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7. 선전포고

 

1941년 12월 7일 오후 2시 25분, UP(Unired Press) 통신사는  방송국과 신문사에 다음과 같은 긴급 전문을 발신했다.

 

"워싱턴 - 백악관에서 일본이 진주만을 공격했다고 발표하다."

("Washington - White House announces Japanese have attacked Pearl Harbor.")

 

루스벨트 대통령이 프랭크 녹스 해군장관으로부터 진주만 기습을 알리는 전화를 받은지 37분 후, 백악관의 언론비서관 스티브 얼리가 3대 통신사에 진주만 기습을 알리는 대통령의 성명을 읽어주려고 동시 전화를 연결한 지 3분 후였다.

 

1분 후인 오후 2시 26분에 라디오 방송국인 WOR 이 다저스 대 자이언츠의 풋볼 경기 중계 방송을 중단하고 UP 통신사의 전문을 그대로 읽었다.

이로써 WOR 은 대중 매체 중 처음으로 진주만 기습 소식을 전했다.

2분 후인 2시 28분에는 NBC 방송국이, 2시 31분에는 CBS 방송국이 정규 프로그램을 중단하고 진주만 기습 소식을 전했다.

 

신문사들은 호외를 찍어내기 시작했다.

가장 먼저 호외를 발간한 신문사는 애틀랜타 저널로 오후 4시 40분에 나왔다.

진주만 기습의 소식은 하와이와의 지리적 거리와는 반대로 워싱턴이 있는 미동부에서 시작하여 서부로 퍼져나가는 양상을 보였다.

실제로 미서부에서 가장 먼저 호외를 발행한 것은 로스엔젤레스 타임즈였는데 오후 2시 20분에 나왔다.

미서부 시간은 동부보다 3시간이 늦으므로 동부시간으로는 오후 5시 20분이었다.

라디오나 지인의 전화를 통하여 진주만 기습 소식을 접한 사람들이 거리로 뛰쳐나와 앞다투어 호외를 사 보았다.

일요일에 평균적으로 25,000 부 정도 판매하던 로스엔젤레스 타임스는 이날 오후에 150,000 부를 판매했다.

 

(진주만 기습을 알리는 로스엔젤레스 타임즈 호외. http://edpadgett.blogspot.kr/2011/12/los-angeles-times-headline.html)

 

덕분에 신문팔이 소년들은 평생에 다시 없을 횡재를 했다.

이들은 평소 신문을 1부당 3센트에 공급받아 5센트를 받고 팔았는데 이날은 25센트, 심지어 더 불러도 순식간에 팔리는 바람에 신문 보급소로 달려가 다시 받아와야 했다.

많은 소년들이 3개월 동안 한푼도 쓰지 않고 매일 부지런히 일해야 겨우 만질 수 있을만한 목돈을 이날 오후 반나절만에 벌었다.

 

진주만 기습의 뉴스는 해외로도 퍼져나갔다.

1941년 12월 7일 일요일 저녁에 영국수상 윈스턴 처칠은 주영 미국대사 존 위넌트, 루스벨트 대통령의 특사인 애버럴 해리먼 및 그의 부인과 함께 관저에서 저녁 식사를 하고 있었다.

 

(영국수상 윈스턴 처칠. 자세한 내용은 여기로)

 

오후 9시가 가까워오자 급사가 라디오를 켰다.

이 15달러짜리 라디오는 루스벨트 대통령의 보좌관인 해리 홉킨스가 특사 자격으로 영국을 방문했을 때 선물한 것으로 처칠 수상은 이 라디오로 항상 저녁 9시 BBC 뉴스를 들었다.

런던은 미국 동부시간보다 5시간 빠르므로 런던의 오후 9시는 워싱턴의 오후 4시이며 하와이의 오전 10시 30분이다.

 

9시 뉴스가 시작되고 몇 분 후 아나운서가 정규 뉴스를 중단하고 속보를 전했다.

 

"루스벨트 대통령은 일본군이 진주만에 있는 미함대의 하와이 기지를 폭격했다고 발표했습니다."

("President Roosevelt has announced that the Japanese have bombed the Hawaiian base of the United States fleet at Pearl Harbor.")

 

해리먼이 놀라서 소리쳤다.

 

"맙소사, 그들이 진주만을 공격했다."

 

그러자 누군가 말했다.

 

"아니, 그것은 펄 리버였습니다."

 

처칠 수상이 말했다.

 

"맞아, 맞아, 우리도 들었소. 그들이 진주만의 미군을 공격했어."

 

처칠 수상은 일어나 라디오 앞에 가서 잠시 듣더니 위넌트 대사에게 말했다.

 

"우리는 일본에게 선전포고할 것이오."

 

당시 일본은 말레이도 공격했지만 아직 그 뉴스는 수상에게 도달하지 않은 상태였다.

수상의 말에 놀란 위넌트 대사는 그를 말렸다.

 

"이런, 라디오 뉴스를 듣고 선전포고를 할 수는 없습니다."

 

위넌트 대사는 수상에게 루스벨트 대통령과 전화를 연결해 주겠다고 말했다.

몇 분 내로 수상과 위넌트 대사는 관저의 작전실(war room)로 들어가 루스벨트 대통령과 통화했다.

 

"대통령 각하, 일본이 뭐 어쨌다는 겁니까?"

 

처칠 수상이 말문을 열자 방금 참모회의를 마친 대통령이 대답했다.

 

"틀림없는 사실이오. 그들이 진주만에서 우리를 공격했습니다. 우리는 이제 한배를 탄 거요."

("It's quite true. They have attcked us in Pearl Harbor. We are all same boat now.")

 

대통령은 다음날 의회에 선전포고를 요청할 것이라고 말했다.

처칠 수상은 전율했다.

그는 목소리가 들뜨지 않도록 조심하면서 루스벨트 대통령에게 신의 가호를 빈다고 말하고 전화를 끊었다.

수상은 훗날 회고록에 이렇게 적었다.

 

"이로써 일이 확실히 단순해졌다. 미국이 우리 편에 섰다는 것이 나로서는 가장 큰 기쁨이었다. 나는 바로 그때 그 순간부터 미국이 전쟁에 뛰어들었으며 끝장을 볼 때까지 철저하게 싸울 것임을 알았다. 그때 이미 우리가 이긴 것이다!...히틀러의 운명은 결정되었다. 무솔리니의 운명은 결정되었다. 그리고 일본인들은, 갈려서 가루가 될 것이었다."

("This certainly simplifies things. To have the Unite States at our side was to me the greatest joy. Now at this very moment I knew the United States was in the war, up to the neck and in to the death. So we had won after all!.. Hitler's fate was sealed. Mussolini's fate was sealed. As for the Japanese, they woud be ground to powder.")

 

반면 영국 국민들은 진주만 기습 소식에 처칠 수상처럼 기뻐하지 않았으며 담담하게 받아들였다.

가장 큰 이유는 대부분의 영국인들이 하와이를 중요한 군사기지라기보다 단순히 휴양지로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에 진주만 기습이 미국인에게 안겨준 엄청난 충격과 거기에 따르는 극심한 분노를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또한 미국이 일본과 전쟁을 하게 되면 영국의 생명선인 해상 교통로를 지켜주던 대서양의 함정을 태평양으로 가져가 버리고 영국과 소련에 대한 렌드리스를 줄일지 모른다는 걱정도 있었다.

물론 이것은 기우에 지나지 않았으며 역사는 처칠 수상이 옳았음을 증명했다.

 

독일 총통 히틀러는 베를린에서 북서쪽으로 720km 떨어진 숲 속에 자리잡은 지하벙커인 늑대소굴에서 진주만 기습 소식을 들었다.

그가 늦은 저녁을 먹고 장군들과 함께 동부전선에 대하여 토의를 하고 있을 때 통신장교가 뛰어 들어와 진주만 기습을 알렸다.

히틀러는 기뻐했다.

 

"전환점이다! 이제 우리에겐 지난 3,000년간 한번도 정복당하지 않았던 동맹국이 생겼다."

 

히틀러는 미국이 유대인들의 지배를 받고 열등한 흑인들로 더럽혀진 주제에 터무니없이 과대평가된 국가라고 생각했다.

그는 미국이 일본과 전쟁을 벌이게 되면 대서양의 함정이 태평양으로 전환배치될 뿐 아니라 유보트가 미국함정인지 영국함정인지 구별한 후에 공격할 필요가 없어짐으로써 대서양 전투에서 독일이 유리해질 것이라고 지엽말단적으로 생각했다.

히틀러는 거대한 잠재력을 가진 고도 공업국가인 미국의 참전이 가지는 무시무시한 의미를 이해하지 못했다.

 

이탈리아 총리 무솔리니 또한 진주만 기습 소식을 듣고 기뻐했다.

무솔리니도 히틀러와 마찬가지로 미국을 과소평가했는데 그는 특히 루스벨트 대통령의 신체적 결함을 들어 그와 그가 이끌던 국민을 폄하했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역사상 어떤 국민들도 마비 환자에게 통치를 받은 적이 없다. 역사를 돌이켜 볼 때 왕들 중에는 대머리도 있었고 뚱보도 있었고 미남도 있었고 심지어 바보도 있었다. 그러나 화장실에 가거나 식사를 할 때마다 남의 도움을 받아야 하는 왕은 결코 없었다."

 

일본에서는 8일 오전 6시에 대본영이 미국 및 영국과 전투에 들어갔다는 사실을 짤막하게 발표했다.

 

"대본영 육해군 발표. 제국 육해군은 금8일 미명 서태평양에서 미영군과 전투 상태에 들어감"

 

미국은 이 발표를 선전포고로 간주했다.

도쿄의 8일 오전 6시는 미동부시간으로 7일 오후 4시, 하와이 시간으로 오전 10시 30분이었다.

 

진주만 기습 다음날인 12월 8일 월요일 오전 7시에 위넌트 주영 미국대사가 백악관으로 전화를 걸어왔다.

영국의 처칠 수상이 하원에 가서 대일선전포고를 하려 한다는 것이었다.

긴급 사안이라고 판단한 교환수는 루스벨트 대통령을 깨웠다.

대통령은 영국의 선전포고가 오후 12시 30분으로 예정된 자신의 양원합동회의 연설 이후로 미루어지기를 원했으나 이미 늦었다.

 

처칠 수상은 런던 시간으로 오후 3시에 열린 의회에 출석하여 영국과 일본 사이에 전쟁상태가 존재한다고 선언했으며 의원들은 우레와 같은 박수로 대일선전포고를 승인했다.

런던의 오후 3시는 위싱턴의 오전 10시이다.

 

대통령은 오전 8시부터 밤새 들어온 보고를 살폈다.

홍콩, 웨이크, 미드웨이가 공격을 받았다.

가장 놀라운 것은 마닐라 인근의 클라크 비행장이 일본기의 기습을 받아 큰 피해를 입었다는 보고였다.

대통령은 진주만 기습을 이미 알고 있던 상황에서 또다시 기습을 허용한 클라크 비행장 피격 소식에 격노했다.

진주만에서는 공습 당시 이륙하여 요격을 실시한 미군 전투기는 불과 10대 정도이며 전함 애리조나의 승조원 대부분이 전사한 것을 비롯하여 사상자가 약 2,800 명에 달한다는 우울한 소식이 들어와 있었다.

 

국내 뉴스를 살펴본 대통령은 기분이 나아졌다.

언론들의 논조는 우호적이었다.

기사들은 대통령을 중심으로 뭉치자고 호소하고 있었으며 그의 실책을 지적하거나 비난하는 기사는 없었다.

정치권도 마찬가지였다.

민주당은 물론 지독한 고립주의자를 포함한 공화당 소속 주지사와 의원들도 대통령에게 전보를 보내어 충성을 맹세하고 초당적인 협력을 약속했다. 

미국은 루스벨트 대통령을 중심으로 단결했다.

 

아침 식사를 마친 대통령은 오전 11시부터 옷을 입기 시작했다.

정상인이라면 늦어도 5분 내에 끝날 일이었지만 대통령은 단단한 판자 위에 누운 상태로 집사 아서 프랫티만의 도움을 받아 45분이 걸려서야 힘겹게 옷을 입을 수 있었다.

 

이후 대통령은 오전 11시 55분부터 10분 간 백악관 내의 진료실에서 주치의 로스 맥킨타이어 소장으로부터 비점막을 축소시키는 치료를 받았다.

대중 매체의 힘을 잘 알고 있던 루스벨트 대통령은 전 세계에 전달되고 역사에 길이 남을 중요한 연설에서 코맹맹이 소리를 내기 싫었던 것이다.

 

잠시 후 그를 의회로 싣고 갈 자동차가 도착했는데 처음 보는 차량이었다.

당시 미국법에 따르면 정부 차량의 가격이 1대당 750달러를 넘길 수 없었기 때문에 대통령이라도 방탄차량을 탈 수 없었는데 진주만 기습 이후 대통령의 경호를 강화한 재무성 비밀경호국(Secret Service)은 방탄차량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비밀 경호국이 급히 준비한 방탄차량이 하필이면 재무성이 압수하여 보관 중이던 시카고의 악명높은 갱 두목 알 카포네의 방탄 리무진이었다.

경호를 책임진 마이크 라일리로부터 자초지종을 들은 대통령은 가벼운 농담으로 라일리의 마음을 편하게 해 주었다.

 

"카포네 씨도 이해해 주겠지."

("I hope Mr. Capone doesn't mind.")

 

대통령을 태운 리무진은 삼엄한 경호를 받으며 의사당에 도착했다.

루스벨트 대통령은 대중의 시선에서 벗어난 의사당 남쪽 입구 아래의 지하차도에서 내려 휠체어로 옮겨탔다.

비밀경호국 요원들이 경사로를 따라 휠체어를 밀어 대통령을 하원 회의장 바로 뒤에 있는 의장실로 옮겼다.

1933년에 루스벨트 대통령이 취임하자 비밀 경호국은 주요 관공서에 나무로 경사로를 만들어 대통령을 태운 휠체어가 다닐 수 있도록 했다.

 

의사당의 경비는 삼엄했다.

비밀경호국 요원 200명 이상이 배치되어 있었으며 착검한 해병대원들이 출입구를 지키고 있었다.

통행 허가증 없이는 누구도 들어갈 수 없었다.

비밀 경호국 요원들이 통행 허가증 없이 기자실에 들어가려던 몇몇 기자들을 쫓아냈다.

 

대통령이 연설할 하원 회의장은 의원과 취재진으로 발 디딜 틈이 없었다.

하원의원은 상원, 내각, 군사령관, 그리고 대법원을 위하여 앞줄 좌석을 비워두고 그 뒤에 앉아 있었다.

몇몇 의원은 역사적인 순간을 보여주기 위하여 자녀를 대동했다.

그 이외의 공간에는 기자가 바글거렸다.

기자들은 기자실 의자 위에 올라가고 통로에 늘어서고 벽에 기대어서 대통령을 기다렸다.

기자실에는 86개의 의자가 준비되어 있었으나 기자는 590명에 달했다.

 

12시 15분부터 부통령 헨리 월래스를 선두로 상원지도부가 입장했으며 이어서 코델 헐 국무장관을 선두로 내각의 각료들이 들어왔다.

각료들 뒤에는 정복을 갖추어 입은 육군참모총장 조지 마셜 대장과 해군참모총장 해럴드 스타크 대장이 들어왔으며 마지막으로 검은 법복을 입은 대법원 판사들이 들어와 앉았다.

 

12시 29분에

 

"미합중국 대통령 각하십니다."

("The President of United States.")

 

라는 방송이 울렸다.

그와 동시에 루스벨트 대통령이 연단 뒤에서 모습을 드러내자 우레같은 박수가 터졌다.

 

대통령은 아들 제임스 루스벨트 대위의 팔을 꽉 붙잡은 채 힘겹게 연단을 향해 걸어가기 시작했다.

그들 주위를 상원과 하원의 대표 6명이 둘러싸고 같이 걸었다.

이는 대통령 연설의 초당파적인 의미를 강조함과 동시에 연단으로 걸어가는 동안 대통령의 불편한 다리를 전 세계의 시선으로부터 숨기는 역할을 했다.

 

연단으로 향하는 대통령의 표정을 살펴본 기자들은 그가 중요한 연설에 대하여 깊은 생각에 잠겨 있다고 보았다.

그러나 사실 루스벨트 대통령은 연단까지 넘어지지 않고 걸어가는데 온 정신을 쏟고 있었다.

전 세계가 지켜보는 가운데 미군 최고 사령관이자 사실상 연합군을 대표하게 될 미국의 대통령이 연단까지 그 짧은 거리도 제대로 걸어가지 못하고 볼썽사납게 자빠져서 주변 사람들이 우루루 달려가 일으켜 세워야 하는 상황이 벌어지면 그 자체로 참사가 될 것이었다.

미국과 동맹국의 사기는 꺾일 것이고 적은 최고사령관의 비참한 모습을 마음껏 비웃으면서 두고두고 절호의 선전거리로 삼을 것이었다.

모든 사람들이 우레와 같은 박수로 힘겹게 연단으로 향하는 대통령에게 힘을 실어주었다. 

 

대통령이 연단에 도착하자 환호성이 터지면서 박수 소리가 더욱 커졌다. 

하원 의장 레이번 의원이 검지를 입술에 갖다대어 조용하라는 표시를 한 후 대통령을 소개했다.

 

루스벨트 대통령은 연단의 가장자리를 단단히 잡고 안경을 고쳐 쓰더니 실내를 천천히 둘러보았다.

연단 아래 앉아있는 상원의원들, 내각 각료들, 군 사령관들, 대법관들을 훑어본 대통령은 뒷쪽에 앉은 하원의원들을 거쳐 사진촬영용 조명까지 훑어보았다.

 

그러고 나서 대통령은 연설문을 넣어둔 노트의 가죽 표지를 펼쳤다.

연설문은 넘길 때 사각거리는 소리가 나지 않는 고급 종이에 타이핑되어 있었다.

 

오후 12시 33분, 대통령은 확신에 넘친 단호하고 낭랑한 목소리로 연설을 시작했다.

 

"어제, 1941년 12월 7일 - 치욕으로 남을 날 - 미합중국은 일본제국의 해군 및 항공 세력으로부터 의도적인 기습 공격을 받았습니다."

("Yesterday, December 7th, 1941 - a date which will live in infamy - the United States of America was suddenly and deliberately attacked by naval and air forces of the Empire of Japan.")

 

(의회에서 연설 중인 루스벨트 대통령. http://en.wikipedia.org/wiki/Infamy_Speech)

 

대통령은 화난 목소리로 일본정부의 비열한 자세를 성토했다.

 

"미합중국은 일본과 평화 상태에 있었으며 일본의 애원에 따라 일본정부 및 천황과 태평양의 평화를 유지하는 방안을 토의하고 있었습니다. " 

 

대통령은 일본이 미국 영토인 오아후 섬을 폭격한 지 1시간이 지난 후에 일본대사를 시켜 어떤 위협이나 전쟁 또는 무력 공격의 힌트도 없는 문건을 전달했다면서 일본의 목적은 오로지 평화에 대한 사탕발림을 늘어놓음으로써 미국을 속이려는 것이었다고 말했다. 

그는 진주만의 피해에 대해서는 얼버무리고 넘어갔다.

 

"미국의 해군과 군대는 큰 피해를 입었습니다. 유감스럽게도 많은 미국인들이 목숨을 잃었습니다."

 

이어서 대통령은 초고 작성 이후 추가된 내용을 말했다.

 

"미국함정들이 샌프란시스코와 호놀룰루 사이의 공해에서 어뢰공격을 받았다는 보고가 들어왔습니다. 어제 일본정부는 말레이를 공격했습니다. 어젯밤에 일본군이 홍콩을 공격했습니다. 어젯밤에 일본군이 괌을 공격했습니다. 어젯밤에 일본군이 필리핀 제도를 공격했습니다.어젯밤에 일본군이 웨이크 섬을 공격했습니다. 그리고 오늘 아침에 일본군이 미드웨이 섬을 공격했습니다."

 

분위기는 가라앉고 박수도 사라졌다.

이때 대통령이 선언했다.

 

"어쨌든, 시간이 얼마나 걸리든, 미국은 절대적인 승리를 쟁취할 것입니다."

 

잠잠해졌던 박수가 다시 터졌다.

이어서 연설은 클라이맥스에 도달했다.

 

"우리 군대의 대담함과, 우리 국민의 활달한 투지로 우리는 반드시 승리를 쟁취할 것입니다. 신이여, 저희를 도우소서."

("With confidence in our armed forces-with the unbinding determination of our people-we will gain inevitable triumph-so help us God.")

 

이제 사람들은 일어서서 미친듯이 박수를 쳤으며 근엄한 대법관들까지 일어나 박수를 쳤다.

대통령은 다음의 말로 연설을 끝맺었다.

 

"저는 의회가 12월 7일, 일요일에 일본이 자행한 부당하고 비열한 공격 이후 미합중국과 일본제국 사이에 전쟁상태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선포해 주실 것을 요청합니다."

("I ask that the Congress declare that since unprovoked and distardly attack by Japan on Sunday, December 7, a state of war has existed between the United States and the Japanese Empire.")

 

모든 사람이 일어나 박수를 쳤다.

일어나지 않은 사람은 공화당 소속의 하원의원인 저넷 랭킨과 클레어 호프만 뿐이었다.

 

연설을 마쳤을 때는 오후 12시 40분으로 6분 30초 밖에 걸리지 않았으나 대단히 성공적이었다.

반응은 폭발적으로 당시에도 언론의 찬사가 쏟아졌으며 오늘날까지 가장 유명한 연설의 하나로 남아있다.

 

상원은 12시 51분부터 선전포고를 위한 토의에 들어갔다.

제1차 대전 당시 상원은 4일 간의 치열한 논쟁을 거쳐 참전을 결정했으나 이번에는 달랐다.

발언을 요청한 사람은 상원에서 고립주의자들을 이끌던 공화당의 아서 반덴버그 의원 뿐이었다.

그는 전쟁을 앞둔 이 시점에서 미국에서 공화당이니 민주당이니 하는 것은 사라졌고 총사령관 밑에 결집한 하나의 미국만이 존재한다면서 고립주의를 버리고 대통령에게 절대적으로 협조할 것을 천명했다.

이후 투표는 일사천리로 진행되어 1시 6분에 끝났다.

결과는 82대 0으로 96명의 상원의원들 중 병석에 누웠거나 멀리 떨어져 있어 표결에 참가하지 못한 14명을 제외하고 참석자 82명 전원이 찬성표를 던졌다.

상원에서는 15분 만에 선전포고를 가결했다.

 

하원에서는 상원처럼 매끄럽게 진행되지는 않았다.

의원들은 토론을 생략하고 표결에 들어가자면서

 

"투표, 투표, 투표"

("Vote, vote, vote")

 

를 외쳤다.

 

하원의 공화당 대표인 조셉 마틴은 마이크를 잡고

 

"적이 저지른 비겁한 짓에 대한 응징이 이루어질 때까지 평화는 없습니다. 우리가 하나로 뭉친 나라라는 걸 세계에 보여줍시다."

 

라고 말한 다음 하원에서 고립주의자들의 대표로서 렌드리스를 가장 심하게 비난했던 해밀튼 피시에게 마이크를 넘겼다.

피시는 다음과 같은 말로 자신의 정치적 입장을 포기하고 대통령에게 적극 협조할 것임을 동료 의원들에게 약속했다.

 

"전쟁을 일으킨 일본 악마들을 요절내기 위해서라면 저는 어떤 희생이라도 마다하지 않을 것입니다."

 

이때 지독한 반전주의자인 랭킨 의원이 발언권을 요청했다.

하원 의장 레이번은 그녀를 무시하고 다른 의원 2명에게 발언 기회를 준 후 오후 1시 4분에 투표를 시작했다.

랭킨은 계속 발언권을 요구하면서 표결을 방해하려 했으나 모두들 그녀를 무시했다.

오후 1시 26분에 하원은 388:1로 선전포고안을 통과시켰는데 반대 1표는 랭킨이 던진 표였다.

그녀는 제1차 세계대전에서도 반대표를 던졌었다.

 

오후 1시 32분, 루스벨트 대통령이 연설을 마친지 52분 후에 의회는 선전포고안을 가결했다.

오후 3시 14분에 하원 의장 레이번이 하원을 대표하여 선전포고문에 서명했다.

오후 3시 25분에는 부통령 월래스가 상원을 대표하여 선전포고문에 서명했다.

선전포고문은 백악관으로 보내졌고 오후 4시 10분에 루스벨트 대통령이 서명했다.

그가 연설을 시작한 후 3시간 37분 만이었다.

 

일본과의 선전포고를 끌어낸 루스벨트 대통령은 이후 국민의 관심이 독일을 떠나 일본에게만 집중되지 않도록 신경을 썼다.

대일선전포고 다음날인 12월 9일에 방송된 노변담화에서 대통령은 독일과 일본의 친밀한 관계를 강조하면서 진주만 기습의 배후에는 독일이 있다면서 독일을 집중적으로 비난했다. 

 

히틀러가 루스벨트 대통령의 고민을 덜어 주었다.

1941년 12월 11일에 독일과 이탈리아는 미국에 선전포고를 했다.

이번에는 연설을 할 필요도 없었다.

대통령은 서면으로 의회에 선전포고를 요청했으며 의회에서는 두말없이 통과시켰다.

이번에는 랭킨 의원도 찬성표를 던졌다.

Posted by 대사(P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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