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 승인
1941년 9월의 전쟁연습 이후 군령부는 연합함대의 진주만 기습 계획에 대하여 명확한 목표를 가지고 대처했다.
즉 가능하면 취소시키고 취소가 불가능하면 규모를 최소화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목표에 따라 군령부는 1941년 9월 말에 소류와 히류의 항속거리가 짧다는 구실로 제2항공전대를 남방작전으로 돌렸으며 오버홀이 예정되어 있던 아카기마저 빼돌렸다.
군령부는 이 사실을 연합함대와 제1항공함대에 통보했으나 제2항공전대에는 알리지 않았다.
1941년 10월 초에 이 사실을 알게 된 제2항공전대 사령관 야마구치 다몬 소장이 제1항공함대의 기함인 아카기로 쳐들어왔다.
당시 겐다 중좌는 나구모 사령장관의 선실에서 나구모 중장 및 구사카 참모장과 함께 진주만 기습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는데 야마구치 소장이 노기등등한 얼굴로 문을 벌컥 열고 들어오자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야마구치 다몬 제독. 자세한 내용은 여기로)
겐다 중좌는 평소 야마구치 제독을 무조건 공격만을 주장하는 무식한 지휘관으로 여겨 싫어했다.
그러나 최소한 6척이 필요한 진주만 공격부대가 3척으로 쪼그라든 비상 사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야마구치 소장처럼 제독이면서 진주만 기습을 열정적으로 지지하고 또한 성격이 불같은 사람과 손을 잡아야 했다.
진주만 기습에 소극적인 나구모 사령장관이나 구사카 참모장은 믿을 수 없었고 계급 사회인 군대에서 일개 중좌에 불과한 겐다 자신은 힘이 없었다.
(제1항공함대의 항공참모 겐다 미노루 중좌. 자세한 내용은 여기로)
야마구치 소장은 나구모 중장에게 으르렁거리듯 물었다.
"도대체 2전대가 빠진 이유가 뭡니까?"
나구모 중장을 대신하여 야마구치 소장의 에타지마 병학교 1년 후배인 구사카 참모장이 조심스럽게 말했다.
"상부에서 결정한 겁니다."
그러자 야마구치 소장은 소리를 질렀다.
"왜 항의하지 않습니까? 정말로 하와이를 공격하고 싶다면 항공모함 6척이 필요하다는 걸 모릅니까? 항속거리가 짧다고? 그건 제가 걱정할 문젭니다. 공격하고 돌아오다가 연료 떨어지면 그냥 바다에 떠 있을거요. 2전대는 신경끄고 먼저 가면 됩니다."
야마구치 소장은 겐다 중좌를 돌아보며 물었다.
"자네는 어떻게 생각하나?"
겐다 중좌는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제독님 생각에 전적으로 찬성입니다. 군령부가 어떻게 이런 멍청한 계획을 세웠는지 이해를 못하겠습니다."
나구모 중장은 야마구치 소장의 기세에 눌려 쩔쩔매다가 겨우 한마디했다.
"아, 군령부에서 명령이 그렇게 내려온 걸 난들 어떡하나?"
야마구치 소장은 그 소리를 듣자 나구모 중장을 한 번 노려보더니 인사도 안하고 문을 쾅 닫고는 나가버렸다.
(제1항공함대 사령장관 사령관 나구모 주이치 중장. 자세한 내용은 여기로)
며칠 후인 1941년 10월 9일에 일본연합함대 사령장관 야마모토 이소로쿠 대장은 히로시마 만에 정박한 기함 나가토 함상으로 휘하의 주요 지휘관들을 소집했다.
연합함대 명령 제1호의 발령을 앞두고 부하들의 의견을 마지막으로 듣고 연합함대 전체의 의견을 통일시키기 위한 것이었다.
그리하여 10월 9일부터 11일까지 나가토 함상에서는 남방작전 전반에 걸쳐 토론이 벌어졌는데 그동안 제1항공함대 수뇌부는 전함 무츠에 머물렀다.
무츠에서의 저녁 회식 자리에서 나구모 중장은 부하들에게 술을 적당히 마시라고 당부했지만 야마구치 소장은 과음했다.
회식을 마칠 때쯤 잔뜩 취한 야마구치 소장이 나구모 중장에게 다가와 옷을 붙잡더니 유도로 메다 꽂으려고 했다.
깜짝 놀란 나구모 중장이 안 넘어가려고 버둥거릴 때 구사카 참모장이 끼어들었다.
몸집이 큰데다 무술이 뛰어난 구사카 참모장은 어렵지 않게 야마구치 소장을 떼어낸 다음 옆방으로 데려가 눕혔다.
(제1항공함대 참모장 구사카 류노스케 소장. 자세한 내용은 여기로)
10월 9일부터 11일까지 3일간의 토론이 끝나고 12일 오전 9시부터 나가토 함상에서는 진주만 기습에 대한 전쟁연습이 실시되었다.
9월 16일의 전쟁연습과 달리 이번에는 진주만 기습에 직접 관계없는 지휘관들도 참관했으며 군령부를 대표하여 항공참모 미요 다츠기치 중좌와 우치다 시게시 중좌도 참관했다.
이번 전쟁연습은 9월과 비교하여 몇 가지가 달라졌다.
우선 잠수함에서 발진하는 소형 잠수정인 갑표적이 포함되었으며 쿠릴열도의 어느 지점이라고만 되어있던 집결 장소가 에토로푸 섬의 히도카프 만으로 결정되었다.(히도카프 만을 고른 것은 중좌 시절 쿠릴 열도에 대해 깊이 공부했던 구사카 소장이었다.)
가장 큰 차이점은 군령부의 의도에 따라 청군으로 참가한 항공모함이 카가, 쇼가쿠, 그리고 즈이가쿠의 3척이라는 것이었다.
결과는 실망스러웠다.
청군함대는 오아후에 완전한 기습을 가했음에도 불구하고 항공력 부족으로 미함대에 치명적인 타격을 주지 못하고 중간 정도의 타격만을 입혔다.
비록 재빠른 퇴각으로 청군함대의 피해는 가벼웠지만 전체적으로 받아들이기 힘든 결과였다.
겐다 중좌나 야마구치 소장, 그리고 야마모토 대장은 항공모함 3척으로 오아후를 공격한다는 것은 큰 의미가 없다는 사실을 확신하게 되었다.
잠수함에서 출격한 갑표적의 전과도 보잘것 없었다.
전쟁연습이 끝난 후 토론이 벌어졌다.
나구모 중장은 하와이에 전개하는 잠수함들이 미해군에게 발견될까봐 두려워했다.
그리하여 잠수함들은 항공공격 이전에는 낮에는 반드시 잠수하고 밤에만 부상하기로 결정했다.
야마모토 제독은 갑표적을 신뢰하지 않았으나 잠수함대인 제6함대의 강력한 요청을 받아들여 반드시 생환한다는 조건으로 참가를 허용했다.
비밀유지와 관련하여 말레이에 상륙할 선단 상공에 나타나는 연합군 정찰기를 어떻게 처리할 것인지가 문제가 되었다.
선단을 호위할 제2함대 사령장관 곤도 노부다케 중장은 선단 상공에 나타나는 정찰기를 무조건 격추할 생각이었지만 나구모 중장은 그럴 경우 하와이의 미군이 경계를 강화할 것이라며 반대했다.
결국 곤도 중장은 진주만 기습 이전에는 정찰기에 발견되면 격추하지 않고 선단의 방향을 바꾸어 적의 눈을 속이기로 했다.
제3전대 사령관 미카와 구니치 중장은 9월에 이어 또다시 전함 공고와 하루나를 제3함대에서 뺴내어 히에이 및 기리시마와 함께 진주만 기습에 참가시켜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번에는 야마모토 대장이 직접 나서 공고와 하루나는 영국해군에 대항하기 위하여 반드시 필요하므로 제3함대 휘하에서 남방작전에 참가해야 한다고 못을 박았다.
다음날인 10월 13일 오전 9시부터 나가토에서는 전술적인 토론이 벌어졌으며 전술토론이 끝난 오후 4시부터 연합함대의 주요 지휘관들과 고급 참모들은 특별 회의를 가졌다.
야마모토 제독은 회의 참가자들에게 다가오는 전쟁에 대해 기탄없이 의견을 말하라면서 좋은 의견을 반영하기 위하여 개인 자격으로 기록할 뿐 공식 기록은 남기지 않으니 어떤 내용이든 발언해도 좋다고 말했다.
대신 회의 마지막에 자신이 결론을 내리면 더 이상의 논쟁은 허용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연합함대 참모장 우가키 마토메 소장의 개회사에 이어 제3전대 사령관 미카와 구니치 중장이 발언했다.
미카와 중장은 순전히 항해라는 면에서 보았을 때 12월 중순 이후에는 북태평양에서의 해상급유가 사실상 불가능하므로 아무리 늦어도 12월 초순에는 진주만을 공격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따라서 개전일은 하와이 현지 시간으로 1941년 12월 7일, 미군 함정이 진주만 내에 가장 많이 모이는 일요일로 결정했다.
제11항공함대 참모장 오니시 다키지로 소장은 진주만을 기습하기에는 계절적으로 이미 늦었으며 항공모함들은 하와이를 공격하는 대신 필리핀을 공격하는 제11항공함대를 지원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제2함대 사령장관 곤도 노부다케 중장은 하와이는 물론 필리핀, 괌, 웨이크 등 미군 기지에 대한 공격을 일체 배제하고 말레이만 공격함으로써 미국의 즉각적인 참전을 막고 일단은 영국과 네덜란드만을 상대로 개전하자고 주장했다.
제1항공함대 사령장관 나구모 주이치 중장과 참모장 구사카 류노스케 소장도 곤도 중장의 의견에 찬성했다.
제2항공전대 사령관 야마구치 다몬 소장은 진주만 공격을 강력하게 지지했다.
마지막으로 연합함대 사령장관 야마모토 이소로쿠 대장이 일어섰다.
"여러분들의 훌륭한 의견을 잘 들었다. 몇몇 의견은 내가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점을 일깨워 주었으며 그 내용은 앞으로 함대명령에 반영될 것이다."
그리고 명확하게 결론을 내렸다.
"하와이 작전은 국가 대전략의 핵심적인 부분이다. 내가 연합함대 사령장관으로 있는 한 하와이를 공격할 것이다. 나는 여러분이 충심으로 나를 지지해 주길 바란다. 이제 여러분은 각자 위치로 돌아가 전쟁의 승리를 위하여 매진하도록. 행운을 빈다!"
이로써 결론이 났다.
야마모토 제독의 결단력과 카리스마에 대항할 인물은 연합함대 내에는 없었다.
이후 연합함대 내에서는 나구모 중장을 위시하여 누구도 하와이 공격에 대해 논쟁하거나 반대하거나 불평하지 않았다.
(연합함대 사령관 야마모토 이소로쿠 대장. 자세한 내용은 여기로)
겐다 중좌는 이제 군령부에 의하여 항공모함 3척으로 쪼그라든 진주만 공격부대를 6척으로 늘리는 일에 집중했다.
제1항공함대 참모장 구사카 소장도 일단 하와이 공격을 수용하자 항모를 6척으로 늘려야 한다는 겐다 중좌를 지지했다.
야마구치 소장은 나가토 함상에서의 특별 회의에서 제2항공전대를 진주만 기습에 참가시키려고 노력했으나 실패했다.
회의에서 제2항공전대의 항공참모 스즈키 에이지로 소좌는 야마구치 소장을 대변하여 제2항공전대가 하와이 공격에 참가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스즈키 소좌는 소류와 히류의 항속거리가 결코 짧지 않으며 북방항로를 사용해도 해상급유없이 하와이까지 왕복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회의 참석자들은 모두가 알고 있는 뻔한 사실을 가지고 야마모토 대장을 비롯한 기라성같은 제독들이 앉아있는 회의 석상에서 막무가내로 우겨대는 스즈키 소좌를 기가 막힌다는 표정으로 쳐다보다가 직속상관인 야마구치 소장에게 어서 제지하지 않고 뭐하냐고 눈치를 주었다.
그러나 야마구치 소장은 스즈키 소좌가 말을 마칠 때까지 모두의 시선을 무시함으로써 그를 지지했다.
회의를 마치고 야마구치 소장은 스즈키 소좌에게 이렇게 말했다.
"자네는 틀렸어. 그리고 스스로 틀렸다는 것을 알면서 그랬다는 것도 아네. 잘했어. 배짱이 마음에 들어."
나가토 함상의 회의가 끝난 직후 야마구치 소장은 다시 한번 나구모 중장의 선실에 쳐들어가 행패를 부렸다.
사실 제2항공전대의 진주만 기습 배제 문제는 야마모토 대장에게 따질 일이었으나 야마구치 소장에게는 그런 생각이 떠오르지 않았다.
대신 그의 분노는 항공전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 주제에 제1항공함대 사령장관 자리를 꿰차고 앉아서는 처음부터 진주만 기습에 반대하더니 이제는 3척의 항공모함만 가지고 하나마나한 히트앤드런 작전이나 수행하려는 나구모 중장에게 향했다.
이번에는 야마구치 소장의 지나친 언행에 화가 난 나구모 중장이 도중에 말을 끊고 나가라고 명령했다.
야마구치 소장은 쫓겨나면서 문을 쾅하고 닫기 전에 들으라는 듯이 큰소리로 중얼거렸다.
"(제1항공함대의) 사령장관이고 나발이고 똑바로 안하면 내 손으로 죽여버릴 거야."
겐다 중좌는 이런 식으로는 해결이 안되며 누군가 군령부와 직접 부딪혀야 한다고 생각하고 구사카 참모장을 설득했다.
구사카 소장은 나구모 중장에게 이제 하와이를 공격해야만 하는 현실을 직시할 때며 공격은 다른 사람이 아닌 나구모 중장 자신이 이끌어야 한다는 점을 상기시켰다.
그리고 하와이를 공격하려면 3척이 아닌 6척의 항모를 이끌고 가야만 성공할 수 있다고 설득하여 항모 6척을 얻어내기 위하여 군령부에 가도 좋다는 허락을 받아내었다.
구사카 소장은 1941년 10월 17일에 군령부를 방문하여 제1부 작전과장 도미오카 사다토시 대좌와 이야기를 나누었다.
도미오카 대좌는 6척의 항모는 커녕 하와이 공격 자체를 반대하면서 한마디도 지지않고 꼬박꼬박 대꾸했다.
더 이상 이야기해 봤자 시간낭비라고 생각한 구사카 소장은 군령부를 떠났다.
이제 하와이 공격의 열렬한 신봉자가 된 구사카 소장은 어깨를 늘어뜨리고 아카기로 돌아가는 대신 나가토로 가서 야마모토 대장을 만났다.
야마모토 대장은 불과 며칠 전만 해도 진주만 공격을 반대하던 구사카 소장이 이제는 열렬한 신봉자가 되어 항모 6척이 꼭 필요한데 군령부의 멍청이들이 말귀를 못 알아먹는다면서 울분을 토하는 모습을 흡족하게 바라보았다.
이야기를 듣고 난 야마모토 대장은 자기가 알아서 처리할테니 걱정말라고 구사카 소장을 달랜 다음 아카기로 돌려보냈다.
야마모토 대장도 이제 승부수를 띄워야 할 때가 왔음을 깨달았다.
그날 저녁 야마모토 대장은 선임참모 구로시마 가메토 대좌를 불러 다음날 군령부로 가라고 말했다.
구로시마 대좌의 임무는 두 가지로서 첫째는 하와이 공격에 대한 승인을 얻는 것, 둘째는 하와이 공격에 6척의 항모를 투입한다는 약속을 받아내는 것이었다.
타고난 승부사였던 야마모토 대장은 구로시마 대좌의 손에 군령부가 버텨내지 못할 강력한 무기를 쥐어 주었다.
다음날인 10월 18일 아침에 구로시마 대좌는 군령부로 날아가 작전과장 도미오카 대좌를 찾았다.
미요 항공참모와 함께 나가토 전쟁연습에 대하여 토의하고 있던 도미오카 대좌를 찾아낸 구로시마 대좌는 하와이 작전에 대한 군령부의 명확한 태도를 즉시 확인하라는 연합함대 사령장관의 명령을 받고 왔다고 말했다.
구로시마 대좌는 개전과 동시에 미함대에 강력한 타격을 가해야만 할 이유를 나열하고 진주만을 반드시 공격해야 하며 공격에 참가할 항공모함은 6척 이상이어야 한다고 말했다.
도미오카 대좌는 눈도 깜짝하지 않았다.
8월의 토론 때와 마찬가지로 도미오카 대좌는 논리정연하게 하와이 공격이 부당한 이유를 조목조목 들이댔다.
구로시마 대좌는 도미오카 대좌의 반론을 꾹 참으면서 다 듣고난 후 야마모토 제독이 준 폭탄을 터뜨렸다.
"야마모토 대장은 그의 작전이 받아들여지기를 바라고 있다. 나는 만약 이 작전이 받아들여지지 않으면 연합함대 사령장관은 제국을 보위할 임무를 수행할 수 없다고 선언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그럴 경우 그는 자신의 모든 참모들과 함께 사임할 수 밖에 없을 것이다."
도미오카 대좌는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옆을 돌아보니 항공참모 미요 중좌도 충격을 받아 멍청한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 순간 도미오카 대좌는 문제가 자신의 능력을 벗어났다는 사실을 깨달았으나 정신을 가다듬고 불타버린 식량창고에서 온전한 낱알을 찾아내는 심정으로 연합함대에 3가지 약속을 요구했다.
1. 공격에는 오로지 6척의 항모만 투입하며 더 이상 요구하지 않는다.
2. 6척의 항모에 배치된 함재기 이외에 추가로 해군 항공력을 요구하지 않는다.
3. 공격이 끝나면 제1항공함대는 최대한 빨리 남방작전을 지원한다.
도미오카 대좌의 반응을 보며 여유를 찾은 구로시마 대좌는 웃으면서 알았다고 말했으나 도미오카 대좌는 문서로 만든 다음 한사코 서명을 요구했다.
우울한 표정으로 구로시마 대좌의 서명이 들어간 문서를 받아든 도미오카 대좌는 구로시마 대좌를 제1부장 후쿠도메 시게루 소장에게 안내했다.
제1부장실로 안내된 구로시마 대좌는 사임 이야기는 빼고 후쿠도메 소장을 설득하려 했으나 실패했고 다시 폭탄을 터뜨릴 수 밖에 없었다.
후쿠도메 소장의 반응도 도미오카 대좌와 비슷했다.
그는 구로시마 대좌를 데리고 3일 전인 10월 15일에 중장으로 진급한 이토 세이치 군령부 차장의 사무실로 갔다.
후쿠도메 소장의 설명을 들은 이토 차장은 즉시 도미오카 대좌를 부른 다음 셋이서 나가노 오사미 군령부 총장의 사무실로 갔다.
구로시마 대좌는 이토 차장의 사무실에서 결과를 기다렸다.
나가노 총장의 사무실에서는 후쿠도메 소장이 먼저 말했다.
그는 진주만 계획에 대한 연합함대와 군령부 사이의 토론 과정과 의견이 충돌하는 사안, 자신이 생각하는 진주만 계획의 문제점을 말한 후 연합함대 사령장관이 계획을 받아주지 않으면 사임하겠다며 위협하고 있다고 말했다.
이어서 이토 차장이 이제 결단을 내려야 할 시점으로 연합함대 사령장관이 사임하겠다며 위협하고 있는 사실을 중시해야 한다고 말했다.
도미오카 작전과장에게는 아무도 물어보지 않았으므로 잠자코 있었다.
말없이 후쿠도메 소장과 이토 중장의 말을 듣고난 후 나가노 총장이 무겁게 입을 열었다.
"야마모토는 이 문제에 대해 누구보다 깊게 연구했네. 그 친구가 그렇게 확신이 있고 성공을 자신한다면 승인하는 것이 최선이라고 생각하네. "
이어서 나가노 총장은 두 가지 조건 즉
1. 진주만 공격이 남방작전을 방해하지 않고
2. 남방작전에 필요한 해군 항공력을 약화시키지 않는다
는 조건을 붙여 작전을 승인했다.
야마모토 제독을 깊이 신뢰하던 나가노 총장으로서는 야마모토가 아닌 다른 사람을 연합함대 사령장관 자리에 앉혀놓고 개전한다는 것은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었다.
(군령부 총장 나가노 오사미 대장. 자세한 내용은 여기로)
세 사람은 총장실을 나와 차장실로 돌아왔다.
이토 차장이 작전이 승인되었다고 말하자 구로시마 대좌는 뛸듯이 기뻐했다.
구로시마 대좌는 들뜬 목소리로
"이제 연합함대 사령장관과 참모들이 모가지를 내놓지 않아도 되겠습니다."
라고 떨떠름한 표정을 짓고 있는 후쿠도메 소장에게 말했다.
이렇게 진주만 기습은 실행 50일 전인 1941년 10월 18일에야 최종 승인을 받았다.
구로시마 대좌가 승인 소식을 나가토에 알리자 연합함대 참모들은 환호성을 질렀으며 야마모토 제독도 기뻐했다.
야마모토 제독은 구로시마 대좌에게 수고했다면서 도쿄 올라간 김에 좀 쉬고 22일에 복귀하라고 말했다.
진주만 기습이 승인됨과 동시에 연합함대 참모들 사이에서 제1항공함대 사령장관 나구모 중장에 대한 비판이 일어났다.
연합함대 참모장 우가키 마토메 소장은 나구모 중장을 경질해야 한다고 주장했으나 야마모토 제독은 받아들이지 않았다.
교체하고 싶어도 마땅한 인물이 없었다.
제1항공함대를 이끌만한 인물은 오자와 지사부로 중장 밖에 없었는데 그는 진주만 기습의 최종 승인이 났던 10월 18일에 남견함대 사령장관으로 발령이 난 상태였다.
게다가 나구모 제독은 나가토 회의 이후 아무런 불평불만없이 진주만 기습 준비에 묵묵히 최선을 다하고 있었다.
사실 야마모토 제독은 진주만 기습부대를 직접 지휘하고픈 마음이 굴뚝같았으나 불가능했다.
일본해군의 실전부대를 총지휘하는 연합함대 사령장관으로서 그는 남방작전의 최종 준비 상황도 소홀히 다룰 수 없었을 뿐 아니라 일촉즉발의 긴장된 상황에서 하와이로 몰래 접근하느라 2주일 이상 무선침묵 상태를 유지할 수 있는 지위가 아니었다.
전시도 아닌 상황에서 2주일 이상 연합함대 사령장관같은 중요한 인물의 행방이 묘연하면 즉시 미군의 주의를 끌 것이었다.
결국 진주만 기습의 현장 지휘는 나구모 제독에게 맡길 수 밖에 없었다.
'1941년 및 그 이전 > 진주만 기습' 카테고리의 다른 글
진주만 기습(9)-출항 (0) | 2018.01.30 |
---|---|
진주만 기습(8)-훈련 (0) | 2018.01.29 |
진주만 기습(6)-전쟁연습 (0) | 2018.01.28 |
진주만 기습(5)-간첩활동 (0) | 2018.01.28 |
진주만 기습(4)-방어준비(2) (0) | 2018.01.2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