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9. 제3차 공습

 

진주만 기습을 둘러싼 오래된 신화의 하나가 일본군이 제3차 공습을 실시하여 진주만의 해군기지 자체를 타격하지 않은 것이 큰 실수라는 주장이다.

일부는 기지타격이 함정공격보다 더 큰 효과를 가져와 태평양함대를 미본토로 물러나게 만들고 전쟁을 상당히 연장했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결론부터 말하면 아무리 진주만 기습이 전략적으로 실익이 없었고 결국에는 일본에게 엄청난 재앙이 되었다지만 제3차 공습을 실시하지 않았다고 일본을 비난할 수는 없다.

 

먼저 알아두어야 할 것은 제3차 공습을 실시할 시간 여유가 없었다는 점이다.

제2차 공격대의 마지막 함재기가 착함한 시간은 12월 7일 오후 12시 15분이었는데 그날 하와이 근해의 일몰 시간은 오후 5시 12분이었다.

사전 계획이 없는 상태에서 각 항공모함에 연락하여 제3차 공격에 가용한 기체 수를 확인하고, 거기에 맞추어 목표를 결정하여 할당하고, 제3차 공습에 대한 사전 준비나 학습이 전혀 되어 있지 않던 조종사들에게 브리핑을 하여 임무를 숙지시키고, 함재기에 재급유하고 재무장시킨 다음 예열하고 발진시켜 제3차 공습을 실시하고 일몰 전에 귀함시킨다는 것은 시간적으로 불가능했다.

 

제1항공함대의 항공참모인 겐다 미노루 중좌도 이 사실을 알고 있었다.

겐다 중좌도 철수에 반대했지만 제3차 공습을 요구한 것은 아니었다.

놓쳐버린 미국 항공모함에 집착하던 그는 하와이 북방에 며칠이고 머무르면서 미국 항공모함을 끌어들여 격멸하자고 주장했다.

물론 제1항공함대 사령장관 나구모 주이치 중장은 이 주장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제1항공함대의 항공참모 겐다 미노루 중좌. 자세한 내용은 여기로)

 

나구모 중장의 기함인 아카기 함상에서 후치다 미츠오 중좌와 나구모 중장 사이에 제3차 공습을 둘러싼 치열한 논쟁이 있었다는 이야기는 후치다가 1963년에 미국의 역사학자 고든 프렌지와의 인터뷰에서 진술한 일방적인 주장일 뿐이다.

그날 아카기 함상에 있었던 사람들 모두 그러한 논쟁이 있었다는 사실을 부정했으며 후치다 자신도 종전 직후 미군에게 심문받을 때는 그러한 논쟁이 있었다는 말을 하지 않았다.

 

(후치다 미츠오 중좌. 자세한 내용은 여기로)

 

당시 조종사들 사이에 제3차 공습을 하자는 주장이 있었던 것은 사실이나 여러 사정을 알고 있는 좌관급의 선임 조종사들은 대체로 옳고 그름을 떠나 제3차 공습이 시간적으로 불가능하다고 생각했다.

하물며 공격대 전체를 지휘했던 후치다 중좌가 이런 명백한 사실을 모르거나 무시하고 나구모 중장에게 제3차 공습을 요구하면서 논쟁을 벌였을 가능성은 희박하다.

 

설사 시간적으로 제3차 공습이 가능했다고 쳐도 나구모 중장이 받아들일 이유가 없었다.

일본군은 하와이의 미군 항공력을 실제보다 훨씬 강하다고 믿고 있었으며 공격대가 미군 항공력에 큰 피해를 입혔음에도 불구하고 충분히 반격을 가할 능력이 있다고 보았다.

공습을 피한 미국 항공모함의 위치는 여전히 오리무중이었으며  미국 잠수함 또한 눈에 불을 켜고 일본함대를 찾고 있을 것이었다.

이미 충분한 전과를 올린 나구모 중장이 커다란 위험을 무릅쓰고 일몰 때까지 하와이 근해에 머물면서 제3차 공습을 실시할 까닭이 없었다.

 

(제1항공함대 사령장관 나구모 주이치 중장. 자세한 내용은 여기로)

 

제3차 공습을 실시하기에는 함정들의 연료도 부족했다.

미국 항공모함 격멸에 집착하던 겐다 중좌는 급유대를 남하시켜 해상급유를 받으면서 미국항모들을 기다리자고 말해 나구모 중장을 경악하게 만들었다.

 

제3차 공습에 나설 전력 자체도 강력하지 못했다.

후치다 자신의 주장에 따르면 그는 미군의 치열한 반격이 예상되는 제3차 공습에는 움직임이 둔한 함상공격기는 빼고 제로기의 호위 하에 급강하폭격기만 투입할 생각이었다.

편제상 제1항공함대는 총 144대의 급강하폭격기를 보유하고 있었으며 공습에 실제로 참가한 것은 130대였다.

이들 중 15대가 격추되고 58대가 피해를 입었다.

따라서 단순 계산으로 제3차 공습에 참가할 수 있는 급강하 폭격기는 71대이며 일부가 급히 수리를 마치고 참가한다고 해도 제3차 공습에 참가하는 급강하폭격기의 숫자는 제2차 공습에 참가했던 79대를 넘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준비를 갖춘 미군은 제3차 공격대가 접근하면 레이더로 탐지한 다음 아직 50대가 넘는 가용 전투기들을 모두 띄워 요격했을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제3차 공격대가 충분한 전과를 올릴 것으로 믿기는 어렵다.

 

해군공창같은 지상기지는 폭장량이 적은 함재기의 공습으로 큰 피해를 입히기 어렵다.

일본은 미드웨이 해전에서 36대의 급강하폭격기와 36대의 수평폭격기를 동원하여 손바닥만한 미드웨이를 폭격하면서 이렇다 할 피해를 입히지 못했으며 하나뿐인 활주로의 기능을 정지시키는 데도 실패했다.

해군공창같은 거대한 지상목표는 폭장량이 많은 4발 중폭격기를 대량으로 동원하여 반복적으로 폭격해야 제대로 피해를 입힐 수 있다.

 

제3차 공습의 목표로 가장 많이 거론되는 것이 진주만의 중유 저장소이다.

당시 진주만에는 27개씩 두 곳, 합계 54개의 탱크에 중유를 저장하고 있었다.

 

휘발유나 천연가스와 달리 중유는 탱크 1개가 파괴된다고 순식간에 주변의 모든 탱크가 유폭을 일으키지 않는다.

중유는 끓는점이 350도에 달하는 불이 붙기 어려운 물질이며 실제로 전함 중에서는 어뢰를 막는 수선하 방뢰구역에 중유를 채우는 경우도 있다.

따라서 급강하폭격기들은 중유 탱크마다 일일이 폭탄을 명중시켜야 했다.

 

제2차 공격대의 명중율을 생각해보면 제3차 공습에 투입된 급강하폭격기를 모두 중유 저장소 폭격에 투입해도 미군기의 요격과 지상의 대공포화를 뚫고 중유 탱크 54개를 모두 명중시킬 것이라고 장담하기는 어렵다.

저장된 중유의 절반만 건져도 태평양함대는 어떻게든 진주만에 머물 수 있었을 것이다.

 

(진주만의 중유 저장소. http://karbuz.blogspot.kr/2006/10/oil-logistics-lesson-from-wwii-2.html)

 

만일 급강하폭격기들이 놀라운 명중율을 과시하여 중유를 모두 불태워버리면 아시아함대 사령관 토머스 하트 대장의 지적처럼 태평양함대는 일시적으로 미본토 서해안으로 물러나야만 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럴 경우라도 이들이 진주만으로 돌아가는데는 그리 긴 시간이 필요치 않았다.

 

기습 당시 진주만에는 많은 중유가 저장되어 있지 않았다.

진주만의 중유 저장량은 56만 3천톤으로 부피로 환산하면 350만 배럴 정도였다.

 

진주만 기습 당시 태평양함대 기지사령관이었던 윌리엄 칼훈 소장의 증언에 따르면 진주만 기습 직후 9일 동안 함대에 75만 배럴, 즉 하루 평균 83,000 배럴을 급유했다고 한다.

이건 기름을 많이 퍼먹는 전함 8척이 움직이지 못하는 상태에서의 소비량이므로 전함들이 건재하면서 활발하게 훈련을 하던 진주만 기습 직전에는 중유 소비량이 더 많았으면 많았지 적지는 않았을 것임을 유추할 수 있다.

즉 기습 당시 진주만의 중유 저장량은 최대한으로 잡아도 40일치 남짓한 분량이었다.

 

원래 전방 기지의 중유 비축량은 그렇게 많지 않다.

진주만의 중유 비축량은 태평양전쟁 당시 최고로 올랐을 때에도 약 140만톤으로 880만 배럴 정도였다.

오키나와 전투 초기 중유를 가장 많이 쓰던 1945년 4월 4일부터 24일까지 3주일 동안 제58기동부대와 오키나와 침공함대가 평균적으로 하루에 약 22만 배럴을 소모했으니 진주만의 중유 저장량은 40일 치에 불과했다.

 

오키나와 침공 당시 태평양함대는 첫달에만 600만 배럴 이상의 중유가 필요할 것이라고 보았는데 발진기지인 울리시의 중유 저장량은 10만 배럴에 지나지 않았다.

사이판, 괌, 콰절린에 저장된 중유가 90만 배럴이었으며 진주만에 500만 배럴이 있었다.

오키나와 전투에서 태평양함대는 900만 배럴에 달하는 중유를 소모했는데 함정들은 대부분 민간 유조선이나 해군 소속의 급유함으로부터 직접 급유를 받았다.

 

함대가 울리시에 정박해 있을 때에는 진주만 또는 미본토에서 중유를 싣고 온 민간 유조선이 함정들에게 직접 급유했다.

작전이 시작되어 함대가 출동하면 미본토나 진주만에서 중유를 싣고 온 민간 유조선들은 울리시에서 해군 소속의 급유함에 중유를 옮겨 싣었고 해군 급유함들이 해상으로 나와 함대에 급유하러 다녔다.

태평양함대는 오키나와 전투 당시 함대에 급유하는 용도로 급유함 39척을 동원했다.

 

울리시까지 중유 수송을 맡았던 민간 유조선은 대부분 T2-SE-A1 급으로 전쟁 기간 중 무려 481척이 건조되었으며 약 12만 배럴의 중유를 수송할 수 있었는데 해군의 급유함들 또한 용량이 비슷했으므로 1:1로 중유를 주고 받을 수 있었다.

미국 해사국은 전쟁 기간 중 705척의 유조선을 건조했는데 이들 중에는 리버티선을 개조한 유조선 62척도 있었다.

리버티형 유조선은 약 64,000 배럴의 중유를 수송할 수 있었다.

 

진주만 기습 당시 진주만의 중유 저장량이 적었다는 것 이외에도 또하나 생각할 점은 미국이 그 정도 양은 금방 채울 능력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이다.

기습 이전의 몇 달 동안 태평양함대는 활발하게 훈련을 하면서 하루에 최소한 83,000 배럴, 1달에 250만 배럴 이상을 소모하고 있었지만 진주만의 중유 저장량은 줄어들지 않았다.

이 말은 유조선들이 미본토로부터 매달 250만 배럴 이상의 중유를 하와이로 수송하고 있었다는 뜻이다.

여기에 더하여 진주만 기습 당시 진주만의 중유를 꺼내 함대에 급유할 수 있는 급유함들의 용량이 76만 배럴이었다고 한다.

하와이와 미본토의 거리를 생각하면 급유함이 1달에 1번은 충분히 왕복할 수 있다.

 

즉 진주만 기습 당시 미국은 매달 최소한 300만 배럴 이상의 중유를 미본토에서 하와이로 수송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었으며 진주만의 중유가 홀랑 타버린다고 해도 넉넉잡고 2달이면 원래 있던 350만 배럴보다 훨씬 많은 양을 보충할 수 있었다.

만일 미본토 서해안의 유조선을 약간만 추가로 동원하면 1달 이내에 보충하는 것이 가능했다.

따라서 제3차 공격대가 진주만의 중유를 홀랑 태워버린다고 해도 미본토 서해안으로 물러났던 태평양함대는 1942년 1월 이후에는 언제든지 진주만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이렇듯 제3차 공습은 시간적으로 불가능했으며 설사 가능했다고 치더라도 예상되는 공격대의 피해에 비하여 별다른 효과를 기대할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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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www.wikipedia.org/

http://blog.naver.com/mirejet (도위창님 블로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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