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 기습 전야

 

일본해군은 1941년 12월 1일 0시를 기하여 함대호출부호를 바꾸었다.

11월 1일에 바꾼 후 1달 만에 다시 바꾼 것이었다.

이전까지 함대호출부호는 6개월 이상 사용했기 때문에 이례적인 일이었다.

 

불안해진 태평양함대 사령관 허즈번드 킴멜 제독은 다음날인 12월 2일에 정보참모 에드원 레이튼 중령을 불러 보고를 들었다.

이 자리에서 레이튼 중령이 최소한 15일 이상 일본제1 및 제2항공전대의 행방이 묘연하다고 말하자 킴멜 제독은 깜짝 놀랐다.

 

"뭐라고! 제1항공전대와 제2항공전대가 어디 있는지 모른다고?"

("What! You don't know where Carrier Division 1 and Carrier Division 2 are?")

 

"예. 모릅니다. 저는 그것들이 본국 수역에 있다고 생각하지만 어디에 있는지 모릅니다."

("No, sir, I do not. I think they are in home waters but I do not know where they are.")

 

레이튼 중령이 대답했다.

 

킴멜 제독이 다시 물었다.

 

"자네 말은 그것들이 지금 다이아몬드 헤드(오아후 섬의 화산) 부근을  돌아다니고 있는데 그걸 모르고 있을 수 있다는 소리인가?"

("Do you mean to say that they could be rounding Diamond Head and you wouldn't know it?")

 

레이튼 중령이 기어 들어가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것들이 지금이라도 발견되길 바랄 뿐입니다."

("I hope they would be sighted before now.")

 

킴멜 제독은 불안감을 느꼈으나 뾰족한 수가 없었다.

또한 이런 일이 처음도 아니었다.

지난 6개월간 태평양 함대가 일본항공모함을 추적한 것은 134일에 지나지 않았다.

일본항모를 연속하여 추적할 수 있는 기간은 짧게는 9일, 길어도 22일이 한계였으며 그 이후에는 사라졌다가 다시 나타나고는 했다.

지난 6개월 간 일본항모들은 그런 식으로 12번이나 사라졌다가 다시 나타났다.

따라서 이번 경우만 예외적이라고 볼 근거는 없었다.

 

12월 2일 오후 8시에 미드웨이 북방 1,500km 해상을 지나던 진주만 공격부대는 도쿄로부터 

 

"니이가타 산을 오르라. 1208"

 

이라는 무전을 받았다.

이는 도쿄 시간으로 12월 8일 0시를 기하여 미국 및 영국에 대하여 개전한다는 뜻이었다.

몇 시간 후 진주만 공격부대는 날짜변경선을 통과했다.

(진주만 공격부대의 모든 일지는 도쿄 시간에 맞추어 작성했지만 여기서부터는 하와이 현지 시간을 적용한다. 도쿄 시간은 하와이 시간보다 19시간 30분 빠르다. 따라서 도쿄 시간 12월 8일 0시는 하와이 시간으로 12월 7일 오전 4시 30분이다.)

 

(진주만 공격부대 항적도. http://en.wikipedia.org/wiki/Attack_on_Pearl_Harbor)

 

12월 3일에 미해군참모총장 해럴드 스타크 대장은 런던, 홍콩, 싱가포르, 마닐라의 일본대사관 및 영사관에서 퍼플 암호 기계를 파괴하고 있다는 보고를 듣고 이 소식을 태평양함대를 비롯한 일선 사령부에 통보했다.

해럴드 총장으로서는 단안을 내린 것으로 당시 일본의 외교암호를 해독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사람은 워싱턴에서도 손에 꼽을 정도였으며 일선 사령관들은 아무리 고위 장교라도 모르고 있었다.

실제로 태평양함대 사령관 킴멜 제독은 이때 퍼플이라는 용어를 처음 들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전문은 킴멜 제독에게 경각심을 불러 일으키지 못했다.

킴멜  제독은 일본해군이 아시아의 영국 영토를 노리고 대규모로 남하 중인 사실을 알고 있었으며 미국이 언제 영국 편을 들어 일본에 선전포고를 할지 모르는 상황에서 일본대사관과 영사관에서 암호기계를 파괴하는 것은 당연하다고 보았다.

 

12월 4일 오후 2시에 도쿄에서는 도고 시게노리 외상이 이토 세이치 군령부 차장 및 참모본부 제1부장인 다나카 신이치 중장과 회의를 갖고 최후 통첩을 미동부 시간으로 12월 7일 오후 1시에 전달하기로 결정했다.

미동부시간 7일 오후 1시는 하와이 시간으로 오전 7시 30분이며 오전 8시로 예정된 공격 30분 전이었다.

오후 1시라는 최후통첩 시간은 마지막 순간에 주미 대사관에 알려주기로 했다.

 

12월 4일 오전에 진주만 공격부대는 해상급유를 마치고 제2급유대를 분리했다.

제2급유대는 구축함 아라레의 호위를 받으면서 진주만 공격부대의 퇴로에 자리잡았다가 공격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합류할 것이었다.

 

같은 날 킴멜 제독은 항공모함 렉싱턴에게 미드웨이에 버팔로 전투기를 파견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렉싱턴은 다음날인 5일에 중순양함 시카고, 애스토리아, 포틀랜드 및 구축함 5척과 함께 진주만을 출항했다.

5일에는 또한 중순양함 2척(인디애나폴리스, 미네아폴리스)과 구형 구축함을 개조한 소해함 5척으로 이루어진 제3기동부대가 진주만을 떠나 존스턴 섬으로 향했다.

 

12월 5일에 히컴 비행장에는 미본토에서 필리핀으로 파견되는 B-24 폭격기 1대가 착륙했다.

사진촬영용으로 사용될 이 폭격기는 최소한의 승무원만 태우고 비무장인 상태로 태평양을 건넜다.

진주만에서는 이렇게 비무장 상태의 폭격기를 파견하는 것은 전쟁성에서도 하와이가 공격을 당하지 않으리라고 믿고 있다는 증거로 받아들였다.

 

하와이에 먼저 접근한 것은 일본잠수함들이었다.

일본잠수함들은 3일 저녁까지 하와이 근해 560km 이내로 진입했고 6일에는 하와이를 둘러쌌다.

12월 5일 저녁까지 I-71 함은 마우이 섬과 카훌라웨 섬 사이의 알랄라케이키 해협에, I-72함은 몰로카이 섬과 라나이 섬 사이의 칼로히 해협에, I-73함은 마우이, 카훌라웨, 그리고 라나이 섬 사이의 케알라이카히키 해협에 도달했다. 

 

(하와이 제도. http://en.wikipedia.org/wiki/Outline_of_Hawaii)

 

12월 5일 오후에 구축함 셀프리지와 랠프 탤벗은 진주만 바깥에서 초계중이었다.

오후 3시경 셀프리지가 수중물체를 발견했다가 놓쳤다.

잠시 후 진주만에서 8km 떨어진 해상에서 랠프 탤벗이 잠수함을 발견했다면서 전대 기함인 셀프리지에게 폭뢰공격 허가를 요청했다.

셀프리지에서 고래라면서 공격을 불허하자 랠프 탤벗의 함장 랠프 얼 중령은 부하들에게

 

"만약 이놈이 고래라면 꼬리에 모터보트를 단 모양이지!"

("If this is a black fish, it has a motorboat up its stern!")

 

라면서 비아냥거렸다.

 

6일 오전 10시 40분에 존 위넌트 주영대사가 국무성에 전문을 보내왔다.

크라 지협에서 14시간 거리에서 서진 중인 2개의 선단이 발견되었다는 것이었다.

큰 선단은 수송선 25척, 순양함 6척, 구축함 10척으로 이루어져 있었고 작은 선단은 수송선 10척, 순양함 2척, 구축함 10척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영령 말레이 반도로 향하는 곤도 중장과 오자와 중장의 함대였다.

해군성은 이 정보를 태평양함대와 제14해군관구를 비롯한 일선 사령부에 보냈다. 

 

육군항공대는 12대의 B-17 폭격기를 하와이를 경유하여 필리핀에 파견하기로 했다.

B-17 폭격기는 6일 밤에 캘리포니아의 해밀튼 비행장을 이륙하여 하와이 시간으로 7일 오전 8시에 오아후 섬의 히컴 비행장에 도착할 것이었다.

중량을 줄이기 위하여 승무원은 5명으로 줄이고 기총은 12.7mm 1정과 7.62mm 2정만 남겼으며 총탄은 싣지 않았다.

 

6일 오전 5시 30분에 진주만 공격부대는 오아후 북서쪽 960km 해상에서 1시간 동안 마지막 급유를 받은 후 제1급유대를 분리했다.

제1급유대는 구축함  가스미의 호위를 받으면서 진주만 공격부대의 퇴로에 대기하다가 공격을 마치고 돌아가는 길에 합류할 것이었다.

 

오아후 섬에서는 6일 오전  8시 15분에 킴멜 대장이 정보참모 레이튼 중령으로부터 보고를 받았다.

일본항모의 위치는 여전히 오리무중이었다.

 

킴멜 제독은 이어서 참모들과 함께 회의를 열었다.

워싱턴에서는 전쟁이 임박했으니 킴멜 제독이 당연히 주말동안 함대 주력을 출항시킬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회의에서는 다른 결론이 나왔다.

무엇보다 항공모함이 없어서 공중엄호를 받을 수 없는 상황에서 전함  중심의 주력 함대를 해상에 내보내는 것은 위험하다는 의견이 다수였다.

엔터프라이즈가 돌아와서 같이 출항할 수 있는 월요일까지는 육군 항공기들이 지켜주는  항구 내가 안전했다.

또 한 가지는 급유함의 부족으로 당시 태평양 함대의 급유함 세력으로는 한번에 함대의 1/8만 급유할 수 있었다.

전쟁이 임박한 상태에서 명확한 목적도 없이 함대를 내보냈다가 해상에 나가있는 함정들의 연료가 떨어졌을 때 전쟁이 터지면 기민한 대응이 불가능할 수도 있었다.

 

회의가 끝나갈 때쯤 호놀룰루의 일본영사관이 서류를 소각하고 암호기계를 파괴했다는 보고가 들어왔다.

서류 소각이야 이전에도 몇 번 있었으니 특별한 일은 아니지만 암호기계를 파괴한 것은 주의를 끌만한 일이었다.

그러나 킴멜 제독은 일본의 영령 말레이 침공이 임박한 상황에서 일본영사관이 암호기계를 파괴하는 것은 있을 수 있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6일 아침에 급유대를 떼어내 버리고 홀가분해진 진주만 공격부대는 오전 11시 30분에 남쪽으로 변침하여 속력을 20노트로 올렸다.

10분 후인 11시 40분에 쓰시마 해전 당시 도고 제독의 기함인 미카사에 올랐던 Z 기가 나구모 제독의 기함 아카기에 올랐다.

이어서 야마모토 제독의 훈시가 전해졌다.

 

"황국의 흥폐가 이 일전에 달렸다. 각자 최선을 다하라."

 

6일 오후 7시 3분에 라하이나 정박지가 비었다는 I-72함으로부터의 보고가 군령부를 통하여 진주만 공격부대에 전달되었다.

이제 모든 전력을 진주만에 집중해야만 할 것이었다.

 

6일 해가 지자 진주만 공격부대의 항공정비병들은 다음날 출격할 항공기들에 대한 최종 정비 및 점검에 들어갔다.

조종사들은 일찍 자라는 명령을 받고 오후 10시까지 잠자리에 들었다.

 

6일 밤에 특별공격대의 일본잠수함 5척은 갑표적을 발진시켰다.

I-24 함의 갑표적을 지휘하는 사카마키 가즈오 소위는 자이로컴퍼스가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다는 걸 발견했다.

이 상태로는 진주만까지 항해하기 어려웠으므로 I-24 함의 함장 하나부사 히로시 소좌는 걱정스럽게 물었다.

 

"어떻게 할 건가?"

 

사카마키 소위는 승조원인 이나가키 기요시 병조와 함께 잠시도 망설이지 않고 힘차게 대답했다.

 

"진주만으로 가겠습니다."

 

미군은 다가오는 위험을 모르고 있었다.

진주만을 관장하는 제14해군관구 사령관 클로드 블로크 소장은 6일 오후 8시 30분에 잠자리에 들었다.

토요일 오후를 맞아 골프를 치느라 피곤했던 것이다.

 

진주만의 해군항공대 사령관 패트릭 벨린저 소장은 5일째 침대 신세를 지고 있었다.

화요일에 심한 독감으로 쓰러진 그는 일요일 아침까지는 꼼짝말고 침대에 누워 쉬라는 군의관의 명령을 받은 처지였다.

 

많은 수병들은 상륙하여 추수감사절에서 크리스마스를 지나 신년으로 이어지는 연말 분위기가 달아오르기 시작하는 12월의 첫째 주말을 즐기고 있었다.

전함 애리조나 곁에 정박한 수리함 베스탈의 경우 수병의 절반 가량이 상륙했다.

 

하와이 육군사령관 월터 쇼트 중장은 하와이 군관구의 정보참모인 켄달 필더 중령, 참모장 타이지 필립스 대령 및 제24사단장 듀란드 윌슨 소장과 함께 스코필드 병영 장교 클럽에서 열린 연례 자선 디너-댄스 파티에 참석했다.

파티가 끝나고 오후 10시 30분에 집에 돌아온 쇼트 중장은 11시쯤 잠자리에 들었다.

다음날 아침에는 태평양함대 사령관 킴멜 대장과의 골프 약속이 잡혀 있었다.

 

하와이 육군항공대 사령관 프레드릭 마틴 소장과 참모장 제임스 몰리슨 중령도 히컴 비행장 장교 클럽에서 열린 파티에 참석했다.

오후 10시 30분에 멀리 샌프란시스코로부터 몰리슨 중령에게 전갈이 왔다.

필리핀으로 향하는 B-17 폭격기 12대가 이륙했으며 하와이 시간으로 다음날 오전 8시경 히컴 비행장에 도착하리라는 내용이었다.

몰리슨 중령은 당직 장교를 찾아 내용을 전달해 주고 자신도 다음날 아침에 관제탑에서 폭격기를 맞이하기 위하여 파티장을 빠져나와 집으로 가서 잤다.

 

태평양함대 사령관 허즈번드 킴멜 대장은 전투부대 사령관 윌리엄 파이 중장, 전투함대 구축함 사령관 마일로 드레멜 소장과 함께 리어리 제독 부부의 초청을 받아 할레쿨라니 호텔에서 저녁을 먹었다.

킴멜 제독은 편안한 마음으로 즐겁게 식사를 하고 와인을 마시며 담소를 나누다가 오후 9시 30분에 집으로 돌아와 10시에 잠자리에 들었다

Posted by 대사(P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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