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발상

 

1920년대 이래 미국을 상대하는 일본해군의 기본 전략은 점감 작전에 이은 함대결전이었다.

강력한 미함대가 동쪽으로부터 접근하면 잠수함들이 마셜 제도와 캐롤라인 제도의 지상발진 항공기들과 함께 전력을 깎아먹고 약해진 미함대가 결전장에 도착하면 전함을 중심으로 한 일본함대 주력이 나서 일격에 섬멸한다는 것이었다.

이러한 결전장으로는 필리핀 근해나 팔라우 제도, 오가사와라 제도 또는 마리아나 제도를 예상했다.

 

그러나 1939년 8월 30일에 연합함대 사령장관으로 취임한 야마모토 이소로쿠 중장은 이러한 전략에 의문을 품었다.(야마모토 제독은 1940년 11월 15일에 대장으로 승진했다.)

남방작전에 투입되는 육군 병력들을 수송하고 상륙시키고 보급하기 위해서는 해군 전력의 상당 부분을 할애해야 했는데 적의 공격을 기다려야 하는 수세적인 점감 요격 전법은 이러한 상황에 맞지 않았다.

그는 개전과 동시에 미태평양함대의 주력에 치명적인 선제 타격을 가하여 최소한 6개월 이상 서태평양에서 몰아낸 이후 남방작전에 전념하는 것이 낫다고 생각하여 진주만 기습을 계획했다.

 

(연합함대사령장관 야마모토 이소로쿠 제독. 자세한 내용은 여기로)

 

야마모토 제독은 조종사 출신이 아니었으나 해군항공병과와 인연이 있었다.

그는 1924년에 가스미가우라 훈련항공대의 부장으로 근무했으며 1933년에는 제1항공전대 사령관이 되었고 35년에는 해군성의 해군항공본부장으로 재직했다.

이러한 직책을 거치면서 야마모토 제독은 해군항공력의 커다란 가능성과 놀라운 발전속도를 알고 있었다.

 

야마모토 제독이 언제부터 진주만 기습을 계획했는지는 알 수 없다.

다만 1939년 11월 15일부터 41년 4월 10일까지 연합함대 참모장을 지냈던 후쿠도메 시게루 제독에 따르면 야마모토 제독이 처음으로 진주만 기습 이야기를 꺼낸 것은 1940년 4월 경이었다.

맑은 봄날에 뇌격기의 훈련 과정을 참관하던 야마모토 사령관이 후쿠도메 참모장에게

 

"항공기로 진주만을 공격하면 어떨까?"

 

하고 물었다.

사실 진주만을 항공기로 공격하는 안은 매년 연합함대 훈련시마다 참모들이 검토하던 사안이라 엉뚱한 소리는 아니었다.

다만 검토할 때마다 불가능이라는 결과가 나왔다.

일본해군은 진주만에 대한 실효성있는 공격은 잠수함에 의해서만 가능하다고 믿었다.

반면 미국은 진주만에 대한 항공공격이 가능하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으나 1941년 말의 시점에서 일본이 실제로 시도하리라고 믿지는 않았다.

 

이후 1940년 가을에 야마모토 제독은 후쿠도메 참모장에게 제11항공함대 참모장이던 오니시 다키지로 소장에게 진주만 기습에 대한 연구를 맡기고 싶다고 말했다.

야마모토 제독이 결심을 굳힌 것은 1940년 12월이었다.

그는 진주만 기습 직후인 1941년 12월 19일에 지인들에게 보낸 편지에서 진주만 기습의 결단을 1년 전인 1940년 12월에 내렸다고 적었다.

 

진주만 기습의 의도가 최초로 드러난 문건은 1941년 1월 7일에 야마모토 제독이 해상 오이카와 코시로 제독에게 보낸 편지다.

1964년에 초안이 발견된 이 편지에서 야마모토 제독은 진주만에 최대한 많은 함정이 몰려 있을 때 항공력을 사용하여 강력한 공격을 가한다는 구상을 밝히면서 공격을 가할 항공모함 기동부대를 자신이 직접 지휘하고 싶다고 적었다.

깨끗하게 정서한 편지는 발견되지 않았는데 야마모토 제독의 요청에 따라 오이카와 해상이 태운 것으로 보인다.

 

며칠 후 제11항공함대 참모장 오니시 다키지로 소장은 야마모토 제독으로부터 1통의 편지를 받았다.

3장으로 이루어진 편지에서 야마모토 제독은 오이카와 해상에게 보낸 편지와 같은 이야기를 하면서 극비리에 연구를 시작하라고 명령했다.

비록 오니시 소장은 지상발진항공대인 제11항공함대의 참모장을  맡고 있었지만 함재기 전술에도 정통했다.

오니시 소장은 1941년 1월 26일에 규슈 남부 아리아케 만에 정박한 연합함대의 기함 나가토에 승함하여 다음날까지 야마모토  사령관과 대화를 나누었다.

제11항공함대로 돌아온 오니시 소장은 뇌격 전문가인 참모 마에다 코세이 중좌를 불러 진주만에 정박한 함정에 대한 뇌격이 가능하냐고 물었다.

마에다 중좌는 현재 사용 중인 어뢰로는 수심이 얕아서 불가능하다고 대답했다.

 

오니시 소장은 작전 수립의 실무를 카가의 항공참모로 있던 겐다 미노루 중좌에게 맡기기로 마음먹었다.

그는 겐다 중좌를 가노야의 제11항공함대 사령부로 불러 야마모토 제독이 자신에게 보낸 편지를 보여 주었다.

편지를 읽어본 겐다 중좌는 진주만을 항공기로 공격한다는 야마모토 제독의 아이디어에 매료되었다.

작전을 입안해 달라는 오니시 소장의 요청을 받아들인 겐다 중좌는 카가로 돌아가 2주 동안 작전의 초안을 잡았다. 

비밀이 중요했으므로 아무에게도 알리지 않고 일과가 끝나면 밤에 혼자 작업해야 하는 고된 일이었으나 야마모토 제독의 아이디어에 흥분한 겐다 중좌는 놀라운 열정으로 임했다.

 

(겐다 미노루. 자세한 내용은 여기로)

 

1941년 2월 말에 겐다 중좌는 작전의 초안을 들고 가노야로 와서 오니시 소장에게 제출했다.

중요한 내용은 9가지로 다음과 같다.

 

1. 공격은 기습적으로 이루어져야 한다.

2. 주요 목표는 적의 항공모함이다.

3. 다음 순위의 목표는 오아후에 있는 적의 지상발진 항공기들이다.

4. 동원가능한 모든 항공모함을 투입해야 한다.

5. 공격에는 뇌격, 급강하폭격, 그리고 수평폭격을 모두 사용해야 한다.

6. 전투기도 공격에서 적극적인 역할을 해야 한다.

7. 공격은 낮에, 가능하면 새벽에 이루어져야 한다.

8. 해상연료보급이 필요하다.

9. 계획 단계에서 기밀유지가 필수적이다.

 

전체적으로 진주만 기습과 거의 비슷한 내용으로 진주만 기습의 실무 계획은 겐다 중좌가 만들었다고 할 수 있다.

겐다 중좌의 초안은 야마모토 제독이나 오니시 제독의 생각과 조금씩 다른 부분이 있다.

 

1번의 기습에 관해서는 이견이 없었다.

 

2번의 주요 목표에 대하여 야마모토 제독은 전함을 주장했으나 겐다 중좌는 항공모함을 지목했고 오니시 소장도 겐다 중좌에게 동조했다.

그러나 공격 당일 항공모함이 없었으므로 결국 주요 목표는 전함이 되었다.

 

3번의 두번째 목표에 대하여 오니시 소장은 지상발진항공기 대신 적 함대의 균형을 깨기 위하여 순양함을 주장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4번의 항공모함 숫자에 대하여 야마모토 제독은 2척, 많아야 4척을 투입하자고 주장했으나 겐다 중좌와 오니시 소장은 최소한 6척, 가능하면 더 많은 숫자를 투입하자고 주장했다.

 

5번의 공격방식에 대하여 야마모토 제독은 뇌격만을 주장했으나 겐다 중좌와 오니시 소장은 3가지 공격방식을 모두 동원할 것을 주장했다.

중요성에 있어서 겐다 중좌는 정확한 급강하폭격에 중점을 두었으나 오니시 소장은 전함의 상부 갑판을 뚫을 수 있는 위력을 가진 수평폭격에 중점을 두었다.

당시 겐다 중좌와 오니시 소장은 포드 섬 부근에 정박한 함정들에 대한 뇌격이 불가능할 것이라고 생각했으나 나중에 뇌격이 가능해짐에 따라 공격의 중점은 야마모토 제독의 생각대로 뇌격에 주어지게 된다.

 

6번의 전투기와 관련하여 야마모토 제독은 전투기없이 뇌격기만을 투입하여 왕복거리 바깥에서 발진시킨 후 항공모함은 철수하며 장거리 공습을 실시한 승무원들은 돌아가는 길에 해상에 불시착하여 잠수함으로 구조하는 방식을 제시했다.

겐다 중좌는 여기에 반대하고 공격대가 전투기의 호위를 받아야 하며 항공모함들이 함재기의 왕복거리 내로 접근하여 공격대를 모두 회수해야 하고 필요하면 반복 공격을 가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7번의 공격시간에 관하여 야마모토 제독은 뇌격기만으로 야간에 기습을 가하자고 주장했으나 겐다 중좌는 정확한 공격을 위하여 날이 어두울 때 발진하여 날이 밝아진 직후에 공격하자고 주장했다.

항구에 정박한 적 함대를 야간에 뇌격기만으로 공격한다는 야마모토 제독의 발상은 영국이 실시한 1940년 11월의 타란토 항 공습에서 큰 영향을 받았다.

 

8번의 해상연료보급은 이견이 없었다.

 

9번의 기밀유지도 이견이 없었으며 겐다 중좌는 만일 비밀이 새어나가면 공격 자체를 포기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진주만 기습의 초안을 보면 알 수 있듯이 겐다 중좌는 재기가 넘치는 장교였으나 동료인 후치다 미츠오의 평가대로 재기가 지나친 면이 있었다.

항공주병론자로서 전함을 혐오하던 겐다 중좌는 오니시 소장에게 진주만공격부대에서 전함은 빼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전함이 쓸데없이 커서 들킬 위험이 많으며 연료도 많이 든다고 주장했으나 오니시 소장은 전함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실제로 진주만공격부대에는 전함 히에이와 기리시마가 동행했다.

 

또한 겐다 중좌는 기습에 이어 육군을 상륙시켜 진주만이 있는 오아후 섬을 점령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기습을 받아 당황한 미군의 사기는 바닥으로 떨어질 것이므로 10,000 명 - 15,000 명 정도만 상륙시키면 오아후 섬을 점령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오니시 소장은 남방작전 때문에 그만한 수송선을 빼낼 수 없으며 설령 수송선과 병력을 확보한다고 해도 15,000 명으로 오아후 섬 점령은 불가능하다면서 거부했다.

 

오니시 소장은 겐다 중좌의 초안을 기본으로 자신의 안을 만들어 야마모토 제독에게 제출했다.

그의 제안은 오아후에 상륙하자는 등의 헛소리를 제외하고는 겐다 중좌의 것과 거의 비슷했다.

다만 오니시 소장은 진주만공격부대의 선도함정으로 잠수함이나 구축함이 아닌 상선을 사용하자고 제안했다.

상선은 미군에게 발견되어도 경계심을 일으키지 않는 반면 잠수함이나 구축함은 발견되면 경계심을 불러일으켜 결국 진주만공격부대를 찾아낼 것이라는 논리였다.

 

야마모토 대장, 겐다 중좌, 그리고 오니시 소장의 생각에서 공통점은 목표를 미태평양함대의 함정들과 오아후 섬의 항공기로 잡았다는 것이었다.

오아후 섬의 군사시설, 즉 연료저장고, 건선거, 공창, 잠수함 기지 등은 목표가 아니었다.

진주만 기습을 평가할 때는 이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1941년 4월부터 오니시 소장은 제11항공함대가 담당한 필리핀 공격에 깊이 관여하면서 진주만 기습 준비에서는 밀려나게 되었다.

따라서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진주만 기습에 관여한 인물은 야마모토 제독과 겐다 중좌만이 남았다.

 

야마모토 대장과 겐다 중좌는 커다란 지위 차이에도 불구하고 서로 잘 아는 사이였다.

겐다가 1933년 류조의 항공참모로 있을 때 류조가 소속된 제1항공전대 사령관이 야마모토 제독이었다.

당시 항공작전에 대하여 전대끼리 토론이 붙으면 어김없이 겐다 참모가 나서 맹활약했다.

야마모토 제독은 겐다 참모에게 감명을 받았으며 항공작전에 대해 제독끼리 토론할 때에도

 

"겐다가 그러는데 말이야.."

 

는 식으로 말했다고 한다.

 

야마모토 대장과 겐다 중좌는 잘 어울리는 한쌍이었다.

겐다 중좌는 뛰어난 기술적 지식을 가지고 있었다.

야마모토 대장은 철저한 계급 사회인 군대에서 일을 이루기 위하여 반드시 필요한 계급, 지위, 명성, 그리고 추진력을 가지고 있었다.

이러한 두 사람의 조합이 진주만 기습을 성공시켰다.

Posted by 대사(P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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