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 루스벨트의 대응

 

1941년 12월 7일은 일요일이었다.

오전 10시에 프랭클린 루스벨트 대통령의 해군보좌관인 존 비어달 대령이 헐-노무라 회담의 결렬을 통보하는 일본군의 외교전보 중 마지막 14번째 전보를 해석한 것을 들고와서 보고했다.

대통령은 전쟁이 임박했다고 느꼈다. 

비어달 대령이 떠난 후 대통령은 정오까지 주치의인 로스 맥킨타이어 해군소장과 일본과의 전쟁에 대해 이야기했다.

 

(프랭클린 댈러노 루스벨트 대통령. 자세한 내용은 여기로)

 

그날 대통령의 첫 공식일정은 오후 12시 30분에 시후 중국대사를 접견한 것이었다. 

대통령은 시후 대사에게 자신이 일본천황에게 보낸 전문에 대해 설명한 후 일본이 타국에 대한 간섭을 중단하고 군사적 긴장을 완화시키지 않는 한 미국과 일본은 전쟁을 피할 수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오후 1시 10분에 시후 대사가 물러가자 대통령은 보좌관인 해리 홉킨스와 함께 점심을 먹은 다음 집무실의 책상에 앉아 취미인 우표 정리를 시작했다.

홉킨스는 소파에 앉아 우표 정리를 하는 대통령과 일본과의 전쟁 가능성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다.

잠시 후 전화가 울렸다.

 

진주만 기습 당시 하와이 해군항공대 작전참모였던 로건 램지 소령은 태평양함대 총사령관 허즈번드 킴멜 제독 명의로

 

"공습, 진주만 - 이것은 훈련이 아니다."

(Air raid, Pearl Harbor - This is no drill.)

 

라는 방송을 내보냈다.

샌프란시스코의 해군 기지에서는 이 방송을 듣자 즉시 워싱턴으로 전문을 보냈다.

전문이 해군장관 프랭크 녹스의 손에 도달했을 때 그는 해군참모총장 해럴드 스타크 대장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맙소사, 이건 사실이 아닐거야, 틀림없이 필리핀을 뜻하는 것이겠지."

("My god, this can't be true, this must mean the Philippines.")

 

녹스 장관은 스타크 제독에게 전문을 보여주며 중얼거렸다.

스타크 제독은 방송이 태평양함대총사령관(CINCPAC) 명의로 나온 것을 보고는 말했다.

 

"아닙니다, 장관님, 이건 진주만입니다."

("No,sir, this is Pearl.")

 

녹스 장관은 즉시 백악관에 전화를 걸었다.

미동부시간으로 1941년 12월 7일 오후 1시 47분, 최초의 폭탄이 휠러 비행장에 떨어진 지 26분 후에 루스벨트 대통령은 점심을 먹고 휴식 시간에 취미인 우표 정리를 하다가 진주만 기습을 알리는 녹스 장관의 전화를 받았다.

(미동부시간은 하와이보다 5시간 30분 빠르다. 따라서 휠러 비행장에 처음으로 폭탄이 떨어진 7일 오전 7시 51분은 워싱턴에서는 7일 오후 1시 21분이다.)

 

"대통령 각하, 호놀룰루로부터 그 지역의 우리군 총사령관 명의로 우리의 모든 기지가 항공공격을 받고 있으며 '이건 훈련이 아니다.' 라는 내용의 방송을 청취했습니다. 일본이 진주만을 공격한 듯합니다."

("Mr. President, they had picked up a radio from the Commander-in-Chief of our forces there advising all our stations that an air raid attack was on and that it was 'no drill.' It appeared as if the Japanese have attacked Pearl Harbor.")

 

녹스 장관이 말을 마치자 대통령이 소리질렀다.

 

"노!"

("No!")

 

대통령은 전화를 끊고 홉킨스에게 내용을 말했다.

홉킨스는 잘못된 정보라고 생각했으나 대통령은 직감적으로 사실이라는 걸 알았다.

 

대통령과 홉킨스는 외부로 전화를 걸기 시작했고 이어서 외부에서 사실확인과 보고를 위한 전화가 폭주하면서 백악관의 전화교환대가 불난 호떡집 마냥 바빠졌다.

당시 백악관에는 외부와 연결된 직통 전화가 없이 모두 교환대를 거쳐야 했는데 그날은 일요일이고 한가할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여자인 교환수 2명 중 제시 길이라는 이름의 신참 교환수만이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1933년부터 백악관에서 교환수로 일한 고참 루이스 핵마이스터는 백악관에서 지척인 자신의 집에서 휴일을 즐기고 있었다.

홉킨스는 길에게 몇 명의 보좌관에게 전화하여 빨리 백악관으로 달려오도록 전하라고 말했으며 대통령은 외교정책에 대한 몇 명의 고위급 조언자와 연결해 달라고 말했다.

순식간에 엄청난 전화 연결 요청이 초를 다투어 밀려드는 상황에서 길은 결단을 내렸다.

그녀는 핵마이스터에게 가장 먼저 전화를 걸어 도와달라고 요청했다.

길의 판단은 정확했다.

오후 2시에 핵마이스터가 달려와서 합류했음에도 두 사람은 쏟아지는 전화를 처리하느라 오후 11시까지 9시간 이상 자리에서 일어날 수 없었다. 

핵마이스터의 회고에 따르면 나중에 일어서려 하자 다리가 풀려 제대로 일어설 수가 없었다고 한다. 

 

자신의 아파트에서 쉬고 있던 루스벨트 대통령의 비서 그레이스 털리는 전화를 받고 즉시 옷을 차려입고 백악관으로 출근했으며 집에서 낮잠을 자고 있던 대통령의 아들 제임스 루스벨트 해병대위도 전화를 받고 백악관으로 달려왔다.

 

대통령이 최초로 전화를 건 사람은 육군장관 헨리 스팀슨으로 시간은 오후 2시 5분이었다.

아침에 육군성에 출근했다가 집으로 가서 점심을 먹고 있던 스팀슨 장관은 전화를 받을 때까지 진주만 기습을 모르고 있었다.

스팀슨 장관은 전화를 받은 후 서둘러 식사를 마치고 육군성으로 돌아갔다.

 

대통령은 이어서 국무장관 코델 헐에게 전화를 걸어 진주만 기습을 알렸다.

헐 장관은 전화를 끊고 나서 사무실 밖에서 대기하고 있던 노무라 기치사부로 일본대사와 구루스 사부로 특사를 접견했다.

 

대통령은 이때쯤 이미 언론에 대한 대책을 생각하고 있었다.

그가 다음으로 전화를 건 상대는 언론비서관 스티브 얼리였다.

얼리가 전화를 받았을 때 그는 느지막히 일어나 샤워를 하고나서 목욕 가운만 걸친 채였다.

대통령은 진주만 기습에 대해 간단하게 설명하고 지시를 내린 다음 전화를 끊었다.

 

얼리는 전화를 끊자마자 백악관의 전화교환대에 요청하여 미국의 3대 통신사인 AP(Associated Press), UP(United Press), 그리고 INS(International News Service) 와 동시 통화를 요청했다.

UP와 INS 는 1958년에 합병하여 UPI 가 된다.

 

오후 2시 22분에 동시 통화가 연결되자 얼리는 3대 통신사에 진주만 기습을 알리는 대통령의 짧은 성명을 발표한 후 추가로 정보가 들어오는 대로 즉시 알려주겠다고 약속했다.

3대 통신사는 경악하면서 이 놀라운 정보를 서둘러 전파했다.

이로써 루스벨트 대통령은 사건 초기에 정보의 흐름을 통제하겠다는 목적을 달성했다.

 

3대 통신사는 진주만 기습 이후 불과 1시간 만에 이런 놀라운 뉴스를 신속하게 알려준 백악관에 커다란 신뢰를 느꼈다.

나아가 극도로 혼란한 진주만 기습 직후 상황에서 스스로의 힘으로 뉴스를 찾아내고 신빙성을 평가하여 보도하는 힘들고 어려운 과정을 감수하는 대신 백악관이 제공하는 정보를 경쟁사보다 늦게 받아보는 일이 없도록 백악관의 발표에 온 신경을 곤두세우게 되었다.

루스벨트 대통령은 이런 식으로 언론이 다루는 뉴스의 원천을 대부분 공급하는 3대 통신사의 기선을 제압하여 백악관만 바라보도록 만듦으로써 언론 검열 준비가 갖추어지기 전의 며칠 동안 정보의 흐름을 통제하는데 성공했다.

 

오후 3시가 넘어가자 루스벨트 대통령의 핵심 참모들이 백악관 2층의 대통령 집무실(Oval Study)에 모이기 시작했다.

(미국 대통령의 집무실은 오늘날에는 Oval Office 또는 Oval Room 으로 부른다.)

오후 3시 5분에 녹스와 스팀슨 장관이 도착했고 잠시 후 조지 마셜 육군참모총장과 헐 장관이 도착했다.

이외에 참석자는 비서 그레이스 털리, 언론비서관 스티브 얼리, 그리고 인사비서관  마빈 매킨타이어 등이었다.

주치의 로스 맥킨타이어 소장은 허겁지겁 달려들어와 대통령의 건강 상태를 관찰했으며 대통령을 그림자처럼 따라다니는 해리 홉킨스도 물론 참석했다.

 

대통령 집무실에서 회의가 진행되는 동안 해군성에 머무르고 있던 해군참모총장 해럴드 스타크 대장은 새로 들어온 사항들을 전화로 계속 보고했다.

스타크 총장의 전화는 대부분 비서인 그레이스 털리가 받아 메모한 다음 타자로 쳐서 대통령에게 전달했다. 

털리는 회의를 방해하지 않고 주변의 소란을 피하여 대통령의 침실에서 전화를 받았다.

 

시간이 갈수록 스타크 총장이 보고하는 피해 규모는 눈덩이처럼 불어났고 참석자들은 충격을 받았다.

루스벨트 대통령은 털리가 건네준 메모를 읽을 때마다 입을 꽉 다물고 침묵을 지켰다. 

이런 침묵은 루스벨트 대통령이 충격을 받거나 커다란 분노를 느낄 때 보여주는 전형적인 반응이었다.

 

회의는 무거운 분위기에서 시작되었다.

스팀슨과 녹스 장관은 일본군이 하와이에 상륙하거나 미본토 서해안을 공격할 수 있다고 말했다.

 

대통령은 충격과 분노 속에서도 침착하게 회의를 이끌어 나갔다.

그는 마셜 장군에게 미군의 배치 상태를 물은 다음 필리핀의 맥아더 장군에게 일본의 위협에 대비하도록 단단히 일러두라고 명령했다.

마셜 대장은 백악관으로 오기 전에 이미 맥아더 장군에게 그런 명령을 내리고 출발했었다.

 

대통령은 이어서 헐 장관에게 라틴 아메리카 국가들에게 사실을 알리고 우호 관계를 유지하라고 명령했다.

실제로 대통령은 이때 라틴 아메리카에 대해 상당한 시간을 들여 토의했다.

 

루스벨트 대통령은 집권 이래 파나마 운하의 안전과 직결된 라틴 아메리카에 대해 공을 많이 들였다.

그는 라틴 아메리카 국가들에 대해 관세를 50% 나 깎아 주어 미국과 라틴 아메리카 사이의 교역을 늘렸다.

유럽에서 전쟁이 발발하자 대통령은 라틴 아메리카에 더욱 신경을 썼다.

라틴 아메리카 국가들과 협상을 벌여 군사기지를 확보했으며 군사고문단을 파견하고 라틴 아메리카 국가의 장교들을 미국의 군사학교에 유학시켰다.

또한 라틴 아메리카 국가의 주요 인물들 중 나치스와 관련된 자들의 목록을 만들어 이들을 공직에서 추방하도록 요구했다.

 

진주만 기습 이후에도 미국은 라틴 아메리카에 렌드리스를 나누어 주면서 공을 들였다.

렌드리스를 받은 38개국 중에 라틴 아메리카 국가가 절반인 19개로 아르헨티나를 제외한 모든 라틴 아메리카 국가들이 많건 적건 미국이 나누어 주는 렌드리스를 받아 챙겼다.

라틴 아메리카에서 가장 많이 받은 브라질은 3억 3천만 달러가 넘는 렌드리스를 받았는데 이는 대영제국, 소련, 프랑스, 중국에 이어 5번째로 많은 것이었다.

 

이어서 대통령은 다음날 의회에 선전포고를 요청할 것이라고 말했다.

회의는 오후 4시 15분에 끝났다.

 

회의가 끝난 직후 영국수상 윈스턴 처칠로부터 전화가 왔다.

루스벨트 대통령은 처칠수상에게 진주만 기습이 사실이라고 확인해 주고 다음날 의회에 선전포고를 요청할 것이라고 말했다.

 

대통령은 이후 연설문을 구상하기 시작했다.

일요일이라 연설원고작성자가 워싱턴에 없었기 때문에 그는 자신의 연설문을 직접 작성해야만 했으나 문제는 없었다.

루스벨트 대통령은 대학 시절  교지인 하버드 크림슨의 편집장을 맡았으며 자신이 항상 작가라고 생각했다.

그는 자신이 무엇을 이야기하고 싶은지 알고 있었으며 그것을 어떻게 표현할지도 정확하게 알고 있었다.

 

구상을 마친 대통령은 오후 4시 50분에 비서 털리를 불러 구술을 시작했다.

 

"어제 쉼표 12월 7일 쉼표 1941년 줄 은.."

("Yesterday comma December 7th comma 1941 dash a day which will live..")

 

털리가 타자기를 두드리자 500 단어도 채 되지 않지만 역사상 가장 유명해진 연설이 처음으로 모습을 드러내었다.

 

연설문 작성을 마친 대통령은 오후 5시 30분에 백악관 내의 진료실에 가서 주치의 매킨타이어 소장으로부터 70분간 축농증 치료를 받았다.

치료의 상세한 내용은 루스벨트 대통령의 진료 기록이 서거 직후 사라졌기 때문에 정확하게 알 수는 없지만 코카인을 사용했을 가능성이 있다.

19세기 말까지 코카콜라에도 들어가는 등 널리 사용되던 코카인은 20세기 들어오면서 마약으로 규정되어 강력한 제재를 받았으나 1940년대에도 마취과 및 이비인후과에서는 광범위하게 사용하고 있었다.

1959년까지도 미국의 이비인후과 교과서에는 1%로 희석한 코카인이 비점막 부종 치료제로 올라 있었다.

 

루스벨트 대통령이 코카인 사용을 알았을 가능성은 희박하다.

당시는 환자가 의사에게 치료에 사용하는 약물이 무엇인지 묻는 시대가 아니었으며 루스벨트 대통령도 예외가 아니었다.

물론 비점막의 부종을 가라앉힐 목적으로 1% 로 희석한 코카인을 소량 비내에 분무하거나 면봉에 묻혀 비점막에 문질렀다고 해서 코카인이 대통령의 판단이나 행동에 영향을 끼쳤을 가능성은 없다.

 

치료를 마친 루스벨트 대통령은 집무실에서 아들 제임스, 보좌관 홉킨스, 그리고 비서 털리와 함께 저녁을 먹었다.

아무도 진주만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

모두들 대통령이 식사 시간이나마 느긋하게 쉴 수 있기를 바랬다.

 

오후 8시 30분부터 루스벨트 행정부의 각료들이 모여 회의를 시작했다.

정식 각료가 아니면서 참석한 사람은 홉킨스 뿐이었다.

대통령은 다음과 같은 말로 회의를 시작했다.

 

"이것은 1861년 이래로 가장 중요한 내각 회의입니다."

("This is the most serious meeting of the Cabinet that had taken place since 1861.")

 

회의에 참석한 각료 중에는 일본이 진주만을 기습했다는 사실만 들은 상태로 달려온 사람도 있어서 대통령은 처음부터 상황을 설명했다.

이때 대통령은 자신이 받은 최신 정보까지 포함하여 알고 있는 바를 그대로 전달했다.

 

'오전 8시경에 일본의 비행기가 진주만의 함정과 모든 비행장을 폭격했다...유감스럽게도 인명피해는 매우 크다..전함 8척이 모두 피해를 입었으며 3척은 가라앉았고 어쩌면 1척이 더 가라앉을지 모른다.구축함 2척은 건선거 안에서 폭격을 받아 대파되었으며 건선거 자체도 피해를 입었다. 다른 함정들도 일부 격침되거나 피해를 입었다. 살아남은 함정들은 해상에 나와 일본함대를 수색 중이다.'

 

는 내용이었다.

 

이어서 루스벨트 대통령은 다음날 상하원이 모두 모이는 양원합동회의 개최를 요청할 것이라고 말했다. 

회의가 진행되는 동안 밖에서는 의회 지도자들이 모여 회의가 끝나기를 기다리면서 서로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대통령은 다음날의 의회 연설에서 일본에 대한 선전포고를 요구할 것이라면서 털리가 타이핑한 연설문을 꺼내 읽어주었다.

헐 국무장관은 너무 짧다고 주장했고 스팀슨 육군장관도 동조했다.

헐 장관은 연설에서 일본과의 교섭 과정을 상세히 설명해야 한다고 주장했으며 각료들은 대부분 동조했다.

스팀슨 장관은 일본 뿐만 아니라 독일과 이탈리아에 대한 선전포고도 요구해야 한다고 주장했으나 이번에는 각료들이 대부분 반대했다.

독일과 주고받은 일본의 외교암호를 해독한 결과 일본과 미국이 개전하면 독일 또한 미국에게 선전포고를 할 가능성이 높았으므로 굳이 먼저 선전포고를 할 이유가 없다는 것이었다.

루스벨트 대통령은 헐의 주장이든 스팀슨의 주장이든 받아들일 생각이 없었다.

 

내각 회의는 피해에 대해 언급하지 말아야 하며 언론과의 접촉은 백악관에 맡겨야 한다는 당부를 마지막으로 오후 9시가 조금 지나 끝났다.

루스벨트 대통령과 월래스 부통령, 녹스 및 스팀슨 장관, 그리고 홉킨스는 집무실에 남았고 다른 각료들은 집무실을 떠났다.

 

이어서 기다리던 의회 지도자들이 집무실로 들어갔다.

상원에서는 상원의장 알벤 바클리, 공화당 대표 찰스 맥네리, 외교위원장 토마스 코날리, 공화당 외교위원 하이람 존슨 등이 참석했다.

하원의장 존 맥코믹은 시간 내로 도착하지 못해 제이 쿠퍼 의원이 대신 참석했으며 공화당 대표 조셉 마틴도 참석했다.

하원에서는 이외에도 외교위원장 솔 블룸, 민주당 원내 총무 리스터 힐, 하원 대변인 샘 레이번 등이 참석했다.

원칙대로라면 하원 외교위원회의 공화당 선임위원인 해밀턴 피시도 참석해야 했으나 그는 강경한 고립주의자로서 렌드리스 법안을 지독하게 비난했다.

루스벨트 대통령이 피시를 백악관에 들이고 싶어하지 않았으므로 홉킨스는 그를 제외하고 대신 외교위원회에서 공화당원으로 두번째 서열인 찰스 이튼을 초대했다.

 

의원들이 집무실로 들어가자 루스벨트 대통령은 심각한 얼굴로 앉아 있다가 모두들 자리를 잡고 앉자 시가를 꺼내더니 홉킨스를 시켜 의원마다 일일이 1대씩 돌렸다.

시가에 불을 붙여 입에 물자마자 대통령은 벌컥 화를 내며 일본대사가 마지막까지 협상하는 척 했다면서 국가 간에 이런 식으로 뒷통수를 친 예는 일찌기 없었다면서 핏대를 올렸다. 

의원들은 같이 시가를 물고 앉아 일본에 대한 분노를 터뜨리는 대통령을 보면서 그가 진심으로 자신들을 대하고 있다고 느꼈다.

 

그러나 이것은 루스벨트 대통령의 노림수였다.

대통령은 각료들과는 달리 의원들에게 한 말은 몇 시간 내로 언론에 퍼지리라는 걸 알고 있었다.

그는 의원들의 입을 통하여 진주만의 피해 사실이 낱낱이 언론에 보도되어 대중들에게 충격을 주는 상황을 원하지 않았다.

따라서 그는 일단 의원들을 안심시켜 진실을 말하고 있다고 믿게 만든 다음 피해 사실을 교묘하게 숨겼다.

대통령은 의원들에게 거짓말을 하지는 않았지만 진실을 다 말하지도 않았으며 해군의 준비 태세를 강조하고 피해를 얼버무리는 방식으로 진주만에서 벌어진 참상의 느낌을 실제보다 약하게 만들어 전달했다.

그렇게 신경을 썼음에도 불구하고 의원들은 상당한 충격을 받았다.

 

진주만 기습에 대한 보고를 마친 대통령은 다음날 12시 30분에 상하양원합동회의를 소집해 달라고 요청했다.

의원들은 소집 요청을 받아들이면서 대통령에게 어떤 내용의 연설을 할 것인지, 의회에 선전포고를 요청할 것인지, 만일 요청한다면 일본에 대해서만 요청할 것인지 아니면 독일과 이탈리아도 포함할 것인지 물었다.

루스벨트 대통령은 아직 연설문을 준비하지 못했다면서 자세한 것은 연설문을 만들어 봐야 안다고 말했다.

당시 대통령은 양복 안주머니 속에 타이핑된 연설문을 가지고 있었으며 불과 몇 십분 전에 그걸 각료들에게 읽어주고 의견을 물은 후였다.

하지만 대통령은 의원들의 입을 통하여 자신의 연설 내용이 미리 대다수 의원들과 대중에게 새어나가 극적인 효과가 떨어지는 걸 원하지 않았다. 

 

이제 의원들을 불러 다음날 양원합동회의를 소집한다는 목적을 달성한 루스벨트 대통령은 회의를 끝내고 싶어했지만 상황은 그렇게 돌아가지 않았다.

회의 내내 충격과 분노에 휩싸여 있던 상원 외교위원장 토머스 코날리가 다시 진주만 이야기를 꺼냈다.

코날리는 대통령에게 어떻게 이런 일이 벌어졌으며 일본군에게는 어떤 피해를 입혔는지 물었다.

대통령은 일본군에게 큰 피해를 입혔다는 정보는 없으며 일본잠수함을 공격한 것 같은데 역시 정확한 사실은 알 수 없다는 식의 원론적 대답 밖에 할 수 없었다.

루스벨트 대통령의 대답에 만족하지 못한 코날리는 대신 녹스 해군장관을 몰아 세웠다. 

 

"당신은 지난달 우리가 일본을 2주 만에 해치울 수 있다고 말하지 않았습니까? 당신은 우리 해군이 잘 준비하고 있으며 일본이 절대로 해치지 못하는 곳에 자리잡고 있다고 말하지 않았나요? 당신은 단지 일 잘하는 해군장관이라는 걸 자랑하려고 공식석상에서 그런 말을 한 것입니까?"

 

불쌍한 녹스 장관은 고개를 푹 숙이고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루스벨트 대통령은 무표정한 얼굴로 앉아있을 뿐이었다.

대통령에게 향할 비난을 대신 짊어지는 것도 각료의 임무 중 하나였다.

코날리는 녹스 장관을 계속 몰아붙였다.

 

"당신은 왜 함정들을 모두 그렇게 좁은 진주만에 몰아 넣었습니까? 당신은 왜 진주만 입구에 쇠사슬을 쳐서 함정들이 드나들지 못하게 했습니까?"

 

코날리는 대잠망을 쇠사슬로 잘못 알고 있었다.

 

"적의 잠수함을 막으려던 겁니다."

 

녹스 장관은 겨우 대답했다.

 

"항공공격은 예상하지 못했습니까?"

 

"예."

 

녹스 장관은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코날리는 분통을 터뜨렸다.

 

"저는 해군에게 일어난 일에 대해 경악을 느낍니다. 그들은 모두 방심한 채 잠들어 있었어요. 우리의 초계기들은 어디에 있었습니까? 해군은 일본과의 협상을 알고 있었습니다."

 

초계기가 어디 있었냐는 코날리의 질문은 녹스 장관 자신도 알고 싶은 것이었다.

 

회의는 오후 11시가 되어서야 끝났다.

대통령은 회의가 끝난 직후 언론에 내보낼 짧은 성명을 구술했다.

다음날 12시 30분에 그가 양원합동회의에서 연설한다는 내용이었다.

 

헐 국무장관은 회의가 끝나자 집무실로 들어와 몇 분간 루스벨트 대통령을 만났다.

그는 대통령의 연설이 길어야 한다고 다시 주장했다.

헐 장관은 대통령에게 일정한 영향력을 가진 국무차관 섬너 웰레스와 함께 설득했으나 소용이 없었다.

 

피곤해진 대통령은 상투적인 수법을 썼다.

그는 헐 장관에게

 

"알았네, 검토해 보겠네." 

 

하고는 집무실 밖으로 쫓아내었다.

 

백악관 밖으로 나온 의원들은 취재진에 둘러 싸였다.

대부분 다음날 대통령이 양원합동회의에서 연설한다는 내용 외에는 말을 아꼈으나 한 가지는 분명했다.

고립주의 경향이 강하여 전쟁을 반대하던 공화당도 대통령을 지지하리라는 것이었다.

상원의 공화당 대표인 맥네리는 말했다.

 

"내 생각에, 공화당은 대통령이 어떤 결정을 내리든 지지할 겁니다." 

 

대통령은 마지막으로 유명한 기자인 CBS 의 에드워드 머로우와 만나 이야기를 나누었다.

머로우는 영국 특파원으로 목숨의 위험을 무릅쓰고 취재를 하다가 잠시 귀국한 상태였다. 

그는 폭격에 신음하면서도 히틀러에 맞서 용감하게 싸우는 영국 국민들의 소식을 매일 2번씩 전하여 미국 국민들 사이에 영국에 동정적인 여론을 불러 일으키는데 크게 기여했다.

루스벨트 대통령 부부는 원래 그날 저녁을 머로우 부부와 함께 먹을 생각이었으나 진주만 기습으로 대통령이 바빴으므로 영부인 엘레노어 루스벨트 여사만이 머로우 부부와 함께 저녁을 먹었다.

대통령은 저녁을 먹은 후 호텔로 돌아가려는 머로우에게 남아 달라고 요청했고 자정이 약간 지나 마침내 시간이 생기자 집무실로 불렀다.

 

머로우와 루스벨트 대통령은 야식으로 나온 샌드위치를 씹으면서 이야기를 나누었다.

대통령은 머로우에게 의회 지도자들에게는 비밀로 했던 진주만의 피해 사실을 솔직하게 말해 주었다.

얘기 도중 대통령은 미군 비행기들이 지상에서 당했다는 말을 하면서 분통이 터지는 듯 책상을 주먹으로 내려치며 소리쳤다.

 

"땅에서 말일세, 맙소사, 땅에서!"

("On the ground, by God, on the ground!")

 

CIA 의 전신인 전략사무국(Office of Strategic Service)의 윌리엄 도노반 대령이 대화 도중에 슬쩍 들어와 앉았으나 대화는 곧 끝났다.

12시 30분이 되자 대통령은 머로우와 도노반 대령을 내보냈다.

 

머로우는 호텔에 돌아오자 잠을 이루지 못하고 창밖을 바라보면서 생각에 잠겼다.

그가 대통령에게 들은 내용을 지금 보도하면 그야말로 특종이 될 것이었다.

대통령을 포함하여 누구도 그에게 명시적으로 비공개(off the record)를 요청하지 않았다.

 

그러나 머로우는 알고 있었다.

대통령이 비공개를 요청하지 않은 것은 자신의 양식을 믿은 것이지 보도를 해도 좋다는 뜻이 아니었다.

자신에게 보여준 대통령의 신뢰를 지키기 위하여 머로우는 일생일대의 특종을 포기하고 아쉬움을 달래면서 잠자리에 들었다. 

 

대통령의 아들 제임스 루스벨트 대위는 머로우가 나가자 집무실로 들어가 아버지를 모시고 침실로 가서 뉘였다.

아들은 침대에 누운 아버지와 눈 앞에 닥쳐온 전쟁에 대해 잠시 이야기를 나눈 후 침실을 나왔다.

1941년 12월 7일은 루스벨트 대통령에게도 무척 긴 하루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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