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 훈련
진주만 기습을 위한 제1항공함대의 훈련은 1941년 6월부터 시작되었다.
제1항공함대의 항공참모 겐다 미노루 중좌는 뇌격 훈련을 위하여 규슈 남단의 가고시마 만을 골랐다.
육지로 길게 들어간 만으로서 주변을 산이 둘러싸고 있고 만 가운데 섬이 있는 가고시마 만은 진주만을 닮았다.
(가고시마 만. http://en.wikipedia.org/wiki/Kagoshima_Bay)
(진주만. http://en.wikipedia.org/wiki/Pearl_Harbor)
진주만을 공격할 3가지 방법인 뇌격, 수평폭격, 급강하폭격 중에서 가장 문제가 되는 것은 뇌격이었다.
대형함을 공격하는데는 뇌격이 가장 효과적이었으나 문제는 진주만의 수심이 15m 정도로 얕다는 것이었다.
겐다 중좌는 위치에 따라 수심이 12m 정도인 곳도 있을 것으로 보았으며 따라서 항공기에서 떨어뜨리는 어뢰는 10m 이내로 가라앉아야 성공을 보장할 수 있다고 믿었다.
일반적인 생각과 달리 일본해군은 진주만 기습 때문에 항공어뢰가 얕게 주행하도록 하는 연구를 시작한 것이 아니다.
1939년 이전까지 일본해군의 항공어뢰 운용방식은 100m 높이에서 떨어뜨리는 것이었다.
그럴 경우 어뢰는 최소한 30m, 최대 100m 까지 가라앉았다가 상향으로 조정한 수평 방향타에 의하여 급격하게 부상하면서 적함에 명중했다.
이럴 경우 항주 거리와 부상 각도, 그리고 최초에 가라앉는 깊이에 따라 어뢰가 적함에 명중하기 전에 해면으로 튀어오르거나 아니면 적함 아래로 통과해버리는 일이 많았다.
따라서 일본해군은 어뢰를 얕게 가라앉힌 다음 천천히 부상시키면 명중율이 높아질 것으로 보고 연구를 시작했다.
1939년 중반에 일본해군의 기술자들은 착수시 떨어져나가는 나무판을 어뢰에 붙이면 가라앉는 깊이를 줄일 수 있다는 걸 알아내었다.
1940년 2월에 실시한 실험에서 100m 높이에서 떨어뜨릴 경우 어뢰가 가라앉는 깊이는 18m 까지 얕아졌다.
만일 항공기가 30m 높이에서 280km/hr 의 속력으로 어뢰를 떨어뜨릴 경우 70% 의 어뢰가 12m 밖에 가라앉지 않았다.
문제는 이렇게 얕게 가라앉은 어뢰는 똑바로 나아가지 못하고 비틀거린다는 것이었는데 기술자들은 이 문제를 해결하지 못했다.
1941년 중반에 겐다 중좌가 해군 기술자들에게 10m 이내로 가라앉는 어뢰를 요구했을 때 여기까지 진척되어 있었다.
겐다 중좌는 초저공에서 투하하는 방법을 제시했다.
2대의 뇌격기가 12m 라는 기록적인 저공으로 비행하면서 어뢰를 떨어뜨린 결과 1발은 10m 이내로 가라앉았으나 1발은 좀 더 깊이 가라앉았다.
일본해군의 기술자들은 혼신의 힘을 다하여 20m 높이에서 190km/hr 의 속력으로 떨어뜨릴 경우 12m 까지만 가라앉으면서 안정적으로 주행하는 91식 2형 항공어뢰를 개발했다.
겐다 중좌는 10m 를 고집했으나 여기까지가 한계였다.
문제는 새로운 어뢰의 생산 일정이 촉박하다는 점으로 해군함정본부는 첫 30발은 1941년 10월 15일, 다음 50발은 10월 31일, 마지막 100 발은 11월 30일이 되어서야 인도가 가능하다고 말했다.
연합함대와 군령부의 참모들이 매일같이 해군함정본부에 몰려가서 아우성을 친 결과 마지막 100발의 인도 시점을 11월 17일까지 앞당겼다.
수평폭격도 문제였는데 기존 폭탄으로는 미국 전함의 장갑판을 뚫기 어려웠다.
해군 기술자들은 나가토 급의 16인치 주포탄을 개량하여 22.8kg의 작약을 가지고 무게가 796.9kg 에 달하는 99식 80-3형 폭탄을 개발했다.
이 폭탄을 3,000m 높이에서 떨어뜨리면 미국 전함의 장갑판을 뚫을 수 있었다.
수평폭격의 낮은 명중율도 문제였다.
1941년 초반까지 일본해군의 폭격 대회에서 우승한 항공대의 수평폭격 성공율은 10% 정도였는데 이 정도로는 곤란했다.
돌파구를 뚫은 것은 아카기의 제3함상공격기 중대장인 후루카와 이즈미 대위였다.
1941년 4월에 9대로 이루어진 후루카와의 중대는 표적함으로 히로시마 만 내에 정박 중인 낡은 군함 셋츠를 3,600m 높이에서 수평폭격하여 모의탄 9발 중 4발을 명중시켰다.
모두들 처음에는 우연이라고 생각했으나 2번째 폭격에서는 3발, 세번째는 무려 5발을 명중시켰다.
후루카와 대위는 비결을 물어보는 겐다 중좌에게 이전에는 폭격수가 주도하는 폭격 과정에서 수동적인 역할에 머물렀던 조종사를 폭격에 적극 참여하도록 훈련시키는 것이 요점이라고 대답했다.
훈련 방법을 바꾼 이후 수평폭격의 성공율은 극적으로 높아져 33%에 달했다.
미해군에 따르면 진주만 기습에서 수평폭격의 명중율은 24% 로서 비록 기습에다가 고정 표적들이지만 실전임을 고려하면 대단한 명중율이었다.
1941년 8월 25일에 겐다 중좌는 친구인 후치다 미츠오 중좌를 아카기의 항공대장으로 끌어들였다.
이후 후치다 중좌는 제1항공함대 조종사들의 훈련을 총괄했으며 진주만 기습시에는 공격대를 총지휘했다.
이때를 전후하여 진주만 기습에서 공격대를 이끌 지휘관들이 결정되었으며 이들이 현장에서 훈련을 이끌었다.
(후치다 미츠오. 자세한 내용은 여기로)
제1항공함대의 함재기들이 모두 가고시마에서 훈련한 것은 아니었다.
가고시마에서 훈련한 것은 아카기 및 카가의 뇌격기 24대와 수평폭격기 30대, 합계 54대였다.
소류 및 히류의 뇌격기 16대와 수평폭격기 20대는 이즈미에서 훈련했으며 다른 항공대도 도미타카, 카사노하라, 사에키, 우사, 오이타, 그리고 오무라 기지에서 항공대 별로 훈련했다.
(뇌격과 수평폭격에 쓰인 기체는 모두 97식 항상공격기로서 뇌격기와 수평폭격기는 진주만 기습 당시 임무에 따라 붙인 호칭이다. 하나의 기체를 뇌격과 수평폭격에 모두 사용한 것은 미해군도 마찬가지이다.)
(나카지마 B5N 97식함상공격기. 자세한 내용은 여기로)
1941년 10월 2일에 제1항공함대 사령장관 나구모 주이치 중장은 제1항공함대의 항공모함 함장들과 항공대장들을 임시 기함으로 쓰고 있던 항공모함 카가로 불러들여 진주만 기습 계획을 공개했다.(아카기는 수리를 위하여 잠시 요코스카 해군기지의 건선거에 들어가 있었다.)
중좌들이던 항공대장들은 진주만 기습 계획을 모두 열렬하게 환영했으며 대좌들인 항공모함 함장들도 대부분 기뻐했다.
이날 이후 제1항공함대의 훈련은 진주만 기습에 특화되어 실시하게 되었으며 그 과정에서 후치다 중좌가 점점 큰 역할을 맡게 되었다.
10월 10일까지 신예 항공모함 쇼가쿠와 즈이가쿠로 이루어진 제5항공전대의 조종사들이 모두 훈련에 합류했다.
후치다 중좌는 1941년 10월 초에 97식 함상공격기 9대로 이루어진 함상공격기 중대들을 뇌격기 4대와 수평폭격기 5대로 분리했다.
기준은 뇌격으로 뇌격 실력이 뛰어난 4명을 뇌격대에 우선 배정하다보니 유능한 조종사들이 모두 뇌격대로 몰렸다.
그리하여 수평폭격을 담당한 조종사들은 낙담했으나 전쟁에서 그런 것까지 일일이 고려할 여유는 없었다.
제1 및 제2항공전대의 함상공격기 90대 중 40대가 전함 및 항공모함에 대한 뇌격을, 50대가 전함에 대한 수평폭격을 담당했다.
실력이 떨어지는 제5항공전대의 함상공격기들은 모두 수평폭격기로 비행장 폭격에 투입되었다.
제5항공전대의 급강하폭격기에게도 표적의 크기가 작은 함정 공격 임무 대신 비행장 폭격 임무가 부과되었다.
제1 및 제2항공전대의 급강하폭격기들은 원래 항공모함을 담당했으나 진주만 기습 당시 항공모함들이 없었으므로 주로 전함을 비롯한 함정을 폭격했으며 일부는 해군공창을 공격했다.
제로기들은 공격기들을 미군 전투기로부터 보호하는 이외에 비행장에 주기된 미군 항공기들이나 관제탑을 비롯한 비행장의 주요 시설물을 기총소사했다.
1941년 10월 초에 함상공격대가 뇌격대와 수평폭격대로 분리되면서 가고시마에서 훈련 중이던 제1항공전대의 뇌격훈련은 난이도가 부쩍 높아졌다.
포드 섬 주변에 정박한 함정들을 어뢰로 공격하려면 뇌격기들은 기중기를 비롯한 각종 장애물이 널린 부두나 육지를 지나 해면으로 20m 고도까지 급강하하여 해안에서 500m 떨어진 해역에 정박하고 있는 전함이나 항공모함에게 어뢰를 발사해야 했다.
가고시마에서의 뇌격 훈련은 이 상황을 가정하여 실시했다.
(진주만 기습 당시 뇌격기의 공격 경로. http://www.freeinfosociety.com/media.php?id=807)
뇌격기들은 우선 중대장기를 선두로 500m 간격으로 만의 남쪽에서부터 진입하여 만 가운데 사쿠라지마의 서쪽 기슭을 200m 높이로 통과했다.
만의 북쪽에 도달한 뇌격기들은 고도를 50m 로 낮추어 시코츠 강 하구에서 남서쪽으로 빙 돌아 가고시마 시가지의 서쪽에 도달한다.
여기서 동쪽으로 변침한 후 가고시마 시내를 40m 높이로 가로지른다.
해안에 인접한 야마가타야 백화점 상공를 통과하면 커다란 물탱크가 나타나고 이어서 해안이다.
뇌격기는 해안에 도달하면 300km/hr 의 속력을 유지하면서 20m 고도까지 급강하한 다음 해안에서 500m 거리에 설치한 부표를 향해 어뢰를 발사한 후 고도를 높여 남쪽으로 이탈한다.
깜빡 실수하면 바다에 추락하여 사망할 수 있는 위험한 훈련이었다.
가고시마 시민들은 40m 의 저공으로 차례차례 시내를 가로지르는 뇌격기의 폭음에 기겁했으며 양계장에서는 닭들이 놀라서 알을 낳지 않았다고 전해진다.
소류와 히류로 이루어진 제2항공전대의 뇌격대는 이즈미에서 훈련했는데 역시 실전을 상정하여 강도높게 훈련했다.
미해군에 따르면 진주만 기습에서 뇌격의 명중율은 55% 로 상당히 높다.
뇌격에 대한 커다란 걱정 중 하나는 함정 부근에 어뢰방어망이 쳐져 있는 경우였다.
겐다 중좌와 후치다 중좌가 아무리 머리를 쥐어짜도 어뢰방어망이 있을 경우 뇌격을 성공시키기 어려웠으나 그렇다고 뇌격을 포기하자니 수평폭격만으로는 충분한 전과를 기대할 수 없었다.
결국 두 사람은 어뢰방어망이 있을 경우 선두의 뇌격기가 돌입하여 자폭함으로써 방어망을 찢고 뒤따르던 뇌격기들이 어뢰를 발사하기로 결정했다.
그러나 태평양함대 사령관 킴멜 제독은 진주만에서 항공기에 의한 뇌격은 불가능하며 항행에 지장을 준다는 이유로 어뢰방어망을 치지 않았다.
급강하폭격기들도 역시 맹훈련을 하고 있었다.
일본해군의 교리에 따르면 급강하폭격기들은 4,000m 높이에서 강하를 시작하여 600m 높이에서 폭탄을 분리했다.
그러나 제1항공함대의 급강하폭격대장 에구사 다카하시 소좌는 명중율을 높이기 위하여 폭탄 분리 고도를 450m 로 낮추자고 제안했다.
이 제안이 받아들여짐으로써 급강하폭격의 정확도가 올라갔다.
Tora!Tora!Tora! 를 지은 마크 스틸에 따르면 진주만 기습에서 함정들을 노린 급강하폭격의 명중율은 약 20% 로서 실망스러운 수준이었는데 가장 큰 원인은 진주만 상공에 구름이 낮게 끼어 있었다는 것이었다.
전투기에 대해서는 상대적으로 훈련에 신경쓸 일이 적었으나 당시까지 생산량이 충분하지 못한 신예 전투기인 제로기와 뛰어난 조종사를 충분히 확보하는 것이 중요했다.
야마모토 대장이 제3항공전대(호쇼, 즈이호) 및 제4항공전대(류조)를 쥐어짜서 제로기와 조종사들을 제1항공함대에 배속하는 바람에 제3 및 제4항공전대는 전투기가 거의 없는 상태가 되었다.
이것으로 모자라자 요코스카 항공대에서 최고의 제로기 조종사들을 차출하여 제1항공함대에 배속하는 바람에 요코스카에서는 늘어난 조종훈련생들을 가르칠 교관이 부족하여 고생했다.
제로기 조종사의 배속 우선 순위는 제1, 제2 및 제5항공전대였으며 필리핀 공격을 지원할 제11항공함대는 그 다음이었다.
제1항공함대의 제로기는 1941년 11월 초에 정수를 맞추었다.
(제로기. 자세한 내용은 여기로)
1941년 10월 중순에 후치다 중좌는 진주만 공격 시간을 겐다 중좌가 정한 12월 7일 오전 6시 30분에서 오전 8시로 늦추었다.
하와이의 일출 시간은 6시 6분이었으므로 6시 30분에 진주만 상공 도달하려면 함재기들은 어둠 속에서 발진하여 오아후 섬까지 날아와야 했는데 후치다 중좌는 미숙한 제5항공전대 조종사들의 야간 이함 및 항법 능력을 신뢰하지 않았다.
겐다 중좌는 흔쾌히 동의하고 나구모 중장에게 허가를 받았다.
해상급유문제도 골칫거리였으나 1941년 10월 말에 돌파구가 열렸다.
일본해군은 북방항로를 해상급유없이 왕복할 수 있는 함정은 항공모함 카가, 쇼가쿠 및 즈이가쿠, 전함 히에이와 기리시마, 그리고 중순양함 도네, 치쿠마 등 7척이었으며 항공모함 아카기, 소류, 히류, 경순양함 아부쿠마 및 구축함들은 해상급유가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일본해군의 해상급유는 급유함이 앞장서고 전투함이 뒤따라가면서 호스를 연결하여 급유를 받았는데 문제는 적의 잠수함이 나타나서 급히 변침해야 할 경우였다.
이럴 경우 구축함이나 경순양함같이 작은 함정들은 호스를 연결한 채 급유함을 따라 변침할 수 있었다.
그러나 아카기같은 대형함은 선회반경이 급유함보다 크기 때문에 그럴 경우 호스가 끊어질 것이었다.
제1항공함대의 참모장 구사카 류노스케 소장이 이 문제를 해결했다.
아카기, 소류 및 히류의 설계도를 검토하고 실무자들과 이야기를 해 본 구사카 소장은 함 내의 공간에 연료를 추가로 실으면 해상급유 없이도 하와이까지 왕복할 수 있다는 결론을 얻었다.
문제는 이것이 함정의 안전규정에 어긋난다는 것이었다.
구사카 소장은 해군성의 안전담당관들을 압박해 달라면서 군령부에서 군비를 담당하는 제2부를 집요하게 물고 늘어졌다.
제2부는 구사카 소장의 요구를 거절했으나 10월 18일에 나가노 군령부 총장이 진주만 기습을 승인하자 태도가 바뀌었다.
군령부는 만일 문제가 생기면 책임을 질테니 예외를 인정해 달라고 해군성에 요청하여 동의를 받아내었고 이로써 구사카 소장은 연료를 항공모함 내부에 실을 수 있었다.
함 내부의 공간이라는 공간에 모두 드럼통을 꽉꽉 채우자 700톤의 연료가 더 들어갔다. (아카기의 연료 탱크에는 6,000톤, 히류와 소류는 3,500톤의 연료를 실을 수 있었다.)
여기에 함저의 균형탱크(trim tanks)에도 연료를 가득 채우자 아카기, 소류, 히류도 해상급유없이 하와이를 왕복할 수 있게 되었다.
그래도 경순양함 아부쿠마나 구축함들은 해상급유를 받아야만 했다.
구사카 소장은 1941년 10월 말까지 구축함 2척이 급유함 양옆에서, 그리고 1척이 뒤에서 급유를 받아 3척이 동시에 급유받는 방식을 시험하여 성공시켰다.
이로써 해상급유에 필요한 시간이 획기적으로 줄어들어 거친 북태평양에서 날씨가 반짝 좋아지면 재빨리 급유할 수 있게 되었다.
제1항공함대 사령장관 나구모 주이치 중장은 1941년 11월 3일 오후 1시 30분에 제1항공함대의 지휘관과 참모들, 그리고 조종사 모두에게 진주만 기습 계획을 공개했다.
모두들 기뻐했으며 특히 조종사들은 자신들이 맹훈련을 해야했던 이유를 알게되어 더욱 기뻐했다.
다음날인11월 4일부터 제1항공함대는 3회에 걸쳐 최종 리허설을 실시했다.
지금까지는 항공모함의 연료를 아끼기 위하여 지상에서 발진했으나 이날은 제1 및 제2항공전대의 함재기들이 항공모함에서 이함하여 대형을 짠 후 30km 전방까지 날아갔다가 돌아오면서 진주만의 미전함들처럼 줄을 맞추어 정박 중이던 연합함대의 전함 및 항공모함들을 상대로 모의 공격을 실시했다.(당시 제5항공전대의 함재기들은 규슈 북서부의 벳푸 부근에서 훈련 중이었으므로 리허설에 불참했다.)
다음날인 11월 5일에는 도중에 미군 전투기의 요격을 받는 상황을 가정하여 리허설을 실시했는데 제1항공함대는 9월의 전쟁연습 때와는 달리 요격을 받아도 만족스러운 전과를 올릴 수 있다는 결론을 내렸다.
11월 7일에는 마지막 리허설이 있었고 이후 평가가 이어졌다.
후치다 중좌는 여러 대의 항공기가 특정 함정에게 지나치게 몰리는 경향이 있다는 점을 발견하고 각각의 조종사들에게 보다 구체적인 목표를 지정했다.
가장 큰 문제는 20m 고도에서 떨어뜨린 어뢰의 40% 만이 12m 이하로 가라앉았다는 것이었다.
나머지는 대부분 15m 까지 가라앉았으며 몇몇은 20m 까지 가라앉았다.
겐다 중좌는 뇌격대를 지휘할 무라타 시게하루 소좌에게 문제 해결을 지시했고 무라타 소좌는 부하들을 이끌고 가고시마로 돌아가서 11월 11일부터 실험했다.
마침내 11월 13일에 무라타 소좌는 비결을 알아내었다.
투하고도 20m 는 맞았으나 속력이 너무 빨랐다.
투하 속력을 300km/hr에서 190km/hr 로 낮추자 82% 의 어뢰가 12m 까지만 가라앉아 안정적으로 주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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