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방어준비(2) - 1941년

 

1941년 1월 27일에 미함대 총사령관 제임스 리처드슨 제독은 해군성에 편지를 보내어 진주만의 방어를 위하여 육군의 전투기 및 대공포 세력을 증강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해군성이 넘겨준 리처드슨 제독의 편지를 읽어본 전쟁성은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으나 육군참모총장 마셜 대장은 리처드슨 제독의 지적에 일리가 있다고 생각했다.

마셜 장군은 신형 P-40B 전투기 50대를 포함한 81대의 전투기를 오아후 섬으로 최대한 빨리 보냈다.

 

(커티스 P-40 전투기. 자세한 내용은 여기로)

 

그러는 동안 하와이에서는 지휘 계통의 변경이 있었다.

1941년 2월 1일에 허즈번드 킴멜 제독이 제임스 리처드슨 제독의 뒤를 이었으며 동시에 태평양에 전개 중이던 함정들은 태평양함대가 되었다.

1주일 후인 2월 7일에는 찰스 헤론 소장의 뒤를 이어 하와이 육군사령관에 월터 쇼트 중장이 취임했다.

 

이론적으로 진주만의 항구 시설을 비롯한 하와이의 해군 시설에 대한 방어는 제14해군관구의 책임이었다.

그러나 진주만 기습 당시까지 제14해군관구 사령관 클로드 블로크 해군소장은 방어부대를 보유하지 못하여 그의 권한은 진주만을 비롯한 해군기지에 대한 행정적인 임무에 국한되었다.

따라서 블로크 소장은 진주만 기습의 책임에서도 비껴났다.

블로크 소장은 1942년에 경질되었는데 이는 선배의 권위를 내세워 사관학교 후배지만 이제는 자신의 상관인 신임 태평양함대 총사령관 체스터 니미츠 대장에게 자꾸 훈수를 두려 했기 때문에 쫓겨난 것으로 진주만 기습에 대한 문책은 아니었다.

 

전통적으로 하와이의 미육군과 해군은 거의 협조를 하지 않았으나 1940년 5월에 태평양 함대가 진주만을 모항으로 삼게 되면서 협조가 불가피해졌다.

그리하여 당시 미함대 총사령관 리처드슨 제독과 하와이 육군 사령관 헤론 장군은 항공력의 운용에 대하여 협정을 맺었다.

즉 해군은 장거리 정찰과 함대의 안전을 위한 공중 초계를 담당하며 공격시에는 해군기와 육군기가 별도로 공격한다는 것이었다.

 

1941년 3월 28일에 킴멜 제독은 쇼트 장군 및 블로크 소장과 함께 전임자들의 합의를 바탕으로 좀 더 세밀한 협정을 맺었다.

 

1. 장거리 정찰은 해군 책임이며 만일 육군 항공기가 장거리 정찰을 지원할 경우 해군의 지휘을 받는다.

2. 오아후 섬의 육상 방어에 투입될 경우 해군기건 육군기건  모두 육군의 지휘를 받는다.

3. 해상의 목표를 공격할 경우 해군기건 육군기건 모두 해군의 지휘를 받는다.

 

1941년 봄의 훈련에서 이 방식은 성과를 거두었으나 진주만 기습은 비상시에 이렇게 느슨한 협조 체계가 무용지물임을 보여주었다.

 

1941년 3월 31일에 하와이 육군 항공대 사령관 프레드릭 마틴 소장과 해군 항공대 사령관 패트릭 벨린저 소장이 마틴-벨린저 보고서(Martin-Bellinger Report)를 공동작성하여 전쟁성과 해군성에 제출했다.

(벨린저 소장의 직함은 편의적 호칭이며 진주만 기습 당시 그는 9개의 직함을 가지고 이론상 5명의 직속상관에게 보고해야 했다. 진주만 기습 이후 그가 다양한 직위를 겸하고 있었다는 사실이 비판을 받았지만 본인은 업무에 지장을 받지 않았다고 주장했다. 중요한 임무를 맡은 장교가 관련된 여러 직위를 겸임하는 것은 흔한 일이며 명령계통을 단순화하고 책임소재를 명확하게 하기 위하여 불가피한 면이 있다.)

 

진주만 기습을 실제와 가장 비슷하게 예측하여 유명해진 마틴-벨린저 보고서의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다.

 

1. 일본은 오렌지 계획에 따른 아군함대의 반격을 좌절시키거나 최소한 늦추기 위하여 진주만에 정박한 아군함대를 공격할 수 있다.

2. 일본의 잠수함이나 항공모함들이 아군 정보기관이 경고를 발하기 전에 하와이에 도달할 수 있다.

3. 일본의 공격은 선전포고 이전에 이루어질 것이다.

4. 가장 가능성이 높고 위험한 공격은 항공기에 의한 공격이며 아마도 480km 이내로 접근한 1척이나 또는 그 이상의 항공모함에서 이함할 것이다.

5. 반복공격의 가능성이 있다.

6. 만일 공격을 시도하는 일본잠수함을 1척이라도 발견한다면 반드시 항모기동부대가 뒤따르고 있을 것이다.

7. 공습은 새벽에 시도할 가능성이 높으며 공습과 동시에 잠수함의 공격을 시도할 가능성이 높다.

8. 현재 오아후의 항공기 세력은 이러한 공습을 막기에 역부족이다.

9. 이러한 공격을 막기 위해서는 오아후 섬을 중심으로 360도 방향으로 매일 장거리 정찰을 실시해야 하며 이를 위하여 B-17 중폭격기 180대를 오아후 섬에 배치해야 한다.(당시 해군이 보유한 초계기는 69대였는데 이들은 함대 훈련시 따라나가 훈련 해역의 초계를 담당해야 했으며 승무원과 부품 부족으로 장거리 초계에 많은 댓수를 투입하기 어려웠다.)

 

마틴-벨린저 보고서가 놀라울만큼 정확하게 진주만 기습을 예견한 것은 사실이지만 바로 그 때문에 진주만 음모론의 단골 소재로 쓰였으며 그 과정에서 살이 덧붙여졌다.

가령 보고서에는 음모론자들이 주장하듯 일본항공모함이 북쪽으로부터 접근할 것이라는 내용이 없다.

만일 그런 내용이 있다면 360도로 장거리 정찰을 권고한 내용과 모순된다.

또한 음모론자들의 주장과 달리 보고서는 일본항공모함이 6척 이상의 대규모로 내습할 것이라고 예견하지 않았다.

오히려 '항모 1척을 동반한 고속함들'(fast ships by a carrier) 이나 '항모 1척 또는 그 이상'(one or more carriers) 등의 표현을 사용하여 1척 내지 2척 정도의 소규모로 사용될 것임을 암시하고 있다.

 

해군성은 마틴-벨린저 보고서를 환영했다.

반면 단지 정찰을 위하여 금쪽같은 B-17 폭격기 180대를 내놓으라는 요구에 직면한 전쟁성은 떨떠름하게 생각했지만 무시할 수는 없었다.

 

마셜 장군은 1941년 4월 말에 대통령에게 제출한 보고서에서 오아후의 육군 병력이 31,000 명이며 6,000 명이 곧 증원될 것이라고 적었다.

그는 또한 오아후의 항공기 세력을 P-40 전투기 105대, 기타 전투기 65대, 중폭격기 35대, 중형폭격기 35대, 경폭격기 13대로 늘릴 것이라고 보고했다.

마셜 대장이 오아후에 대한 적의 위협을 평가하면서 마틴-벨린저 보고서와 달리 1. 파괴활동(sabotage) 2. 항공모함에 의한 공습 3. 상륙으로 우선 순위를 매긴 것이 눈길을 끈다.

그는 오아후의 육군 병력은 이미 1과 3에 대처하기에 충분하며 계획대로 항공기들이 배치되면 2에 대한 방어도 충분할 것이라고 보고했다.

 

항공기 증원은 지지부진했다.

마셜 장군이 대통령에게 제출한 보고서에서 언급한 35대의 B-17 폭격기는 1941년 4월 말까지 도착하기로 되어 있었으나 실제로는 5월 중순에야 도착했으며 그나마 약속한 35대 중에서 14대는 대서양으로 돌려지고 21대만 도착했다.

 

7월 초에 전쟁성은 하와이 육군항공대 사령관 마틴 소장에게 B-17 폭격기가 실제로 몇 대나 필요하냐고 물었다.

당시 미육군항공대와 전쟁성은 B-17 폭격기의 위력을 과대평가하여 35대로 이루어진 1개 폭격비행대가 6척의 항공모함과 맞먹는다고 계산했다.

마틴 소장은 마틴-벨린저 보고서에서 요구한 것과 마찬가지로 장거리 정찰을 위하여180대가 필요하다고 답했다.

전쟁성은 1년 후인 1942년 6월까지 최소 136대에서 최대 204대의 B-17 폭격기를 보내주겠노라고 약속했다.

 

그러나 현지 지휘관에게 듣기 좋은 말을 해주는 것과 절대적인 수량이 부족한 가운데 사방에서 서로 달라고 아우성치는 강력한 신형 중폭격기를 배분하는 것은 다른 문제였다.

오히려 1941년 9월 초에 하와이는 우선순위가 높은 필리핀에 9대의 B-17 폭격기를 빼앗기고 12대만이 남았다.

게다가 부품이 모자라서 절반 정도는 지상에서 부품 공급처 역할을 했고 마틴 소장은 가용한 B-17 폭격기로 승무원 훈련하기도 빠듯했다. 

진주만 기습 당시 오아후 섬의 B-17 폭격기는 12대였으며 6대만이 가용한 상태였다.

 

(보잉 B-17 플라잉포트레스 폭격기. 자세한 내용은 여기로)

 

전투기는 사정이 나았다.

진주만 기습 당시 오아후의 육군항공대는 마셜 장군이 보고서에서 언급한 숫자보다 단지 18대가 부족한 152대의 전투기를 보유하고 있었으며 2/3에 달하는 99대가 신형인 P-40 전투기였다.

그러나 역시 부품 부족으로 많은 전투기들이 부품공급처 역할을 해야 했으며 가용댓수의 대부분은 훈련에 투입해야 했다.

진주만 기습 당시 P-40 전투기 99대 중의 64대, P-36전투기 39대 중의 20대, P-26전투기 14대 중의 10대만이 가용한 상태였다.

 

항공기의 보호도 문제였다.

쇼트 중장은 1941년 2월에 부임하자마자 마틴 소장으로부터 항공기 보호를 위하여 항공기용 엄폐호가 필요하다는 보고를 받고 전쟁성에 예산 배정을 요청했다.

전쟁성은 1941년 5월에 253개의 엄폐호를 건설할 것을 허가했지만 예산 배정은 진주만 기습 때까지 없었다.

쇼트 중장은 1941년 가을까지 자체의 자원과 공병대를 동원하여 휠러 비행장에 85개의 엄폐호를 만들었다.

그러나 쇼트 중장은 11월 27일에 파괴활동에 의한 항공기 손실을 막기 위하여 항공기들을 한데 모아 경비하라는 명령을 내리면서 애써 만든 엄폐호를 무용지물로 만들었다.

 

항공기의 보호를 위해서는 엄폐호 못지 않게 여러 비행장에 분산하는 것이 효과적이었다.

육군은 1941년에 호놀룰루 동쪽의 동해안에 벨로우즈 비행장을 완성하여 전투기와 경폭격기용으로 사용했다.

오아후 섬 북쪽에는 연습용의 할레이와 비행장이 있었는데 지도에는 나오지 않았으며 따라서 진주만 기습 당시 일본기들도 존재를 몰랐다.

쇼트 장군은 또한 해군과 협의하여 해군 비행장의 활주로를 연장함으로써 유사시 중폭격기를 운용할 수 있도록 했다.

 

(오아후 섬. http://www.bouwman.com/world/Hawaii/Oahu-WWII.html)

 

전임 사령관들처럼 쇼트 중장도 오아후 이외의 섬에 비행장을 만들자고 건의했고 마틴-벨린저 보고서의 영향을 받은 전쟁성이 요청을 받아들였다. 

1941년 6월부터 중폭격기를 운용할 수 있는 비행장이 하와이 섬에 3개, 카우아이 섬에 2개 건설되기 시작했으며 몰로카이 섬과 라나이 섬에는 각각 1개씩 전투기 기지를 건설하기 시작했으나 모두 진주만 기습 때까지 완성하지 못했다. 

 

다른 섬에 비행장을 건설하면서 방어를 위하여 지상군도 파견했다.

쇼트 중장은 1941년 5월에 제299보병연대를 하와이 사단에서 분리했다.

제299연대의 1개 대대는 하와이 섬에, 1개 대대는 카우아이 섬에, 나머지 1개 대대는 마우이 섬과 몰로카이 섬에 분산 배치되었다.

이렇게 배치된 파견부대들은 하와이 군관구의 직속부대가 되었다.

 

(하와이 제도. http://www.antor.org/images/hawaii.jpg)

 

쇼트 중장은 대공방어의 중점을 대공포에 두었다.

1941년 9월에 작성된 전쟁성의 계획에 따라 오아후 섬에는 4개 대공포 연대가 배치되었으며 12월 말에 5번째 연대가 도착할 예정이었다.

편성표에 따르면 고고도 수평폭격기에 효과적인 3인치 대공포가 이동형 84문, 고정형 26문, 급강하폭격기나 저공으로 비행하는 적기에 유용한 37mm 대공포가 144문, 12.7mm 대공기관총이 516정에 달했다.

 

그러나 서류와는 달리  대공포 연대들은 형편없는 전력을 가지고 있었다.

진주만 기습 당시 실제로 배치된 대공화기는 3인치 대공포가 이동형 60문, 고정형 26문, 37mm 대공포가 20문, 12.7mm 대공기관총이 109정에 지나지 않았다.

 

게다가 37mm 대공포와 12.7mm 대공기관총의 탄약이 모자랐다.

37mm 대공포의 탄약은 진주만 기습 이틀 전인 12월 5일에야 충분한 양이 도착했고 12.7mm 대공기관총의 탄약은 진주만 기습 때까지도 모자랐다.

따라서 급강하 폭격기나 저공으로 공격하는 적기에 대한 사격 훈련이 부족했다.

 

탄약이 충분한 3인치 대공포도 문제가 있었는데 이동형의 경우 탄약을 탄약고에 보관했으므로 최소한 몇 시간 전에 경고를 받아야만 공습에 대응할 수 있었다.

포좌 주변에 탄약을 쌓아두고 있던 고정식 3인치 대공포 26문만이 기습에 대응하여 즉시 사격을 개시할 수 있었다. 

따라서 진주만 기습 당시 일본기들에게 반격한 것은 주로 함정의 대공화기들이었다.

 

하와이 대공방어의 가장 큰 문제는 레이더가 없다는 것이었다.

사실 워싱턴의 통신병과(Signal Corp)에서는 1939년 11월에 처음으로 하와이에 레이더를 설치하겠다는 계획을 세웠으나 여러가지 이유로 1년 6개월 이상 미루어지다가 1941년 7월이 되어서야 최초의 이동식 레이더인 SCR-270 1대가 오아후에 도착했다.

이후 9월까지 5대의 이동식 레이더가 가동을 시작했으며 진주만 기습 10일 전인 11월 27일에 6번째 레이더가 도착하여 오아후 북쪽의 오파나 스테이션에서 가동을 시작했다.

이 6번째 레이더가 진주만 기습 당일 접근하는 일본기들을 발견했다.

 

이동식 레이더의 성능 자체는 만족스러웠다.

1941년 11월 초에 실시한 시험 결과 이동식 레이더들은 오아후로 접근하는 함재기의 군집을 약 130km 전방에서, 그리고 폭격기 1대를 약 50km 전방에서 발견했는데 이만하면 만족스러운 성능이었다.

하지만 실제 운용에는 문제가 많았다.

레이더들은 초기형이라 부품의 수명이 짧았는데 예비 부품이 모자랐으며 안정적으로 전원을 공급할 이동형 발전기도 모자랐다.

따라서 하루 최대 4시간 이상은 가동할 수 없었으며 진주만 기습 때까지 훈련용으로만 사용했다.

 

SCR-270 보다 강력한 설치식 레이더인 SCR-271 3대도 1941년 11월 중에 도착했으나 이들을 설치해야 할 산봉우리에는 준비가 갖추어져 있지 않았다.

이유는 어처구니없는 것으로서 당시 미국 행정기관이 얼마나 천하태평이었는지를 보여준다.

 

일찌기 1941년 3월에 하와이 육군사령관 쇼트 중장은 레이더 기지로 하와이에서 가장 높은 지점인 오아후 북쪽 마우이 섬의 할레아칼라 산 정상을 비롯한 몇몇 곳을 점찍었는데 뜻밖의 장애에 부딪혔다.

국립공원관리청(National Park Service)이 제동을 걸고 나선 것이었다.

다급해진 쇼트 중장은 전쟁성에 도움을 요청했으나 전쟁성도 국립공원관리청을 설득하는데 실패함으로써 하와이 육군사령부는 산 정상의 풍광을 해칠 수 있다는 이유로 하와이 방어에 필요한 레이더 기지를 건설할 수 없었다.

따라서 1941년 11월에 그토록 기다리던 설치형 레이더가 도착했어도 설치할 수 없었다.

 

조기경보 및 요격체계는 레이더만 있다고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레이더가 적기를 탐지하면 즉시 정보센터로 전달되고 정보센터는 전투기와 대공포에 경고를 내린다.

또한 지휘관이 결정하면 정보센터가 요격기를 유도하며 대공포를 통제해야 하는데 항공기의 속력이 빠르므로 이러한 모든 절차는 최대한 빨리 이루어져야 한다.

 

요격사령부라고 불릴만한 이러한 시스템은 전에는 없던 것이었으며 만들려면 배워야만 했다.

1941년 늦은 가을에 하와이의 전투기들을 지휘하는 제14전투비행단(14th Pursuit Wing)사령관 하워드 데이비슨 준장이 통신장교들과 함께 워싱턴의 통신병과에 파견되어 요격사령부 만드는 법을 배웠다.

하워드 준장이 교육을 마치고 하와이로 돌아온 것은 진주만 기습 사흘 전인 12월 4일이었다.

따라서 진주만 기습 당시 접근하는 일본기들을 발견한 레이더 조작병들은 어디로 보고를 해야 하는지조차 몰랐다.

 

쇼트 중장은 1941년 10월 1일에 보병연대 4개를 가진 하와이 사단을 각각 3개의 연대를 가지고 11,000 명으로 이루어진 제24 및 제25보병사단으로 분리했다.

외곽의 섬에 분산배치된 제299보병연대는 사단에 소속되지 않고 군관구 직할 병력으로 남았다. 

 

1941년 한해 동안 하와이에 주둔하는 육군 병력은 28,798 명에서 43,177 명으로 크게 늘었으며 하와이는 미국의 해외기지 중 최대 규모였다.

늘어난 병력 중 절반 정도는 많은 일본계를 포함하여 하와이 현지에서 뽑았으며 절반 정도는 미본토에서 건너왔다.

하와이에서 뽑은 병력이든 미본토에서 건너온 병력이든 모두 훈련이 필요했으므로 1941년 내내 하와이 군관구는 미본토와 마찬가지로 훈련에 힘을 쏟았다.

 

마셜 장군은 1941년 9월 22일에 루스벨트 대통령에게 제출한 보고서에서 평화시 하와이의 육군병력 상한선을 42,000 명으로 잡았으며 전쟁이 발발하면 즉시 17,300 명을 증원하고 전시에는 68,000 명을 유지하겠다고 적었다.

 

이보다 5일 앞선 1941년 9월 17일에 전쟁성이 작성한 하와이 방어계획을 보면 진주만 기습이 성공한 이유를 알 수 있다.

여기서 전쟁성이 예상한 위협 순위는 다음과 같다.

 

1. 잠수함에 의한 뇌격 또는 기뢰 설치

2. 파괴행위

3. 기뢰, 항공기 또는 수상함정에 의한 상선 공격

4. 항공모함을 사용한 공습

5. 수상함정을 사용한 공격

6. 아군 함대의 부재를 틈탄 복합적인 공격

 

위협 순위를 보면 전쟁성이 5개월 전에 제출된 마틴-벨린저 보고서를 무시하고 있었다는 걸 알 수 있다.

 

전쟁성의 위협 평가에 따라 육군에게는 파괴활동에 대응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 임무가 되어 이쪽에 중점을 두었다.

해군 또한 육군과 생각이 비슷하여 접근하는 적의 항공모함을 포착하기 오아후 섬에서 800km 이상의 장거리 초계를 실시할 필요는 없다고 믿었다.

실제로 장거리 초계를 실시하고 싶어도 기체, 승무원, 부품이 모두 모자라는 것이 현실이기도 했다.

오아후 섬을 중심으로 매일 360도 장거리 정찰을 실시하기 위하여 마틴-벨린저 보고서에서 요구했던 B-17 폭격기 180대는 겨우 12대로 쪼그라들었으며 그나마 6대만이 가용한 상황이었다. 

결국 나름대로 노력했음에도 불구하고 미육군과 해군은 진주만 기습을 막지 못했다.

Posted by 대사(PW)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