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전쟁연습(War Game)

 

1941년 4월 10일, 일본해군은 제1항공함대를 창설했다.

제1항공전대(아카기, 카가), 제2항공전대(소류, 히류) 그리고 제4항공전대(류조)로 이루어진 제1항공함대의 창설로 항모기동부대는 전함 중심 함대의 조연에서 벗어나 해전의 주역으로서 전략적 승리를 가져올만큼 강력한 항공력을 보유하게 되었다.

제4항공전대는 나중에 신예 항공모함 쇼가쿠와 즈이가쿠로 구성된 제5항공전대로 교체되며 이렇게 6척의 항모로 구성된 제1항공함대가 진주만을 기습한다.

 

제1항공함대 사령장관으로는 수뢰전 전문가로서 해군대학장이었던 나구모 주이치 중장, 참모장으로는 구사카 류노스케 소장, 그리고 항공참모로는 겐다 미노루 중좌가 임명되었다.

나구모 중장이 제1항공전대 사령관을 겸했으며 제2항공전대 사령관은 공격적인 야마구치 다몬 소장, 제5항공전대 사령관은 하라 주이치 소장이었다.

 

제1항공함대 사령장관 나구모 중장은 항공전에 대해 잘 몰랐으며 참모장 구사카 소장은 항공전에 대해 해박하다는 평을 듣고 있었으나 실제로는 실력이 모자랐다.

따라서 두 사람은 항공참모 겐다 중좌에게 의존했는데 게다가 나구모 사령관과 구사카 참모장은 진주만 기습에 반대하는 입장이었다.

그들이 보기에 진주만 기습은 지나치게 모험적이었다.

결국 겐다 중좌가 제1항공함대 내에서 야마모토 제독을 대리하여 진주만 기습 준비를 이끌었으며 그 과정에서 영향력이 더욱 커졌다.

 

제1항공함대 창설과 함께 연합함대 참모장도 후쿠도메 시게루 소장에서 이토 세이치 소장으로 바뀌었다.

후쿠도메 소장은 군령부로 옮겨가 작전을 담당한 제1부장이 되었다.

이토 소장도 1941년 8월 1일에 우가키 마토메 소장에게 연합함대 참모장 자리를 넘겨주고 9월 1일에 군령부 차장이 되었다.

후쿠도메 소장과 이토 소장은 연합함대 참모장 시절부터 진주만 기습을 내심 반대했으며 군령부에 들어간 이후 공공연하게 반대한다.

 

따라서 1941년 9월 중순의 전쟁연습 때가 되어서야 군령부가 연합함대의 진주만 기습 계획을 알았다고 하는 주장은 사실이 아니다.

실제로 야마모토 제독이 진주만 기습에 대한 자신의 구상을 군령부에 정식으로 알린 것은 1941년 4월 말이었다.

연합함대 선임참모인 구로시마 가메토 대좌가 군령부 제1부 작전과장인 도미오카 사다토시 대좌를 찾아와서 진주만 기습에 대해 설명하고 군령부에서 심도있게 검토해 주기를 요구했다.

 

도미오카 대좌는 거부했다.

그가 생각하기에 일본해군의 제1목표는 자원이 풍부한 남방지역을 점령하는 것이었으며 여기에 전력을 집중해야 했다.

하와이에서 출격하는 미함대는 전통적인 방식대로 잠수함과 항공기로 세력을 깎아먹은 후에 함대결전으로 섬멸하면 될 것이었다.

 

도미오카 대좌와 구로시마 대좌는 치열하게 토론했으나 결론을 내지 못하고 서로 상대방의 사고방식을 어리석다고 생각하면서 토론을 마쳤다.

구로시마 대좌가 돌아가자 도미오카 대좌는 나가노 군령부 총장에게 보고했으며 이로써 야마모토 제독은 진주만 기습 계획을 군령부에 알린다는 목적을 달성했다.

 

일본해군의 전쟁연습(war game)은 통상 11월 말에서 12월 초에 걸쳐 실시했으나 개전 시점을 11월 말 정도로 예상하고 있던 야마모토 제독은 군령부에 전쟁연습을 9월로 당겨달라고 요청했다.

1941년 8월 7일, 구로시마 대좌가 연합함대 참모들과 함께 군령부를 찾아와 작전과장 도미오카 대좌에게 전쟁연습을 앞당겨 줄 것과 전쟁연습에 진주만 기습을 포함시켜 줄 것을 요구했다.

도미오카 대좌는 요구를 받아들였으나 이것이 곧 군령부가 진주만 기습에 찬성한다는 뜻은 아니었다.

실제로 이날 군령부에서는 구로시마 대좌가 이끄는 연합함대 참모들과 도미오카 대좌가 이끄는 군령부 작전과 참모들 사이에 진주만 기습을 두고 열띤 토론이 벌어졌다.

 

구로시마 대좌는 일본연합함대와 미국태평양함대의 전력을 비교해 보았을 때 일단 남방작전이 시작되면 연합함대가 남방작전을 뒷받침하면서 동시에 일본군의 옆구리를 노리는 태평양함대를 상대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지적했다.

따라서 개전과 동시에 진주만을 기습하여 6개월 이상 태평양함대를 전장에서 쫓아내야 한다고 주장했다.

 

여기에 대해 도미오카 대좌는 조목조목 반박했다.

 

1. 진주만 공격은 기습이 필수적인데 장거리를 항해하는 커다란 항모기동부대를 숨기기는 어렵다.

하와이로 접근하는 도중 많은 항공기나 배들이 보게 될 것이며 설령 이들을 피한다고 해도 미군의 장거리 정찰에 걸릴 확률이 높다.

전쟁이 예상한 날짜인 X 데이에 벌어진다는 보장도 없으며 진주만 공격부대가 하와이로 접근하는 도중에 태평양 지역의 미군과 일본군 사이에 우발적인 충돌이라도 벌어지면 하와이의 경계가 강화될 것이다.

 

2. 다른  배나 비행기를 피하려면 북태평양으로 가야 하고 그러려면 해상급유가 필요하다.

그러나 일본해군은 해상급유의 경험이 적으며 늦가을 이후 북태평양에서 해상급유가 가능한 날은 1달에 7일 밖에 되지 않는다.

 

3. 함재기가 진주반 상공에 도달했을 때 미군함정들이 모두 항 내에 있으리라는 보장이 없다.

 

4. 기습에 성공해도 큰 성과를 거두기 어렵다.

진주만 상공은 함정을 공격하려는 항공기가 기동하기에 협소하다.

또한 수심이 얕아 대형함 공격에 효과적인 어뢰를 쓰기 어렵고 수평폭격은 명중율이 낮으며 명중율이 높은 급강하 폭격은 전함의 갑판을 뚫을 수 없다.

 

5. 남방작전을 지원해야 할 지상발진항공기 세력이 약하기 때문에 항공모함들도 남방지역에 대한 상륙작전을 지원해야 한다.

 

6. 항공모함들이 진주만을 기습하지 않고 남방작전에 투입되어도 함대결전을 준비할 시간은 충분하다.

전쟁 발발시 진주만을 떠난 태평양함대는 필리핀으로 직행하지 않고 자신들의 후방 보급로를 위협하는 마셜제도를 먼저 공격할 것이다.

따라서 하와이 부근에 깔아놓은 잠수함으로부터 미함대가 진주만을 떠났다는 경보를 받고 준비를 시작해도 마셜제도를 경유한 미함대가 필리핀에 접근하기 전에 함대결전을 위한 준비를 갖출 수 있을 것이다.

일본해군은 이런 상황에 대비하여 지난 20년간 피땀을 흘리며 훈련해 왔다. 

 

이로써 군령부가 진주만 기습을 반대한다는 점이 명확해졌다.

 

1941년 9월 초에 제1항공함대의 기함인 아카기에서는 진주만에 접근하는 경로를 두고 토론이 벌어졌다.

항공참모 겐다 중좌는 남방항로, 중앙항로, 북방항로의 3가지 경로를 제시했다.

 

남방항로는 세토 내해의 하시라지마를 출발한 함정들이 마셜제도의 웟제 환초에서 집결한 다음 남쪽으로부터 하와이에 접근하는 코스였다.

잇점은 날씨가 좋으며 웟제 환초에서 급유를 받을 수 있어 해상급유 없이 공격이 가능했다.

또한 일이 잘못되어 미함대와 해상전투를 벌일 경우 마셜환초에 전개한 지상발진 항공기들의 지원을 받기 쉬웠다.

단점은 하와이 남서해역이 태평양 함대의 훈련 해역으로 정찰이 엄중하여 훈련 중인 미함정들을 만나거나 정찰기에 들킬 위험이 많았다.

 

(서태평양. http://classroom.mapshop.com/HISTORY/US/World-War-II-Pacific.asp

 

중앙항로는 요코스카나 하시라지마를 출발한 함대가 오가사와라 제도의 치치지마에서 집결한 후 미드웨이 북쪽 800km 해역을 통과하여 하와이 북쪽에 도달한 다음 남진하는 코스였다.

이 항로는 북방항로처럼 해상이 거칠지 않고 남방항로와 달리 미해군의 훈련 해역을 통과하지 않았다.

그러나 치치지마에 급유 시설이 없어서 해상급유가 필요했고 오가사와라 제도를 감시하는 미국 잠수함이나 미드웨이의 미군 항공기에게 들킬 확률이 높았다.

 

북방항로는 일본에서 출발한 함정들이 쿠릴 열도에서 모인 다음 북태평양을 건너 북쪽으로부터 하와이로 접근하는 코스였다.

장점은 민간선박이나 항공기의 항로로부터 비껴나 있고 미군의 정찰도 허술하여 들킬 위험이 적다는 것이었다.

문제는 해상급유가 필요했는데 늦가을과 겨울에는 해상이 거칠어져 급유 가능한 날이 1달에 7일 밖에 되지 않았으며 항해 또한 어려웠다.

 

나구모 제독은 해상급유가 필요없고 날씨가 좋으며 유사시 마셜 제도에 전개한 지상발진항공기의 도움을 받기 쉬운 남방항로를 선호했다.

반면 겐다 중좌는 들킬 위험이 적은 북방항로를 선호했다.

 

이러한 차이는 기습의 중요성에 대한 인식 차이이기도 했다.

나구모 제독은 대규모 함대가 완전 기습을 가하기는 어렵다고 보고 들킬 위험이 다소 있더라도 공격부대가 온전한 상태로 하와이에 도달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반면 겐다 중좌는 기습이야말로 진주만 공격의 핵심으로 들킬 위험을 낮출 수 있다면 거친 날씨와 해상 급유의 어려움을 감내해야 한다고 믿었다.

 

나구모 중장이 늦가을과 겨울에 북방항로가 얼마나 험난한지, 그리고 거친 해상에서 해상급유를 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 강조하자 겐다 중좌는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제독님께서 북방항로를 나쁘다고 생각하신다면 미국 제독들도 똑같이 생각한다는 점을 기억하셔야 합니다."

 

제1항공함대의 참모장 구사카 소장이 겐다 중좌에게 동조하면서 군령부에서 실시할 전쟁연습은 북방항로로 실시하기로 결정되었다.

 

도쿄에 있는 해군대학에서 벌어지는 일본해군의 전쟁연습은 평소 11월 말에서 12월 초에 걸쳐 실시되었다.

전쟁연습에는 해군 내에서 잘 나가는 제독과 그 참모들이 참가했으며 그들은 오랜만에 동기를 만나 밤마다 술집에서 음주가무를 즐기면서 회포를 풀었다.

전쟁연습이 끝나면 곧 성탄절과 신정으로 이어졌는데 일찌기 서구화를 단행한 일본에서 성탄절과 신정은 서양 못지않게 큰 명절이었다.

이래저래 전쟁연습에 참가하는 사람들은 흥겨운 마음으로 참가하는 것이 일반적이었으나 1941년에는 달랐다.

무엇보다 날짜가 2달 정도 앞당겨진 9월 11일에 시작되었고 내용도 엄중하여 연습기간 중에 술을 먹거나 할 분위기가 아니었다.

 

첫날인 9월 11일 목요일은 오전 9시부터 오후 1시까지 참가자들끼리 전쟁연습을 위한 토론회를 하고 마쳤다.

다음날인 12일 금요일부터는 오전 8시부터 오후 5시까지 남방작전에 대한 전쟁연습이 주말도 없이 16일 화요일까지 계속되었으며 16일에는 마지막으로 진주만 기습에 대한 전쟁연습이 있었다.

 

전쟁연습은 일본해군을 뜻하는 청군과 연합군을 뜻하는 홍군으로 나뉘어 진행했다.

청군의 총지휘는 주로 총사령부의 참모장이 맡고 청군 단위 부대의 지휘관은 해당 부대의 참모장들이 맡았다.

홍군은 주로 대좌가 총지휘했으며 좌관급 장교들이 단위 부대를 지휘했다.

15일까지 전쟁연습은 말레이, 필리핀, 보르네오, 셀레베스, 길버트 제도, 괌, 웨이크에 대한 침공을 다루었으며 아직 세부 작전 계획이 나오지 않은 네덜란드령 동인도 제도는 제외했다.

 

특이한 것은 진주만 기습 계획의 수립에 큰 역할을 맡았던 오니시 다키지로 소장이 전쟁연습 이후 진주만 기습을 반대하는 쪽으로 돌아섰다는 점이다.

필리핀 침공을 지원하는 제11항공함대의 참모장으로 전쟁연습에 참가했던 오니시 소장은 거대한 작전의 규모에 비하여 제11항공함대의 전력이 부족하다는 사실을 절감했다.

특히 신예 전투기인 제로기가 부족했다.

오니시 소장은 필리핀 침공을 다룬 전쟁연습이 끝나자 항모기동부대가 하와이를 공격하는 대신 제11항공함대를 도와 필리핀 침공에 투입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마지막으로 9월 16일 화요일 아침부터 해군대학의 별실에서 진주만 기습에 대한 전쟁연습이 시작되었다.

이 연습은 다른 연습과는 달랐다.

원래 전쟁연습에서는 자기가 직접 관련되지 않은 작전도 참관할 수 있었으나 진주만 기습의 전쟁연습에는 작전에  직접 관련된 인물로서 야마모토 제독이 허가한 30명 정도의 인원만이 입실할 수 있었다.

이들은 대부분 진주만 기습에 참가할 지휘관과 참모, 대항군인 홍군을 담당한 장교들, 그리고 군령부를 대표하여 참관한 후쿠도메 제1부장, 도미오카 작전과장, 작전참모 사나기 사다무 대좌 그리고 항공참모 미요 다츠키치 중좌 등이었다.

재미있는 것은 진주만 공격부대의 지원대를 지휘할 제3전대 사령관 미카와 구니치 중장과  경계대를 지휘할 제1수뢰전대 사령관 오모리 센타로 소장은 이때서야 진주만 기습 작전을 알게 되었다고 한다.

 

전쟁연습을 앞둔 토론 시간에 나구모 제독이 북방항로 대신 남방항로를 제안했으나 제2항공전대 사령관 야마구치 소장을 필두로 모두들 반대하여 북방항로를 따라 전쟁연습이 시작되었다.

관례에 따라 청군은 제1항공함대 참모장 구사카 소장이 지휘했고 홍군은 군령부에서 정보를 담당하는 제3부의 정보과장 오가와 간지 대좌가 지휘했다.

공격 예정일은 1941년 11월 25일 새벽이었으며 청군의 항모는 4척이었다.

 

대항군인 홍군을 지휘한 오가와 대좌는 16일 오전의 전쟁연습에서 파란을 일으켰다.

홍군의 정찰기가 공격 전날 900km 거리에서 청군의 항모기동부대를 발견하자 오가와 대좌는 홍군함대를 모두 끌고 나오는 대신 함대는 정박시켜 둔 채 요격에 전념했다.

다음날 새벽에 항공모함에서 1시간 간격을 두고 출격한 청군의 함재기 제1파와 제2파는 진주만 상공에서 벌떼같이 달려드는 홍군의 요격기들을 만났다.

공격은 실패하여 청군은 공격에 나선 함재기의 절반을 잃으면서 홍군의 함대에 가벼운 손실만을 입혔다.

청군의 공격을 막아낸 홍군은 살아남은 항공기로 청군 함대를 역습하여 4척의 항모 중 2척을 격침하고 2척에 피해를 입혔으며 호위함정 몇 척을 격침했다.

청군은 참패했다.

 

오전의 실패를 거울삼아 오후의 전쟁연습에서 청군함대는 하와이 북방에 도착하는 시간을 조절했다.

오아후를 출발한 정찰기가 돌아갈 시간인 저녁에 하와이 북방 700km 거리에 도달한 청군함대는 밤새 남하하여 새벽에 공격대를 내보냈다.

이번에는 기습에 성공한 청군이 큰 전과를 거두었다.

청군은 항공모함 엔터프라이즈와 렉싱턴, 전함 4척, 순양함 3척을 격침하고, 항공모함 새러토가, 전함 1척, 순양함 3척을 대파했다.

또한 홍군의 항공기 50대를 격추하고 80대를 지상에서 파괴했다.

 

홍군을 지휘하던 오가와 대좌는 포기하지 않고 남은 항공기를 긁어모아 청군함대를 공격했다.

청군함대의 전투초계기들이 홍군 항공기 50대를 추가로 격추했으나 홍군은 항공모함 1척을 격침하고 1척을 대파하여 일부 원수를 갚았다.

이때 마침 스콜이 쏟아져 청군함대는 무사히 도망쳤다.

오가와 대좌는 갑작스런 스콜의 등장에 항의했으나 묵살되었다.

이로써 전쟁연습이 끝났다.

 

전쟁연습의 결과는 연합함대와 군령부 모두에게 불만이었다.

군령부는 전쟁연습이 해상급유의 어려움을 반영하지 않았으며 제로기 1대의 능력이 홍군 전투기 3대와 같다고 설정한 것은 지나치다고 생각했다.

특히 청군함대가 공습을 받을 때 마침 스콜이 쏟아져 도망칠 수 있었다는 결론에 어이없어했다.

야마모토 제독 또한 전쟁연습으로 군령부를 설득하려던 계획이 틀어졌다.

겐다 중좌는 하와이 상륙도 다룰 것을 주장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다음날인 17일에 벌어진 토론에서는 다양한 의견이 나왔다.

겐다 중좌는 항공모함이 모자라서 결과가 나빴다면서 만일 청군의 항모 숫자가 4척이 아니라 6척이었으면 훨씬 좋은 결과가 나왔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군령부는 설사 진주만을 기습하더라도 항공모함은 3척, 아무리 많아도 4척 이상은 안 된다고 맞섰다.

 

제3전대 사령관 미카와 중장은 전함 히에이와 기리시마 이외에 제3함대에 배속된 전함 공고와 하루나도 진주만 기습에 참가시켜야 한다고 주장했다.

여기에 대해 제3함대 사령장관 다카하시 이보우 중장이 강력하게 반대했으며 군령부의 지지를 받아 공고와 하루나를 지킬 수 있었다.

 

진주만 기습에 대한 토론회는 17일 오후 5시 30분에 참가자들이 저녁식사를 시작하면서 끝났다.

1941년의 전쟁연습이 공식적으로 끝난 것은 9월 20일 오후 5시 30분이었다.

 

군령부 제1부는 9월 28일에 연합함대 참모장 우가키 마토메 소장이 이끄는 연합함대 참모들 및 제1항공함대 참모장 구사카 류노스케 소장이 이끄는 제1항공함대 참모들과 함께 극비리에 진주만 기습 전쟁연습에 대한 토론회를 열었다.

제1부장 후쿠도메 소장의 개회사에 이어 양측은 불꽃튀는 설전을 벌였으나 서로의 의견 차이만 확인했을 뿐 결론은 나지 않았다. 

진주만 기습을 반대하는 군령부의 태도는 변한 것이 없었다.  

실제로 후쿠도메 소장은 전쟁연습이 끝난 직후 나가노 군령부 총장에게 진주만 기습에 반대한다는 의견을 올리고 동의를 받은 상태였다.

 

재미있는 것은 진주만 기습을 실행해야 할 제1항공함대 참모장 구사카 소장이 토론에서 진주만 기습에 반대하는 군령부 편에 섰다는 사실이다.

물론 제1항공함대의 항공참모 겐다 중좌는 연합함대의 항공참모 사사키 아키라 중좌와 함께 진주만 기습을 찬성하면서 토론에서 맹활약했다.

 

비밀 토론회의 결과를 보고받은 야마모토 제독은 불같이 화를 내면서

 

"그게 무슨 바보같은 모임인가? 그 입만 살아있는 놈들은 대체 무슨 생각이지? 도대체 누가 미함대를 절름발이로 만들어 놓지 않고서 남방작전이 가능하다고 단 1초라도 생각할 수 있단 말인가? 나는 연합함대 사령장관으로서 내 계획을 관철시키고야 말겠다!"

 

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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