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 의의

 

진주만 기습은 전술 및 작전술적 수준에서 보았을 때 해전사에 길이 남을만한 성공적인 대규모 기습이었다.

일본연합함대 사령장관 야마모토 이소로쿠 대장은 여러 척의 항공모함으로부터 발진한 다수의 함재기를 집중 운용하여 전력을 극대화한다는 새로운 개념으로 대담한 기습을 구상하고 계획을 수립한 후 기밀을 유지하면서 현실화시켰다. 

일본함대는 5,600km 에 달하는 북태평양 항로를 들키지 않고 항해하는데 성공했으며 중유를 채운 드럼통을 항공모함 내부에 싣는 창의성을 발휘하여 짧은 항속거리를 극복했다.

일본군은 진주만의 얕은 수심을 극복하기 위하여 어뢰를 개량했으며 조종사들, 특히 뇌격기 조종사들은 맹훈련을 통하여 지형상의 어려움을 극복하고 실전에서 뛰어난 명중율을 보였다.  

 

(진주만 공격부대의 항로. http://en.wikipedia.org/wiki/Attack_on_Pearl_Harbor)

 

일본함대는 어려움을 뚫고 공습 가능 거리까지 몰래 접근하여 결정적인 일격을 가했다.

공격대는 기습에 성공하여 가벼운 피해만 입으면서 미태평양함대의 주력을 단번에 무력화시켰다.

진주만 기습이 성공하면서 일본군은 측면의 위협을 걱정하지 않고 남방작전에 전념할 수 있었으며 예정보다 훨씬 빠른 3개월 만에 제1단계를 마무리지었다. 

 

하지만 진주만 기습을 전략적 수준에서 바라보면 다른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

야마모토 제독은 남방작전의 측면 위협을 제거하기 위하여 진주만 기습을 단행했다.

그러나 사실 태평양함대는 진주만 기습이 없었더라도 남방작전을 방해할 수 없었다.

 

미군의 오렌지 계획에 따르면 일본과 전쟁이 벌어질 경우 태평양함대는 즉시 출격하여 마셜제도를 공격하게 되어 있었다.

그러나 1941년 5월에 태평양함대 세력의 상당 부분이 대서양으로 빠져 나가자 태평양함대는 약화된 상태로 연합함대와 정면대결을 할 수 없다고 판단하여 계획을 수정했다.

전쟁 발발시 마셜제도를 공격한다는 점은 그대로지만 즉시 출격하지 않고 대서양에서 증원 함대가 도착하기를 기다려 함께 출격한다는 것이었다.

수정된 계획에 따르면 마셜 제도 공격은 아무리 빨라도 개전 이후 3개월이 지나서야 실시하게 되어 있었는데 일본은 3개월 만에 남방작전의 제1단계를 마무리지었다.

 

실제로 진주만 기습이 성공한 데에는 이러한 사실이 영향을 끼쳤다.

태평양함대가 연합함대에 정면으로 도전할 수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던 미군 지휘관들은 일본이 위험을 무릅쓰고 진주만까지 찾아와서 허약한 함대를 공격할 것이라고 생각하지 못했다. 

 

일본은 진주만 기습을 통하여 해전의 패러다임을 바꾸었다.

전함은 함대 주력의 지위에서 물러나고 항공모함이 그 자리를 물려받았다.

해전의 패러다임을 바꿈으로써 일본은 스스로 진주만 기습의 의미를 퇴색시켰다.

 

집중운용되는 함재기의 무시무시한 위력을 겪어본 미해군은 진주만의 연기가 채 걷히기도 전에 전함 중심 교리를 미련없이 버리고 항공모함 중심 교리로 갈아탔다.

항공모함은 피해를 면한데 비해 전함은 쓰고 싶어도 쓸 수가 없었기 때문에 교리의 급격한 전환이 별다른 저항없이 하루아침에 이루어졌다.

그리하여 1941년 12월 7일 아침까지만 해도 함대의 꽃이자 주력이었던 전함들, 특히 속력이 느린 구형전함들은 순식간에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인 2선급 전력으로 추락했다.

 

실제로 1942년 6월 초의 미드웨이 해전 당시 태평양함대는 최대 7척(메릴랜드, 테네시, 펜실베이니아, 콜로라도, 뉴멕시코, 미시시피, 아이다호)의 구형전함을 동원할 수 있었다.

그러나 태평양함대 총사령관 체스터 니미츠 대장은 항공모함 기동부대에 구형전함을 포함시키라는 미함대총사령관 어네스트 킹 대장의 권고를 무시하고 순양함과 구축함의 호위를 받는 항공모함 기동부대로 미드웨이 해전을 치렀다.

속력이 느리고 어뢰에 취약한 구형전함은 항공모함 기동부대에 없는 것이 낫다고 본 것이었다.

구형전함은 1943년 이후 상륙작전시 함포사격을 담당하는 새로운 역할을 찾았지만 함대의 주력이라는 옛 영광을 되찾지는 못했다.

 

미해군의 항공모함 중심 교리는 철저하여 항모기동부대와 같이 행동할 수 있는 고속전함도 찬밥신세를 면하지 못했다.

태평양 함대가 사보섬 해전에서 중순양함을 4척이나 상실하자 킹 제독은 대신 고속전함들을 보내 주었다.

그러나 니미츠 제독은 고마워하기는 커녕 가뜩이나 급유함이 모자라는데 고속전함이 중순양함보다 기름을 많이 퍼먹는다고 타박했다.

 

진주만 기습에서 살아남은 태평양함대의 항공모함은 1942년 초에 중부 태평양의 일본군 기지를 공격했고 4월에는 도쿄를 공습하여 일본인에게 진주만 기습에 버금가는 충격을 안겨 주었다.

1942년 5월 초에는 산호해 해전에서 개전 이후 최초로 일본군의 전진을 막아내었으며 6월 4일에는 미드웨이 해전에서 일본의 주력 항공모함 4척을 격침하여 연합함대에게 치명타를 먹였다.

 

항구에서 공격을 받았기 때문에 숙련된 승조원이 대부분 살아남았다.

진주만 기습으로 미해군은 3,000 명 가까운 사상자를 기록했지만 그나마 다행이었다.

미함대가 마셜 제도로 출격하여 일본함대와 해상결전을 벌였다면 당시 전력 차로 보아 진주만 기습보다 훨씬 큰 피해를 입었을 것이다.

니미츠 제독은 진주만 기습 당시 일본함대의 접근을 알고 태평양함대가 진주만을 떠나 해전을 벌였으면 대부분의 함정이 침몰하고 사상자가 20,000 명에 달했을 것이라고 추산했다.

다행히 항구에서 공격당했기 때문에 숙련된 승조원이 대부분 살아남아 이후 무섭게 팽창하는 미함대의 기간 요원이 되었다.

진주만에서 숙련된 승조원이 대부분 살아남았음에도 급팽창한 미함대는 1943년 후반기부터 승조원의 미숙함 때문에 고생했다.

만일 전쟁 초기에 태평양함대의 숙련된 승조원 20,000명을 상실했다면 어려움은 훨씬 컸을 것이다.

 

진주만 기습 당시 태평양 함대의 가장 큰 관심사는 승조원의 훈련이었다.

이는 함대의 전투력 증강에도 직결되지만 앞으로 급팽창할 미함대의 기간 요원을 육성한다는 의미가 컸다. 

따라서 당시 태평양함대는 승조원의 훈련에 가장 높은 우선 순위를 두고 있었으며 정박 중인 함대의 안전 확보나 초계 등은 우선 순위가 떨어졌다.

카탈리나 정찰비행정도 훈련을 위하여 초계 비행을 늘리지 않은 면이 있으며 이는 진주만 기습의 성공에 중요한 요인이 되었다.

해상결전 대신 항구에서 공격을 당함으로써 태평양함대는 그렇게 애지중지하던 승조원을 대부분 구할 수 있었다.

 

격침된 전함 4척 또한 항구에서 격침된 관계로 2척은 인양하여 재취역할 수 있었으나 승조원에 비하면 부차적인 이익이었다.

미국은 태평양전쟁 기간 동안 정규항공모함 17척, 경항공모함 9척, 호위항공모함 76척, 고속전함 8척, 중순양함 12척, 경순양함 33척, 구축함 347척, 호위구축함 417척, 잠수함 205척을 취역시켰다.

이런 엄청난 전력증가에 2선급 전력인 구형전함 2척이 추가되었다고 한들 큰 의미는 없었다. 

 

항공기 또한 마찬가지로 전쟁 중 30만대가 넘는 군용 항공기를 생산한 미국에게 200대가 채 되지 않는 항공기의 손실은 큰 타격이 아니었다.

실제로 미군은 진주만 기습 직후 하와이에 항공기들을 대거 파견했다.

따라서 하와이의 항공기 숫자는 진주만 기습이 있은지 2주일 만에 기습 이전의 수준에 도달했고 이후 증강되었다.

전략적으로 보아 진주만 기습은 일본에게 별다른 군사적 이익을 안겨주지 못했다.

 

국가 대전략의 견지에서 보면 진주만 기습은 일본에게 엄청난 재앙이었다.

진주만 기습으로 격노한 미국인들은 하나로 똘똘 뭉쳐 전쟁에 임했으며 일본에게 무조건 항복을 받아낼 때까지 전열이 흐트러지지 않았다.

 

(진주만 기습 다음날 의회에서 연설 중인 루스벨트 대통령. http://en.wikipedia.org/wiki/Infamy_Speech)

 

일본이 미군을 공격하지 않고 영국과 네덜란드만 상대로 전쟁을 벌였어도 결국 미국이 참전했을 가능성이 높다.

하지만 그럴 경우 진주만 기습을 당했을 때처럼 거국적인 일치단결을 이루지 못했을 것이며 전쟁이 길어지면 피로감 또한 빨리 나타났을 것이다.

그랬다면 적당한 때에 협상으로 전쟁을 끝낼 수 있었을지 모르며 어떤 경우라도 실제 역사보다는 일본에게 좋은 결과로 끝났을 가능성이 많다.

그러나 진주만 기습 이후에는 일본에게 살아남을 기회가 없었다.

 

미국의 참전은 소련의 생존과 더불어 제2차 세계 대전의 승패를 결정한 사건이었다.

일본은 진주만을 기습함으로써 미국의 참전을 초래하여 제2차 세계대전의 승패를 결정지었다.

전쟁의 승패를 가르는 중요한 전투를 결전이라고 부른다면 진주만 기습이야말로 제2차 세계대전의 승패를 가른 결전이었다.

진주만 기습의 진정한 의의는 그것일지도 모른다.

Posted by 대사(P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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