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 애리조나(BB-39)

 

진주만 기습 당시 애리조나는 테네시 바로 뒤, 전함열의 안쪽에 정박하고 있었으며 바깥쪽에는 수리함 베스털이 정박하고 있었다.

오전 8시 5분, 카가의 수평폭격기 5대가 애리조나 상공을 지나가면서 폭탄을 투하했다.

폭격은 정확했다.

5발의 폭탄 중 3발이 애리조나의 후반부에 명중했으며 1발은 베스털에 명중했다.

 

애리조나에 명중한 3발 중 1발은 좌현 85번 프레임의 대공포좌에 명중했다.

다른 1발은 96번 프레임의 좌현 끝쪽에 명중하여 방뢰격벽 안에서 폭발했다.

나머지 1발은 4번 포탑 모서리에 맞고 튕겨서 우현 갑판을 뚫고 들어가 식품저장고에서 폭발했다.

 

5분 후인 8시 10분에 히류의 수평폭격기 5대가 폭탄을 떨어뜨렸다.

5발의 중 1발은 베스털에 명중했고 다른 1발은 애리조나의 전반부에 명중했다.

이 폭탄 1발이 애리조나의 운명을 결정지었다.

 

(애리조나의 명중 상황. Battlleship Arizona, P.265)

 

2번 포탑의 오른쪽 전방에 명중한 폭탄은 14인치 주포의 장약이 보관되어 있던 화약고를 뚫고 들어가 폭발했다.

애리조나는 포탑 1개당 300 발의 14인치 포탄을 보유하고 있었는데 각 포탄마다 비단주머니에 무연화약을 채운 48kg 짜리 장약 주머니를 최대 4개 사용했다.

따라서 전방의 6개 탄약고에는 14인치 주포탄 600발과 115톤이 넘는 무연화약으로 이루어진 48kg 짜리 장약주머니 2,400개가 있었다.

 

폭탄에 들어있던 작약 22kg 의 폭발은 장약 주머니에 들어있던 무연화약을 발화시키는데 충분했다.

장약의 폭발로 급속히 팽창한 가스가 좌현 쪽의 주포탄약고로 밀고 들어가자 600발의 주포탄과 115톤이 넘는 무연화약을 보관하던 전방 탄약고 6개가 무시무시한 위력으로 폭발했다.

 

커다란 불덩어리가 150m 상공까지 치솟았고 88번 프레임 앞쪽이 통째로 쓸려 나갔으며, 내부 구조물이 쓸려나간 빈 공간에 엄청난 양의 바닷물이 밀려들면서 애리조나는 순식간에 가라앉았다.

너무 빨리 가라앉는 바람에 전복될 시간도 없었다.

화약고 내의 공기가 너무나 급격하게 팽창하는 바람에 애리조나 앞에 정박했던 테네시의 함미갑판에는 미처 연소하지 못한 채 폭풍에 밀려나온 무연화약이 먼지처럼 쌓였다.

 

(애리조나의 전방화약고가 폭발하는 순간. http://www.navsource.org/archives/01/39b.htm)

 

애리조나의 88번 프레임 앞쪽은 만신창이가 되었다.

폭발이 얼마나 심하게 함체의 앞쪽을 헤집어 놓았는지 미해군의 조사반은 화약고에 명중한 폭탄이 지나간 경로를 확인할 수가 없었다.

엄청난 위력의 폭발이 10번에서 70번 프레임 사이의 현측을 통해 옆으로, 그리고 1번 포탑 전면의 갑판을 통해 위로 빠져나갔으며 폭발이 빠져나간 길을 따라 엿가락처럼 휘어진 철판이 늘어섰다.

폭발이 함체 전방의 모든 것을 휩쓸어 밖으로 끌고 나감에 따라 1번 및 2번 포탑은 9m 가량 내려 앉았고 전방갑판 자체도 움푹 꺼졌다.

 

(옆에서 본 애리조나의 원래 모습과 오늘날 모습. http://www.navsource.org/archives/01/39d.htm)

 

엄청난 폭발과 뒤이은 급속한 침몰 및 화재로 인하여 1,511명의 승조원 중 제1전함전대 사령관 아이작 키드 소장과 함장 프랭클린 반 발켄버그 대령을 포함한 1,177명이 전사했다.

열기가 얼마나 강했던지 함교에 있던 키드 소장의 시체에서 확인이 가능한 것은 강철로 된 함교 바닥에 눌어붙어 버린 해군사관학교 졸업반지 뿐이었다.

키드 소장과 발켄버그 대령에게는 명예훈장이 추서되었다.

애리조나의 전사자는 진주만 기습에서 발생한 해군 및 해병대의 전사자 2,117 명의 절반이 넘는다.

 

폭발의 여파로 화재가 일어났고 연료탱크가 터져 불타는 중유가 흘러나왔다.

이때 흘러나오기 시작한 중유는 오늘날까지도 하루 2.2리터 정도의 양으로 계속 흘러나오고 있다.

생존자들은 함정에 남아 화재와 싸우면서 수면 위에 드러난 대공기관총으로 전투를 지속하다가 오전 10시 32분에 부상자와 함께 퇴함했다.

 

침몰한 지 3주일 후인 1941년 12월 29일에 애리조나는 잠정적으로 현역에서 제외되었고 1년 후인 1942년 12월 1일에 함적에서 제적되었다.

다른 함정들과 달리 함체의 피해가 심해서 인양, 수리 및 개장은 불가능했다.

애리조나의 상부구조물 중 해면 위로 나온 부분은 1942년에 대부분 제거되었다.

 

육군은 오아후 섬의 해안포 세력을 증강하기 위하여 애리조나의 포탑을 해안포로 활용하고 싶어했다.

튼튼한 포탑으로 보호된 3연장 14인치 해안포는 생존성이 높고 위력이 어마어마하여 오아후에 접근하는 적 함정에게 커다란 위협이 될 것이었다.

 

육군의 요청에 따라 해군은 1943년 4월에 애리조나에서 3번 및 4번 포탑을 뽑아 육군에 넘겨 주었다.

애리조나의 포탑을 넘겨받은 육군은 오아후의 서해안과 남해안을 제압할 수 있는 카헤 곶에 애리조나 포대(Battery Arizona)를, 동해안을 사정거리에 두는 모카푸 반도에 펜실베이니아 포대(Battery Pennsylvenia)를 건설하기 시작했다.

 

포대의 완성은 1944년 1월로 예정되었으나 미군의 반격이 진전되면서 오아후가 침공받을 위험성이 없어졌다.

따라서 공사는 지지부진했고 결국 펜실베이니아 포대가 완성되어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시험발사를 한 것은 일본이 항복한 1945년 8월 15일이었다.

애리조나 포대는 완성되지 못했다.

전쟁이 끝나자 미국은 포대를 폐쇄하고 애리조나의 후방 포탑 2개를 해체했다.

 

1944년 가을에는 애리조나의 2번 포탑에서 14인치 주포 3문을 빼내어 곧게 펴고 포신의 안쪽을 교체한 다음 네바다의 1번 포탑에 장착했다.

네바다는 애리조나의 주포를 가지고 이오지마와 오키나와를 포격했다.

 

전쟁이 끝난 후 1950년 3월 7일에 태평양함대 총사령관 아서 레드포드 대장이 애리조나에 국기를 게양하기로 결정했다.

태평양 함대는 애리조나의 함교를 지탱하던 다리를 잘라내 버린 그루터기에 국기게양대를 세우고 주변에 나무로 마루를 만들었다.

국기위병이 매일 아침 보트를 타고 가서 국기를 게양하고 저녁에 거두어 들였다.

 

1962년에 애리조나는 국가성지(National Shrine) 로 지정되었으며 함체 위에서 가로지르는 형태로 기념관 공사를 시작했다.

기념관 공사가 마무리되자 1966년 10월 15일에 애리조나는 국립 기념관(National Memorial)으로 지정되었다.

1989년 5월 5일에는 애리조나의 잔해가 국립역사유적지(National Historical Landmark) 로 지정되었다.

 

(애리조나 기념관. http://en.wikipedia.org/wiki/USS_Arizona_Memorial)

 

진주만 기습 당시 애리조나에서 근무하다가 살아남은 승조원은 사망시 유골을 애리조나에 안치하여 거기에 잠들어 있는 수많은 동료들과 영원히 함께 지낼 수 있다.

진주만 기습 이전에 애리조나에 근무했던 승조원은 사망시 유골을 태운 재를 애리조나 위의 해면에 뿌릴 수 있다.

 

애리조나의 종은 애리조나 주립대학에 있는데 미식축구 경기에서 승리했을 때만 울린다고 한다.

애리조나 주 피닉스 중심가에 있는 웨슬리 볼린 기념공원에는 애리조나의 망루와 닻이 전시되어 있다.

애리조나 주립 박물관에는 은퇴한 애리조나의 승조원들이 기부한 물품을 비롯하여 애리조나와 관련된 물품들을 전시하고 있다.

Posted by 대사(P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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