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 도라!도라!도라!

 

구축함 워드가 갑표적을 격침하는 동안 183대로 이루어진 일본군의 제1차 공격대는 오아후 북방의 태평양 상공을 날고 있었다.

공격대의 가운데는 후치다 미츠오 중좌가 이끄는 49대의 수평폭격기가 3,000m 고도로 날았다.

왼쪽으로는 다카하시 가쿠이치 소좌가 지휘하는 급강하 폭격기 51대가 3,300m 고도로 날고 있었으며 오른쪽으로는 무라타 시게하루 소좌가 이끄는 뇌격기 40대가 2,800m 고도를 유지하며 날았다.

폭격기들 머리 위로 상공 4,300m 고도에서는 이타야 시게루 소좌가 지휘하는 제로기 43대가 호위하고 있었다.

 

오전 7시가 되자 후치다 중좌는 오아후의 KGMB 라디오 방송국에서 송출하는 하와이 음악을 들을 수 있었다.

당시 미육군은 본토에서 장거리 폭격기가 날아올 경우 KGMB 라디오를 통하여 밤새 하와이 음악을 틀어 오아후 섬을 찾아오는데 도움을 주었다.

12월 7일 아침에 도착할 B-17 폭격기를 위한 음악이 일본군 비행기를 유도하고 있는 꼴이었다.

해면 1,500m 상공에는 구름이 끼어 해상으로부터 일본기들을 발견하기 어려웠으므로 기습에 이상적인 날씨였다.

 

사실 오아후의 미군은 구름을 뚫고 일본기들을 탐지할 수 있는 수단을 가지고 있었다.

오아후 섬의 북단 카후쿠 곶의 해발 70m 지점에는 SCR-270 레이더를 장비한 오파나 이동 레이더 기지가 있었다.

미육군이 오아후 섬에 배치한 6개의 이동식 레이더 기지 중 가장 북쪽에 위치한 이 기지에는 레이더 조작병인 조셉 로커드 이등병과 조지 엘리엇 이등병이 오전 4시부터 레이더로 훈련을 하고 있었는데 주로 고참인 로커드 이등병이 엘리엇 이등병에게 조작법을 가르쳤다. 

 

(SCR-270 레이더. http://en.wikipedia.org/wiki/SCR-270_radar)

 

7일 오전 6시 45분에 레이더에 광점이 하나 나타났다.

치쿠마에서 발진한 수상정찰기가 잡힌 것이었다.

그러나 일요일 새벽에 3시간 동안 훈련을 하면 보통 20대 정도의 아군 비행기를 발견할 수 있었기 때문에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치쿠마의 수상정찰기는 진주만을 정찰한 후 7시 35분에 무전을 보내어 항만 내에 전함 9척, 중순양함 1척, 경순양함 6척이 있다고 보고했으며 3분 후인 38분에는 '풍향 80도, 풍속 14m, 적 함대 상공 운고 1,700m, 구름밀도 7  ' 이라고 보고했다.

임무를 마친 치쿠마의 수상 정찰기는 북상하여 돌아갔다.

 

잠시 후에는 도네의 수상정찰기가 라하이나 정박지가 비어 있다고 보고했다.

도네의 정찰기는 이후 남쪽으로 향하여 미군 항공모함을 찾았으나 당시 오아후 서쪽 320km 지점에 있던 엔터프라이즈를 찾지 못했다.

 

오파나 레이더 기지에서는 오전 7시가 되자 로커드 이등병이 철수하려고 했으나 엘리엇 이등병은 좀 더 훈련하기를 원했다.

오전 7시 2분, 5도 방향 212km 거리에서 커다란 광점이 나타났다.

레이더 스크린을 바라본 로커드 이등병은 광점의 크기로 보아 50대 이상의 비행기로 이루어진 커다란 집단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로커드 이등병은 어쨌든 훈련 시간이 끝났으므로 그냥 철수하려고 했으나 엘리엇 이등병은 정보센터에 연결된 전화기로 보고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두 사람은 8분 정도 티격태격하다가 결국 로커드 이등병이 졌고 엘리엇 이등병이 정보센터와 연결된 전화기를 들었다.

광점은 처음 발견했을 때보다 30km 이상 가까워진 상태였다.

 

엘리엇 이등병이 정보센터에 전화를 걸자 교환수 조셉 맥도널드 이등병이 받았다.

맥도널드 이등병은 엘리엇 이등병에게 지금 주변에는 아무도 없으니 곧 찾아서 연락하겠다고 말했다.

주변을 둘러보던 맥도널드 이등병은 추적장교(pursuit officer)인 커밋 타일러 중위를 발견했다.

추적장교란 전투기의 발진과 목표 지점으로의 유도를 담당하는 관제장교를 돕는 직책으로 타일러 중위는 12월 3일부터 추적장교 일을 시작한 풋내기였다.

 

7시 15분에 정보센터에서 오파나 기지로 전화를 걸자 로커드 이등병이 받았다.

로커드 이등병은 타일러 중위에게 자신이 본 것을 말했다.

타일러 중위의 머리 속에는 그 정체불명의 광점이 적일 수도 있다는 생각은 떠오르지 않았다.

대신 그는 밤새 KGMB 라디오 방송국에서 하와이 음악을 틀고 있었던 것을 기억해 내었다.

동료 폭격기 조종사들에게서 미본토로부터 장거리 폭격기가 올 때면 KGMB 방송국에서 하와이 음악을 밤새 튼다는 소리를 들었던 타일러 중위는 그 광점이  태평양을 건너 오아후 섬에 접근 중인 B-17 폭격기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일개 이등병에게 그런 이야기를 할 수는 없었으므로 타일러 중위는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

 

"글쎄, 걱정할 것 없어."

("Well, don't worry about it.")

 

이 대답은 이후 무사안일과 무책임한 태도의 상징이 되었다.

 

실제로 당시 미본토에서 출발한 B-17 폭격기 12대도 접근하고 있었는데 일본기들로부터 약 5도 동쪽으로 치우친 곳에서 접근하고 있었다.

 

타일러 중위와 통화한 후 로커드 이등병은 다시 내려가자고 재촉했으나 엘리엇 이등병은 추적을 계속했다.

7시 20분에 광점은 3도 방향에서 119km 까지 접근했으며 조지 마셜 육군참모총장이 보낸 경고 전문이 호놀룰루의 RCA 통신국에 도달한 7시 33분에는 15도 방향으로 56km 까지 접근하고 있었다.

7시 39분에 광점은 41도 방향으로 32km 까지 접근한 상태에서 사라졌는데 이것은 오파나 기지 뒤편의 언덕에서 생기는 간섭파에 가려진 것이었다.

엘리엇 이등병과 로커드 이등병은 레이더를 끄고 아침 식사를 하기 위하여 기지로 내려갔다. 

이리하여 레이더에서의 정보는 기습을 막는데 도움을 주지 못했다.

 

로커드 이등병은 타일러 중위에게 레이더에 나타난 항공기가 50대 이상이라는 말을 하지 않는 실수를 저질렀다.

미육군항공대의 교리에 따르면 50대 이상의 대편대를 만드는 경우가 없었기 때문에 그 말을 들었다면 타일러 중위가 B-17 폭격기로 오인하지는 않았을 것이었다.

또한 타일러 중위는 로커드 이등병과의 통화 내용을 제14전투비행단의 작전장교인 케네스 버키스트 소령에게 보고하지 않은 실수를 저질렀다.

 

레이더로 일본기의 접근을 탐지하고도 요격에 실패한 이 사건은 역사학자들에게 많은 비판을 받았다.

특히 존 키건을 비롯한 영국의 역사학자들이 매섭게 비판하는 경향이 있는데 이는 영국이 영국본토항공전에서 레이더를 활용하여 큰 성과를 올렸을 뿐 아니라 당시 오아후에 배치된 레이더 장비를 제공했던 사실과 연관이 있을 것이다.

하지만 고든 프렌지는 자신의 저서 <At Dawn We Slept :The Untold Story of Pearl Harbor>에서 로커드 이등병이나 타일러 중위의 실수가 없었더라도 이미 늦었다고 주장했다.

 

타일러 중위가 로커드 이등병과 통화한 시간은 7시 15분으로 이는 휠러 비행장에 최초의 폭탄이 떨어진 7시 51분으로부터 36분 전이었다.

따라서 로커드 이등병의 설명을 듣고 상황을 파악한 타일러 중위가 버키스트 소령에게 보고를 하고 버키스트 소령이 결단을 내려 전투기의 분산을 지시해도 분산에는 최소한 30분이 걸리기 때문에 시간이 모자랐다는 것이다.

프렌지는 갑표적 격침 보고를 받았을 때가 요격을 위한 마지막 기회였으며 이후로는 기회가 없었다고 주장했다.

 

다만 육군이 레이더 접촉 사실을 해군에 통보하지 않은 것은 실수라고 봐야 한다.

만일 일본기들이 북쪽에서 접근해 온 것을 알았다면 진주만 기습 이후 해군이 엉뚱한 방향을 수색하느라고 고생하지 않았을 것이다.

 

제1차 공격대가 오전 7시 40분에 오아후 섬의 북단 카후쿠 곶에 도착하자 후치다 중좌는 신호탄을 발사했다.

기습에 성공했으므로 신호탄은 1발만 발사할 생각이었다.

그런데 신호탄을 발사하고 보니 소류의 제로기 8대를 이끄는 스기나미 마사지 대위가 구름 속에서 신호탄을 보지 못한 것 같았다.

원래 3초 간격으로 신호탄을 2번 발사하면 기습이 실패했다는 뜻이었으므로 후치다 중좌는 일부러 10초 정도 기다렸다가 신호탄을 다시 발사했다. 

하지만 급강하폭격기들을 이끌고 있던 다카하시 가쿠이치 소좌는 기습이 실패했다는 뜻인 줄 알고 휘하의 급강하폭격기들에게 공격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뇌격대를 이끌던 무라타 시게하루 소좌는 후치다 중좌의 뜻을 정확하게 파악하고 다카하시 소좌가 착각을 일으켰음을 깨달았으나 어쩔 도리가 없었다.

무라타 소좌는 뇌격기들에게 계획대로 공격하라는 명령을 내렸고 뇌격기들은 고도를 낮추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진주만 기습의 최초 공격은 전함에 대한 뇌격이 아닌 휠러 비행장에 떨어진 폭탄이 되었으나 어차피 기습은 성공했고 순서가 바뀌었어도 문제가 없었다.

 

(진주만 기습 상황도. http://upload.wikimedia.org/wikipedia/commons/1/1c/Pearl_Harbor_bombings_map.jpg)

 

후치다 중좌는 오아후 북해안을 남서쪽으로 날면서 쌍안경으로 진주만을 바라보고 놀랐다.

함정들이 평화시에도 기대하기 힘들 정도로  다닥다닥 붙어서 정박하고 있었다.

오전 7시 49분, 하와이 북해안의 와이메아 만 상공에서 후치다 중좌와 동승한 통신수는

 

"도!도!도!"

 

라고 타전했다.

(도는 '도츠게키세요'의 첫 음절로 '돌격하라'는 뜻이다.)

 

이 신호를 따라 공격대는 각자의 목표를 찾아 흩어졌다.

 

후치다 중좌는 수평폭격기 49대를 이끌고 오아후 섬의 서해안을 따라 남하했다.

진주만 동쪽 바버스 곶 상공에 다다랐을 때  후치다 중좌는 기습 성공을 확신했으며 후치다 중좌의 통신수가 7시 53분에

 

"도라-도라-도라"

 

를 타전했다.

기습에 성공하여 미태평양함대의 함정들과 오아후의 육군 군사시설들을 무방비 상태에서 공격했다는 의미였다.

 

기습 성공의 암호가 도착하자 아카기 함상에서는 제1항공함대 참모장 구사카 류노스케 소장이 눈물을 주르륵 흘렸다.

사령관 나구모 주이치 중장도 감정이 북받치는지 입을 꽉 다물고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아일랜드에 있던 다른 장교들도 모두 말없이 기지개를 켜면서 안도감을 드러내었다.

 

기습은 성공했다.

Posted by 대사(P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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