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 전쟁경고

 

1941년 11월 26일에 미국의 코델 헐 국무장관은 노무라 기치사부로 주미일본대사와 구루스 사부로 특사에게 강경한 내용의 헐 노트를 수교했다.

진주만 공격부대는 전날 이미 히도카프 만을 떠나 하와이로 다가오고 있었다.

 

11월 27일 오전에 진주만에 있는 태평양함대 사령부에서는 허즈번드 킴멜 대장이 미드웨이와 웨이크의 방어강화를 위해 육군과 회의를 가졌다.

해군 측 참석자는 항모기동부대 사령관인 윌리엄 헐지 중장과 윌슨 브라운 중장, 제14해군관구 사령관 클로드 블로크 소장, 해군항공대 사령관 패트릭 벨린저 소장 및 태평양 함대의 전쟁계획장교(war plan officer)인 찰스 맥모리스 대령이었다.

육군 측에서는 하와이 육군사령관 월터 쇼트 중장, 하와이 육군항공대 사령관 프레드릭 마틴 소장, 그리고 마틴 소장의 참모장인 제임스 몰리슨 중령이 참석했다.

 

(허즈번드 킴멜 제독. 자세한 내용은 여기로)

 

킴멜 대장이 미드웨이와 웨이크에 P-40 전투기를 25대씩 모두 50대를 파견하자고 제안하자 몰리슨 중령은 오아후 섬의 방어를 이유로 반대했다.

몰리슨 중령은 일본의 항모기동부대가 진주만을 공습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고 말했다.

그러자 킴멜 대장은 어처구니가 없다는 반응을 보였다.

 

"능력이야 있지, 하지만 가능성은?"

("Capability, yes, but possibility?")

 

하더니 킴멜 대장은 불쑥 맥모리스 대령에게 물어보았다.

 

"자네는 일본의 항공공격 가능성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나?"

("What do you think about the prospects of a Japanese air attack?")

 

"없습니다, 절대로 없습니다."

(None, absolutely none.)

 

맥모리스 대령이 대답했다.

 

결국 회의에서는 P-40 전투기 대신 미드웨이에는 해병대의 버팔로 전투기 12대, 웨이크에는 역시 해병대의 와일드캣 12대를 보내기로 결정이 났다.

하지만 이건 쇼트 중장이 미드웨이와 웨이크에 파견될 P-40 전투기에 대한 지휘권을 유지하겠다고 고집을 부려서 해군 측이 포기한 것이지 결코 진주만에 대한 일본군의 항공공격을 의식한 것이 아니었다. 

실제로 회의 참석자 중에서 몰리슨 중령을 제외하고는 아무도 진주만에 대한 항공공격의 위험성을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점심 시간이 되어 회의는 파하였지만 킴멜 대장의 사관학교 동기생이자 친구인 헐지 중장은 오후 6시까지 남아 이런저런 이야기들을 나누었다.

이때 킴멜 대장이 항모기동부대에 구형전함을 포함시키면 어떠냐고 물어보자 헐지 중장은 거절했다.

이로써 미국의 항모기동부대 지휘관들은 진주만 기습 이전부터 항모기동부대에 속력이 느린 구형전함을 포함시키지 않으려 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실제로 진주만 기습 이후 미함대총사령관 어니스트 킹 대장은 대서양함대의 구형전함들을 급히 미본토 서해안으로 불러모았다.

그래놓고 신임 태평양함대 사령관인 체스터 니미츠 대장에게 미본토 서해안에서 대기 중이던 구형전함들을 항모기동부대에 포함시키라고 권고한 적이 있으나 니미츠 제독은 거절했다. 

 

11월 27일 오후 2시 30분에 쇼트 중장이 회의를 마치고 사령부로 돌아오니 참모장 타이지 필립스 대령이 마셜 장군의 서명이 들어간 전쟁성 전문 제472호(War Department Message No.472)를 내밀었다.

요지는 다음과 같다.

 

1. 일본과의 외교가 성공할 가능성은 거의 없으며 언제든지 적대행위가 발생할 수 있다.

2. 적대행위는 반드시 일본에 의하여 시작되어야 한다.

3. 방어에 필요하다고 생각하면 정찰을 하거나 기타 조치를 취해야 하지만 지역 주민들을 놀라게 하거나 방어를 강화하겠다는 의도를 들키지 않아야 한다.

4. 이 전문에 대해 아는 장교의 수를 최소한으로 하라.

 

전문을 읽어본 쇼트 중장은 전쟁성이 무슨 일이 있어도 전쟁을 피해야 한다고 생각하며 하와이에서 일본을 자극할 수 있는 일이 터지는 것을 두려워한다는 느낌을 받았다.

쇼트 중장은 방어 강화 이야기는 필리핀에 하는 말이며 주민들에 대한 이야기는 하와이를 염두에 두고 하는 말이라고 생각했다.

실제로 주민들에 대한 내용은 하와이에 보낸 전문에만 들어 있었으며 필리핀이나 카리브 해에 보낸 전문에는 빠져 있었다.

쇼트 중장의 경험상 공습의 위험이 있다면 전쟁성이 전문에서 언급할 것이라고 보았으며 오전 회의에서 맥모리스 대령이 보여준 확신은 쇼트 중장에게도 영향을 끼쳐 공습 가능성을 낮게 보았다.

 

그로서는 공습을 막기 위하여 해군의 임무인 장거리 초계를 독자적으로 실시할 자원도 없었다.

가용한 B-17 폭격기는 6대 뿐이었는데 이것으로는 승무원 훈련에도 모자랐으며 장거리 초계는 어림없는 일이었다.

 

또한 공습에 대비하려면 명령에 대해 아는 장교가 늘어날 수 밖에 없었다.

전투기 조종사들을 비상대기 상태로 두고 더 자주 공중에 띄우려면 왜 그래야하는지 설명해야만 했다.

 

쇼트 중장의 주의는 자연히 파괴활동을 막는데 집중되었고  결국 그는 파괴활동으로부터 전투기들을 지키기 위하여 분산배치하지 말고 경비하기 쉽도록 활주로에 한데 모아놓으라는 치명적인 명령을 내렸다.

쇼트 중장은 설사 공습을 당해도 30분 전에만 경고를 받으면 전투기들을 다시 분산시킬 수 있으니 문제없다고 생각했으나 일본군은 30분의 여유를 허용하지 않았다.

 

쇼트 중장의 조치 중 의미가 있는 것은 레이더의 가동시간을 늘린 것이었다.

레이더 훈련은 아침 7시 - 11시, 정오 - 오후 4시까지 실시했으며 토요일에는 오후  훈련이 없었고 일요일에는 쉬었다.

쇼트 중장은 오전 훈련 시작을 새벽 4시로 당겼으며 일요일에도 오전 4시 - 7시까지 훈련하도록 명령했다.

일요일 새벽 훈련을 하던 오파나 스테이션의 레이더가 진주만 공습 당일 일본기들을 발견했다.

 

문제는 하와이의 미육군이 레이더를 중시하지 않았다는 점이었다.

진주만  기습 이후 쇼트 중장은 자신이 레이더를 신뢰하지 않았으며 단지 앞날을 위하여 훈련에 중점을 두었다고 말했다.

실제로 진주만 기습 당시에는 레이더에서 요격사령부를 거쳐 전투기와 대공포를 통제하는 보고 및 명령체계도 존재하지 않았다.

 

같은 날인 27일에 태평양함대 사령관 킴멜 대장도 해군성으로부터 쇼트 중장이 받은 것과 비슷한 전문을 받았다.

해럴드 스타크 해군참모총장의 서명이 들어간 이 전문은

 

"이것은 전쟁경고로 생각하라."

("This dispatch is to be considered a war warning.")

 

는 문장으로 시작하여 킴멜 대장을 놀라게 했으나 사실 내용은 이틀 전인 24일에 받은 내용과 별다른 차이가 없었다.

킴멜 대장이 생각하기로 전쟁경고란 일본이 어딘가를 공격할 수 있다는 소리였고 그건 지난 몇 개월간 계속 들어온 소리였으며 이틀 전에도 비슷한 전문을 받았다.

이번에도 일본군이 필리핀, 타이, 크라반도, 북보르네오에 상륙할 가능성이 있다고 언급했을 뿐 이틀 전의 전문과 마찬가지로 하와이는 공격대상에서 빠져 있었다.

해군성의 전쟁계획국장으로 전문에 전쟁경고란 용어를 넣은 장본인인 리치먼드 켈리 터너 소장은 진주만 기습 이후 킴멜 대장이 전쟁경고란 용어를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는 사실에 분통을 터뜨렸다.

 

킴멜 제독으로서는 실제로 전문을 받고 장거리 초계를 강화하려 해도 어려움이 많았다.

태평양 함대가 보유한 카탈리나 정찰비행정은 81대로 적은 수는 아니었으나 실상은 달랐다.

81대 중 27대는 구형의 PBY-3이고 54대는 신형 PBY-5 였는데 신형  카탈리나들은 늦게 도착했다.

즉 18대는 10월 28일, 12대는 11월 8일, 그리고 24대는 11월 23일에야 도착하여 승무원들이 시험비행 중이었다.

그나마 구형 카탈리나 중 12대는 미드웨이에 파견되어 있었으며 제대로 운용가능한 카탈리나들은 함대 훈련에 따라나가 정찰해야 했다.

 

오늘날의 상식과는 다르게 당시 태평양함대가 중시했던 것은 항구 내에 정박한 함대의 안전이 아니라 전쟁이 벌어지면 얼마나 신속하게 전투에 투입되어 제대로 싸우느냐였다.

따라서 당시 태평양함대는 훈련을 최우선으로 했으며 항구에 정박한 함대의 안전을 위한 장거리 초계는 우선 순위가 떨어졌다.

결국 킴멜 대장은 전문을 받고 장거리 초계를 실시하긴 했으나 그때그때 형편이 되는대로 가끔씩 실시하는 정도였다.

장거리 초계보다는 신형 카탈리나 승무원의 훈련에 우선권을 두었던 것이다.

 

대신 킴멜 대장은 공습보다 가능성이 크다고 생각했던 잠수함의 위협에 집중했다.

지금까지 미국 함정들은 잠수함으로 의심되는 경우에도 공격하지 않았지만 이후 하와이 근해의 모든 함정은 잠수함으로 의심되는 경우 폭뢰 공격을 가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돌이켜 보면 킴멜 대장은 27일의 전문을 받고서도 적절한 조치를 취하지 않은 책임을 면하기 어려우며 진주만 기습에 가장 큰 책임이 있다고 지목된 것도 불가피하다.

그는 장거리 초계를 성실하게 실시하지 않았으며 심지어 해군항공대 사령관인 벨린저 소장에게 전문을 보여주지도 않았다.

쇼트 중장 또한 하와이의 미국 정보기관들이 일본계가 파괴 활동을 일으키려 한다는 증거를 잡지 못했음에도 불구하고 그 생각에 매몰되어 전투기를 활주로에 집결시키는 큰 실수를 저질렀다.

 

하지만 해군성과 전쟁성 또한 잘못이 없다고 보기는 어렵다.

우선 하와이의 방어가 해군과 육군이 밀접하게 협조해야 하는 특성상 비슷한 내용을 따로 보낼 것이 아니라 해군참모총장과 육군참모총장이 공동으로 작성한 하나의 전문을 보내는 것이 옳았다.

 

전문의 내용이 명확하지 못한 점도 문제이다.

진주만 기습 후에 터너 소장은 전쟁 경고란 용어를 쓴 이유를 설명하면서 킴멜 제독이 잠수함을 일본군의 예상 접근 경로에 파견하고 항공기로 장거리 초계를 실시하며 항모기동부대를 외해로 내보내어 하와이로 접근하는 일본군을 공격하기에 적절한 위치에서 대기하도록 하고 함대 주력은 비상을 걸고 교전에 대비할 것을 기대했다고 말했다. 

그러나 해군성이 실제로 이것을 원했다면 그렇게 두리뭉실한 전문을 보낼 것이 아니라 킴멜 제독에게 레인보우5 작전의 해군 부분인 WPL46 에 규정된 H 임무를 수행하라고 명령하면 간단한 일이었다.

H 임무는 태평양 지역의 미국 영토를 침공하려는 적의 원정부대를 격퇴하는 임무이기 때문에 해군성이 하와이에 대하여 H 임무를 수행하라는 명령을 내렸다면 킴멜 대장은 싫어도 터너 소장이 말한 것 같은 일을 해야만 했을 것이다.

 

해군성이 H 임무를 수행하라는 명령을 내리지 못한 이유는 간단하다.

그만한 확신을 가질 수 있는 정보가 없었기 때문이며 따라서 H 임무 명령을 내리지 못했다고 하여 해군성이 비난받을 일은 아니다.

그렇다면 해군성도 확신하지 못하여 모호한 전문을 발송할 수 밖에 없었는데 그 일을 휘하의 현지부대인 태평양함대가 실시하지 못했다고 하여 책임을 묻는 것이 과연 정당화될 수 있는지 하는 의문이 남는다.

 

쇼트 중장도 마찬가지로 전쟁성의 전문을 받은 다음날인 11월 28일에 육군항공대는 쇼트 중장에게 일본계에 의한 파괴활동을 제1의 위협으로 보고 대비할 것을 요청하는 전문을 2개나 보냈다.

물론 이때는 전투기들을 한곳에 모아 경비한다는 결정을 내린 뒤였지만 이 전문들이 그러한 결정에 정당성을 부여한 것은 틀림없다.

만일 쇼트 중장이 반복적인 경고를 받고도 적극적으로 대응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가 파괴활동에 의하여 항공기의 일부라도 파괴되었다면 엄청난 비난과 처벌을 피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킴멜 제독과 쇼트 중장은 27일의 전문을 받고 자신들이 조치한 사항을 보고했지만 해군 및 육군참모총장은 보고를 받고도 별다른 언급을 하거나 후속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

육군참모총장 마셜 장군은 27일의 전문에 대한 맥아더 대장과 쇼트 중장의 조치 사항을 거의 동시에 보고받았다.

당시 마셜 장군은 맥아더 장군의 보고서에는 서명을 했으나 쇼트 장군의 보고서에는 그의 서명이 없다.

마셜 장군은 진주만 기습 이후 의회에 출석하여 쇼트 중장의 보고서를 보았는지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면서 자신이 개입할 수 있는 기회였는데 그렇게 하지 못했다고 솔직하게 시인했다.

 

(미육군참모총장 조지 마셜 장군. 자세한 내용은 여기로)

 

그리하여 1941년 11월 27일에 보내진 전쟁성과 해군성의 전문은 진주만 기습을 막는데 아무런 역할을 하지 못했다.

Posted by 대사(P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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