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 이것은 훈련이 아니다.

 

진주만 기습 당시 항만 내의 함정들은 3급 태세(condition 3)를 유지하고 있었는데 이때의 3급 태세는 전시보다는 훨씬 느슨했다.

주포와 5인치 함포에는 인원이 배치되지 않았으며 레이더실, 사격통제장치 및 탄약 보급에도 인원이 배치되지 않았다.

기관총에는 인원이 배치되어 있었으나 탄약들은 상자에 담겨 있었고 열쇠는 갑판사관이 가지고 있었다.

많은 장교들은 아침식사를 하고 있거나 막 일어난 상태였으며 수병들은 대부분 아침식사를 마치고 갑판에서 이야기를 나누거나 선실에서 가족에게서 온 편지를 읽거나 쓰는 등 빈둥거리고 있었다.

 

진주만 내에는 전투함 70척과 보조함 24척등 총 94척이 정박하고 있었다.

전투함의 내역을 보면 전함 8척, 중순양함 2척, 경순양함 6척, 구축함 29척, 잠수함 5척, 포정 1척, 기뢰부설함 9척(8척은 구축함을 개조한 것), 그리고 소해함 10척(4척은 구축함을 개조한 것)이었다.

보조함은 각종 모함 10척, 수리함 3척, 급유함 2척 ,원양예인함 2척 및 병원함, 수로측량함, 군수품보급함, 탄약보급함, 표적함, 잠수함구난함 각 1척씩, 그리고 태평양함대 기지사령관 윌리엄 칼훈 소장의 기함인 아르곤이었다.

 

(진주만 기습 당시 함정의 배치상황. http://commons.wikimedia.org/wiki/Category:Pearl_Harbor_attack_-_maps#mediaviewer/File:Pearl_Harbor_before_strike.gif)

 

진주만 기습 당시 94척의 함정 중 이동 중인 것은 구축함 헬름 뿐이었다.

헬름은 함체의 소자작업을 위하여 오전 7시 26분에 이스트 협만을 출발하여 오전 7시 55분에 웨스트 협만으로 들어서는 찰나였다.

 

태평양함대 기뢰부대 사령관(Commander Mine Force Pacific Fleet) 윌리엄 펄롱 소장은 아침식사를 하라는 전갈을 기다리면서 기함인 기뢰부설함 오글라라의 후갑판을 산책하고 있었다.

오글라라는 평소 전함 펜실베니아가 정박하는 텐텐부두(Port 1010)에 정박한 경순양함 헬레나의 바깥 쪽에 정박하고 있었는데 이곳은 진주만 전체를 살피는데 좋은 위치였다.

텐텐부두라는 명칭은 부두 남서쪽으로 연결되어 있는 건선거의 길이가 1010피트(약 308m) 라는 데서 붙은 이름이다.

낡아서 여간해서는 출항을 안하는 오글라라 함상에서 생활하던 펄롱 소장은 그날 아침 진주만의 해상선임장교였다.

 

오전 7시 55분에 펄롱 소장은 포드 섬 상공을 낮게 날던 비행기가 폭탄을 떨어뜨리는 것을 보았다.

처음에는 폭탄이 제대로 고정되지 않은 것이라고 생각했으나 비행기가 방향을 돌리는 순간 일장기가 눈에 들어왔다.

펄롱 소장은 소리쳤다.

 

"일본군이다! 총원 전투배치!"

(Japanese! Man your stations!)

 

곧 오글라라는 발광신호로 항구 내의 전 함정에 대해 전투배치 명령을 내렸다.

 

오전 7시 55분에 해군항공대 작전참모인 로건 램지 소령은 포드 섬 지휘소 창가에서 군기 위병들이 국기를 게양하는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갑자기 비행기 1대가 저공으로 상공을 지나갔다.

화가 난 램지 소령은 비행기 번호를 적으라고 명령했다.

하지만 잠시 후 그 비행기가  뭔가를 떨어뜨리자 격납고에서 폭음이 울리면서 불길이 솟았다.

램지 소령은 복도로 달려나가 통신병에게 급하게 메모를 휘갈겨 쓴 후 해군항공대 사령관 패트릭 벨린저 소장 명의로 방송하라고 명령했다.

 

거기에는

 

"공습, 진주만 - 이것은 훈련이 아니다."

(Air raid, Pearl Harbor - This is no drill.)

 

라고 적혀 있었다.

통신문은 하와이 지역  전용 주파수를 통하여 오전 7시 58분에 타전되었다.

 

진주만 기습을 알리는 방송이 흘러나오기 시작했을 때 태평양함대의 당직장교였던 조셉 머피 중령은 태평양함대 사령관 허즈번드 킴멜 대장에게 아침에 잠수함을 격침했다는 워드의 보고에 대해 추가로 확인한 사실을 전화로 보고하고 있었다.

머피 중령이 워드가 어선이 제한 해역 내로 들어와 검색했다는 말을 하고 있을 때 사무실의 문이 벌컥 열리더니 부사관 1명이 뛰어들어와 진주만이 공습을 받고 있으며 이건 훈련이 아니라는 방송이 방송탑(signal tower)에서 나오고 있다고 말했다.

깜짝 놀란 머피 중령이 이 사실을 킴멜 제독에게 전하자 전화가 끊어졌다.

머피 중령은 패트릭 소장 명의로 방송된 내용을 킴멜 제독으로 명의를 바꾸어 오전 8시 정각에 워싱턴과 해상의 모든 함정들에게 타전했다.

 

이 통신문을 받아든 프랭크 녹스 해군장관은 이렇게 말했다.

 

"맙소사! 그럴 리가 없어, 이건 필리핀을 뜻하는 것이 틀림없어!"

("My God! This can't be true, this must mean the Philippines!")

 

한편 관사에서 전화로 머피 중령이 보고를 듣던 킴멜 제독은 머피 중령이 보고 도중 공습을 당했다고 말하자 수화기를 내려놓고 하얀 정복의 단추를 채우면서 관사 밖으로 뛰쳐나왔다.

이웃한 제14해군관구 참모장 존 얼 대령의 관사 잔디밭에서는 진주만이 한눈에 보였다.

얼 대령 관사의 잔디밭으로 달려간 킴멜 제독은 진주만 상공에서 설치고 있는 일본기들을 넋을 잃고 바라보았다.

그 광경을 옆에서 지켜보았던 얼 부인에 따르면 당시 킴멜 제독의 얼굴이 하얀 정복만큼이나 하얗게 질려 있었다고 한다.

 

킴멜 제독은 즉시 운전병을 호출했다.

그가 차에 올라타려는 순간 제2잠수함전대의 도빈 중령이 동승을 요청했다.

킴멜 제독과 도빈 중령이 오전 8시 10분에 사령부에 도착했을 때는 폭탄의 폭발음과 기총의 사격 소리, 비행기의 엔진 소리, 반격하는 대공포와 기관총의 사격소리, 화재의 내음과 연기로 아수라장이었다.

킴멜 제독은 멍하니 충격을 받은 상태로 자신의 사무실로 달려갔다.

어쨌거나 할 일은 해야만 했다.

오전 8시 12분에 킴멜 제독은 진주만이 일본의 공격을 받았음을 확인하는 내용을 다시 워싱턴에 타전했고, 17분에는 제2초계비행단에게 적 항공모함의 위치를 찾으라는 명령을 내렸다.

 

킴멜 제독의 참모들도 모여들기 시작했다.

태평양함대 참모장 윌리엄 스미스 대령은 킴멜 제독과 전투부대 사령관 윌리엄 파이 중장이 전쟁계획실 사무실에 나란히 서서 창 밖을 바라보고 있는 것을 발견했다.

스미스 대령은 적의 폭탄 1발이면 태평양함대의 지휘관이 없어진다면서 두 사람이 같이 있으면 안된다고 말했다.

파이 중장은 그 말을 듣고 사령부의 반대쪽 끝으로 갔다.

항공장교들은 일본항모를 찾기 위하여 초계기를 발진시키라는 명령을 전달하려고 전화통에 달라붙어 오아후의 모든 해군기지에 전화를 걸었다.

 

태평양함대의 통신참모였던 모리스 커츠 중령에 따르면 당시 태평양함대 사령부의 분위기는 히스테릭하지는 않았으며 질서가 유지되었으나 깊은 절망감에 빠져 있었다.

속속 들어오는 피해 보고를 들으면서 킴멜 제독과 스미스 대령은 일본기의 정확한 공격에 놀랐다.

 

킴멜 제독은 끔찍한 피해 보고가 들어올 때마다 괴로워했다.

당시 미해군은 전쟁 때와 비교하여 규모가 작고 가족적인 분위기가 강했다.

부사관과 수병은 함정에 배치되면 20년 혹은 30년 후에 전역할 때까지 그 배에서 근무했다.

 

애너폴리스 해군사관학교를 졸업한 장교들은 몇 년에 한번씩은 매일같이 얼굴을 맞대는 상황에서 평생을 근무했다.

자연히 가족끼리도 친해서 자녀끼리 결혼하는 경우도 많았고 후배이자 부하인 해군장교가 사위가 되는 경우도 비일비재했다.

또한 해군 내에서 성공한 장교일수록 아들을 해군사관학교에 보내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에 초급 장교들은 대부분 동료의 아버지를 상사로 모신 경험이 있었으며 고급 장교들은 대체로 동료의 아들을 부하로 거느리는 경험을 했다.

 

킴멜 제독은 진주만에 근무하는 장병들 수천명의 얼굴을 알고 있었고 수백명의 이름을 알았으며 수십명과는 친구 사이였다.

경험많은 사령관들부터 풋내기 수병까지 그들 모두가 킴멜 제독의 부하였으며 그의 책임이었다.

 

그 잔인한 아침에 킴멜 제독이 창밖을 바라보는 동안 추력을 거의 잃은 탄환 하나가 유리창을 깨고 들어와 킴멜 제독의 가슴에 맞아 검은 얼룩을 남긴 후 바닥에 떨어졌다.

깜짝 놀란 참모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킴멜 제독은 바닥에 떨어진 탄환을 집어 살펴보더니 말했다.

 

"이것이 나를 죽였더라면 차라리 자비로운 일이었을 텐데."

("It would have been merciful had it killed me.")

Posted by 대사(P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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