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간첩 활동

 

하와이의 일본영사관은 설치된 이래 계속 간첩활동을 해왔다.

1940년 5월에 미함대가 진주만에 상주하게 되자 일본 외무성은 군령부의 요청에 따라 군지 기치 하와이 총영사에게 미함대의 규모, 배치 및 활동에 대하여 정기적으로 보고하라고 명령했다.

이러한 임무를 싫어했던 군지 총영사는 하와이 신문에 나온 내용만 모아 보고했는데 뜻밖에도 효과적이었다.

당시 하와이 신문들은 경쟁적으로 미함대의 규모, 숫자 및 활동에 대하여 보도했으며 친절하게도 개별 함정의 이름과 입출항 날짜까지 보도했다.

 

정보 수집에 소극적이었던 군지 총영사는 군령부의 요구에 의하여 1940년 9월 11일에 교체되어 귀국하고 부영사였던 오쿠다 오쿠지로가 총영사가 되었다.

보다 적극적이었던 오쿠다 총영사는 신문에만 의지하지 않고 영사관 직원을 시켜 정보를 수집하여 신문의 정확성을 검증하고 보도하지 않은 부분을 보충했다.

정보수집에 동원된 것은 총영사관의 요리사로서 일본의 해군사관학교인 에타지마 병학교에 입학했다가 체력이 딸려 중퇴한 39세의 세키 고이치였다.

일본 외무성에서 보내준 제인군함연감으로 미국 함정의 모습을 익힌 세키는 영사관 밖으로 나가 정보를 수집했다.

 

세키의 정보수집은 평범했다.

대부분의 경우 세키는 호놀룰루 시내에 있는 영사관 앞에서 택시를 잡아타고 진주만의 공창 쪽으로 가면서 차창을 통하여 정박 중인 미함정들을 살폈다.

공창 앞에는 노점이 허용되어 있었기 때문에 거기서 청량음료 한 잔을 마시면서 항내를 둘러보고는 다시 택시를 타고 나왔다.

가끔씩은 일본계 2세로 1935년부터 영사관에서 서기로 일하고 있던 리차드 미사유키 고토시도로가 모는 차를 타고 진주만의 동쪽에 있는 펄시티나 북쪽에 있는 아이에와에 가기도 했다.

하와이에서 태어나 자란 고토시도로는 영어가 유창하고 현지 물정에 밝아서 세키에게 도움이 되었다.

세키는 출입금지구역에 들어가지 않았으므로 그의 정보수집활동은 합법의 테두리를 벗어나지 않았다.

 

오쿠다 총영사는 신문에서 얻은 정보와 세키가 가져온 정보를 취합하여 보고서를 작성한 다음 암호실의 츠키카와 사이논에게 넘겼다.

츠키카와가 암호화한 보고서는 미국의 상업 통신망을 타고 일본 외무성을 거쳐 군령부에 도달했다.

 

미국은 1941년 들어서야 신문의 보도가 미함대에 위험하다는 걸 깨달았다.

1941년 2월 5일자 호놀룰루 스타 불리틴 지의 1면 제목이 '함대 주력, 출항하다.'(MAIN BODY OF FLEET TO SEA.)였다.

2월 10일에 해군장관 프랭크 녹스는 언론에게 군사기밀을 유지해 줄 것을 요청했으며 국민에게도 함정 승조원의 이동 상황에 대하여 알려고 하지 말아달라고 요청했다.

하와이에서는 제14해군관구 사령관인 클로드 블로크 소장이 스타 불리틴 지에 대하여 함대의 움직임을 보도하는 기사가 함대를 위험에 빠뜨린다면서 강력하게 항의했다.

이후 신문들은 자제하기 시작했으나 일본 영사관은 정보수집의 노하우를 터득하여 지장을 받지 않았다.

 

1941년 초가 되자 일본은 진주만의 미함대가 두 개로 나뉘어 하나는 해상에 하나는 항 내에 머무른다는 것을 알아내었으며 교대 시점이 매주 수요일이라는 사실도 파악했다.

이런 패턴은 이후 변하게 되지만 문제는 미해군이 일정한 패턴을 따라 행동하며 그 사실을 일본에게 들켰다는 사실이었다.

물론 평화시 훈련에 주력하는 함대가 일정한 패턴을 갖기 쉬운 면은 있었으나 그래도 함대 이동같은 중요한 문제에서 일정한 패턴을 따라 행동한다는 것은 피해야 할 일이었으며 미해군은 실수를 저질렀다.

진주만 기습 날짜인 12월 7일도 태평양함대의 패턴을 읽은 일본군이 가장 많은 함정이 항 내에 정박하는 일요일을 고른 결과였다.

 

1941년 3월 14일에 하와이 총영사로 기타 나가오가 부임했고 오쿠다는 원래 자리인 부영사로 돌아갔다. 

 

기타 총영사가 부임한 지 2주 후인 1941년 3월 27일에 모리무라 타다시라는 이름을 가진 29세의 풋내기 서기관이 니타 마루를 타고 호놀룰루 항의 8번 부두에 도착했다.

모리무라는 1만 7천톤급 대형 호화여객선인 니타 마루에서 1명 뿐인 1등 객실 손님으로서 부영사라는 직함을 사용했으며 항해 중에도 매일 선장과 함께 식사를 했기 때문에 항해 중에도 선내에서 유명했다.

당시 일본에서 하와이까지 1등 객실의 뱃삯은 2000엔으로 모리무라같은 하급 외교관의 10개월치 봉급에 해당했다.

더구나 기타 총영사가 니타 마루의 객실까지 찾아가서 모리무라를 영사관으로 데리고 와서 인사를 시켰다.

기타 총영사는 모리무라의 숙소로 단독주택을 배정했는데 독신의 풋내기 서기관에게 단독주택을 배정한 것은 유례가 없는 일이었다.

며칠 후 기타 총영사는 모리무라를 미국 측에 서기관으로 등록했다.

 

이후로도 모리무라의 행동은 의문의 연속이었다.

모리무라는 일본계 2세를 담당하는 부서에 배치되었는데 그곳은 이미 2명이 근무하고 있어 인원이 충분했다.

사실 모리무라는 담당 업무에 대하여 아는 것이 없었으며 배우려고 하지도 않았다.

아침에 출근하여 인사를 하고 외출해서는 퇴근 시간이 되어서야 영사관으로 돌아왔는데 안 돌아오는 날도 많았다.

 

영사관을 나간 모리무라는 신나게 놀았다.

아가씨들을 태우고 드라이브를 하고 보트를 즐겼으며 저녁에는 기타 총영사가 소개시켜 준 춘조루라는 일본 요정에 가서 게이샤들과 어울려 술을  마셨다.

기타 총영사는 모리무라에게 경고 한 번 하지 않았다.

 

그러자 영사관 내에 모리무라가 외무성 고관의 청탁으로 낙하산을 타고 내려왔다는 소문이 퍼졌다.

일본 영사관을 감시하던 미국 정보기관들도 새로 도착한 서기관이 일본 유력인사의 아들로 해외 근무 경력을 쌓기 위하여 하와이 영사관에 배치된 돈많고 놀기 좋아하는 한량으로 평가하고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다.

이것이야말로 일본 군령부가 바라던 바였다.

 

모리무라의 본명은 요시카와 다케오로서 고도로 훈련된 정보장교였다. 

하와이에 배치될 당시 29세였던 요시카와는 에타지마 병학교를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했으나 임관 직후 심각한 위장병으로 예편당했다.

실의에 빠져있던 그에게 인사장교가 와서 스파이를 뜻하는 정보장교가 되겠다면 해군에 자리가 있다고 권고하자 받아들였다.

정보를 담당한 군령부 제3부 제8과에 배치된 요시카와는 영어와 함께 필리핀, 괌 및 하와이의 미군에 대하여 4년간 집중적인 교육을 받아 태평양 지역의 미군에 대하여 웬만한 미군 장교보다 많은 지식을 가지게 되었다. 

요시카와는 이후 외무성에 파견되어 서기관으로 임명된 후 하와이 영사관으로 파견되었다.

 

(요시카와 다케오. 자세한 내용은 여기로)

 

하와이로 파견된 요시카와는 정보 수집의 핵심 인물이 되었다.

그는 주로 고토시도로와 함께 움직였으며 세키는 요시카와로부터 정보 수집 요령을 교육받고 따로 움직였다.

요시카와는 이동시 고토시도로의 37년산 포드 자동차 아니면 60세의 일본계 2세 존 요시게 미카미의 택시를 이용했다.

 

요시카와의 정보수집 방식은 겉보기에 세키와 큰 차이가 없었으나 효율적이었다.

그가 자주 가던 춘조루는 진주만 부근의 알레와 언덕에 있어서 2층에서는 진주만과 히컴 비행장이 한눈에 보였다.

비록 맨눈으로 보기에는 너무  멀었으나 2층에는 손님 누구나가 볼 수 있는 망원경이 있었다.

 

요시카와는 진주만 부근의 아이에와 언덕을 비롯하여 항만과 그 부근을 볼 수 있는 관측 포인트를 몇 군데 확보했다.

그는 관측 포인트들을 옮겨 다니면서 관찰했으며 아무리 좋은 포인트에도 연속하여 가지 않았다.

요시카와는 육안 관찰이 어려운 카네오헤 비행장을 관찰할 때 이외에는 주의를 끌 수 있는 쌍안경을 사용하지 않았으며 사진을 찍거나 스케치를 하거나 메모를 하지도 않았다.

그는 자신이 본 내용을 머릿 속에 기억했다가 숙소로 돌아와서 기록했다.

이렇게 만든 보고서를 1주일에 1번씩 기타 총영사에게 제출하면 암호화한 다음 도쿄에 타전했다.

 

요시카와는 미군 항공기의 출격 패턴을 관찰했는데 쌍안경을 사용하지 않아서 이륙한 항공기가 어디서 변침하며 어느 거리까지 정찰하는지 알 수 없었다.

그러나 항공기들이 오아후 섬의 북쪽으로는 좀처럼 날아가지 않는다는 것은 알 수 있었다. 

 

진주만의 북동쪽에는 펄 시티가 있었다.

이곳의 부두는 진주만과 포드 섬을 한 눈에 볼 수 있는 절호의 관측 지점이었으나 요시카와는 어떤 경우라도 1주일에 3회 이상은 부두에 가지 않았으며 갈 때마다 옷을 바꾸어 입었다.

요시카와는 이 부두에서 포드 섬의 전함들이 2열로 정박한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이 정보에 근거하여 일본은 진주만 기습시 바깥쪽의 전함들은 어뢰로 공격하고 안쪽의 전함들은 수평폭격으로 공격한다는 계획을 세웠다.

 

1941년 5월 12일 보고에서 요시카와는 전함들의 이름을 모두 확인했으며 유타는 단지 표적함일 뿐이라는 사실도 알아내었다.

다만 요시카와도 히컴 비행장 때문에 가려진 진주만 입구에 대잠망이 있는지 없는지는 알 수 없었으며 진주만의 잠수함들에 관해서도 몰랐다.

 

일본은 요시카와의 보고 덕분에 1941년 5월에 태평양함대 전력의 약 1/4 이 대서양으로 빠져나갔다는 사실을 알았다.

요시카와는 5월 23일에 전함 아이다호, 미시시피, 뉴멕시코가 사라졌다고 보고했으며 26일에는 경순양함의 숫자가 10척에서 7척으로 줄었다고 보고했다.

이 보고는 얼마 후 파나마 운하의 정보원으로부터 이들 함정들이 파나마 운하를 통과했다는 보고로 확인되었다.

 

같은 5월에 요시카와는 미해군이 마우이 섬의 라하이나 정박지를 포기했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일본은 전해인 1940년에 미해군이 수심이 깊은 라하이나 정박지를 포기했다는 정보를 입수했는데 이후 사용을 재개했는지 궁금해했다.

요시카와의 보고 덕분에 진주만 기습 당시 일본기들은 라하이나 정박지를 무시하고 오아후 섬에 전력을 집중할 수 있었다.

 

일본은 또한 미해군이 카네오헤 앞바다를 임시 정박지로 쓴다고 의심하고 있었다.

요시카와는 하와이 아가씨 2명과 함께 카네오헤 앞바다에서 뱃놀이를 했다.

이때 요시카와는 배 밑바닥에 설치된 유리를 통하여 수심을 살펴보고 커다란 군함들이 정박하기에는 카네오헤 앞바다의 수심이 너무 얕다는 것을 확인했다.

 

요시카와는 미군의 우려와 달리 하와이의 일본계가 전쟁시 일본을 지지하지 않을 것으로 보았다.

그는 보고서에서 하와이의 일본계를 '쓰레기' 라고 표현했다.

 

1941년 9월 24일에 일본 외무성은 진주만의 함대 정박 상황을 5개 구역으로 나누어 보고하라고 명령했다.

일본의 외교암호를 해독한 미 전쟁성은 이 명령의 의미에 대하여 고민했으나 미본토 서해안과 필리핀을 비롯한 태평양 각지에서 일본이 광범위하게 벌이고 있는 정보 수집 활동의 일부일 뿐 특별한 의미가 있는 것은 아니라는 결론을 내렸다.

요시카와는 이 명령에 따라 구역을 나누어 함정의 정박상황을 보고했다.

 

하와이의 일본 영사관은 외교 암호가 아닌 일본해군의 암호를 쓰고 있어서 미국이 해독을 하지 못하고 있었다.

진주만을 구역별로 나누어 보고하라는 내용을 해독한 것도 이 명령이 일본의 외교암호인 퍼플을 사용하는 워싱턴의 일본대사관으로 보내진 덕분이었다.

미국은 일찌기 1920년 이전부터 일본의 외교 암호를 해독했으나 1930년대 들어 암호 해독을 중단했고 그동안 일본은 암호를 개량하여 해독을 어렵게 만들었다.

그리하여 미국이 일본의 외교암호인 퍼플을 다시 해독하기 시작한 것은 1940년 8월부터였으며 일본해군의 암호인 JN-25b 는 진주만 기습 이후에야 해독하기 시작했다.

 

9월부터 요시카와는 공중에서도 간첩활동을 시작했다.

그는 게이샤 1-2명과 함께 로저스 비행장에서 비행기를 전세내어 오아후 상공을 날아다니면서 휠러 비행장, 히컴 비행장, 해병대의 에바 비행장 등을 관찰하고 격납고의 숫자를 세었다.

진주만 상공은 비행금지 구역이었으나 그는 부근을 날면서 군함들의 정박 상황과 포드 섬 비행장을 살필 수 있었다.

이 모든 걸 살펴보는데 20분이면 충분했다.

 

요시카와는 1941년 11월 15일부터 매일 진주만을 정찰하고 보고했다.

일본에 보낸 보고서에서 그는 함대가 주말에 항구로 돌아오며 많은 장교와 수병들이 상륙한다고 적었다.

 

11월 27일, 고토시도로는 요시카와의 명령을 받고 펄 시티의 부두에 가서 포드 섬에 엔터프라이즈가 정박 중인 사실을 확인했다.

다음날 엔터프라이즈는 웨이크 섬에 와일드캣 12대로 이루어진 제211해병전투비행대대(VMF-211)를 파견하기 위하여 출항했다.

진주만 기습 이틀 전인 12월 5일에 요시카와는 렉싱턴이 출항한 것을 확인했다.

렉싱턴은 미드웨이에 파견할 항공기들을 싣고 12월 5일 오전 8시 10분에 출항했다.

웨이크에 항공기를 파견한 엔터프라이즈는 진주만 기습 때까지 돌아오지 않았고 새러토가는 오버홀을 위하여 미본토 서해안에 있었으며 나머지 항공모함들은 대서양에 있었다.

이로써 미국의 항공모함들은 진주만 기습을 피할 수 있었다.

 

기습 전날인 1941년 12월 6일 오후 6시에 요시카와는 마지막 보고서를 기타 총영사에게 제출했고 총영사는 즉시 도쿄에 타전했다.

진주만에는 방공기구가 떠있지 않았으며 전함 부근에는 어뢰방지망이 없었다.

장거리 정찰은 이루어지지 않고 있었으며 함정들은 대부분 항 내에 정박하고 있었다.

물론 항공모함과 몇 척의 중순양함은 빠져나간 상태였지만 모든 것이 완벽할 수는 없었다.

마지막 보고 내용을 보면 요시카와나 기타 총영사가 진주만 기습을 알고 있었던 듯한 느낌이 들어서 흥미롭다.

 

요시카와는 진주만 기습 이후 영사관 직원들과 함께 억류되었으며 간첩 활동을 들키지 않은 채 1942년 8월 15일에 영사관 직원들과 함께 일본으로 추방되었다.

 

미국의 정보기관들은 언제나 하와이의 일본영사관이 간첩활동에 연루되어 있다고 의심했으나 1941년 당시에는 일본영사관이 보조적인 역할을 할 뿐 간첩망의 주축이라고 보지는 않았다.

그들은 일본계 지역 사회에 뿌리를 박고 대본영에 직접 보고하는 간첩망이 있다고 보았으며 이들의 목표가 일본계를 선동하여 폭동을 일으키거나 파괴활동을 하는 것이라고 믿어 하와이의 일본계 주민들과 지역 사회를 예의주시하고 있었다.

 

재미있는 것은 간첩 활동에서 가장 중요한 역할을 맡은 요시카와도 자신이 하와이 간첩망의 핵심인물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요시카와는 자신의 역할은 보조적일 뿐 하와이에는 자신도 모르게 활동하면서 대본영에 직접 보고하는 강력한 간첩망이 따로 있을 것으로 보았다.

 

실제로 군령부는 하와이에서 일본영사관과 관계없이 10명 정도의 간첩들을 직접 관리하고 있었으나 실상은 초라했다.

간첩들은 주로 전직 일본 해군장교들이었는데 기본을 망각하고 있었다.

세탁소 주인으로 위장한 간첩은 오아후를 방문한 자신의 옛날 부하였던 해군장교에게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경례를 받고 반말을 했다.

술집을 경영하던 간첩은 사무실 벽면에 자신이 일본해군의 정복을 입고 다른 장교들과 같이 찍은 기념 사진을 걸어두었는데 거기에는 장교들의 친필 사인이 들어 있었다.

양조장에 근무하던 간첩은 알콜 중독자로 술만 취하면 자신이 비밀임무를 수행 중인 해군장교라고 떠들었다.

그들은 미국 정보기관의 주시를 받고 있었으며 실적도 없었다.

결국 군령부는 1941년 10월 말에 간첩 활동을 중단하고 귀국시켰으며 이때 귀국하지 못한 간첩들은 진주만 기습 직후 체포되었다.

 

이들 중 베른하르트 오토 쿤이라는 독일인이 있었는데 독일해군 출신이었으며 1936년에 도쿄에서 군령부에 고용되어 하와이에 잠입했다.

쿤은 공작금으로 편하게 지내려는 사기꾼에 가까웠다.

군령부는 쿤에게 정착에 필요한 많은 돈을 주고 오아후 섬에 수년간 잠복시켰다가 결정적일 때 간첩으로 쓰려고 했다.

그러나 그는 현지에서 여러번 사업에 손을 댔다가 실패했을 뿐 아니라 부인 및 딸과 함께 사치한 생활을 하면서 돈을 탕진했다.

돈이 떨어지자 쿤은 일본영사관에 찾아가 공작금을 요구하여 아무것도 모르던 기타 총영사를 놀라게 만들었다.

기타 총영사는 쿤에  대해 외무성에 보고하면서 믿을 수 없다고 평가했으나 군령부는 쿤을 버리지 않고 다른 간첩들을 귀국시킬 때 쿤에게 14,000 달러의 거금을 주면서 11월부터 활동을 시작하라고 명령했다.

그러나 쿤은 미국 정보기관의 감시를 받고 있었으며 얼마 후 체포되었다.

 

결국 요시카와가 이끌던 일본영사관의 소규모 간첩단이 사실상 하와이에서 일본이 가진 간첩망의 모두였으나 그것으로 충분했다.

 

하와이의 미국 정보기관들은 1941년 11월 즈음부터 요시카와를 의심했으나 일본과의 외교 관계가 일촉즉발인 상황에서 확증도 없이 정식 외교관인 요시카와를 체포하거나 숙소를 압수수색할 수는 없었다.

일본 외교관들이 기회가 닿는대로 정보를 수집한다는 건 공공연한 비밀이었으며 그건 미국 외교관들도 마찬가지였다.

당시 FBI 는 불법적으로 하와이의 일본영사관과 그 직원들 및 일본계 지역사회의 전화를 도청하고 있었으나 체포될까봐 공포에 떨던 요시카와는 전화로 의심스러운 말을 흘릴만큼 어리석지 않았다. 

일본영사관은 진주민 기습 직전에 모든 서류를 불태우라는 명령을 받았으며 이때 요시카와는 자신의 간첩 활동을 증명할 서류들을 불태웠다.

미국 정보기관은 결국 요시카와를 잡지 못했다.

Posted by 대사(P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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