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 출항

 

진주만 기습에 참가하는 세력 중에서 가장 먼저 출항한 것은 제6함대 소속 잠수함들이었다.

제6함대 사령장관 시미츠 미츠미 중장은 휘하 지휘관들을 1941년 11월 10일에 히로시마 만의 사에키 앞바다에 정박한 기함인 연습순양함 가토리 함상에 소집하여 작전 명령을 하달했다.

 

다음날인 1941년 11월 11일 오전 11시 11분에 미와 시게요시 소장의 제3잠수전대 소속 8척의 잠수함이 히로시마 만을 떠났다.

이들은 도중에 콰절린 환초에 들러 급유를 받은 후 존스턴 섬과 팔미라 섬 사이를 통과하여 7척은 오아후 섬 남쪽에 전개하고 I-74 함은 니하우 섬 부근에 전개할 것이었다.

I-74 함은 진주만 기습 당일 니하우 섬 부근에서 물에 떨어진 조종사들을 구조하고 공습으로부터 달아나려는 미함정들을 공격할 것이었다.

오아후 남쪽에 전개할 7척 중에서 I-72 함와 I-73 함은 마우이 섬의 서해안에 자리잡은 라하이나 정박지와 라나이 섬에 미함정들이 정박하고 있는지를 확인하여 통보해 주게 되어 있었다.

 

1941년 11월 16일에는 야마자키 시게키 소장이 지휘하는 제2잠수전대 소속 6척의 잠수함이 요코스카를 출항했다.

제2잠수전대는 미드웨이 북쪽을 통과하여 하와이의 북쪽에 도달한 다음 남하할 것이었다.

이들중  제7잠수대(I-1, I-2, I-3)는 오아후-카우아이 사이, 그리고 제8잠수대(I-4, I-5, I-6)는 오아후-몰로카이 사이에 전개하여 태평양함대의 움직임을 감시하고 공습 이후에는 해당 해역을 통과하는 함정들을 공격할 것이었다.

 

(진주만 기습 당시 일본잠수함의 전개 상황. http://www.i-16tou.com/stlou/stlou5.html)

 

같은 16일에 가야하라 야스차가 중좌가 지휘하는 I-10 함이 요코스카를 떠났다.

I-10 함은 남동쪽으로 가서 피지의 수바 항을 관찰하고 북동쪽으로 꺾어 사모아와 크리스마스 섬을 정찰한 후 하와이 동쪽, 샌프란시스코에서 남서쪽으로 1,700km 떨어진 해역에 잠복할 것이었다.

이곳에서 I-10 함은 하와이와 미서해안을 오가는 미국함정들의 움직임을 감시하고 공습을 받아 망가져서 미서해안으로 수리를 받으러 가는 함정들을 격침할 것이었다. 

 

17일에는 진주만 공격부대의 전방에서 정찰하면서 나아갈 제1잠수전대 제2잠수대(I-19, I-21, I-23)가 이마이즈미 키지로 대좌의 지휘 아래 히도카프 만으로 출발했다.

 

18일 아침에는 갑표적을 싣고 갈 특별공격대의 잠수함 5척(I-16, I-18,  I-20, I-22, I-24)이 사사키 한쿠 대좌의 지휘 아래 구레 군항을 떠나 가메가쿠비로 가서 갑표적 5척을 사령탑 뒤에 싣고 붕고수도를 빠져나갔다.

 

마지막으로 11월 19일에 요코타 미노루 중좌가 지휘하는 I-26 함이 출항했다.

I-26 함은 2주 전인 11월 6일에 완성되었으며 그를 비롯한 승조원들은 아직 함을 완전히 알지 못하는 상태였다.

해군에 들어온 이래 잠수함에서만 근무해왔던 요코타 중좌에게도 완성된 지 2주 밖에 되지 않은 잠수함을 타고 작전에 투입된 경우는 처음이었다.

I-26 함은 알류샨 열도로 나아가 미군 함정들의 움직임을 보고하고 진주만 기습 이후에는 미군 함정들을 공격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진주만 기습에 참가한 잠수함은 갑표적 5척을 포함하여 29척이었다.

 

1941년 11월 13일 오전 9시에 연합함대 사령장관 야마모토 이소로쿠 대장은 연합함대의 주요 지휘관들을 참모들을 모아 회의를 열고 연합함대 명령 제1호를 발령했다.

 

4일 후인 17일 오후 3시, 야마모토 대장은 히로시마 만에 정박 중인 아카기 함상에 올라 제1항공함대 및 예하 항공전대 수뇌부, 그리고 항공대의 장교 등 약 100 명에게 출항을 앞두고 마지막 연설을  했다.

연설문은 남아있지 않으나 사람들의 기억에 의하면 짧고 힘이 있으면서 감동적인 연설이었다고 한다.

야마모토 대장은 미해군을 얕보지 말 것을 당부하면서 적은 멍청이가 아니며 우리 계획을 탐지하고 기다릴 수도 있으니 이에 대해서도 대비해야 한다고 말했다.

적이 미리 알 수도 있다는 언급은 겐다 및 후치다 중좌에게 감명을 주었다.

야마모토 제독의 연설이 끝나자 일동은 만세삼창을 했다.

 

이어서 진주만 공격부대의 함정들이 출항하기 시작했다.

17일 오후 4시에 항공모함 소류와 히류로 이루어진 제2항공전대가 구축함 4척의 호위를 받으면서 히로시마 만을 출항했다. 

제2항공전대는 세토 내해로 나와 붕고 수도를 통과한 후 시코쿠 남단을 돌아 북쪽 쿠릴열도 에토로프 섬의 히도카프 만으로 향했다.

사령관 야마구치 다몬 소장은 히도카프 만으로 가는 동안 대공포 연습을 시켰다.

또한 미군의 통신을 감청한 결과 미군 잠수함들이 필리핀 북방으로 진출한 것으로 보인다는 군령부의 경고에 따라 많은 수병들이 견시 임무에 투입되었다.

 

같은 날 항모 쇼가쿠와 즈이가쿠로 이루어진 제5항공전대는 규슈 북서부의 벳푸를 출발하여 역시 히도카프 만으로 향했다.

항공모함 아카기는 17일 저녁에 구축함 2척의 호위를 받으면서 히로시마 만을 떠나 북쪽으로 향했다.

 

항모 카가는 사세보로 가서 신형어뢰 100발을 실은 후 동료 항모들보다 하루 늦은 18일 오후에 구축함 2척의 호위를 받으면서 히도카프 만으로 출발했다.

수뢰국장인 츠치다 히사오 중좌가 혹시 있을지 모를 신형어뢰의 문제점을 해결하기 위하여 기술자들과 함께 동행했다.

 

제1 및 제2항공전대의 항공모함 4척에는 이들 이외에도 기술자들이 타고 있었다.

미국전함의 장갑판을 뚫기 위한 800kg 짜리 신형폭탄은 기존의 폭탄투하기와 맞지 않았는데 새로운 폭탄투하기를 만들어 공급할 시간이 없었으므로 기술자들이 항모 내에서 기존의 폭탄투하기를 개조했다.

어뢰와 폭탄투하기 문제 해결을 위하여 항모에 탑승했던 기술자들은 진주만 공격부대가 히도카프 만을 떠날 때 급유함에 옮겨진 다음 함대가 돌아올 때까지 히도카프 만에 머물러야 했다.

 

이외에 제3전대(히에이, 기리시마), 제8전대(도네, 치쿠마) 및 제1수뢰전대가 모두 18일 저녁까지 출항을 마쳤다.

야마모토 제독의 기함 나가토를 비롯하여 히로시마 만에 정박 중이던 연합함대의 함정들은 건투를 빈다는 발광신호를 보내면서 출항하는 진주만 기습부대의 함정들을 배웅했다.

 

진주만 공격부대에 앞서 포함 구나시리가 에토로푸 섬에 도착하여 통신장교에게 모든 통신을 차단하라고 명령했다.

이로서 에토로푸 섬의 전화, 전보 및 우편 서비스가 중단되었다.

연락선도 끊겼으며 개인적인 출입은 물론 어부인 현지 주민이 고기잡이 나가는 것마저 막았다.

진주만 기습 떄까지 에토로푸 섬의 주민들은 죄수처럼 옴짝달싹할 수 없었다.

 

야마모토 제독은 보안을 위하여 심혈을 기울였다. 일본을 떠날 때 항공모함들이 육상기지에서 훈련 중이던 함재기들을 싣고 빠져나가는 것과 동시에 인근의 항공기지에서 항공기들을 하루에 몇번이고 내보내어 비행횟수가 줄어든 것을 사람들이 느끼지 못하게 했다.

또한 시내에 수병들이 줄어들었다는 걸 눈치채지 못하도록 지상의 해군부대에서는 많은 수병들에게 외박을 허용했다.

진주만 공격부대는 출항과 동시에 무선침묵상태에 들어갔으므로 줄어든 통신량을 보전하기 위하여 가짜 통신을 내보냈으며 함대호출부호도 변경했다.

 

보안은 히도카프 만으로 향하는 진주만 공격부대 내에서도 철저하게 지켜졌다.

모든 함정에게는 통신을 내보내서는 안 된다는 엄격한 명령이 내려와 있었다.

많은 함정에서는 실수로 건드리는 일이 없도록 통신기의 키를 봉인했으며 일부 함정에서는 아예 키의 단자를 뽑아버렸다.

진주만 공격부대 내에서도 진주만 기습에 대해 알고 있는 것은 제1항공함대의 지휘관들과 참모들, 공습에 참가할 조종사들 뿐이었으며 호위부대나 경계부대에서는 사령관인 미카와 중장과 오모리 소장, 그리고 참모들만이 알고 있었다.

그외의 승조원들에게 행선지는 비밀이었으며 어디로 가는지 헷갈리도록 하기 위하여 하복과 동복이 동시에 지급되었다.

일본의 노력은 목적을 달성했다.

 

(조셉 로슈포트 중령)

 

미태평양함대의 전투정보실장 조셉 로슈포트 중령은 제1항공함대의 첫 리허설이 있던 1941년 11월 4일에 일본군의 암호통신에게서 '제1항공함대' 란 단어를 뽑아내었다.

태평양함대의 정보참모 에드윈 레이튼 중령은 이 단어를 보는 순간 지난 몇 개월간의 의문이 풀렸다.

원래 일본의 제1함대와 제2함대에는 항상 항공전대가 하나씩 붙어있었는데 1941년 여름부터 사라졌다.

일본인의 작명 성향에 비추어 볼 때 제1항공함대는 항공전대의 집합체이며 이는 제1 및 제2함대에서 사라진 항공전대들이 제1항공함대를 이루고 있음을 암시하고 있었다.

레이튼 중령은 또한 제1항공함대의 창설은 일본해군이 앞으로 항공모함을 집중운용하겠다는 의지를 보여주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레이튼 중령을 비롯한 누구도 제1항공함대가 1달 후에 진주만을 공격할 줄은 몰랐다. 

 

태평양함대의 전투정보실은 1941년 11월 13일 현재 제1항공함대가  세토 내해에 머물러 있으며 별다른 활동을 보이지 않는다고 평가했다.

이후 일본군이 함대호출부호를 바꾸면서 전투정보실은 제1항공함대를 놓쳤으나 일본 측에게서 별다른 변화를 느끼지 못했으므로 항공모함들이 여전히 세토 내해에 머무르고 있을 것으로 예측했다.

 

이외에도 전투 정보실은 진주만 공격부대에 편성된 함정들이 다른 부대에 배속되었다고 해석하는 실수를 저질렀다.

전투정보실은 11월 15일에 전함 히에이와 기리시마로 이루어진 제3전대가 제1구축대와 함께 남파함대에 배속되었다고 보고했고, 다음날인 16일에는 뜬금없이 항공모함 즈이가쿠가 마셜제도에 있는 것 같다는 보고를 올렸다.

 

한편 히도카프로 향하는 아카기 함상에서 겐다 중좌와 후치다 중좌는 야마모토 제독의 연설이 마음에 걸렸다.

미군이 미리 알고 있을 때를 대비한 대책이 필요했다.

그들은 뇌격대를 지휘할 무라타 시게하루 소좌와 함께 해답을 만들었는데 기습 여부에 따라 제1차 공격대를 지휘할 후치다 중좌가 권총형 신호탄을 발사하기로 했다.

기습에 성공하면 1발, 실패하면 2발을 쏘기로 했으며 여기에 따라 공격순서가 달라질 것이었다.

 

진주만 기습의 주역은 뇌격으로서 기습에 성공하든 실패하든 공격순서는 뇌격의 효과를 극대화하는 방향으로 결정했다.

기습을 달성하여 신호탄이 1발만 발사되면 뇌격대가 가장 먼저 공격에 들어가 기습의 효과를 극대화하면서 뇌격을 가할 것이고 급강하폭격기와 수평폭격기가 그 뒤를 따를 것이었다.

만일 기습이 실패하여 신호탄이 2발 발사되면 먼저 급강하 폭격기가 공격에 들어가고 이어서 수평폭격기가 공격하여 적의 요격기와 대공포화를 끌어당긴 후 뇌격대가 마지막으로 들어가서 뇌격을 가할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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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훈련

 

진주만 기습을 위한 제1항공함대의 훈련은 1941년 6월부터 시작되었다.

제1항공함대의 항공참모 겐다 미노루 중좌는 뇌격 훈련을 위하여 규슈 남단의 가고시마 만을 골랐다.

육지로 길게 들어간 만으로서 주변을 산이 둘러싸고 있고 만 가운데 섬이 있는 가고시마 만은  진주만을 닮았다.

 

(가고시마 만. http://en.wikipedia.org/wiki/Kagoshima_Bay)

 

(진주만. http://en.wikipedia.org/wiki/Pearl_Harbor)

 

진주만을 공격할 3가지 방법인 뇌격, 수평폭격, 급강하폭격 중에서 가장 문제가 되는 것은 뇌격이었다.

대형함을 공격하는데는 뇌격이 가장 효과적이었으나 문제는 진주만의 수심이 15m 정도로 얕다는 것이었다.

겐다 중좌는 위치에 따라 수심이 12m 정도인 곳도 있을 것으로 보았으며 따라서 항공기에서 떨어뜨리는 어뢰는 10m 이내로 가라앉아야 성공을 보장할 수 있다고 믿었다.

 

일반적인 생각과 달리 일본해군은 진주만 기습 때문에 항공어뢰가 얕게 주행하도록 하는 연구를 시작한 것이 아니다.

1939년 이전까지 일본해군의 항공어뢰 운용방식은 100m 높이에서 떨어뜨리는 것이었다.

그럴 경우 어뢰는 최소한 30m, 최대 100m 까지 가라앉았다가 상향으로 조정한 수평 방향타에 의하여 급격하게 부상하면서 적함에 명중했다.

이럴 경우 항주 거리와 부상 각도, 그리고 최초에 가라앉는 깊이에 따라 어뢰가 적함에 명중하기 전에 해면으로 튀어오르거나 아니면 적함 아래로 통과해버리는 일이 많았다.

따라서 일본해군은 어뢰를 얕게 가라앉힌 다음 천천히 부상시키면 명중율이 높아질 것으로 보고 연구를 시작했다.

 

1939년 중반에 일본해군의 기술자들은 착수시 떨어져나가는 나무판을 어뢰에 붙이면 가라앉는 깊이를 줄일 수 있다는 걸 알아내었다.

1940년 2월에 실시한 실험에서 100m 높이에서 떨어뜨릴 경우 어뢰가 가라앉는 깊이는 18m 까지 얕아졌다.

만일 항공기가 30m 높이에서 280km/hr 의 속력으로 어뢰를 떨어뜨릴 경우 70% 의 어뢰가 12m 밖에 가라앉지 않았다.

문제는 이렇게 얕게 가라앉은 어뢰는 똑바로 나아가지 못하고 비틀거린다는 것이었는데 기술자들은 이 문제를 해결하지 못했다.

1941년 중반에 겐다 중좌가 해군 기술자들에게 10m 이내로 가라앉는 어뢰를 요구했을 때 여기까지 진척되어 있었다.

 

겐다 중좌는 초저공에서 투하하는 방법을 제시했다.

2대의 뇌격기가 12m 라는 기록적인 저공으로 비행하면서 어뢰를 떨어뜨린 결과 1발은 10m 이내로 가라앉았으나 1발은 좀 더 깊이 가라앉았다.

 

일본해군의 기술자들은 혼신의 힘을 다하여 20m 높이에서 190km/hr 의 속력으로 떨어뜨릴 경우 12m 까지만 가라앉으면서 안정적으로 주행하는 91식 2형 항공어뢰를 개발했다.

겐다 중좌는 10m 를 고집했으나 여기까지가 한계였다.

 

문제는 새로운 어뢰의 생산 일정이 촉박하다는 점으로 해군함정본부는 첫 30발은 1941년 10월 15일, 다음 50발은 10월 31일, 마지막 100 발은 11월 30일이 되어서야 인도가 가능하다고 말했다.

연합함대와 군령부의 참모들이 매일같이 해군함정본부에 몰려가서 아우성을 친 결과 마지막 100발의 인도 시점을 11월 17일까지 앞당겼다.

 

수평폭격도 문제였는데 기존 폭탄으로는 미국 전함의 장갑판을 뚫기 어려웠다.

해군 기술자들은 나가토 급의 16인치 주포탄을 개량하여 22.8kg의 작약을 가지고 무게가 796.9kg 에 달하는 99식 80-3형 폭탄을 개발했다.

이 폭탄을 3,000m 높이에서 떨어뜨리면 미국 전함의 장갑판을 뚫을 수 있었다.

 

수평폭격의 낮은 명중율도 문제였다.

1941년 초반까지 일본해군의 폭격 대회에서 우승한 항공대의 수평폭격 성공율은 10% 정도였는데 이 정도로는 곤란했다.

 

돌파구를 뚫은 것은 아카기의 제3함상공격기 중대장인 후루카와 이즈미 대위였다.

1941년 4월에 9대로 이루어진 후루카와의 중대는 표적함으로 히로시마 만 내에 정박 중인 낡은 군함 셋츠를 3,600m 높이에서 수평폭격하여 모의탄 9발 중 4발을 명중시켰다.

모두들 처음에는 우연이라고 생각했으나 2번째 폭격에서는 3발, 세번째는 무려 5발을 명중시켰다.

후루카와 대위는 비결을 물어보는 겐다 중좌에게 이전에는 폭격수가 주도하는 폭격 과정에서 수동적인 역할에 머물렀던 조종사를 폭격에 적극 참여하도록 훈련시키는 것이 요점이라고 대답했다. 

훈련 방법을 바꾼 이후 수평폭격의 성공율은 극적으로 높아져 33%에 달했다.

미해군에 따르면 진주만 기습에서 수평폭격의 명중율은 24% 로서 비록 기습에다가 고정 표적들이지만 실전임을 고려하면 대단한 명중율이었다.

 

1941년 8월 25일에 겐다 중좌는 친구인 후치다 미츠오 중좌를 아카기의 항공대장으로 끌어들였다.

이후 후치다 중좌는 제1항공함대 조종사들의 훈련을 총괄했으며 진주만 기습시에는 공격대를 총지휘했다.

이때를 전후하여 진주만 기습에서 공격대를 이끌 지휘관들이 결정되었으며 이들이 현장에서 훈련을 이끌었다.

 

(후치다 미츠오. 자세한 내용은 여기로)

 

제1항공함대의 함재기들이 모두 가고시마에서 훈련한 것은 아니었다.

가고시마에서 훈련한 것은 아카기 및 카가의 뇌격기 24대와 수평폭격기 30대, 합계 54대였다.

소류 및 히류의 뇌격기 16대와 수평폭격기 20대는 이즈미에서 훈련했으며 다른 항공대도 도미타카, 카사노하라, 사에키, 우사, 오이타, 그리고 오무라 기지에서 항공대 별로 훈련했다. 

(뇌격과 수평폭격에 쓰인 기체는 모두 97식 항상공격기로서 뇌격기와 수평폭격기는 진주만 기습 당시 임무에 따라 붙인 호칭이다. 하나의 기체를 뇌격과 수평폭격에 모두 사용한 것은 미해군도 마찬가지이다.)

 

(나카지마 B5N 97식함상공격기. 자세한 내용은 여기로)

 

1941년 10월 2일에 제1항공함대 사령장관 나구모 주이치 중장은 제1항공함대의 항공모함 함장들과 항공대장들을 임시 기함으로 쓰고 있던 항공모함 카가로 불러들여 진주만 기습 계획을 공개했다.(아카기는 수리를 위하여 잠시 요코스카 해군기지의 건선거에 들어가 있었다.)

중좌들이던 항공대장들은 진주만 기습 계획을 모두 열렬하게 환영했으며 대좌들인 항공모함 함장들도 대부분 기뻐했다.

 

이날 이후 제1항공함대의 훈련은 진주만 기습에 특화되어 실시하게 되었으며 그 과정에서 후치다 중좌가 점점 큰 역할을 맡게 되었다.

10월 10일까지 신예 항공모함 쇼가쿠와 즈이가쿠로 이루어진 제5항공전대의 조종사들이 모두 훈련에 합류했다.

 

후치다 중좌는 1941년 10월 초에 97식 함상공격기 9대로 이루어진 함상공격기 중대들을 뇌격기 4대와 수평폭격기 5대로 분리했다.

기준은 뇌격으로 뇌격 실력이 뛰어난 4명을 뇌격대에 우선 배정하다보니 유능한 조종사들이 모두 뇌격대로 몰렸다.

그리하여 수평폭격을 담당한 조종사들은 낙담했으나 전쟁에서 그런 것까지 일일이 고려할 여유는 없었다.

 

제1 및 제2항공전대의 함상공격기 90대 중 40대가 전함 및 항공모함에 대한 뇌격을, 50대가 전함에 대한 수평폭격을 담당했다.

실력이 떨어지는 제5항공전대의 함상공격기들은 모두 수평폭격기로 비행장 폭격에 투입되었다.

제5항공전대의 급강하폭격기에게도 표적의 크기가 작은 함정 공격 임무 대신 비행장 폭격 임무가 부과되었다.

제1 및 제2항공전대의 급강하폭격기들은 원래 항공모함을 담당했으나 진주만 기습 당시 항공모함들이 없었으므로 주로 전함을 비롯한 함정을 폭격했으며 일부는 해군공창을 공격했다.

제로기들은 공격기들을 미군 전투기로부터 보호하는 이외에 비행장에 주기된 미군 항공기들이나 관제탑을 비롯한 비행장의 주요 시설물을 기총소사했다.

 

1941년 10월 초에 함상공격대가 뇌격대와 수평폭격대로 분리되면서 가고시마에서 훈련 중이던 제1항공전대의 뇌격훈련은 난이도가 부쩍 높아졌다.

포드 섬 주변에 정박한 함정들을 어뢰로 공격하려면 뇌격기들은 기중기를 비롯한 각종 장애물이 널린 부두나 육지를 지나 해면으로 20m 고도까지 급강하하여 해안에서 500m 떨어진 해역에 정박하고 있는 전함이나 항공모함에게 어뢰를 발사해야 했다.

가고시마에서의 뇌격 훈련은 이 상황을 가정하여 실시했다.

 

(진주만 기습 당시 뇌격기의 공격 경로. http://www.freeinfosociety.com/media.php?id=807)

 

뇌격기들은 우선 중대장기를 선두로 500m 간격으로 만의 남쪽에서부터 진입하여 만 가운데 사쿠라지마의 서쪽 기슭을 200m 높이로 통과했다.

만의 북쪽에 도달한 뇌격기들은 고도를 50m 로 낮추어 시코츠 강 하구에서 남서쪽으로 빙 돌아 가고시마 시가지의 서쪽에 도달한다.

여기서 동쪽으로 변침한 후 가고시마 시내를 40m 높이로 가로지른다.

해안에 인접한 야마가타야 백화점 상공를 통과하면 커다란 물탱크가 나타나고 이어서 해안이다. 

뇌격기는 해안에 도달하면 300km/hr 의 속력을 유지하면서 20m 고도까지 급강하한 다음 해안에서 500m 거리에 설치한 부표를 향해 어뢰를 발사한 후 고도를 높여 남쪽으로 이탈한다.

깜빡 실수하면 바다에 추락하여 사망할 수 있는 위험한 훈련이었다.

가고시마 시민들은 40m 의 저공으로 차례차례 시내를 가로지르는 뇌격기의 폭음에 기겁했으며 양계장에서는 닭들이 놀라서 알을 낳지 않았다고 전해진다.

 

소류와 히류로 이루어진 제2항공전대의 뇌격대는 이즈미에서 훈련했는데 역시 실전을 상정하여 강도높게 훈련했다.

미해군에 따르면 진주만 기습에서 뇌격의 명중율은 55% 로 상당히 높다.

 

뇌격에 대한 커다란 걱정 중 하나는 함정 부근에 어뢰방어망이 쳐져 있는 경우였다.

겐다 중좌와 후치다 중좌가 아무리 머리를 쥐어짜도 어뢰방어망이 있을 경우 뇌격을 성공시키기 어려웠으나 그렇다고 뇌격을 포기하자니 수평폭격만으로는 충분한 전과를 기대할 수 없었다.

결국 두 사람은 어뢰방어망이 있을 경우 선두의 뇌격기가 돌입하여 자폭함으로써 방어망을 찢고 뒤따르던 뇌격기들이 어뢰를 발사하기로 결정했다.

그러나 태평양함대 사령관 킴멜 제독은 진주만에서 항공기에 의한 뇌격은 불가능하며 항행에 지장을 준다는 이유로 어뢰방어망을 치지 않았다.

 

급강하폭격기들도 역시 맹훈련을 하고 있었다.

일본해군의 교리에 따르면 급강하폭격기들은 4,000m 높이에서 강하를 시작하여 600m 높이에서 폭탄을 분리했다.

그러나 제1항공함대의 급강하폭격대장 에구사 다카하시 소좌는 명중율을 높이기 위하여 폭탄 분리 고도를 450m 로 낮추자고 제안했다.

이 제안이 받아들여짐으로써 급강하폭격의 정확도가 올라갔다.

Tora!Tora!Tora! 를 지은 마크 스틸에 따르면 진주만 기습에서 함정들을 노린 급강하폭격의 명중율은 약 20% 로서 실망스러운 수준이었는데 가장 큰 원인은 진주만 상공에 구름이 낮게 끼어 있었다는 것이었다.

 

전투기에 대해서는 상대적으로 훈련에 신경쓸 일이 적었으나 당시까지 생산량이 충분하지 못한 신예 전투기인 제로기와 뛰어난 조종사를 충분히 확보하는 것이 중요했다.

야마모토 대장이 제3항공전대(호쇼, 즈이호) 및 제4항공전대(류조)를 쥐어짜서 제로기와 조종사들을 제1항공함대에 배속하는 바람에 제3 및 제4항공전대는 전투기가 거의 없는 상태가 되었다. 

이것으로 모자라자 요코스카 항공대에서 최고의 제로기 조종사들을 차출하여 제1항공함대에 배속하는 바람에 요코스카에서는 늘어난 조종훈련생들을 가르칠 교관이 부족하여 고생했다.

제로기 조종사의 배속 우선 순위는 제1, 제2 및 제5항공전대였으며 필리핀 공격을 지원할 제11항공함대는 그 다음이었다.

제1항공함대의 제로기는 1941년 11월 초에 정수를 맞추었다.

 

(제로기. 자세한 내용은 여기로)

 

1941년 10월 중순에 후치다 중좌는 진주만 공격 시간을 겐다 중좌가 정한 12월 7일 오전 6시 30분에서 오전 8시로 늦추었다.

하와이의 일출 시간은 6시 6분이었으므로 6시 30분에 진주만 상공 도달하려면 함재기들은 어둠 속에서 발진하여 오아후 섬까지 날아와야 했는데 후치다 중좌는 미숙한 제5항공전대 조종사들의 야간 이함 및 항법 능력을 신뢰하지 않았다.

겐다 중좌는 흔쾌히 동의하고 나구모 중장에게 허가를 받았다.

 

해상급유문제도 골칫거리였으나 1941년 10월 말에 돌파구가 열렸다.

일본해군은 북방항로를 해상급유없이 왕복할 수 있는 함정은 항공모함 카가, 쇼가쿠 및 즈이가쿠, 전함 히에이와 기리시마, 그리고 중순양함 도네, 치쿠마 등 7척이었으며 항공모함 아카기, 소류, 히류, 경순양함 아부쿠마 및 구축함들은 해상급유가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일본해군의 해상급유는 급유함이 앞장서고 전투함이 뒤따라가면서 호스를 연결하여 급유를 받았는데 문제는 적의 잠수함이 나타나서 급히 변침해야 할 경우였다.

이럴 경우 구축함이나 경순양함같이 작은 함정들은 호스를 연결한 채 급유함을 따라 변침할 수 있었다.

그러나 아카기같은 대형함은 선회반경이 급유함보다 크기 때문에 그럴 경우 호스가 끊어질 것이었다.

 

제1항공함대의 참모장 구사카 류노스케 소장이 이 문제를 해결했다.

아카기, 소류 및 히류의 설계도를 검토하고 실무자들과 이야기를 해 본 구사카 소장은 함 내의 공간에 연료를 추가로 실으면 해상급유 없이도 하와이까지 왕복할 수 있다는 결론을 얻었다.

문제는 이것이 함정의 안전규정에 어긋난다는 것이었다.

 

구사카 소장은 해군성의 안전담당관들을 압박해 달라면서 군령부에서 군비를 담당하는 제2부를 집요하게 물고 늘어졌다.

제2부는 구사카 소장의 요구를 거절했으나 10월 18일에 나가노 군령부 총장이 진주만 기습을 승인하자 태도가 바뀌었다.

군령부는 만일 문제가 생기면 책임을 질테니 예외를 인정해 달라고 해군성에 요청하여 동의를 받아내었고 이로써 구사카 소장은 연료를 항공모함 내부에 실을 수 있었다.

함 내부의 공간이라는 공간에 모두 드럼통을 꽉꽉 채우자 700톤의 연료가 더 들어갔다. (아카기의 연료 탱크에는 6,000톤, 히류와 소류는 3,500톤의 연료를 실을 수 있었다.)

여기에 함저의 균형탱크(trim  tanks)에도 연료를 가득 채우자 아카기, 소류, 히류도 해상급유없이 하와이를 왕복할 수 있게 되었다.

 

그래도 경순양함 아부쿠마나 구축함들은 해상급유를 받아야만 했다.

구사카 소장은 1941년 10월 말까지 구축함 2척이 급유함 양옆에서, 그리고 1척이 뒤에서 급유를 받아 3척이 동시에 급유받는 방식을 시험하여 성공시켰다.

이로써 해상급유에 필요한 시간이 획기적으로 줄어들어 거친 북태평양에서 날씨가 반짝 좋아지면 재빨리 급유할 수 있게 되었다.

 

제1항공함대 사령장관 나구모 주이치 중장은 1941년 11월 3일 오후 1시 30분에 제1항공함대의 지휘관과 참모들, 그리고 조종사 모두에게 진주만 기습 계획을 공개했다.

모두들 기뻐했으며 특히 조종사들은 자신들이 맹훈련을 해야했던 이유를 알게되어 더욱 기뻐했다. 

 

다음날인11월 4일부터 제1항공함대는 3회에 걸쳐 최종 리허설을 실시했다.

지금까지는 항공모함의 연료를 아끼기 위하여 지상에서 발진했으나 이날은 제1 및 제2항공전대의 함재기들이 항공모함에서 이함하여 대형을 짠 후 30km 전방까지 날아갔다가 돌아오면서 진주만의 미전함들처럼 줄을 맞추어 정박 중이던 연합함대의 전함 및 항공모함들을 상대로 모의 공격을 실시했다.(당시 제5항공전대의 함재기들은 규슈 북서부의 벳푸 부근에서 훈련 중이었으므로 리허설에 불참했다.)

다음날인 11월 5일에는 도중에 미군 전투기의 요격을 받는 상황을 가정하여 리허설을 실시했는데 제1항공함대는 9월의 전쟁연습 때와는 달리 요격을 받아도 만족스러운 전과를 올릴 수 있다는 결론을 내렸다.

11월 7일에는 마지막 리허설이 있었고 이후 평가가 이어졌다.

 

후치다 중좌는 여러 대의 항공기가 특정 함정에게 지나치게 몰리는 경향이 있다는 점을 발견하고 각각의 조종사들에게 보다 구체적인 목표를 지정했다.

 

가장 큰 문제는 20m 고도에서 떨어뜨린 어뢰의 40% 만이 12m 이하로 가라앉았다는 것이었다.

나머지는 대부분 15m 까지 가라앉았으며 몇몇은 20m 까지 가라앉았다.

겐다 중좌는 뇌격대를 지휘할 무라타 시게하루 소좌에게 문제 해결을 지시했고 무라타 소좌는 부하들을 이끌고 가고시마로 돌아가서 11월 11일부터 실험했다.

 

마침내 11월 13일에 무라타 소좌는 비결을 알아내었다.

투하고도 20m 는 맞았으나 속력이 너무 빨랐다.

투하 속력을  300km/hr에서 190km/hr 로 낮추자 82% 의 어뢰가 12m 까지만 가라앉아 안정적으로 주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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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승인

 

1941년 9월의 전쟁연습 이후 군령부는 연합함대의 진주만 기습 계획에 대하여 명확한 목표를 가지고 대처했다.

즉 가능하면 취소시키고 취소가 불가능하면 규모를 최소화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목표에 따라 군령부는 1941년 9월 말에 소류와 히류의 항속거리가 짧다는 구실로 제2항공전대를 남방작전으로 돌렸으며 오버홀이 예정되어 있던 아카기마저 빼돌렸다.

군령부는 이 사실을 연합함대와 제1항공함대에 통보했으나 제2항공전대에는 알리지 않았다.

 

1941년 10월 초에 이 사실을 알게 된 제2항공전대 사령관 야마구치 다몬 소장이 제1항공함대의 기함인 아카기로 쳐들어왔다.

당시 겐다 중좌는 나구모 사령장관의 선실에서 나구모 중장 및 구사카 참모장과 함께 진주만 기습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는데 야마구치 소장이 노기등등한 얼굴로 문을 벌컥 열고 들어오자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야마구치 다몬 제독. 자세한 내용은 여기로)

 

겐다 중좌는 평소 야마구치 제독을 무조건 공격만을 주장하는 무식한 지휘관으로 여겨 싫어했다.

그러나 최소한 6척이 필요한 진주만 공격부대가 3척으로 쪼그라든 비상 사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야마구치 소장처럼 제독이면서 진주만 기습을 열정적으로 지지하고 또한 성격이 불같은 사람과 손을 잡아야 했다.

진주만 기습에 소극적인 나구모 사령장관이나 구사카 참모장은 믿을 수 없었고 계급 사회인 군대에서 일개 중좌에 불과한 겐다 자신은 힘이 없었다.

 

(제1항공함대의 항공참모 겐다 미노루 중좌. 자세한 내용은 여기로)

 

야마구치 소장은 나구모 중장에게 으르렁거리듯 물었다.

 

"도대체 2전대가 빠진 이유가 뭡니까?"

 

나구모 중장을 대신하여 야마구치 소장의 에타지마 병학교 1년 후배인 구사카 참모장이 조심스럽게 말했다.

 

"상부에서 결정한 겁니다."

 

그러자 야마구치 소장은 소리를 질렀다.

 

"왜 항의하지 않습니까? 정말로 하와이를 공격하고 싶다면 항공모함 6척이 필요하다는 걸 모릅니까? 항속거리가 짧다고? 그건 제가 걱정할 문젭니다. 공격하고 돌아오다가 연료 떨어지면 그냥 바다에 떠 있을거요. 2전대는 신경끄고 먼저 가면 됩니다."

 

야마구치 소장은 겐다 중좌를 돌아보며 물었다.

 

"자네는 어떻게 생각하나?"

 

겐다 중좌는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제독님 생각에 전적으로 찬성입니다. 군령부가 어떻게 이런 멍청한 계획을 세웠는지 이해를 못하겠습니다."

 

나구모 중장은 야마구치 소장의 기세에 눌려 쩔쩔매다가 겨우 한마디했다.

 

"아, 군령부에서 명령이 그렇게 내려온 걸 난들 어떡하나?"

 

야마구치 소장은 그 소리를 듣자 나구모 중장을 한 번 노려보더니 인사도 안하고 문을 쾅 닫고는 나가버렸다.

 

(제1항공함대 사령장관 사령관 나구모 주이치 중장. 자세한 내용은 여기로)

 

며칠 후인 1941년 10월 9일에 일본연합함대 사령장관 야마모토 이소로쿠 대장은 히로시마 만에 정박한 기함 나가토 함상으로 휘하의 주요 지휘관들을 소집했다.

연합함대 명령 제1호의 발령을 앞두고 부하들의 의견을 마지막으로 듣고 연합함대 전체의 의견을 통일시키기 위한 것이었다.

 

그리하여 10월 9일부터 11일까지 나가토 함상에서는 남방작전 전반에 걸쳐 토론이 벌어졌는데 그동안 제1항공함대 수뇌부는 전함 무츠에 머물렀다.

무츠에서의 저녁 회식 자리에서 나구모 중장은 부하들에게 술을 적당히 마시라고 당부했지만 야마구치 소장은 과음했다.

회식을 마칠 때쯤 잔뜩 취한 야마구치 소장이 나구모 중장에게 다가와 옷을 붙잡더니 유도로 메다 꽂으려고 했다.

깜짝 놀란 나구모 중장이 안 넘어가려고 버둥거릴 때 구사카 참모장이 끼어들었다.

몸집이 큰데다 무술이 뛰어난 구사카 참모장은 어렵지 않게 야마구치 소장을 떼어낸 다음 옆방으로 데려가 눕혔다.

 

(제1항공함대 참모장 구사카 류노스케 소장. 자세한 내용은 여기로)

 

10월  9일부터 11일까지 3일간의 토론이 끝나고 12일 오전 9시부터 나가토 함상에서는 진주만 기습에 대한 전쟁연습이 실시되었다.

9월 16일의 전쟁연습과 달리 이번에는 진주만 기습에 직접 관계없는 지휘관들도 참관했으며 군령부를 대표하여 항공참모 미요 다츠기치 중좌와 우치다 시게시 중좌도 참관했다.

 

이번 전쟁연습은 9월과 비교하여 몇 가지가 달라졌다.

우선 잠수함에서 발진하는 소형 잠수정인 갑표적이 포함되었으며 쿠릴열도의 어느 지점이라고만 되어있던 집결 장소가 에토로푸 섬의 히도카프 만으로 결정되었다.(히도카프 만을 고른 것은 중좌 시절 쿠릴 열도에 대해 깊이 공부했던 구사카 소장이었다.)

가장 큰 차이점은 군령부의 의도에 따라 청군으로 참가한 항공모함이 카가, 쇼가쿠, 그리고 즈이가쿠의 3척이라는 것이었다.

 

결과는 실망스러웠다.

청군함대는 오아후에 완전한 기습을 가했음에도 불구하고 항공력 부족으로 미함대에 치명적인 타격을 주지 못하고 중간 정도의 타격만을 입혔다.

비록 재빠른 퇴각으로 청군함대의 피해는 가벼웠지만 전체적으로 받아들이기 힘든 결과였다.

겐다 중좌나 야마구치 소장, 그리고 야마모토 대장은 항공모함 3척으로 오아후를 공격한다는 것은 큰 의미가 없다는 사실을 확신하게 되었다.

잠수함에서 출격한 갑표적의 전과도 보잘것 없었다.

 

전쟁연습이 끝난 후 토론이 벌어졌다.

나구모 중장은 하와이에 전개하는 잠수함들이 미해군에게 발견될까봐 두려워했다.

그리하여 잠수함들은 항공공격 이전에는 낮에는 반드시 잠수하고 밤에만 부상하기로 결정했다.

야마모토 제독은 갑표적을 신뢰하지 않았으나 잠수함대인 제6함대의 강력한 요청을 받아들여 반드시 생환한다는 조건으로 참가를 허용했다.

 

비밀유지와 관련하여 말레이에 상륙할 선단 상공에 나타나는 연합군 정찰기를 어떻게 처리할 것인지가 문제가 되었다.

선단을 호위할 제2함대 사령장관 곤도 노부다케 중장은 선단 상공에 나타나는 정찰기를 무조건 격추할 생각이었지만 나구모 중장은 그럴 경우 하와이의 미군이 경계를 강화할 것이라며 반대했다.

결국 곤도 중장은 진주만 기습 이전에는 정찰기에 발견되면 격추하지 않고 선단의 방향을 바꾸어 적의 눈을 속이기로 했다.

 

제3전대 사령관 미카와 구니치 중장은 9월에 이어 또다시 전함 공고와 하루나를 제3함대에서 뺴내어 히에이 및 기리시마와 함께 진주만 기습에 참가시켜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번에는 야마모토 대장이 직접 나서 공고와 하루나는 영국해군에 대항하기 위하여 반드시 필요하므로 제3함대 휘하에서 남방작전에 참가해야 한다고 못을 박았다.

 

다음날인 10월 13일 오전 9시부터 나가토에서는 전술적인 토론이 벌어졌으며 전술토론이 끝난 오후 4시부터 연합함대의 주요 지휘관들과 고급 참모들은 특별 회의를 가졌다.

야마모토 제독은 회의 참가자들에게 다가오는 전쟁에 대해 기탄없이 의견을 말하라면서 좋은 의견을 반영하기 위하여 개인 자격으로 기록할 뿐 공식 기록은 남기지 않으니 어떤 내용이든 발언해도 좋다고 말했다.

대신 회의 마지막에 자신이 결론을 내리면 더 이상의 논쟁은 허용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연합함대 참모장 우가키 마토메 소장의 개회사에 이어 제3전대 사령관 미카와 구니치 중장이 발언했다.

미카와 중장은 순전히 항해라는 면에서 보았을 때 12월 중순 이후에는 북태평양에서의 해상급유가 사실상 불가능하므로 아무리 늦어도 12월 초순에는 진주만을 공격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따라서 개전일은 하와이 현지 시간으로 1941년 12월 7일, 미군 함정이 진주만 내에 가장 많이 모이는 일요일로 결정했다.

 

제11항공함대 참모장 오니시 다키지로 소장은 진주만을 기습하기에는 계절적으로 이미 늦었으며 항공모함들은 하와이를 공격하는 대신 필리핀을 공격하는 제11항공함대를 지원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제2함대 사령장관 곤도 노부다케 중장은 하와이는 물론 필리핀, 괌, 웨이크 등 미군 기지에 대한 공격을 일체 배제하고 말레이만 공격함으로써 미국의 즉각적인 참전을 막고 일단은 영국과 네덜란드만을 상대로 개전하자고 주장했다.

제1항공함대 사령장관 나구모 주이치 중장과 참모장 구사카 류노스케 소장도 곤도 중장의 의견에 찬성했다.

제2항공전대 사령관 야마구치 다몬 소장은 진주만 공격을 강력하게 지지했다.

 

마지막으로 연합함대 사령장관 야마모토 이소로쿠 대장이 일어섰다.

 

"여러분들의 훌륭한 의견을 잘 들었다. 몇몇 의견은 내가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점을 일깨워 주었으며 그 내용은 앞으로 함대명령에 반영될 것이다."

 

그리고 명확하게 결론을 내렸다.

 

"하와이 작전은 국가 대전략의 핵심적인 부분이다. 내가 연합함대 사령장관으로 있는 한 하와이를 공격할 것이다. 나는 여러분이 충심으로 나를 지지해 주길 바란다. 이제 여러분은 각자 위치로 돌아가 전쟁의 승리를 위하여 매진하도록. 행운을 빈다!"

 

이로써 결론이 났다.

야마모토 제독의 결단력과 카리스마에 대항할 인물은 연합함대 내에는 없었다.

이후 연합함대 내에서는 나구모 중장을 위시하여 누구도 하와이 공격에 대해 논쟁하거나 반대하거나 불평하지 않았다.

 

(연합함대 사령관 야마모토 이소로쿠 대장. 자세한 내용은 여기로)

 

겐다 중좌는 이제 군령부에 의하여 항공모함 3척으로 쪼그라든 진주만 공격부대를 6척으로 늘리는 일에 집중했다.

제1항공함대 참모장 구사카 소장도 일단 하와이 공격을 수용하자 항모를 6척으로 늘려야 한다는 겐다 중좌를 지지했다.

 

야마구치 소장은 나가토 함상에서의 특별 회의에서 제2항공전대를 진주만 기습에 참가시키려고 노력했으나 실패했다.

회의에서 제2항공전대의 항공참모 스즈키 에이지로 소좌는 야마구치 소장을 대변하여 제2항공전대가 하와이 공격에 참가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스즈키 소좌는 소류와 히류의 항속거리가 결코 짧지 않으며 북방항로를 사용해도 해상급유없이 하와이까지 왕복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회의 참석자들은 모두가 알고 있는 뻔한 사실을 가지고 야마모토 대장을 비롯한 기라성같은 제독들이 앉아있는 회의 석상에서 막무가내로 우겨대는 스즈키 소좌를 기가 막힌다는 표정으로 쳐다보다가 직속상관인 야마구치 소장에게 어서 제지하지 않고 뭐하냐고 눈치를 주었다.

그러나 야마구치 소장은 스즈키 소좌가 말을 마칠 때까지 모두의 시선을 무시함으로써 그를 지지했다.

회의를 마치고 야마구치 소장은 스즈키 소좌에게 이렇게 말했다.

 

"자네는 틀렸어. 그리고 스스로 틀렸다는 것을 알면서 그랬다는 것도 아네. 잘했어. 배짱이 마음에 들어."

 

나가토 함상의 회의가 끝난 직후 야마구치 소장은 다시 한번 나구모 중장의 선실에 쳐들어가 행패를 부렸다.

사실 제2항공전대의 진주만 기습 배제 문제는 야마모토 대장에게 따질 일이었으나 야마구치 소장에게는 그런 생각이 떠오르지 않았다.

대신 그의 분노는 항공전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 주제에 제1항공함대 사령장관 자리를 꿰차고 앉아서는 처음부터 진주만 기습에 반대하더니 이제는 3척의 항공모함만 가지고 하나마나한 히트앤드런 작전이나 수행하려는 나구모 중장에게 향했다.

이번에는 야마구치 소장의 지나친 언행에 화가 난 나구모 중장이 도중에 말을 끊고 나가라고 명령했다. 

야마구치 소장은 쫓겨나면서 문을 쾅하고 닫기 전에 들으라는 듯이 큰소리로 중얼거렸다.

 

"(제1항공함대의) 사령장관이고 나발이고 똑바로 안하면 내 손으로 죽여버릴 거야."

 

겐다 중좌는 이런 식으로는 해결이 안되며 누군가 군령부와 직접 부딪혀야 한다고 생각하고 구사카 참모장을 설득했다.

구사카 소장은 나구모 중장에게 이제 하와이를 공격해야만 하는 현실을 직시할 때며 공격은 다른 사람이 아닌 나구모 중장 자신이 이끌어야 한다는 점을 상기시켰다.

그리고 하와이를 공격하려면 3척이 아닌 6척의 항모를 이끌고 가야만 성공할 수 있다고 설득하여 항모 6척을 얻어내기 위하여 군령부에 가도 좋다는 허락을 받아내었다.

 

구사카 소장은 1941년 10월 17일에 군령부를 방문하여 제1부 작전과장 도미오카 사다토시 대좌와 이야기를 나누었다.

도미오카 대좌는 6척의 항모는 커녕 하와이 공격 자체를 반대하면서 한마디도 지지않고 꼬박꼬박 대꾸했다.

더 이상 이야기해 봤자 시간낭비라고 생각한 구사카 소장은 군령부를 떠났다.

 

이제 하와이 공격의 열렬한 신봉자가 된 구사카 소장은 어깨를 늘어뜨리고 아카기로 돌아가는 대신 나가토로 가서 야마모토 대장을 만났다.

야마모토 대장은 불과 며칠 전만 해도 진주만 공격을 반대하던 구사카 소장이 이제는 열렬한 신봉자가 되어 항모 6척이 꼭 필요한데 군령부의 멍청이들이 말귀를 못 알아먹는다면서 울분을 토하는 모습을 흡족하게 바라보았다.

이야기를 듣고 난 야마모토 대장은 자기가 알아서 처리할테니 걱정말라고 구사카 소장을 달랜 다음 아카기로 돌려보냈다.

 

야마모토 대장도 이제 승부수를 띄워야 할 때가 왔음을 깨달았다.

그날 저녁 야마모토 대장은 선임참모 구로시마 가메토 대좌를 불러 다음날 군령부로 가라고 말했다.

구로시마 대좌의 임무는 두 가지로서 첫째는 하와이 공격에 대한 승인을 얻는 것, 둘째는 하와이 공격에 6척의 항모를 투입한다는 약속을 받아내는 것이었다.

타고난 승부사였던 야마모토 대장은 구로시마 대좌의 손에 군령부가 버텨내지 못할 강력한 무기를 쥐어 주었다.

 

다음날인 10월 18일 아침에 구로시마 대좌는 군령부로 날아가 작전과장 도미오카 대좌를 찾았다.

미요 항공참모와 함께 나가토 전쟁연습에 대하여 토의하고 있던 도미오카 대좌를 찾아낸 구로시마 대좌는 하와이 작전에 대한 군령부의 명확한 태도를 즉시 확인하라는 연합함대 사령장관의 명령을 받고 왔다고 말했다.

구로시마 대좌는 개전과 동시에 미함대에 강력한 타격을 가해야만 할 이유를 나열하고 진주만을 반드시 공격해야 하며 공격에 참가할 항공모함은 6척 이상이어야 한다고 말했다.

 

도미오카 대좌는 눈도 깜짝하지 않았다.

8월의 토론 때와 마찬가지로 도미오카 대좌는 논리정연하게 하와이 공격이 부당한 이유를 조목조목 들이댔다.

구로시마 대좌는 도미오카 대좌의 반론을 꾹 참으면서 다 듣고난 후 야마모토 제독이 준 폭탄을 터뜨렸다.

 

"야마모토 대장은 그의 작전이 받아들여지기를 바라고 있다. 나는 만약 이 작전이 받아들여지지 않으면 연합함대 사령장관은 제국을 보위할 임무를 수행할 수 없다고 선언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그럴 경우 그는 자신의 모든 참모들과 함께 사임할 수 밖에 없을 것이다."

 

도미오카 대좌는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옆을 돌아보니 항공참모 미요 중좌도 충격을 받아 멍청한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 순간 도미오카 대좌는 문제가 자신의 능력을 벗어났다는 사실을 깨달았으나 정신을 가다듬고 불타버린 식량창고에서 온전한 낱알을 찾아내는 심정으로 연합함대에 3가지 약속을 요구했다.

 

1. 공격에는 오로지 6척의 항모만 투입하며 더 이상 요구하지 않는다.

2. 6척의 항모에 배치된 함재기 이외에 추가로 해군 항공력을 요구하지 않는다.

3. 공격이 끝나면 제1항공함대는 최대한 빨리 남방작전을 지원한다.

 

도미오카 대좌의 반응을 보며 여유를 찾은 구로시마 대좌는 웃으면서 알았다고 말했으나 도미오카 대좌는 문서로 만든 다음 한사코 서명을 요구했다.

우울한 표정으로 구로시마 대좌의 서명이 들어간 문서를 받아든 도미오카 대좌는 구로시마 대좌를 제1부장 후쿠도메 시게루 소장에게 안내했다.

 

제1부장실로 안내된 구로시마 대좌는 사임 이야기는 빼고 후쿠도메 소장을 설득하려 했으나 실패했고 다시 폭탄을 터뜨릴 수 밖에 없었다.

후쿠도메 소장의 반응도 도미오카 대좌와 비슷했다.

그는 구로시마 대좌를 데리고 3일 전인 10월 15일에 중장으로 진급한 이토 세이치 군령부 차장의 사무실로 갔다.

후쿠도메 소장의 설명을 들은 이토 차장은 즉시 도미오카 대좌를 부른 다음 셋이서 나가노 오사미 군령부 총장의 사무실로 갔다.

구로시마 대좌는 이토 차장의 사무실에서 결과를 기다렸다.

 

나가노 총장의 사무실에서는 후쿠도메 소장이 먼저 말했다.

그는 진주만 계획에 대한 연합함대와 군령부 사이의 토론 과정과 의견이 충돌하는 사안, 자신이 생각하는 진주만 계획의 문제점을 말한 후 연합함대 사령장관이 계획을 받아주지 않으면 사임하겠다며 위협하고 있다고 말했다.

이어서 이토 차장이 이제 결단을 내려야 할 시점으로 연합함대 사령장관이 사임하겠다며 위협하고 있는 사실을 중시해야 한다고 말했다.

도미오카 작전과장에게는 아무도 물어보지 않았으므로 잠자코 있었다.

 

말없이 후쿠도메 소장과 이토 중장의 말을 듣고난 후 나가노 총장이 무겁게 입을 열었다.

 

"야마모토는 이 문제에 대해 누구보다 깊게 연구했네. 그 친구가 그렇게 확신이 있고 성공을 자신한다면 승인하는 것이 최선이라고 생각하네. "

 

이어서 나가노 총장은 두 가지 조건 즉

 

1. 진주만 공격이 남방작전을 방해하지 않고

2. 남방작전에 필요한 해군 항공력을 약화시키지 않는다

 

는 조건을 붙여 작전을 승인했다.

야마모토 제독을 깊이 신뢰하던 나가노 총장으로서는 야마모토가 아닌 다른 사람을 연합함대 사령장관 자리에 앉혀놓고 개전한다는 것은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었다.

 

(군령부 총장 나가노 오사미 대장. 자세한 내용은 여기로)

 

세 사람은 총장실을 나와 차장실로 돌아왔다.

이토 차장이 작전이 승인되었다고 말하자 구로시마 대좌는 뛸듯이 기뻐했다.

구로시마 대좌는 들뜬 목소리로

 

"이제 연합함대 사령장관과 참모들이 모가지를 내놓지 않아도 되겠습니다."

 

라고 떨떠름한 표정을 짓고 있는 후쿠도메 소장에게 말했다.

이렇게 진주만 기습은 실행 50일 전인 1941년 10월 18일에야 최종 승인을 받았다.

 

구로시마 대좌가 승인 소식을 나가토에 알리자 연합함대 참모들은 환호성을 질렀으며 야마모토 제독도 기뻐했다.

야마모토 제독은 구로시마 대좌에게 수고했다면서 도쿄 올라간 김에 좀 쉬고 22일에 복귀하라고 말했다.

 

진주만 기습이 승인됨과 동시에 연합함대 참모들 사이에서 제1항공함대 사령장관 나구모 중장에 대한 비판이 일어났다.

연합함대 참모장 우가키 마토메 소장은 나구모 중장을 경질해야 한다고 주장했으나 야마모토 제독은 받아들이지 않았다.

 

교체하고 싶어도 마땅한 인물이 없었다.

제1항공함대를 이끌만한 인물은 오자와 지사부로 중장 밖에 없었는데 그는 진주만 기습의 최종 승인이 났던 10월 18일에 남견함대 사령장관으로 발령이 난 상태였다.

게다가 나구모 제독은 나가토 회의 이후 아무런 불평불만없이 진주만 기습 준비에 묵묵히 최선을 다하고 있었다. 

 

사실 야마모토 제독은 진주만 기습부대를 직접 지휘하고픈 마음이 굴뚝같았으나 불가능했다.

일본해군의 실전부대를 총지휘하는 연합함대 사령장관으로서 그는 남방작전의 최종 준비 상황도 소홀히 다룰 수 없었을 뿐 아니라 일촉즉발의 긴장된 상황에서 하와이로 몰래 접근하느라 2주일 이상 무선침묵 상태를 유지할 수 있는 지위가 아니었다.

전시도 아닌 상황에서 2주일 이상 연합함대 사령장관같은 중요한 인물의 행방이 묘연하면 즉시 미군의 주의를 끌 것이었다.

결국 진주만 기습의 현장 지휘는 나구모 제독에게 맡길 수 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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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전쟁연습(War Game)

 

1941년 4월 10일, 일본해군은 제1항공함대를 창설했다.

제1항공전대(아카기, 카가), 제2항공전대(소류, 히류) 그리고 제4항공전대(류조)로 이루어진 제1항공함대의 창설로 항모기동부대는 전함 중심 함대의 조연에서 벗어나 해전의 주역으로서 전략적 승리를 가져올만큼 강력한 항공력을 보유하게 되었다.

제4항공전대는 나중에 신예 항공모함 쇼가쿠와 즈이가쿠로 구성된 제5항공전대로 교체되며 이렇게 6척의 항모로 구성된 제1항공함대가 진주만을 기습한다.

 

제1항공함대 사령장관으로는 수뢰전 전문가로서 해군대학장이었던 나구모 주이치 중장, 참모장으로는 구사카 류노스케 소장, 그리고 항공참모로는 겐다 미노루 중좌가 임명되었다.

나구모 중장이 제1항공전대 사령관을 겸했으며 제2항공전대 사령관은 공격적인 야마구치 다몬 소장, 제5항공전대 사령관은 하라 주이치 소장이었다.

 

제1항공함대 사령장관 나구모 중장은 항공전에 대해 잘 몰랐으며 참모장 구사카 소장은 항공전에 대해 해박하다는 평을 듣고 있었으나 실제로는 실력이 모자랐다.

따라서 두 사람은 항공참모 겐다 중좌에게 의존했는데 게다가 나구모 사령관과 구사카 참모장은 진주만 기습에 반대하는 입장이었다.

그들이 보기에 진주만 기습은 지나치게 모험적이었다.

결국 겐다 중좌가 제1항공함대 내에서 야마모토 제독을 대리하여 진주만 기습 준비를 이끌었으며 그 과정에서 영향력이 더욱 커졌다.

 

제1항공함대 창설과 함께 연합함대 참모장도 후쿠도메 시게루 소장에서 이토 세이치 소장으로 바뀌었다.

후쿠도메 소장은 군령부로 옮겨가 작전을 담당한 제1부장이 되었다.

이토 소장도 1941년 8월 1일에 우가키 마토메 소장에게 연합함대 참모장 자리를 넘겨주고 9월 1일에 군령부 차장이 되었다.

후쿠도메 소장과 이토 소장은 연합함대 참모장 시절부터 진주만 기습을 내심 반대했으며 군령부에 들어간 이후 공공연하게 반대한다.

 

따라서 1941년 9월 중순의 전쟁연습 때가 되어서야 군령부가 연합함대의 진주만 기습 계획을 알았다고 하는 주장은 사실이 아니다.

실제로 야마모토 제독이 진주만 기습에 대한 자신의 구상을 군령부에 정식으로 알린 것은 1941년 4월 말이었다.

연합함대 선임참모인 구로시마 가메토 대좌가 군령부 제1부 작전과장인 도미오카 사다토시 대좌를 찾아와서 진주만 기습에 대해 설명하고 군령부에서 심도있게 검토해 주기를 요구했다.

 

도미오카 대좌는 거부했다.

그가 생각하기에 일본해군의 제1목표는 자원이 풍부한 남방지역을 점령하는 것이었으며 여기에 전력을 집중해야 했다.

하와이에서 출격하는 미함대는 전통적인 방식대로 잠수함과 항공기로 세력을 깎아먹은 후에 함대결전으로 섬멸하면 될 것이었다.

 

도미오카 대좌와 구로시마 대좌는 치열하게 토론했으나 결론을 내지 못하고 서로 상대방의 사고방식을 어리석다고 생각하면서 토론을 마쳤다.

구로시마 대좌가 돌아가자 도미오카 대좌는 나가노 군령부 총장에게 보고했으며 이로써 야마모토 제독은 진주만 기습 계획을 군령부에 알린다는 목적을 달성했다.

 

일본해군의 전쟁연습(war game)은 통상 11월 말에서 12월 초에 걸쳐 실시했으나 개전 시점을 11월 말 정도로 예상하고 있던 야마모토 제독은 군령부에 전쟁연습을 9월로 당겨달라고 요청했다.

1941년 8월 7일, 구로시마 대좌가 연합함대 참모들과 함께 군령부를 찾아와 작전과장 도미오카 대좌에게 전쟁연습을 앞당겨 줄 것과 전쟁연습에 진주만 기습을 포함시켜 줄 것을 요구했다.

도미오카 대좌는 요구를 받아들였으나 이것이 곧 군령부가 진주만 기습에 찬성한다는 뜻은 아니었다.

실제로 이날 군령부에서는 구로시마 대좌가 이끄는 연합함대 참모들과 도미오카 대좌가 이끄는 군령부 작전과 참모들 사이에 진주만 기습을 두고 열띤 토론이 벌어졌다.

 

구로시마 대좌는 일본연합함대와 미국태평양함대의 전력을 비교해 보았을 때 일단 남방작전이 시작되면 연합함대가 남방작전을 뒷받침하면서 동시에 일본군의 옆구리를 노리는 태평양함대를 상대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지적했다.

따라서 개전과 동시에 진주만을 기습하여 6개월 이상 태평양함대를 전장에서 쫓아내야 한다고 주장했다.

 

여기에 대해 도미오카 대좌는 조목조목 반박했다.

 

1. 진주만 공격은 기습이 필수적인데 장거리를 항해하는 커다란 항모기동부대를 숨기기는 어렵다.

하와이로 접근하는 도중 많은 항공기나 배들이 보게 될 것이며 설령 이들을 피한다고 해도 미군의 장거리 정찰에 걸릴 확률이 높다.

전쟁이 예상한 날짜인 X 데이에 벌어진다는 보장도 없으며 진주만 공격부대가 하와이로 접근하는 도중에 태평양 지역의 미군과 일본군 사이에 우발적인 충돌이라도 벌어지면 하와이의 경계가 강화될 것이다.

 

2. 다른  배나 비행기를 피하려면 북태평양으로 가야 하고 그러려면 해상급유가 필요하다.

그러나 일본해군은 해상급유의 경험이 적으며 늦가을 이후 북태평양에서 해상급유가 가능한 날은 1달에 7일 밖에 되지 않는다.

 

3. 함재기가 진주반 상공에 도달했을 때 미군함정들이 모두 항 내에 있으리라는 보장이 없다.

 

4. 기습에 성공해도 큰 성과를 거두기 어렵다.

진주만 상공은 함정을 공격하려는 항공기가 기동하기에 협소하다.

또한 수심이 얕아 대형함 공격에 효과적인 어뢰를 쓰기 어렵고 수평폭격은 명중율이 낮으며 명중율이 높은 급강하 폭격은 전함의 갑판을 뚫을 수 없다.

 

5. 남방작전을 지원해야 할 지상발진항공기 세력이 약하기 때문에 항공모함들도 남방지역에 대한 상륙작전을 지원해야 한다.

 

6. 항공모함들이 진주만을 기습하지 않고 남방작전에 투입되어도 함대결전을 준비할 시간은 충분하다.

전쟁 발발시 진주만을 떠난 태평양함대는 필리핀으로 직행하지 않고 자신들의 후방 보급로를 위협하는 마셜제도를 먼저 공격할 것이다.

따라서 하와이 부근에 깔아놓은 잠수함으로부터 미함대가 진주만을 떠났다는 경보를 받고 준비를 시작해도 마셜제도를 경유한 미함대가 필리핀에 접근하기 전에 함대결전을 위한 준비를 갖출 수 있을 것이다.

일본해군은 이런 상황에 대비하여 지난 20년간 피땀을 흘리며 훈련해 왔다. 

 

이로써 군령부가 진주만 기습을 반대한다는 점이 명확해졌다.

 

1941년 9월 초에 제1항공함대의 기함인 아카기에서는 진주만에 접근하는 경로를 두고 토론이 벌어졌다.

항공참모 겐다 중좌는 남방항로, 중앙항로, 북방항로의 3가지 경로를 제시했다.

 

남방항로는 세토 내해의 하시라지마를 출발한 함정들이 마셜제도의 웟제 환초에서 집결한 다음 남쪽으로부터 하와이에 접근하는 코스였다.

잇점은 날씨가 좋으며 웟제 환초에서 급유를 받을 수 있어 해상급유 없이 공격이 가능했다.

또한 일이 잘못되어 미함대와 해상전투를 벌일 경우 마셜환초에 전개한 지상발진 항공기들의 지원을 받기 쉬웠다.

단점은 하와이 남서해역이 태평양 함대의 훈련 해역으로 정찰이 엄중하여 훈련 중인 미함정들을 만나거나 정찰기에 들킬 위험이 많았다.

 

(서태평양. http://classroom.mapshop.com/HISTORY/US/World-War-II-Pacific.asp

 

중앙항로는 요코스카나 하시라지마를 출발한 함대가 오가사와라 제도의 치치지마에서 집결한 후 미드웨이 북쪽 800km 해역을 통과하여 하와이 북쪽에 도달한 다음 남진하는 코스였다.

이 항로는 북방항로처럼 해상이 거칠지 않고 남방항로와 달리 미해군의 훈련 해역을 통과하지 않았다.

그러나 치치지마에 급유 시설이 없어서 해상급유가 필요했고 오가사와라 제도를 감시하는 미국 잠수함이나 미드웨이의 미군 항공기에게 들킬 확률이 높았다.

 

북방항로는 일본에서 출발한 함정들이 쿠릴 열도에서 모인 다음 북태평양을 건너 북쪽으로부터 하와이로 접근하는 코스였다.

장점은 민간선박이나 항공기의 항로로부터 비껴나 있고 미군의 정찰도 허술하여 들킬 위험이 적다는 것이었다.

문제는 해상급유가 필요했는데 늦가을과 겨울에는 해상이 거칠어져 급유 가능한 날이 1달에 7일 밖에 되지 않았으며 항해 또한 어려웠다.

 

나구모 제독은 해상급유가 필요없고 날씨가 좋으며 유사시 마셜 제도에 전개한 지상발진항공기의 도움을 받기 쉬운 남방항로를 선호했다.

반면 겐다 중좌는 들킬 위험이 적은 북방항로를 선호했다.

 

이러한 차이는 기습의 중요성에 대한 인식 차이이기도 했다.

나구모 제독은 대규모 함대가 완전 기습을 가하기는 어렵다고 보고 들킬 위험이 다소 있더라도 공격부대가 온전한 상태로 하와이에 도달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반면 겐다 중좌는 기습이야말로 진주만 공격의 핵심으로 들킬 위험을 낮출 수 있다면 거친 날씨와 해상 급유의 어려움을 감내해야 한다고 믿었다.

 

나구모 중장이 늦가을과 겨울에 북방항로가 얼마나 험난한지, 그리고 거친 해상에서 해상급유를 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 강조하자 겐다 중좌는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제독님께서 북방항로를 나쁘다고 생각하신다면 미국 제독들도 똑같이 생각한다는 점을 기억하셔야 합니다."

 

제1항공함대의 참모장 구사카 소장이 겐다 중좌에게 동조하면서 군령부에서 실시할 전쟁연습은 북방항로로 실시하기로 결정되었다.

 

도쿄에 있는 해군대학에서 벌어지는 일본해군의 전쟁연습은 평소 11월 말에서 12월 초에 걸쳐 실시되었다.

전쟁연습에는 해군 내에서 잘 나가는 제독과 그 참모들이 참가했으며 그들은 오랜만에 동기를 만나 밤마다 술집에서 음주가무를 즐기면서 회포를 풀었다.

전쟁연습이 끝나면 곧 성탄절과 신정으로 이어졌는데 일찌기 서구화를 단행한 일본에서 성탄절과 신정은 서양 못지않게 큰 명절이었다.

이래저래 전쟁연습에 참가하는 사람들은 흥겨운 마음으로 참가하는 것이 일반적이었으나 1941년에는 달랐다.

무엇보다 날짜가 2달 정도 앞당겨진 9월 11일에 시작되었고 내용도 엄중하여 연습기간 중에 술을 먹거나 할 분위기가 아니었다.

 

첫날인 9월 11일 목요일은 오전 9시부터 오후 1시까지 참가자들끼리 전쟁연습을 위한 토론회를 하고 마쳤다.

다음날인 12일 금요일부터는 오전 8시부터 오후 5시까지 남방작전에 대한 전쟁연습이 주말도 없이 16일 화요일까지 계속되었으며 16일에는 마지막으로 진주만 기습에 대한 전쟁연습이 있었다.

 

전쟁연습은 일본해군을 뜻하는 청군과 연합군을 뜻하는 홍군으로 나뉘어 진행했다.

청군의 총지휘는 주로 총사령부의 참모장이 맡고 청군 단위 부대의 지휘관은 해당 부대의 참모장들이 맡았다.

홍군은 주로 대좌가 총지휘했으며 좌관급 장교들이 단위 부대를 지휘했다.

15일까지 전쟁연습은 말레이, 필리핀, 보르네오, 셀레베스, 길버트 제도, 괌, 웨이크에 대한 침공을 다루었으며 아직 세부 작전 계획이 나오지 않은 네덜란드령 동인도 제도는 제외했다.

 

특이한 것은 진주만 기습 계획의 수립에 큰 역할을 맡았던 오니시 다키지로 소장이 전쟁연습 이후 진주만 기습을 반대하는 쪽으로 돌아섰다는 점이다.

필리핀 침공을 지원하는 제11항공함대의 참모장으로 전쟁연습에 참가했던 오니시 소장은 거대한 작전의 규모에 비하여 제11항공함대의 전력이 부족하다는 사실을 절감했다.

특히 신예 전투기인 제로기가 부족했다.

오니시 소장은 필리핀 침공을 다룬 전쟁연습이 끝나자 항모기동부대가 하와이를 공격하는 대신 제11항공함대를 도와 필리핀 침공에 투입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마지막으로 9월 16일 화요일 아침부터 해군대학의 별실에서 진주만 기습에 대한 전쟁연습이 시작되었다.

이 연습은 다른 연습과는 달랐다.

원래 전쟁연습에서는 자기가 직접 관련되지 않은 작전도 참관할 수 있었으나 진주만 기습의 전쟁연습에는 작전에  직접 관련된 인물로서 야마모토 제독이 허가한 30명 정도의 인원만이 입실할 수 있었다.

이들은 대부분 진주만 기습에 참가할 지휘관과 참모, 대항군인 홍군을 담당한 장교들, 그리고 군령부를 대표하여 참관한 후쿠도메 제1부장, 도미오카 작전과장, 작전참모 사나기 사다무 대좌 그리고 항공참모 미요 다츠키치 중좌 등이었다.

재미있는 것은 진주만 공격부대의 지원대를 지휘할 제3전대 사령관 미카와 구니치 중장과  경계대를 지휘할 제1수뢰전대 사령관 오모리 센타로 소장은 이때서야 진주만 기습 작전을 알게 되었다고 한다.

 

전쟁연습을 앞둔 토론 시간에 나구모 제독이 북방항로 대신 남방항로를 제안했으나 제2항공전대 사령관 야마구치 소장을 필두로 모두들 반대하여 북방항로를 따라 전쟁연습이 시작되었다.

관례에 따라 청군은 제1항공함대 참모장 구사카 소장이 지휘했고 홍군은 군령부에서 정보를 담당하는 제3부의 정보과장 오가와 간지 대좌가 지휘했다.

공격 예정일은 1941년 11월 25일 새벽이었으며 청군의 항모는 4척이었다.

 

대항군인 홍군을 지휘한 오가와 대좌는 16일 오전의 전쟁연습에서 파란을 일으켰다.

홍군의 정찰기가 공격 전날 900km 거리에서 청군의 항모기동부대를 발견하자 오가와 대좌는 홍군함대를 모두 끌고 나오는 대신 함대는 정박시켜 둔 채 요격에 전념했다.

다음날 새벽에 항공모함에서 1시간 간격을 두고 출격한 청군의 함재기 제1파와 제2파는 진주만 상공에서 벌떼같이 달려드는 홍군의 요격기들을 만났다.

공격은 실패하여 청군은 공격에 나선 함재기의 절반을 잃으면서 홍군의 함대에 가벼운 손실만을 입혔다.

청군의 공격을 막아낸 홍군은 살아남은 항공기로 청군 함대를 역습하여 4척의 항모 중 2척을 격침하고 2척에 피해를 입혔으며 호위함정 몇 척을 격침했다.

청군은 참패했다.

 

오전의 실패를 거울삼아 오후의 전쟁연습에서 청군함대는 하와이 북방에 도착하는 시간을 조절했다.

오아후를 출발한 정찰기가 돌아갈 시간인 저녁에 하와이 북방 700km 거리에 도달한 청군함대는 밤새 남하하여 새벽에 공격대를 내보냈다.

이번에는 기습에 성공한 청군이 큰 전과를 거두었다.

청군은 항공모함 엔터프라이즈와 렉싱턴, 전함 4척, 순양함 3척을 격침하고, 항공모함 새러토가, 전함 1척, 순양함 3척을 대파했다.

또한 홍군의 항공기 50대를 격추하고 80대를 지상에서 파괴했다.

 

홍군을 지휘하던 오가와 대좌는 포기하지 않고 남은 항공기를 긁어모아 청군함대를 공격했다.

청군함대의 전투초계기들이 홍군 항공기 50대를 추가로 격추했으나 홍군은 항공모함 1척을 격침하고 1척을 대파하여 일부 원수를 갚았다.

이때 마침 스콜이 쏟아져 청군함대는 무사히 도망쳤다.

오가와 대좌는 갑작스런 스콜의 등장에 항의했으나 묵살되었다.

이로써 전쟁연습이 끝났다.

 

전쟁연습의 결과는 연합함대와 군령부 모두에게 불만이었다.

군령부는 전쟁연습이 해상급유의 어려움을 반영하지 않았으며 제로기 1대의 능력이 홍군 전투기 3대와 같다고 설정한 것은 지나치다고 생각했다.

특히 청군함대가 공습을 받을 때 마침 스콜이 쏟아져 도망칠 수 있었다는 결론에 어이없어했다.

야마모토 제독 또한 전쟁연습으로 군령부를 설득하려던 계획이 틀어졌다.

겐다 중좌는 하와이 상륙도 다룰 것을 주장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다음날인 17일에 벌어진 토론에서는 다양한 의견이 나왔다.

겐다 중좌는 항공모함이 모자라서 결과가 나빴다면서 만일 청군의 항모 숫자가 4척이 아니라 6척이었으면 훨씬 좋은 결과가 나왔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군령부는 설사 진주만을 기습하더라도 항공모함은 3척, 아무리 많아도 4척 이상은 안 된다고 맞섰다.

 

제3전대 사령관 미카와 중장은 전함 히에이와 기리시마 이외에 제3함대에 배속된 전함 공고와 하루나도 진주만 기습에 참가시켜야 한다고 주장했다.

여기에 대해 제3함대 사령장관 다카하시 이보우 중장이 강력하게 반대했으며 군령부의 지지를 받아 공고와 하루나를 지킬 수 있었다.

 

진주만 기습에 대한 토론회는 17일 오후 5시 30분에 참가자들이 저녁식사를 시작하면서 끝났다.

1941년의 전쟁연습이 공식적으로 끝난 것은 9월 20일 오후 5시 30분이었다.

 

군령부 제1부는 9월 28일에 연합함대 참모장 우가키 마토메 소장이 이끄는 연합함대 참모들 및 제1항공함대 참모장 구사카 류노스케 소장이 이끄는 제1항공함대 참모들과 함께 극비리에 진주만 기습 전쟁연습에 대한 토론회를 열었다.

제1부장 후쿠도메 소장의 개회사에 이어 양측은 불꽃튀는 설전을 벌였으나 서로의 의견 차이만 확인했을 뿐 결론은 나지 않았다. 

진주만 기습을 반대하는 군령부의 태도는 변한 것이 없었다.  

실제로 후쿠도메 소장은 전쟁연습이 끝난 직후 나가노 군령부 총장에게 진주만 기습에 반대한다는 의견을 올리고 동의를 받은 상태였다.

 

재미있는 것은 진주만 기습을 실행해야 할 제1항공함대 참모장 구사카 소장이 토론에서 진주만 기습에 반대하는 군령부 편에 섰다는 사실이다.

물론 제1항공함대의 항공참모 겐다 중좌는 연합함대의 항공참모 사사키 아키라 중좌와 함께 진주만 기습을 찬성하면서 토론에서 맹활약했다.

 

비밀 토론회의 결과를 보고받은 야마모토 제독은 불같이 화를 내면서

 

"그게 무슨 바보같은 모임인가? 그 입만 살아있는 놈들은 대체 무슨 생각이지? 도대체 누가 미함대를 절름발이로 만들어 놓지 않고서 남방작전이 가능하다고 단 1초라도 생각할 수 있단 말인가? 나는 연합함대 사령장관으로서 내 계획을 관철시키고야 말겠다!"

 

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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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간첩 활동

 

하와이의 일본영사관은 설치된 이래 계속 간첩활동을 해왔다.

1940년 5월에 미함대가 진주만에 상주하게 되자 일본 외무성은 군령부의 요청에 따라 군지 기치 하와이 총영사에게 미함대의 규모, 배치 및 활동에 대하여 정기적으로 보고하라고 명령했다.

이러한 임무를 싫어했던 군지 총영사는 하와이 신문에 나온 내용만 모아 보고했는데 뜻밖에도 효과적이었다.

당시 하와이 신문들은 경쟁적으로 미함대의 규모, 숫자 및 활동에 대하여 보도했으며 친절하게도 개별 함정의 이름과 입출항 날짜까지 보도했다.

 

정보 수집에 소극적이었던 군지 총영사는 군령부의 요구에 의하여 1940년 9월 11일에 교체되어 귀국하고 부영사였던 오쿠다 오쿠지로가 총영사가 되었다.

보다 적극적이었던 오쿠다 총영사는 신문에만 의지하지 않고 영사관 직원을 시켜 정보를 수집하여 신문의 정확성을 검증하고 보도하지 않은 부분을 보충했다.

정보수집에 동원된 것은 총영사관의 요리사로서 일본의 해군사관학교인 에타지마 병학교에 입학했다가 체력이 딸려 중퇴한 39세의 세키 고이치였다.

일본 외무성에서 보내준 제인군함연감으로 미국 함정의 모습을 익힌 세키는 영사관 밖으로 나가 정보를 수집했다.

 

세키의 정보수집은 평범했다.

대부분의 경우 세키는 호놀룰루 시내에 있는 영사관 앞에서 택시를 잡아타고 진주만의 공창 쪽으로 가면서 차창을 통하여 정박 중인 미함정들을 살폈다.

공창 앞에는 노점이 허용되어 있었기 때문에 거기서 청량음료 한 잔을 마시면서 항내를 둘러보고는 다시 택시를 타고 나왔다.

가끔씩은 일본계 2세로 1935년부터 영사관에서 서기로 일하고 있던 리차드 미사유키 고토시도로가 모는 차를 타고 진주만의 동쪽에 있는 펄시티나 북쪽에 있는 아이에와에 가기도 했다.

하와이에서 태어나 자란 고토시도로는 영어가 유창하고 현지 물정에 밝아서 세키에게 도움이 되었다.

세키는 출입금지구역에 들어가지 않았으므로 그의 정보수집활동은 합법의 테두리를 벗어나지 않았다.

 

오쿠다 총영사는 신문에서 얻은 정보와 세키가 가져온 정보를 취합하여 보고서를 작성한 다음 암호실의 츠키카와 사이논에게 넘겼다.

츠키카와가 암호화한 보고서는 미국의 상업 통신망을 타고 일본 외무성을 거쳐 군령부에 도달했다.

 

미국은 1941년 들어서야 신문의 보도가 미함대에 위험하다는 걸 깨달았다.

1941년 2월 5일자 호놀룰루 스타 불리틴 지의 1면 제목이 '함대 주력, 출항하다.'(MAIN BODY OF FLEET TO SEA.)였다.

2월 10일에 해군장관 프랭크 녹스는 언론에게 군사기밀을 유지해 줄 것을 요청했으며 국민에게도 함정 승조원의 이동 상황에 대하여 알려고 하지 말아달라고 요청했다.

하와이에서는 제14해군관구 사령관인 클로드 블로크 소장이 스타 불리틴 지에 대하여 함대의 움직임을 보도하는 기사가 함대를 위험에 빠뜨린다면서 강력하게 항의했다.

이후 신문들은 자제하기 시작했으나 일본 영사관은 정보수집의 노하우를 터득하여 지장을 받지 않았다.

 

1941년 초가 되자 일본은 진주만의 미함대가 두 개로 나뉘어 하나는 해상에 하나는 항 내에 머무른다는 것을 알아내었으며 교대 시점이 매주 수요일이라는 사실도 파악했다.

이런 패턴은 이후 변하게 되지만 문제는 미해군이 일정한 패턴을 따라 행동하며 그 사실을 일본에게 들켰다는 사실이었다.

물론 평화시 훈련에 주력하는 함대가 일정한 패턴을 갖기 쉬운 면은 있었으나 그래도 함대 이동같은 중요한 문제에서 일정한 패턴을 따라 행동한다는 것은 피해야 할 일이었으며 미해군은 실수를 저질렀다.

진주만 기습 날짜인 12월 7일도 태평양함대의 패턴을 읽은 일본군이 가장 많은 함정이 항 내에 정박하는 일요일을 고른 결과였다.

 

1941년 3월 14일에 하와이 총영사로 기타 나가오가 부임했고 오쿠다는 원래 자리인 부영사로 돌아갔다. 

 

기타 총영사가 부임한 지 2주 후인 1941년 3월 27일에 모리무라 타다시라는 이름을 가진 29세의 풋내기 서기관이 니타 마루를 타고 호놀룰루 항의 8번 부두에 도착했다.

모리무라는 1만 7천톤급 대형 호화여객선인 니타 마루에서 1명 뿐인 1등 객실 손님으로서 부영사라는 직함을 사용했으며 항해 중에도 매일 선장과 함께 식사를 했기 때문에 항해 중에도 선내에서 유명했다.

당시 일본에서 하와이까지 1등 객실의 뱃삯은 2000엔으로 모리무라같은 하급 외교관의 10개월치 봉급에 해당했다.

더구나 기타 총영사가 니타 마루의 객실까지 찾아가서 모리무라를 영사관으로 데리고 와서 인사를 시켰다.

기타 총영사는 모리무라의 숙소로 단독주택을 배정했는데 독신의 풋내기 서기관에게 단독주택을 배정한 것은 유례가 없는 일이었다.

며칠 후 기타 총영사는 모리무라를 미국 측에 서기관으로 등록했다.

 

이후로도 모리무라의 행동은 의문의 연속이었다.

모리무라는 일본계 2세를 담당하는 부서에 배치되었는데 그곳은 이미 2명이 근무하고 있어 인원이 충분했다.

사실 모리무라는 담당 업무에 대하여 아는 것이 없었으며 배우려고 하지도 않았다.

아침에 출근하여 인사를 하고 외출해서는 퇴근 시간이 되어서야 영사관으로 돌아왔는데 안 돌아오는 날도 많았다.

 

영사관을 나간 모리무라는 신나게 놀았다.

아가씨들을 태우고 드라이브를 하고 보트를 즐겼으며 저녁에는 기타 총영사가 소개시켜 준 춘조루라는 일본 요정에 가서 게이샤들과 어울려 술을  마셨다.

기타 총영사는 모리무라에게 경고 한 번 하지 않았다.

 

그러자 영사관 내에 모리무라가 외무성 고관의 청탁으로 낙하산을 타고 내려왔다는 소문이 퍼졌다.

일본 영사관을 감시하던 미국 정보기관들도 새로 도착한 서기관이 일본 유력인사의 아들로 해외 근무 경력을 쌓기 위하여 하와이 영사관에 배치된 돈많고 놀기 좋아하는 한량으로 평가하고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다.

이것이야말로 일본 군령부가 바라던 바였다.

 

모리무라의 본명은 요시카와 다케오로서 고도로 훈련된 정보장교였다. 

하와이에 배치될 당시 29세였던 요시카와는 에타지마 병학교를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했으나 임관 직후 심각한 위장병으로 예편당했다.

실의에 빠져있던 그에게 인사장교가 와서 스파이를 뜻하는 정보장교가 되겠다면 해군에 자리가 있다고 권고하자 받아들였다.

정보를 담당한 군령부 제3부 제8과에 배치된 요시카와는 영어와 함께 필리핀, 괌 및 하와이의 미군에 대하여 4년간 집중적인 교육을 받아 태평양 지역의 미군에 대하여 웬만한 미군 장교보다 많은 지식을 가지게 되었다. 

요시카와는 이후 외무성에 파견되어 서기관으로 임명된 후 하와이 영사관으로 파견되었다.

 

(요시카와 다케오. 자세한 내용은 여기로)

 

하와이로 파견된 요시카와는 정보 수집의 핵심 인물이 되었다.

그는 주로 고토시도로와 함께 움직였으며 세키는 요시카와로부터 정보 수집 요령을 교육받고 따로 움직였다.

요시카와는 이동시 고토시도로의 37년산 포드 자동차 아니면 60세의 일본계 2세 존 요시게 미카미의 택시를 이용했다.

 

요시카와의 정보수집 방식은 겉보기에 세키와 큰 차이가 없었으나 효율적이었다.

그가 자주 가던 춘조루는 진주만 부근의 알레와 언덕에 있어서 2층에서는 진주만과 히컴 비행장이 한눈에 보였다.

비록 맨눈으로 보기에는 너무  멀었으나 2층에는 손님 누구나가 볼 수 있는 망원경이 있었다.

 

요시카와는 진주만 부근의 아이에와 언덕을 비롯하여 항만과 그 부근을 볼 수 있는 관측 포인트를 몇 군데 확보했다.

그는 관측 포인트들을 옮겨 다니면서 관찰했으며 아무리 좋은 포인트에도 연속하여 가지 않았다.

요시카와는 육안 관찰이 어려운 카네오헤 비행장을 관찰할 때 이외에는 주의를 끌 수 있는 쌍안경을 사용하지 않았으며 사진을 찍거나 스케치를 하거나 메모를 하지도 않았다.

그는 자신이 본 내용을 머릿 속에 기억했다가 숙소로 돌아와서 기록했다.

이렇게 만든 보고서를 1주일에 1번씩 기타 총영사에게 제출하면 암호화한 다음 도쿄에 타전했다.

 

요시카와는 미군 항공기의 출격 패턴을 관찰했는데 쌍안경을 사용하지 않아서 이륙한 항공기가 어디서 변침하며 어느 거리까지 정찰하는지 알 수 없었다.

그러나 항공기들이 오아후 섬의 북쪽으로는 좀처럼 날아가지 않는다는 것은 알 수 있었다. 

 

진주만의 북동쪽에는 펄 시티가 있었다.

이곳의 부두는 진주만과 포드 섬을 한 눈에 볼 수 있는 절호의 관측 지점이었으나 요시카와는 어떤 경우라도 1주일에 3회 이상은 부두에 가지 않았으며 갈 때마다 옷을 바꾸어 입었다.

요시카와는 이 부두에서 포드 섬의 전함들이 2열로 정박한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이 정보에 근거하여 일본은 진주만 기습시 바깥쪽의 전함들은 어뢰로 공격하고 안쪽의 전함들은 수평폭격으로 공격한다는 계획을 세웠다.

 

1941년 5월 12일 보고에서 요시카와는 전함들의 이름을 모두 확인했으며 유타는 단지 표적함일 뿐이라는 사실도 알아내었다.

다만 요시카와도 히컴 비행장 때문에 가려진 진주만 입구에 대잠망이 있는지 없는지는 알 수 없었으며 진주만의 잠수함들에 관해서도 몰랐다.

 

일본은 요시카와의 보고 덕분에 1941년 5월에 태평양함대 전력의 약 1/4 이 대서양으로 빠져나갔다는 사실을 알았다.

요시카와는 5월 23일에 전함 아이다호, 미시시피, 뉴멕시코가 사라졌다고 보고했으며 26일에는 경순양함의 숫자가 10척에서 7척으로 줄었다고 보고했다.

이 보고는 얼마 후 파나마 운하의 정보원으로부터 이들 함정들이 파나마 운하를 통과했다는 보고로 확인되었다.

 

같은 5월에 요시카와는 미해군이 마우이 섬의 라하이나 정박지를 포기했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일본은 전해인 1940년에 미해군이 수심이 깊은 라하이나 정박지를 포기했다는 정보를 입수했는데 이후 사용을 재개했는지 궁금해했다.

요시카와의 보고 덕분에 진주만 기습 당시 일본기들은 라하이나 정박지를 무시하고 오아후 섬에 전력을 집중할 수 있었다.

 

일본은 또한 미해군이 카네오헤 앞바다를 임시 정박지로 쓴다고 의심하고 있었다.

요시카와는 하와이 아가씨 2명과 함께 카네오헤 앞바다에서 뱃놀이를 했다.

이때 요시카와는 배 밑바닥에 설치된 유리를 통하여 수심을 살펴보고 커다란 군함들이 정박하기에는 카네오헤 앞바다의 수심이 너무 얕다는 것을 확인했다.

 

요시카와는 미군의 우려와 달리 하와이의 일본계가 전쟁시 일본을 지지하지 않을 것으로 보았다.

그는 보고서에서 하와이의 일본계를 '쓰레기' 라고 표현했다.

 

1941년 9월 24일에 일본 외무성은 진주만의 함대 정박 상황을 5개 구역으로 나누어 보고하라고 명령했다.

일본의 외교암호를 해독한 미 전쟁성은 이 명령의 의미에 대하여 고민했으나 미본토 서해안과 필리핀을 비롯한 태평양 각지에서 일본이 광범위하게 벌이고 있는 정보 수집 활동의 일부일 뿐 특별한 의미가 있는 것은 아니라는 결론을 내렸다.

요시카와는 이 명령에 따라 구역을 나누어 함정의 정박상황을 보고했다.

 

하와이의 일본 영사관은 외교 암호가 아닌 일본해군의 암호를 쓰고 있어서 미국이 해독을 하지 못하고 있었다.

진주만을 구역별로 나누어 보고하라는 내용을 해독한 것도 이 명령이 일본의 외교암호인 퍼플을 사용하는 워싱턴의 일본대사관으로 보내진 덕분이었다.

미국은 일찌기 1920년 이전부터 일본의 외교 암호를 해독했으나 1930년대 들어 암호 해독을 중단했고 그동안 일본은 암호를 개량하여 해독을 어렵게 만들었다.

그리하여 미국이 일본의 외교암호인 퍼플을 다시 해독하기 시작한 것은 1940년 8월부터였으며 일본해군의 암호인 JN-25b 는 진주만 기습 이후에야 해독하기 시작했다.

 

9월부터 요시카와는 공중에서도 간첩활동을 시작했다.

그는 게이샤 1-2명과 함께 로저스 비행장에서 비행기를 전세내어 오아후 상공을 날아다니면서 휠러 비행장, 히컴 비행장, 해병대의 에바 비행장 등을 관찰하고 격납고의 숫자를 세었다.

진주만 상공은 비행금지 구역이었으나 그는 부근을 날면서 군함들의 정박 상황과 포드 섬 비행장을 살필 수 있었다.

이 모든 걸 살펴보는데 20분이면 충분했다.

 

요시카와는 1941년 11월 15일부터 매일 진주만을 정찰하고 보고했다.

일본에 보낸 보고서에서 그는 함대가 주말에 항구로 돌아오며 많은 장교와 수병들이 상륙한다고 적었다.

 

11월 27일, 고토시도로는 요시카와의 명령을 받고 펄 시티의 부두에 가서 포드 섬에 엔터프라이즈가 정박 중인 사실을 확인했다.

다음날 엔터프라이즈는 웨이크 섬에 와일드캣 12대로 이루어진 제211해병전투비행대대(VMF-211)를 파견하기 위하여 출항했다.

진주만 기습 이틀 전인 12월 5일에 요시카와는 렉싱턴이 출항한 것을 확인했다.

렉싱턴은 미드웨이에 파견할 항공기들을 싣고 12월 5일 오전 8시 10분에 출항했다.

웨이크에 항공기를 파견한 엔터프라이즈는 진주만 기습 때까지 돌아오지 않았고 새러토가는 오버홀을 위하여 미본토 서해안에 있었으며 나머지 항공모함들은 대서양에 있었다.

이로써 미국의 항공모함들은 진주만 기습을 피할 수 있었다.

 

기습 전날인 1941년 12월 6일 오후 6시에 요시카와는 마지막 보고서를 기타 총영사에게 제출했고 총영사는 즉시 도쿄에 타전했다.

진주만에는 방공기구가 떠있지 않았으며 전함 부근에는 어뢰방지망이 없었다.

장거리 정찰은 이루어지지 않고 있었으며 함정들은 대부분 항 내에 정박하고 있었다.

물론 항공모함과 몇 척의 중순양함은 빠져나간 상태였지만 모든 것이 완벽할 수는 없었다.

마지막 보고 내용을 보면 요시카와나 기타 총영사가 진주만 기습을 알고 있었던 듯한 느낌이 들어서 흥미롭다.

 

요시카와는 진주만 기습 이후 영사관 직원들과 함께 억류되었으며 간첩 활동을 들키지 않은 채 1942년 8월 15일에 영사관 직원들과 함께 일본으로 추방되었다.

 

미국의 정보기관들은 언제나 하와이의 일본영사관이 간첩활동에 연루되어 있다고 의심했으나 1941년 당시에는 일본영사관이 보조적인 역할을 할 뿐 간첩망의 주축이라고 보지는 않았다.

그들은 일본계 지역 사회에 뿌리를 박고 대본영에 직접 보고하는 간첩망이 있다고 보았으며 이들의 목표가 일본계를 선동하여 폭동을 일으키거나 파괴활동을 하는 것이라고 믿어 하와이의 일본계 주민들과 지역 사회를 예의주시하고 있었다.

 

재미있는 것은 간첩 활동에서 가장 중요한 역할을 맡은 요시카와도 자신이 하와이 간첩망의 핵심인물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요시카와는 자신의 역할은 보조적일 뿐 하와이에는 자신도 모르게 활동하면서 대본영에 직접 보고하는 강력한 간첩망이 따로 있을 것으로 보았다.

 

실제로 군령부는 하와이에서 일본영사관과 관계없이 10명 정도의 간첩들을 직접 관리하고 있었으나 실상은 초라했다.

간첩들은 주로 전직 일본 해군장교들이었는데 기본을 망각하고 있었다.

세탁소 주인으로 위장한 간첩은 오아후를 방문한 자신의 옛날 부하였던 해군장교에게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경례를 받고 반말을 했다.

술집을 경영하던 간첩은 사무실 벽면에 자신이 일본해군의 정복을 입고 다른 장교들과 같이 찍은 기념 사진을 걸어두었는데 거기에는 장교들의 친필 사인이 들어 있었다.

양조장에 근무하던 간첩은 알콜 중독자로 술만 취하면 자신이 비밀임무를 수행 중인 해군장교라고 떠들었다.

그들은 미국 정보기관의 주시를 받고 있었으며 실적도 없었다.

결국 군령부는 1941년 10월 말에 간첩 활동을 중단하고 귀국시켰으며 이때 귀국하지 못한 간첩들은 진주만 기습 직후 체포되었다.

 

이들 중 베른하르트 오토 쿤이라는 독일인이 있었는데 독일해군 출신이었으며 1936년에 도쿄에서 군령부에 고용되어 하와이에 잠입했다.

쿤은 공작금으로 편하게 지내려는 사기꾼에 가까웠다.

군령부는 쿤에게 정착에 필요한 많은 돈을 주고 오아후 섬에 수년간 잠복시켰다가 결정적일 때 간첩으로 쓰려고 했다.

그러나 그는 현지에서 여러번 사업에 손을 댔다가 실패했을 뿐 아니라 부인 및 딸과 함께 사치한 생활을 하면서 돈을 탕진했다.

돈이 떨어지자 쿤은 일본영사관에 찾아가 공작금을 요구하여 아무것도 모르던 기타 총영사를 놀라게 만들었다.

기타 총영사는 쿤에  대해 외무성에 보고하면서 믿을 수 없다고 평가했으나 군령부는 쿤을 버리지 않고 다른 간첩들을 귀국시킬 때 쿤에게 14,000 달러의 거금을 주면서 11월부터 활동을 시작하라고 명령했다.

그러나 쿤은 미국 정보기관의 감시를 받고 있었으며 얼마 후 체포되었다.

 

결국 요시카와가 이끌던 일본영사관의 소규모 간첩단이 사실상 하와이에서 일본이 가진 간첩망의 모두였으나 그것으로 충분했다.

 

하와이의 미국 정보기관들은 1941년 11월 즈음부터 요시카와를 의심했으나 일본과의 외교 관계가 일촉즉발인 상황에서 확증도 없이 정식 외교관인 요시카와를 체포하거나 숙소를 압수수색할 수는 없었다.

일본 외교관들이 기회가 닿는대로 정보를 수집한다는 건 공공연한 비밀이었으며 그건 미국 외교관들도 마찬가지였다.

당시 FBI 는 불법적으로 하와이의 일본영사관과 그 직원들 및 일본계 지역사회의 전화를 도청하고 있었으나 체포될까봐 공포에 떨던 요시카와는 전화로 의심스러운 말을 흘릴만큼 어리석지 않았다. 

일본영사관은 진주민 기습 직전에 모든 서류를 불태우라는 명령을 받았으며 이때 요시카와는 자신의 간첩 활동을 증명할 서류들을 불태웠다.

미국 정보기관은 결국 요시카와를 잡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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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방어준비(2) - 1941년

 

1941년 1월 27일에 미함대 총사령관 제임스 리처드슨 제독은 해군성에 편지를 보내어 진주만의 방어를 위하여 육군의 전투기 및 대공포 세력을 증강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해군성이 넘겨준 리처드슨 제독의 편지를 읽어본 전쟁성은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으나 육군참모총장 마셜 대장은 리처드슨 제독의 지적에 일리가 있다고 생각했다.

마셜 장군은 신형 P-40B 전투기 50대를 포함한 81대의 전투기를 오아후 섬으로 최대한 빨리 보냈다.

 

(커티스 P-40 전투기. 자세한 내용은 여기로)

 

그러는 동안 하와이에서는 지휘 계통의 변경이 있었다.

1941년 2월 1일에 허즈번드 킴멜 제독이 제임스 리처드슨 제독의 뒤를 이었으며 동시에 태평양에 전개 중이던 함정들은 태평양함대가 되었다.

1주일 후인 2월 7일에는 찰스 헤론 소장의 뒤를 이어 하와이 육군사령관에 월터 쇼트 중장이 취임했다.

 

이론적으로 진주만의 항구 시설을 비롯한 하와이의 해군 시설에 대한 방어는 제14해군관구의 책임이었다.

그러나 진주만 기습 당시까지 제14해군관구 사령관 클로드 블로크 해군소장은 방어부대를 보유하지 못하여 그의 권한은 진주만을 비롯한 해군기지에 대한 행정적인 임무에 국한되었다.

따라서 블로크 소장은 진주만 기습의 책임에서도 비껴났다.

블로크 소장은 1942년에 경질되었는데 이는 선배의 권위를 내세워 사관학교 후배지만 이제는 자신의 상관인 신임 태평양함대 총사령관 체스터 니미츠 대장에게 자꾸 훈수를 두려 했기 때문에 쫓겨난 것으로 진주만 기습에 대한 문책은 아니었다.

 

전통적으로 하와이의 미육군과 해군은 거의 협조를 하지 않았으나 1940년 5월에 태평양 함대가 진주만을 모항으로 삼게 되면서 협조가 불가피해졌다.

그리하여 당시 미함대 총사령관 리처드슨 제독과 하와이 육군 사령관 헤론 장군은 항공력의 운용에 대하여 협정을 맺었다.

즉 해군은 장거리 정찰과 함대의 안전을 위한 공중 초계를 담당하며 공격시에는 해군기와 육군기가 별도로 공격한다는 것이었다.

 

1941년 3월 28일에 킴멜 제독은 쇼트 장군 및 블로크 소장과 함께 전임자들의 합의를 바탕으로 좀 더 세밀한 협정을 맺었다.

 

1. 장거리 정찰은 해군 책임이며 만일 육군 항공기가 장거리 정찰을 지원할 경우 해군의 지휘을 받는다.

2. 오아후 섬의 육상 방어에 투입될 경우 해군기건 육군기건  모두 육군의 지휘를 받는다.

3. 해상의 목표를 공격할 경우 해군기건 육군기건 모두 해군의 지휘를 받는다.

 

1941년 봄의 훈련에서 이 방식은 성과를 거두었으나 진주만 기습은 비상시에 이렇게 느슨한 협조 체계가 무용지물임을 보여주었다.

 

1941년 3월 31일에 하와이 육군 항공대 사령관 프레드릭 마틴 소장과 해군 항공대 사령관 패트릭 벨린저 소장이 마틴-벨린저 보고서(Martin-Bellinger Report)를 공동작성하여 전쟁성과 해군성에 제출했다.

(벨린저 소장의 직함은 편의적 호칭이며 진주만 기습 당시 그는 9개의 직함을 가지고 이론상 5명의 직속상관에게 보고해야 했다. 진주만 기습 이후 그가 다양한 직위를 겸하고 있었다는 사실이 비판을 받았지만 본인은 업무에 지장을 받지 않았다고 주장했다. 중요한 임무를 맡은 장교가 관련된 여러 직위를 겸임하는 것은 흔한 일이며 명령계통을 단순화하고 책임소재를 명확하게 하기 위하여 불가피한 면이 있다.)

 

진주만 기습을 실제와 가장 비슷하게 예측하여 유명해진 마틴-벨린저 보고서의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다.

 

1. 일본은 오렌지 계획에 따른 아군함대의 반격을 좌절시키거나 최소한 늦추기 위하여 진주만에 정박한 아군함대를 공격할 수 있다.

2. 일본의 잠수함이나 항공모함들이 아군 정보기관이 경고를 발하기 전에 하와이에 도달할 수 있다.

3. 일본의 공격은 선전포고 이전에 이루어질 것이다.

4. 가장 가능성이 높고 위험한 공격은 항공기에 의한 공격이며 아마도 480km 이내로 접근한 1척이나 또는 그 이상의 항공모함에서 이함할 것이다.

5. 반복공격의 가능성이 있다.

6. 만일 공격을 시도하는 일본잠수함을 1척이라도 발견한다면 반드시 항모기동부대가 뒤따르고 있을 것이다.

7. 공습은 새벽에 시도할 가능성이 높으며 공습과 동시에 잠수함의 공격을 시도할 가능성이 높다.

8. 현재 오아후의 항공기 세력은 이러한 공습을 막기에 역부족이다.

9. 이러한 공격을 막기 위해서는 오아후 섬을 중심으로 360도 방향으로 매일 장거리 정찰을 실시해야 하며 이를 위하여 B-17 중폭격기 180대를 오아후 섬에 배치해야 한다.(당시 해군이 보유한 초계기는 69대였는데 이들은 함대 훈련시 따라나가 훈련 해역의 초계를 담당해야 했으며 승무원과 부품 부족으로 장거리 초계에 많은 댓수를 투입하기 어려웠다.)

 

마틴-벨린저 보고서가 놀라울만큼 정확하게 진주만 기습을 예견한 것은 사실이지만 바로 그 때문에 진주만 음모론의 단골 소재로 쓰였으며 그 과정에서 살이 덧붙여졌다.

가령 보고서에는 음모론자들이 주장하듯 일본항공모함이 북쪽으로부터 접근할 것이라는 내용이 없다.

만일 그런 내용이 있다면 360도로 장거리 정찰을 권고한 내용과 모순된다.

또한 음모론자들의 주장과 달리 보고서는 일본항공모함이 6척 이상의 대규모로 내습할 것이라고 예견하지 않았다.

오히려 '항모 1척을 동반한 고속함들'(fast ships by a carrier) 이나 '항모 1척 또는 그 이상'(one or more carriers) 등의 표현을 사용하여 1척 내지 2척 정도의 소규모로 사용될 것임을 암시하고 있다.

 

해군성은 마틴-벨린저 보고서를 환영했다.

반면 단지 정찰을 위하여 금쪽같은 B-17 폭격기 180대를 내놓으라는 요구에 직면한 전쟁성은 떨떠름하게 생각했지만 무시할 수는 없었다.

 

마셜 장군은 1941년 4월 말에 대통령에게 제출한 보고서에서 오아후의 육군 병력이 31,000 명이며 6,000 명이 곧 증원될 것이라고 적었다.

그는 또한 오아후의 항공기 세력을 P-40 전투기 105대, 기타 전투기 65대, 중폭격기 35대, 중형폭격기 35대, 경폭격기 13대로 늘릴 것이라고 보고했다.

마셜 대장이 오아후에 대한 적의 위협을 평가하면서 마틴-벨린저 보고서와 달리 1. 파괴활동(sabotage) 2. 항공모함에 의한 공습 3. 상륙으로 우선 순위를 매긴 것이 눈길을 끈다.

그는 오아후의 육군 병력은 이미 1과 3에 대처하기에 충분하며 계획대로 항공기들이 배치되면 2에 대한 방어도 충분할 것이라고 보고했다.

 

항공기 증원은 지지부진했다.

마셜 장군이 대통령에게 제출한 보고서에서 언급한 35대의 B-17 폭격기는 1941년 4월 말까지 도착하기로 되어 있었으나 실제로는 5월 중순에야 도착했으며 그나마 약속한 35대 중에서 14대는 대서양으로 돌려지고 21대만 도착했다.

 

7월 초에 전쟁성은 하와이 육군항공대 사령관 마틴 소장에게 B-17 폭격기가 실제로 몇 대나 필요하냐고 물었다.

당시 미육군항공대와 전쟁성은 B-17 폭격기의 위력을 과대평가하여 35대로 이루어진 1개 폭격비행대가 6척의 항공모함과 맞먹는다고 계산했다.

마틴 소장은 마틴-벨린저 보고서에서 요구한 것과 마찬가지로 장거리 정찰을 위하여180대가 필요하다고 답했다.

전쟁성은 1년 후인 1942년 6월까지 최소 136대에서 최대 204대의 B-17 폭격기를 보내주겠노라고 약속했다.

 

그러나 현지 지휘관에게 듣기 좋은 말을 해주는 것과 절대적인 수량이 부족한 가운데 사방에서 서로 달라고 아우성치는 강력한 신형 중폭격기를 배분하는 것은 다른 문제였다.

오히려 1941년 9월 초에 하와이는 우선순위가 높은 필리핀에 9대의 B-17 폭격기를 빼앗기고 12대만이 남았다.

게다가 부품이 모자라서 절반 정도는 지상에서 부품 공급처 역할을 했고 마틴 소장은 가용한 B-17 폭격기로 승무원 훈련하기도 빠듯했다. 

진주만 기습 당시 오아후 섬의 B-17 폭격기는 12대였으며 6대만이 가용한 상태였다.

 

(보잉 B-17 플라잉포트레스 폭격기. 자세한 내용은 여기로)

 

전투기는 사정이 나았다.

진주만 기습 당시 오아후의 육군항공대는 마셜 장군이 보고서에서 언급한 숫자보다 단지 18대가 부족한 152대의 전투기를 보유하고 있었으며 2/3에 달하는 99대가 신형인 P-40 전투기였다.

그러나 역시 부품 부족으로 많은 전투기들이 부품공급처 역할을 해야 했으며 가용댓수의 대부분은 훈련에 투입해야 했다.

진주만 기습 당시 P-40 전투기 99대 중의 64대, P-36전투기 39대 중의 20대, P-26전투기 14대 중의 10대만이 가용한 상태였다.

 

항공기의 보호도 문제였다.

쇼트 중장은 1941년 2월에 부임하자마자 마틴 소장으로부터 항공기 보호를 위하여 항공기용 엄폐호가 필요하다는 보고를 받고 전쟁성에 예산 배정을 요청했다.

전쟁성은 1941년 5월에 253개의 엄폐호를 건설할 것을 허가했지만 예산 배정은 진주만 기습 때까지 없었다.

쇼트 중장은 1941년 가을까지 자체의 자원과 공병대를 동원하여 휠러 비행장에 85개의 엄폐호를 만들었다.

그러나 쇼트 중장은 11월 27일에 파괴활동에 의한 항공기 손실을 막기 위하여 항공기들을 한데 모아 경비하라는 명령을 내리면서 애써 만든 엄폐호를 무용지물로 만들었다.

 

항공기의 보호를 위해서는 엄폐호 못지 않게 여러 비행장에 분산하는 것이 효과적이었다.

육군은 1941년에 호놀룰루 동쪽의 동해안에 벨로우즈 비행장을 완성하여 전투기와 경폭격기용으로 사용했다.

오아후 섬 북쪽에는 연습용의 할레이와 비행장이 있었는데 지도에는 나오지 않았으며 따라서 진주만 기습 당시 일본기들도 존재를 몰랐다.

쇼트 장군은 또한 해군과 협의하여 해군 비행장의 활주로를 연장함으로써 유사시 중폭격기를 운용할 수 있도록 했다.

 

(오아후 섬. http://www.bouwman.com/world/Hawaii/Oahu-WWII.html)

 

전임 사령관들처럼 쇼트 중장도 오아후 이외의 섬에 비행장을 만들자고 건의했고 마틴-벨린저 보고서의 영향을 받은 전쟁성이 요청을 받아들였다. 

1941년 6월부터 중폭격기를 운용할 수 있는 비행장이 하와이 섬에 3개, 카우아이 섬에 2개 건설되기 시작했으며 몰로카이 섬과 라나이 섬에는 각각 1개씩 전투기 기지를 건설하기 시작했으나 모두 진주만 기습 때까지 완성하지 못했다. 

 

다른 섬에 비행장을 건설하면서 방어를 위하여 지상군도 파견했다.

쇼트 중장은 1941년 5월에 제299보병연대를 하와이 사단에서 분리했다.

제299연대의 1개 대대는 하와이 섬에, 1개 대대는 카우아이 섬에, 나머지 1개 대대는 마우이 섬과 몰로카이 섬에 분산 배치되었다.

이렇게 배치된 파견부대들은 하와이 군관구의 직속부대가 되었다.

 

(하와이 제도. http://www.antor.org/images/hawaii.jpg)

 

쇼트 중장은 대공방어의 중점을 대공포에 두었다.

1941년 9월에 작성된 전쟁성의 계획에 따라 오아후 섬에는 4개 대공포 연대가 배치되었으며 12월 말에 5번째 연대가 도착할 예정이었다.

편성표에 따르면 고고도 수평폭격기에 효과적인 3인치 대공포가 이동형 84문, 고정형 26문, 급강하폭격기나 저공으로 비행하는 적기에 유용한 37mm 대공포가 144문, 12.7mm 대공기관총이 516정에 달했다.

 

그러나 서류와는 달리  대공포 연대들은 형편없는 전력을 가지고 있었다.

진주만 기습 당시 실제로 배치된 대공화기는 3인치 대공포가 이동형 60문, 고정형 26문, 37mm 대공포가 20문, 12.7mm 대공기관총이 109정에 지나지 않았다.

 

게다가 37mm 대공포와 12.7mm 대공기관총의 탄약이 모자랐다.

37mm 대공포의 탄약은 진주만 기습 이틀 전인 12월 5일에야 충분한 양이 도착했고 12.7mm 대공기관총의 탄약은 진주만 기습 때까지도 모자랐다.

따라서 급강하 폭격기나 저공으로 공격하는 적기에 대한 사격 훈련이 부족했다.

 

탄약이 충분한 3인치 대공포도 문제가 있었는데 이동형의 경우 탄약을 탄약고에 보관했으므로 최소한 몇 시간 전에 경고를 받아야만 공습에 대응할 수 있었다.

포좌 주변에 탄약을 쌓아두고 있던 고정식 3인치 대공포 26문만이 기습에 대응하여 즉시 사격을 개시할 수 있었다. 

따라서 진주만 기습 당시 일본기들에게 반격한 것은 주로 함정의 대공화기들이었다.

 

하와이 대공방어의 가장 큰 문제는 레이더가 없다는 것이었다.

사실 워싱턴의 통신병과(Signal Corp)에서는 1939년 11월에 처음으로 하와이에 레이더를 설치하겠다는 계획을 세웠으나 여러가지 이유로 1년 6개월 이상 미루어지다가 1941년 7월이 되어서야 최초의 이동식 레이더인 SCR-270 1대가 오아후에 도착했다.

이후 9월까지 5대의 이동식 레이더가 가동을 시작했으며 진주만 기습 10일 전인 11월 27일에 6번째 레이더가 도착하여 오아후 북쪽의 오파나 스테이션에서 가동을 시작했다.

이 6번째 레이더가 진주만 기습 당일 접근하는 일본기들을 발견했다.

 

이동식 레이더의 성능 자체는 만족스러웠다.

1941년 11월 초에 실시한 시험 결과 이동식 레이더들은 오아후로 접근하는 함재기의 군집을 약 130km 전방에서, 그리고 폭격기 1대를 약 50km 전방에서 발견했는데 이만하면 만족스러운 성능이었다.

하지만 실제 운용에는 문제가 많았다.

레이더들은 초기형이라 부품의 수명이 짧았는데 예비 부품이 모자랐으며 안정적으로 전원을 공급할 이동형 발전기도 모자랐다.

따라서 하루 최대 4시간 이상은 가동할 수 없었으며 진주만 기습 때까지 훈련용으로만 사용했다.

 

SCR-270 보다 강력한 설치식 레이더인 SCR-271 3대도 1941년 11월 중에 도착했으나 이들을 설치해야 할 산봉우리에는 준비가 갖추어져 있지 않았다.

이유는 어처구니없는 것으로서 당시 미국 행정기관이 얼마나 천하태평이었는지를 보여준다.

 

일찌기 1941년 3월에 하와이 육군사령관 쇼트 중장은 레이더 기지로 하와이에서 가장 높은 지점인 오아후 북쪽 마우이 섬의 할레아칼라 산 정상을 비롯한 몇몇 곳을 점찍었는데 뜻밖의 장애에 부딪혔다.

국립공원관리청(National Park Service)이 제동을 걸고 나선 것이었다.

다급해진 쇼트 중장은 전쟁성에 도움을 요청했으나 전쟁성도 국립공원관리청을 설득하는데 실패함으로써 하와이 육군사령부는 산 정상의 풍광을 해칠 수 있다는 이유로 하와이 방어에 필요한 레이더 기지를 건설할 수 없었다.

따라서 1941년 11월에 그토록 기다리던 설치형 레이더가 도착했어도 설치할 수 없었다.

 

조기경보 및 요격체계는 레이더만 있다고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레이더가 적기를 탐지하면 즉시 정보센터로 전달되고 정보센터는 전투기와 대공포에 경고를 내린다.

또한 지휘관이 결정하면 정보센터가 요격기를 유도하며 대공포를 통제해야 하는데 항공기의 속력이 빠르므로 이러한 모든 절차는 최대한 빨리 이루어져야 한다.

 

요격사령부라고 불릴만한 이러한 시스템은 전에는 없던 것이었으며 만들려면 배워야만 했다.

1941년 늦은 가을에 하와이의 전투기들을 지휘하는 제14전투비행단(14th Pursuit Wing)사령관 하워드 데이비슨 준장이 통신장교들과 함께 워싱턴의 통신병과에 파견되어 요격사령부 만드는 법을 배웠다.

하워드 준장이 교육을 마치고 하와이로 돌아온 것은 진주만 기습 사흘 전인 12월 4일이었다.

따라서 진주만 기습 당시 접근하는 일본기들을 발견한 레이더 조작병들은 어디로 보고를 해야 하는지조차 몰랐다.

 

쇼트 중장은 1941년 10월 1일에 보병연대 4개를 가진 하와이 사단을 각각 3개의 연대를 가지고 11,000 명으로 이루어진 제24 및 제25보병사단으로 분리했다.

외곽의 섬에 분산배치된 제299보병연대는 사단에 소속되지 않고 군관구 직할 병력으로 남았다. 

 

1941년 한해 동안 하와이에 주둔하는 육군 병력은 28,798 명에서 43,177 명으로 크게 늘었으며 하와이는 미국의 해외기지 중 최대 규모였다.

늘어난 병력 중 절반 정도는 많은 일본계를 포함하여 하와이 현지에서 뽑았으며 절반 정도는 미본토에서 건너왔다.

하와이에서 뽑은 병력이든 미본토에서 건너온 병력이든 모두 훈련이 필요했으므로 1941년 내내 하와이 군관구는 미본토와 마찬가지로 훈련에 힘을 쏟았다.

 

마셜 장군은 1941년 9월 22일에 루스벨트 대통령에게 제출한 보고서에서 평화시 하와이의 육군병력 상한선을 42,000 명으로 잡았으며 전쟁이 발발하면 즉시 17,300 명을 증원하고 전시에는 68,000 명을 유지하겠다고 적었다.

 

이보다 5일 앞선 1941년 9월 17일에 전쟁성이 작성한 하와이 방어계획을 보면 진주만 기습이 성공한 이유를 알 수 있다.

여기서 전쟁성이 예상한 위협 순위는 다음과 같다.

 

1. 잠수함에 의한 뇌격 또는 기뢰 설치

2. 파괴행위

3. 기뢰, 항공기 또는 수상함정에 의한 상선 공격

4. 항공모함을 사용한 공습

5. 수상함정을 사용한 공격

6. 아군 함대의 부재를 틈탄 복합적인 공격

 

위협 순위를 보면 전쟁성이 5개월 전에 제출된 마틴-벨린저 보고서를 무시하고 있었다는 걸 알 수 있다.

 

전쟁성의 위협 평가에 따라 육군에게는 파괴활동에 대응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 임무가 되어 이쪽에 중점을 두었다.

해군 또한 육군과 생각이 비슷하여 접근하는 적의 항공모함을 포착하기 오아후 섬에서 800km 이상의 장거리 초계를 실시할 필요는 없다고 믿었다.

실제로 장거리 초계를 실시하고 싶어도 기체, 승무원, 부품이 모두 모자라는 것이 현실이기도 했다.

오아후 섬을 중심으로 매일 360도 장거리 정찰을 실시하기 위하여 마틴-벨린저 보고서에서 요구했던 B-17 폭격기 180대는 겨우 12대로 쪼그라들었으며 그나마 6대만이 가용한 상황이었다. 

결국 나름대로 노력했음에도 불구하고 미육군과 해군은 진주만 기습을 막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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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방어 준비(1) - 1941년 이전

 

1921년에 일본과의 조약에 의하여 하와이 서쪽의 기지들을 요새화할 수 없게 되면서 진주만의 가치가 올라갔다.

해군은 진주만을 일본과의 전쟁시 필리핀을 향하여 진격하는 함대의 출발지로 생각했으며 육군은 알래스카-하와이-파나마를 잇는 방어선의 중추로 생각했다.

그리하여 해군은 1938년까지 진주만을 개발하는데 75,000,000 달러를 투입했으며 육군은 진주만을 지키기 위한 방어시설에 해군보다 2배 이상의 예산을 투자했다.

전쟁성은 1935년부터 38년 가을까지 하와이 군관구에 장비 공급의 가장 높은 우선 순위를 부여했으며 병력도 1935년 여름의 14,821명에서 38년 여름에는  21,289명으로 40% 이상 증강했다.

하와이에서 육군의 임무는 오아후 섬을 지키는 것이었다.

 

1935년 9월에 하와이 육군사령관 휴이 드럼 소장은 하와이 주둔 육군의 전력을 강화하고 방어임무를 확장하기를 원했다.

그는 개발 중이던 B-17 폭격기 26대를 오아후 섬에 배치하고 하와이 섬과 카우아이 섬에 비행장을 건설하며 비행장 보호를 위하여 이 섬들에 병력을 주둔시키자고 주장했다.

드럼 소장은 전시에 하와이에 주둔할 100,000 명의 병력 중에서 23,000 명을 이들 섬에 배치하기를 원했으나 전쟁성과 해군은 반대했다.

 

다음 해인 1936년 말에 드럼 장군은 식량 보급을 위하여 하와이 제도의 다른 섬을 방어하자고 재차 주장했다.

오아후의 식량자급률은 15% 에 지나지 않으므로 미본토와의 보급이 끊어졌을 경우 다른 섬에서 식량을 생산하여 부족분을 메꿀 수 있다는 논리였으나 전쟁성과 해군은 또다시 반대했다.

 

반대의 근거는 진주만에 강력한 해군함대가 존재하는 한 하와이 전체가 안전하니 육군은 함대의 요람인 진주만을 지키는데 집중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 논리에서 진주만에 강력한 함대가 정박하면 일본이 감히 하와이를 공격하지 못할 것이라는 인식이 당시 미군에게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으며 이런 생각이 진주만 기습의 성공을 불러온 한 요인이었다. 

 

1938년 1월에 공병인 에드워드 마컴 대령이 하와이를 시찰하고 대통령과 전쟁성에 구두로 보고했다.

마컴 대령은 진주만의 방어 태세를 강화해야 할 필요가 있으며 오아후 섬을 지원하고 식량 확보를 위하여 하와이 섬과 카우아이 섬에 비행장을 만들자는 드럼 장군의 제안을 지지했다.

그는 또한 일본과 싸우게 되면 일본이 하와이를  공격할 가능성이 높다고 예견했다.

마컴 대령은 일본의 항공모함들이 북쪽으로부터 접근하면 탐지하기 어렵다고 지적하면서 일본 함재기들에게 대항하기 위하여 오아후 섬의 항공기 세력을 350대로 늘리고 장거리 정찰을 실시할 것을 권고했다.

마컴 대령의 권고는 유럽의 정세와 맞물려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독일의 위협이 증대되면서 1938년부터 미군의 관심은 대서양 연안과 라틴 아메리카로 이동했다.

 

전쟁성은 오아후 섬에 1개 사단이 이미 배치되어 있고 강력한 대공포와 해안포 세력이 있으며 1938년부터는 하와이 전대를 비롯한 함대 세력이 상주할 것이므로 적의 공격을 막는데 어려움이 없다고 평가했다.

다만 육군항공대의 항공기가 구식이며 세력이 빈약하다는 사실은 인정했다.

전쟁성의 항공위원회는 1939년 6월에 하와이의 항공기 숫자를 기존의 124대에서 전투기 140대와 폭격기 100대를 포함하여 256대로 늘리는 방안을 제시했다.

항공위원회는 또한 육군이 하와이 근해 1,600km 까지 장거리 정찰을 실시하는 방안도 제시했다.

 

드럼 장군을 이어 하와이 육군사령관이 된 찰스 헤론 소장은 1939년 9월에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신임 육군참모총장인 마셜 대장에게 보고서를 올렸다.

그는 적이 오아후 섬에 상륙해서 점령하기는 어렵다고 보았다.

헤론 장군은 오아후 섬이 항공모함에서 발진하는 함재기에 의한 공격에 취약하다는 점을 인정했으나 오아후를 공격한 적의 항공모함은 아군 폭격기의 반격을 받아 격침될 것이므로 적이 모험을 강행할 가능성이 낮다고 보았다.

2년 후 일본해군은 헤론 장군의 견해가 틀렸다는 것을 증명한다.

 

하와이에 대한 항공기 증원 계획은 축소되었다.

1939년 말에 전쟁성은 일본이 하와이를 공격하더라도 최대 2척의 항공모함만을 동원할 것으로 판단하여 전투기 122대와 중형 폭격기 68대면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일본이 하와이 공격에 2척 이하의 항모만을 동원할 것이라는 생각은 1941년 말까지 이어져서 진주만 기습의 또다른 성공요인이 되었다.

실제로 진주만 기습 직후에도 미군은 동원된 일본항모의 숫자가 2척이 넘는다는 사실은 알았으나 6척이라고는 상상하지 못했으며 3척 아니면 기껏해야 4척이라고 생각했다.

전쟁성과 하와이 육군 사령부는 또한 장거리 정찰은 해군 소관으로 규정하고 육군 항공기들은 해군의 장거리 정찰 능력을 증강할 필요가 있을 때에만 투입된다고 못을 박았다.

 

1940년 6월에 육군항공대의 54개 비행대 프로그램이 추진되면서 하와이의 육군항공세력도 전투기 세력을 좀 더 늘리고 중형 폭격기 68대를 중폭격기로 바꾼다는 결정이 내려졌다.

그러나 여전히 일본항모는 2척 이하로 올 것이고 장거리 정찰은 해군 담당이라는 인식은 여전했으므로 증원 속도는 느렸다.

1940년 말에 하와이의 육군항공기 숫자는 115대로 대부분 훈련에나 적합한 낡은 기종들이었다. 

 

1940년 5월 7일부터 태평양함대가 진주만을 모항으로 삼게 됨에 따라 진주만의 중요성은 더욱 커졌다.

육군은 함대가 진주만에 있는 한 하와이는 안전하지만 함대가 떠나면 일본군이 하와이를 공격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1940년 6월에 프랑스의 항복이 가까워지자 태평양함대가 대서양으로 가야할지 모른다는 위기감이 생겼다.

이러한 분위기 하에서 6월 17일에 육군참모총장 마셜 대장은 하와이 군관구와 파나마 운하 군관구에 경계 태세에 만전을 기하라는 전문을 보냈다.

 

(미육군참모총장 조지 마셜 장군. 자세한 내용은 여기로)

 

하와이 육군사령관 헤론 소장은 마셜 참모총장의 지시에 과도하게 반응했다.

그는 모든 감시소와 대공포에 24시간 인원을 배치했다.

대공포에는 실탄이 보급되었으며 비행제한구역에 들어오는 항공기는 무조건 격추하라는 명령이 떨어졌다.

히컴 비행장과 휠러 비행장의 항공기들은 분산되었으며 6월 21일에는 해군으로부터 해안 정찰 임무를 넘겨받았다.

폭동에 대비하여 오아후 섬의 일본계들은 엄중한 감시 하에 놓였다.

해군도 육군의 조치에 호응하여 하와이 근해의 정찰을 강화하고 제한적으로 장거리 정찰을 시작했다.

 

전쟁성은 하와이 군관구의 과도한 경계태세를 완화하라고 권고했으며 1달이 지나자 일본계에 대한 감시와 훈련을 겸한 해안정찰을 제외하고는 원래대로 돌아갔다.

해군은 장거리 정찰을 지속했으나 1940년 12월 말에 해군참모총장의 권고에 따라 정찰이 필요한 작전 해역을 제외하고는 장거리 정찰을 중단했다.

 

헤론 소장은 경계 기간 중에 대공포 요원의 부족을 실감하고 9월에 마셜 장군에게 대공포 요원의 증원을 요청했다.

이때 미국은 대서양 전투에서 중립인 척하는 상태에서 벗어나 노골적으로 영국을 편들기로 결정했기 때문에 일본에게 미국이 대서양을 중시하더라도 결코 태평양을 포기하지 않는다는 걸 보여줄 제스츄어가 필요했다.

루스벨트 대통령은 주방위군 1개 사단을 하와이에 파견하려고 했으나 헨리 스팀슨 전쟁성 장관이 반대했다.

대신 주방위군 소속의 제251대공포 연대가 1940년 겨울에 하와이로 파견되었는데 이 부대는 제2차 세계대전에서 최초로 미본토를 떠난 주방위군 부대였다.

 

1940년 말이 되었을 때 하와이 육군사령관 헤론 소장은 하와이의 방어태세에 비교적 만족했지만 대공포 부족을 염려했다.

그는 1940년 11월에 전쟁성에 제출한 보고서에서 오아후 섬에는 높은 고도로 비행하는 항공기를 공격할 대구경 대공포만 있으며 낮은 고도의 항공기를 공격할 소구경 대공화력이 부족하다고 지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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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오아후 섬

 

진주만을 가진 하와이 제도의 오아후 섬은 제2차 세계대전 이전과 전쟁 기간을 통하여 미국의 해외 기지 중 가장 중요한 곳이었다.

전쟁 전에 미국 방어에 핵심적인 지역은 오아후 섬과 파나마 운하 지역이었으나 태평양전쟁이 발발한 후에는 오아후 섬의 중요성이 커졌다.

그만큼 오아후 섬의 방어도 충실했으며 1941년 4월에 펴낸 보고서에서 미국 전쟁성은 오아후 섬을 세계에서 가장 강력한 요새로 확신한다고 적었다.

물론 그 확신은 7개월 후에 일본이 실시한 놀라우리만치 성공적인 공격으로 산산조각이 났다.

 

미국은 1898년에 하와이를 합병한 직후부터 오아후 섬에 수비대를 주둔시켰다.

미해군과 육군은 1908년에 오아후 섬의 진주만을 태평양에서 으뜸가는 해군 전진기지로 개발하기로 합의했다.

육군은 진주만을 지키기 위하여 수비대를 증강했고 1913년에는 전쟁성 직속으로 하와이 군관구를 설치했다. 

제1차 세계대전 종료 이후 20년간 미육군은 병력의 11%를 오아후 섬에 주둔시켰으며 진주만과 동쪽의 호놀룰루 항을 지키기 위하여 해안포와 대공포를 설치했다. 

 

1941년 초까지 하와이에 주둔한 미육군의 임무는

 

'적의 함대, 항공기, 또는 원정군으로부터 진주만을 지키는 것'

 

이었다.

 

1940년 5월부터 미태평양함대의 주력이 진주만을 모항으로 삼게 되면서 1941년 2월에 마셜 육군참모총장은 하와이 주둔 육군의 방어 대상에 진주만의 항구 시설 뿐만 아니라 함정도 포함된다고 비공식적으로 인정했다.

이렇듯 태평양함대의 전진 배치는 육군의 방어 의무를 늘렸으나 실제로는 강력한 함대가 진주만에 머무르는 동안은 일본의 공격이 없을 것이라는 그릇된 안전감을 주어 수비대의 심리를 이완시켰다.

 

(하와이 제도. http://www.antor.org/images/hawaii.jpg)

 

하와이 제도는 캘리포니아에서 남서쪽으로 3,900km, 일본의 혼슈로부터 남동쪽으로 6,300km 떨어져 있다.

가장 큰 섬은 전체 면적의 약 2/3를 차지하는 하와이 섬이며 여기서 북서쪽으로 약 640km 에 걸쳐 8개의 섬들이 늘어서 있다.

중요한 섬들은 하와이, 마우이, 오아후, 카우아이 섬이며 하와이 섬을 제외한 세 섬은 크기가 비슷하다.

기후는 아열대로 지내기 좋은 편이다.

 

(오아후 섬. http://www.bouwman.com/world/Hawaii/Oahu-WWII.html)

 

오아후 섬은 하와이 제도에서 세번째로 큰 섬으로 면적이 약 1,545㎢ 이며 남해안에 두 개의 항구를 가지고 있다.

호놀룰루 앞바다에는 호놀룰루 항이 있었으며 거기서 북서쪽으로 11km 정도 떨어진 곳에서 내륙으로 움푹 들어간 초호를 군항으로 개발한 것이 진주만이었다.

 

오아후 섬의 면적은 하와이 제도 전체 면적의 1/10 정도이나 인구는 1940년 당시 약 423,000 명으로 하와이 제도 전체 인구의 약 60% 를 차지했다.

인종 구성은 다양했으며 일본계가 가장 많아 약 37% 로 백인 전체 숫자와 맞먹었다.

하와이 섬과 카우아이 섬에서는 일본계가 3:1 의 비율로 백인들을 압도했다.

일본계 중 3/4은 미국에서 태어난 시민권자였으나 미군은 일본과 전쟁이 났을 경우 일본계의 충성심을 믿지 못했다.

따라서 미해군과 육군은 일본과 전쟁시 하와이 전역에 군정을 실시하기로 결정해 두었다.

 

하와이의 통치 체제는 미연방에 늦게 편입된 지역으로서 과도기적인 성격을 지니고 있었다.

현지 의회는 투표로 선출했으나 연방 하원에 파견하는 대표자는 투표로 뽑지 않았으며 행정관료와 사법부는 대통령이 지명했다.

하와이 정부의 통치권은 하와이 제도 전체와 북쪽으로 미드웨이까지 미쳤다.

 

오아후 섬은 다이아몬드 모양으로 북서쪽에서 남동쪽으로 두 개의 산맥이 달리고 있었으며 대부분의 인구가 산맥 사이의 평원 지역과 남쪽에 몰려 있었다.

군부대들도 대부분 평원에 자리잡았기 때문에 보안이 곤란했다. 

육군 사령부는 호놀룰루 교외의 샤프터 요새에 자리잡고 있었고 주력은 진주만에서 북쪽으로 약 16km 정도 떨어진 스코필드 병영에 주둔하고 있었다.

육군의 주력은 1921년에 창설된 하와이 사단으로 사단의 배치는 오아후 섬 북해안에 상륙한 적군이 진주만을 공격하는 진로를 가로막는 형태였다.

미국이 생각하기에 오아후 섬의 동해안과 서해안은 산맥에 가로막히고 남해안에는 진주만과 호놀룰루 항을 지키기 위하여 강력한 해안포들이 배치되어 있었기 때문에 적이 상륙할 곳은 북해안 밖에 없었다.

 

육군의 주요 비행장인 히컴 비행장은 섬 남쪽의 진주만과 호놀룰루 시가지 사이에 있었으며 섬 중앙인 스코필드 병영 주변에는 전투기용인 휠러 비행장이 있었고 1941년에는 남동해안에 벨로우즈 비행장을 완성하여 전투기와 경폭격기용으로 사용했다.

해군은 진주만 내의 포드 섬에 정찰기와 함재기들을 위한 비행장을 가지고 있었고 동해안의 카네오헤 만에 정찰기들을 위한 비행장을 가지고 있었다.

해병대는 진주만 서쪽의 에바 지역에 비행장을 가지고 있었다.

이외에도 몇 개의 간이 비행장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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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발상

 

1920년대 이래 미국을 상대하는 일본해군의 기본 전략은 점감 작전에 이은 함대결전이었다.

강력한 미함대가 동쪽으로부터 접근하면 잠수함들이 마셜 제도와 캐롤라인 제도의 지상발진 항공기들과 함께 전력을 깎아먹고 약해진 미함대가 결전장에 도착하면 전함을 중심으로 한 일본함대 주력이 나서 일격에 섬멸한다는 것이었다.

이러한 결전장으로는 필리핀 근해나 팔라우 제도, 오가사와라 제도 또는 마리아나 제도를 예상했다.

 

그러나 1939년 8월 30일에 연합함대 사령장관으로 취임한 야마모토 이소로쿠 중장은 이러한 전략에 의문을 품었다.(야마모토 제독은 1940년 11월 15일에 대장으로 승진했다.)

남방작전에 투입되는 육군 병력들을 수송하고 상륙시키고 보급하기 위해서는 해군 전력의 상당 부분을 할애해야 했는데 적의 공격을 기다려야 하는 수세적인 점감 요격 전법은 이러한 상황에 맞지 않았다.

그는 개전과 동시에 미태평양함대의 주력에 치명적인 선제 타격을 가하여 최소한 6개월 이상 서태평양에서 몰아낸 이후 남방작전에 전념하는 것이 낫다고 생각하여 진주만 기습을 계획했다.

 

(연합함대사령장관 야마모토 이소로쿠 제독. 자세한 내용은 여기로)

 

야마모토 제독은 조종사 출신이 아니었으나 해군항공병과와 인연이 있었다.

그는 1924년에 가스미가우라 훈련항공대의 부장으로 근무했으며 1933년에는 제1항공전대 사령관이 되었고 35년에는 해군성의 해군항공본부장으로 재직했다.

이러한 직책을 거치면서 야마모토 제독은 해군항공력의 커다란 가능성과 놀라운 발전속도를 알고 있었다.

 

야마모토 제독이 언제부터 진주만 기습을 계획했는지는 알 수 없다.

다만 1939년 11월 15일부터 41년 4월 10일까지 연합함대 참모장을 지냈던 후쿠도메 시게루 제독에 따르면 야마모토 제독이 처음으로 진주만 기습 이야기를 꺼낸 것은 1940년 4월 경이었다.

맑은 봄날에 뇌격기의 훈련 과정을 참관하던 야마모토 사령관이 후쿠도메 참모장에게

 

"항공기로 진주만을 공격하면 어떨까?"

 

하고 물었다.

사실 진주만을 항공기로 공격하는 안은 매년 연합함대 훈련시마다 참모들이 검토하던 사안이라 엉뚱한 소리는 아니었다.

다만 검토할 때마다 불가능이라는 결과가 나왔다.

일본해군은 진주만에 대한 실효성있는 공격은 잠수함에 의해서만 가능하다고 믿었다.

반면 미국은 진주만에 대한 항공공격이 가능하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으나 1941년 말의 시점에서 일본이 실제로 시도하리라고 믿지는 않았다.

 

이후 1940년 가을에 야마모토 제독은 후쿠도메 참모장에게 제11항공함대 참모장이던 오니시 다키지로 소장에게 진주만 기습에 대한 연구를 맡기고 싶다고 말했다.

야마모토 제독이 결심을 굳힌 것은 1940년 12월이었다.

그는 진주만 기습 직후인 1941년 12월 19일에 지인들에게 보낸 편지에서 진주만 기습의 결단을 1년 전인 1940년 12월에 내렸다고 적었다.

 

진주만 기습의 의도가 최초로 드러난 문건은 1941년 1월 7일에 야마모토 제독이 해상 오이카와 코시로 제독에게 보낸 편지다.

1964년에 초안이 발견된 이 편지에서 야마모토 제독은 진주만에 최대한 많은 함정이 몰려 있을 때 항공력을 사용하여 강력한 공격을 가한다는 구상을 밝히면서 공격을 가할 항공모함 기동부대를 자신이 직접 지휘하고 싶다고 적었다.

깨끗하게 정서한 편지는 발견되지 않았는데 야마모토 제독의 요청에 따라 오이카와 해상이 태운 것으로 보인다.

 

며칠 후 제11항공함대 참모장 오니시 다키지로 소장은 야마모토 제독으로부터 1통의 편지를 받았다.

3장으로 이루어진 편지에서 야마모토 제독은 오이카와 해상에게 보낸 편지와 같은 이야기를 하면서 극비리에 연구를 시작하라고 명령했다.

비록 오니시 소장은 지상발진항공대인 제11항공함대의 참모장을  맡고 있었지만 함재기 전술에도 정통했다.

오니시 소장은 1941년 1월 26일에 규슈 남부 아리아케 만에 정박한 연합함대의 기함 나가토에 승함하여 다음날까지 야마모토  사령관과 대화를 나누었다.

제11항공함대로 돌아온 오니시 소장은 뇌격 전문가인 참모 마에다 코세이 중좌를 불러 진주만에 정박한 함정에 대한 뇌격이 가능하냐고 물었다.

마에다 중좌는 현재 사용 중인 어뢰로는 수심이 얕아서 불가능하다고 대답했다.

 

오니시 소장은 작전 수립의 실무를 카가의 항공참모로 있던 겐다 미노루 중좌에게 맡기기로 마음먹었다.

그는 겐다 중좌를 가노야의 제11항공함대 사령부로 불러 야마모토 제독이 자신에게 보낸 편지를 보여 주었다.

편지를 읽어본 겐다 중좌는 진주만을 항공기로 공격한다는 야마모토 제독의 아이디어에 매료되었다.

작전을 입안해 달라는 오니시 소장의 요청을 받아들인 겐다 중좌는 카가로 돌아가 2주 동안 작전의 초안을 잡았다. 

비밀이 중요했으므로 아무에게도 알리지 않고 일과가 끝나면 밤에 혼자 작업해야 하는 고된 일이었으나 야마모토 제독의 아이디어에 흥분한 겐다 중좌는 놀라운 열정으로 임했다.

 

(겐다 미노루. 자세한 내용은 여기로)

 

1941년 2월 말에 겐다 중좌는 작전의 초안을 들고 가노야로 와서 오니시 소장에게 제출했다.

중요한 내용은 9가지로 다음과 같다.

 

1. 공격은 기습적으로 이루어져야 한다.

2. 주요 목표는 적의 항공모함이다.

3. 다음 순위의 목표는 오아후에 있는 적의 지상발진 항공기들이다.

4. 동원가능한 모든 항공모함을 투입해야 한다.

5. 공격에는 뇌격, 급강하폭격, 그리고 수평폭격을 모두 사용해야 한다.

6. 전투기도 공격에서 적극적인 역할을 해야 한다.

7. 공격은 낮에, 가능하면 새벽에 이루어져야 한다.

8. 해상연료보급이 필요하다.

9. 계획 단계에서 기밀유지가 필수적이다.

 

전체적으로 진주만 기습과 거의 비슷한 내용으로 진주만 기습의 실무 계획은 겐다 중좌가 만들었다고 할 수 있다.

겐다 중좌의 초안은 야마모토 제독이나 오니시 제독의 생각과 조금씩 다른 부분이 있다.

 

1번의 기습에 관해서는 이견이 없었다.

 

2번의 주요 목표에 대하여 야마모토 제독은 전함을 주장했으나 겐다 중좌는 항공모함을 지목했고 오니시 소장도 겐다 중좌에게 동조했다.

그러나 공격 당일 항공모함이 없었으므로 결국 주요 목표는 전함이 되었다.

 

3번의 두번째 목표에 대하여 오니시 소장은 지상발진항공기 대신 적 함대의 균형을 깨기 위하여 순양함을 주장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4번의 항공모함 숫자에 대하여 야마모토 제독은 2척, 많아야 4척을 투입하자고 주장했으나 겐다 중좌와 오니시 소장은 최소한 6척, 가능하면 더 많은 숫자를 투입하자고 주장했다.

 

5번의 공격방식에 대하여 야마모토 제독은 뇌격만을 주장했으나 겐다 중좌와 오니시 소장은 3가지 공격방식을 모두 동원할 것을 주장했다.

중요성에 있어서 겐다 중좌는 정확한 급강하폭격에 중점을 두었으나 오니시 소장은 전함의 상부 갑판을 뚫을 수 있는 위력을 가진 수평폭격에 중점을 두었다.

당시 겐다 중좌와 오니시 소장은 포드 섬 부근에 정박한 함정들에 대한 뇌격이 불가능할 것이라고 생각했으나 나중에 뇌격이 가능해짐에 따라 공격의 중점은 야마모토 제독의 생각대로 뇌격에 주어지게 된다.

 

6번의 전투기와 관련하여 야마모토 제독은 전투기없이 뇌격기만을 투입하여 왕복거리 바깥에서 발진시킨 후 항공모함은 철수하며 장거리 공습을 실시한 승무원들은 돌아가는 길에 해상에 불시착하여 잠수함으로 구조하는 방식을 제시했다.

겐다 중좌는 여기에 반대하고 공격대가 전투기의 호위를 받아야 하며 항공모함들이 함재기의 왕복거리 내로 접근하여 공격대를 모두 회수해야 하고 필요하면 반복 공격을 가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7번의 공격시간에 관하여 야마모토 제독은 뇌격기만으로 야간에 기습을 가하자고 주장했으나 겐다 중좌는 정확한 공격을 위하여 날이 어두울 때 발진하여 날이 밝아진 직후에 공격하자고 주장했다.

항구에 정박한 적 함대를 야간에 뇌격기만으로 공격한다는 야마모토 제독의 발상은 영국이 실시한 1940년 11월의 타란토 항 공습에서 큰 영향을 받았다.

 

8번의 해상연료보급은 이견이 없었다.

 

9번의 기밀유지도 이견이 없었으며 겐다 중좌는 만일 비밀이 새어나가면 공격 자체를 포기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진주만 기습의 초안을 보면 알 수 있듯이 겐다 중좌는 재기가 넘치는 장교였으나 동료인 후치다 미츠오의 평가대로 재기가 지나친 면이 있었다.

항공주병론자로서 전함을 혐오하던 겐다 중좌는 오니시 소장에게 진주만공격부대에서 전함은 빼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전함이 쓸데없이 커서 들킬 위험이 많으며 연료도 많이 든다고 주장했으나 오니시 소장은 전함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실제로 진주만공격부대에는 전함 히에이와 기리시마가 동행했다.

 

또한 겐다 중좌는 기습에 이어 육군을 상륙시켜 진주만이 있는 오아후 섬을 점령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기습을 받아 당황한 미군의 사기는 바닥으로 떨어질 것이므로 10,000 명 - 15,000 명 정도만 상륙시키면 오아후 섬을 점령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오니시 소장은 남방작전 때문에 그만한 수송선을 빼낼 수 없으며 설령 수송선과 병력을 확보한다고 해도 15,000 명으로 오아후 섬 점령은 불가능하다면서 거부했다.

 

오니시 소장은 겐다 중좌의 초안을 기본으로 자신의 안을 만들어 야마모토 제독에게 제출했다.

그의 제안은 오아후에 상륙하자는 등의 헛소리를 제외하고는 겐다 중좌의 것과 거의 비슷했다.

다만 오니시 소장은 진주만공격부대의 선도함정으로 잠수함이나 구축함이 아닌 상선을 사용하자고 제안했다.

상선은 미군에게 발견되어도 경계심을 일으키지 않는 반면 잠수함이나 구축함은 발견되면 경계심을 불러일으켜 결국 진주만공격부대를 찾아낼 것이라는 논리였다.

 

야마모토 대장, 겐다 중좌, 그리고 오니시 소장의 생각에서 공통점은 목표를 미태평양함대의 함정들과 오아후 섬의 항공기로 잡았다는 것이었다.

오아후 섬의 군사시설, 즉 연료저장고, 건선거, 공창, 잠수함 기지 등은 목표가 아니었다.

진주만 기습을 평가할 때는 이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1941년 4월부터 오니시 소장은 제11항공함대가 담당한 필리핀 공격에 깊이 관여하면서 진주만 기습 준비에서는 밀려나게 되었다.

따라서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진주만 기습에 관여한 인물은 야마모토 제독과 겐다 중좌만이 남았다.

 

야마모토 대장과 겐다 중좌는 커다란 지위 차이에도 불구하고 서로 잘 아는 사이였다.

겐다가 1933년 류조의 항공참모로 있을 때 류조가 소속된 제1항공전대 사령관이 야마모토 제독이었다.

당시 항공작전에 대하여 전대끼리 토론이 붙으면 어김없이 겐다 참모가 나서 맹활약했다.

야마모토 제독은 겐다 참모에게 감명을 받았으며 항공작전에 대해 제독끼리 토론할 때에도

 

"겐다가 그러는데 말이야.."

 

는 식으로 말했다고 한다.

 

야마모토 대장과 겐다 중좌는 잘 어울리는 한쌍이었다.

겐다 중좌는 뛰어난 기술적 지식을 가지고 있었다.

야마모토 대장은 철저한 계급 사회인 군대에서 일을 이루기 위하여 반드시 필요한 계급, 지위, 명성, 그리고 추진력을 가지고 있었다.

이러한 두 사람의 조합이 진주만 기습을 성공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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