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 출항
진주만 기습에 참가하는 세력 중에서 가장 먼저 출항한 것은 제6함대 소속 잠수함들이었다.
제6함대 사령장관 시미츠 미츠미 중장은 휘하 지휘관들을 1941년 11월 10일에 히로시마 만의 사에키 앞바다에 정박한 기함인 연습순양함 가토리 함상에 소집하여 작전 명령을 하달했다.
다음날인 1941년 11월 11일 오전 11시 11분에 미와 시게요시 소장의 제3잠수전대 소속 8척의 잠수함이 히로시마 만을 떠났다.
이들은 도중에 콰절린 환초에 들러 급유를 받은 후 존스턴 섬과 팔미라 섬 사이를 통과하여 7척은 오아후 섬 남쪽에 전개하고 I-74 함은 니하우 섬 부근에 전개할 것이었다.
I-74 함은 진주만 기습 당일 니하우 섬 부근에서 물에 떨어진 조종사들을 구조하고 공습으로부터 달아나려는 미함정들을 공격할 것이었다.
오아후 남쪽에 전개할 7척 중에서 I-72 함와 I-73 함은 마우이 섬의 서해안에 자리잡은 라하이나 정박지와 라나이 섬에 미함정들이 정박하고 있는지를 확인하여 통보해 주게 되어 있었다.
1941년 11월 16일에는 야마자키 시게키 소장이 지휘하는 제2잠수전대 소속 6척의 잠수함이 요코스카를 출항했다.
제2잠수전대는 미드웨이 북쪽을 통과하여 하와이의 북쪽에 도달한 다음 남하할 것이었다.
이들중 제7잠수대(I-1, I-2, I-3)는 오아후-카우아이 사이, 그리고 제8잠수대(I-4, I-5, I-6)는 오아후-몰로카이 사이에 전개하여 태평양함대의 움직임을 감시하고 공습 이후에는 해당 해역을 통과하는 함정들을 공격할 것이었다.
(진주만 기습 당시 일본잠수함의 전개 상황. http://www.i-16tou.com/stlou/stlou5.html)
같은 16일에 가야하라 야스차가 중좌가 지휘하는 I-10 함이 요코스카를 떠났다.
I-10 함은 남동쪽으로 가서 피지의 수바 항을 관찰하고 북동쪽으로 꺾어 사모아와 크리스마스 섬을 정찰한 후 하와이 동쪽, 샌프란시스코에서 남서쪽으로 1,700km 떨어진 해역에 잠복할 것이었다.
이곳에서 I-10 함은 하와이와 미서해안을 오가는 미국함정들의 움직임을 감시하고 공습을 받아 망가져서 미서해안으로 수리를 받으러 가는 함정들을 격침할 것이었다.
17일에는 진주만 공격부대의 전방에서 정찰하면서 나아갈 제1잠수전대 제2잠수대(I-19, I-21, I-23)가 이마이즈미 키지로 대좌의 지휘 아래 히도카프 만으로 출발했다.
18일 아침에는 갑표적을 싣고 갈 특별공격대의 잠수함 5척(I-16, I-18, I-20, I-22, I-24)이 사사키 한쿠 대좌의 지휘 아래 구레 군항을 떠나 가메가쿠비로 가서 갑표적 5척을 사령탑 뒤에 싣고 붕고수도를 빠져나갔다.
마지막으로 11월 19일에 요코타 미노루 중좌가 지휘하는 I-26 함이 출항했다.
I-26 함은 2주 전인 11월 6일에 완성되었으며 그를 비롯한 승조원들은 아직 함을 완전히 알지 못하는 상태였다.
해군에 들어온 이래 잠수함에서만 근무해왔던 요코타 중좌에게도 완성된 지 2주 밖에 되지 않은 잠수함을 타고 작전에 투입된 경우는 처음이었다.
I-26 함은 알류샨 열도로 나아가 미군 함정들의 움직임을 보고하고 진주만 기습 이후에는 미군 함정들을 공격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진주만 기습에 참가한 잠수함은 갑표적 5척을 포함하여 29척이었다.
1941년 11월 13일 오전 9시에 연합함대 사령장관 야마모토 이소로쿠 대장은 연합함대의 주요 지휘관들을 참모들을 모아 회의를 열고 연합함대 명령 제1호를 발령했다.
4일 후인 17일 오후 3시, 야마모토 대장은 히로시마 만에 정박 중인 아카기 함상에 올라 제1항공함대 및 예하 항공전대 수뇌부, 그리고 항공대의 장교 등 약 100 명에게 출항을 앞두고 마지막 연설을 했다.
연설문은 남아있지 않으나 사람들의 기억에 의하면 짧고 힘이 있으면서 감동적인 연설이었다고 한다.
야마모토 대장은 미해군을 얕보지 말 것을 당부하면서 적은 멍청이가 아니며 우리 계획을 탐지하고 기다릴 수도 있으니 이에 대해서도 대비해야 한다고 말했다.
적이 미리 알 수도 있다는 언급은 겐다 및 후치다 중좌에게 감명을 주었다.
야마모토 제독의 연설이 끝나자 일동은 만세삼창을 했다.
이어서 진주만 공격부대의 함정들이 출항하기 시작했다.
17일 오후 4시에 항공모함 소류와 히류로 이루어진 제2항공전대가 구축함 4척의 호위를 받으면서 히로시마 만을 출항했다.
제2항공전대는 세토 내해로 나와 붕고 수도를 통과한 후 시코쿠 남단을 돌아 북쪽 쿠릴열도 에토로프 섬의 히도카프 만으로 향했다.
사령관 야마구치 다몬 소장은 히도카프 만으로 가는 동안 대공포 연습을 시켰다.
또한 미군의 통신을 감청한 결과 미군 잠수함들이 필리핀 북방으로 진출한 것으로 보인다는 군령부의 경고에 따라 많은 수병들이 견시 임무에 투입되었다.
같은 날 항모 쇼가쿠와 즈이가쿠로 이루어진 제5항공전대는 규슈 북서부의 벳푸를 출발하여 역시 히도카프 만으로 향했다.
항공모함 아카기는 17일 저녁에 구축함 2척의 호위를 받으면서 히로시마 만을 떠나 북쪽으로 향했다.
항모 카가는 사세보로 가서 신형어뢰 100발을 실은 후 동료 항모들보다 하루 늦은 18일 오후에 구축함 2척의 호위를 받으면서 히도카프 만으로 출발했다.
수뢰국장인 츠치다 히사오 중좌가 혹시 있을지 모를 신형어뢰의 문제점을 해결하기 위하여 기술자들과 함께 동행했다.
제1 및 제2항공전대의 항공모함 4척에는 이들 이외에도 기술자들이 타고 있었다.
미국전함의 장갑판을 뚫기 위한 800kg 짜리 신형폭탄은 기존의 폭탄투하기와 맞지 않았는데 새로운 폭탄투하기를 만들어 공급할 시간이 없었으므로 기술자들이 항모 내에서 기존의 폭탄투하기를 개조했다.
어뢰와 폭탄투하기 문제 해결을 위하여 항모에 탑승했던 기술자들은 진주만 공격부대가 히도카프 만을 떠날 때 급유함에 옮겨진 다음 함대가 돌아올 때까지 히도카프 만에 머물러야 했다.
이외에 제3전대(히에이, 기리시마), 제8전대(도네, 치쿠마) 및 제1수뢰전대가 모두 18일 저녁까지 출항을 마쳤다.
야마모토 제독의 기함 나가토를 비롯하여 히로시마 만에 정박 중이던 연합함대의 함정들은 건투를 빈다는 발광신호를 보내면서 출항하는 진주만 기습부대의 함정들을 배웅했다.
진주만 공격부대에 앞서 포함 구나시리가 에토로푸 섬에 도착하여 통신장교에게 모든 통신을 차단하라고 명령했다.
이로서 에토로푸 섬의 전화, 전보 및 우편 서비스가 중단되었다.
연락선도 끊겼으며 개인적인 출입은 물론 어부인 현지 주민이 고기잡이 나가는 것마저 막았다.
진주만 기습 떄까지 에토로푸 섬의 주민들은 죄수처럼 옴짝달싹할 수 없었다.
야마모토 제독은 보안을 위하여 심혈을 기울였다. 일본을 떠날 때 항공모함들이 육상기지에서 훈련 중이던 함재기들을 싣고 빠져나가는 것과 동시에 인근의 항공기지에서 항공기들을 하루에 몇번이고 내보내어 비행횟수가 줄어든 것을 사람들이 느끼지 못하게 했다.
또한 시내에 수병들이 줄어들었다는 걸 눈치채지 못하도록 지상의 해군부대에서는 많은 수병들에게 외박을 허용했다.
진주만 공격부대는 출항과 동시에 무선침묵상태에 들어갔으므로 줄어든 통신량을 보전하기 위하여 가짜 통신을 내보냈으며 함대호출부호도 변경했다.
보안은 히도카프 만으로 향하는 진주만 공격부대 내에서도 철저하게 지켜졌다.
모든 함정에게는 통신을 내보내서는 안 된다는 엄격한 명령이 내려와 있었다.
많은 함정에서는 실수로 건드리는 일이 없도록 통신기의 키를 봉인했으며 일부 함정에서는 아예 키의 단자를 뽑아버렸다.
진주만 공격부대 내에서도 진주만 기습에 대해 알고 있는 것은 제1항공함대의 지휘관들과 참모들, 공습에 참가할 조종사들 뿐이었으며 호위부대나 경계부대에서는 사령관인 미카와 중장과 오모리 소장, 그리고 참모들만이 알고 있었다.
그외의 승조원들에게 행선지는 비밀이었으며 어디로 가는지 헷갈리도록 하기 위하여 하복과 동복이 동시에 지급되었다.
일본의 노력은 목적을 달성했다.
(조셉 로슈포트 중령)
미태평양함대의 전투정보실장 조셉 로슈포트 중령은 제1항공함대의 첫 리허설이 있던 1941년 11월 4일에 일본군의 암호통신에게서 '제1항공함대' 란 단어를 뽑아내었다.
태평양함대의 정보참모 에드윈 레이튼 중령은 이 단어를 보는 순간 지난 몇 개월간의 의문이 풀렸다.
원래 일본의 제1함대와 제2함대에는 항상 항공전대가 하나씩 붙어있었는데 1941년 여름부터 사라졌다.
일본인의 작명 성향에 비추어 볼 때 제1항공함대는 항공전대의 집합체이며 이는 제1 및 제2함대에서 사라진 항공전대들이 제1항공함대를 이루고 있음을 암시하고 있었다.
레이튼 중령은 또한 제1항공함대의 창설은 일본해군이 앞으로 항공모함을 집중운용하겠다는 의지를 보여주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레이튼 중령을 비롯한 누구도 제1항공함대가 1달 후에 진주만을 공격할 줄은 몰랐다.
태평양함대의 전투정보실은 1941년 11월 13일 현재 제1항공함대가 세토 내해에 머물러 있으며 별다른 활동을 보이지 않는다고 평가했다.
이후 일본군이 함대호출부호를 바꾸면서 전투정보실은 제1항공함대를 놓쳤으나 일본 측에게서 별다른 변화를 느끼지 못했으므로 항공모함들이 여전히 세토 내해에 머무르고 있을 것으로 예측했다.
이외에도 전투 정보실은 진주만 공격부대에 편성된 함정들이 다른 부대에 배속되었다고 해석하는 실수를 저질렀다.
전투정보실은 11월 15일에 전함 히에이와 기리시마로 이루어진 제3전대가 제1구축대와 함께 남파함대에 배속되었다고 보고했고, 다음날인 16일에는 뜬금없이 항공모함 즈이가쿠가 마셜제도에 있는 것 같다는 보고를 올렸다.
한편 히도카프로 향하는 아카기 함상에서 겐다 중좌와 후치다 중좌는 야마모토 제독의 연설이 마음에 걸렸다.
미군이 미리 알고 있을 때를 대비한 대책이 필요했다.
그들은 뇌격대를 지휘할 무라타 시게하루 소좌와 함께 해답을 만들었는데 기습 여부에 따라 제1차 공격대를 지휘할 후치다 중좌가 권총형 신호탄을 발사하기로 했다.
기습에 성공하면 1발, 실패하면 2발을 쏘기로 했으며 여기에 따라 공격순서가 달라질 것이었다.
진주만 기습의 주역은 뇌격으로서 기습에 성공하든 실패하든 공격순서는 뇌격의 효과를 극대화하는 방향으로 결정했다.
기습을 달성하여 신호탄이 1발만 발사되면 뇌격대가 가장 먼저 공격에 들어가 기습의 효과를 극대화하면서 뇌격을 가할 것이고 급강하폭격기와 수평폭격기가 그 뒤를 따를 것이었다.
만일 기습이 실패하여 신호탄이 2발 발사되면 먼저 급강하 폭격기가 공격에 들어가고 이어서 수평폭격기가 공격하여 적의 요격기와 대공포화를 끌어당긴 후 뇌격대가 마지막으로 들어가서 뇌격을 가할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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