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 급강하 폭격(1) - 전함 폭격

 

시마자키 시게카즈 소좌가 이끄는 제2차 공격대는 167대로 이루어져 있었다.

제2차 공격대에는 뇌격기가 참가하지 않았으며 97식함상공격기들은 모두 수평폭격에 투입되었다.

 

54대로 이루어진 수평폭격기들은 3개로 나뉘어 27대는 히컴 비행장, 18대는 카네오헤 해군비행장, 그리고 9대는 포드 섬 비행장을 폭격했다.

78대에 달하는 급강하폭격기들은 제2차 공격대의 주력으로 포드 섬 및 해군 공창 부두의 항공모함과 순양함을 공격할 임무를 띠고 있었다.

35대로 이루어진 제로기는 우선 폭격기들을 호위한 다음 비행장 공격에 참가했는데 18대는 포드 섬과 히컴 비행장을, 17대는 카네오헤 및 벨로우즈 비행장을 공격했다.

 

제2차 공격대는 7일 오전 8시 40분에 오아후 섬의 북동쪽 해상에 도달했다.

시마자키 소좌는 오전 8시 54분에 공격명령을 내렸는데 이는 다소 늦은 시간으로 실제로 급강하폭격기들은 이미 폭격을 시작한 이후였다. 

제2차 공격대의 선두는 제1차 공격대가 떠난 지 25분 후에 도착했다.

 

(진주만 기습 상황도. http://upload.wikimedia.org/wikipedia/commons/1/1c/Pearl_Harbor_bombings_map.jpg)

 

소류의 에구사 다카시게 소좌가 지휘하는 급강하폭격기대는 아카기, 카가, 소류 및 히류의 99식 함상폭격기 78대로 이루어져 있었으며 당시 일본해군에서 최고의 기량을 자랑하는 급강하 폭격기 조종사들이 조종하고 있었다.

이들의 제1목표는 항공모함, 제2목표는 순양함 그리고 제3목표가 전함이었는데 이는 급강하폭격기가 장비한 250kg 짜리 폭탄이 전함의 갑판을 뚫을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항공모함이 없었기 때문에 계획에 따르면 순양함에 집중적인 공격이 가해져야 했으나 실제로는 그렇지 못했다.

미해군의 기록을 살펴보면 가장 많은 숫자인 약 30대가 전함을 공격했고 단지 17대가 순양함을 공격했다.

또한 최소한 16대가 구축함을 공격했으며 12대는 기타 함정을 공격했다.

 

전함을 공격한 약 30대의 급강하폭격기들 가운데 절반 이상이 진주만을 탈출하려던 네바다를 공격했다.

제1차 공습 당시 카가의 뇌격기로부터 어뢰 1발을 얻어맞은 네바다는 수선 하에 15m x 8m 의 구멍이 뚫리면서 동력이 꺼졌으나 오전 8시 40분에 동력을 회복하고 애리조나로부터 흘러나온 불타는 중유를 피하여 전함열을 떠났다.

오전 8시 48분에 급강하폭격기들이 진주만 상공에 도달했을 때 네바다는 진주만 입구로 나가기 위하여 포드 섬의 동해안을 따라 남쪽으로 항해 중이었다. 

 

(진주만 기습 당시 네바다의 움직임. 출처 : Why, How, Fleet Salvage and Final Appraissal, Homer N. Wallin, Naval History Division, P.213)

 

진주만 상공에 남아 있던 후치다 미츠오 중좌는 네바다가 진주만을 빠져나가려고 한다는 사실을 알았다.

네바다를 격침하면 진주만을 봉쇄할 수 있다고 생각한 미츠오 중좌는 급강하폭격기대를 지휘하던 에구사 소좌에게 네바다를 격침하라고 명령했다.

 

마키노 사부로 소좌가 지휘하는 카가의 급강하폭격기 26대 중에서 제1 및 제3중대 17대가 네바다를 노리고 급강하했다.

네바다는 모든 대공포를 동원하여 반격했으나 역부족이었다.

곧 네바다 주위에 지근탄이 떨어지기 시작하더니 공격 시작 2분 만인 8시 50분까지 5발이 명중했다.

17분 후인 9시 7분에 카가의 제2중대 소속 급강하폭격기가 1발의 폭탄을 추가로 명중시켰다.

 

6발의 폭탄 중 4발이 1번 포탑 앞쪽의 함수에 명중했다.

이 폭탄들은 이미 어뢰 1발을 맞은 함수에 더 많은 구멍을 뚫어 침수를 가속화시켰으며 화재를 일으켰다.

화재가 전방 탄약고를 위협하자 네바다는 전방 탄약고를 침수시켜야 했고 이로 인하여 함수는 더욱 낮아졌다.

다른 1발은 굴뚝의 기저부에 명중했으며 나머지 1발은 승조원 취사실에 명중했다.

 

기뢰부설함 오글라라에서 공습 장면을 지켜보던 태평양함대 기뢰부대 사령관 윌리엄 펄롱 소장은 일본군이 진주만 입구로 나가는 수로에 기뢰를 깔아놓았을지 모른다고 의심했다.

진주만 입구로 나가던 네바다가 기뢰에 접촉하여 침몰하면 항구가 봉쇄될 수 있었다.

 

펄롱 소장은 네바다에게 좌초하라는 명령을 내렸고 공습 당시 네바다의 최선임 장교였던 프랜시스 토머스 소령은 이 명령에 따라 오전 9시 10분에 네바다를 호스피탈 곶에 좌초시켰다.

잠시 후 펄롱 소장은 네바다를 바닥이 단단한 곳으로 옮기기 위하여 예인함 호가와 아보셋을 파견했다.

호가와 아보셋은 호스피탈 곶에서 네바다를 끌어내어 오전 10시 30분에 포드 섬 남안의 건너편 와이피오 곶의 후미에 있는 단단한 바닥에 다시 좌초시켰다.

이날 네바다에서는 1,484 명의 승조원 중에서 50명이 전사하고 109명이 부상을 입었다.

 

(와이피오 곶 후미에 좌초한 네바다. 옆에 예인함 호가와 아보셋이 보인다. http://www.navsource.org/archives/01/36c.htm)

 

와이피오 곶의 후미에 좌초한 네바다는 진주만 기습 2개월 후인 1942년 2월 12일에 인양되었다.

진주만에서 응급수리를 받고 미본토 서해안의 퓨젯사운드 조선소에 들어간 네바다는 1942년 10월까지 수리, 오버홀 및 근대화 개장을 받았다.

개장을 마친 네바다는 미본토 서해안에서 대기하다가 1943년 5월의 애투섬 상륙작전에 화력지원을 담당하면서 일선에 복귀했다.

 

일본 측은 급강하폭격기들이 네바다를 제외하고 전함열에 있던 전함에게 추가로 21발의 폭탄을 명중시켰다고 주장했으나 실제로 네바다를 제외하면 전함열의 전함 중 의미있는 피해를 입은 것은 캘리포니아가 유일하다.

오전 8시 45분에 소류와 히류의 급강하폭격기 3대가 캘리포니아에 달려들어 1발의 명중탄을 기록했다.

이 폭탄은 대공포 탄약고에 떨어져 약 50명을 죽였다.

 

(진주만 기습 당시 함정의 배치상황. http://maps101blog.com/2010/12/)

 

태평양함대의 기함인 전함 펜실베이니아는 진주만 기습 당시 구축함 캐신 및 다운즈와 함께 1번 건선거에 들어 있었다.

펜실베이니아는 첫번째 공습을 무사히 넘겼으나 두번째 공습에서는 소류 소속의 급강하폭격기 9대로부터 공격을 받았다.

오전 9시 6분에 이들이 떨어뜨린 폭탄 중 1발이 펜실베이니아의 단정갑판에 명중했다.

함체의 피해는 크지 않았으나 이날 펜실베이니아에서는 1,476명의 승조원들 중 18명이 전사하고 30명이 부상을 입었다.

 

펜실베이니아는 1941년 12월 20일에 진주만을 떠나 샌프란시스코로 가서 1942년 3월 30일까지 수리를 받았다.

이후 후방을 전전하며 훈련과 방어를 맡다가 1942년 10월 4일부터 1943년 2월 5일까지 메어 아일랜드 해군조선소에서 오버홀 및 근대화 개장을 받았다.

개장을 마친 펜실베이니아는 1943년 5월 11일에 애투 섬 포격에 참가하면서 일선에 복귀했다.

 

(공습을 받은 직후 펜실베이니아의 모습. 앞에 쓰러진 구축함은 캐신, 그 옆은 다운즈이다.

http://www.navsource.org/archives/01/38c.htm)

 

펜실베이니아 앞에 있던 구축함 캐신과 다운즈는 펜실베이니아를 노린 폭탄을 맞았다.

캐신은 2발을 맞았다.

첫번째 폭탄은 캐신의 140번 프레임을 통과하여 건선거 바닥에서 터지면서 화재를 일으켰다.

두번째 폭탄은 캐신의 60번 프레임을 관통하면서 폭발하여 캐신과 다운즈의 중유탱크를 파열시켰다.

다운즈 또한 함교에 1발을 맞았다.

 

캐신과 다운즈에서 흘러나온 중유가 건선거 바닥에서 불타 오르면서 자욱한 연기가 솟아올랐다.

잠시 후 가열된 다운즈의 어뢰가 폭발하면서 다운즈와 캐신의 함체는 큰 피해를 입었으며 캐신은 폭발의 충격으로 다운즈 쪽으로 쓰러졌다.

당황한 기술자가 화재를 잡기 위하여 건선거에 물을 집어넣었으나 오히려 물 위로 불타는 중유막이 퍼지도록 만들었을 뿐이었다.

이날 다운즈에서는 12명이 전사했다.

 

태평양함대는 1942년 2월 5일에 쓰러진 캐신을 일으켜 세웠고, 다음날인 2월 6일에는 임시로 수리한 다운즈를 건선거에서 빼내었다. 

임시 수리를 바친 캐신은 2월 18일에 건선거에서 나왔다.

캐신과 다운즈의 함체 피해는 심각했다.

미해군은 캐신과 다운즈의 함체는 해체하되 각종 기계와 부품은 거두어서 새로운 함체에 옮겨 재취역시키기로 했다.

 

다운즈는 1942년 8월에, 캐신은 10월에 해체되었으며 그 기계와 부품은 샌프란시스코 인근의 메어 아일랜드 조선소로 보내졌다.

메어 아알랜드 조선소에서는 새로 만든 함체에 다운즈와 캐신의 기계와 부품을 채워 넣었다.

이리하여 다운즈는 1943년 11월 15일에, 캐신은 1944년 2월 15일에 기존의 함명과 함체 번호를 유지한 채로 재취역했다.

Posted by 대사(P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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