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 웨스트버지니아(BB-48)

 

오클라호마 뒤에 정박 중이던 웨스트버지니아는 진주만 기습 당시 함령이 18년으로 진주만의 전함 중 가장 젊었다.

오전 7시 55분에 웨스트버지니아의 당직 사관 로만 브룩스 소위는 일본기가 떨어뜨린 폭탄에 맞은 포드 섬 남쪽의 격납고에서 솟아오르는 불길을 보았다.

아직 공습 사실을 모르고 있던 브룩스 소위는 폭음에 이어 불길이 솟아오르자 폭격 지점과 웨스트버지니아 사이의 일직선 상에 있던 캘리포니아에서 폭발사고가 일어난 줄 알고 신속한 대처를 위하여 소화 및 인명구조 요원의 배치를 명령했다.

선실에 있던 많은 수병들이 이 명령을 듣고 도와주기 위하여 갑판 위로 올라왔다.

덕분에 웨스트버지니아는 오클라호마와 비슷한 강도의 공격을 받았음에도 인명피해는 훨씬 적었다.

 

(진주만 기습 당시 함정의 배치상황. http://commons.wikimedia.org/wiki/Category:Pearl_Harbor_attack_-_maps#mediaviewer/File:Pearl_Harbor_before_strike.gif)

 

갑판에 올라온 장병들 중 프레드릭 화이트 중위가 일본기가 접근하면서 어뢰를 투하하는 광경을 발견하고 첫번째 어뢰가 명중하기 전인 7시 56분에 전투배치 명령을 내렸고 2분도 안 되어 대공화기들이 불을 뿜기 시작했다.

웨스트버지니아는 아카기(3대), 카가(4대) 및 히류(2대)의 뇌격기 9대로부터 공격을 받아 좌현에 최소 4발, 최대 7발의 어뢰를 맞았다. 

어뢰 3발은 장갑대 아래에 맞았으며 함이 기울어졌을 때 최소 1발에서 최대 4발이 장갑대에 맞았다.

명중한 어뢰 중 1발 내지 2발은 기존의 어뢰가 뚫어놓은 구멍을 통하여 함체 내로 진입하여 제2장갑갑판에 명중하면서 조타장치실과 그 부근을 날려버렸다.

웨스트버지니아는 어뢰 뿐만 아니라 아카기, 카가 및 소류의 수평폭격기가 떨어뜨린 800kg 짜리 대형폭탄 2발을 맞았으나 천만다행으로 모두 불발탄이었다.

 

어뢰가 명중하자 함체가 급속히 왼쪽으로 기울어지면서 함내의 동력, 조명, 통신 및 좌현의 대공화기들이 모두 기능을 정지했다.

보수관 존 하퍼 소령은 방재센터에서 역침수를 실시하라고 명령하려 했으나 전화가 먹통이었다.

그러나 4개반으로 이루어진 60명의 보수반원들이 스스로의 판단으로 4개소에서 약 40개에 달하는 빈 격실(void)에 전부 역침수를 실시했으며 피격 지점 부근에 있던 수병들은 재빨리 방수문을 닫아서 추가 침수를 막았다.

시의적절한 방수문의 폐쇄와 역침수 덕분에 28도에 달했던 함체의 기울기가 15도까지 돌아오면서 웨스트버지니아는 전복을 피할 수 있었다. 

 

웨스트버지니아의 흑인 조리병 도리스 밀러는 그날 아침 6시에 일어났다.

밀러는 최초의 어뢰가 명중했을 때 함내의 세탁물을 모으고 있던 중이었다. 전투배치 명령이 떨어지자 밀러는 자신의 위치인 대공포 탄약고로 갔으나 이미 어뢰에 의하여 파괴된 후였다.

밀러는 함의 전방과 후방, 그리고 좌현과 우현으로 통하는 통로가 만나는 곳으로 가서 다른 임무를 기다렸다.

 

그때 웨스트버지니아의 함장 머빈 베니언 대령이 인접한 테네시에 명중한 폭탄의 파편에 맞아 내장이 다 쏟아져 나오는 중상을 입고 쓰러졌다.

통신관 도일 존슨 소령은 체격이 좋은 밀러를 데리고 상처입은 함장을 옮기러 갔다.

밀러가 베니언 함장을 옮기려 하자 함장은 완강히 후송을 거부했다.

할 수 없이 레슬리 릭 상사가 진통제를 주사한 후 밀러는 함장을 노출된 위험한 곳에서 함교 뒤쪽의 안전한 곳으로 옮겼다.

베니언 함장은 이곳에서 부하들의 보고를 받고 전투를 지휘하다가 전사했으며 명예훈장이 추서되었다. 

 

함장을 옮긴 후 프레드릭 화이트 중위는 함교에 설치된 2정의 12.7mm 대공기관총을 사격하려고 했다.

빅터 델리노 소위가  1정을 맡은 다음 밀러에게 다른 1정에 탄약을 장전하라고 말했다.

밀러는 탄약을 장전한 후 사격을 시작했다.

 

한참 사격하다 돌아본 델라노 소위는 기관총 사격 훈련을 받은 적이 없는 밀러가 사격하는 것을 보고 깜짝 놀랐으나 제지하지는 않았다.

화이트 중위도 제지하지 않았으며 오히려 두 사람을 위하여 기관총탄을 날라 주었다.

밀러는 총탄이 떨어질 때까지 사격했으나 일본기를 격추하지는 못했다. 

이후 밀러는 화재를 무릅쓰고 부상병들을 안전한 곳으로 옮겨 많은 이들의 생명을 구한 후 퇴함 명령이 내리자 함을 벗어났다.

밀러는 베니언 함장을 안전한 곳으로 옮기고 용감하게 일본기와 맞선 공로로 흑인으로서는 최초로 해군십자장을 받았다.

이후 밀러는 1943년 11월 24일에 호위항모 리스컴베이가 메이킨 환초 근해에서 일본잠수함 I-175 함의 어뢰를 맞고 격침될 때 전사했다.

 

(도리스 밀러. http://en.wikipedia.org/wiki/Doris_Miller)

 

어뢰에 난타당한 웨스트버지니아의 주변에 잠시 후 수평폭격기들이 폭탄을 떨어뜨렸는데 이들 중 2발이 명중했다.

1발은 전방 망루에 떨어져 제2장갑판에 부딪혔으나 불발탄이었다.

2번째 폭탄은 3번 주포탑에 떨어졌다.

폭탄은 주포탑 위에 얹혀있던 킹피셔 수상정찰기를 부수면서 포탑 지붕을 뚫고 들어갔다.

이 폭탄에 맞아 주포 1문이 망가졌으나 역시 불발탄이었다.

 

그러나 부서진 수상정찰기에서 흘러나온 항공유에 불이 붙어 화재가 발생했다.

게다가 터진 연료탱크와 인접한 애리조나에서 흘러나온 중유에 불이 붙었다.

 

재빠른 방수문 폐쇄와 역침수 덕분에 전복을 피한 웨스트버지니아는 불길에 둘러싸인 채 상부구조물을 수면에 내놓고 얕은 바닥에 가라앉았다.

 

(얕은 바닥에 가라앉은 웨스트버지니아. 옆에 보이는 것은 전함 테네시. http://www.navsource.org/archives/01/48f.htm)

 

부장 로스코 힐렌코에터 중령은 이미 퇴함했기 때문에 서열 3위인 보수관 존  하퍼 소령이 함장 베니언 대령의 마지막 명령에 따라 보수반원들을 제외한 장병들에게 퇴함명령을 내렸다.

하퍼 소령은 보수반원들을 이끌고 3번 포탑 부근을 비롯한 여러 곳의 화재를 진압한 후 오후 2시에 최종적으로 퇴함 명령을 내렸다. 

 

1,541명의 승조원 중 함장 베니언 대령을 포함한 105명이 전사하고 52명이 부상을 입었다.

웨스트버지니아의 인명피해가 비슷한 숫자의 어뢰를 얻어맞은 오클라호마보다 적었던 이유는 무엇보다도 적절한 역침수로 인하여 함체가 전복되지 않았으며 당직사관 브룩스 소위가 어뢰가 명중하기 전에 소화 및 인명구조 요원 배치 명령을 내림으로서 공격 초기에 많은 장병들이 함의 윗쪽으로 올라왔기 때문이었다.

 

웨스트버지니아는 1942년 5월 17일에 인양되어 6월9일에 진주만의 건선거에 들어갔다.

수리를 마친 웨스트버지니아는 1943년 5월 7일에 진주만을 떠나 미본토 서해안 브레머톤에 있는 퓨젯 사운드 해군 조선소로 가서 개장을 실시한 다음 1944년 9월 23일에 구축함  2척의 호위를 받으며 진주만으로 돌아왔다.

Posted by 대사(P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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