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 스즈키 소좌의 브리핑

 

히도카프 만에 도착한 제2전대의 기함 히에이 함상에는 스즈키 수구루 소좌가 손님으로 타고 있었다.

스즈키 소좌는 불과 2주일 전에 오아후로부터 돌아온 참이었다.

 

1달 전인 1941년 10월 22일에 일본우선회사 소속 14,500 톤급의 여객선 다이요마루가 요코하마를 떠나 호놀룰루로 향했다.

이 배에는 3명의 해군장교가 신분을 숨기고 타고 있었다.

항공장교인 스즈키 수구루 소좌, 잠수함 장교인 마에지마 도시히데 소좌, 그리고 갑표적 장교인 마츠오 게이우 대위였다.

스즈키 소좌는 선원인 사무장보, 마에지마 소좌는 선박회사 소속의 의사, 그리고 마츠오 대위는 승객으로 가장했다.

의사로 위장한 마에지마 소좌는 만약을 대비하여 의학 용어를 익히고 이름도 츠카다라는 가명을 썼으나 스즈키 소좌와 마츠오 대위는 본명을 썼다.

 

(다이요마루. http://commons.wikimedia.org/wiki/File:Taiyo_Maru_in_Mitsubishi_Nagasaki.JPG)

 

다이요마루는 군령부의 요청을 받은 일본정부의 명령에 따라 무선침묵을 유지한 채 진주만 공격부대가 사용할 북방항로를 따라 하와이로 향했다.

항해 기간 동안 스즈키 소좌와 마에지마 소좌는 시계, 풍향, 풍속같은 날씨와 해상상태를 매일 점검하고 기록했으며 접근하는 항공기나 배가 있는지 쌍안경으로 관찰했다.

다이요마루가 미드웨이 북쪽을 지날 때 미군의 정찰기가 보이지 않았으므로 진주만 공격부대는 더 멀리 북쪽으로 돌아갈 이유는 없었다.

스즈키 소좌가 배나 비행기를 처음 본 것은 다이요마루가 진주만 북쪽 320km 지점에 이르러 미군의 정찰기에 발견되었을 때였다.

이로써 오아후 북쪽에 대한 미국의 정찰반경은 320km 이며 그 이전에는 배나 비행기를 만날 확률이 낮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다이요마루는 토요일인 1941년 11월 1일 오전 8시 30분에 호놀룰루 항의 8번 부두에 도착했다.

곧 하와이 총영사인 기타 나가오가 찾아와 스즈키 소좌와 면담했다.

스즈키 소좌는 군령부가 작성한 100 여 가지의 질문을 전달했고 기타 총영사는 다이요마루가 출항할 때까지 매일 찾아와 답변했다.

가장 좋은 방법은 오아후 섬의 정보 수집을 책임지고 있던 요시카와 다케오가 다이요마루에 직접 와서 답변하는 방법이었으나 군령부나 일본영사관 모두 정보수집의 핵심인물인 요시카와를 위험에 빠뜨리고 싶어하지 않았다.

같은 이유로 요시카와가 작성한 답변서를 기타 총영사가 전달하는 방법도 위험했다.

결국 기타 총영사가 요시카와와 함께 답변을 만들어 기억했다가 다이요마루에 와서 스즈키 소좌에게 말해주었다.

기타 총영사는 꽤 정확하게 정보를 전달했으나 몇몇 정보는 잘못 전달되었으며 어떤 정보는 요시카와가 잘못 알고 있었다.

 

스즈키 소좌, 마에지마 소좌 및 마츠오 대위는 다이요마루가 호놀룰루에 정박해 있는 동안 배를 떠나지 않고 쌍안경으로 북서쪽에 보이는 진주만을 관찰하고 날아다니는 항공기들도 관찰했다.

항공기를 관찰하면서 스즈키 소좌는 단발기인지 쌍발기인지 4발기인지 구분해서 기록했다.

다이요마루는 11월 5일에 호놀룰루를 출항하여 진주만 기습부대가 돌아올 항로를 따라 17일 오전에 일본으로 돌아왔다.

돌아오는 길에도 하와이 근해를 벗어나자 일본 근해에 도달할 때까지 비행기나 배를 만나지 않았다. 

다이요마루가 요코하마 항에 접근하자 해군성이 보낸 보트가 스즈키 소좌, 마에지마 소좌 및 마츠오 대위를 데리러 왔다.

보트를 타고 해안에 도착한 세 사람은 즉시 도쿄로 가서 해군성 건물 2층에 마련된 방으로 들어갔다.

그곳에는 나가노 군령부 총장, 이토 차장, 후쿠도메 제1부장, 도미오카 작전과장, 미요 항공참모 등 군령부의 주요 인사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스즈키 소좌는 이들에게 기타 총영사로부터 들은 답변 내용과 자신이 관찰한 내용을 설명한 후 질문을 받고 대답했으며 이어서 마에지마 소좌와 마츠오 대위도 같은 과정을 거쳤다.

 

이렇듯 중요한 모임에서 나가노 총장은 열성이 없었다.

나가노 총장은 처음에 반짝하다가 이내 관심을 잃었으며 날카로운 질문과 대답이 오가는 긴장된 분위기 하에서도 대부분의 시간을 꾸벅꾸벅 졸았다.

군인으로서 최고의 지위인 군령부 총장에 오른 이후 나가노 제독은 목표를 잃고 도전을 싫어하며 현실에 안주하려 했다.

나가노 총장의 이러한 무기력한 태도 덕분에 연합함대 사령장관 야마모토 대장이 상급기관인 군령부를 상대로 번번이 자신의 의사를 관철시킬 수 있었다.

 

군령부와의 모임을 마치고 나니 밤늦은 시간이었다.

도쿄에 집이 있던 스즈키 소좌는 자기 집으로 갔으며 마에지마 소좌는 잠수함 부대에 설명하기 위하여 요코스카로, 마츠오 대위는 갑표적 승조원들에게 설명하기 위하여 구레로 갔다.

 

스즈키 소좌는 다음날인 11월 18일에 군령부로 가서 정보분석관들과 함께 자신이 기타 총영사에게서 들은 내용과 스스로 관찰한 내용을 다시 한 번 반복했다.

이후 그에게는 더 중요한 임무가 주어졌다.

스즈키 소좌는 히도카프 만으로 가서 제1항공함대 수뇌부에 브리핑하라는 명령을 받고 18일 저녁에 제2전대 사령관 미카와 구니치 중장의 기함 히에이에 올랐다.

 

쿠릴열도 에토로푸 섬의 동해안 중간 쯤에 있는 히도카프 만은 일찌기 해적들의 근거지였다.

9km x 9km 크기로 내륙으로 움푹 들어간 히도카프 만은 좋은 정박지로 진주만 기습부대가 함대가 외부의 눈을 피해서 숨기에 안성맞춤이었다.

대부분 어부인 주민들은 만 북쪽의 도시모이와 남쪽의 우엠베츠에 모여 살았는데 집 이외에는 건물이랄 것이 없는 오지였다.

진주만 공격부대는 1941년 11월 21일부터 히도카프 만에 도착하기 시작했으며 22일에 신형어뢰를 싣고 온 카가가 마지막으로 도착했다.

 

(에토로프 섬. 동해안 중간에 잘록하게 들어간 것이 히도카프 만이다. http://en.wikipedia.org/wiki/Iturup)

 

제1항공함대 사령장관 나구모 중장은 11월 22일 오후 8시에 기함 아카기에서 제1항공함대의 참모들 및 후치다 중좌와 함께 스즈키 소좌의 브리핑을 들었다.  

스즈키 소좌는 군령부에서와 마찬가지로 기타 총영사에게서 들은 것과 자신이 호놀룰루 항에서 관찰한 내용을 설명했다.

 

미태평양함대가 주말마다 항구로 돌아온다는 정보는 아직 유효했다.

이어서 스즈키 소좌는 오아후 섬의 미군 항공력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미해군은 포드 섬에 약 60대, 그리고 카네오헤 기지에 약 50대의 카탈리나 정찰비행정을 보유하고 있다.

오아후 남서쪽의 바버즈 곶에서는 언제나 함재기 약 80대가 훈련중이다.

미육군은 히컴 비행장에 4발 중폭격기 약 40대, 쌍발폭격기 약 100대를 보유하고 있다.

미육군의 전투기는 P-40, P-38, P-36 이 약 200대이고 기타 약 70대를 보유하고 있다.

 

이것을 보면 당시 스즈키 소좌가 오아후 섬의 미군 항공력을 상당히 과대평가하고 있었다는 점을 알 수 있다.

우선 미해군이 보유한 카탈리나 정찰비행정은 110대가 아니라 포드 섬에 45대, 카네오헤에 36대로 합계 81대였으며 그중 12대는 미드웨이에 파견나와 실제로는 69대였다.

스즈키 소좌가 보고한 '바버즈 곶에서 훈련 중인 함재기 80대' 는 에바 비행장에 전개하고 있던 해병항공대로 보이는데 진주만 기습 당시 오아후 섬의 해병항공대가 보유한 항공기는 와일드캣 10대, 돈틀레스 22대, 빈디케이터 급강하폭격기 7대, 쌍발초계기 3대, 그리고 연습기 1대로 합계 43대였다.

 

육군항공대의 경우 과대평가는 더 심했다.

4발 중폭격기인 B-17D 는 40대가 아니라 12대 밖에 없었으며 그나마 부품부족으로 6대 만이 가용한 상태였다.

쌍발폭격기 또한 100대가 아니라 B-12 3대, B-18 33대, A-12 2대, A-20 12대로 총 50대였으며 부품부족으로 B-12 1대, B-18 21대, A-12 2대, A-20 5대 등 29대만이 가용한 상태였다.

그나마 A-20 을 제외한 쌍발폭격기들은 모두 구형이었다.

 

전투기 또한 270대가 아니라 P-40 99대, P-36 39대, P-26 14대로 총 152대였으며 역시 부품부족으로 P-40 64대, P-36 20대, P-26 10대 등 94대만이 가용한 상태였다.

P-40 을 제외한 기종들은 구형이었으며 강력한 신형 쌍발전투기인 P-38 은 배치되지 않은 상태였다.

 

스즈키 소좌는 오아후 섬의 육군 항공기 세력을 폭격기 140대, 전투기 270대, 기타 45대로 보아 455대로 추산했으나 실제로는 폭격기 62대, 전투기 152대, 정찰기 13대, 훈련기 4대 등 231대였으며 그나마 가용한 것은 폭격기 35대, 전투기 94대, 정찰기 11대, 훈련기 3대 등 143대에 지나지 않았다.

일본군은 오아후에 배치된 미육군의 항공력을 3배 이상 과대평가했으며 이렇게 과대평가된 오아후의 미국 항공력에 대한 공포가 진주만 기습에서 나구모 중장이 3차 공습을 포기한 가장 큰 이유였다.

 

(히도카프 만에 정박 중인 제1항공함대의 기함 아카기. http://commons.wikimedia.org/wiki/File:Akagi_Hitokappu_Bay.jpg) 

 

스즈키 소좌는 이어서 항공정찰에 대해 설명했다.

항공정찰은 오아후의 남쪽과 남서쪽으로는 활발하지만 북쪽으로는 뜸했다.

미해군의 카탈리나  정찰비행정들은 아침에 이륙하여 정찰한 후 점심에 돌아오며 오후에 다시 이륙하여 해질때까지는 돌아왔다.

따라서 미군 정찰기들은 해뜨기 전이나 해가 진 이후에는 활동하지 않았으며 이는 진주만 기습의 성공율을 높여주는 중요한 정보였다.

 

설명이 끝나자 겐다 중좌는 가장 중요한 항공모함에 대하여 물었다.

스즈키 소좌는 잠시 망설이더니 자신은 항공모함을 보지 못했지만 항모들은 다른 함정들과 같이 행동한다고 말했다.

 

이것은 틀린 말이었다.

실제로 오아후의 정보 수집을 책임지고 있던 요시카와 다케오는 진주만을 드나드는 항모의 행동 패턴을 파악하려고 골머리를 앓았으나 도통 알 수가 없었다.

당연한 것이 당시 태평양함대의 항공모함들은 전방 기지에 항공기를 파견하러 사방으로 돌아다니고 있었다.

따라서 항모들은 전함을 중심으로 한 태평양함대 주력의 훈련 스케줄과는 상관없이 항공기를 파견하러 다니는 도중에 따로 훈련하고 있었으므로 입출항 시기를 예측할 수 있는 행동 패턴이 없었다.

 

겐다 중좌는 기습을 가했을 때 진주만 내에 항모가 없을 수도 있다는 사실에 불안감을 느꼈으나 항모가 있건없건 공습을 감행하기로 결정했다.

항모가 없을 경우 주목표는  전함과 항공기가 될 것이었다.

 

스즈키 소좌가 히도카프 만에 정박한 아카기에서 브리핑하고 있을 때 미태평양함대의 전투정보실은 마셜 제도에 일본이 가진 전체 잠수함의 1/3 가량이 몰려있는 것을 알아내었으나 이들이 하와이를 목표로 하고 있다는 사실은 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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