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 갑표적(2) - HA-19정과 I-16정

 

사카마키 가즈오 소위와 이나가키 기요시 2등병조가 탑승한 HA-19 정은 I-24 함에서 발진했다.

자이로컴퍼스가 고장난 상태로 발진한 HA-19 정은 어렵게 진주만 입구에 도달했으나 항내로 진입하지 못했다.

항내로 진입하려 할 때마다 부근의 산호초에 좌초되었으며 이때 2발의 어뢰 중 1발이 발사불능이 되었다.

 

(진주만 기습 당시 함정의 배치상황. http://maps101blog.com/2010/12/)

 

진주만 기습이 시작되었을 때 구축함 헬름은 함체의 소자작업을 위하여 웨스트 협만에 들어서는 중이었다.

헬름은 공습이 시작되는 순간에 진주만 내에서 이동 중이던 유일한 함정이었다.

공습이 시작되자 헬름은 대공포화로 반격을 가하면서 진주만을 탈출했다.

진주만 입구를 빠져나가던 헬름은 7일 오전 8시 17분에 산호초에 걸린 HA-19 정의 사령탑을 발견하고 포격을 가했으나 명중시키는데 실패했다.

 

8시 20분에 HA-19 정은 산호초에서 빠져나와 잠항했다.정장 사카마키 소위는 헬름의 공격을 받자 공포에 사로잡혀 방향도 모르고 잠항한 상태로 달렸는데 함체가 물속에서 뒤집힌 상태로 달리기도 했다. 

함체는 손상을 입어 바닷물이 새어 들어왔고 축전지에 닿아 유독한 염소가스가 발생했다.

그렇게 한참을 달리던 HA-19 정은 다시 산호초에 좌초했는데 이때 사카마키 소위와 이나가키 2등병조는 염소가스로 인하여 정신을 잃었다.

 

7일 밤에 사카마키 소위는 정신을 차리고 사령탑의 문을 열어 환기를 시켰다.그는 이나가키 2등병조를 깨운 다음 함체를 살폈다.

HA-19 정은 해안 부근의 산호초에 좌초했으며 그 과정에서 사용이 가능했던 1발의 어뢰마저 발사불능이 되었다.

사카마키 소위는 자신들이 좌초한 곳이 모함인 I-16 함과의 접선 장소인 오아후 남쪽의 라나이 섬이라고 생각했으나 사실은 오아후 동해안에 있는 벨로우즈 비행장 부근 해안이었다

 

(진주만 기습 당시 비행장들. http://www.ibiblio.org/hyperwar/AAF/7Dec41/maps/7Dec41-2.jpg)

 

사카마키 소위는 이나가키 2등병조와 함께 탈출하기로 했다.

그는 자폭용 폭약의 신관을 활성화시킨 다음 이나가키 2등병조와 함께 바다로 뛰어들었다.

헤엄치던 사카마키 소위는 잠시 후 자폭용 폭약이 작동하지 않았다는 것을 깨달았으나 되돌아갈 체력이 없었다.

이나가키 2등병조는 물살에 휩쓸려 실종되었고 사카마키 소위도 물살에 휩쓸려 정신을 잃었다.

 

해안에 밀려온 사카마키 소위가 눈을 뜨자 벨로우즈 비행장 수비대 소속의 데이비드 아쿠이 병장이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리하여 아쿠이 병장은 태평양 전쟁에서 최초로 포로를 잡은 미군이 되었다.

 

(해안에 좌초한 HA-19정. http://en.wikipedia.org/wiki/Kazuo_Sakamaki)

 

미군은 해안에 좌초한 HA-19 정을 인양한 다음 미본토로 보내 전쟁채권 판매에 동원했다.

HA-19 정은 40개 주, 2,000 개가 넘는 도시를 돌아다니며 전시되었으며 가는 곳마다 큰 인기를 끌어 전쟁채권 판매에 커다란 도움을 주었다.

역사학자들은 HA-19 정 덕분에 미국 정부가 팔아치운 전쟁채권의 액수가 진주만에서 피해를 입은 함정과 시설들을 수리하고도 남는다고 평가한다.

 

(워싱턴의 국회의사당 앞에서 전시 중인 HA-19정. http://uschs.wordpress.com/2012/06/26/a-submarine-at-the-capitol/)

 

HA-19  정은 현재 텍사스 주 프레데릭스버그의 태평양전쟁박물관에 전시 중이다.

 

(태평양전쟁박물관에 전시 중인 HA-19 정. http://www.combinedfleet.com/Pearl.htm)

 

요코야마 마사하루 중위와 가미타 사다무 2등병조가 탑승한 I-16 정의 운명은 전쟁이 끝난 후에도 오랫동안 수수께끼였다.

일부 연구자들은 I-16정이 7일 오전 10시경 진주만 입구에서 외해로 탈출하던 경순양함 세인트루이스를 공격한 후 부근에 있던 구축함 블루로부터 폭뢰 공격을 받았다고 주장하지만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I-16 정은 1941년 12월 7일 밤 10시 40분에 모함인 I-16 함에

 

"성공, 성공, 성공"

 

이라는 무전을 치고 다음날인 8일 새벽 0시 51분에

 

"항해가 불가능하다."

 

는 무전을 마지막으로 역사에서 사라졌다.

 

1990년대 들어 일단의 연구자들이 진주만 기습 당시 일본군 항공기가 찍은 사진에 I-16 정의 공격 장면이 들어 있다고 주장하기 시작했다.

이 사진을 보면 전함 오클라호마와 웨스트버지니아의 현측 해상에 직사각형의 물체가 보이고 그 뒤로는 3개의 물보라가 일고 있으며 직사각형의 물체에서 출발하여 웨스트버지니아와 오클라호마로 향하는 어뢰의 항적같은 것이 보인다.

연구자들은 검은 직사각형이 I-16 정의 사령탑이며 뒤에 보이는 물보라는 갑표적의 이중반전프로펠러가 해면에서 회전할 때 나타나는 것으로 I-16 정이 웨스트버지니아와 오클라호마에 어뢰를 발사한 직후의 상황을 찍은 것이라고 주장했다.

 

(I-16 정의 공격장면이라고 주장하는 사진. http://www.aerospaceweb.org/question/hydrodynamics/q0280.shtml)

 

물론 여기에 대한 반론도 만만찮다.

많은 연구자들은 직사각형의 물체는 단지 원본 사진을 인화하는 과정에서 달라붙은 보푸라기를 제거한 흔적일 가능성이 많다고 주장했다.

물보라도 잠수함보다는 역시 동축반전 프로펠러를 이용하는 항공어뢰가 얕게 주행하다가 물 위로 잠시 떠오르면서 만들었을 가능성이 많다고 주장했다.

결정적으로 일본군 뇌격기에 의한 공격이 진행되는 도중에 I-16 정이 아군의 항공어뢰에 맞을 수 있는 위험한 위치에서 공격을 시도할 이유가 없다고 주장했다.

실제로 HA-19 정에서 노획한 서류에 의하면 갑표적들은 항공공격이 끝난 이후 오전 10시부터 공격을 가하기로 되어 있었다.

 

I-16 정이 진주만 내로 잠입하여 어뢰 공격을 가했다는 주장은 2009년 3월에 하와이 해저탐사연구소(Hawaii Undersea Research Laboratory = HURL)가 진주만 바깥에서 3개로 잘려진 갑표적의 잔해를 찾으면서 힘을 얻게 되었다.

이들이 주장하는 I-16 정의 운명은 다음과 같다.

 

진주만에 잠입하는데 성공한 I-16 정은 오전 8시경 어뢰 1발을 오클라호마에, 다른 1발을 웨스트버지니아 또는 애리조나에 발사했다.

다만 공습 후 주변 해저에서 항공어뢰보다 큰 어뢰가 폭발하지 않은 채로 발견된 것으로 보아 2번째 어뢰는 폭발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공격을 마친 I-16 정은 일단 웨스트 협만 쪽으로 달아났다가 반전하여 진주만 입구로 향했다.

구축함형 소해함 보보링크의 전투 보고서에는 오전 9시에 웨스트 협만의 와이피오 곶 부근 해상에서 진흙이 섞인 소용돌이가 일어나는 것을 목격하고 포탄을 3발 발사했다는 구절이 나오는데 이때 보보링크가 목격한 것이 탈출을 위하여 웨스트 협만을 나서던 I-16 정이 진흙바닥에 스치면서 일으킨 현상이다.

 

I-16 정이 진주만 입구에 도달했을 때는 이미 대잠망이 닫혀서 탈출이 불가능했다.

할 수 없이 웨스트 협만으로 돌아온 I-16 정은 해저에 웅크리고 있다가 밤이 되자 부상하여 밤 10시 40분에 공격에 성공했다는 무전을 보냈다.

이후 함체에 손상이 생기거나 축전지가 방전되거나 어떤 이유로든 항해가 불가능해지자 8일 새벽 0시 51분에 항해가 불가능하다는 무전을보낸 후 웨스트 협만에서 자폭했다.

실제로 2009년에 발견된 갑표적의 잔해에서 앞쪽 축전지 부근에 장착되어 있던 자폭용 폭약이 터진 상태였다.

 

(I-16 정으로 추정되는 갑표적 잔해의 함수 부분. 어뢰 2발을 모두 발사한 상태이다.

http://www.aerospaceweb.org/question/hydrodynamics/q0280.shtml)

 

마리애나 제도 침공을 앞둔 1944년 5월 21일에 웨스트 협만에서 탄약을 적재하던 전차상륙함 353함에서 폭발이 발생하여 전차상륙함 6척이 파괴되면서 163명이 사망하고 396명이 부상하는 참사가 발생했다.

웨스트 협만 참사(West Loch Disaster)라고 부르는 이 사고로 파괴된 전차상륙함의 잔해를 수습하던 미해군은 웨스트 협만에 가라앉아 있던 I-16 정을 발견했다.

그러나 진주만 기습 이래 종전시까지 진주만에서 발생한 가장 큰 사고였던 웨스트 협만 참사에 대해 엄격한 보도관제를 실시하고 있던 태평양함대는 I-16 정의 발견 또한 비밀에 붙였다.

그들은 I-16 정을 인양하여 3개로 자른 다음 전차상륙함들의 잔해와 함께 진주만 바깥에 버렸다.

 

I-16 정의 운명에 대한 이러한 주장은 2009년 3월의 잔해 발견으로 강력한 지지를 받고 있다.

실제로 발견된 갑표적의 잔해는 3개로 분리된 채 전차상륙함의 잔해를 버린 곳에서 발견되었으며 쇠사슬에 묶여 있었다.

이로써 미해군이 I-16 정의 잔해를 웨스트 협만에서 발견하여 인양한 다음 3 부분으로 잘라서 전차상륙함의 잔해와 함께 그곳에 버렸다는 주장에 힘을 실어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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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 갑표적(1) - I-18정, I-20정, I-22 정

 

진주만 기습에서 5척의 갑표적들은 아무런 공식 전과도 올리지 못한 채 전멸했다.

갑표적은 HA 로 시작하는 고유 번호를 가지고 있으나 진주만 기습에 투입된 갑표적 중 HA 번호가 확인된 것은 포로로 잡힌 사카마키 가즈오 소위의 HA-19 정뿐으로 I-24 함에서 발진했다.

따라서 여기서 칭하는 갑표적의 번호는 발진한 잠수함의 기호를 딴 것이다.

즉 I-16 정은 I-16 함에서 발진한 갑표적이라는 뜻이며 HA 번호와는 다르다.

다만 사카마키 소위의 갑표적은 HA-19 정으로 칭한다.

 

진주만 기습에 참가한 갑표적 중 가장 먼저 발진한 것은 요코야마 마사하루 중위와 가미타 사다무 2등 병조가 탑승한 I-16 정으로 7일 새벽 0시 42분에 진주만 입구에서 11km 떨어진 해상에서 발진했다.

두번째로 발진한 것은 이와사 나오지 대위와 사사키 나오기치 1등 병조가 탑승한 I-22 정으로 7일 새벽 1시 16분에 진주만 입구에서 14km 떨어진 해상에서 발진했다.

세번째로 발진한 것은 후루노 시게미 중위와 요코야마 시게노리 1등 병조가 탑승한 I-18 정으로 7일 새벽 2시 15분에 진주만 입구에서 21km 떨어진 해상에서 발진했다.

네번째로 발진한 것은 히루 아키라 소위와 가타야마 요시로 2등 병조가 탑승한 I-20 정으로 7일 새벽 2시 57분에 진주만 입구에서 8km 떨어진 해상에서 발진했다.

마지막으로 발진한 것은 사카마키 가즈오 소위와 이나가키 기요시 2등 병조가 탑승한 HA-19 정으로 7일 새벽 3시 33분에 진주만 입구에서 16km 떨어진 해상에서 발진했다.

I-24 함에서 발진한 HA-19 정은 자이로컴퍼스가 고장나서 발진이 늦었다.

 

갑표적들은 진주만에 잠입해 해저에 숨어 있다가 제1차 공습과 제2차 공습 사이에 부상하여 어뢰로 전함들을 공격할 예정이었다.

공격을 마친 갑표적은 진주만을 벗어나 오아후 남동쪽에 있는 라나이 섬 부근에서 모함과 만나 일본으로 돌아갈 예정이었으나 1척도 접선 장소에 나타나지 않았다.

 

(하와이 제도. http://www.antor.org/images/hawaii.jpg)

 

12월 7일 오전 3시 42분에 소해함 콘도르가 발견하여 워드에게 보고했던 잠수정은 발진 시각을 고려해 볼 때 I-16 정이나 I-22 정일 가능성이 높다.

 

I-20 정은 7일 오전 6시 50분 경에 진주만 입구 부근에서 구축함 워드의 공격을 받아 격침되었으며 잔해는 2002년에 발견되었다.

 

(2002년에 진주만 부근 해저에서 발견된 I-20 정의 잔해. http://www.aerospaceweb.org/question/hydrodynamics/q0280.shtml)

 

I-22 정은 공습이 진행 중이던 오전 8시 36분에 포드 섬의 서쪽, 미들 협만 쪽에 정박 중이던 수상기모함 커티스에 의하여 발견되었다.

커티스는 I-22 정의 잠망경을 발견하고 사격을 가하기 시작했다.

 

(진주만 기습 당시 함정의 배치상황. http://maps101blog.com/2010/12/)

 

잠시 후 I-22 정은 커티스를 노리고 어뢰를 발사했으나 빗나가 펄시티의 부두에 부딪혀 폭발했다.

어뢰를 쏘고 가벼워진 I-22 정이 부상하자 커티스 뿐 아니라 주변에 있던 수리함 메두사, 수상기모함 탠지어, 구축함형 소해함 페리와 제인, 기뢰부설함 브리즈가 사격을 가했다.

이들이 발사한 포탄 중 1발이 I-22 정의 사령탑에 명중했으며 정장 이와사 나오지 대위는 이때 전사했을 것이다.

 

이스트 협만에 정박 중이던 구축함 모내건의 함장 빌 버퍼드 소령은 오전 7시 51분에 진주만 밖에 있던 구축함 워드를 지원하라는 명령을 받았는데 4분 후 일본군의 공습이 시작되었다.

대공포를 난사하면서 미들 협만 쪽으로 이동하던 모내건은 일본군 잠수함을 발견했다는 커티스의 무선보고를 들었다.

 

해상을 살피던 모내건은 I-22 정을 발견하고 전속력으로 달려들었다.

I-22 정은 달려드는 모내건에게 남은 어뢰 1발을 발사했으나 모내건의 좌현으로 약 20m 정도 빗나가서 포드 섬 해안에 부딪혀 폭발했다.

모내건이 고속으로 들이받자 I-22 정은 옆으로 쓰러지면서 침몰했다.

충돌 직후 모내건은 함미에서 폭발심도를 얕게 맞춘 폭뢰 2발을 떨어뜨려 마무리지었다.

이는 잘못하면 모내건 자신에게 위험할 수 있는 공격이었으나 이로써 I-22 정을 격침했다. 

 

고속으로 질주하던 모내건은 베코닝 곶 앞에 정박 중이던 준설선을 아슬아슬하게 비껴나면서 함체가 긁혔으나 다행히 큰 상처를 입지는 않았다.

모내건은 이후 일본기들을 피하여 진주만을 빠져나와 공해로 도망쳤다.

 

미해군은 진주만 기습 2주일 후에 I-22 정의 프로펠러와 전방 함체 일부를 우연히 발견하여 인양했으나 구태여 나머지를 찾지는 않았다.

전쟁 후반기에 I-22 정의 잔해가 발견되었던 곳에 잠수함용 건선거가 들어섰다. 

전쟁이 끝난 후 1952년에 I-22 정의 나머지 부분이 노출되었으나 내부에 축전지에서 발생한 염소가스가 가득했으므로 그 자리에 다시 파묻었다.

 

I-18정은 1960년 6월 13일에 미국의 다이버들에 의하여 진주만 입구 바깥의 키히 환초에서 발견되었다.

함체에는 폭뢰 공격을 받은 흔적이 있었으며 어뢰 2발은 발사되지 않은 상태였다.

진주만 기습 당시 진주만 입구 부근에서 몇 차례의 폭뢰 공격 보고가 있었으므로 이때 격침된 것으로 보인다.

함체 내부에서 승조원인 후루노 시게미 중위와 요코야마 시게노리 1등 병조의 시체가 발견되지 않았으므로 일단 탈출에는 성공한 후 실종된 것으로 보인다.

 

(인양된 I-18 정의 모습. 앞쪽을 절단한 상태다.

http://en.wikipedia.org/wiki/Type_A_K%C5%8D-hy%C5%8Dteki-class_submarine#Pearl_Harbor_attack)

 

미해군은 어뢰가 있어 위험한 I-18 정의 앞쪽을 절단하고 인양한 후 일본정부의 요청에 따라 해상자위대에 넘겨주었다.

 I-18 정은 현재 에타지마 병학교에 전시되어 있다.

 

(에타지마 병학교에 전시 중인 I-18 정. 앞쪽은 만들어 붙인 것이다. http://www.combinedfleet.com/Pearl.ht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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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 포드 섬과 히컴 비행장

 

오아후 북해안에서 후치다 중좌가 돌격명령을 내리자 다카하시 가쿠이치 소좌가 이끄는 쇼가쿠의 급강하폭격기 26대는 이타야 시게루 소좌가 이끄는 아카기 소속  제로기 9대의 호위를 받으면서 쿨라우 산맥 서쪽을 따라 남하했다.

 

(오아후 지도. http://hidot.hawaii.gov/highways/home/oahu/oahu-state-roads-and-highways/)

 

이타야 소좌가 이끌던 아카기의 제로기들은 남하 도중 오전 7시 53분에 민간용 훈련기 2대와 마주쳤다.

훈련기 중 1대는 격추되었으나 조종사는 무사히 탈출했다.

 오전 7시 55분, 진주만에 접근한 쇼가쿠의 급강하폭격기 26대 중 제1중대 9대는 포드 섬 비행장을, 제2 및 제3중대 17대는 히컴 비행장을 공격했다.

이타야 소좌는 호놀룰루 남쪽까지 날아가 오전 7시 57분에 민간 비행장인 로저스 비행장을 공격했다.

 

(진주만 기습 상황도. http://upload.wikimedia.org/wikipedia/commons/1/1c/Pearl_Harbor_bombings_map.jpg)

 

쇼가쿠의 급강하폭격기 9대로 이루어진 다카하시 소좌의 제1중대가 7시 55분에 포드 섬을 폭격하기 시작하자 3분 후인 58분에 유명한

 

"진주만 공습, 이것은 훈련이 아니다."

("Air Raid Pearl Harbor, This is no drill.")

 

라는 전문이 발신되었다.

 

포드 섬은 패트릭 벨린저 소장이 지휘하는 제2초계비행단의 기지였으며 항공모함이 진주만에 정박할 경우 함재기가 주둔하는 기지였다.

당시 포드 섬에는 33대의 카탈리나 비행정이 주둔 중이었다.

급강하폭격기는 격납고와 주기 중인 비행기에게 큰 피해를 입혔는데 애리조나가 침몰하면서 급수관을 깔고 앉는 바람에 물의 공급이 끊어져 소화활동에 지장을 받았다.

 

(불타고 있는 포드 섬의 6번 격납고. http://en.wikipedia.org/wiki/Ford_Island)

 

포드 섬 비행장이 공격을 받는 동안 엔터프라이즈에서 발진한 돈틀레스 18대가 도착했다.

18대 중 계획대로 포드 섬에 착륙한 것은 4대에 지나지 않았다.

3대는 제로기에 의하여 격추되었고 2대는 아군의 대공포에 맞아 격추되었다.

7대는 에바 비행장에 착륙했으며 1대는 히컴 비행장에 착륙했다.

나머지 1대는 오아후 섬을 벗어나 카우아이 섬의 비행장에 착륙했다.

 

쇼가쿠의 급강하폭격기 2개 중대 17대는 히컴 비행장을 공격했다.

히컴 비행장에는 B-17 폭격기 12대, B-18 폭격기 33대, A-20 폭격기 12대 등 일본항모에 반격을 가할 능력이 있는 하와이 육군항공대의 폭격기가 주둔하고 있었다.

이들 폭격기도 휠러 비행장의 전투기와 마찬가지로 파괴활동에 대비하여 감시가 쉽도록 약 3m 간격을 두고 촘촘히 늘어서 있었다.

 

(히컴 비행장 공격 상황도. http://the.honoluluadvertiser.com/specials/pearlharbor60/pearl2truck.html)

 

히컴 비행장에 접근한 쇼가쿠의 급강하폭격기 17대는 1개 중대씩 좌우로 갈라진 다음 오전 7시 55분부터 격납고와 그 앞에 늘어선 비행기들을 목표로 폭격을 시작했다.

상공에 미군 요격기가 없다는 것을 확인한 아카기의 제로기들도 8시부터 지상의 미군 비행기들을 기총소사했으며 이타야 소좌는 남쪽으로 날아가 민간비행장인 로저스 비행장을 공격했다.

8시 5분에는 카가의 제로기들도 기총소사에 가담했다.

아카기의 제로기들은 3번에 걸쳐 히컴 비행장에 기총소사를 가한 다음 8시 10분에 에바 비행장으로 가서 그곳을 기총소사했다.

히컴 비행장의 비행기들과 격납고는 큰 피해를 입었으며 막사도 폭격을 받았다. 

 

히컴 비행장이 공격을 받는 동안 미본토 서해안에서 날아온 제38 및 제88 중정찰비행대대(Reconaissance Squadron, Heavy)소속의 B-17C 4대와 B-17E 8대가 도착했다.

비행에 꼭 필요한 승무원 5명만을 태우고 무장을 제거한 B-17 폭격기들은 착륙 과정에서 제로기의 공격을 받았으나 큰 피해를 입지는 않았다.

B-17C 1대가 히컴 비행장에 착륙한 직후 불탔고 다른 1대는 오아후 북쪽의 골프장에 불시착했다.

나머지 10대중 7대는 히컴 비행장에, 2대는 할레이와 비행장에, 1대는 벨로우즈 비행장에 무사히 착륙하여 다음날부터 임무에 투입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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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 애리조나(BB-39)

 

진주만 기습 당시 애리조나는 테네시 바로 뒤, 전함열의 안쪽에 정박하고 있었으며 바깥쪽에는 수리함 베스털이 정박하고 있었다.

오전 8시 5분, 카가의 수평폭격기 5대가 애리조나 상공을 지나가면서 폭탄을 투하했다.

폭격은 정확했다.

5발의 폭탄 중 3발이 애리조나의 후반부에 명중했으며 1발은 베스털에 명중했다.

 

애리조나에 명중한 3발 중 1발은 좌현 85번 프레임의 대공포좌에 명중했다.

다른 1발은 96번 프레임의 좌현 끝쪽에 명중하여 방뢰격벽 안에서 폭발했다.

나머지 1발은 4번 포탑 모서리에 맞고 튕겨서 우현 갑판을 뚫고 들어가 식품저장고에서 폭발했다.

 

5분 후인 8시 10분에 히류의 수평폭격기 5대가 폭탄을 떨어뜨렸다.

5발의 중 1발은 베스털에 명중했고 다른 1발은 애리조나의 전반부에 명중했다.

이 폭탄 1발이 애리조나의 운명을 결정지었다.

 

(애리조나의 명중 상황. Battlleship Arizona, P.265)

 

2번 포탑의 오른쪽 전방에 명중한 폭탄은 14인치 주포의 장약이 보관되어 있던 화약고를 뚫고 들어가 폭발했다.

애리조나는 포탑 1개당 300 발의 14인치 포탄을 보유하고 있었는데 각 포탄마다 비단주머니에 무연화약을 채운 48kg 짜리 장약 주머니를 최대 4개 사용했다.

따라서 전방의 6개 탄약고에는 14인치 주포탄 600발과 115톤이 넘는 무연화약으로 이루어진 48kg 짜리 장약주머니 2,400개가 있었다.

 

폭탄에 들어있던 작약 22kg 의 폭발은 장약 주머니에 들어있던 무연화약을 발화시키는데 충분했다.

장약의 폭발로 급속히 팽창한 가스가 좌현 쪽의 주포탄약고로 밀고 들어가자 600발의 주포탄과 115톤이 넘는 무연화약을 보관하던 전방 탄약고 6개가 무시무시한 위력으로 폭발했다.

 

커다란 불덩어리가 150m 상공까지 치솟았고 88번 프레임 앞쪽이 통째로 쓸려 나갔으며, 내부 구조물이 쓸려나간 빈 공간에 엄청난 양의 바닷물이 밀려들면서 애리조나는 순식간에 가라앉았다.

너무 빨리 가라앉는 바람에 전복될 시간도 없었다.

화약고 내의 공기가 너무나 급격하게 팽창하는 바람에 애리조나 앞에 정박했던 테네시의 함미갑판에는 미처 연소하지 못한 채 폭풍에 밀려나온 무연화약이 먼지처럼 쌓였다.

 

(애리조나의 전방화약고가 폭발하는 순간. http://www.navsource.org/archives/01/39b.htm)

 

애리조나의 88번 프레임 앞쪽은 만신창이가 되었다.

폭발이 얼마나 심하게 함체의 앞쪽을 헤집어 놓았는지 미해군의 조사반은 화약고에 명중한 폭탄이 지나간 경로를 확인할 수가 없었다.

엄청난 위력의 폭발이 10번에서 70번 프레임 사이의 현측을 통해 옆으로, 그리고 1번 포탑 전면의 갑판을 통해 위로 빠져나갔으며 폭발이 빠져나간 길을 따라 엿가락처럼 휘어진 철판이 늘어섰다.

폭발이 함체 전방의 모든 것을 휩쓸어 밖으로 끌고 나감에 따라 1번 및 2번 포탑은 9m 가량 내려 앉았고 전방갑판 자체도 움푹 꺼졌다.

 

(옆에서 본 애리조나의 원래 모습과 오늘날 모습. http://www.navsource.org/archives/01/39d.htm)

 

엄청난 폭발과 뒤이은 급속한 침몰 및 화재로 인하여 1,511명의 승조원 중 제1전함전대 사령관 아이작 키드 소장과 함장 프랭클린 반 발켄버그 대령을 포함한 1,177명이 전사했다.

열기가 얼마나 강했던지 함교에 있던 키드 소장의 시체에서 확인이 가능한 것은 강철로 된 함교 바닥에 눌어붙어 버린 해군사관학교 졸업반지 뿐이었다.

키드 소장과 발켄버그 대령에게는 명예훈장이 추서되었다.

애리조나의 전사자는 진주만 기습에서 발생한 해군 및 해병대의 전사자 2,117 명의 절반이 넘는다.

 

폭발의 여파로 화재가 일어났고 연료탱크가 터져 불타는 중유가 흘러나왔다.

이때 흘러나오기 시작한 중유는 오늘날까지도 하루 2.2리터 정도의 양으로 계속 흘러나오고 있다.

생존자들은 함정에 남아 화재와 싸우면서 수면 위에 드러난 대공기관총으로 전투를 지속하다가 오전 10시 32분에 부상자와 함께 퇴함했다.

 

침몰한 지 3주일 후인 1941년 12월 29일에 애리조나는 잠정적으로 현역에서 제외되었고 1년 후인 1942년 12월 1일에 함적에서 제적되었다.

다른 함정들과 달리 함체의 피해가 심해서 인양, 수리 및 개장은 불가능했다.

애리조나의 상부구조물 중 해면 위로 나온 부분은 1942년에 대부분 제거되었다.

 

육군은 오아후 섬의 해안포 세력을 증강하기 위하여 애리조나의 포탑을 해안포로 활용하고 싶어했다.

튼튼한 포탑으로 보호된 3연장 14인치 해안포는 생존성이 높고 위력이 어마어마하여 오아후에 접근하는 적 함정에게 커다란 위협이 될 것이었다.

 

육군의 요청에 따라 해군은 1943년 4월에 애리조나에서 3번 및 4번 포탑을 뽑아 육군에 넘겨 주었다.

애리조나의 포탑을 넘겨받은 육군은 오아후의 서해안과 남해안을 제압할 수 있는 카헤 곶에 애리조나 포대(Battery Arizona)를, 동해안을 사정거리에 두는 모카푸 반도에 펜실베이니아 포대(Battery Pennsylvenia)를 건설하기 시작했다.

 

포대의 완성은 1944년 1월로 예정되었으나 미군의 반격이 진전되면서 오아후가 침공받을 위험성이 없어졌다.

따라서 공사는 지지부진했고 결국 펜실베이니아 포대가 완성되어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시험발사를 한 것은 일본이 항복한 1945년 8월 15일이었다.

애리조나 포대는 완성되지 못했다.

전쟁이 끝나자 미국은 포대를 폐쇄하고 애리조나의 후방 포탑 2개를 해체했다.

 

1944년 가을에는 애리조나의 2번 포탑에서 14인치 주포 3문을 빼내어 곧게 펴고 포신의 안쪽을 교체한 다음 네바다의 1번 포탑에 장착했다.

네바다는 애리조나의 주포를 가지고 이오지마와 오키나와를 포격했다.

 

전쟁이 끝난 후 1950년 3월 7일에 태평양함대 총사령관 아서 레드포드 대장이 애리조나에 국기를 게양하기로 결정했다.

태평양 함대는 애리조나의 함교를 지탱하던 다리를 잘라내 버린 그루터기에 국기게양대를 세우고 주변에 나무로 마루를 만들었다.

국기위병이 매일 아침 보트를 타고 가서 국기를 게양하고 저녁에 거두어 들였다.

 

1962년에 애리조나는 국가성지(National Shrine) 로 지정되었으며 함체 위에서 가로지르는 형태로 기념관 공사를 시작했다.

기념관 공사가 마무리되자 1966년 10월 15일에 애리조나는 국립 기념관(National Memorial)으로 지정되었다.

1989년 5월 5일에는 애리조나의 잔해가 국립역사유적지(National Historical Landmark) 로 지정되었다.

 

(애리조나 기념관. http://en.wikipedia.org/wiki/USS_Arizona_Memorial)

 

진주만 기습 당시 애리조나에서 근무하다가 살아남은 승조원은 사망시 유골을 애리조나에 안치하여 거기에 잠들어 있는 수많은 동료들과 영원히 함께 지낼 수 있다.

진주만 기습 이전에 애리조나에 근무했던 승조원은 사망시 유골을 태운 재를 애리조나 위의 해면에 뿌릴 수 있다.

 

애리조나의 종은 애리조나 주립대학에 있는데 미식축구 경기에서 승리했을 때만 울린다고 한다.

애리조나 주 피닉스 중심가에 있는 웨슬리 볼린 기념공원에는 애리조나의 망루와 닻이 전시되어 있다.

애리조나 주립 박물관에는 은퇴한 애리조나의 승조원들이 기부한 물품을 비롯하여 애리조나와 관련된 물품들을 전시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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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 메릴랜드, 테네시, 베스털, 네오쇼

 

오전 7시 49분에 오아후 북해안 와이에아 상공에서 돌격명령을 내린 후 후치다 미츠오 중좌가 이끄는 수평폭격기 49대는 3,000m 고도를 유지하면서 오아후 섬의 서해안을 따라 남하했다.

시가 요시오 대위가 이끄는 카가의 제로기 9대가 호위를 맡았다.

후치다 중좌는 7시 53분에 바버스 곶 부근에서 기습성공을 뜻하는 도라도라도라를 타전했다.

수평폭격기들은 진주만을 남쪽으로 돌아 8시 5분에 남서쪽으로부터 진주만에 진입했다.

후치다 중좌는 이런 경로를 취함으로써 자신들이 접근한 방향을 오도하고 육지 상공에서 들키는 걸 막으려 했다.

카가의 제로기들은 호위임무에서 벗어나 히컴 비행장을 공격했다.

 

(진주만 기습 상황도. http://upload.wikimedia.org/wikipedia/commons/1/1c/Pearl_Harbor_bombings_map.jpg)

 

800kg 에 달하는 폭탄은 나가토 급의 16인치 포탄을 개조한 것으로서 3,000m 높이에서 투하할 경우 미국전함들의 장갑팝을 관통할 수 있었다.

폭탄에는 지연신관이 장착되어 장갑판에 부딪치면 0.2초 후에 폭발하게 되어 있었다.

 

투하고도는 3,000m 를 지켜야 했다.

만일 2,000m 높이에서 투하한다면 장갑판을 뚫지 못할 것이었다.

만일 4,000m 높이에서 투하한다면 최종 속도가 너무 빨라서 0.2초 내에 함체를 통과해 버릴 것이었다.

 

800kg 짜리 폭탄은 관통력에 중점을 둔 16인치 철갑탄을 기본으로 만들었기 때문에 무게의 대부분이 쇳덩어리였으며 작약은 22.3kg 에 불과했다.

따라서 함체 내에서 터져야만 충분한 효과를 볼 수 있었으며 폭탄의 크기에 비해 지근탄의 효과는 제한적이었다.

실제로 베스털에 명중한 폭탄 중 1발은 함체를 통과해 해저에서 폭발했는데 거의 피해가 없었다.

 

49대로 이루어진 수평폭격기들은 4대로 이루어진 후치다 미츠오 중좌의 중대를 제외하변 5대로 이루어져 총 10개의 중대였다.

폭격은 중대 단위로 이루어졌으며 5대가 갈매기처럼 역V자형으로 진행하면서 한꺼번에 폭탄을 투하했다.

 

진주만 기습 당일 구름의 높이는 1,700m 정도였다.

따라서 급강하 폭격기들은 교리에 정해진 고도인 4,000m 가 아니라 구름 아래인 1,500m 고도에서 급강하를 시작했으나 숙련도가 뛰어났기 때문에 큰 지장을 받지 않았다.

뇌격기는 원래 저공에서 공격하니 구름과는 상관이 없었다.

 

그러나 관통력때문에 3,000m 고도를 유지해야 하는 수평폭격기들은 낮게 깔린 구름 때문에 지장을 받았다.

실제로 후치다 중좌는 처음에 네바다를 폭격하려 했으나 구름에 가려 오른쪽으로 선회한 다음 다시 돌아와 메릴랜드를 폭격했다.

후치다 중대의 폭탄 4발은 모두 빗나갔다.

 

그러나 구름 양이 7 정도로 그리 많은 편은 아니어서 수평폭격도 효과를 거두었다.

수평폭격기들은 전함열의 안쪽에 있던 메릴랜드, 테네시, 애리조나, 전함열의 끝에 있던 네바다, 따로 정박 중이던 캘리포니아를 목표로 삼았다.

49대의 수평폭격기는 전함 4척(웨스트버지니아, 메릴랜드, 테네시, 애리조나) 그리고 수리함 베스털에게 총 12발의 폭탄을 명중시켰다.

 

신관의 신뢰성은 좋지 않았다.

명중한 폭탄 12발 중 5발이 불발이거나 조기 폭발이었으며 베스털에 명중한 2발 중 1발은 함체를 그대로 통과하여 진주만 바닥에서 폭발했다.

그러나 애리조나에 명중한 4발의 폭탄 중 1발이 진주만 기습 최대의 전과를 올리면서 비극의 상징이 되었다.

 

(진주만 기습 당시 함정의 배치상황. http://maps101blog.com/2010/12/)

 

전함열의 선두에서 오클라호마 안쪽에 정박 중이던 메릴랜드(BB-46)는 진주만에 정박중이던  전함 중 가장 가벼운 피해를 입었다.

메릴랜드는 아카기의 수평폭격기가 떨어뜨린 800kg 짜리 폭탄 2발을 맞았는데 1발은 전방 선실을 뚫고 수면 아래 화물창에서 폭발하면서 침수를 일으켜 흘수가 1.5m 정도 깊어졌다.

다른 1발은 함체 전방에 쳐놓은 천막의 밧줄에 명중하면서 조기 폭발하여 갑판에 3.7mx 6.1m 크기의 구멍을 뚫었다.

총 1,604명의 승조원 중 4명이 전사하고 14명이 부상을 입었다.

 

메릴랜드는 공습 이후 건선거에 들어가지도 않고 12월 20일까지 수리를 마친 후 미본토 서해안 브레머튼의 퓨젯 사운드 해군 조선소로 가서 본격적인 수리를 받았다.

1942년 2월 26일에 퓨젠 사운드 조선소를 나온 메릴랜드는 시험항해를 마치고 6월부터 일선에 복귀했다.

메릴랜드는 진주만에서 피해를 입은 함정 중에서 가장 먼저 일선에 복귀했다.

 

(진주만 기습 당시 메릴랜드의 모습. 옆에 전복된 함정은 오클라호마. http://www.navsource.org/archives/01/46c.htm)

 

메릴랜드의 바로 뒤, 웨스트버지니아의 안쪽에 정박하고 있던 테네시(BB-43)는 아카기, 카가 및 소류의 수평폭격기가 떨어뜨린 800kg 짜리 폭탄 중 2발을 맞았는데 1발은 조기 폭발, 1발은 불발이라 피해가 적었다.

1발은 2번 포탑의 지붕에 명중하는 순간 조기 폭발했는데 이 폭발로 옆에 정박했던 웨스트버지니아의 함장 베니언 대령이 치명상을 입었다. 

나머지 1발은 3번 포탑 지붕을 뚫고 들어가 주포 1문을 망가뜨렸으나 불발탄이었다.

 

테네시의 피해는 주로 25m 뒤에 정박하고 있던 애리조나에서 날아온 파편과 불타는 중유에 의한 것이었다.

승조원들은 애리조나에서 흘러온 불타는 중유에 의한 화재를 끄기 위하여 다음날 아침까지 샌드위치와 커피로 끼니를 때워 가며 밤새 소화작업을 벌여야 했다.

1,466명의 승조원 중 5명이 사망하고 21명이 부상을 입었다.

 

테네시는 12월 20일까지 임시수리를 마치고 미본토 서해안 브레머톤의 퓨젯 사운드 해군조선소로 가서 본격적인 수리를 받았다.  

1942년 2월 26일에 퓨젯 사운드 해군 조선소를 나온 테네시는 시험항해를 거쳐 8월 14일에 진주만으로 돌아왔다.

그러나 개장을 위하여 2주 후인 27일에 다시 퓨젯 사운드 해군 조선소로 돌아갔다.

1943년 5월 7일에 개장을 마친 테네시는 동년 8월의 키스카 상륙작전에 참가한 것을 시작으로 일선에 복귀했다.

 

(1941년 12월 10일에 찍은 테네시의 사진. 옆에 상부구조물만 내놓고 가라앉은 함정은 웨스트버지니아. http://www.navsource.org/archives/01/43d.htm)

 

진주만 기습 당시 웨스트버지니아의 뒤, 애리조나의 바깥쪽에 정박하고 있던 수리함 베스털(AR-4)은 애리조나를 노린 카가와 히류의 수평폭격기가 떨어뜨린 800kg 짜리 폭탄 10발 중 2발을 맞았다.

베스털은 오전 7시 55분에 전투태세에 들어가 대공포 사격을 시작했는데 8시 5분에 애리조나를 노린 카가의 800kg 짜리 폭탄 5발 중 1발이 우현 전방에 떨어졌다.

폭탄은 3개 갑판을 관통한 후 식료품 창고에서 폭발하면서 화재를 일으켰으며 베스털은 주변에 있던 전방 탄약고를 침수시켜야 했다.

 

8시 10분에 애리조나를 노린 히류의 수평폭격기들이 떨어뜨린 5발의 폭탄 중 1발이 좌현 후방에 명중했다.

이 폭탄은 함체를 뚫고 내려가 배 밑바닥에 1.5m x 1.5m 크기의 구명을 남긴 채 관통한 다음 해저에서 폭발하여 거의 피해가 없었다.

 

그러나 이때 히류의 수평폭격기들이 떨어뜨린 5발 중 1발에 맞아 애리조나의 전방 탄약고가 폭발하면서 어마어마한 폭풍이 베스털을 덮쳤다.

폭풍은 베스털의 화재를 순식간에 끄면서 함장 캐신 영 중령을 함 밖으로 날려 버렸다.

기적적으로 별다른 상처없이 해면에 떨어진 영 중령은 헤엄쳐서 다시 함으로 돌아왔다.

애리조나로부터 불타는 중유가 흘러나와 베스털이 화염에 휩싸이자 누군가 퇴함을 권고했으나 영 중령은 거부했다.

 

오전 8시 40분에 승조원들이 도끼로 애리조나와 연결된 로프를 끊었고 베스털은 애리조나의 곁을 떠났다.

키가 말을 듣지 않아 양쪽 프로펠러의 회전 수를 조절하여 방향을 조절했다.

곧 예인함이 다가와 베스털을 진주만 북서쪽의 맥그로우 곶 부근으로 끌고 갔고 베스털은 오전 9시 10분에 맥그로우 곶 부근 수심 11m 해역에 닻을 내렸다.

함장 영 중령은 만일 일본기가 다시 공격해오면 베스털이 가라앉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닻을 올려 오전 9시 50분에 맥그로우 곶 동쪽의 아이에아 만으로 가서 얕은 모래톱에 함을 좌초시켰다.

 

(아이에아 만의 모래톱에 좌초한 베스털의 모습. http://www.navsource.org/archives/09/25/2504.htm)

 

베스털은 이 와중에도 수리반을 오클라호마에 파견하여 뒤집힌 배 밑바닥을 뚫고 승조원을 구조하기도 했다.

영 중령은 이날의 지휘로 명예훈장을 받았다.

승조원 783명 중 16명이 전사하고 19명이 부상을 입었다.

 

공격이 끝나자 베스털의 승조원들은 자신들의 배에 들어찬 기름과 물을 빼낸 후 응급 수리를 실시했고 기습 1주일 후부터 진주만 내를 돌아다니면서 다른 함정들을 수리했다.

승조원들은 다른 배를 수리하면서 자함의 수리도 병행했으며 베스털의 수리가 완전히 끝난 것은 1942년 2월 중순이었다.

 

(진주만 기습 당시 네오쇼의 모습. 앞에 보이는 것은 캘리포니아. http://www.navsource.org/archives/09/19/19023.htm)

 

급유함 네오쇼(AO-23)는 전함열과 캘리포니아 사이에 정박하고 있었다.

당시 네오쇼는 항공유를 만재하고 있었기 때문에 만일 폭발한다면 캘리포니아와 전함열의 전함들 전부가 커다란 피해를 입을 수 있었다.

네오쇼는 애리조나로부터 흘러나온 불타는 중유가 다가오자 정박 중이던 선석을 떠나 사우스이스트 협만으로 이동했다.

도중에 네오쇼는 대공화기로 일본기 1대를 격추했다.

네오쇼의 승조원 중 전사자는 없었으며 3명이 일본기의 기총소사로 부상을 입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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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 캘리포니아와 네바다

 

태평양함대 전투부대 사령관 윌리엄 파이 중장의 기함 캘리포니아는 급유함 네오쇼를 사이에 두고 전함열의 남쪽에 따로 정박하고 있었다.

아카기(2대)와 소류(1대)의 뇌격기 3대로부터 공격을 받은 캘리포니아는 전함 중에 늦게 공격받은 편이지만 다른 전함에 비하여 대응이 늦었다.

방수를 비롯한 함정 상태가 미흡했고, 너무 많은 장교들이 상륙한 상태였으며 함상에 남아있던 장교들은 신속하고 현명하게 행동하지 못했다.

전투배치나 완전 방수태세(Condition Zed) 명령도 늦었다.

 

(진주만 기습 당시 함정의 배치상황. http://commons.wikimedia.org/wiki/Category:Pearl_Harbor_attack_-_maps#mediaviewer/File:Pearl_Harbor_before_strike.gif)

 

공식적으로 언급되지는 않지만 기함을 맡은 전함의 경우 엄정해보이는 겉모습에도 불구하고 실제 준비 태세나 함정의 상태는 다른 전함보다 열악한 경우가 많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기함일 경우 검열에서 제독이 굴욕감을 느끼거나 짜증을 내지 않도록 함정 상태의 문제점을 깐깐하게 지적하지 않고 대충 합격점을 주는 경우가 많다.

또한 기함에서는 함장을 포함한 승조원들이 제독과 참모들을 시중들고 각종 함상 행사를 준비하고 행사에 대비하여 겉모습을 번쩍거리게 유지하느라 전투에 대비한 준비 태세나 함정 상태를 최선으로 유지할 여유가 없는 경우가 많다. 

 

캘리포니아의 경우 진주만 기습 당시 검열을 앞두고 있었는데 이럴 경우 함저의 물탱크와 빈 격실을 완전히 환기시켜야 했다. 따라서 공격을 받았을 때 이중 바닥의 구멍을 막는 맨홀 뚜껑 6개는 제거되었고 다른 12개는 고정용 너트를 빼서 언제든지 제거할 수 있도록 해 놓은 상태였다.

 

오전 8시 5분, 캘리포니아의 좌현에 아카기의 뇌격기 2대가 발사한 어뢰 중 1발이 명중했고, 잠시 후 소류의 뇌격기가 발사한 어뢰 1발이 추가로 명중했다.

1발은 함교 바로 앞, 1발은 3번 주포탑 아래에 명중했다.

방수 태세가 갖추어지지 않은 상태에서 장갑대 아래에 명중한 어뢰 2발은 대량의 침수를 가져와 함체가 급속히 왼쪽으로 기울기 시작했다.

함장이 상륙하여 부재한 상황에서 에드가 페인 소위가 역침수를 실시했다.

이때 페인 소위는 오른쪽 보일러실 2개를 침수시키는 결정을 내렸는데 사실 그럴 필요까지는 없었다.

어쨌든 역침수 덕분에 왼쪽으로 16도까지 기울어졌던 캘리포니아는 기울기가 완화되면서 전복을 모면했다.

 

하지만 어뢰의 폭발로 연료탱크가 파열되었고 그곳으로 바닷물이 들어가 8시 10분에 캘리포니아는 동력을 잃어버렸다.

따라서 이때부터 반격을 시작한 캘리포니아의 대공포좌에는 승조원들이 줄을 서서 탄약을 날랐다.

오전 8시 45분에 소류와 히류의 급강하폭격기들이 떨어뜨린 250kg 짜리 폭탄 중 1발이 대공포 탄약고에 떨어져 일렬로 늘어서 탄약을 운반하던 승조원들 중 약 50명이 전사했다.

 

보수반의 초인적인 노력으로 8시 55분까지 캘리포니아는 동력, 조명 및 수압을 회복했으며 화재도 거의 진압했다.

오전 9시 10분에는 4개의 보일러를 가동하면서 이동이 가능해졌다.

그동안 함정에 돌아와 있던 함장 조엘 벙클리 대령은 이때 지체없이 닻을 올리고 이동하라는 명령을 내렸어야 했다.

그가 이동명령을 내리지 않고 시간을 끄는 동안 애리조나에서 흘러나온 불타는 중유가 캘리포니아를 덮쳐 10시가 되자 함정 뒤쪽이 온통 불길과 연기에 휩싸였다.

 

이렇게 되자 벙클리 대령은 오전 10시 2분에 퇴함명령을 내렸는데 이것이 치명적이었다.

퇴함 명령에 따라 전방 기관실의 인원들이 자리를 뜨면서 동력이 끊어져 펌프가 작동을 멈추었다.

만일 캘리포니아가 일찍 이동하여 애리조나에서 흘러나온 불타는 중유를 피할 수 있었다면 퇴함명령을 내릴 필요도 없었을 것이며 침몰도 면할 수 있었을 것이다.

 

(애리조나로부터 불붙은 기름이 떠내려오자 캘리포니아의 승조원들이 퇴함하고 있다. 오른쪽에 전복된 오클라호마의 함체가 보인다. http://www.navsource.org/archives/01/44b.htm)

 

오전 10시 15분에 풍향이 바뀌면서 애리조나에서 흘러나온 불붙은 기름이 다른 곳으로 떠내려 가자 벙클리 대령은 모든 승조원에게 배로 돌아가라고 명령했으나 일부만이 명령에 따랐다.

그동안 캘리포니아에서는 침수가 계속되고 있었다.

많은 방수문이 닫히지 않았고 통풍관이나 파이프에 망가진 곳이 많아 어뢰가 뚫은 구멍으로 들어온 바닷물이 계속 함내를 침수시켰다.

소해함 비레오와 보보링크가 캘리포니아에 접근하여 펌프로 물을 퍼냈고 승조원들도 이동식 휘발유 펌프로 물을 퍼내었으나 침수되는 속도를 당해내지 못했다.

필사적인 배수 노력에도 불구하고 캘리포니아의 침수는 계속 진행되어 3일 후인 12월 10일 밤에 캘리포니아는 상부구조물만 물 밖으로 내놓은 채 바닥에 가라앉았다. 

1,666명의 승조원 중 98명이 전사하고, 61명이 부상을 입었다.

 

로버트 스코트 상사는 최후까지 전투위치를 지키면서 대공포를 발사하다가 전사하여 명예훈장이 추서되었으며 그의 이름은 DE-214 에 붙었다.

토머스 리브스 무전상사는 부하들을 모아 대공포탄을 인력으로 보급하는 조직을 만들어 지휘하다가 연기에 질식해 전사했다.

리브스 무전상사에에게도 명예훈장이 추서되었으며 그의 이름은 DE-156 에 붙었다.

 

캘리포니아는 1942년 3월 25일에 인양되어 진주만의 건선거에서 수리를 마쳤다.

1942년 6월 7일에 캘리포니아는 진주만을 떠나 자력으로 미본토 서해안 브레머튼의 퓨젯 사운드 해군 조선소에 가서 개장을 실시했다.

1944년 1월 31일에 퓨젯 사운드 해군 조선소를 떠난 캘리포니아는 2달간 시험항해를 실시한 후 5월 5일에 마리아나 제도 침공작전을 위하여 샌프란시스코를 떠나 마리아나 제도로 향하면서 일선에 복귀했다.

 

일본군의 어뢰공격이 시작되었을 때 함렬의 마지막에 위치한 네바다 함상에서는 국기게양식이 진행되면서 국가를 연주하고 있었다.

그때 갑자기 멀리서 연속적인 폭음이 들리더니 주변의 함정들이 미친듯이 대공포화를 발사하기 시작했다.

공격 당시 네바다의 최선임 장교였던 프랜시스 토마스 소령이 즉시 전투배치 명령을 내렸고, 곧 네바다의 대공포화들이 불을 뿜기 시작했다.

 

잠시 후 카가의 뇌격기 1대가 네바다의 좌현으로 접근했다.

네바다의 5인치 부포와 12.7mm 대공기관총이 불을 뿜자 그 뇌격기는 불이 붙었으나 어뢰 투사에 성공한 후 추락했다.

어뢰는 8시 3분에 네바다의 좌현 함수에 명중하여 13m x 9m 크기의 구멍을 만들었다.

이 폭발로 격실 몇 개가 침수되었고 전기는 유지되었으나 배를 움직일만한 동력은 사라졌다.

네바다는 수평폭격으로 인한 피해는 받지 않았다.

 

잠시 후 애리조나에서 흘러나온 불타는 중유가 접근했다.

오전 8시 40분에 동력이 돌아오자 토머스 소령은 출항하기로 결정했다.

힐 원사가 정박용 부표에 뛰어내려 기총소사를 무릅쓰고 밧줄을 풀고나서 헤엄쳐 돌아왔다.

나중에 힐 원사는 일본군의 폭격으로 전사했으며 명예훈장이 추서되었다.

 

(불타는 포드 섬의 수상기 계류장을 배경으로 진주만 입구로 향하는 네바다. http://www.navsource.org/archives/01/36c.htm)

 

이제 네바다는 연기를 쭗고 선석을 떠나 진주만 입구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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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 웨스트버지니아(BB-48)

 

오클라호마 뒤에 정박 중이던 웨스트버지니아는 진주만 기습 당시 함령이 18년으로 진주만의 전함 중 가장 젊었다.

오전 7시 55분에 웨스트버지니아의 당직 사관 로만 브룩스 소위는 일본기가 떨어뜨린 폭탄에 맞은 포드 섬 남쪽의 격납고에서 솟아오르는 불길을 보았다.

아직 공습 사실을 모르고 있던 브룩스 소위는 폭음에 이어 불길이 솟아오르자 폭격 지점과 웨스트버지니아 사이의 일직선 상에 있던 캘리포니아에서 폭발사고가 일어난 줄 알고 신속한 대처를 위하여 소화 및 인명구조 요원의 배치를 명령했다.

선실에 있던 많은 수병들이 이 명령을 듣고 도와주기 위하여 갑판 위로 올라왔다.

덕분에 웨스트버지니아는 오클라호마와 비슷한 강도의 공격을 받았음에도 인명피해는 훨씬 적었다.

 

(진주만 기습 당시 함정의 배치상황. http://commons.wikimedia.org/wiki/Category:Pearl_Harbor_attack_-_maps#mediaviewer/File:Pearl_Harbor_before_strike.gif)

 

갑판에 올라온 장병들 중 프레드릭 화이트 중위가 일본기가 접근하면서 어뢰를 투하하는 광경을 발견하고 첫번째 어뢰가 명중하기 전인 7시 56분에 전투배치 명령을 내렸고 2분도 안 되어 대공화기들이 불을 뿜기 시작했다.

웨스트버지니아는 아카기(3대), 카가(4대) 및 히류(2대)의 뇌격기 9대로부터 공격을 받아 좌현에 최소 4발, 최대 7발의 어뢰를 맞았다. 

어뢰 3발은 장갑대 아래에 맞았으며 함이 기울어졌을 때 최소 1발에서 최대 4발이 장갑대에 맞았다.

명중한 어뢰 중 1발 내지 2발은 기존의 어뢰가 뚫어놓은 구멍을 통하여 함체 내로 진입하여 제2장갑갑판에 명중하면서 조타장치실과 그 부근을 날려버렸다.

웨스트버지니아는 어뢰 뿐만 아니라 아카기, 카가 및 소류의 수평폭격기가 떨어뜨린 800kg 짜리 대형폭탄 2발을 맞았으나 천만다행으로 모두 불발탄이었다.

 

어뢰가 명중하자 함체가 급속히 왼쪽으로 기울어지면서 함내의 동력, 조명, 통신 및 좌현의 대공화기들이 모두 기능을 정지했다.

보수관 존 하퍼 소령은 방재센터에서 역침수를 실시하라고 명령하려 했으나 전화가 먹통이었다.

그러나 4개반으로 이루어진 60명의 보수반원들이 스스로의 판단으로 4개소에서 약 40개에 달하는 빈 격실(void)에 전부 역침수를 실시했으며 피격 지점 부근에 있던 수병들은 재빨리 방수문을 닫아서 추가 침수를 막았다.

시의적절한 방수문의 폐쇄와 역침수 덕분에 28도에 달했던 함체의 기울기가 15도까지 돌아오면서 웨스트버지니아는 전복을 피할 수 있었다. 

 

웨스트버지니아의 흑인 조리병 도리스 밀러는 그날 아침 6시에 일어났다.

밀러는 최초의 어뢰가 명중했을 때 함내의 세탁물을 모으고 있던 중이었다. 전투배치 명령이 떨어지자 밀러는 자신의 위치인 대공포 탄약고로 갔으나 이미 어뢰에 의하여 파괴된 후였다.

밀러는 함의 전방과 후방, 그리고 좌현과 우현으로 통하는 통로가 만나는 곳으로 가서 다른 임무를 기다렸다.

 

그때 웨스트버지니아의 함장 머빈 베니언 대령이 인접한 테네시에 명중한 폭탄의 파편에 맞아 내장이 다 쏟아져 나오는 중상을 입고 쓰러졌다.

통신관 도일 존슨 소령은 체격이 좋은 밀러를 데리고 상처입은 함장을 옮기러 갔다.

밀러가 베니언 함장을 옮기려 하자 함장은 완강히 후송을 거부했다.

할 수 없이 레슬리 릭 상사가 진통제를 주사한 후 밀러는 함장을 노출된 위험한 곳에서 함교 뒤쪽의 안전한 곳으로 옮겼다.

베니언 함장은 이곳에서 부하들의 보고를 받고 전투를 지휘하다가 전사했으며 명예훈장이 추서되었다. 

 

함장을 옮긴 후 프레드릭 화이트 중위는 함교에 설치된 2정의 12.7mm 대공기관총을 사격하려고 했다.

빅터 델리노 소위가  1정을 맡은 다음 밀러에게 다른 1정에 탄약을 장전하라고 말했다.

밀러는 탄약을 장전한 후 사격을 시작했다.

 

한참 사격하다 돌아본 델라노 소위는 기관총 사격 훈련을 받은 적이 없는 밀러가 사격하는 것을 보고 깜짝 놀랐으나 제지하지는 않았다.

화이트 중위도 제지하지 않았으며 오히려 두 사람을 위하여 기관총탄을 날라 주었다.

밀러는 총탄이 떨어질 때까지 사격했으나 일본기를 격추하지는 못했다. 

이후 밀러는 화재를 무릅쓰고 부상병들을 안전한 곳으로 옮겨 많은 이들의 생명을 구한 후 퇴함 명령이 내리자 함을 벗어났다.

밀러는 베니언 함장을 안전한 곳으로 옮기고 용감하게 일본기와 맞선 공로로 흑인으로서는 최초로 해군십자장을 받았다.

이후 밀러는 1943년 11월 24일에 호위항모 리스컴베이가 메이킨 환초 근해에서 일본잠수함 I-175 함의 어뢰를 맞고 격침될 때 전사했다.

 

(도리스 밀러. http://en.wikipedia.org/wiki/Doris_Miller)

 

어뢰에 난타당한 웨스트버지니아의 주변에 잠시 후 수평폭격기들이 폭탄을 떨어뜨렸는데 이들 중 2발이 명중했다.

1발은 전방 망루에 떨어져 제2장갑판에 부딪혔으나 불발탄이었다.

2번째 폭탄은 3번 주포탑에 떨어졌다.

폭탄은 주포탑 위에 얹혀있던 킹피셔 수상정찰기를 부수면서 포탑 지붕을 뚫고 들어갔다.

이 폭탄에 맞아 주포 1문이 망가졌으나 역시 불발탄이었다.

 

그러나 부서진 수상정찰기에서 흘러나온 항공유에 불이 붙어 화재가 발생했다.

게다가 터진 연료탱크와 인접한 애리조나에서 흘러나온 중유에 불이 붙었다.

 

재빠른 방수문 폐쇄와 역침수 덕분에 전복을 피한 웨스트버지니아는 불길에 둘러싸인 채 상부구조물을 수면에 내놓고 얕은 바닥에 가라앉았다.

 

(얕은 바닥에 가라앉은 웨스트버지니아. 옆에 보이는 것은 전함 테네시. http://www.navsource.org/archives/01/48f.htm)

 

부장 로스코 힐렌코에터 중령은 이미 퇴함했기 때문에 서열 3위인 보수관 존  하퍼 소령이 함장 베니언 대령의 마지막 명령에 따라 보수반원들을 제외한 장병들에게 퇴함명령을 내렸다.

하퍼 소령은 보수반원들을 이끌고 3번 포탑 부근을 비롯한 여러 곳의 화재를 진압한 후 오후 2시에 최종적으로 퇴함 명령을 내렸다. 

 

1,541명의 승조원 중 함장 베니언 대령을 포함한 105명이 전사하고 52명이 부상을 입었다.

웨스트버지니아의 인명피해가 비슷한 숫자의 어뢰를 얻어맞은 오클라호마보다 적었던 이유는 무엇보다도 적절한 역침수로 인하여 함체가 전복되지 않았으며 당직사관 브룩스 소위가 어뢰가 명중하기 전에 소화 및 인명구조 요원 배치 명령을 내림으로서 공격 초기에 많은 장병들이 함의 윗쪽으로 올라왔기 때문이었다.

 

웨스트버지니아는 1942년 5월 17일에 인양되어 6월9일에 진주만의 건선거에 들어갔다.

수리를 마친 웨스트버지니아는 1943년 5월 7일에 진주만을 떠나 미본토 서해안 브레머톤에 있는 퓨젯 사운드 해군 조선소로 가서 개장을 실시한 다음 1944년 9월 23일에 구축함  2척의 호위를 받으며 진주만으로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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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 오클라호마(BB-37)

 

무라타 시게하루 소좌가 이끄는 아카기와 카가의 뇌격기 24대는 히류의 제로기 6대의 호위를 받으면서 와이아나에 산맥 서쪽 기슭을 따라 남하했다.

히류의 제로기들은 에바 비행장 상공에서 이탈하여 비행장을 공격했고, 아카기와 카가의 뇌격기들은 고도를 낮추면서 진주만의 남쪽을 돌아 남동쪽으로부터 진입하면서 공격했다.

 

(진주만 기습 상황도. http://upload.wikimedia.org/wikipedia/commons/1/1c/Pearl_Harbor_bombings_map.jpg)

 

아카기와 카가의 뇌격기들은 포드 섬의 동쪽에 정박한 전함들을 노렸는데 전함 공격에는 히류의 뇌격기 4대와 소류의 뇌격기 1대도 참가했다. 

진주만의 북동쪽에서 접근한 소류의 뇌격기 8대 중 6대는 표적함 유타를 공격하여 유타에 2발, 롤리에 1발을 명중시켰다.

소류의 뇌격기대를 이끌던 나가이 츠요시 대위는 포드 섬을 건넌 직후 1010부두에 2중으로 정박 중이던 헬레나와 오글라라를 전함으로 오인하여 공격했다.

어뢰는 헬레나에 명중했고 오글라라는 그 충격으로 침수되어 침몰했다.

나가이 대위의 요기였던 소류의 마지막 뇌격기는 1010부두의 목표가 전함이 아님을 깨닫고 크게 선회한 다음 전함을 공격하는 카가의 뇌격기에 합류했다.

 

소류 뇌격기의 뒤를 따라 북동쪽에서 진입한 히류의 뇌격기 8대는 유타를 공격하지 않고 오른쪽으로 크게 꺾어 에바 비행장 상공까지 와서 다시 왼쪽으로 선회했다.

이때 히류의 뇌격기들은 소류의 나가이 대위가 헬레나를 공격하는 장면을 보았다.

히류의 뇌격기들 중 4대는 나가이 대위를 따라 1010부두에 2중으로 정박하여 전함처럼 보이는 헬레나와 오글라라를 향해 어뢰를 발사했다.

이 뇌격기들은 떠오르는 해를 정면으로 바라보면서 어뢰를 발사했기 때문에 정확하게 투하하는데 실패했다.

4발의 어뢰 중 3발은 바닥의 진흙에 처박혔고 1발은 빗나가서 1010부두에 맞았다.

히류의 뇌격기들 중 나머지 4대는 1010부두에 정박한 함정이 전함이 아님을 깨닫고 전함을 공격하는 아카기의 뇌격기와 합류했다.

 

진주만의 남동쪽으로부터 진입한 아카기와 카가의 뇌격기 24대는 6대씩 4개의 중대로 나뉘어 1대씩 차례로 돌입했다.

비행기 사이의 거리는 약 500m, 중대 사이의 거리는 약 1,800m 였다.

뇌격기들은 전함렬의 선두에 있던 오클라호마와 두번째의 웨스트버지니아에 집중적인 공격을 가했다.

 

전함열에 대한 공격은 7시 57분에 아카기의 뇌격기들을 이끌던 무라타 소좌가 웨스트버지니아에 어뢰를 발사하면서 시작되었다.

아카기의 뇌격기 제1중대 6대 중 4대는 오클라호마를, 2대는 웨스트버지니아를 공격했다.

 

어어서 아카기 제2중대가 달려들었다.

제2중대의 선두 2대는 왼쪽으로 꺾어 캘리포니아에 2발의 어뢰를 발사하여 1발을 명중시켰다.

3번째 뇌격기는 웨스트버지니아를 공격했으며 나머지 3대는 오클라호마를 공격했다. 

히류의 뇌격기 4대도 아카기 제2중대와 함께 전함을 공격했다.

선두 2대는 웨스트버지니아를, 후방 2대는 오클라호마를 공격했다.

 

이어서 카가의 뇌격기들이 달려들었다.

선두 3대는 웨스트버지니아를 공격했고 뒤따르던 2대는 오클라호마를 공격했다.

 

이맘때부터 미해군의 대공포들이 본격적으로 반격을 시작했다.

카가의 6번째 뇌격기는 어뢰를 투하하기 전에 대공포화에 맞았다.

이 뇌격기는 어뢰를 버린 후 해군병원 마당에 추락했다.

7번째 뇌격기도 대공포화에 맞았는데 대공포가 어뢰를 명중시켜 뇌격기는 공중폭발했다.

8번째 뇌격기는 웨스트버지니아를 공격했다.

 

이때 소류의 뇌격기 1대가 카가 뇌격기의 공격 진형에 끼어들었다.

소류의 뇌격기는 왼쪽으로 꺽어 캘리포니아에 어뢰를 발사하여 명중시켰다.

이 뇌격기는 직후 대공포화에 의하여 큰 피해를 입었으나 노련한 조종사는 상처입은 비행기를 살살 달래어 일본함대까지 돌아가서 구축함 부근에 불시착했다.

 

카가의 9번째 뇌격기는 갑자기 끼어든 소류의 뇌격기 때문에 진로가 방해를 받자 오른쪽으로 꺾어 네바다에 어뢰를 발사했다.

이 뇌격기는 어뢰 발사 직후 네바다의 대공포화에 맞아 격추되었으나 어뢰는 명중했다.

10번째 뇌격기는 오클라호마에 어뢰를 발사했고, 마지막 2대의 뇌격기는 어뢰를 발사하기 전에 격추당했다.

 

일본기의 어뢰공격은 오전 7시 55분부터 8시 6분까지 불과 11분간 진행되었으나 진주만 기습에서 일본군이 이룬 전과의 가장 큰 부분을 차지했다.

뇌격기 40대 중 36대가 제대로 어뢰를 발사했고 최소 16발에서 최대 21발을 명중시켜 전함 3척, 표적함 1척 및 기뢰부설함 1척을 격침하고, 전함 1척과 경순양함 2척에 피해를 입혔다. 

 

(진주만 기습 당시 함정의 배치상황. http://commons.wikimedia.org/wiki/Category:Pearl_Harbor_attack_-_maps#mediaviewer/File:Pearl_Harbor_before_strike.gif)

 

메릴랜드의 바깥쪽에서 전함렬의 선두에 섰던 오클라호마는 아카기(7대), 카가(3대) 및 히류(2대)의 뇌격기 12대로부터 공격을 받았다.

무라타 소좌의 바로 왼쪽 뒤에서 비행하던 고토 중위가 오클라호마를 확인하고 최초로 어뢰를 떨어뜨렸다.

어뢰는 7시 57분에 오클라호마의 좌현에 명중했으며 이어서 2발이 추가로 명중했다.

 

(오클라호마에 어뢰가 명중하는 순간. http://en.wikipedia.org/wiki/Attack_on_Pearl_Harbor)

 

순식간에 3발의 어뢰에 얻어맞은 오클라호마는 대량의 침수가 일어나면서 순식간에 왼쪽으로 35도나 기울어 역침수를 할 시간적 여유가 없었으며, 대공기관총 1정이 잠깐 사격을 가한 것 이외에는 반격할 시간도 없었다.

오클라호마의 함장 하워드 보데 대령은 상륙한 상태였으므로 부장 제시 켄워시 중령이 퇴함명령을 내렸다.

수병들은 명령에 따라 왼쪽으로 기울어지고 있는 함의 오른쪽으로 퇴함했다.

 

오클라호마가 전복되는 도중 최소 2발에서 최대 4발의 어뢰가 장갑대에 추가로 명중했다.

함의 우현으로 기어오르거나 바다에 뛰어든 수병들은 일본기의 기총소사를 받았으며 잠시 후 주변에는 수평폭격기가 떨어뜨린 폭탄이 터지기 시작했다.

많은 장병들이 바로 옆에 정박 중이던 메릴랜드에 기어올라 대공포 사격을 도왔다.

 

오클라호마는 왼쪽으로 90도를 넘어 기울어지다가 상부 구조물이 해면에 처박혀서야 멈추었다.

첫 공격을 받은지 15분 만에 오클라호마는 왼쪽으로 150도 전복되어 오른쪽 배 밑바다뿐만 아니라 용골까지 드러났다.

 

(전복된 오클라호마의 모습. 뒤에 보이는 함정은 메릴랜드. http://www.history.navy.mil/photos/sh-usn/usnsh-o/bb37.htm)

 

하와이 민간인으로 공창에서 근무하던 줄리오 데카스트로는 구조대를 결성했다.

데카스트로의 구조대는 수리함 베스탈에서 달려온 수리반의 도움을 받아 오클라호마의 밑바닥을 토치램프로 절단하고 승조원 32명을 구했다.

 

배가 급속하게 뒤집히면서 많은 승조원들이 배 안에 갇혀 희생이 컸다.

1,354명의 승조원 중 429명이 전사하거나 실종되었고, 32명이 부상을 입었다.

429명의 전사 및 실종자는 애리조나의 1,177명에 이어 두번째로 많은 숫자이다.

 

전사자 중 알로이시우스 슈미트 신부는 제2차 세계대전에서 최초로 전사한 군종 신부였다.

 

존 잉글랜드 소위는 퇴함명령이 떨어지자 일단 탈출하는데 성공했으나 통신실에 승조원들이 남아있는 것을 알고 3번이나 되돌아가 3명을 무사히 구조했으나 4번째 들어가서 나오지 못했다.

잉글랜드 소위에게는 명예 훈장이 추서되었으며 호위구축함 DE-635 에 그의 이름이 붙었다.

 

프랜시스 플라허티 소위와 제임스 워드 상병은 배가 공격을 받을 당시 각각 포탑 속에 있었다.

그들은 동료들이 탈출할 수 있도록 마지막까지 손전등으로 포탑 내부를 비추어 주었으나 본인들은 탈출에 실패했다. 

두 사람 모두 명예훈장이 추서되었으며 플라허티 소위의 이름은 DE-135 에, 워드 상병의 이름은 DE-243 에 붙었다.

 

존 오스틴 상사는 배가 전복될 때 현창을 열고 15명의 부하들에게 탈출로를 열어 주었으나 자신은 탈출에 실패했다.

오스틴 상사에게는 해군십자장이 추서되었으며 이름은 호위구축함 DE-15 에 붙여졌다.

 

오클라호마는 1943년 11월 말에 인양되어 진주만의 건선거에서 응급수리를 마쳤으나 해군은 오클라호마의 개장을 포기하고 1944년 9월 1일에 퇴역시켰다.

진주만 구석에 정박하고 있던 오클라호마는 전쟁이 끝난 후 1946년 12월 6일에 46,000 달러의 가격으로 무어 건선거 회사에 고철로 팔렸다. 

1947년 5월 10일에 2척의 예인선에 끌려 진주만을 떠난 오클라호마는 1주일 후인 5월 17일에 하와이 북동쪽 800km 해상에서 폭풍우를 만나 침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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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 유타, 롤리, 헬레나, 오글라라

 

오전 7시 49분에 오아후 섬 북쪽의 와이메아 산 상공에서 후치다 미츠오 중좌가 돌격하라는 명령을 내리자 무라타 시게루 소좌가 지휘하는 40대의 뇌격기들은 2개로 나뉘었다.

무라타 소좌가 지휘하는 아카기와 카가 소속의 뇌격기 24대는 오카지마 기요구마 대위가 지휘하는 히류 소속 제로기 6대의 호위를 받으면서 와이아나에 산맥 서쪽 기슭을 따라 남하했다.

마츠무라 히라타 대위가 지휘하는 히류와 소류 소속 뇌격기 16대는 제로기의 호위없이 와이아나에 산맥 동쪽 기슭을 따라 남하했다. 

40대로 이루어진 뇌격기들은 최소 16발, 최대 21발의 어뢰를 진주만에 정박중이던 전함 4척, 표적함 1척, 그리고 경순양함 2척에 명중시켜 전함 3척(오클라호마, 웨스트버지니아, 캘리포니아), 표적함 1척(유타), 기뢰부설함 1척(오글라라)을 격침하고 전함 1척(네바다), 경순양함 2척(롤리, 헬레나)에 피해를 입혔다.

 

(진주만 기습 상황도. http://upload.wikimedia.org/wikipedia/commons/1/1c/Pearl_Harbor_bombings_map.jpg)

 

마츠무라 대위가 이끌던 히류와 소류의 뇌격기 16대는 원래 포드 섬의 북서쪽에 정박하던 항공모함들이 목표였으나 그날 아침에 항모들은 없었다.

대신 경순양함 디트로이트와 롤리, 표적함 유타, 그리고 수상기모함 탠지어가 나란히 정박하고 있었다.

 

(진주만 기습 당시 함정의 배치상황. http://commons.wikimedia.org/wiki/Category:Pearl_Harbor_attack_-_maps#mediaviewer/File:Pearl_Harbor_before_strike.gif)

 

히류의 뇌격기를 이끌고 포드 섬의 북서쪽에서 접근하던 마츠무라 대위는 유타를 보고는 표적함인 것을 알아채고 부하들을 이끌고 오른쪽으로 꺾어 에바 비행장 쪽으로 선회했다.

소류의 뇌격기를 이끌던 나가이 츠요시 대위 또한 유타가 표적함임을 알고 포드 섬을 넘어갔다.

 

그러나 소류의 뇌격기 8대 중 6대는 유타를 노리고 어뢰를 발사했다.

유타를 노린 6발의 어뢰 중 2발이 유타에 명중하고 1발은 롤리에 맞았으며 나머지 3발은 빗나갔다.

 

오전 8시 1분에 유타의 좌현 후방에 어뢰 2발이 잇달아 명중하면서 걷잡을 수 없는 침수가 일어나자 함장 솔로몬 이스퀴스 중령은 퇴함명령을 내렸다.8시 12분에 유타는 전복되었다.

피터 토믹 상사는 갑판 아래에서 수병들의 퇴함을 돕고 마지막 순간까지 함의 동력을 유지하다가 목숨을 잃었다.

그에게는 명예훈장이 추서되었다.

 

포드 섬 해안에 도착한 함장 이스퀴스 중령은 뒤집어진 함체 내에서 살아남은 승조원들이 구조를 요청하면서 뱃전을 두드리는 소리를 들었다.

그는 역시 어뢰를 맞아 정신이 없던 경순양함 롤리에서 토치램프를 빌린 다음 자원자들과 함께 뒤집힌 유타로 가서 철판을 잘라내어 4명을 구조했다.

유타의 승조원 525명 중 64명이 전사했다.

 

(전복되는 유타의 모습)

 

유타 앞에 정박 중이던 경순양함 롤리는 유타를 노렸던 어뢰 중 1발을  맞았다.최초의 1발은 함수 쪽으로 빗나갔으나 다른 1발이 좌현 중앙에 명중하여 2번 보일러실과 전방 기관실을 침수시켰다.

 

어뢰가 함의 전력 계통을 망가뜨리는 순간 롤리의 나팔수가 전투배치신호를 불었으며 곧 3인치 대공포가 작렬하기 시작했다.

이날 롤리는 단독 또는 합동으로 5대의 일본기를 격추했다.

 

침수가 진행되면서 함이 왼쪽으로 기울자 보수반원들은 역침수를 실시하는 것과 동시에 무거운 물품들을 바다로 버렸고 승조원들은 우현 너머 정박용 부표에 추가로 밧줄을 걸어 전복을 막았다.

그동안 보수반원들이 침수를 막는데 성공하여 롤리는 침몰을 면했다.

 

롤리는 제2차 공격에서 아카기의 급강하폭격기로부터 공격을 받았다.

1발의 250kg 짜리 철갑탄이 명중했으나 천만다행으로 함체를 그대로 뚫고 나가 해저에서 폭발했다.

이날 롤리에서는 기적적으로 부상자만 몇 명 나왔을 뿐 전사자는 없었다.

 

(어뢰를 맞아 기울어진 롤리. 뒤에 전복된 유타가 보인다.)

 

포드 섬을 건넌 나가이 대위는 1010부두에 정박 중인 전함을 발견하고 어뢰를 발사했다.

그 직후 나가이 대위는 자기가 공격한 것이 전함이 아니라 작은 군함 2척이 겹쳐서 전함처럼 보인 것이라는 걸 깨달았다.

나가이 대위가 공격한 것은 2중으로 정박하고 있던 기뢰부설함 오글라라와 경순양함 헬레나였다.

평소 펜실베니아가 있던 자리에 정박한 2척의 함정은 전함으로 오인받아 어뢰공격을 받았다.

 

오전 7시 57분, 어뢰는 오글라라의 함저를 지나쳐 헬레나의 우현 중앙 부근, 3번 주포탑 바로 앞에 명중했다.

폭발 순간 전투배치를 위하여 부근을 달리고 있던 20명이 전사하고 기관실 하나와 보일러실 하나가 침수되었으나 수병들이 재빨리 방수문을 닫아서 더 이상의 침수를 막았다.

어뢰에 맞는 순간 전기가 나갔으나 보수반이 전방 디젤 발전기를 가동함으로써 모든 포탑에 전원이 들어왔으며 펌프가 작동하면서 역침수를 실시하여 전복을 막았다.

어뢰에 명중한 지 4분 후인 오전 8시 1분부터 헬레나는 대공포를 발사하기 시작했다.

 

(1010부두 옆에 전복되어 침몰한 기뢰부설함 오글라라. 앞쪽에 경순양함 헬레나가 보인다. http://en.wikipedia.org/wiki/USS_Oglala_(CM-4)#mediaviewer/File:USS_Oglala_(CM-4)_capsized_at_Pearl_Harbor_1941.jpeg)

 

헬레나 바깥쪽에 정박 중이던 오글라라는 헬레나에 명중한 어뢰의 폭발로 좌현 중앙 배 밑바닥이 터지면서 보일러실이 침수되었다.

동력이 나가서 펌프를 사용할 수 없는 가운데 수병들이 격실을 밀폐하려 했으나 구식 설계의 낡은 함정인 오글라라는 격벽이 시원찮아서 침수를 막을 수가 없었다.

침수가 계속 진행되자 오글라라는 헬레나를 가두지 않도록 예인함에 이끌려 뒤로 빠졌다.

오글라라가 심하게 기울어져 제대로 걸어다니기도 힘들 지경이 되자 오전 9시 30분에 오글라라를 기함으로 삼고 있던 태평양함대 기뢰부대 사령관 윌리엄  펄롱 소장이 퇴함명령을 내렸다.

퇴함 명령이 내려진 지 30분 후인 오전 10시에 오글라라는 왼쪽으로 전복되면서 1010부두 옆에 침몰했다.

다행히 전사자는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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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 휠러, 에바, 카네오헤, 벨로우즈

 

오아후 섬에서 가장 먼저 공격을 받은 것은 섬의 중앙에 자리잡은 휠러 비행장이었다.

미육군의 전투기 세력이 집결해 있던 휠러 비행장은 사카모토 아키라 대위가 지휘하는 즈이가쿠의 급강하폭격기 25대가 공격했으며 스기나미 마사지 대위가 이끄는 소류의 제로기 8대가 호위했다.

휠러 비행장에는 제14전투비행단 소속 비행기 145대가 있었으며 전투기 약 120대는 파괴활동에 대비하여 감시가 쉽도록 격납고 앞쪽에 줄지어 모여 있었다.

 

(진주만 기습 상황도. http://upload.wikimedia.org/wikipedia/commons/1/1c/Pearl_Harbor_bombings_map.jpg)

 

오전 7시 51분부터 사카모토 대위가 지휘하는 급강하폭격기 25대가 동쪽과 서쪽으로부터 동시에 휠러 비행장에 달려들었다.

99식 급강하폭격기들은 구름 바로 아래인 1,500m 고도에서 급강하를 시작하여 격납고와 그 앞에 줄지어 늘어선 비행기에 폭탄을 떨어뜨렸다.

호위를 맡은 소류의 제로기 8대도 상공에 미군 전투기가 보이지 않자 오전 7시 55분부터 지상공격에 합세하여 기관포와 7.7mm 기관총으로 격납고 앞에 주기된 미군 전투기들과  관제탑, 막사, PX, 사무실에다가 골프장까지 공격했다.

제로기들이 얼마나 낮게 날았는지 조종사의 금니까지 보였다고 한다.

 

비행기가 폭탄이나 총탄에 맞으면 불븥은 항공유를 뿜어내어 옆의 비행기에 불이 붙었다.

그러면 연쇄 반응이 일어나 차례로 불이 붙었다.

병사들이 전투기들을 분산시키려고 안간힘을 썼지만 15분 만에 휠러 비행장에는 불타는 전투기들이 길게 늘어섰다. 

(휠러 비행장 공격 상황. http://the.honoluluadvertiser.com/specials/pearlharbor60/pearl2truck.html)

 

소류의 제로기 8대는 휠러 비행장에 3차례의 기총소사를 가한 후 8시 5분에는 에바 비행장으로 가서 그곳을 공격하고 있던 히류의 제로기 6대와 합류했다.

 

오카지마 기요구마 대위가 지휘하는 히류의 제로기 6대는 와이아나에 산맥의 서쪽 기슭을 따라 남하하던 아카기와 카가의 뇌격기 24대를 호위했다.

이들은 에바 비행장 상공에 이르자 호위 임무에서 벗어나 오전 7시 53분부터 활주로에 늘어선 비행기들에게 기총소사를 가했다.

8시 5분에는 소류의 제로기 8대도 가세하여 활주로의 전투기에 기총소사를 가했으며 마침 에바 비행장 부근을 지나가던 엔터프라이즈의 돈틀레스 4대를 격추했다.

 

오아후 서쪽 320km 해상에 있던 엔터프라이즈에서는 7일 아침에 18대의 돈틀레스를 이함시켰다.

돈틀레스들은 2대씩 짝지어 엔터프라이즈와 오아후 섬 사이의 해역을 정찰하면서 날아간 다음 바로 오아후 섬에 착륙하라는 명령을 받고 있었다.

엔터프라이즈는 오후에 진주만에 입항할 예정이었다.

 

에바 비행장의 상황도 휠러 비행장과 비슷했다.

기총탄에 맞은 비행기는 불타 올랐고 불타는 항공유가 강처럼 흘러 옆에 있던 비행기와 막사까지 태웠다.

불길을 잡으려고 접근하던 소방차도 기총소사를 받아 타이어가 펑크나면서 주저앉았다.

8시 15분부터는 복귀하던 쇼가쿠의 급강하폭격기들과 아카기 및 카가의 제로기들이 15분간 에바 비행장에 기총소사를 가했다.

 

(에바 비행장 공격 상황. http://the.honoluluadvertiser.com/specials/pearlharbor60/pearl2truck.html)

 

해병대원들은 용감하게 저항했다.

불타는 비행기 사이에서 정찰기 1대를 끌어낸 해병대원들은 기관총을 장착하고 반격을 가했으며 흥분한 해병대원 1명은 권총을 쏘아댔다. 

에바 비행장  공격에서 격추된 제로기는 1대였다.

(오아후 지도. http://hidot.hawaii.gov/highways/home/oahu/oahu-state-roads-and-highways/)

 

가네코 다다시 대위가 지휘하는 쇼가쿠 소속 제로기 5대와 사토 마사오 대위가 지휘하는 즈이가쿠의 제로기 6대는 쿨라우 산맥 서쪽을 따라 남하하여 오전 7시 53분부터 카네오헤 비행장을 공격했다.

제로기들은 저공비행하면서 주기장에 계류 중이던 카탈리나 비행정 4대와 워밍업 플랫폼에 나란히 주기중이던 카탈리나 정찰기들에게 기총소사를 퍼부어 큰 피해를 입혔다.

 

(카네오헤 비행장 공격 상황도. http://the.honoluluadvertiser.com/specials/pearlharbor60/pearl2truck.html)

 

쇼가쿠의 제로기들을 이끌던 사토 대위는 돌아가는 길에 벨로우즈 비행장에 기총소사를 가하여 비행기 1대를 파괴하고 미군 1명에게 부상을 입혔다.

 

(벨로우즈 비행장 공격 상황도. http://the.honoluluadvertiser.com/specials/pearlharbor60/pearl2truck.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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