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 이것은 훈련이 아니다.

 

진주만 기습 당시 항만 내의 함정들은 3급 태세(condition 3)를 유지하고 있었는데 이때의 3급 태세는 전시보다는 훨씬 느슨했다.

주포와 5인치 함포에는 인원이 배치되지 않았으며 레이더실, 사격통제장치 및 탄약 보급에도 인원이 배치되지 않았다.

기관총에는 인원이 배치되어 있었으나 탄약들은 상자에 담겨 있었고 열쇠는 갑판사관이 가지고 있었다.

많은 장교들은 아침식사를 하고 있거나 막 일어난 상태였으며 수병들은 대부분 아침식사를 마치고 갑판에서 이야기를 나누거나 선실에서 가족에게서 온 편지를 읽거나 쓰는 등 빈둥거리고 있었다.

 

진주만 내에는 전투함 70척과 보조함 24척등 총 94척이 정박하고 있었다.

전투함의 내역을 보면 전함 8척, 중순양함 2척, 경순양함 6척, 구축함 29척, 잠수함 5척, 포정 1척, 기뢰부설함 9척(8척은 구축함을 개조한 것), 그리고 소해함 10척(4척은 구축함을 개조한 것)이었다.

보조함은 각종 모함 10척, 수리함 3척, 급유함 2척 ,원양예인함 2척 및 병원함, 수로측량함, 군수품보급함, 탄약보급함, 표적함, 잠수함구난함 각 1척씩, 그리고 태평양함대 기지사령관 윌리엄 칼훈 소장의 기함인 아르곤이었다.

 

(진주만 기습 당시 함정의 배치상황. http://commons.wikimedia.org/wiki/Category:Pearl_Harbor_attack_-_maps#mediaviewer/File:Pearl_Harbor_before_strike.gif)

 

진주만 기습 당시 94척의 함정 중 이동 중인 것은 구축함 헬름 뿐이었다.

헬름은 함체의 소자작업을 위하여 오전 7시 26분에 이스트 협만을 출발하여 오전 7시 55분에 웨스트 협만으로 들어서는 찰나였다.

 

태평양함대 기뢰부대 사령관(Commander Mine Force Pacific Fleet) 윌리엄 펄롱 소장은 아침식사를 하라는 전갈을 기다리면서 기함인 기뢰부설함 오글라라의 후갑판을 산책하고 있었다.

오글라라는 평소 전함 펜실베니아가 정박하는 텐텐부두(Port 1010)에 정박한 경순양함 헬레나의 바깥 쪽에 정박하고 있었는데 이곳은 진주만 전체를 살피는데 좋은 위치였다.

텐텐부두라는 명칭은 부두 남서쪽으로 연결되어 있는 건선거의 길이가 1010피트(약 308m) 라는 데서 붙은 이름이다.

낡아서 여간해서는 출항을 안하는 오글라라 함상에서 생활하던 펄롱 소장은 그날 아침 진주만의 해상선임장교였다.

 

오전 7시 55분에 펄롱 소장은 포드 섬 상공을 낮게 날던 비행기가 폭탄을 떨어뜨리는 것을 보았다.

처음에는 폭탄이 제대로 고정되지 않은 것이라고 생각했으나 비행기가 방향을 돌리는 순간 일장기가 눈에 들어왔다.

펄롱 소장은 소리쳤다.

 

"일본군이다! 총원 전투배치!"

(Japanese! Man your stations!)

 

곧 오글라라는 발광신호로 항구 내의 전 함정에 대해 전투배치 명령을 내렸다.

 

오전 7시 55분에 해군항공대 작전참모인 로건 램지 소령은 포드 섬 지휘소 창가에서 군기 위병들이 국기를 게양하는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갑자기 비행기 1대가 저공으로 상공을 지나갔다.

화가 난 램지 소령은 비행기 번호를 적으라고 명령했다.

하지만 잠시 후 그 비행기가  뭔가를 떨어뜨리자 격납고에서 폭음이 울리면서 불길이 솟았다.

램지 소령은 복도로 달려나가 통신병에게 급하게 메모를 휘갈겨 쓴 후 해군항공대 사령관 패트릭 벨린저 소장 명의로 방송하라고 명령했다.

 

거기에는

 

"공습, 진주만 - 이것은 훈련이 아니다."

(Air raid, Pearl Harbor - This is no drill.)

 

라고 적혀 있었다.

통신문은 하와이 지역  전용 주파수를 통하여 오전 7시 58분에 타전되었다.

 

진주만 기습을 알리는 방송이 흘러나오기 시작했을 때 태평양함대의 당직장교였던 조셉 머피 중령은 태평양함대 사령관 허즈번드 킴멜 대장에게 아침에 잠수함을 격침했다는 워드의 보고에 대해 추가로 확인한 사실을 전화로 보고하고 있었다.

머피 중령이 워드가 어선이 제한 해역 내로 들어와 검색했다는 말을 하고 있을 때 사무실의 문이 벌컥 열리더니 부사관 1명이 뛰어들어와 진주만이 공습을 받고 있으며 이건 훈련이 아니라는 방송이 방송탑(signal tower)에서 나오고 있다고 말했다.

깜짝 놀란 머피 중령이 이 사실을 킴멜 제독에게 전하자 전화가 끊어졌다.

머피 중령은 패트릭 소장 명의로 방송된 내용을 킴멜 제독으로 명의를 바꾸어 오전 8시 정각에 워싱턴과 해상의 모든 함정들에게 타전했다.

 

이 통신문을 받아든 프랭크 녹스 해군장관은 이렇게 말했다.

 

"맙소사! 그럴 리가 없어, 이건 필리핀을 뜻하는 것이 틀림없어!"

("My God! This can't be true, this must mean the Philippines!")

 

한편 관사에서 전화로 머피 중령이 보고를 듣던 킴멜 제독은 머피 중령이 보고 도중 공습을 당했다고 말하자 수화기를 내려놓고 하얀 정복의 단추를 채우면서 관사 밖으로 뛰쳐나왔다.

이웃한 제14해군관구 참모장 존 얼 대령의 관사 잔디밭에서는 진주만이 한눈에 보였다.

얼 대령 관사의 잔디밭으로 달려간 킴멜 제독은 진주만 상공에서 설치고 있는 일본기들을 넋을 잃고 바라보았다.

그 광경을 옆에서 지켜보았던 얼 부인에 따르면 당시 킴멜 제독의 얼굴이 하얀 정복만큼이나 하얗게 질려 있었다고 한다.

 

킴멜 제독은 즉시 운전병을 호출했다.

그가 차에 올라타려는 순간 제2잠수함전대의 도빈 중령이 동승을 요청했다.

킴멜 제독과 도빈 중령이 오전 8시 10분에 사령부에 도착했을 때는 폭탄의 폭발음과 기총의 사격 소리, 비행기의 엔진 소리, 반격하는 대공포와 기관총의 사격소리, 화재의 내음과 연기로 아수라장이었다.

킴멜 제독은 멍하니 충격을 받은 상태로 자신의 사무실로 달려갔다.

어쨌거나 할 일은 해야만 했다.

오전 8시 12분에 킴멜 제독은 진주만이 일본의 공격을 받았음을 확인하는 내용을 다시 워싱턴에 타전했고, 17분에는 제2초계비행단에게 적 항공모함의 위치를 찾으라는 명령을 내렸다.

 

킴멜 제독의 참모들도 모여들기 시작했다.

태평양함대 참모장 윌리엄 스미스 대령은 킴멜 제독과 전투부대 사령관 윌리엄 파이 중장이 전쟁계획실 사무실에 나란히 서서 창 밖을 바라보고 있는 것을 발견했다.

스미스 대령은 적의 폭탄 1발이면 태평양함대의 지휘관이 없어진다면서 두 사람이 같이 있으면 안된다고 말했다.

파이 중장은 그 말을 듣고 사령부의 반대쪽 끝으로 갔다.

항공장교들은 일본항모를 찾기 위하여 초계기를 발진시키라는 명령을 전달하려고 전화통에 달라붙어 오아후의 모든 해군기지에 전화를 걸었다.

 

태평양함대의 통신참모였던 모리스 커츠 중령에 따르면 당시 태평양함대 사령부의 분위기는 히스테릭하지는 않았으며 질서가 유지되었으나 깊은 절망감에 빠져 있었다.

속속 들어오는 피해 보고를 들으면서 킴멜 제독과 스미스 대령은 일본기의 정확한 공격에 놀랐다.

 

킴멜 제독은 끔찍한 피해 보고가 들어올 때마다 괴로워했다.

당시 미해군은 전쟁 때와 비교하여 규모가 작고 가족적인 분위기가 강했다.

부사관과 수병은 함정에 배치되면 20년 혹은 30년 후에 전역할 때까지 그 배에서 근무했다.

 

애너폴리스 해군사관학교를 졸업한 장교들은 몇 년에 한번씩은 매일같이 얼굴을 맞대는 상황에서 평생을 근무했다.

자연히 가족끼리도 친해서 자녀끼리 결혼하는 경우도 많았고 후배이자 부하인 해군장교가 사위가 되는 경우도 비일비재했다.

또한 해군 내에서 성공한 장교일수록 아들을 해군사관학교에 보내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에 초급 장교들은 대부분 동료의 아버지를 상사로 모신 경험이 있었으며 고급 장교들은 대체로 동료의 아들을 부하로 거느리는 경험을 했다.

 

킴멜 제독은 진주만에 근무하는 장병들 수천명의 얼굴을 알고 있었고 수백명의 이름을 알았으며 수십명과는 친구 사이였다.

경험많은 사령관들부터 풋내기 수병까지 그들 모두가 킴멜 제독의 부하였으며 그의 책임이었다.

 

그 잔인한 아침에 킴멜 제독이 창밖을 바라보는 동안 추력을 거의 잃은 탄환 하나가 유리창을 깨고 들어와 킴멜 제독의 가슴에 맞아 검은 얼룩을 남긴 후 바닥에 떨어졌다.

깜짝 놀란 참모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킴멜 제독은 바닥에 떨어진 탄환을 집어 살펴보더니 말했다.

 

"이것이 나를 죽였더라면 차라리 자비로운 일이었을 텐데."

("It would have been merciful had it killed m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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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 도라!도라!도라!

 

구축함 워드가 갑표적을 격침하는 동안 183대로 이루어진 일본군의 제1차 공격대는 오아후 북방의 태평양 상공을 날고 있었다.

공격대의 가운데는 후치다 미츠오 중좌가 이끄는 49대의 수평폭격기가 3,000m 고도로 날았다.

왼쪽으로는 다카하시 가쿠이치 소좌가 지휘하는 급강하 폭격기 51대가 3,300m 고도로 날고 있었으며 오른쪽으로는 무라타 시게하루 소좌가 이끄는 뇌격기 40대가 2,800m 고도를 유지하며 날았다.

폭격기들 머리 위로 상공 4,300m 고도에서는 이타야 시게루 소좌가 지휘하는 제로기 43대가 호위하고 있었다.

 

오전 7시가 되자 후치다 중좌는 오아후의 KGMB 라디오 방송국에서 송출하는 하와이 음악을 들을 수 있었다.

당시 미육군은 본토에서 장거리 폭격기가 날아올 경우 KGMB 라디오를 통하여 밤새 하와이 음악을 틀어 오아후 섬을 찾아오는데 도움을 주었다.

12월 7일 아침에 도착할 B-17 폭격기를 위한 음악이 일본군 비행기를 유도하고 있는 꼴이었다.

해면 1,500m 상공에는 구름이 끼어 해상으로부터 일본기들을 발견하기 어려웠으므로 기습에 이상적인 날씨였다.

 

사실 오아후의 미군은 구름을 뚫고 일본기들을 탐지할 수 있는 수단을 가지고 있었다.

오아후 섬의 북단 카후쿠 곶의 해발 70m 지점에는 SCR-270 레이더를 장비한 오파나 이동 레이더 기지가 있었다.

미육군이 오아후 섬에 배치한 6개의 이동식 레이더 기지 중 가장 북쪽에 위치한 이 기지에는 레이더 조작병인 조셉 로커드 이등병과 조지 엘리엇 이등병이 오전 4시부터 레이더로 훈련을 하고 있었는데 주로 고참인 로커드 이등병이 엘리엇 이등병에게 조작법을 가르쳤다. 

 

(SCR-270 레이더. http://en.wikipedia.org/wiki/SCR-270_radar)

 

7일 오전 6시 45분에 레이더에 광점이 하나 나타났다.

치쿠마에서 발진한 수상정찰기가 잡힌 것이었다.

그러나 일요일 새벽에 3시간 동안 훈련을 하면 보통 20대 정도의 아군 비행기를 발견할 수 있었기 때문에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치쿠마의 수상정찰기는 진주만을 정찰한 후 7시 35분에 무전을 보내어 항만 내에 전함 9척, 중순양함 1척, 경순양함 6척이 있다고 보고했으며 3분 후인 38분에는 '풍향 80도, 풍속 14m, 적 함대 상공 운고 1,700m, 구름밀도 7  ' 이라고 보고했다.

임무를 마친 치쿠마의 수상 정찰기는 북상하여 돌아갔다.

 

잠시 후에는 도네의 수상정찰기가 라하이나 정박지가 비어 있다고 보고했다.

도네의 정찰기는 이후 남쪽으로 향하여 미군 항공모함을 찾았으나 당시 오아후 서쪽 320km 지점에 있던 엔터프라이즈를 찾지 못했다.

 

오파나 레이더 기지에서는 오전 7시가 되자 로커드 이등병이 철수하려고 했으나 엘리엇 이등병은 좀 더 훈련하기를 원했다.

오전 7시 2분, 5도 방향 212km 거리에서 커다란 광점이 나타났다.

레이더 스크린을 바라본 로커드 이등병은 광점의 크기로 보아 50대 이상의 비행기로 이루어진 커다란 집단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로커드 이등병은 어쨌든 훈련 시간이 끝났으므로 그냥 철수하려고 했으나 엘리엇 이등병은 정보센터에 연결된 전화기로 보고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두 사람은 8분 정도 티격태격하다가 결국 로커드 이등병이 졌고 엘리엇 이등병이 정보센터와 연결된 전화기를 들었다.

광점은 처음 발견했을 때보다 30km 이상 가까워진 상태였다.

 

엘리엇 이등병이 정보센터에 전화를 걸자 교환수 조셉 맥도널드 이등병이 받았다.

맥도널드 이등병은 엘리엇 이등병에게 지금 주변에는 아무도 없으니 곧 찾아서 연락하겠다고 말했다.

주변을 둘러보던 맥도널드 이등병은 추적장교(pursuit officer)인 커밋 타일러 중위를 발견했다.

추적장교란 전투기의 발진과 목표 지점으로의 유도를 담당하는 관제장교를 돕는 직책으로 타일러 중위는 12월 3일부터 추적장교 일을 시작한 풋내기였다.

 

7시 15분에 정보센터에서 오파나 기지로 전화를 걸자 로커드 이등병이 받았다.

로커드 이등병은 타일러 중위에게 자신이 본 것을 말했다.

타일러 중위의 머리 속에는 그 정체불명의 광점이 적일 수도 있다는 생각은 떠오르지 않았다.

대신 그는 밤새 KGMB 라디오 방송국에서 하와이 음악을 틀고 있었던 것을 기억해 내었다.

동료 폭격기 조종사들에게서 미본토로부터 장거리 폭격기가 올 때면 KGMB 방송국에서 하와이 음악을 밤새 튼다는 소리를 들었던 타일러 중위는 그 광점이  태평양을 건너 오아후 섬에 접근 중인 B-17 폭격기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일개 이등병에게 그런 이야기를 할 수는 없었으므로 타일러 중위는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

 

"글쎄, 걱정할 것 없어."

("Well, don't worry about it.")

 

이 대답은 이후 무사안일과 무책임한 태도의 상징이 되었다.

 

실제로 당시 미본토에서 출발한 B-17 폭격기 12대도 접근하고 있었는데 일본기들로부터 약 5도 동쪽으로 치우친 곳에서 접근하고 있었다.

 

타일러 중위와 통화한 후 로커드 이등병은 다시 내려가자고 재촉했으나 엘리엇 이등병은 추적을 계속했다.

7시 20분에 광점은 3도 방향에서 119km 까지 접근했으며 조지 마셜 육군참모총장이 보낸 경고 전문이 호놀룰루의 RCA 통신국에 도달한 7시 33분에는 15도 방향으로 56km 까지 접근하고 있었다.

7시 39분에 광점은 41도 방향으로 32km 까지 접근한 상태에서 사라졌는데 이것은 오파나 기지 뒤편의 언덕에서 생기는 간섭파에 가려진 것이었다.

엘리엇 이등병과 로커드 이등병은 레이더를 끄고 아침 식사를 하기 위하여 기지로 내려갔다. 

이리하여 레이더에서의 정보는 기습을 막는데 도움을 주지 못했다.

 

로커드 이등병은 타일러 중위에게 레이더에 나타난 항공기가 50대 이상이라는 말을 하지 않는 실수를 저질렀다.

미육군항공대의 교리에 따르면 50대 이상의 대편대를 만드는 경우가 없었기 때문에 그 말을 들었다면 타일러 중위가 B-17 폭격기로 오인하지는 않았을 것이었다.

또한 타일러 중위는 로커드 이등병과의 통화 내용을 제14전투비행단의 작전장교인 케네스 버키스트 소령에게 보고하지 않은 실수를 저질렀다.

 

레이더로 일본기의 접근을 탐지하고도 요격에 실패한 이 사건은 역사학자들에게 많은 비판을 받았다.

특히 존 키건을 비롯한 영국의 역사학자들이 매섭게 비판하는 경향이 있는데 이는 영국이 영국본토항공전에서 레이더를 활용하여 큰 성과를 올렸을 뿐 아니라 당시 오아후에 배치된 레이더 장비를 제공했던 사실과 연관이 있을 것이다.

하지만 고든 프렌지는 자신의 저서 <At Dawn We Slept :The Untold Story of Pearl Harbor>에서 로커드 이등병이나 타일러 중위의 실수가 없었더라도 이미 늦었다고 주장했다.

 

타일러 중위가 로커드 이등병과 통화한 시간은 7시 15분으로 이는 휠러 비행장에 최초의 폭탄이 떨어진 7시 51분으로부터 36분 전이었다.

따라서 로커드 이등병의 설명을 듣고 상황을 파악한 타일러 중위가 버키스트 소령에게 보고를 하고 버키스트 소령이 결단을 내려 전투기의 분산을 지시해도 분산에는 최소한 30분이 걸리기 때문에 시간이 모자랐다는 것이다.

프렌지는 갑표적 격침 보고를 받았을 때가 요격을 위한 마지막 기회였으며 이후로는 기회가 없었다고 주장했다.

 

다만 육군이 레이더 접촉 사실을 해군에 통보하지 않은 것은 실수라고 봐야 한다.

만일 일본기들이 북쪽에서 접근해 온 것을 알았다면 진주만 기습 이후 해군이 엉뚱한 방향을 수색하느라고 고생하지 않았을 것이다.

 

제1차 공격대가 오전 7시 40분에 오아후 섬의 북단 카후쿠 곶에 도착하자 후치다 중좌는 신호탄을 발사했다.

기습에 성공했으므로 신호탄은 1발만 발사할 생각이었다.

그런데 신호탄을 발사하고 보니 소류의 제로기 8대를 이끄는 스기나미 마사지 대위가 구름 속에서 신호탄을 보지 못한 것 같았다.

원래 3초 간격으로 신호탄을 2번 발사하면 기습이 실패했다는 뜻이었으므로 후치다 중좌는 일부러 10초 정도 기다렸다가 신호탄을 다시 발사했다. 

하지만 급강하폭격기들을 이끌고 있던 다카하시 가쿠이치 소좌는 기습이 실패했다는 뜻인 줄 알고 휘하의 급강하폭격기들에게 공격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뇌격대를 이끌던 무라타 시게하루 소좌는 후치다 중좌의 뜻을 정확하게 파악하고 다카하시 소좌가 착각을 일으켰음을 깨달았으나 어쩔 도리가 없었다.

무라타 소좌는 뇌격기들에게 계획대로 공격하라는 명령을 내렸고 뇌격기들은 고도를 낮추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진주만 기습의 최초 공격은 전함에 대한 뇌격이 아닌 휠러 비행장에 떨어진 폭탄이 되었으나 어차피 기습은 성공했고 순서가 바뀌었어도 문제가 없었다.

 

(진주만 기습 상황도. http://upload.wikimedia.org/wikipedia/commons/1/1c/Pearl_Harbor_bombings_map.jpg)

 

후치다 중좌는 오아후 북해안을 남서쪽으로 날면서 쌍안경으로 진주만을 바라보고 놀랐다.

함정들이 평화시에도 기대하기 힘들 정도로  다닥다닥 붙어서 정박하고 있었다.

오전 7시 49분, 하와이 북해안의 와이메아 만 상공에서 후치다 중좌와 동승한 통신수는

 

"도!도!도!"

 

라고 타전했다.

(도는 '도츠게키세요'의 첫 음절로 '돌격하라'는 뜻이다.)

 

이 신호를 따라 공격대는 각자의 목표를 찾아 흩어졌다.

 

후치다 중좌는 수평폭격기 49대를 이끌고 오아후 섬의 서해안을 따라 남하했다.

진주만 동쪽 바버스 곶 상공에 다다랐을 때  후치다 중좌는 기습 성공을 확신했으며 후치다 중좌의 통신수가 7시 53분에

 

"도라-도라-도라"

 

를 타전했다.

기습에 성공하여 미태평양함대의 함정들과 오아후의 육군 군사시설들을 무방비 상태에서 공격했다는 의미였다.

 

기습 성공의 암호가 도착하자 아카기 함상에서는 제1항공함대 참모장 구사카 류노스케 소장이 눈물을 주르륵 흘렸다.

사령관 나구모 주이치 중장도 감정이 북받치는지 입을 꽉 다물고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아일랜드에 있던 다른 장교들도 모두 말없이 기지개를 켜면서 안도감을 드러내었다.

 

기습은 성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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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 갑표적 격침

 

항공모함을 출격한 1차 공격대가 진주만으로 접근하는 동안 I-24 함의 갑표적 정장인 사카마키 가즈오 소위는 항해에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잠망경을 올려 확인한 결과 자이로스코프가 가리키는 방향은 실제와 90도나 오차가 났다.

사카마키 소위는 자이로스코프를 포기하고 잠망경에 의존하여 진주만 입구에 접근하려 했으나 쉬운 일이 아니었다.

급기야 갑표적은 방향을 잃고 헤매기 시작했다.

사실 사카마키 소위는 진주만 입구에 접근하지 못했기 때문에 목숨을 건졌다.

 

7일 아침에 미해군의 보급함 안타레스가 바지선을 끌고 진주만 입구로 접근하고 있었다.

오전 6시 30분, 안타레스의 함장 로렌스 그래니스 중령이 함의 우현 뒷쪽 1,400m 해상에서 무엇인가를 발견하고 쌍안경으로 살펴보니 잠수함의 사령탑이었다.

아마도 부력 조절 실패로 떠오른 것 같았다.

그래니스는 주변에 있던 구축함 워드에게 보고했다.

이때 초계를 나서던 카탈리나 비행정 1대도 잠수함을 발견하고 위치를 알리는 연막탄을 떨어뜨렸다.

 

워드의 함교를 지키고 있던 포술장 괴프너 중위는 안타레스의 보고를 받고 쌍안경으로 살펴본 후 조타병에게도 보여 주었다.

두 사람은 잠수함의 사령탑이 틀림없다는데 의견이 일치했다.

괴프너 중위가 보고하자 함장 윌리엄 아우터브리지 대위가 함교로 달려왔다.

 

(위키스 급 구축함 DD-139 워드. 배수량 : 1,267톤, 길이 : 96m, 속력 : 35노트, 승조원 : 231명, 무장 : 4인치 단장포 4문, 3인치 대공포 2문, 21인치 어뢰발사관 4연장 3개, 어뢰 12발)

 

아우터브리지 함장이 쌍안경으로 살펴보니 잠수함의 사령탑이 틀림없었다.

아군일까 생각해 보았으나 사령탑이 처음보는 형태였다.

게다가 이곳은 아군 잠수함은 반드시 부상해야만 하는 해역인데도 잠수함은 완전히 부상하지 않았으며 워드와 통신하려는 노력도 하지 않고 오히려 잠항하려 하고 있었다. 

그는 적의 잠수함이 틀림없다고 생각하고 6시 40분에 총원 전투배치 명령을 내렸다.

동시에 워드는 속력을 높여 잠수함에게 접근했다.

 

잠수함에게서 50m 거리까지 근접한 워드는 잠수함과 나란히 달리면서 포격을 가하기 시작했다.

초탄은 약간 높았으나 두번째 사격에서 3번 포탑의 4인치 주포가 잠수함의 사령탑 오른쪽 하단에 1발을 명중시켰다.

잠수함은 황급히 잠항했고 워드는 잠수함의 예상 항로를 가로지르면서 폭발심도를 30m로 맞춘 폭뢰를 투하했다.

폭뢰 공격이 끝난 오전 6시 53분에 워드는 적의 잠수함을 공격했다는 사실을 제14해군관구에 보고했다.

워드가 폭뢰투하를 마치자 상공의 카탈리나 비행정이 폭뢰 2발을 투하했다.

이로써 워드와 카탈리나는 I-20 함에서 발진한 일본군의 갑표적을 격침했다. 

 

(2002년에 진주만 부근 해저에서 발견된 갑표적의 잔해. http://www.aerospaceweb.org/question/hydrodynamics/q0280.shtml)

 

2002년에 하와이 대학의 탐사팀이 진주만에서 6km 정도 떨어진 곳에서 깊이 370m 깊이에 가라앉아 있던 I-20 갑표적의 잔해를 발견했는데 갑표적의 사령탑에는 워드의 함포에 맞은 흔적이 남아 있었다.

 

(갑표적의 우현 사령탑 하단. 워드의 4인치 주포에 맞아 관통당한 구멍이 보인다. http://www.soest.hawaii.edu/HURL/gallery/archaeology/midget.html)

 

12월 7일 아침에 제14해군관구의 당직사관은 해럴드 카민스키 소령이었다.

워드가 일본잠수함을 격침했다고 보고하자 카민스키 소령은 즉시 제14해군관구 사령관 클로드 블로크 소장의 부관에게 전화를 걸었으나 연결되지 않았다. 

그러자 카민스키 소령은 태평양함대에 전화를 걸어 블랙 소령에게 알렸다.

블랙 소령이 당직 장교인 빈센트 머피 중령에게 전화를 걸어 상황을 설명했을 때 머피 중령은 숙소에서 옷을 입고 있던 중이었다.

머피 중령이 사무실로 들어오자마자 제1초계 비행단의 로간 램지 소령으로부터 전화가 왔다.

램지 소령은 포드 섬의 당직장교인 딕 벨린저 대위로부터 카탈리나 정찰기 1대가 구축함과 공동 작전으로 일본잠수함을 격침했다는 보고를 듣고 전화를 걸어온 것이었다.

 

머피 중령은 워드의 보고에 이어 램지 소령의 전화를 받자 심상치 않은 일이라고 판단하고 태평양함대 사령관 허즈번드 킴멜 대장에게 전화를 걸었다.

이날 킴멜 대장은 오전 7시쯤 일어났으며 머피 중령의 전화를 받았을 때에는 아직 세수와 면도도 하지 않은 상태였다.

킴멜 대장은 워드의 보고를 그대로 믿지는 않았으나 어쨌든 사태가 심각하다고 보고 머피 중령에게 상황을 파악하여 다시 전화하라고 말했다.

 

블랙 소령과 통화한 후 카민스키 소령은 제14해군관구 참모장 존 얼 대령에게 전화를 걸었다.

카민스키 소령의 보고를 받은 얼 대령의 첫 반응은 지금까지 여러번 있었던대로 오보라는 것이었다.

그는 워드의 함장 아우터브리지 대위가 경험이 일천하다는 사실을 언급한 후 카민스키 소령에게 사실을 확인해서 다시 보고하라고 말한 다음 전화를 끊었다.

하지만 얼 대령은 사태의 중대성을 감안하여 잠시 후인 7시 12분에 블로크 소장에게 전화를 걸었다.

블로크 소장과 얼 대령은 이 문제에 관해 10분 정도 이야기한 다음 상황이 확실해질 때까지 좀 더 기다려 보기로 결정했다.

 

잠수함을 공격했다는 워드에 보고에 대한 반응을 보면 당시 제14해군관구나 태평양함대의 장교들이 잠수함 출현을 가볍게 생각하지 않았다는 걸 알 수 있다.

문제는 대응 시스템으로 일본군의 공습이 1시간도 남지 않은 상황에서 이 중요한 사태에 대하여 누구도 신속한 결정을 내리지 못한 채 전화통만 붙들고 아까운 시간을 날려버렸다.

만일 제14해군관구나 포드 섬의 당직사관에게 보고를 듣자마자 일단 항공기를 초계에 내보내고 상부에는 나중에 보고할 수 있는 권한이 있었다면 피해를 줄일 수 있었을지 모른다.  

 

또하나 아쉬운 점은 해군이 이 사실을 즉각 육군에 통보하지 않은 점이었다.

만일 워드로부터 보고가 들어옴과 동시에 육군에도 통보되었으면 파괴활동에 매몰되어 있던 육군의 생각을 바꿀 수 있을지도 몰랐다.

적의 잠수함이 접근했다면 파괴활동보다는 공습이 뒤따를 가능성을 훨씬 높았기 때문이다.

 

파괴 활동에 대비하여 감시를 편하게 하기 위하여 모아 두었던 전투기들을 분산시키는 데는 30분이 필요했다.

만일 워드의 보고를 일찍 듣고 결단을 빨리 내렸으면 일본기들이 들이닥치기 전에 전투기들을 분산시켜 일본기의 공격으로부터 보호할 기회가 있었다.

그랬다면 공습이 진행되는 동안 상당수의 전투기들을 내보내어 아군의 피해를 줄이고 일본군에게 더 큰 피해를 강요할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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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 발진

 

1941년 12월 6일에 거추장스러운 급유대를 떼어버린 진주만 공격부대는 20노트의 속력으로 남하했다.

경순양함 아부쿠마가 앞장섰으며 제17구축대의 구축함 4척이 넓게 펼쳐져 뒤따랐다.

5km 뒤에는 전함 히에이와 기리시마가 나란히 항진했고 전함의 좌우로 6km 떨어진 해상에는 중순양함 도네와 치쿠마가 항진했다.

전함의 5km 후방에서는 6척의 항공모함이 2열로 항진했다.

기함 아카기가 오른쪽 선두에 섰고 1.5km 후방에 카가가 뒤따랐으며 왼쪽에는 소류가 선두에 서고 히류가 뒤따랐다.

쇼가쿠와 즈이가쿠는 카가와 히류의 뒤를 따랐다.

제18구축대의 구축함 3척이 항공모함의 후방을 지켰으며 잠수함 3척은 뒤처져 따라갔다.

 

하와이 시간으로 1941년 12월 7일 오전 2시에 군령부로부터 마지막 정보가 도착했다.

진주만에는 방공기구가 떠있지 않았으며 전함 주변에 어뢰방어망도 없었고 항공기에 의한 장거리 초계도 이루어지지 않고 있었다.

정박 중인 함정은 전함 9척, 경순양함 3척, 수상기모함 3척, 구축함 17척이었으며 경순양함 4척과 구축함 9척은 건선거에 들어가 있었다.

항공모함과 중순양함은 없었다.

 

항공정비병들은 제1차 공격대를 비행갑판에 올려 발진준비를 시작했다.

제2차 공격대는 아직 격납갑판에 있었다.

 

12월 7일 새벽에 미해군의 소해함 콘도르와 크로스빌은 진주만 입구를 초계하고 있었다.

오전 3시 42분에 콘도르의 당직사관 러셀 맥클로이 소위가 뱃머리에서 왼쪽으로 50m 떨어진 해상에서 뭔가를 발견하고 조타하사 로버트 우트릭을 불러 의견을 물었다.

쌍안경을 들여다 본 우트릭은 잠망경이라고 대답했다.

맥클로이 소위는 오전 3시 57분에 주변에 있던 구축함 워드에게 발광신호로 잠항 상태의 잠수함을 발견했다고 보고했다.

 

이틀 전인 12월 5일부터 구축함 워드의 함장을 맡고 있던 35세의 윌리엄 아우터브리지 대위는 총원 전투배치 명령을 내렸다.

워드는 소나로 주변을 수색했으나 아무것도 찾지 못했고 아우터브리지 함장은 오전 4시 35분에 전투배치를 해제했다

 

오전 4시 58분에 진주만 입구의 대잠망이 열리면서 소해정 2척은 항 내로 들어갔다.

당시 잠수함 오인 사건이 많았기 때문에 이 사건에 대해 콘도르나 워드 모두 일지에 기록했을 뿐 보고하지 않았다.

이때 맥클로이 소위가 본 것은 아마도 갑표적 중 1척이며 이 갑표적은 소해정들을 따라 항 내로 잠입했을 가능성이 크다.

대잠망은 오전 8시 40분까지 열려있었다.

 

진주만 공습에 참가할 조종사들의 기상 시간은 오전 5시였으나 일부 조종사들은 3시 30분에 일어나 배 안에 만들어 놓은 신사에 참배하고 마음을 가다듬었다.

아침식사를 마친 조종사들은 마지막 브리핑을 듣기 위하여 비행대기실에 모였는데 칠판에는 최종 확인된 미국함정들의 정박 위치가 그려져 있었다.

아카기의 비행대기실에서는 후치다 미츠오 중좌가 수평폭격에 대하여, 무라타 시게하루 소좌가 뇌격에 대하여, 그리고 이타야 시게루 소좌가 전투기 조종사들에게 요점만 추려 짧게 설명했으며 마지막으로 나구모 주이치 중장이 간단하게 격려사를 했다.

격려사가 끝나자 후치다 중좌는 모두 기립시켜 아카기의 함장 하세가와 기치 대좌에게 경례를 했다.

하세가와 대좌는 경례를 받은 다음

 

"계획에 따라 이함하라."

 

는 명령을 내렸다.

소류를 비롯한 다른 항공모함에서도 비슷한 광경이 벌어졌다.

 

오전 5시 30분에 중순양함 도네와 치쿠마가 각각 1대씩의 수상정찰기를 사출했다.

도네의 정찰기는 라하이나 정박지로, 치쿠마의 정찰기는 진주만으로 향했다.

 

진주만에서 북쪽으로 370km 떨어진 발진해역에 들어선 항공모함들은 5시 58분부터 호위함정들과 함께 바람이 불어오는 동쪽으로 변침하여 24노트의 속력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후치다 중좌는 탑승하기 전에 정비장교로부터 '필승' 이라고 적힌 하얀 머리띠를 받아 헬멧에 둘렀다.

풍속은 50km/hr 였으며 해상에는 2m 높이의 파도가 일고 있었고 항공모함의 비행갑판은 아래위로 5도씩 흔들렸다.

 

오전 6시 5분부터 발진이 시작되었다.

가벼워서 활주거리가 짧은 제로기가 먼저 발진했고 이어서 수평폭격기 또는 급강하폭격기, 마지막으로 뇌격기가 발진했다.

제1차 공격대의 숫자는 원래 뇌격기 40대, 수평폭격기 50대, 급강하폭격기 54대, 제로기 45대로 총 189대였다.

그러나 카가의 수평폭격기 1대, 쇼가쿠의 급강하폭격기 1대와 즈이가쿠의 급강하폭격기 2대는 마지막 점검에서 엔진고장으로 제외되어 7일 새벽에 비행갑판에 올려진 함재기는 185대였다.

이들 중 소류의 제로기 1대는 이함 직후 바다에 추락했으나 조종사는 구축함에 구조되었다.

쇼가쿠의 제로기 1대는 이함 직후 엔진이 고장나서 돌아가야만 했으므로 최종적으로 공격에 참가한 항공기는 183대였다.

제1차 공격대는 15분 만에 발진을 마치고 6시 20분에 대형을 갖추어 오아후로 날아가기 시작했는데 이는 기록적으로 빠른 발함시간이었다.

 

(1941년 12월 7일 아침에 진주만을 공격하기 위하여 아카기에서 이함하는 제로기. http://en.wikipedia.org/wiki/Attack_on_Pearl_Harbor)

 

제1차 공격대가 발진을 마치자 진주만 공격부대는 다시 남쪽으로 변침하여 20노트의 속력으로 항진했다.

항공정비병들은 제2차 공격대를 비행갑판에 올려 발진준비를 했으며 비행대기실에서는 조종사에 대한 브리핑이 실시되었다.

오전 7시 5분부터 항모들이 다시 동쪽으로 변침하여 바람을 안고 달리기 시작했고 제로기를 필두로 제2차 공격대가 이함했다.

제2차 공격대는 수평폭격기 54대, 급강하 폭격기 81대, 제로기 36대 등 총 171대로 이루어져 있었으나 카가와 소류의 급강하폭격기 각 1대와 히류의 제로기 1대가 엔진 이상으로 빠져 168대가 비행갑판에 올려졌다.

이들 중 히류의 급강하폭격기 1대가 이함 직후 엔진 고장으로 탈락하여 총 167대가 공격에 참가했다.

 

그리하여 제1차 공격대가 이함을 시작한지 90분 만에 350대에 달하는 전체 공격대가 발진을 마쳤다.

항공모함의 승조원들은 발진이 진행되는 동안 계속 손을 흔들며 제2차 공격대의 마지막 항공기가 완전히 시야에서 사라질 때까지 만세를 불렀다.

 

전함 히에이와 기리시마, 중순양함 도네와 치쿠마에서는 오전 6시 30분에 수상정찰기를 사출하여 남쪽으로 파견했다.

이들은 오아후 방면으로부터 진주만 공격부대를 향하여 북상하는 미군의 항공기나 수상함정이 있는지 감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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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 기습 전야

 

일본해군은 1941년 12월 1일 0시를 기하여 함대호출부호를 바꾸었다.

11월 1일에 바꾼 후 1달 만에 다시 바꾼 것이었다.

이전까지 함대호출부호는 6개월 이상 사용했기 때문에 이례적인 일이었다.

 

불안해진 태평양함대 사령관 허즈번드 킴멜 제독은 다음날인 12월 2일에 정보참모 에드원 레이튼 중령을 불러 보고를 들었다.

이 자리에서 레이튼 중령이 최소한 15일 이상 일본제1 및 제2항공전대의 행방이 묘연하다고 말하자 킴멜 제독은 깜짝 놀랐다.

 

"뭐라고! 제1항공전대와 제2항공전대가 어디 있는지 모른다고?"

("What! You don't know where Carrier Division 1 and Carrier Division 2 are?")

 

"예. 모릅니다. 저는 그것들이 본국 수역에 있다고 생각하지만 어디에 있는지 모릅니다."

("No, sir, I do not. I think they are in home waters but I do not know where they are.")

 

레이튼 중령이 대답했다.

 

킴멜 제독이 다시 물었다.

 

"자네 말은 그것들이 지금 다이아몬드 헤드(오아후 섬의 화산) 부근을  돌아다니고 있는데 그걸 모르고 있을 수 있다는 소리인가?"

("Do you mean to say that they could be rounding Diamond Head and you wouldn't know it?")

 

레이튼 중령이 기어 들어가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것들이 지금이라도 발견되길 바랄 뿐입니다."

("I hope they would be sighted before now.")

 

킴멜 제독은 불안감을 느꼈으나 뾰족한 수가 없었다.

또한 이런 일이 처음도 아니었다.

지난 6개월간 태평양 함대가 일본항공모함을 추적한 것은 134일에 지나지 않았다.

일본항모를 연속하여 추적할 수 있는 기간은 짧게는 9일, 길어도 22일이 한계였으며 그 이후에는 사라졌다가 다시 나타나고는 했다.

지난 6개월 간 일본항모들은 그런 식으로 12번이나 사라졌다가 다시 나타났다.

따라서 이번 경우만 예외적이라고 볼 근거는 없었다.

 

12월 2일 오후 8시에 미드웨이 북방 1,500km 해상을 지나던 진주만 공격부대는 도쿄로부터 

 

"니이가타 산을 오르라. 1208"

 

이라는 무전을 받았다.

이는 도쿄 시간으로 12월 8일 0시를 기하여 미국 및 영국에 대하여 개전한다는 뜻이었다.

몇 시간 후 진주만 공격부대는 날짜변경선을 통과했다.

(진주만 공격부대의 모든 일지는 도쿄 시간에 맞추어 작성했지만 여기서부터는 하와이 현지 시간을 적용한다. 도쿄 시간은 하와이 시간보다 19시간 30분 빠르다. 따라서 도쿄 시간 12월 8일 0시는 하와이 시간으로 12월 7일 오전 4시 30분이다.)

 

(진주만 공격부대 항적도. http://en.wikipedia.org/wiki/Attack_on_Pearl_Harbor)

 

12월 3일에 미해군참모총장 해럴드 스타크 대장은 런던, 홍콩, 싱가포르, 마닐라의 일본대사관 및 영사관에서 퍼플 암호 기계를 파괴하고 있다는 보고를 듣고 이 소식을 태평양함대를 비롯한 일선 사령부에 통보했다.

해럴드 총장으로서는 단안을 내린 것으로 당시 일본의 외교암호를 해독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사람은 워싱턴에서도 손에 꼽을 정도였으며 일선 사령관들은 아무리 고위 장교라도 모르고 있었다.

실제로 태평양함대 사령관 킴멜 제독은 이때 퍼플이라는 용어를 처음 들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전문은 킴멜 제독에게 경각심을 불러 일으키지 못했다.

킴멜  제독은 일본해군이 아시아의 영국 영토를 노리고 대규모로 남하 중인 사실을 알고 있었으며 미국이 언제 영국 편을 들어 일본에 선전포고를 할지 모르는 상황에서 일본대사관과 영사관에서 암호기계를 파괴하는 것은 당연하다고 보았다.

 

12월 4일 오후 2시에 도쿄에서는 도고 시게노리 외상이 이토 세이치 군령부 차장 및 참모본부 제1부장인 다나카 신이치 중장과 회의를 갖고 최후 통첩을 미동부 시간으로 12월 7일 오후 1시에 전달하기로 결정했다.

미동부시간 7일 오후 1시는 하와이 시간으로 오전 7시 30분이며 오전 8시로 예정된 공격 30분 전이었다.

오후 1시라는 최후통첩 시간은 마지막 순간에 주미 대사관에 알려주기로 했다.

 

12월 4일 오전에 진주만 공격부대는 해상급유를 마치고 제2급유대를 분리했다.

제2급유대는 구축함 아라레의 호위를 받으면서 진주만 공격부대의 퇴로에 자리잡았다가 공격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합류할 것이었다.

 

같은 날 킴멜 제독은 항공모함 렉싱턴에게 미드웨이에 버팔로 전투기를 파견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렉싱턴은 다음날인 5일에 중순양함 시카고, 애스토리아, 포틀랜드 및 구축함 5척과 함께 진주만을 출항했다.

5일에는 또한 중순양함 2척(인디애나폴리스, 미네아폴리스)과 구형 구축함을 개조한 소해함 5척으로 이루어진 제3기동부대가 진주만을 떠나 존스턴 섬으로 향했다.

 

12월 5일에 히컴 비행장에는 미본토에서 필리핀으로 파견되는 B-24 폭격기 1대가 착륙했다.

사진촬영용으로 사용될 이 폭격기는 최소한의 승무원만 태우고 비무장인 상태로 태평양을 건넜다.

진주만에서는 이렇게 비무장 상태의 폭격기를 파견하는 것은 전쟁성에서도 하와이가 공격을 당하지 않으리라고 믿고 있다는 증거로 받아들였다.

 

하와이에 먼저 접근한 것은 일본잠수함들이었다.

일본잠수함들은 3일 저녁까지 하와이 근해 560km 이내로 진입했고 6일에는 하와이를 둘러쌌다.

12월 5일 저녁까지 I-71 함은 마우이 섬과 카훌라웨 섬 사이의 알랄라케이키 해협에, I-72함은 몰로카이 섬과 라나이 섬 사이의 칼로히 해협에, I-73함은 마우이, 카훌라웨, 그리고 라나이 섬 사이의 케알라이카히키 해협에 도달했다. 

 

(하와이 제도. http://en.wikipedia.org/wiki/Outline_of_Hawaii)

 

12월 5일 오후에 구축함 셀프리지와 랠프 탤벗은 진주만 바깥에서 초계중이었다.

오후 3시경 셀프리지가 수중물체를 발견했다가 놓쳤다.

잠시 후 진주만에서 8km 떨어진 해상에서 랠프 탤벗이 잠수함을 발견했다면서 전대 기함인 셀프리지에게 폭뢰공격 허가를 요청했다.

셀프리지에서 고래라면서 공격을 불허하자 랠프 탤벗의 함장 랠프 얼 중령은 부하들에게

 

"만약 이놈이 고래라면 꼬리에 모터보트를 단 모양이지!"

("If this is a black fish, it has a motorboat up its stern!")

 

라면서 비아냥거렸다.

 

6일 오전 10시 40분에 존 위넌트 주영대사가 국무성에 전문을 보내왔다.

크라 지협에서 14시간 거리에서 서진 중인 2개의 선단이 발견되었다는 것이었다.

큰 선단은 수송선 25척, 순양함 6척, 구축함 10척으로 이루어져 있었고 작은 선단은 수송선 10척, 순양함 2척, 구축함 10척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영령 말레이 반도로 향하는 곤도 중장과 오자와 중장의 함대였다.

해군성은 이 정보를 태평양함대와 제14해군관구를 비롯한 일선 사령부에 보냈다. 

 

육군항공대는 12대의 B-17 폭격기를 하와이를 경유하여 필리핀에 파견하기로 했다.

B-17 폭격기는 6일 밤에 캘리포니아의 해밀튼 비행장을 이륙하여 하와이 시간으로 7일 오전 8시에 오아후 섬의 히컴 비행장에 도착할 것이었다.

중량을 줄이기 위하여 승무원은 5명으로 줄이고 기총은 12.7mm 1정과 7.62mm 2정만 남겼으며 총탄은 싣지 않았다.

 

6일 오전 5시 30분에 진주만 공격부대는 오아후 북서쪽 960km 해상에서 1시간 동안 마지막 급유를 받은 후 제1급유대를 분리했다.

제1급유대는 구축함  가스미의 호위를 받으면서 진주만 공격부대의 퇴로에 대기하다가 공격을 마치고 돌아가는 길에 합류할 것이었다.

 

오아후 섬에서는 6일 오전  8시 15분에 킴멜 대장이 정보참모 레이튼 중령으로부터 보고를 받았다.

일본항모의 위치는 여전히 오리무중이었다.

 

킴멜 제독은 이어서 참모들과 함께 회의를 열었다.

워싱턴에서는 전쟁이 임박했으니 킴멜 제독이 당연히 주말동안 함대 주력을 출항시킬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회의에서는 다른 결론이 나왔다.

무엇보다 항공모함이 없어서 공중엄호를 받을 수 없는 상황에서 전함  중심의 주력 함대를 해상에 내보내는 것은 위험하다는 의견이 다수였다.

엔터프라이즈가 돌아와서 같이 출항할 수 있는 월요일까지는 육군 항공기들이 지켜주는  항구 내가 안전했다.

또 한 가지는 급유함의 부족으로 당시 태평양 함대의 급유함 세력으로는 한번에 함대의 1/8만 급유할 수 있었다.

전쟁이 임박한 상태에서 명확한 목적도 없이 함대를 내보냈다가 해상에 나가있는 함정들의 연료가 떨어졌을 때 전쟁이 터지면 기민한 대응이 불가능할 수도 있었다.

 

회의가 끝나갈 때쯤 호놀룰루의 일본영사관이 서류를 소각하고 암호기계를 파괴했다는 보고가 들어왔다.

서류 소각이야 이전에도 몇 번 있었으니 특별한 일은 아니지만 암호기계를 파괴한 것은 주의를 끌만한 일이었다.

그러나 킴멜 제독은 일본의 영령 말레이 침공이 임박한 상황에서 일본영사관이 암호기계를 파괴하는 것은 있을 수 있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6일 아침에 급유대를 떼어내 버리고 홀가분해진 진주만 공격부대는 오전 11시 30분에 남쪽으로 변침하여 속력을 20노트로 올렸다.

10분 후인 11시 40분에 쓰시마 해전 당시 도고 제독의 기함인 미카사에 올랐던 Z 기가 나구모 제독의 기함 아카기에 올랐다.

이어서 야마모토 제독의 훈시가 전해졌다.

 

"황국의 흥폐가 이 일전에 달렸다. 각자 최선을 다하라."

 

6일 오후 7시 3분에 라하이나 정박지가 비었다는 I-72함으로부터의 보고가 군령부를 통하여 진주만 공격부대에 전달되었다.

이제 모든 전력을 진주만에 집중해야만 할 것이었다.

 

6일 해가 지자 진주만 공격부대의 항공정비병들은 다음날 출격할 항공기들에 대한 최종 정비 및 점검에 들어갔다.

조종사들은 일찍 자라는 명령을 받고 오후 10시까지 잠자리에 들었다.

 

6일 밤에 특별공격대의 일본잠수함 5척은 갑표적을 발진시켰다.

I-24 함의 갑표적을 지휘하는 사카마키 가즈오 소위는 자이로컴퍼스가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다는 걸 발견했다.

이 상태로는 진주만까지 항해하기 어려웠으므로 I-24 함의 함장 하나부사 히로시 소좌는 걱정스럽게 물었다.

 

"어떻게 할 건가?"

 

사카마키 소위는 승조원인 이나가키 기요시 병조와 함께 잠시도 망설이지 않고 힘차게 대답했다.

 

"진주만으로 가겠습니다."

 

미군은 다가오는 위험을 모르고 있었다.

진주만을 관장하는 제14해군관구 사령관 클로드 블로크 소장은 6일 오후 8시 30분에 잠자리에 들었다.

토요일 오후를 맞아 골프를 치느라 피곤했던 것이다.

 

진주만의 해군항공대 사령관 패트릭 벨린저 소장은 5일째 침대 신세를 지고 있었다.

화요일에 심한 독감으로 쓰러진 그는 일요일 아침까지는 꼼짝말고 침대에 누워 쉬라는 군의관의 명령을 받은 처지였다.

 

많은 수병들은 상륙하여 추수감사절에서 크리스마스를 지나 신년으로 이어지는 연말 분위기가 달아오르기 시작하는 12월의 첫째 주말을 즐기고 있었다.

전함 애리조나 곁에 정박한 수리함 베스탈의 경우 수병의 절반 가량이 상륙했다.

 

하와이 육군사령관 월터 쇼트 중장은 하와이 군관구의 정보참모인 켄달 필더 중령, 참모장 타이지 필립스 대령 및 제24사단장 듀란드 윌슨 소장과 함께 스코필드 병영 장교 클럽에서 열린 연례 자선 디너-댄스 파티에 참석했다.

파티가 끝나고 오후 10시 30분에 집에 돌아온 쇼트 중장은 11시쯤 잠자리에 들었다.

다음날 아침에는 태평양함대 사령관 킴멜 대장과의 골프 약속이 잡혀 있었다.

 

하와이 육군항공대 사령관 프레드릭 마틴 소장과 참모장 제임스 몰리슨 중령도 히컴 비행장 장교 클럽에서 열린 파티에 참석했다.

오후 10시 30분에 멀리 샌프란시스코로부터 몰리슨 중령에게 전갈이 왔다.

필리핀으로 향하는 B-17 폭격기 12대가 이륙했으며 하와이 시간으로 다음날 오전 8시경 히컴 비행장에 도착하리라는 내용이었다.

몰리슨 중령은 당직 장교를 찾아 내용을 전달해 주고 자신도 다음날 아침에 관제탑에서 폭격기를 맞이하기 위하여 파티장을 빠져나와 집으로 가서 잤다.

 

태평양함대 사령관 허즈번드 킴멜 대장은 전투부대 사령관 윌리엄 파이 중장, 전투함대 구축함 사령관 마일로 드레멜 소장과 함께 리어리 제독 부부의 초청을 받아 할레쿨라니 호텔에서 저녁을 먹었다.

킴멜 제독은 편안한 마음으로 즐겁게 식사를 하고 와인을 마시며 담소를 나누다가 오후 9시 30분에 집으로 돌아와 10시에 잠자리에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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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개전 결정

 

진주만 공격부대가 동진하는 동안 제1항공함대 사령장관 나구모 주이치 중장은 미국잠수함의 출현에 가장 신경을 썼다.

따라서 많은 수병들이 잠수함 감시에 투입되었다.

하와이로 가는 항로의 절반 동안은 전 병력의 1/4이 항상 전투배치 상태에 있었으며 나머지 절반에서는 1/2이 전투배치 상태에 있었다.

항해 동안 조종사들은 진주만의 모양과 적 함정의 모양을 숙지했으며 특히 뇌격기 조종사들은 진입 및 이탈 경로를 숙지했다.

 

항공참모 겐다 미노루는 일개 중좌에 지나지 않는 자신의 어깨에 드리워진 엄청난 책임에 짓눌려 신경질적인 반응을 보였다.

그는 아카기의 수평폭격대장인 후루카와 이즈미 대위에게 전함의 주포탑을 직격하여 그 아래에 있는 탄약고를 유폭시키라고 말했다.

후루카와 대위는 3,000m 높이에서 떨어뜨리는 수평폭격으로는 그토록 정밀한 폭격이 불가능하다고 반박하자 겐다 중좌는 정신력으로 극복가능한 일이라고 말했다.

그러자 후루카와 대위는 말도 안 되는 일을 강요하지 말라면서 화를 내었다.

 

(제1항공함대의 항공참모 겐다 미노루 중좌. 자세한 내용은 여기로)

 

일본해군 내에서 최고의 폭격수로 불리던 소류의 가나이 노보루 비조는 매일 오전과 오후 한 차례씩 비행복을  갖추어 입고 격납갑판에 주기한 97식 함상공격기의 폭격수석에 올라 눈 아래 펼쳐진 진주만의 광경을 상상하면서 폭격 연습을 했다.

 

진주만 공격부대는 선두에 구축함 4척을 10km 간격으로 나란히 세우고 그 뒤를 항공모함 6척이 2줄로 따랐다.

그 뒤에는 급유함들이 따라갔으며 마지막으로 전함과 중순양함들이 역시 2열로 뒤를 따랐다.

경순양함 아부쿠마와  구축함 5척은 좌우 경계를 맡았다.

잠수함 3척은 원래 함대의 앞쪽을 정찰하도록 되어 있었으나 나구모 중장은 연락이 끊어질까 우려했다.

결국 잠수함들은 하와이를 향해 가는 동안 아카기의 오른쪽 1km 거리에서 항진했다.

밤이나 안개가 끼면 함정 사이의 거리를 줄였다.

 

나구모 중장은 하와이로 가는 도중 안절부절했다.

그는 해상급유와 진형 유지를 걱정했으며 급유함의 검은 연기나 적의 잠수함에 의하여 발견되거나 또는 적이 미리 알고 기다리는 사태를 두려워했다.

하지만 가장 큰 걱정은 막판에 외교교섭이 타결되어 도쿄로부터 공격중지명령이 떨어졌는데 그 명령을 받지 못하고 진주만을 공격하여 나라를 멸망의 구렁텅이로 빠뜨리는 경우였다.

 

제1항공함대의 참모장 구사카 류노스케 소장은 나구모 중장의 걱정을 덜어주려고 애썼으나 효과가 없었다.

구사카 참모장이 작전의 위험이 크긴 하지만 논리적으로 보아 걱정할 이유는 없다는 식으로 말하면 나구모 중장은 고개를 저으며 이렇게 말했다.

 

"자넨 지나치게 낙관적이야."

 

(제1항공함대 사령장관 나구모 주이치 중장. 자세한 내용은 여기로)

 

진주만 공격부대의 조종사들은 낮에는 반복적인 학습과 토론으로 힘든 시간을 보냈지만 밤에는 일반 수병들과 달리 자유시간을 만끽했다.

이들은 저녁 식사 이후에는 장기를 두거나 카드를 치거나 거의 매일 제공되는 술과 안주를 즐기면서 이야기를 나누었다.

 

나구모 중장의 걱정과 달리 태평양 함대의 전투정보실은 일본의 기만작전에 휘둘리고 있었다.

11월 30일 보고에서 전투정보실은 항공모함 아카기와 급유함 간의 통신을 포착했다고 적고 있는데 당시 아카기와 급유함은 전혀 전파를 발신하지 않았으므로 이는 옛날 통신을 다시 틀고 있던 일본의 기만작전에 속고 있다는 증거였다.

 

겐다 중좌는 나구모 중장과 구사카 소장이 히도카프를 떠나기 전에 이미 2번의 공습으로 진주만 기습을 마무리짓기로 결정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는 나구모 중장에게 사고를 유연하게 해야하며 필요에 따라 3번 이상의 공습을 가할 가능성을 염두에 두라고 주장했으나 반응이 시원찮았다.

 

겐다 중좌는 결정적일 때 내놓기 위하여 계획 하나를 작성했다.

진주만 기습 이후 북쪽으로 물러가는 것이 아니라 하와이 남서쪽으로 내려와서 마셜 제도 쪽으로 철수한다는 것이었다.

이럴 경우 진주만 공격부대는 월요일, 화요일은 물론 어쩌면 수요일까지도 진주만에 반복적인 공습을 가할 수 있었으며 만일 미함대가 추격해 올 경우 마셜 제도의 지상발진 항공기들로부터 지원을 받기 쉬웠다.

 

군령부에서는 매일 오전 11시에 진주만 공격부대의 항로에 대한 일기예보를 포함하여 최신 정보들을 전송했다.

전송은 2시간 간격으로 오전 11시, 오후 1시, 오후 3시 하는 식으로 홀수 시각마다 반복되었으며 다른 정보로 바뀔 때까지 지속되었다.

일본항공모함들은 특유의 낮은 아일랜드 때문에 수신 기능에 문제가 있었으나 진주만 공격부대에는 위험하게 보일만큼 높은 함교를 가진 덕분에 수신기능이 뛰어난 전함 히에이와 기리시마가 있어서 수신에 문제는 없었다.

군령부는 또한 일본라디오의 일기예보에도 미리 약속된 문구를 집어넣는 방법으로 진주만 공격부대에 정보를 제공했다.

진주만 공격부대는 엄격한 무선침묵을 실시하고 있었다.

 

도쿄에서는 어전회의를 앞두고 1941년 11월 28일 오후 4시에 연락회의가 열렸다. 

여기서 도고 시게노리 외상은 나가노 오사미 군령부 총장에게 개전  날짜를 알아야 대미 외교를 할 수 있다고 말했다.

나가노 총장은 망설이면서 12월 8일이 예정일이라고 말했다.

도고 외상은 최소한 노무라 주미대사에게는 개전 날짜를 알려야한다고 주장했으나 군령부는 반대했다.

군령부는 노무라 대사가 개전 날짜를 몰라야 마지막 순간까지 미국을 상대로 진지하게 외교적 문제들을 다룸으로써 미국의 주의를 외교적 문제에 붙잡아 두어 비밀을 지키는데 도움을 줄 수 있다고 말했다.

 

진주만 공격부대가 히도카프만을 떠난 이후 날씨는 예상 외로 좋아서 매일 구축함에 대한 급유를 실시할 수 있었다.

하지만 함대 전반에 걸쳐 연료 절약이 엄격하게 실시되었다.

연료 절약을 위하여 난방을 하지 않아 장병들은 함내에서도 모두 두꺼운 옷을 입고 생활했으며 전기 사용도 최소한으로 억제했다.

더운 물도 나오지 않아  모두 찬물로 샤워했으나 연료 적재량의 여유가 있던 쇼가쿠와 즈이가쿠만은 예외적으로 더운물 샤워를 즐길 수 있었다.

 

1941년 12월 1일 오후 2시에 도쿄의 황궁 동실에서는 1941년의 마지막 어전회의가 열려 미국과 영국에 대한 개전을 결의했다.

남방작전에 참가하는 함대들은 이미 움직이고 있었다.

 

괌 침공부대는 11월 29일에 세토 내해를 떠나 오가사와라 제도에 정박했다.

이들은 12월 4일에 오가사와라 제도를 떠나 괌으로 향했다.

 

곤도 노부다케 중장이 지휘하는 제2함대 또한 11월 29일에 세토 내해를 떠나 12월 2일에 타이완의 펑후 제도에 도착했다.

제2함대는 필리핀, 말레이 및 네덜란드령 동인도제도의 연합군 해군 세력을 제거하고 상륙을 지원할 임무를 띄고 있었다.

 

말레이 반도 침공을 지원할 오자와 지사부로 중장의 남파함대는 11월 20일부터 소규모 단위로 출항을 시작했다.

 

남방 작전에 참가한 함대 중에서 가장 규모가 큰 것은 제3함대 사령장관 다카하시 이보우 중장이 지휘하는 필리핀 침공부대로 수송선을 포함하여 100 척에 달했다.

필리핀 침공부대는 11월 22일에 세토 내해를 떠나 25일에 펑후 제도에 도착한 후 12월 8일의 진주만 기습을 기다렸다.

 

다카기 다케오 소장이 지휘하는 남부필리핀지원부대는 11월 24일에 내해를 출발하여 팔라우에 도착했다.

남부필리핀지원부대는 팔라우를 12월 6일에 출발하여 다바오를 침공했다.

 

미군은 이러한 일본해군의 움직임을 주시하고 있었으며 미군이 이들에게 주의를 집중하는 동안 진주만 공격부대는 들키지 않고 하와이까지 갈 수 있었다.

 

11월 28일에는 구축함 우시오와 사자나미, 그리고 급유함 시리야로 이루어진 고니시 가나모 대좌의 미드웨이 파쇄대가 다테야마 항을 떠났다.

미드웨이 파쇄대는 미드웨이를 포격함으로써 비행장에 타격을 입혀 진주만 공격부대의 퇴로를 확보하고 미군의 관심을 진주만 공격부대로부터 떼어놓는 임무를 맡았다.

급유함 시리야의 함장 도고 미노루 대좌는 쓰시마 해전 당시 일본함대를 지휘했던 도고 헤이아치로 제독의 아들이었다.

 

고가 미네이치 중장의 지나방면함대는 중국 작전에 전념하고 있었다.

이들은 육군의 작전을 지원하고 진주만 기습 이후에는 홍콩 점령을 지원했다.

 

호소가야 보시로 중장의 제5함대는 오가사와라 제도를 포함하여 일본의 동쪽 바다를 지켰다.

 

연합함대 사령장관 야마모토 이소로쿠 대장이 직접 지휘하는 연합함대 주력은 전함  6척, 경항공모함 2척, 경순양함 2척 및 구축함 13척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이 강력한 세력은 세토 내해에 머무르면서 일본 본토와 남방 작전의 측면을 방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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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전쟁경고

 

1941년 11월 26일에 미국의 코델 헐 국무장관은 노무라 기치사부로 주미일본대사와 구루스 사부로 특사에게 강경한 내용의 헐 노트를 수교했다.

진주만 공격부대는 전날 이미 히도카프 만을 떠나 하와이로 다가오고 있었다.

 

11월 27일 오전에 진주만에 있는 태평양함대 사령부에서는 허즈번드 킴멜 대장이 미드웨이와 웨이크의 방어강화를 위해 육군과 회의를 가졌다.

해군 측 참석자는 항모기동부대 사령관인 윌리엄 헐지 중장과 윌슨 브라운 중장, 제14해군관구 사령관 클로드 블로크 소장, 해군항공대 사령관 패트릭 벨린저 소장 및 태평양 함대의 전쟁계획장교(war plan officer)인 찰스 맥모리스 대령이었다.

육군 측에서는 하와이 육군사령관 월터 쇼트 중장, 하와이 육군항공대 사령관 프레드릭 마틴 소장, 그리고 마틴 소장의 참모장인 제임스 몰리슨 중령이 참석했다.

 

(허즈번드 킴멜 제독. 자세한 내용은 여기로)

 

킴멜 대장이 미드웨이와 웨이크에 P-40 전투기를 25대씩 모두 50대를 파견하자고 제안하자 몰리슨 중령은 오아후 섬의 방어를 이유로 반대했다.

몰리슨 중령은 일본의 항모기동부대가 진주만을 공습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고 말했다.

그러자 킴멜 대장은 어처구니가 없다는 반응을 보였다.

 

"능력이야 있지, 하지만 가능성은?"

("Capability, yes, but possibility?")

 

하더니 킴멜 대장은 불쑥 맥모리스 대령에게 물어보았다.

 

"자네는 일본의 항공공격 가능성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나?"

("What do you think about the prospects of a Japanese air attack?")

 

"없습니다, 절대로 없습니다."

(None, absolutely none.)

 

맥모리스 대령이 대답했다.

 

결국 회의에서는 P-40 전투기 대신 미드웨이에는 해병대의 버팔로 전투기 12대, 웨이크에는 역시 해병대의 와일드캣 12대를 보내기로 결정이 났다.

하지만 이건 쇼트 중장이 미드웨이와 웨이크에 파견될 P-40 전투기에 대한 지휘권을 유지하겠다고 고집을 부려서 해군 측이 포기한 것이지 결코 진주만에 대한 일본군의 항공공격을 의식한 것이 아니었다. 

실제로 회의 참석자 중에서 몰리슨 중령을 제외하고는 아무도 진주만에 대한 항공공격의 위험성을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점심 시간이 되어 회의는 파하였지만 킴멜 대장의 사관학교 동기생이자 친구인 헐지 중장은 오후 6시까지 남아 이런저런 이야기들을 나누었다.

이때 킴멜 대장이 항모기동부대에 구형전함을 포함시키면 어떠냐고 물어보자 헐지 중장은 거절했다.

이로써 미국의 항모기동부대 지휘관들은 진주만 기습 이전부터 항모기동부대에 속력이 느린 구형전함을 포함시키지 않으려 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실제로 진주만 기습 이후 미함대총사령관 어니스트 킹 대장은 대서양함대의 구형전함들을 급히 미본토 서해안으로 불러모았다.

그래놓고 신임 태평양함대 사령관인 체스터 니미츠 대장에게 미본토 서해안에서 대기 중이던 구형전함들을 항모기동부대에 포함시키라고 권고한 적이 있으나 니미츠 제독은 거절했다. 

 

11월 27일 오후 2시 30분에 쇼트 중장이 회의를 마치고 사령부로 돌아오니 참모장 타이지 필립스 대령이 마셜 장군의 서명이 들어간 전쟁성 전문 제472호(War Department Message No.472)를 내밀었다.

요지는 다음과 같다.

 

1. 일본과의 외교가 성공할 가능성은 거의 없으며 언제든지 적대행위가 발생할 수 있다.

2. 적대행위는 반드시 일본에 의하여 시작되어야 한다.

3. 방어에 필요하다고 생각하면 정찰을 하거나 기타 조치를 취해야 하지만 지역 주민들을 놀라게 하거나 방어를 강화하겠다는 의도를 들키지 않아야 한다.

4. 이 전문에 대해 아는 장교의 수를 최소한으로 하라.

 

전문을 읽어본 쇼트 중장은 전쟁성이 무슨 일이 있어도 전쟁을 피해야 한다고 생각하며 하와이에서 일본을 자극할 수 있는 일이 터지는 것을 두려워한다는 느낌을 받았다.

쇼트 중장은 방어 강화 이야기는 필리핀에 하는 말이며 주민들에 대한 이야기는 하와이를 염두에 두고 하는 말이라고 생각했다.

실제로 주민들에 대한 내용은 하와이에 보낸 전문에만 들어 있었으며 필리핀이나 카리브 해에 보낸 전문에는 빠져 있었다.

쇼트 중장의 경험상 공습의 위험이 있다면 전쟁성이 전문에서 언급할 것이라고 보았으며 오전 회의에서 맥모리스 대령이 보여준 확신은 쇼트 중장에게도 영향을 끼쳐 공습 가능성을 낮게 보았다.

 

그로서는 공습을 막기 위하여 해군의 임무인 장거리 초계를 독자적으로 실시할 자원도 없었다.

가용한 B-17 폭격기는 6대 뿐이었는데 이것으로는 승무원 훈련에도 모자랐으며 장거리 초계는 어림없는 일이었다.

 

또한 공습에 대비하려면 명령에 대해 아는 장교가 늘어날 수 밖에 없었다.

전투기 조종사들을 비상대기 상태로 두고 더 자주 공중에 띄우려면 왜 그래야하는지 설명해야만 했다.

 

쇼트 중장의 주의는 자연히 파괴활동을 막는데 집중되었고  결국 그는 파괴활동으로부터 전투기들을 지키기 위하여 분산배치하지 말고 경비하기 쉽도록 활주로에 한데 모아놓으라는 치명적인 명령을 내렸다.

쇼트 중장은 설사 공습을 당해도 30분 전에만 경고를 받으면 전투기들을 다시 분산시킬 수 있으니 문제없다고 생각했으나 일본군은 30분의 여유를 허용하지 않았다.

 

쇼트 중장의 조치 중 의미가 있는 것은 레이더의 가동시간을 늘린 것이었다.

레이더 훈련은 아침 7시 - 11시, 정오 - 오후 4시까지 실시했으며 토요일에는 오후  훈련이 없었고 일요일에는 쉬었다.

쇼트 중장은 오전 훈련 시작을 새벽 4시로 당겼으며 일요일에도 오전 4시 - 7시까지 훈련하도록 명령했다.

일요일 새벽 훈련을 하던 오파나 스테이션의 레이더가 진주만 공습 당일 일본기들을 발견했다.

 

문제는 하와이의 미육군이 레이더를 중시하지 않았다는 점이었다.

진주만  기습 이후 쇼트 중장은 자신이 레이더를 신뢰하지 않았으며 단지 앞날을 위하여 훈련에 중점을 두었다고 말했다.

실제로 진주만 기습 당시에는 레이더에서 요격사령부를 거쳐 전투기와 대공포를 통제하는 보고 및 명령체계도 존재하지 않았다.

 

같은 날인 27일에 태평양함대 사령관 킴멜 대장도 해군성으로부터 쇼트 중장이 받은 것과 비슷한 전문을 받았다.

해럴드 스타크 해군참모총장의 서명이 들어간 이 전문은

 

"이것은 전쟁경고로 생각하라."

("This dispatch is to be considered a war warning.")

 

는 문장으로 시작하여 킴멜 대장을 놀라게 했으나 사실 내용은 이틀 전인 24일에 받은 내용과 별다른 차이가 없었다.

킴멜 대장이 생각하기로 전쟁경고란 일본이 어딘가를 공격할 수 있다는 소리였고 그건 지난 몇 개월간 계속 들어온 소리였으며 이틀 전에도 비슷한 전문을 받았다.

이번에도 일본군이 필리핀, 타이, 크라반도, 북보르네오에 상륙할 가능성이 있다고 언급했을 뿐 이틀 전의 전문과 마찬가지로 하와이는 공격대상에서 빠져 있었다.

해군성의 전쟁계획국장으로 전문에 전쟁경고란 용어를 넣은 장본인인 리치먼드 켈리 터너 소장은 진주만 기습 이후 킴멜 대장이 전쟁경고란 용어를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는 사실에 분통을 터뜨렸다.

 

킴멜 제독으로서는 실제로 전문을 받고 장거리 초계를 강화하려 해도 어려움이 많았다.

태평양 함대가 보유한 카탈리나 정찰비행정은 81대로 적은 수는 아니었으나 실상은 달랐다.

81대 중 27대는 구형의 PBY-3이고 54대는 신형 PBY-5 였는데 신형  카탈리나들은 늦게 도착했다.

즉 18대는 10월 28일, 12대는 11월 8일, 그리고 24대는 11월 23일에야 도착하여 승무원들이 시험비행 중이었다.

그나마 구형 카탈리나 중 12대는 미드웨이에 파견되어 있었으며 제대로 운용가능한 카탈리나들은 함대 훈련에 따라나가 정찰해야 했다.

 

오늘날의 상식과는 다르게 당시 태평양함대가 중시했던 것은 항구 내에 정박한 함대의 안전이 아니라 전쟁이 벌어지면 얼마나 신속하게 전투에 투입되어 제대로 싸우느냐였다.

따라서 당시 태평양함대는 훈련을 최우선으로 했으며 항구에 정박한 함대의 안전을 위한 장거리 초계는 우선 순위가 떨어졌다.

결국 킴멜 대장은 전문을 받고 장거리 초계를 실시하긴 했으나 그때그때 형편이 되는대로 가끔씩 실시하는 정도였다.

장거리 초계보다는 신형 카탈리나 승무원의 훈련에 우선권을 두었던 것이다.

 

대신 킴멜 대장은 공습보다 가능성이 크다고 생각했던 잠수함의 위협에 집중했다.

지금까지 미국 함정들은 잠수함으로 의심되는 경우에도 공격하지 않았지만 이후 하와이 근해의 모든 함정은 잠수함으로 의심되는 경우 폭뢰 공격을 가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돌이켜 보면 킴멜 대장은 27일의 전문을 받고서도 적절한 조치를 취하지 않은 책임을 면하기 어려우며 진주만 기습에 가장 큰 책임이 있다고 지목된 것도 불가피하다.

그는 장거리 초계를 성실하게 실시하지 않았으며 심지어 해군항공대 사령관인 벨린저 소장에게 전문을 보여주지도 않았다.

쇼트 중장 또한 하와이의 미국 정보기관들이 일본계가 파괴 활동을 일으키려 한다는 증거를 잡지 못했음에도 불구하고 그 생각에 매몰되어 전투기를 활주로에 집결시키는 큰 실수를 저질렀다.

 

하지만 해군성과 전쟁성 또한 잘못이 없다고 보기는 어렵다.

우선 하와이의 방어가 해군과 육군이 밀접하게 협조해야 하는 특성상 비슷한 내용을 따로 보낼 것이 아니라 해군참모총장과 육군참모총장이 공동으로 작성한 하나의 전문을 보내는 것이 옳았다.

 

전문의 내용이 명확하지 못한 점도 문제이다.

진주만 기습 후에 터너 소장은 전쟁 경고란 용어를 쓴 이유를 설명하면서 킴멜 제독이 잠수함을 일본군의 예상 접근 경로에 파견하고 항공기로 장거리 초계를 실시하며 항모기동부대를 외해로 내보내어 하와이로 접근하는 일본군을 공격하기에 적절한 위치에서 대기하도록 하고 함대 주력은 비상을 걸고 교전에 대비할 것을 기대했다고 말했다. 

그러나 해군성이 실제로 이것을 원했다면 그렇게 두리뭉실한 전문을 보낼 것이 아니라 킴멜 제독에게 레인보우5 작전의 해군 부분인 WPL46 에 규정된 H 임무를 수행하라고 명령하면 간단한 일이었다.

H 임무는 태평양 지역의 미국 영토를 침공하려는 적의 원정부대를 격퇴하는 임무이기 때문에 해군성이 하와이에 대하여 H 임무를 수행하라는 명령을 내렸다면 킴멜 대장은 싫어도 터너 소장이 말한 것 같은 일을 해야만 했을 것이다.

 

해군성이 H 임무를 수행하라는 명령을 내리지 못한 이유는 간단하다.

그만한 확신을 가질 수 있는 정보가 없었기 때문이며 따라서 H 임무 명령을 내리지 못했다고 하여 해군성이 비난받을 일은 아니다.

그렇다면 해군성도 확신하지 못하여 모호한 전문을 발송할 수 밖에 없었는데 그 일을 휘하의 현지부대인 태평양함대가 실시하지 못했다고 하여 책임을 묻는 것이 과연 정당화될 수 있는지 하는 의문이 남는다.

 

쇼트 중장도 마찬가지로 전쟁성의 전문을 받은 다음날인 11월 28일에 육군항공대는 쇼트 중장에게 일본계에 의한 파괴활동을 제1의 위협으로 보고 대비할 것을 요청하는 전문을 2개나 보냈다.

물론 이때는 전투기들을 한곳에 모아 경비한다는 결정을 내린 뒤였지만 이 전문들이 그러한 결정에 정당성을 부여한 것은 틀림없다.

만일 쇼트 중장이 반복적인 경고를 받고도 적극적으로 대응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가 파괴활동에 의하여 항공기의 일부라도 파괴되었다면 엄청난 비난과 처벌을 피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킴멜 제독과 쇼트 중장은 27일의 전문을 받고 자신들이 조치한 사항을 보고했지만 해군 및 육군참모총장은 보고를 받고도 별다른 언급을 하거나 후속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

육군참모총장 마셜 장군은 27일의 전문에 대한 맥아더 대장과 쇼트 중장의 조치 사항을 거의 동시에 보고받았다.

당시 마셜 장군은 맥아더 장군의 보고서에는 서명을 했으나 쇼트 장군의 보고서에는 그의 서명이 없다.

마셜 장군은 진주만 기습 이후 의회에 출석하여 쇼트 중장의 보고서를 보았는지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면서 자신이 개입할 수 있는 기회였는데 그렇게 하지 못했다고 솔직하게 시인했다.

 

(미육군참모총장 조지 마셜 장군. 자세한 내용은 여기로)

 

그리하여 1941년 11월 27일에 보내진 전쟁성과 해군성의 전문은 진주만 기습을 막는데 아무런 역할을 하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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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진주만 공격부대

 

출항을 몇 시간 앞둔 1941년 11월 25일 밤에 제1항공함대 사령장관 나구모 주이치 중장은 히도카프 만에 정박한 기함 아카기의 선실에 누워 걱정에 휩싸여 있었다.

 

'만일 진주만에 적 함대가 없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적이 우리의 계획을 미리 알고 매복해 있으면?

오늘 히도카프 만처럼 날씨가 나쁘면 해상급유가 불가능한데 항해 내내 이런 날씨가 이어진다면?

안개가 끼면 진주만을 공격하고 돌아온  함재기들의 착함이 어려울 것이다.

반면 날씨가 맑다면 진주만 공격부대는 새하얀 설원의 검은 소처럼 눈에 띌 것이다.

기습에 성공해도 살아남은 B-17 이 대규모로 역습해 온다면 어떻게 될 것인가?'

 

이리저리 뒤척이던 나구모 제독은 잠들기를 포기하고 26일 0시 경에 일어나 진주만의 상황을 브리핑했던 스즈키 스구루 소좌를 불렀다.

스즈키 소좌는 잠옷으로 갈아입었다가 갑작스런 호출을 받자 복장을 갖추고 나구모 중장의 선실로 갔다.

 

나구모 중장은 스즈키 소좌가 들어오자 질문을 퍼부었다.

스즈키 소좌는 나구모 중장이 듣고 싶어하는 답을 말해줄 수는 없었지만 그의 걱정을 덜어주려고 노력했다.

 

"오랫동안 관찰한 결과 미함대는 주말에는 항상 항구에 들어오며 그걸 갑자기 바꿀 이유는 없어 보입니다."

"현재까지 미국은 우리의 의도를 모르고 있는 것이 거의 확실하며 모든 상황이 우리에게 압도적으로 유리합니다."

 

는 식이었다.

 

어차피 나구모 중장도 스즈키 소좌가 자신이 원하는 대답을 해 줄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나구모 중장은 술과 간단한 안주를 들여오게 해서 스즈키 소좌에게 권했다.

스즈키 소좌는 중장과 단 둘이 앉아 술을 마시는 흔치 않은 경험을 한 후 26일 새벽 2시에 자기 선실로 돌아왔다.

침대에 누운 스즈키 소좌는 대함대를 지휘하는 사령장관이자 중장인 사람도 일개 소좌처럼 큰 작전을 앞두고 걱정 때문에 잠을 설친다는 사실을 알게 되자 묘한 기분이 들었다.

 

다음날인 1941년 11월 26일 오전 6시에 진주만 기습부대는 히도카프 만을 떠났다.

(일본 시간은 미동부보다 14시간 빠르며, 하와이보다는 19시간 30분 빠르다.따라서 진주만 공격부대가 히도카프 만을 떠난 26일 오전 6시는 워싱턴 시간으로는 25일 오후 4시이며 하와이 시간으로는 25일 오전 10시 30분이다. 앞으로 별도의 언급이 없는 한 시간은 현지 시간을 따르며 진주만 공격부대는 날짜 변경선을 넘기 전에는 일본 시간, 넘은 이후에는 하와이 시간을  따른다.)

 

스즈키 소좌는 히도카프 만에 정박한 포함 구나시리에서 진주만 공격부대를 배웅했다.

장병의 사기는 높았으며 젊은 장교들은 자신들의 앞에 무엇이 기다리고 있든지 개의치 않았다.

 

총 30척으로 이루어진 진주만 공격부대의 구성은 다음과 같다.

 

1. 공습부대 - 제 1 항공함대 (사령장관 : 나구모 주이치 중장, 참모장 : 구사카 류노스케 소장)

제 1 항공전대 (나구모 중장) - 항공모함 아카기, 카가

제 2 항공전대 (야마구치 다몬 소장) - 항공모함 소류, 히류

제 5 항공전대 (하라 주이치 소장) - 항공모함 쇼가쿠, 즈이가쿠

 

2. 지원대 - 제 3 전대 (미카와 군이치 중장) - 전함 히에이, 기리시마

제 8 전대 (아베 히로아키 소장) - 중순양함 도네, 치쿠마

 

3. 경계대 - 제 1 수뢰전대 (오모리 센타로 소장) - 경순양함 아부쿠마

제 17 구축대 (스기우라 가주 대좌) - 구축함 다니카제, 우라카제, 요코카제, 이소카제

제 18 구축대 (미야자카 대좌) - 구축함 시라누이, 카스미, 아키쿠모, 아라레, 카게로

 

4. 초계대 - 제 2 잠수대 (이마이즈미 키지로 대좌) - 잠수함 I-19, I-21, I-23

 

5. 보급부대 - 제1보급대(오토 마사나오 대좌) - 교쿠토마루, 겐요마루, 고쿠요마루, 신고쿠마루

 제2보급대(니미 가즈타카 대좌)- 도요마루, 니혼마루, 도에이마루

 

(http://blog.naver.com/mirejet/110083057166, <At Dawn We Slept : The Untold Story of Pearl Harbor> Gordon W. Prange, McGraw Hill, 1981, P.394, <제2차세계대전해전사> 이정수. 남영문화사, 1981년, P.119)

 

함정들의 제원은 다음과 같다.

 

 함종

함명 

표준배수량 

최고속력 

항속거리 

연료량

 항공모함

아카기 

 41,300톤

 31노트

 18노트로 14,800km

 6,000톤

 카가

 42,500톤

 28노트

 18노트로 18,500km

 8,200톤

 쇼가쿠,즈이가쿠

 29,800톤

 34노트

 18노트로 18,000km

 5,000톤

 소류,히류

 20,250톤

 34노트

 18노트로 14,100km

 3,500톤

 전함

 히에이,기리시마

 37,000톤

 30노트

 18노트로 18,100km

 6,300톤

 중순양함

 도네,치쿠마

 11,000톤

 36노트

 18노트로 14,800km

 2,600톤

 경순양함

 아부쿠마

 5,500톤

 35노트

 14노트로 9,300km

 1,600톤

 구축함

 카게로 급

 2,000톤

 36노트

 18노트로 11,100km

 600톤

 카스미, 아라레

 2,000톤

 35노트

 18노트로 9,300km

 600톤

 잠수함

 I-19, 21,23

 2,200톤

 23노트

 16노트로 25,900km

 800톤

 급유함

 겐요마루급

 20,000톤

 18노트

 16노트로 16,700km

 2,000톤

 도호마루급

 8,000톤

 16노트

 14노트로 13.000km

 450톤

(<At Dawn We Slept : The Untold Story of Pearl Harbor> Gordon W. Prange, McGraw Hill, 1981, P.416, 일부 수정 및 편집)

 

제1항공전대사령관을 겸하고 있던 제1항공함대 사령장관 나구모 주이치 중장은 항공전에 대해서는 책으로만 배웠으므로 항공참모 겐다 중좌와 아카기의 항공대장 후치다 미츠오 중좌에게 의존했다.

제2항공전대 사령관 야마구치 다몬 소장은 항공전에 익숙했으나 그도 실전경험이 없기는 나구모 중장과 마찬가지였다.

제5항공전대 사령관 하라 주이치 소장 또한 1941년 9월에 항공전대 사령관이 되기 전까지는 항공전에 문외한이었다.

 

제1항공전대를 이루고 있는 아카기와 카가는 각각 전투기 18대, 함상폭격기 18대, 함상공격기 27대, 합계 63대를 운용했다.

제2항공전대를 이루고 있는 소류와 히류는 각각 전투기 18대, 함상폭격기 18대, 함상공격기 18대, 합계 54대를 운용했다.

제5항공전대를 이루고 있는 쇼가쿠와 즈이가쿠는 각각 전투기 18대, 함상폭격기 27대, 함상공격기 27대, 합계 72대를 운용했다.

 

(일본항공모함 카가. 자세한 내용은 여기로)

 

일본 군령부는 태평양함대의 미국항공모함을 최대 4척으로 추정하고 있었으나 실제로는 3척이었으며 그나마 새러토가는 오버홀을 위하여 미본토 서해안의 푸젯사운드 조선소에 들어가 있었다.

따라서 중부 태평양에서 활동 중이던 미국항공모함은 렉싱턴과 엔터프라이즈 2척이었다.

CV-2 렉싱턴은 표준배수량 34,000톤에 최고 속력 35노트로 약 80대의 함재기를 운용했으며, CV-6 엔터프라이즈는 표준배수량 20,000톤에 최고 속력 34노트로 약 85대의 함재기를 운용했다.

 

전함 히에이와 기리시마는 속력이 30노트에 달해 21노트에 불과한 태평양함대의 전함들보다 빨랐으며, 무장도 14인치 주포 8문으로 약한 편은 아니었다.

그러나 태평양함대는 16인치 주포 8문을 가진 메릴랜드와 웨스트버지니아를 포함한 8척의 전함을 가지고 있어서 전함 전력은 진주만 공격부대를 압도했다.

 

(일본전함 히에이. 자세한 내용은 여기로

 

중순양함  도네와 치쿠마는 8인치 주포 8문을 가지고 있어서 9문을 가진 미국 중순양함 샌프란시스코보다 1문이 적었으나 대신 강력한 산소어뢰 발사관 6문을 가지고 있었다.

게다가 표준배수량 10,000 톤에 33노트인 샌프란시스코보다 더 크고 더 빨랐으므로 일본해군은 자신들의 중순양함이 미군 중순양함을 압도한다고 생각했다.

 

(일본중순양함 도네. 자세한 내용은 여기로)

 

경순양함 아부쿠마는 5,500톤에 140mm 주포 5문을 보유하고 있어서 7,000톤에 6인치 주포 10문을 가진 미국 경순양함 롤리에게 주포 화력은 밀렸다.

그러나 아부쿠마는 어뢰발사관 2문과 산소어뢰 8발을 보유하고 있어서 결코 얕잡아 볼 수 없는 전력을 가지고 있었다.

 

(일본경순양함 아부쿠마. http://en.wikipedia.org/wiki/Japanese_cruiser_Abukuma, 자세한 내용은 여기로)

 

진주만 공습부대에 배치된 9척의 일본구축함 중 7척은 최신형인 가게로 급이었으며 2척은 아사시오 급이었는데 모두 5인치 주포 6문과 산소어뢰 및 폭뢰를 갖추고 있었다.

일본구축함들은 전반적으로 미국구축함보다 강력했으나 태평양함대는 진주만 공격부대의 3배가 넘는 29척의 구축함을 보유하고 있었다.

 

(가게로급 구축함 시라누이. 자세한 내용은 여기로)

 

I-15 급 잠수함인 I-19, I-21, I-23함은 미국잠수함보다 훨씬 컸으며 수상정찰기 1대를 싣고 다녀  정찰능력이 뛰어났다.

수상정찰기는 170km/hr 의 속력으로 3시간 동안 비행할 수 있었다.

 

(I-15 급 잠수함. 자세한 내용은 여기로)

 

제1보급대의 급유함들은 최고 18노트를 낼 수 있었고 제2보급대는 최대 16노트를 낼 수 있었다.

진주만 공격부대는 하와이를 왕복하면서 대부분 12 - 14노트의 속력으로 항해했다.

 

히도카프 만을 떠난 이후로 나구모 중장은 일본해군의 일개 중장이 아니었다.

그가 진주만 기습을 성공으로 이끌면 국가의 영웅으로 승리의 상징이 될 것이었다.

설사 그가 진주만 기습에서 전사한다 해도 길이 추앙받을 것이며 에타지마 병학교에서는 이후 수십년간 그의 전술을 가르치고 연구할 것이었다.

하지만 만약 실패하는 날이면 천길의 땅을 파도 그 수치를 파묻지 못하고 태평양의 바닷물을 다 쏟아부어도 씻어내지 못할 것이었다.

 

나구모 중장의 어깨에 걸린 책임은 막중했다.

그가 이끌고 있는 진주만 기습부대는 일본해군의 전통과 오랜 시간 미해군에 대항하기 위하여 확립해 온 계획들을 모두 쓰레기통에 처넣어 버리고 함대항공력의 집중적인 운용을 통하여 적의 함대 주력을 격파한다는 새로운 방식의 전투를 치르려 하고 있었다.

이제 나구모 중장은 누구도 가보지 못한 미지의 바다로 나아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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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공습 계획

 

1941년 11월 23일 아침에 제1항공함대 사령장관 나구모 주이치 중장은 히도카프 만에 정박 중인 기함 아카기 함상으로 진주만 공격부대의 지휘관, 참모 및 함장들을 모두 불러 모은 후 기동부대 명령 제1호를 발령했다.

이로써 진주만 공격부대의 장병 전원이 진주만 기습에 대해 알게 되었다.

 

(히도카프 만에 정박 중인 제1항공함대의 기함 아카기. http://commons.wikimedia.org/wiki/File:Akagi_Hitokappu_Bay.jpg)

 

이 자리에서 제1항공함대의 항공참모 겐다 미노루 중좌는 진주만 기습의 개요에 대하여 설명했다.

목표는 진주만에 정박 중인 항공모함 전부와 전함 4척 이상을 격침하고 오아후의 항공기들을 최대한 많이 파괴하는 것이었다.

 

제1파는 오아후 북쪽 370km 거리에서 발진하며 제2파는 320km 거리에서 출격할 것이었다.

후치다 미츠오 중좌가 지휘하는 제1파는 뇌격기, 수평폭격기, 급강하폭격기 및 전투기가 모두 참가하며 적의 항공모함과 전함을 공격하는 것이 주요 임무였다.

시마자키 시게카즈 소좌가 지휘하는 제2파는 뇌격기는 빼고 수평폭격기, 급강하폭격기 및 전투기로 이루어져 제1파가 공격한 함정들을 추가로 공격하여 마무리짓고 적의 항공력을 말살하여 반격을 불가능하게 만드는 임무를 맡았다.

공격을 마친 항공기들은 오아후 북서쪽 30km 공역에 집결하여 귀함할 것이었다.

 

하와이를 향해 가는 도중 발견되지 않는 것이 중요하므로 제1항공함대는 진주만 기습부대가 이함하기 전에는 함재기를 띄우지 않을 것이었다.

다만 진주만 기습 전날까지 비상사태에 대비하여 해가 뜬 직후부터 해질녘까지 각 항공모함의 비행갑판에 전투기 6대와 급강하폭격기 3대를 즉시 출격이 가능한 상태로 유지할 것이었다. 

 

적이 공격일 이전에 진주만 공격부대를 발견하면 함대는 돌아갈 것이었다.

공격 당일 발견당하면 싸울 것이었다.

 

진주만의 상황에 대한 최종정보는 오아후의 일본영사관과 하와이 해역에 미리 전개한 잠수함이 알려주기로 되어 있었다.

이 최종 통고를 받지 못할 경우에 대비하여 제1차 공격대의 출격 30분 전에 중순양함 도네와 치쿠마에서 정찰기 1대씩을 사출할 것이었다.

정찰기 1대는 라하이나 정박지를, 다른 1대는 진주만을 정찰하고 무전으로 보고할 것이었다.

 

공습이 진행되는 동안 함대 방공을 위하여 각 항모에서 6대씩 총 36대의 전투기를 전투초계에 투입할 것이었다.

전투초계기들은 18대씩 2시간 간격으로 교대로 초계를 담당하며 나머지 18대는 비행갑판에 즉시 출격가능한 상태로 대기할 것이었다.

공중에 뜬 18대의 전투기 중 9대는 4,000m, 나머지 9대는 2,000m 고도를 담당할 것이었다. 

항해 중 함대는 무전신호를 일체 보내지 않으며 신호는 낮에는 깃발 신호, 밤에는 발광  신호를 사용할 것이었다.

제1파 공격대가 기습에 성공하면 후치다 중좌가 '도라-도라-도라'(호랑이-호랑이-호랑이) 라는 무전을 치기로 했다.

나구모 중장은 공격을 마친 함재기들이 귀환 도중에 엔진이 고장나는 사태 이외에는 무전을 금지했다.

그러자 조종사들이 항모의 안전을 위하여 엔진이 고장나도 무전을 치지 않기로 결의하고 나구모 중장의 승인을 받았다.

오전 회의가 끝나자 지원부대 및 경계부대의 지휘관, 참모 및 함장들은 각자 위치로 돌아갔다.

 

나구모 중장은 11월 23일 오후에 제1항공함대 수뇌부와 조종사 전원이 모인 가운데 다시 회의를 열었다.

여기서는 주로 후치다 중좌가 공습에 대한 세부 내용을 설명했다.

 

공격대가 이함할 때 쇼가쿠와 즈이가쿠의 함재기들은 함대 뒷쪽 400m 상공에, 카가와 히류의 함재기들은 함대 상공 200m 고도에, 아카기와 소류의 함재기들은 함대 앞쪽 400m 상공에 집결할 것이었다.

후치다 중좌 자신은 함대 가장 앞쪽에 15대의 수평폭격기를 이끌고 500m 고도로 집결할 것이었다.

 

진주만을 향해 날아가는 동안 수평폭격기들은 중앙 3,000m 고도, 뇌격기들은 오른쪽 2,800m 고도, 급강하폭격기들은 왼쪽 3,500m 고도로 날아갈 것이었다.

순항속도가 빠른 전투기들은 3,800m 고도로 폭격기들 상공을 왔다갔다하면서 비행할 것이었다.

제2차 공격대도 비슷한 방식으로 이함하여 비행할 것이었다.

 

오아후 북쪽에 도달하면 후치다 중좌가 권총으로 신호탄을 발사할 것이었다.

동시에 전투기들은 폭격기들을 앞지르면서 튀어나와 제공권을 장악할 것이었다.

이때 전투기들은 2개로 나뉘어 이타야 시게루 소령이 지휘하는 27대는 3,800m 고도를 유지하고 오카지마 기요구마 대위가 지휘하는 18대는 2,000m 고도로 내려올 것이었다.

그동안 수평폭격기들은 3,000m 고도를 유지하고 급강하폭격기들은 4,000m 고도로 상승하며 뇌격기들은 하강할 것이었다.

신호탄이 1발만 발사되면 뇌격기들이 가장 먼저 진입하고, 2발 발사되면 급강하폭격기, 수평폭격기, 그리고 뇌격기의 순서로 진입할 것이었다.

 

(진주만 기습 상황도. http://en.wikipedia.org/wiki/Pearl_Harbor_attack)

 

뇌격대는 2개로 나뉘어 포드 섬의 양쪽으로부터 진입할 것이었다.

무라타 시게하루 소좌가 지휘하는 아카기와 카가의 뇌격기 24대는 포드 섬의 남동쪽으로부터 진입하면서 전함들을 공격할 것이었다.

나가이 츠요시 대위가 지휘하는 소류와 히류 소속 16대는 포드 섬의 북서쪽으로부터 진입하면서 항공모함을 공격할 것이었다.

하지만 기습 당시 항공모함이 없었으므로 소류와 히류의 뇌격기들은 표적함 유타와 순양함 롤리를 공격했으며 일부는 포드 섬을 건너 전함 캘리포니아, 오클라호마 및 웨스트버지니아를 공격했다.

뇌격 대상은 중대장이 정했으나 목표의 최종 식별 및 공격은 조종사가 스스로 결정했다.

 

(진주만 기습 당시 뇌격기의 공격 경로. http://www.freeinfosociety.com/media.php?id=807)

 

후치다 미츠오 중좌가 지휘하는 아카기, 카가, 소류 및 히류의 수평폭격기 50대는 800kg 짜리 폭탄으로 2열로 정박한 전함군의 안쪽에 정박한 함정들을 공격할 것이었다.

뇌격대와 마찬가지로 폭탄 투하의 최종 결정은 개별 조종사 및 폭격수의 몫이었다.

후치다 중좌는 만일 진주만 바깥으로 도망치려는 함선을 발견하면 입구 근처에서 격침하여 진주만을 폐쇄하라고 말했다.

 

뇌격기와 수평폭격기가 함정들을 공격하는 동안 250kg 폭탄 1발을 장착한 쇼가쿠와 즈이가쿠의 급강하 폭격기 54대는 비행장을 공격할 것이었다.

다카하시 가쿠이치 소좌가 이끄는 쇼가쿠의 급강하 폭격기 27대는 포드 섬의 해군항공기지와 히컴 비행장을, 사카모토 아키라 대위가 이끄는 즈이가쿠의 급강하폭격기 27대는 휠러 비행장을 공격할 것이었다.

 

전투기들은 제공권을 장악하고 이후에는 히컴, 휠러, 에바, 카네오헤, 벨로우즈 비행장의 미군기들과 관제탑을 기총소사할 것이었다.

 

제1차 공격대에 참가할 항공기는 뇌격기 40대, 수평폭격기 50대, 급강하 폭격기 54대, 전투기  45대로 총 189대였다.

이들 중 수평폭격기 1대, 급강하폭격기 3대 및 전투기 2대가 기계적 결함으로 빠져서 실제로 공습에 참가한 항공기는 183대였다. 

 

시마자키 시게카즈 소좌가 이끄는 제2차 공격대는 제1차 공격대가 시작한 함정 공격 임무를 완수하고 비행장을 공격할 것이었다.

제2차공격대의 핵심은 에구사 다카시게 소좌가 지휘하는 아카기, 카가, 소류 및 히류의 급강하폭격기 81대였다.

겐다 중좌는 제2차 공격대가 도달할 때 쯤이면 미태평양함대의 항공모함들이 제1차 공격대의 뇌격을 받아 전복되어 있을 것으로 기대했다.

250kg 짜리 폭탄 1발을 장착한 제2차 공격대의 급강하폭격기들이 전복된 항공모함에 달려들어 함체를 걸레짝으로 만들어 버리면 미군이 감히 수리할 엄두를 내지 못할 것이었다.

그러나 공습 당일 항공모함이 없었기 때문에 제2차 공격대의 급강하폭격기들은 전함을 포함한 다양한 함정들을 공격했다.

일부 폭격기들은 해군공창을 공격했으며 마키노 사부로 소좌가 지휘하는 카가의 급강하폭격기들은 진주만 바깥으로 도망치려던 전함 네바다를 집중폭격하여 입구 근처에서 침몰시키려 했으나 실패했다.

 

시마자키 시게카즈 소좌가 이끄는 쇼가쿠와 즈이가쿠의 수평폭격기 54대는 비행장을 폭격할 것이었다.

54대의 수평폭격기 중 36대는 250kg 짜리 폭탄 1발과 60kg 짜리 폭탄 6발로 무장했으며 나머지 18대는 250kg 짜리 폭탄 2발로 무장했다.

이치하라 다츠오 대위가 지휘하는 쇼가쿠의 수평폭격기 27대 중 18대는 포드 섬 비행장, 9대는 카네오헤 비행장을 폭격하고 시마자키 소좌가 지휘하는 즈이가쿠의 수평폭격기 27대는 히컴 비행장을 폭격하여 일본항공모함에 대한 미군의 반격능력을 분쇄할 것이었다.

 

신도 사부로 대위가 지휘하는 전투기 36대 역시 제공권을 장악하고 비행장의 항공기와 관제탑을 기총소사할 것이었다.

제2차 공격대에 투입될 항공기는 수평폭격기 54대, 급강하폭격기 81대, 전투기 36대로 합계 171대였으나 공습시에는 급강하폭격기 1대가 불참하여 실제 공격에 투입된 숫자는 170대였다.

1차와 2차 공격대를 합쳐 진주만 기습에 참가한 일본함재기는 353대였다.

 

진주만 공격의 주역은 뇌격기였는데 겐다 중좌와 후치다 중좌는 만일 어뢰방어망이 있을 경우 선두 뇌격기가 자폭하여 망을 찢기로 하고 뇌격기 조종사들의 동의를 받아둔 상태였다.

하지만 나구모 제독이 허가하지 않을 것이 뻔했기 때문에 후치다 중좌는 꼼수를 썼다.

뇌격대의 공격에 대하여 설명하던 무라타 소좌가 어뢰방어망이 있을 경우에 관하여 말할 때가 되자 후치다 중좌가 슬쩍 끼어들어 무라타 소좌를 밀어내고 자신이 설명했다.

 

"어뢰방어망이 있을 경우 선두 뇌격기가 어뢰방어망을 폭격하여 돌격로를 열 것입니다. 만일 선두가 실패하면 다음 뇌격기가, 또 실패하면 다음 뇌격기가..이런 식으로 폭격하여 돌격로를 엽니다."

 

예상대로 나구모 중장이 말을 끊고 질문했다.

 

"어뢰방어망을 폭격하여 돌격로를 연다는 것이 정확하게 무슨 뜻인가?"

 

후치다는  미리 준비한 대로 능청스럽게 대답했다.

 

"그것은 대단히 기술적이고 특별한 형태의 공격으로 조종사들은 무슨 말인지 압니다."

 

그러자 나구모 제독은 더 이상 묻지 않았다.

 

회의는 이어서 진주만에 미함대가 없을 경우 어떻게 할 것인지로 옮겨갔다.

그럴 경우 진주만 공격부대는 함재기를 회수한 후 남하하면서 하와이 주변을 수색하여 미함대와 대결할 것이었다.

이때는 수평폭격기도 모두 어뢰를 장비하고 뇌격기로 운용할 것이었다.

미함대를 발견하는데 실패하면 진주만 공격부대는 마셜제도로 물러가 다음 명령을 기다릴 것이었다.

수색 도중 미함대가 진주만에 돌아와도 진주만을 공습하지는 않을 것이었다.

기습의 잇점이 사라진 상태에서는 위험이 너무 컸다.

 

저녁 식사를 마치고 조종사들은 26개 공격대 별로 나뉘어 토론에 들어갔다.

겐다 중좌와 후치다 중좌는 공격대를 돌아다니면서 조종사들의 질문에 대답하고 모든 조종사가 자신의 임무를 숙지하도록 격려했다.

아카기의 주방에서는 술과 음식을 준비했다.

밤늦게 토론회를 마친 조종사들은 히도카프 만에 심한 폭풍우가 이는 가운데 야식을 즐기면서 떠들썩하게 놀다가 잤다.

 

1941년 11월 24일 아침부터 조종사들은 토론과 학습을 재개했으며 오전에 나구모 중장이 들러 조종사들을 격려했다.

아카기의 해도실에서는 진주만의 대형 모형을 만들었는데 새로운 정보가 들어옴에 따라 모형은 점점  정교해졌다.

 

이날 야마모토 제독으로부터 26일 아침에 하와이를 향하여 출항하라는 명령이 내려왔다.

함정들은 24일과 25일에 걸쳐 급유를 받고 기관을 점검하는 등 출항준비에 들어갔다.

카가는 싣고 온 100 발의 신형어뢰를 아카기, 소류 및 히류에 분배했으며 기술자들이 항모에 올라 신형어뢰를 마지막으로 점검하고 정비병들에게 취급 방법을 설명했다.

 

사기는 높았다.

제2항공전대 사령관 야마구치 다몬 소장은 부하들을 비행갑판에 모아놓고 출항명령이 내려왔다는 사실을 알리고 연설을 했다.

그는 연설에서 좋은 철로 뛰어난 장인이 만든 명검인 자신의 칼 이야기를 꺼냈다.

검술이 뛰어난 야마구치 소장은 그 칼을 휘둘러 일본 투구를 반쪽으로 가를 수 있었다.

야마구치 소장은 제2항공전대를 칼에 비유하자면 자신의 칼보다 훨씬 좋은 천하제일의 명검이라며 다음과 같은 말로 연설을 맺었다.

 

"자, 이제 적을 반토막내러 가자!"

 

그리고는 당시 해군 내에서 가장 인기가 높던 군가를 불렀다.

야마구치 소장과 부하들은 목청높여 군가를 부른 후 만세삼창을 했다.

 

25일 저녁이 되자 각 함정마다 만들어 놓은 신사에는 조종사와 승조원이 몰려들어 기원했다.

모두들 미군 몰래 하와이에 접근하여 최소한의 희생으로 적 함대를 박살내고 무사히 일본으로 돌아올 수 있기를 기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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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스즈키 소좌의 브리핑

 

히도카프 만에 도착한 제2전대의 기함 히에이 함상에는 스즈키 수구루 소좌가 손님으로 타고 있었다.

스즈키 소좌는 불과 2주일 전에 오아후로부터 돌아온 참이었다.

 

1달 전인 1941년 10월 22일에 일본우선회사 소속 14,500 톤급의 여객선 다이요마루가 요코하마를 떠나 호놀룰루로 향했다.

이 배에는 3명의 해군장교가 신분을 숨기고 타고 있었다.

항공장교인 스즈키 수구루 소좌, 잠수함 장교인 마에지마 도시히데 소좌, 그리고 갑표적 장교인 마츠오 게이우 대위였다.

스즈키 소좌는 선원인 사무장보, 마에지마 소좌는 선박회사 소속의 의사, 그리고 마츠오 대위는 승객으로 가장했다.

의사로 위장한 마에지마 소좌는 만약을 대비하여 의학 용어를 익히고 이름도 츠카다라는 가명을 썼으나 스즈키 소좌와 마츠오 대위는 본명을 썼다.

 

(다이요마루. http://commons.wikimedia.org/wiki/File:Taiyo_Maru_in_Mitsubishi_Nagasaki.JPG)

 

다이요마루는 군령부의 요청을 받은 일본정부의 명령에 따라 무선침묵을 유지한 채 진주만 공격부대가 사용할 북방항로를 따라 하와이로 향했다.

항해 기간 동안 스즈키 소좌와 마에지마 소좌는 시계, 풍향, 풍속같은 날씨와 해상상태를 매일 점검하고 기록했으며 접근하는 항공기나 배가 있는지 쌍안경으로 관찰했다.

다이요마루가 미드웨이 북쪽을 지날 때 미군의 정찰기가 보이지 않았으므로 진주만 공격부대는 더 멀리 북쪽으로 돌아갈 이유는 없었다.

스즈키 소좌가 배나 비행기를 처음 본 것은 다이요마루가 진주만 북쪽 320km 지점에 이르러 미군의 정찰기에 발견되었을 때였다.

이로써 오아후 북쪽에 대한 미국의 정찰반경은 320km 이며 그 이전에는 배나 비행기를 만날 확률이 낮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다이요마루는 토요일인 1941년 11월 1일 오전 8시 30분에 호놀룰루 항의 8번 부두에 도착했다.

곧 하와이 총영사인 기타 나가오가 찾아와 스즈키 소좌와 면담했다.

스즈키 소좌는 군령부가 작성한 100 여 가지의 질문을 전달했고 기타 총영사는 다이요마루가 출항할 때까지 매일 찾아와 답변했다.

가장 좋은 방법은 오아후 섬의 정보 수집을 책임지고 있던 요시카와 다케오가 다이요마루에 직접 와서 답변하는 방법이었으나 군령부나 일본영사관 모두 정보수집의 핵심인물인 요시카와를 위험에 빠뜨리고 싶어하지 않았다.

같은 이유로 요시카와가 작성한 답변서를 기타 총영사가 전달하는 방법도 위험했다.

결국 기타 총영사가 요시카와와 함께 답변을 만들어 기억했다가 다이요마루에 와서 스즈키 소좌에게 말해주었다.

기타 총영사는 꽤 정확하게 정보를 전달했으나 몇몇 정보는 잘못 전달되었으며 어떤 정보는 요시카와가 잘못 알고 있었다.

 

스즈키 소좌, 마에지마 소좌 및 마츠오 대위는 다이요마루가 호놀룰루에 정박해 있는 동안 배를 떠나지 않고 쌍안경으로 북서쪽에 보이는 진주만을 관찰하고 날아다니는 항공기들도 관찰했다.

항공기를 관찰하면서 스즈키 소좌는 단발기인지 쌍발기인지 4발기인지 구분해서 기록했다.

다이요마루는 11월 5일에 호놀룰루를 출항하여 진주만 기습부대가 돌아올 항로를 따라 17일 오전에 일본으로 돌아왔다.

돌아오는 길에도 하와이 근해를 벗어나자 일본 근해에 도달할 때까지 비행기나 배를 만나지 않았다. 

다이요마루가 요코하마 항에 접근하자 해군성이 보낸 보트가 스즈키 소좌, 마에지마 소좌 및 마츠오 대위를 데리러 왔다.

보트를 타고 해안에 도착한 세 사람은 즉시 도쿄로 가서 해군성 건물 2층에 마련된 방으로 들어갔다.

그곳에는 나가노 군령부 총장, 이토 차장, 후쿠도메 제1부장, 도미오카 작전과장, 미요 항공참모 등 군령부의 주요 인사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스즈키 소좌는 이들에게 기타 총영사로부터 들은 답변 내용과 자신이 관찰한 내용을 설명한 후 질문을 받고 대답했으며 이어서 마에지마 소좌와 마츠오 대위도 같은 과정을 거쳤다.

 

이렇듯 중요한 모임에서 나가노 총장은 열성이 없었다.

나가노 총장은 처음에 반짝하다가 이내 관심을 잃었으며 날카로운 질문과 대답이 오가는 긴장된 분위기 하에서도 대부분의 시간을 꾸벅꾸벅 졸았다.

군인으로서 최고의 지위인 군령부 총장에 오른 이후 나가노 제독은 목표를 잃고 도전을 싫어하며 현실에 안주하려 했다.

나가노 총장의 이러한 무기력한 태도 덕분에 연합함대 사령장관 야마모토 대장이 상급기관인 군령부를 상대로 번번이 자신의 의사를 관철시킬 수 있었다.

 

군령부와의 모임을 마치고 나니 밤늦은 시간이었다.

도쿄에 집이 있던 스즈키 소좌는 자기 집으로 갔으며 마에지마 소좌는 잠수함 부대에 설명하기 위하여 요코스카로, 마츠오 대위는 갑표적 승조원들에게 설명하기 위하여 구레로 갔다.

 

스즈키 소좌는 다음날인 11월 18일에 군령부로 가서 정보분석관들과 함께 자신이 기타 총영사에게서 들은 내용과 스스로 관찰한 내용을 다시 한 번 반복했다.

이후 그에게는 더 중요한 임무가 주어졌다.

스즈키 소좌는 히도카프 만으로 가서 제1항공함대 수뇌부에 브리핑하라는 명령을 받고 18일 저녁에 제2전대 사령관 미카와 구니치 중장의 기함 히에이에 올랐다.

 

쿠릴열도 에토로푸 섬의 동해안 중간 쯤에 있는 히도카프 만은 일찌기 해적들의 근거지였다.

9km x 9km 크기로 내륙으로 움푹 들어간 히도카프 만은 좋은 정박지로 진주만 기습부대가 함대가 외부의 눈을 피해서 숨기에 안성맞춤이었다.

대부분 어부인 주민들은 만 북쪽의 도시모이와 남쪽의 우엠베츠에 모여 살았는데 집 이외에는 건물이랄 것이 없는 오지였다.

진주만 공격부대는 1941년 11월 21일부터 히도카프 만에 도착하기 시작했으며 22일에 신형어뢰를 싣고 온 카가가 마지막으로 도착했다.

 

(에토로프 섬. 동해안 중간에 잘록하게 들어간 것이 히도카프 만이다. http://en.wikipedia.org/wiki/Iturup)

 

제1항공함대 사령장관 나구모 중장은 11월 22일 오후 8시에 기함 아카기에서 제1항공함대의 참모들 및 후치다 중좌와 함께 스즈키 소좌의 브리핑을 들었다.  

스즈키 소좌는 군령부에서와 마찬가지로 기타 총영사에게서 들은 것과 자신이 호놀룰루 항에서 관찰한 내용을 설명했다.

 

미태평양함대가 주말마다 항구로 돌아온다는 정보는 아직 유효했다.

이어서 스즈키 소좌는 오아후 섬의 미군 항공력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미해군은 포드 섬에 약 60대, 그리고 카네오헤 기지에 약 50대의 카탈리나 정찰비행정을 보유하고 있다.

오아후 남서쪽의 바버즈 곶에서는 언제나 함재기 약 80대가 훈련중이다.

미육군은 히컴 비행장에 4발 중폭격기 약 40대, 쌍발폭격기 약 100대를 보유하고 있다.

미육군의 전투기는 P-40, P-38, P-36 이 약 200대이고 기타 약 70대를 보유하고 있다.

 

이것을 보면 당시 스즈키 소좌가 오아후 섬의 미군 항공력을 상당히 과대평가하고 있었다는 점을 알 수 있다.

우선 미해군이 보유한 카탈리나 정찰비행정은 110대가 아니라 포드 섬에 45대, 카네오헤에 36대로 합계 81대였으며 그중 12대는 미드웨이에 파견나와 실제로는 69대였다.

스즈키 소좌가 보고한 '바버즈 곶에서 훈련 중인 함재기 80대' 는 에바 비행장에 전개하고 있던 해병항공대로 보이는데 진주만 기습 당시 오아후 섬의 해병항공대가 보유한 항공기는 와일드캣 10대, 돈틀레스 22대, 빈디케이터 급강하폭격기 7대, 쌍발초계기 3대, 그리고 연습기 1대로 합계 43대였다.

 

육군항공대의 경우 과대평가는 더 심했다.

4발 중폭격기인 B-17D 는 40대가 아니라 12대 밖에 없었으며 그나마 부품부족으로 6대 만이 가용한 상태였다.

쌍발폭격기 또한 100대가 아니라 B-12 3대, B-18 33대, A-12 2대, A-20 12대로 총 50대였으며 부품부족으로 B-12 1대, B-18 21대, A-12 2대, A-20 5대 등 29대만이 가용한 상태였다.

그나마 A-20 을 제외한 쌍발폭격기들은 모두 구형이었다.

 

전투기 또한 270대가 아니라 P-40 99대, P-36 39대, P-26 14대로 총 152대였으며 역시 부품부족으로 P-40 64대, P-36 20대, P-26 10대 등 94대만이 가용한 상태였다.

P-40 을 제외한 기종들은 구형이었으며 강력한 신형 쌍발전투기인 P-38 은 배치되지 않은 상태였다.

 

스즈키 소좌는 오아후 섬의 육군 항공기 세력을 폭격기 140대, 전투기 270대, 기타 45대로 보아 455대로 추산했으나 실제로는 폭격기 62대, 전투기 152대, 정찰기 13대, 훈련기 4대 등 231대였으며 그나마 가용한 것은 폭격기 35대, 전투기 94대, 정찰기 11대, 훈련기 3대 등 143대에 지나지 않았다.

일본군은 오아후에 배치된 미육군의 항공력을 3배 이상 과대평가했으며 이렇게 과대평가된 오아후의 미국 항공력에 대한 공포가 진주만 기습에서 나구모 중장이 3차 공습을 포기한 가장 큰 이유였다.

 

(히도카프 만에 정박 중인 제1항공함대의 기함 아카기. http://commons.wikimedia.org/wiki/File:Akagi_Hitokappu_Bay.jpg) 

 

스즈키 소좌는 이어서 항공정찰에 대해 설명했다.

항공정찰은 오아후의 남쪽과 남서쪽으로는 활발하지만 북쪽으로는 뜸했다.

미해군의 카탈리나  정찰비행정들은 아침에 이륙하여 정찰한 후 점심에 돌아오며 오후에 다시 이륙하여 해질때까지는 돌아왔다.

따라서 미군 정찰기들은 해뜨기 전이나 해가 진 이후에는 활동하지 않았으며 이는 진주만 기습의 성공율을 높여주는 중요한 정보였다.

 

설명이 끝나자 겐다 중좌는 가장 중요한 항공모함에 대하여 물었다.

스즈키 소좌는 잠시 망설이더니 자신은 항공모함을 보지 못했지만 항모들은 다른 함정들과 같이 행동한다고 말했다.

 

이것은 틀린 말이었다.

실제로 오아후의 정보 수집을 책임지고 있던 요시카와 다케오는 진주만을 드나드는 항모의 행동 패턴을 파악하려고 골머리를 앓았으나 도통 알 수가 없었다.

당연한 것이 당시 태평양함대의 항공모함들은 전방 기지에 항공기를 파견하러 사방으로 돌아다니고 있었다.

따라서 항모들은 전함을 중심으로 한 태평양함대 주력의 훈련 스케줄과는 상관없이 항공기를 파견하러 다니는 도중에 따로 훈련하고 있었으므로 입출항 시기를 예측할 수 있는 행동 패턴이 없었다.

 

겐다 중좌는 기습을 가했을 때 진주만 내에 항모가 없을 수도 있다는 사실에 불안감을 느꼈으나 항모가 있건없건 공습을 감행하기로 결정했다.

항모가 없을 경우 주목표는  전함과 항공기가 될 것이었다.

 

스즈키 소좌가 히도카프 만에 정박한 아카기에서 브리핑하고 있을 때 미태평양함대의 전투정보실은 마셜 제도에 일본이 가진 전체 잠수함의 1/3 가량이 몰려있는 것을 알아내었으나 이들이 하와이를 목표로 하고 있다는 사실은 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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