며 이들 중 1대가 워드를 도와 갑표적 I-20 정을 격침했다.

진주만 기습 당시 오아후 섬에 주둔 중이던 카탈리나 정찰비행정 69대 중에서 이들 7대를 포함한 11대만이 살아 남았다.

 

(PBY 카탈리나 정찰비행정. 자세한 내용은 여기로)

 

7일 아침에 엔터프라이즈에서 이함하여 기습 도중에 오아후 섬에 도달한 돈틀레스 18대 중에서 9대는 포드 섬 비행장에서 급유와 무장을 마친 다음 오후 12시 10분에 이륙했다.

이들은 일본함대를 찾아 북쪽으로 160km 정도 날아갔으나 오후 3시 45분에 돌아설 때까지 일본함대와 접촉하지 못했다.

이날 카탈리나 정찰비행정 6대와 해군수송기 5대도 이륙하여 일본함대를 찾았으나 발견하지 못했다.

 

(더글러스 SBD 돈틀레스 급강하폭격기. 자세한 내용은 여기로)

 

7일 오후에 정찰 중이던 엔터프라이즈의 돈틀레스 1대가 오아후 섬 남쪽에서 일본항모 2척을 발견했다고 잘못된 보고를 해왔다.

오후 5시에 제6뇌격비행대대 소속의 데버스테이터 뇌격기 18대가 어뢰를 장비하고 출격했다.

제6전투비행대대의 와일드캣 6대가 호위했으며 뇌격기가 어뢰를 투하할 때까지 일본함정의 눈을 가리기 위하여 연막탄을 장비한 제6폭격비행대대의 돈틀레스 6대가 동행했다.

 

(더글러스 TBD 데버스테이터. 자세한 내용은 여기로)

 

일본함대를 찾지 못한 공격대는 귀로에 올랐는데 와일드캣 6대는 데버스테이터 및 돈틀레스들과 헤어져 진주만의 포드 섬 비행장으로 향했다.

와일드캣의 도착은 반복적으로 고지가 되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오후 9시 10분에 진주만 상공으로 와일드캣이 접근하자 신경이 날카로워져 있던 대공포 사수들이 사격을 시작했다.

치명적인 오인사격으로 6대의 와일드캣 중 4대가 격추되어 허버트 멩게스 소위가 전사했으며 프랜시스 헤벨 중위와 에릭 앨런 중위는 탈출 과정에서 중상을 입어 다음날 사망했다.

멩게스 소위는 제2차 세계대전에서 최초로 전사한 해군전투기 조종사이다.

 

(그루먼 F4F 와일드캣. 자세한 내용은 여기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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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 비행장 폭격

 

제2차 공격대의 97식 함상공격기 54대는 모두 비행장 폭격에 동원되었다.

전함의 장갑판을 뚫기 위하여 800kg 짜리 폭탄을 1발 장비했던 제1차 공격대의 수평폭격기와 달리 제2차 공격대의 수평폭격기는 250kg 짜리 폭탄 1발과 60kg짜리 폭탄 6발, 또는 250kg 짜리 폭탄 2발을 장비했다.

 

시마자키 시게카즈 소좌가 지휘하는 쇼가쿠의 수평폭격기 27대는 히컴 비행장을 공격했다.

이치하라 다츠오 대위가 지휘하는 즈이가쿠의 수평폭격기 제1 및 제2중대 18대는 카네오헤 해군비행장을 공격했고, 아쿠인 요시아키 대위가 지휘하는 제3중대 9대는 포드 섬 비행장을 공격했다.

 

(진주만 기습 상황도. http://upload.wikimedia.org/wikipedia/commons/1/1c/Pearl_Harbor_bombings_map.jpg)

 

아쿠인 요시아키 대위가 지휘하는 쇼가쿠의 수평폭격기 제3중대 9대는 카가에서 발진한 제로기 9대의 호위를 받으며 포드 섬 상공에 진입했다.

제3중대는 자욱한 연기에 휩싸인 포드 섬 비행장을 오전 9시 2분부터 폭격하여 추가로 피해를 입혔다.

카가의 니카이도 야스시 대위가 지휘하던 제로기 9대는 포드 섬 비행장에 기총소사를 가한 후 인접한 히컴 비행장을 공격했으며 돌아가는 길에 휠러 비행장에 기총소사를가했다.

이날 포드 섬 비행장에서는 70대의 비행기 중 카탈리나 정찰비행정 19대를 포함하여 33대의 비행기가 파괴되었는데 대부분 제1차 공격 때 부서졌다.

전사자는 1명이었다.

 

시마자키 시게카즈 소좌가 지휘하는 즈이가쿠의 수평폭격기 27대는 아카기에서 발진한 제로기 9대의 호위를 받으며 히컴 비행장 상공에 진입했다.

남쪽으로부터 진입한 수평폭격기들은 오전 9시 5분부터 격납고와 주변의 막사를 노리고 폭탄을 투하했다.

오전 9시 10분부터 신도 사부로 대위가 지휘하는 아카기의 제로기 9대가 3차례에 걸쳐 기총소사를 가하여 인명피해를 입혔다.

이날 히컴 비행장에서는 폭격기 57대(B-17 12대, B-18 33대, A-20 12대) 중 18대(B-17 4대, B-18 12대, A-20 2대)가 파괴되었고, 다른 19대가 피해를 입었다.

인명피해는 전사 121명, 부상 274명이었다.

(히컴 비행장 공격 상황도. http://the.honoluluadvertiser.com/specials/pearlharbor60/pearl2truck.html)

 

이치하라 다츠오 대위가 지휘하는 쇼가쿠의 제1및 제2중대 소속 수평폭격기 18대는 히류에서 발진한 제로기 8대의 호위를 받으며 카네오헤 해군비행장 상공에 진입하여 오전 8시 55분부터 폭격을 시작했다.

우선적인 목표는 비행장 남쪽의 격납고들이었다.

1번 격납고가 폭탄에 맞아 불타면서 안에 있던 카탈리나 정찰비행정 4대가 상실되었다.

노노 스미오 대위가 지휘하는 히류의 제로기 8대는 1차례 기총소사를 가한 후 벨로우즈 비행장으로 날아갔다.

9시 5분에  소류의 제로기 9대가 카네오헤 비행장에 도착하여 6차례에 걸쳐 기총소사를 가했다

기총소사 도중 소류의 제로기들을 이끌던 이다 후사타 대위의 제로기가 대공포화에 맞아 추락했다.

카네오헤 기지에 주둔 중이던 36대의 카탈리나 정찰비행정 중에서 27대가 파괴되고 6대가 피해를 입었다.

무사한 것은 공격이 시작되기 전에 초계에 나섰던 3대 뿐이었다.

인명피해는 민간인 2명을 포함하여 사망 17명, 부상 67명이었다.

(카네오헤 비행장 공격 상황도. http://the.honoluluadvertiser.com/specials/pearlharbor60/pearl2truck.html)

 

휠러 비행장은 제2차 공격에서는 폭격을 받지 않았으나 대신 공격을 마치고 물러가는 일본기들이 지나가면서 기총소사를 가했다.

오전 9시 15분에 북쪽으로 물러가던 카가의 제로기 7대가 1차례 기총소사를 가했으며 9시 30분에는 카가의 급강하폭격기 16대가 역시 북쪽으로 돌아가는 길에 기총소사를 가했다.

이날 휠러 비행장에서는 140대(P-40 87대, P-36 및 P-26 53대)의 전투기들 중 53대가 파괴되고 30대가 피해를 입었으며 전사자는 37명이었다.

 

(휠러 비행장 공격 상황. http://the.honoluluadvertiser.com/specials/pearlharbor60/pearl2truck.html)

 

벨로우즈 비행장은 이날 폭격은 받지 않았으나 전투기들의 기총소사를 받았다.

기습 당시 벨로우즈 비행장에는 P-40 전투기 12대와 정찰기 8대가 주기 중이었는데 전투기들은 정비를 위하여 무장을 제거한 상태였다.

제2차 공격이 시작되었을 때 12대의 전투기 중 3대의 무장이 완료된 상태였는데 2대는 이륙 직후 히류의 제로기들로부터 공격을 받아 격추되어 조종사 조지 화이트먼 소위는 전사했고 비숍 소위는 부상을 입었다.

나머지 1대는 조종사가 탑승한 상태로 제로기의 총격을 받아 한스 크리스티안 소위가 전사했다.

 

벨로우즈 비행장은 제2차 공격에서 3개 중대의 제로기로부터 기총소사를 받았다.

이날 하루동안 벨로우즈 비행장에서는 전투기 2대가 이륙하려다가 격추되고 정찰기 1대가 지상에서 파괴되었으며 히컴 비행장에 착륙하려다가 공격을 받자 도망쳐 벨로우즈 비행장에 비상착륙한 B-17C 1대도 파괴되었다.

전사자는 전투기 조종사 2명이었다.

(벨로우즈 비행장 공격 상황도. http://the.honoluluadvertiser.com/specials/pearlharbor60/pearl2truck.html)

 

에바 해병대 비행장은 9시 10분부터 10분 간 히류의 제로기들과 아카기의 급강하폭격기들로부터 기총소사를 받았다.

지상요원들이 부서진 비행기에서 떼어낸 기총으로 맹렬하게 반격했으므로 제2차 공격으로 입은 피해는 미미했다.

이날 하루동안 에바 비행장에서는 49대의 비행기중 33대가 파괴되고 15대가 피해를 입었다.

총 32대의 급강하폭격기 중에서 빈디케이터 8대와 돈틀레스 10대, 11대의 와일드캣 중에서 9대, 그리고 잡용기 6대가 파괴되었으며 살아남은 16대 중에서 15대가 피해를 입었다.

인명피해는 전사 4명, 부상 13명이었다. 

(에바 비행장 공격 상황. http://the.honoluluadvertiser.com/specials/pearlharbor60/pearl2truck.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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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 급강하 폭격(2) - 순양함, 구축함 및 기타 함정

 

에구사 다카시게 소좌가 지휘하는 소류의 급강하 폭격기 17대 중 최소한 10대 이상이 해군 공창 지역을 폭격했다.

이들은 해군 공창 부두에 정박 중이던 중순양함 2척(뉴올리언스, 샌프란시스코)과 경순양함 2척(호놀룰루, 세인트루이스)을 노렸다.

 

(진주만 기습 당시 함정의 배치상황. http://maps101blog.com/2010/12/)

 

에구사 소좌는 중순양함 뉴올리언스를 노리고 폭탄을 떨어뜨렸으나 빗나갔다.

이날 중순양함 뉴올리언스와 샌프란시스코는 거의 피해를 입지 않았다.

 

경순양함 호놀룰루는 지근탄에 의하여 피해를 입었다.

250kg 짜리 폭탄 1발이 콘크리트 부두를 관통하여 함체의 좌현에서 6m 정도 떨어진 곳에서 폭발했다.

이 폭발로 40번 프레임을 중심으로 좌현 12m 가량이 늘어났고 철판이 1.5m 이상 안으로 꺼지면서 침수가 발생했다.

침수는 생각보다 심하여 항해가 불가능한 수준이었다.

호놀룰루는 1941년 12월 13일에 전함 펜실베이니아가 빠진 1번 건선거에 들어가 1942년 1월 2일까지 수리를 받았다.

함체 수리가 완전히 끝난 것은 1월 12일이었다.

 

(지근탄에 의한 호놀룰루 함체의 피해. http://www.navsource.org/archives/04/048/04048.htm)

 

경순양함 세인트루이스 부근에는 3발의 지근탄이 떨어졌으나 피해는 없었다.

호놀룰루의 바깥에 정박 중이던 세인트루이스는 오전 9시 31분에 부두를 떠나 25노트의 속력으로 진주만을 빠져나갔다.

세인트루이스의 전투보고서에는 탈출 도중 진주만 입구 부근에서 일본군 갑표적으로부터 어뢰공격을 받았음을 암시하는 부분이 있다.

그러나 오늘날 드러난 사실에 비추어 볼 때 당시 세인트루이스가 갑표적으로부터 공격을 받았을 가능성은 희박하다.

 

히류의 급강하폭격기 4대는 1010부두에 정박 중이던 경순양함 헬레나를 폭격했으나 명중시키지 못했다.

 

아카기의 급강하폭격기 5대는 포드 섬 북쪽에 정박 중이던 경순양함 롤리를 폭격하여 오전 9시 8분에 1발을 명중시켰으나 함체를 그대로 관통하여 해저에서 폭발했다.

 

구축함들도 폭격을 받았다.

공습이 시작되었을 때 구축함 쇼는 1번 건선거 옆에 있는 2번 부유선거 속에 들어 있었는데 오전 9시 12분에 아카기의 급강하폭격기 8대가 폭격했다.

쇼는 3발의 명중탄을 맞았는데 3번째 폭탄이 함교를 뚫고 들어와 함체 내에서 폭발하면서 파편이 연료탱크를 찢었다.

치명적인 화재가 발생했고 진압이 불가능해지자 오전 9시 25분에 퇴함명령이 떨어졌다.

5분 후인 오전 9시 30분에 화재로 인하여 가열된 전방 탄약고가 어마어마한 위력으로 폭발했다.

이날 쇼에서는 24명이 전사했다.

 

(쇼의 전방탄약고가 폭발하는 순간. http://www.navsource.org/archives/05/373.htm)

 

이 폭발로 65번 프레임 앞쪽의 함체는 걸레짝이 되었으나 함체의 중앙과 후반부, 그리고 기계류는 멀쩡하여 부유선거가 가라앉았음에도 불구하고 쇼는 함수를 물에 처 박은 채 떠 있었다.

미해군은 처음에 쇼를 완전 손실로 처리했으나 피해 조사를 해보고 함을 살리기로 결정했다.

 

태평양함대는 1941년 12월 19일에 함수를 물에 처박은 채 떠 있던 쇼를 건져내어 걸레짝이 되어버린 65번 프레임 앞쪽을 잘라내고 나무로 만든 임시 함수를 붙였다.

진주만에서 임시 수리를 마친 쇼는 1942년 2월 9일에 나무함수를 붙인 채로 진주만을 떠나 샌프란시스코 인근의 메어 아일랜드 해군조선소로 갔다.

쇼는 1942년 6월 말까지 메어 아일랜드 해군조선소에서 새로운 함수를 붙이고 말끔하게 수리를 마쳤으며 기존 승조원 60여명을 포함한 승조원들이 탑승했다.

미본토 서해안에서 승조원의 훈련을 마친 쇼는 1942년 8월 31일에 진주만에 돌아옴으로써 일선에 복귀했다.

 

다른 급강하폭격기들이 구축함 데일과 헬름을 폭격했으나 명중시키지 못했다.

 

수상기모함 커티스와 탠지어도 폭격을 받았다.

커티스의 대공포가 9시 5분에 포드 섬 상공에서 급강하폭격기 1대를 명중시켰는데 이 폭격기는 커티스의 우현에 격돌하여 화재를 일으켰다.

이 화재를 잡기 전에 6대의 급강하폭격기가 폭격을 가했고 1발이 격납고에 명중하여 큰 인명피해를 입히면서 추가로 화재를 일으켰으나 승조원들이 30분 만에 화재를 진압했다.

이날 커티스에서는 20명이 전사하고 58명이 부상을 입었다.

 

포드 섬의 북동쪽에 정박 중이던 수상기모함 탠지어도 5대의 급강하폭격기로부터 공격을 받았으나 피해를 모면했다.

 

78대로 이루어진 제2차 공격대의 급강하폭격기들은 14대의 손실을 입은 것에 비하면 전과가 빈약했다.

일본 측은 49발을 명중시켰다고 주장했으나 'Tora! Tora! Tora! , Pearl Harbor 1941' 의 저자 마크 스틸은 명중탄이 15발 내외라고 주장했다.

실제로 모리슨 제독이나 진주만 기습 이후 함정의 인양 및 수리에 실무 책임을 맡았던 호머 월린 제독의 저작, 그리고 함정들의 전투보고서를 살펴보면 마크 스틸의 주장이 사실에 가깝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는 약 20% 에 지나지 않는 명중율로 상대가 대부분 정박 중이던 함정이었다는 점을 감안하면 실망스러운 수준이었다.

가장 큰 원인은 구름의 고도가 1,700m 정도로 낮아서 급강하폭격기들이 교리에서 규정한 4,000m 대신 훨씬 낮은 1,500m 고도에서 급강하를 시작할 수 밖에 없었다는 점이었다.

또한 기습효과가 사라져 소수의 미국 전투기가 이륙하여 요격에 나섰고 미함정들 또한 대공포를 사용하여 치열하게 반격을 가함으로써 폭격에만 집중하기 어려웠다.

이외에 제1차 공격에서 함정과 지상 시설에 발생한 화재의 연기가 조준을 방해했다는 점도 급강하폭격의 명중율을 떨어뜨린 요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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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 급강하 폭격(1) - 전함 폭격

 

시마자키 시게카즈 소좌가 이끄는 제2차 공격대는 167대로 이루어져 있었다.

제2차 공격대에는 뇌격기가 참가하지 않았으며 97식함상공격기들은 모두 수평폭격에 투입되었다.

 

54대로 이루어진 수평폭격기들은 3개로 나뉘어 27대는 히컴 비행장, 18대는 카네오헤 해군비행장, 그리고 9대는 포드 섬 비행장을 폭격했다.

78대에 달하는 급강하폭격기들은 제2차 공격대의 주력으로 포드 섬 및 해군 공창 부두의 항공모함과 순양함을 공격할 임무를 띠고 있었다.

35대로 이루어진 제로기는 우선 폭격기들을 호위한 다음 비행장 공격에 참가했는데 18대는 포드 섬과 히컴 비행장을, 17대는 카네오헤 및 벨로우즈 비행장을 공격했다.

 

제2차 공격대는 7일 오전 8시 40분에 오아후 섬의 북동쪽 해상에 도달했다.

시마자키 소좌는 오전 8시 54분에 공격명령을 내렸는데 이는 다소 늦은 시간으로 실제로 급강하폭격기들은 이미 폭격을 시작한 이후였다. 

제2차 공격대의 선두는 제1차 공격대가 떠난 지 25분 후에 도착했다.

 

(진주만 기습 상황도. http://upload.wikimedia.org/wikipedia/commons/1/1c/Pearl_Harbor_bombings_map.jpg)

 

소류의 에구사 다카시게 소좌가 지휘하는 급강하폭격기대는 아카기, 카가, 소류 및 히류의 99식 함상폭격기 78대로 이루어져 있었으며 당시 일본해군에서 최고의 기량을 자랑하는 급강하 폭격기 조종사들이 조종하고 있었다.

이들의 제1목표는 항공모함, 제2목표는 순양함 그리고 제3목표가 전함이었는데 이는 급강하폭격기가 장비한 250kg 짜리 폭탄이 전함의 갑판을 뚫을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항공모함이 없었기 때문에 계획에 따르면 순양함에 집중적인 공격이 가해져야 했으나 실제로는 그렇지 못했다.

미해군의 기록을 살펴보면 가장 많은 숫자인 약 30대가 전함을 공격했고 단지 17대가 순양함을 공격했다.

또한 최소한 16대가 구축함을 공격했으며 12대는 기타 함정을 공격했다.

 

전함을 공격한 약 30대의 급강하폭격기들 가운데 절반 이상이 진주만을 탈출하려던 네바다를 공격했다.

제1차 공습 당시 카가의 뇌격기로부터 어뢰 1발을 얻어맞은 네바다는 수선 하에 15m x 8m 의 구멍이 뚫리면서 동력이 꺼졌으나 오전 8시 40분에 동력을 회복하고 애리조나로부터 흘러나온 불타는 중유를 피하여 전함열을 떠났다.

오전 8시 48분에 급강하폭격기들이 진주만 상공에 도달했을 때 네바다는 진주만 입구로 나가기 위하여 포드 섬의 동해안을 따라 남쪽으로 항해 중이었다. 

 

(진주만 기습 당시 네바다의 움직임. 출처 : Why, How, Fleet Salvage and Final Appraissal, Homer N. Wallin, Naval History Division, P.213)

 

진주만 상공에 남아 있던 후치다 미츠오 중좌는 네바다가 진주만을 빠져나가려고 한다는 사실을 알았다.

네바다를 격침하면 진주만을 봉쇄할 수 있다고 생각한 미츠오 중좌는 급강하폭격기대를 지휘하던 에구사 소좌에게 네바다를 격침하라고 명령했다.

 

마키노 사부로 소좌가 지휘하는 카가의 급강하폭격기 26대 중에서 제1 및 제3중대 17대가 네바다를 노리고 급강하했다.

네바다는 모든 대공포를 동원하여 반격했으나 역부족이었다.

곧 네바다 주위에 지근탄이 떨어지기 시작하더니 공격 시작 2분 만인 8시 50분까지 5발이 명중했다.

17분 후인 9시 7분에 카가의 제2중대 소속 급강하폭격기가 1발의 폭탄을 추가로 명중시켰다.

 

6발의 폭탄 중 4발이 1번 포탑 앞쪽의 함수에 명중했다.

이 폭탄들은 이미 어뢰 1발을 맞은 함수에 더 많은 구멍을 뚫어 침수를 가속화시켰으며 화재를 일으켰다.

화재가 전방 탄약고를 위협하자 네바다는 전방 탄약고를 침수시켜야 했고 이로 인하여 함수는 더욱 낮아졌다.

다른 1발은 굴뚝의 기저부에 명중했으며 나머지 1발은 승조원 취사실에 명중했다.

 

기뢰부설함 오글라라에서 공습 장면을 지켜보던 태평양함대 기뢰부대 사령관 윌리엄 펄롱 소장은 일본군이 진주만 입구로 나가는 수로에 기뢰를 깔아놓았을지 모른다고 의심했다.

진주만 입구로 나가던 네바다가 기뢰에 접촉하여 침몰하면 항구가 봉쇄될 수 있었다.

 

펄롱 소장은 네바다에게 좌초하라는 명령을 내렸고 공습 당시 네바다의 최선임 장교였던 프랜시스 토머스 소령은 이 명령에 따라 오전 9시 10분에 네바다를 호스피탈 곶에 좌초시켰다.

잠시 후 펄롱 소장은 네바다를 바닥이 단단한 곳으로 옮기기 위하여 예인함 호가와 아보셋을 파견했다.

호가와 아보셋은 호스피탈 곶에서 네바다를 끌어내어 오전 10시 30분에 포드 섬 남안의 건너편 와이피오 곶의 후미에 있는 단단한 바닥에 다시 좌초시켰다.

이날 네바다에서는 1,484 명의 승조원 중에서 50명이 전사하고 109명이 부상을 입었다.

 

(와이피오 곶 후미에 좌초한 네바다. 옆에 예인함 호가와 아보셋이 보인다. http://www.navsource.org/archives/01/36c.htm)

 

와이피오 곶의 후미에 좌초한 네바다는 진주만 기습 2개월 후인 1942년 2월 12일에 인양되었다.

진주만에서 응급수리를 받고 미본토 서해안의 퓨젯사운드 조선소에 들어간 네바다는 1942년 10월까지 수리, 오버홀 및 근대화 개장을 받았다.

개장을 마친 네바다는 미본토 서해안에서 대기하다가 1943년 5월의 애투섬 상륙작전에 화력지원을 담당하면서 일선에 복귀했다.

 

일본 측은 급강하폭격기들이 네바다를 제외하고 전함열에 있던 전함에게 추가로 21발의 폭탄을 명중시켰다고 주장했으나 실제로 네바다를 제외하면 전함열의 전함 중 의미있는 피해를 입은 것은 캘리포니아가 유일하다.

오전 8시 45분에 소류와 히류의 급강하폭격기 3대가 캘리포니아에 달려들어 1발의 명중탄을 기록했다.

이 폭탄은 대공포 탄약고에 떨어져 약 50명을 죽였다.

 

(진주만 기습 당시 함정의 배치상황. http://maps101blog.com/2010/12/)

 

태평양함대의 기함인 전함 펜실베이니아는 진주만 기습 당시 구축함 캐신 및 다운즈와 함께 1번 건선거에 들어 있었다.

펜실베이니아는 첫번째 공습을 무사히 넘겼으나 두번째 공습에서는 소류 소속의 급강하폭격기 9대로부터 공격을 받았다.

오전 9시 6분에 이들이 떨어뜨린 폭탄 중 1발이 펜실베이니아의 단정갑판에 명중했다.

함체의 피해는 크지 않았으나 이날 펜실베이니아에서는 1,476명의 승조원들 중 18명이 전사하고 30명이 부상을 입었다.

 

펜실베이니아는 1941년 12월 20일에 진주만을 떠나 샌프란시스코로 가서 1942년 3월 30일까지 수리를 받았다.

이후 후방을 전전하며 훈련과 방어를 맡다가 1942년 10월 4일부터 1943년 2월 5일까지 메어 아일랜드 해군조선소에서 오버홀 및 근대화 개장을 받았다.

개장을 마친 펜실베이니아는 1943년 5월 11일에 애투 섬 포격에 참가하면서 일선에 복귀했다.

 

(공습을 받은 직후 펜실베이니아의 모습. 앞에 쓰러진 구축함은 캐신, 그 옆은 다운즈이다.

http://www.navsource.org/archives/01/38c.htm)

 

펜실베이니아 앞에 있던 구축함 캐신과 다운즈는 펜실베이니아를 노린 폭탄을 맞았다.

캐신은 2발을 맞았다.

첫번째 폭탄은 캐신의 140번 프레임을 통과하여 건선거 바닥에서 터지면서 화재를 일으켰다.

두번째 폭탄은 캐신의 60번 프레임을 관통하면서 폭발하여 캐신과 다운즈의 중유탱크를 파열시켰다.

다운즈 또한 함교에 1발을 맞았다.

 

캐신과 다운즈에서 흘러나온 중유가 건선거 바닥에서 불타 오르면서 자욱한 연기가 솟아올랐다.

잠시 후 가열된 다운즈의 어뢰가 폭발하면서 다운즈와 캐신의 함체는 큰 피해를 입었으며 캐신은 폭발의 충격으로 다운즈 쪽으로 쓰러졌다.

당황한 기술자가 화재를 잡기 위하여 건선거에 물을 집어넣었으나 오히려 물 위로 불타는 중유막이 퍼지도록 만들었을 뿐이었다.

이날 다운즈에서는 12명이 전사했다.

 

태평양함대는 1942년 2월 5일에 쓰러진 캐신을 일으켜 세웠고, 다음날인 2월 6일에는 임시로 수리한 다운즈를 건선거에서 빼내었다. 

임시 수리를 바친 캐신은 2월 18일에 건선거에서 나왔다.

캐신과 다운즈의 함체 피해는 심각했다.

미해군은 캐신과 다운즈의 함체는 해체하되 각종 기계와 부품은 거두어서 새로운 함체에 옮겨 재취역시키기로 했다.

 

다운즈는 1942년 8월에, 캐신은 10월에 해체되었으며 그 기계와 부품은 샌프란시스코 인근의 메어 아일랜드 조선소로 보내졌다.

메어 아알랜드 조선소에서는 새로 만든 함체에 다운즈와 캐신의 기계와 부품을 채워 넣었다.

이리하여 다운즈는 1943년 11월 15일에, 캐신은 1944년 2월 15일에 기존의 함명과 함체 번호를 유지한 채로 재취역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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