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방어 준비(1) - 1941년 이전

 

1921년에 일본과의 조약에 의하여 하와이 서쪽의 기지들을 요새화할 수 없게 되면서 진주만의 가치가 올라갔다.

해군은 진주만을 일본과의 전쟁시 필리핀을 향하여 진격하는 함대의 출발지로 생각했으며 육군은 알래스카-하와이-파나마를 잇는 방어선의 중추로 생각했다.

그리하여 해군은 1938년까지 진주만을 개발하는데 75,000,000 달러를 투입했으며 육군은 진주만을 지키기 위한 방어시설에 해군보다 2배 이상의 예산을 투자했다.

전쟁성은 1935년부터 38년 가을까지 하와이 군관구에 장비 공급의 가장 높은 우선 순위를 부여했으며 병력도 1935년 여름의 14,821명에서 38년 여름에는  21,289명으로 40% 이상 증강했다.

하와이에서 육군의 임무는 오아후 섬을 지키는 것이었다.

 

1935년 9월에 하와이 육군사령관 휴이 드럼 소장은 하와이 주둔 육군의 전력을 강화하고 방어임무를 확장하기를 원했다.

그는 개발 중이던 B-17 폭격기 26대를 오아후 섬에 배치하고 하와이 섬과 카우아이 섬에 비행장을 건설하며 비행장 보호를 위하여 이 섬들에 병력을 주둔시키자고 주장했다.

드럼 소장은 전시에 하와이에 주둔할 100,000 명의 병력 중에서 23,000 명을 이들 섬에 배치하기를 원했으나 전쟁성과 해군은 반대했다.

 

다음 해인 1936년 말에 드럼 장군은 식량 보급을 위하여 하와이 제도의 다른 섬을 방어하자고 재차 주장했다.

오아후의 식량자급률은 15% 에 지나지 않으므로 미본토와의 보급이 끊어졌을 경우 다른 섬에서 식량을 생산하여 부족분을 메꿀 수 있다는 논리였으나 전쟁성과 해군은 또다시 반대했다.

 

반대의 근거는 진주만에 강력한 해군함대가 존재하는 한 하와이 전체가 안전하니 육군은 함대의 요람인 진주만을 지키는데 집중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 논리에서 진주만에 강력한 함대가 정박하면 일본이 감히 하와이를 공격하지 못할 것이라는 인식이 당시 미군에게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으며 이런 생각이 진주만 기습의 성공을 불러온 한 요인이었다. 

 

1938년 1월에 공병인 에드워드 마컴 대령이 하와이를 시찰하고 대통령과 전쟁성에 구두로 보고했다.

마컴 대령은 진주만의 방어 태세를 강화해야 할 필요가 있으며 오아후 섬을 지원하고 식량 확보를 위하여 하와이 섬과 카우아이 섬에 비행장을 만들자는 드럼 장군의 제안을 지지했다.

그는 또한 일본과 싸우게 되면 일본이 하와이를  공격할 가능성이 높다고 예견했다.

마컴 대령은 일본의 항공모함들이 북쪽으로부터 접근하면 탐지하기 어렵다고 지적하면서 일본 함재기들에게 대항하기 위하여 오아후 섬의 항공기 세력을 350대로 늘리고 장거리 정찰을 실시할 것을 권고했다.

마컴 대령의 권고는 유럽의 정세와 맞물려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독일의 위협이 증대되면서 1938년부터 미군의 관심은 대서양 연안과 라틴 아메리카로 이동했다.

 

전쟁성은 오아후 섬에 1개 사단이 이미 배치되어 있고 강력한 대공포와 해안포 세력이 있으며 1938년부터는 하와이 전대를 비롯한 함대 세력이 상주할 것이므로 적의 공격을 막는데 어려움이 없다고 평가했다.

다만 육군항공대의 항공기가 구식이며 세력이 빈약하다는 사실은 인정했다.

전쟁성의 항공위원회는 1939년 6월에 하와이의 항공기 숫자를 기존의 124대에서 전투기 140대와 폭격기 100대를 포함하여 256대로 늘리는 방안을 제시했다.

항공위원회는 또한 육군이 하와이 근해 1,600km 까지 장거리 정찰을 실시하는 방안도 제시했다.

 

드럼 장군을 이어 하와이 육군사령관이 된 찰스 헤론 소장은 1939년 9월에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신임 육군참모총장인 마셜 대장에게 보고서를 올렸다.

그는 적이 오아후 섬에 상륙해서 점령하기는 어렵다고 보았다.

헤론 장군은 오아후 섬이 항공모함에서 발진하는 함재기에 의한 공격에 취약하다는 점을 인정했으나 오아후를 공격한 적의 항공모함은 아군 폭격기의 반격을 받아 격침될 것이므로 적이 모험을 강행할 가능성이 낮다고 보았다.

2년 후 일본해군은 헤론 장군의 견해가 틀렸다는 것을 증명한다.

 

하와이에 대한 항공기 증원 계획은 축소되었다.

1939년 말에 전쟁성은 일본이 하와이를 공격하더라도 최대 2척의 항공모함만을 동원할 것으로 판단하여 전투기 122대와 중형 폭격기 68대면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일본이 하와이 공격에 2척 이하의 항모만을 동원할 것이라는 생각은 1941년 말까지 이어져서 진주만 기습의 또다른 성공요인이 되었다.

실제로 진주만 기습 직후에도 미군은 동원된 일본항모의 숫자가 2척이 넘는다는 사실은 알았으나 6척이라고는 상상하지 못했으며 3척 아니면 기껏해야 4척이라고 생각했다.

전쟁성과 하와이 육군 사령부는 또한 장거리 정찰은 해군 소관으로 규정하고 육군 항공기들은 해군의 장거리 정찰 능력을 증강할 필요가 있을 때에만 투입된다고 못을 박았다.

 

1940년 6월에 육군항공대의 54개 비행대 프로그램이 추진되면서 하와이의 육군항공세력도 전투기 세력을 좀 더 늘리고 중형 폭격기 68대를 중폭격기로 바꾼다는 결정이 내려졌다.

그러나 여전히 일본항모는 2척 이하로 올 것이고 장거리 정찰은 해군 담당이라는 인식은 여전했으므로 증원 속도는 느렸다.

1940년 말에 하와이의 육군항공기 숫자는 115대로 대부분 훈련에나 적합한 낡은 기종들이었다. 

 

1940년 5월 7일부터 태평양함대가 진주만을 모항으로 삼게 됨에 따라 진주만의 중요성은 더욱 커졌다.

육군은 함대가 진주만에 있는 한 하와이는 안전하지만 함대가 떠나면 일본군이 하와이를 공격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1940년 6월에 프랑스의 항복이 가까워지자 태평양함대가 대서양으로 가야할지 모른다는 위기감이 생겼다.

이러한 분위기 하에서 6월 17일에 육군참모총장 마셜 대장은 하와이 군관구와 파나마 운하 군관구에 경계 태세에 만전을 기하라는 전문을 보냈다.

 

(미육군참모총장 조지 마셜 장군. 자세한 내용은 여기로)

 

하와이 육군사령관 헤론 소장은 마셜 참모총장의 지시에 과도하게 반응했다.

그는 모든 감시소와 대공포에 24시간 인원을 배치했다.

대공포에는 실탄이 보급되었으며 비행제한구역에 들어오는 항공기는 무조건 격추하라는 명령이 떨어졌다.

히컴 비행장과 휠러 비행장의 항공기들은 분산되었으며 6월 21일에는 해군으로부터 해안 정찰 임무를 넘겨받았다.

폭동에 대비하여 오아후 섬의 일본계들은 엄중한 감시 하에 놓였다.

해군도 육군의 조치에 호응하여 하와이 근해의 정찰을 강화하고 제한적으로 장거리 정찰을 시작했다.

 

전쟁성은 하와이 군관구의 과도한 경계태세를 완화하라고 권고했으며 1달이 지나자 일본계에 대한 감시와 훈련을 겸한 해안정찰을 제외하고는 원래대로 돌아갔다.

해군은 장거리 정찰을 지속했으나 1940년 12월 말에 해군참모총장의 권고에 따라 정찰이 필요한 작전 해역을 제외하고는 장거리 정찰을 중단했다.

 

헤론 소장은 경계 기간 중에 대공포 요원의 부족을 실감하고 9월에 마셜 장군에게 대공포 요원의 증원을 요청했다.

이때 미국은 대서양 전투에서 중립인 척하는 상태에서 벗어나 노골적으로 영국을 편들기로 결정했기 때문에 일본에게 미국이 대서양을 중시하더라도 결코 태평양을 포기하지 않는다는 걸 보여줄 제스츄어가 필요했다.

루스벨트 대통령은 주방위군 1개 사단을 하와이에 파견하려고 했으나 헨리 스팀슨 전쟁성 장관이 반대했다.

대신 주방위군 소속의 제251대공포 연대가 1940년 겨울에 하와이로 파견되었는데 이 부대는 제2차 세계대전에서 최초로 미본토를 떠난 주방위군 부대였다.

 

1940년 말이 되었을 때 하와이 육군사령관 헤론 소장은 하와이의 방어태세에 비교적 만족했지만 대공포 부족을 염려했다.

그는 1940년 11월에 전쟁성에 제출한 보고서에서 오아후 섬에는 높은 고도로 비행하는 항공기를 공격할 대구경 대공포만 있으며 낮은 고도의 항공기를 공격할 소구경 대공화력이 부족하다고 지적했다.

Posted by 대사(P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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