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 갑표적(2) - HA-19정과 I-16정

 

사카마키 가즈오 소위와 이나가키 기요시 2등병조가 탑승한 HA-19 정은 I-24 함에서 발진했다.

자이로컴퍼스가 고장난 상태로 발진한 HA-19 정은 어렵게 진주만 입구에 도달했으나 항내로 진입하지 못했다.

항내로 진입하려 할 때마다 부근의 산호초에 좌초되었으며 이때 2발의 어뢰 중 1발이 발사불능이 되었다.

 

(진주만 기습 당시 함정의 배치상황. http://maps101blog.com/2010/12/)

 

진주만 기습이 시작되었을 때 구축함 헬름은 함체의 소자작업을 위하여 웨스트 협만에 들어서는 중이었다.

헬름은 공습이 시작되는 순간에 진주만 내에서 이동 중이던 유일한 함정이었다.

공습이 시작되자 헬름은 대공포화로 반격을 가하면서 진주만을 탈출했다.

진주만 입구를 빠져나가던 헬름은 7일 오전 8시 17분에 산호초에 걸린 HA-19 정의 사령탑을 발견하고 포격을 가했으나 명중시키는데 실패했다.

 

8시 20분에 HA-19 정은 산호초에서 빠져나와 잠항했다.정장 사카마키 소위는 헬름의 공격을 받자 공포에 사로잡혀 방향도 모르고 잠항한 상태로 달렸는데 함체가 물속에서 뒤집힌 상태로 달리기도 했다. 

함체는 손상을 입어 바닷물이 새어 들어왔고 축전지에 닿아 유독한 염소가스가 발생했다.

그렇게 한참을 달리던 HA-19 정은 다시 산호초에 좌초했는데 이때 사카마키 소위와 이나가키 2등병조는 염소가스로 인하여 정신을 잃었다.

 

7일 밤에 사카마키 소위는 정신을 차리고 사령탑의 문을 열어 환기를 시켰다.그는 이나가키 2등병조를 깨운 다음 함체를 살폈다.

HA-19 정은 해안 부근의 산호초에 좌초했으며 그 과정에서 사용이 가능했던 1발의 어뢰마저 발사불능이 되었다.

사카마키 소위는 자신들이 좌초한 곳이 모함인 I-16 함과의 접선 장소인 오아후 남쪽의 라나이 섬이라고 생각했으나 사실은 오아후 동해안에 있는 벨로우즈 비행장 부근 해안이었다

 

(진주만 기습 당시 비행장들. http://www.ibiblio.org/hyperwar/AAF/7Dec41/maps/7Dec41-2.jpg)

 

사카마키 소위는 이나가키 2등병조와 함께 탈출하기로 했다.

그는 자폭용 폭약의 신관을 활성화시킨 다음 이나가키 2등병조와 함께 바다로 뛰어들었다.

헤엄치던 사카마키 소위는 잠시 후 자폭용 폭약이 작동하지 않았다는 것을 깨달았으나 되돌아갈 체력이 없었다.

이나가키 2등병조는 물살에 휩쓸려 실종되었고 사카마키 소위도 물살에 휩쓸려 정신을 잃었다.

 

해안에 밀려온 사카마키 소위가 눈을 뜨자 벨로우즈 비행장 수비대 소속의 데이비드 아쿠이 병장이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리하여 아쿠이 병장은 태평양 전쟁에서 최초로 포로를 잡은 미군이 되었다.

 

(해안에 좌초한 HA-19정. http://en.wikipedia.org/wiki/Kazuo_Sakamaki)

 

미군은 해안에 좌초한 HA-19 정을 인양한 다음 미본토로 보내 전쟁채권 판매에 동원했다.

HA-19 정은 40개 주, 2,000 개가 넘는 도시를 돌아다니며 전시되었으며 가는 곳마다 큰 인기를 끌어 전쟁채권 판매에 커다란 도움을 주었다.

역사학자들은 HA-19 정 덕분에 미국 정부가 팔아치운 전쟁채권의 액수가 진주만에서 피해를 입은 함정과 시설들을 수리하고도 남는다고 평가한다.

 

(워싱턴의 국회의사당 앞에서 전시 중인 HA-19정. http://uschs.wordpress.com/2012/06/26/a-submarine-at-the-capitol/)

 

HA-19  정은 현재 텍사스 주 프레데릭스버그의 태평양전쟁박물관에 전시 중이다.

 

(태평양전쟁박물관에 전시 중인 HA-19 정. http://www.combinedfleet.com/Pearl.htm)

 

요코야마 마사하루 중위와 가미타 사다무 2등병조가 탑승한 I-16 정의 운명은 전쟁이 끝난 후에도 오랫동안 수수께끼였다.

일부 연구자들은 I-16정이 7일 오전 10시경 진주만 입구에서 외해로 탈출하던 경순양함 세인트루이스를 공격한 후 부근에 있던 구축함 블루로부터 폭뢰 공격을 받았다고 주장하지만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I-16 정은 1941년 12월 7일 밤 10시 40분에 모함인 I-16 함에

 

"성공, 성공, 성공"

 

이라는 무전을 치고 다음날인 8일 새벽 0시 51분에

 

"항해가 불가능하다."

 

는 무전을 마지막으로 역사에서 사라졌다.

 

1990년대 들어 일단의 연구자들이 진주만 기습 당시 일본군 항공기가 찍은 사진에 I-16 정의 공격 장면이 들어 있다고 주장하기 시작했다.

이 사진을 보면 전함 오클라호마와 웨스트버지니아의 현측 해상에 직사각형의 물체가 보이고 그 뒤로는 3개의 물보라가 일고 있으며 직사각형의 물체에서 출발하여 웨스트버지니아와 오클라호마로 향하는 어뢰의 항적같은 것이 보인다.

연구자들은 검은 직사각형이 I-16 정의 사령탑이며 뒤에 보이는 물보라는 갑표적의 이중반전프로펠러가 해면에서 회전할 때 나타나는 것으로 I-16 정이 웨스트버지니아와 오클라호마에 어뢰를 발사한 직후의 상황을 찍은 것이라고 주장했다.

 

(I-16 정의 공격장면이라고 주장하는 사진. http://www.aerospaceweb.org/question/hydrodynamics/q0280.shtml)

 

물론 여기에 대한 반론도 만만찮다.

많은 연구자들은 직사각형의 물체는 단지 원본 사진을 인화하는 과정에서 달라붙은 보푸라기를 제거한 흔적일 가능성이 많다고 주장했다.

물보라도 잠수함보다는 역시 동축반전 프로펠러를 이용하는 항공어뢰가 얕게 주행하다가 물 위로 잠시 떠오르면서 만들었을 가능성이 많다고 주장했다.

결정적으로 일본군 뇌격기에 의한 공격이 진행되는 도중에 I-16 정이 아군의 항공어뢰에 맞을 수 있는 위험한 위치에서 공격을 시도할 이유가 없다고 주장했다.

실제로 HA-19 정에서 노획한 서류에 의하면 갑표적들은 항공공격이 끝난 이후 오전 10시부터 공격을 가하기로 되어 있었다.

 

I-16 정이 진주만 내로 잠입하여 어뢰 공격을 가했다는 주장은 2009년 3월에 하와이 해저탐사연구소(Hawaii Undersea Research Laboratory = HURL)가 진주만 바깥에서 3개로 잘려진 갑표적의 잔해를 찾으면서 힘을 얻게 되었다.

이들이 주장하는 I-16 정의 운명은 다음과 같다.

 

진주만에 잠입하는데 성공한 I-16 정은 오전 8시경 어뢰 1발을 오클라호마에, 다른 1발을 웨스트버지니아 또는 애리조나에 발사했다.

다만 공습 후 주변 해저에서 항공어뢰보다 큰 어뢰가 폭발하지 않은 채로 발견된 것으로 보아 2번째 어뢰는 폭발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공격을 마친 I-16 정은 일단 웨스트 협만 쪽으로 달아났다가 반전하여 진주만 입구로 향했다.

구축함형 소해함 보보링크의 전투 보고서에는 오전 9시에 웨스트 협만의 와이피오 곶 부근 해상에서 진흙이 섞인 소용돌이가 일어나는 것을 목격하고 포탄을 3발 발사했다는 구절이 나오는데 이때 보보링크가 목격한 것이 탈출을 위하여 웨스트 협만을 나서던 I-16 정이 진흙바닥에 스치면서 일으킨 현상이다.

 

I-16 정이 진주만 입구에 도달했을 때는 이미 대잠망이 닫혀서 탈출이 불가능했다.

할 수 없이 웨스트 협만으로 돌아온 I-16 정은 해저에 웅크리고 있다가 밤이 되자 부상하여 밤 10시 40분에 공격에 성공했다는 무전을 보냈다.

이후 함체에 손상이 생기거나 축전지가 방전되거나 어떤 이유로든 항해가 불가능해지자 8일 새벽 0시 51분에 항해가 불가능하다는 무전을보낸 후 웨스트 협만에서 자폭했다.

실제로 2009년에 발견된 갑표적의 잔해에서 앞쪽 축전지 부근에 장착되어 있던 자폭용 폭약이 터진 상태였다.

 

(I-16 정으로 추정되는 갑표적 잔해의 함수 부분. 어뢰 2발을 모두 발사한 상태이다.

http://www.aerospaceweb.org/question/hydrodynamics/q0280.shtml)

 

마리애나 제도 침공을 앞둔 1944년 5월 21일에 웨스트 협만에서 탄약을 적재하던 전차상륙함 353함에서 폭발이 발생하여 전차상륙함 6척이 파괴되면서 163명이 사망하고 396명이 부상하는 참사가 발생했다.

웨스트 협만 참사(West Loch Disaster)라고 부르는 이 사고로 파괴된 전차상륙함의 잔해를 수습하던 미해군은 웨스트 협만에 가라앉아 있던 I-16 정을 발견했다.

그러나 진주만 기습 이래 종전시까지 진주만에서 발생한 가장 큰 사고였던 웨스트 협만 참사에 대해 엄격한 보도관제를 실시하고 있던 태평양함대는 I-16 정의 발견 또한 비밀에 붙였다.

그들은 I-16 정을 인양하여 3개로 자른 다음 전차상륙함들의 잔해와 함께 진주만 바깥에 버렸다.

 

I-16 정의 운명에 대한 이러한 주장은 2009년 3월의 잔해 발견으로 강력한 지지를 받고 있다.

실제로 발견된 갑표적의 잔해는 3개로 분리된 채 전차상륙함의 잔해를 버린 곳에서 발견되었으며 쇠사슬에 묶여 있었다.

이로써 미해군이 I-16 정의 잔해를 웨스트 협만에서 발견하여 인양한 다음 3 부분으로 잘라서 전차상륙함의 잔해와 함께 그곳에 버렸다는 주장에 힘을 실어주고 있다.

Posted by 대사(P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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