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 성문보 전투(1) - 부실한 방어태세

 

1941년 12월 9일 아침이 되자 몰트비 소장은 일본군의 진격이 예상보다 빠르다는 것을 느꼈다.

몰트비 소장은 해군을 지휘하던 콜린슨 대령에게 구룡반도에서의 철수가 빨라질 수 있으니 구룡에서 애버딘으로 장비와 보급품을 옮기는 일에 속력을 내어 달라고 요청했다.

빅토리아 항은 구룡반도에서 탈출하는 중국인들의 작은 배로 가득차서 보급품을 실은 주정들이 이동하는데 애를 먹었다. 

 

중경에서는 장개석 총통이 영국군 연락관 데니스 장군에게 홍콩을 구원하기 위하여 병력을 동원하겠다고 말했다.

중국군의 3개 군(Army)이 남쪽으로부터 광동을 공격하여 일본군을 묶어두는 동안  유한모 장군이 지휘하는 또다른 3개 군이 광동-구룡 간 철도를 따라 공세를 가한다는 것이었다.

중국군의 군은 보통 사단 3개로 이루어지지만 중국군 사단은 규모가 작았으므로 1개 군의 화력은 영국사단과 비슷했다.

그러나 장개석 총통은 공격이 1942년 1월 10일 이후에야 가능하다고 말했는데 홍콩은 그때까지 버티지 못했다.

 

12월 9일 오후가 되자 일본군들이 진드링커스 선에 접근했다.

서쪽에서는 제229연대의 선두가 버팔로 힐에 도달했으며 중앙에서는 제228연대가 니들 힐에 도착했다.

 

(1941년 12월 8일 - 13일에 걸친 홍콩전투상황도. 출처 : Hong Kong 1941-45, P.36)

 

9일 오후 3시에 니들 힐에 도착한 제228연대장 도이 데이히치 대좌는 성문저수지 남쪽에 있는 강력한 진지인 성문보에 빨래가 널려 있다는 정찰대의 보고를 받았다.

이것은 성문보를 지키는 병사들의 기강이 해이하다는 증거였다.

도이 대좌는 즉시 공격하고 싶었으나 문제가 있었다.

 

성문보는 그의 관할이 아니라 서쪽의 제230연대 관할이었다.

실전에서 상부의 허락없이 연대지경선을 넘는 것은 중대한 명령위반으로 큰 벌을 받을 수 있었다.

게다가 갑자기 자욱한 안개가 끼면서 시계가 20m 아래로 떨어져 즉시 공격하기는 불가능했다.

도이 연대장은 밤에 성문보를 공격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는 다케요시 이나가키 소좌의 제2/228대대를 성문보 동쪽으로 보내어 적이 접근하는지 감시하고 니시야나 하주라 소좌의 제3/228대대에게 성문보를 공격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하주라 소좌는 제9중대장 카스가이 요시타로 중위와 제10중대장 와카바야시 도이치 중위에게 지원자 150명을 뽑아 성문보를 공격하라고 명령했다.

 

성문보는 진드링커스 선에서 가장 강력한 진지로 성문저수지의 남쪽을 이루는 주빌리 댐에서 180m 정도 떨어진 곳에서 시작하여 스머글러 능선의 서쪽 사면에 걸쳐 있었다.

진지는 5개의 강화 콘크리트 벙커(400, 401A, 401B, 402 및 403벙커)와 역시 강화 콘크리트로 만들어진  해발 341m 의 포병관측소로 이루어져 있었으며 관측소가 지휘소를 겸하고 있었다.

관측소에는 철문이 달려 있었고 벙커와 관측소 사이는 콘크리트 터널로 연결되어 있었는데 영국군은 이 터널에 런던의 유명한 거리 이름을 붙였다.

터널은 중간에 콘크리트로 만들어진 무개호를 통하여 바깥과 연결되어 있었다.

벙커 주변에는 참호를 파 놓았고 접근하는 길에는 철조망을 쳐 놓았으나 지뢰는 없었다. 

 

성문보를 지키던 병력은 시릴 존스 대위가 지휘하는 제2왕립스코트대대 A 중대였다.

A 중대는 말이 중대지 실제로는 소대 규모로서 중대본부는 10명으로 이루어져 있었고, 휘하에는 소대장  톰슨 소위를 포함하여 25명으로 이루어진 제8소대 밖에 없었다.

이외에 윌콕스 중위가 이끄는 홍콩싱가포르포병대 제1홍콩연대 제2포대의 관측반이 있었는데 영국군 2명, 인도인 통신병 2명으로 4명이었다.

이렇게 39명이 성문보를 지키는 모두였으며 기관총은 401B 와 402 벙커에만 있었다.

 

제2왕립스코트대대장 사이먼 화이트 중령은 성문보의 병사들에게 비커스 기관총반을 제외한 병력들은 적의 포격이 쏟아질 때를 제외하고는 벙커에 들어가지 말라는 명령을 내렸다.

이런 명령이 필요했다는 점에서 당시 성문보를 지키던 병력들의 기강이 좋은 편이 아니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9일 밤11시에 일본군이 공격해 왔을 때 성문보의 병력 중 장교 3명 모두를 포함한 10명 이상이 지휘소 안에 있었고 포병관측반의 인도통신병 1명과 A 중대의 병사 4명은 성문보의 북서쪽에서 경계를 서고 있었으며 나머지 병력들은 기관총이 장비된 401B 및 402 벙커 안과 그 주변에 있었다.

제2왕립스코트대대본부는 성문보에서 캐슬피크 도로를 따라 남서쪽으로 내려가 스머글러 능선 아랫쪽의 도로 주위에 자리잡고 있었다.

성문보의 남동쪽에는 로버트 뉴튼 대위가 지휘하는 D/2/7 라지푸트 중대가 진드링커스 방어선의 빈 틈을 메우기 위하여 배치되어 있었다.

D 중대는 성문보 남동쪽의 성문계곡을 화력으로 감제하면서 북쪽으로 주빌리 댐과 니들힐 사이를 정찰하라는 명령을 받고 있었다.

 

(성문보 전투 상황도. 일본 측에서 본 모습으로 지도 아랫쪽이 북쪽이다. 출처 : Hong Kong 1941-45, P.44,45에서 발췌)

 

9일 오후 6시에 일본제228연대의 주력이 주빌리 댐에서 북쪽으로 500m 떨어진 지점까지 접근했다.

오후 8시에 제2왕립스코트대대장 화이트 중령은 성문보의 A중대에게 명령을 내렸다.

정찰대를 보내어 성문계곡을 따라 성문저수지 북쪽의 니들힐까지 정찰하고 내려오는 길에 스머글러 능선의 D/5/7 라지푸트 중대의 주둔지까지 정찰한 다음 귀환하라는 내용이었다.

이 명령에 따라 제8소대장 톰슨 소위는 9명의 부하를 이끌고 정찰을 나섰다.

 

오후 10시 30분에 돌아온 톰슨 소위는 관측소로 가서 A중대장 존스 대위에게 일본군을 발견하지 못했다고 말했다.

당시 일본군이 주빌리 댐에서 북쪽으로 불과 500m 떨어진 곳까지 진출한 상태였는데 이해할 수 없는 보고였다.

정찰에 걸린 시간을 계산해보면 톰슨 소위가 주빌리 댐 북쪽을 정찰하지 않고 바로 남쪽으로 내려가 D/5/7 라지푸트 중대와 접촉한 다음 성문보로 돌아왔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성문보를 공격할 150명의 일본군이 주빌리 댐을 건너 401B 벙커 앞에 집결한 시간은 오후 9시30분이었다.

따라서 톰슨 소위가 명령에 따라 북쪽을 정찰했다면 남하하던 일본군과 마주쳤을 것이다.

톰슨 소위가 존스 대위에게 정찰보고를 하는 동안 전투가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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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침공

 

홍콩 침공을 담당한 일본육군제38사단은 1941년 12월 1일부터 본격적으로 이동을 시작했다.

제229 및 제230연대는 1941년 12월 1일에 주둔 중이던 불산(佛山)을 떠나 광저우를 지나 6일 저녁까지 심천강 대안에 도달했다.

제228연대는 12월 5일 밤 - 6일 새벽에 걸쳐 홍콩 북동쪽의 미르스(Mirs) 만에 상륙하여 6일 저녁까지 심천에 도착했다.

몰트비 소장은 일본군이 미르스 만에 상륙했다는 보고를 받고도 일본군의 침공 의도를 반신반의했다.

 

홍콩의용방위군단은 12월 5일에 전면적으로 소집되었으나 홍콩의 민간인들은 전쟁이 임박했다는 사실을 믿지 않았다.

침공 전날인 7일은 일요일이었는데 식당, 상점 및 영화관이 정상 영업했으며 해피밸리 경마장은 개장 이래 최대 관객 수를 기록했다.

 

홍콩수비대는 구룡반도를 책임진 구룡보병여단(Kowloon Infantry Brigade, KIB)과 홍콩 섬 방어를 책임진 홍콩보병여단(Hong Kong Infantry Brige, HKIB)로 나위어져 있었다.

세드릭 월리스 준장이 지휘하는 구룡보병여단은 홍콩섬으로 철수한 후에는 동부 여단(East Brigade)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존 라슨 준장이 지휘하는 홍콩보병여단은 구룡보병여단이 홍콩섬으로 철수한 후에는 서부여단(West Brigde)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구룡보병여단은 구룡반도의 서쪽에 제2왕립스코트대대, 중앙에 제5/7라지푸트대대, 동쪽에 제2/14 펀잡대대를 배치했다.

제2왕립스코트대대의 C 중대는 스탠포드 번스 소령의 지휘 아래 캐슬피크도로를 원랑(元朗)까지 순찰했다.

제2/14펀잡대대의 C 중대는 의용대 소속의 장갑차 2대 및 브렌건캐리어 4대와 함께 상수(上水)에서 대포시장에 이르는 지역을 감시했다.

C/2/14펀잡 중대에는 또한 의용대의 공병과 함께 제22왕립공병요새중대가 동행했다.

구룡보병여단에 대한 화력지원은 홍콩싱가포르왕립포병대 제1홍콩연대 제1 및 제2포대와 제25중형포 포대가 담당했다.   

 

(1941년 12월 8일 - 13일에 걸친 홍콩전투상황도. 출처 : Hong Kong 1941-45, P.36)

 

일본제23군은 1941년 12월 8일 오전 3시 55분에 대본영으로부터 '사쿠라 사쿠라' 라는 암호전문을 받았다.

홍콩 공격을 시작하라는 명령이었다.

11분 후인 오전 4시 6분에 제23군 사령관 사카이 중장은 홍콩 공격 명령을 내렸다.

홍콩 시간은 진주만보다 18시간 30분 빠르므로 홍콩시간 8일 새벽 3시 55분은 하와이 시간으로 7일 오전 8시 25분으로 진주만 기습이 시작되고 34분이 지난 시점이었다.

 

오전 4시 45분에 몰트비 소장의 정보참모로 일본어에 능통한 찰스 복서 소령이 라디오 도쿄에서 일본국민들에게 전쟁이 임박했다고 보도하는 것을 듣고 몰트비 소장에게 보고했다.

오전 5시에는 일본군이 말레이에 상륙하려 한다고 싱가포르에서 보고하는 전문을 홍콩의 해군기지에서 청취했다.

오전 6시 45분에 몰트비 소장은 병사들에게 영국과 일본 사이에 전쟁이 일어났다는 사실을 통보했다. 

 

심천강에서는 영국공병들이 다리를 파괴하기 시작했다.

보톰리 소령의 지휘를 받는 의용대 공병중대는 그레이 소령이 지휘하는 C/2/14 라지푸트 중대의 지원을 받아 8일 오전 7시 30분까지 심천강의 모든 다리를 폭파시켰다.

하지만 일본군은 부교를 만들어 심천강을 건너기 시작했다.

 

일본기들은 오전 7시 20분에 광저우 비행장을 이륙하여 오전 8시부터 구룡반도의 카이탁 비행장과 수상기 계류장을 공격했다.

98식 경전투기 12대가 97식 전투기 9대의 호위를 받으면서 카이탁 비행장을 공격하여 영국군의 빌데비스트 뇌격기 및 의용대의 연습기 모두와 민간기까지 12대를 파괴하고 비행장에 피해를 입혔다.

또다른 일본기들은 수상기 계류장을 공격하여 왈루스 비행정과 마침 홍콩에 도착해 계류 중이던 판 아메리칸 항공의 시콜스키 S-42B 비행정을 파괴했다.

 

카이탁 비행장에서는 유라시아 항공사의 융커스 52 여객기 2대와 중국항공공사의 T32 콘도르 여객기 1대만이 파괴를 면했다.

살아남은 이들 여객기들은 중화민국 건국자인 손문의 미망인과 장개석 총통의 처형인 송씨 자매 등 요인들을 태우고 그날 안으로 홍콩을 떠났다.

 

일본기들은 이어서 구룡반도의 심수보(深水埗)에 있던 막사를 폭격했는데 이곳은 캐나다 위니펙척탄병대대가 사용하고 있었다.

병사들이 홍콩 섬으로 가기 위하여 아침 일찍 막사를 떠난 덕분에 사망자는 없었으나 통신부사관 1명과 통신병 1명이 부상을 입었다.

두 사람은 제2차 세계대전에서 최초로 부상을 입은 캐나다군이었다.

일본기들은 태고 조선소와 구룡 시의 건선거도 폭격했는데 이 순간에도 홍콩 섬의 빅토리아시티에서는 식당과 영화관이 정상 영업을 하고 있었다.

이날 캐슬피크도로를 순찰 중이던 의용대 제1중대의 장갑차와 브렌건캐리어도 일본기의 공격을 받았고 영국해군의 포정 시칼라는 캐슬피크만에서 2번에 걸쳐 일본기의 공습을 받았으나 살아남았다.

 

일본군은 연대별로 3곳에서 심천강을 건넜다.

서쪽을 담당한 제223연대는 낙마주(落馬洲)에서 강을 건넌 뒤 2개로 갈라져 1개 부대는 신전(新田)-원랑-캐슬피크를 거쳐 서쪽을 토벌하면서 내려오고 다른 1개 부대는 바로 남진하여 해발 957m 로 홍콩의 최고봉인 대모산 북쪽 기슭을 향했다.

 

중앙을 담당한 제228연대는 나호(羅湖)에서 강을 건넌 뒤 상수-대포-구룡을 잇는 도로를 따라 그래시 힐(Grassy Hill)로 남하했다.

그래시 힐의 남서쪽에는 성문저수지가 있었고 저수지 남쪽에는 성문보(城門堡)가 있었다.

성문보는 강화 콘크리트로 만들어진 벙커 사이를 콘크리트 터널로 연결한 강력한 방어진지였다.

 

동쪽에서는 제229연대가 사두각(沙头角)에서 강을 건넌 뒤 녹경(鹿頸)과 사라동(沙羅洞)을 거쳐 대포로 향했다.

대포를 통과한 연대는 타이드 코브(Tide Cove)를 건너  대수항(大水坑) 마을에 상륙한 다음 마안산(馬鞍山)을 거쳐 진격할 것이었다.

일본군은 강력한 저항을 만나면 우회한 다음 계속 진격하라는 명령을 받고 있었다. 

 

8일 하루 동안 구룡반도 곳곳에서 교전이 벌어졌다.

펀잡대대는 오후 1시경에 일본군과 처음으로 교전했고 오후 6시 30분에는 대포 남쪽의 둑길에 매복했다가 기습을 가하여 선두의 몇개 소대를 쓸어버렸다.

대포 남쪽의 도로에서는 장갑차와 브렌건캐리어로 무장한 의용대가 일본군 선봉을 격파했다.

제2왕립스코트대대의 정찰대는 원랑에서 일본군을 만나 교전했다.

포병대는 일본구축함과 포탄을 주고 받았으며 대포 방면의 일본군에게 포격을 가하여 피해를 입혔다.

 

영국군이 초전에 작은 승리를 몇 번 거두었지만 일본군의 진격을 막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압도적인 병력을 가진 일본군은 정확한 지도를 가지고 있었으며 미리 심어놓았던 간첩들의 길안내를 받아 빠르게 전진했다.

8일 저녁이 되자 펀잡대대가 포위를 피해 그래시 힐까지 후퇴했다.

오후 10시에는 일본군 선봉이 대포-구룡 사이의 도로를 따라 사전(沙田)까지 진격했으며 의용대 공병은 가까스로 성문강에 걸려있던 다리를 파괴했다. 

 

8일 밤에 몰트비 소장은 구룡보병여단에게 진드링커스선에 집결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진드링커스 선의 중앙을 담당한 펀잡대대는 타이드 코브의 머릿부분인 사전위(沙田圍)를 중심으로 방어망을 펴고 의용대의 지원을 받아 이틀간 버텼다.

방어선의 동쪽은 제2왕립스코트대대가 담당했으며 펀잡대대와 스코트대대 사이의 스머글러 능선은 비어있는 상태였다.

구룡보병여단장 윌리스 준장은 유일한 예비대인 로버트 뉴튼 대위의 D/5/7 라지푸트 중대를 스머글러 능선에 투입했다.

서쪽을 담당한 라지푸트대대는 아직 일본군과 접촉하지 않고 있었다.

 

영국해군은 구룡에 있던 장비와 보급품들을 주정에 실어 홍콩 섬 남부의 애버딘으로 옮겼다.

일본군의 공습이 시작되면서 구룡 반도의 주민들이 앞다투어 배를 타고 홍콩 섬으로 건너오는 바람에 해상이 혼잡하여 장비와 보급품을 옮기는 일은 쉽지 않았다.

 

일본해군의 순양함 이스즈가 구축함 몇 척과 함께 해안포 사정거리 바깥에서 왔다갔다하면서 홍콩을 봉쇄했다.

그러나 영국해군의 구축함 타넷과 스카우트는 8일 저녁 9시 30분에 일본해군의 봉쇄를 뚫고 싱가포르로 탈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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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공격준비(2) - 편제

 

사카이 다카시 중장이 지휘하는 제23군에서 홍콩 공략의 주력은 사노 타다요시 중장의 보병제38사단이었으며 아라키 가츠토시 대좌가 지휘하는 보병제66연대(아라키 지대)는 점령지를 방어했다.

화력 지원을 위하여 제38사단의 사단포병에 더하여 기타시마 기네오 소장이 지휘하는 제1포병대가 추가되었다.

제23군의 비행대인 제1비행단이 항공지원을 담당했고 해군에서는 제2견지함대(중국파견함대)를 투입하여 지원했다.

 

제38사단은 3각 편제 사단인 1940년식 B형 사단이었다.

사단의 주력은 보병단장 이토 다케오 소장이 지휘하는 3개 보병연대(도이 데이히치 대좌의 제228연대, 다나카 류사부로 대좌의 제229연대, 쇼지 도시시게 대좌의 제230연대)였으며 간키 다케요시 대좌가 지휘하는 산포연대가 화력지원을 담당했다.

지원부대로는 유바타 슈이치 중좌의 치중대, 이와부치 츠네오 중좌의 공병대, 가바야시 오토카즈 중좌의 수송제3연대, 아타미 주로 대위의 전차중대, 그밖에 의무대, 통신대, 헌병 등이 있었다.

1940년식 B 형 사단의 정원은 20,000명이었으나 홍콩 침공 당시 제38사단은 경전차로 이루어진 전차중대가 포함되고 포병, 공병 및 수송 부문이 강화되어 23,228명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산포연대의 정원은 약 3,400명, 말은 약 1,400필로 산포대대 3개와 관측반 및 연대수송대로 이루어져 41식 75mm 산포 36문을 운용했다.

산포대대의 정원은 약 980명으로 산포중대 3개와 관측반 및 대대수송대로 이루어져 산포 12문을 보유했다.

산포중대의 정원은 218명으로 산포소대 2개와 관측반 및 중대수송대로 이루어져 산포 4문을 보유했다.

산포소대의 정원은 28명으로 75mm 산포 2문을 보유했다.

홍콩 침공 당시 산포제38연대는 75mm 산포 28문을 보유했으나 추가로 33문을 배속받아 제38사단의 75mm 산포는 61문이었다.

 

(41식 75mm 산포. 자세한 내용은 여기로. http://en.wikipedia.org/wiki/Type_41_75_mm_Mountain_Gun)

 

보병연대의 정원은 3,845명이며, 700필이 넘는 군마를 보유하고 있었다.

주력은 보병대대 3개였으며 전포중대(戰砲中隊) 또는 대대가 화력지원을 담당했고 대전차중대와 통신중대를 가지고 있었다.

이외에 공병중대, 의무대, 통신반이 배속되었으며 필요하면 포병대대나 노무대를 배속받기도 했다.

 

보병대대의 정원은 1,071명으로 보병중대 4개와 기관총중대, 그리고 전포소대 또는 중대를 가지고 있었다.

기관총중대의 정원은 174명으로 3개의 기관총소대로 이루어져 92식 중기관총 12정을 보유했다.

기관총소대의 정원은 46명으로 4개의 전총분대(戰銃分隊)와 1개의 탄약분대로 이루어져 중기관총 4정을 보유했다.

전총분대의 정원은 11명으로 중기관총 1정을 운용했다.

 

(92식 중기관총. 자세한 내용은 여기로. http://commons.wikimedia.org/wiki/File:Type_92_Heavy_Machine_Gun_from_1933_book.jpg)

 

전포중대의 정원은 122명으로 탄약소대와 2개의 전포소대로 이루어져 91식 70mm 보병포 4문을 보유했다.

전포소대의 정원은 55명으로 탄약분대와 2개의 전포분대로 이루어져 보병포 2문을 보유했다.

전포분대는 15명으로 이루어져 보병포 1문을 운용했다.

 

(92식 보병포. 자세한 내용은 여기로 . http://en.wikipedia.org/wiki/Type_92_Battalion_Gun)

 

보병중대의 정원은 181명으로 보병소대 3개로 이루어져 있었으며 화기소대를 배속받는 경우도 있었다.

보병소대의 정원은 54명으로 기관총분대 3개와 척탄통분대 1개로 이루어져 있었다.

기관총분대의 정원은 13명으로 분대장, 기관총 요원 4명, 소총수 8명으로 이루어져 경기관총 3정을 보유하고 있었다.

척탄통분대의 정원은 13명으로 분대장, 척탄통 사수 6명, 소총수6명으로 이루어져 척탄통 3문을 보유하고 있었다.

 

제38사단의 사단포병은 증강되었다.

75mm 산포 28문을 가진 기존의 산포제38연대에 더하여 75mm 산포 33문을 갖춘 독립산포제10 및 제20연대가 가세했다.

150mm 박격포 15문을 보유한 독립박격포제21대대와 37mm 대전차포 20문을 가진 독립속사포 제2 및 제5대대도 투입되었다.

 

사단포병과는 별도로 중포를 가진 기타시마 기네오 소장의 제1포병대가 추가로 화력지원을 했다.

제1포병대는 240mm 곡사포 8문, 150mm 곡사포 22문, 그리고 150mm 박격포 15문을 보유하고 있었다.

 

구룡반도의 방어를 맡은 아라키 지대는 제51사단 제66연대를 기간으로 하여 5,892명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제23군의 비행대인 하부 히데하루 대좌의 제1비행단은 98식 경폭격기 34대, 97식 전투기 13대, 97식 사령부정찰기 3대, 98식 직접협동정찰기 6대 등 56대를 보유하고 있었다.

제1비행단은 비행장대대를 포함하여 약 1,300명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98식 경폭격기. 자세한 내용은 여기로. http://en.wikipedia.org/wiki/Kawasaki_Army_Type_98_LIght_Bomber)

 

해군은 니이미 마사이치 중장이 지휘하는 제2견지함대 소속으로 포격부대와 공격부대로 이루어져 있었다.

포격부대는 경순양함 이스즈를 기함으로 하여 구축함 3척, 수뢰정 4척, 무장수송함 1척, 수상기모함 가미카와마루로 이루어져 있었다.

가미카와마루는 94식 수상기 2대와 92식 뇌격기 3대를 운용했으며 해군항공대원은 약 200명이었다.

 

(일본해군의 경순양함 이스즈. 자세한 내용은 여기로. http://en.wikipedia.org/wiki/Japanese_cruiser_Isuzu)

 

공격부대는 기함 우이지를 포함한 포정 3척, 무장수송함 5척, 수송함 1척, 기뢰부설함 2척, 소해함 1척 및 급유함 2척으로 이루어져 있었으며 약 300명의 해군육전대를 홍콩 섬 남쪽에 상륙시키는 양동작전을 펼칠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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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공격준비(1) - 계획

 

일본은 1940년 2월 9일에 중국 남부의 작전을 담당하는 남지나파견군을 창설했다.

창설 당시 지나파견군 예하였던 남지나파견군은 7월 23일에 대본영 직속이 되었다.

이듬해인 1941년 6월 28일에 대본영은 남지나파견군을 제23군으로 개편하고 초대 사령관으로 이마무라 히토시 중장을 임명했다.

태평양 전쟁 개전을 1달 앞둔 11월 6일에 이마무라 중장은 네덜란드령 동인도제도 공략을 책임진 제16군 사령관이 되었다.

이마무라 중장의 뒤를 이어 사카이 다카시 중장이 제23군 사령관이 되었으며 기병제1여단장 구리바야시 타다미치 소장이 참모장에 임명되었다.

제23군은 사카이 사령관 부임 당시 제18, 제38, 제51 및 제104사단의 4개 사단을 보유하고 있었다.

 

(제23군 사령관 사카이 다카시 중장. http://en.wikipedia.org/wiki/Takashi_Sakai)

 

사카이 사령관은 부임과 동시에 홍콩 공략을 준비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대본영은 말레이 상륙 직후 해군의 지원 하에 제38사단으로 홍콩을 공격하여 열흘 안에 함락시키라고 명령했다.

 

홍콩 수비대에 캐나다 군이 증원되자 사카이 사령관은 대본영에 열흘 만에 홍콩을 함락시키라는 요구는 비현실적이라고 항의하는 동시에 증원을 요구했다.

대본영은 본토에 있던 위수연대(경비연대) 하나를 보내주었다.

위수연대를 공격 작전에 사용하기는 힘들었으나 대신 사카이 사령관은 제51사단에서 제66연대를 빼내어 홍콩전투에 참가시킬 수 있었다.

제66연대장 아라키 가츠토시 대좌의 이름을 따서 아라키 지대라고 이름붙인 제66연대는 전투에 참가하지는 않았지만 제38사단이 구룡반도를 점령한 후 방어를 맡았다.

덕분에 제38사단은 홍콩 섬 상륙에 모든 전력을 투입할 수 있었다.

 

일본군은 침공 몇 년전부터 홍콩에 간첩을 침투시켰는데 홍콩 경찰의 대응 능력이 미약했기 때문에 간첩들은 활발하게 활동했다.

실제로 일본군이 침공했을 때 사용한 지도는 홍콩 당국의 행정용 지도나 군대용 지도에 보기 편하도록 일본어로 몇몇 내용을 추가 인쇄한 것이었다.

일본군은 또한 홍콩의 조직폭력배들에게 자금과 무기를 대주면서 포섭하여 침공시 후방에서 소요를 일으키려 했으나 진책 소장의 대응에 막혀 실패했다.

 

침공계획은 3단계로 나뉘어져 있었다.

제1단계는 심천강을 건너 구룡반도를 점령하고 제2단계에서는 홍콩 섬 상륙을 준비할 것이었다.

제3단계는 홍콩 섬에 상륙하여 점령하는 것이었다.

 

 

(홍콩전투의 전개 과정. http://en.wikipedia.org/wiki/Battle_of_hong_kong)

 

제1단계에서 제38사단은 크게 2개로 나뉘어 전진할 것이었다.

주력은 우익으로 제38사단의 보병단장 이토 다케오 소장이 지휘할 것이었다.

우익은 제228 및 제230연대와 산포대대, 대전차대대 및 공병대대 각 1개로 이루어져 산포연대의 지원을 받을 것이었다.

제228 및 제230연대의 제3대대는 우익의 예비대이며 화력 지원을 담당한 산포연대의 1개 대대는 보병과 동행할 것이었다.

 

좌익은 제229연대를 중심으로 소규모의 포병 및 공병 분견대가 딸려 있었다.

화력지원은 1개 산포연대, 1개 독립야포대대 및 1개 박격포대대가 담당할 것이었다.

 

우익은 대모산의 남서쪽을 통하여 영국군의 방어선을 공격할 것이었다.

좌익은 대모산과 대포 방면으로 남하하여 방어선을 공격할 것이었다. 

구룡반도의 점령은 1주일 내로 끝내게 되어 있었다.

 

구룡반도를 점령하면 제2단계로 들어가 3일 간 홍콩 섬 상륙을 준비하며 이 기간 동안 그린 섬과 스톤커터 섬을 점령하게 되어 있었다.

 

(홍콩 섬 상륙 및 전투.http://www.canadaatwar.ca/content-42/world-war-ii/the-battle-of-hong-kong/)

 

제3단계인 홍콩 섬 상륙은 침공 이후 열흘 째에 실시하게 되어 있었다.

상륙은 홍콩 섬의 북동해안인 백사만과 노스 포인트 사이에 실시하며 3개 연대가 모두 참가할 것이었다.

제230연대가 우익, 제228연대가 중앙, 제229연대가 좌익을 담당하며 일단 상륙하면 빅토리아 시티를 향하여 서쪽으로 진격하게 되어 있었다. 

상륙은 야간에 실시하며 다음날 아침까지는 빅토리아 피크에 도달하여 빅토리아 시티를 고립시키도록 되어 있었다.

각 연대는 2개 대대를 상륙에 동원하며 제3/228대대와 제1/230대대는 소속 연대의 예비대로, 제1/229대대는 사단예비대로 구룡에서 대기할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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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방어준비(2) - 배치

 

일본군의 침공을 받을 당시 중국사령관 크리스토퍼 마이클 몰트비 소장이 지휘하던  홍콩수비대는 의무대 및 세인트 존 야전병원 관계자를 포함하여 13,981명이었다.

영국 및 캐나다인이 8,919명, 인도 및 중국인이 4,402명, 나머지는 의료 관계자였다.

정규군 보병은 5,422명이었으며 약 6,000명은 포병, 공병, 해군 및 홍콩의용방위군단(Hong Kong Volunteer Defence Corps = HKVDC)소속이었다.

 

(중국사령관 크리스토퍼 몰트비 소장. http://en.wikipedia.org/wiki/Christopher_Maltby)

 

홍콩의용방위군단(=이후 줄여서 의용대)은 1854년부터 이어져 온 유서깊은 지역의용방어조직으로 침공을 받을 당시 7개 보병중대, 5개 기관총중대, 5개 포대, 브렌건캐리어를 가진 1개 장갑차소대로 이루어져 있었으며 병력은 약 2,200명이었다.

장비에서 보듯 의용대는 단순히 머리 수만 맞추는 수준이 아니었으며 정규군에 버금가는 전투력을 가지고 있었다. 

 

의용대의 보병중대는 약 100명으로 이루어져 있었으며 각 중대는 인종별로 구성되어 있었다.

제3중대는 기관총중대로서 백인과 중국인의 혼혈인 유라시아 중대, 제4중대는 보병중대로서 중국인 중대, 제5중대는 기관총중대로서 포르투갈인 중대라는 식이었다.

 

홍콩의 인구 구성에 비하여 수비대에서 중국계의 비중은 낮았는데 이는 대다수 중국인들이 홍콩의 중국 귀속을 바라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영국은 자국 국적을 가진 홍콩의 중국계도 수비대에 뽑으려고 하지 않았다.

중일 전쟁 이후 병력 수요가 늘어나면서 중국인을 뽑으려고 했으나 이번에는 일본이 침투시킨 중국 또는 대만 간첩이 끼어들까봐 과감하게 뽑지 못했다.

실제로 일본은 홍콩에 많은 간첩을 심었으며 수비대의 군복을 만들어주는 재단사나 수비대가 주로 가는 이발사 중에서도 간첩이 있었다.

이들의 활약으로 일본군은 침공 때 공습이나 포격을 정확하게 실시할 수 있었다.

 

일본은 광동성을 점령하자 광동의 조직폭력배 200개 파, 12,000명을 모아 자금을 대고 무장시켜 앞잡이로 써먹었는데 홍콩에도 많은 조직폭력배들이 일본군의 침공시 영국군 후방에서 소요를 일으킨다는 조건으로 일본으로부터 자금과 무기를 지원받고 있었다.

이러한 제5열을 소탕하는 데에는 중화민국 해군 소장인 진책 제독의 공이 컸다.

 

국민당 정부의 장개석 총통은 광동성이 함락되어 홍콩과 육로를 통한 연결이 끊어지자 진책 소장을 연락관으로 홍콩에 파견했다.

다리가 하나 뿐인 진책 소장은 증권회사의 중역으로 위장했는데 홍콩과 국민당 정부와의 연락업무라는 본연의 임무 이외에 홍콩의 제5열을 분쇄하는 데에도 앞장섰다.

홍콩 경찰의 능력으로 제5열을 찾아내어 잡아들이는 것은 불가능했으므로 당국도 진책 소장을 후원했다.

 

진책 소장은 경찰의 묵인 아래 조직폭력배들을 모아 톰슨 기관총으로 무장시킨 다음 제5열로 의심되는 자들을 습격하여 사살했다.

법을 무시한 살인이었으나 당시로서는 불가피했다.

정보를 입수하고 가치를 판단하는데 뛰어난 능력을 가진 진책 소장은 정확한 정보를 입수하여 평가한 다음 적이 숨거나 달아나기 전에 신속하게 제거하는 방식으로 일본의사주를 받은 홍콩의 제5열을 효과적으로 제압했다.

따라서 일본이 심혈을 기울였음에도 홍콩이 침공을 받았을 때 제5열에 의한 소요 사태는 발생하지 않았다.

 

홍콩의 해안선에는 해안포 29문이 배치되어 있었다.

9.2인치(234mm)포 8문, 6인치(152mm)포 15문(3문은 스톤커터 섬에 배치), 4.7인치(120mm)포 2문, 4인치(102mm)포 4문이었으며 포신이 바다를 향하고 있었지만 구룡 쪽으로도 포격이 가능했다.

또한 해안에 상륙하는 적을 공격하기 위하여 18파운드(83.8mm) 및 2파운드(40mm) 포 10문이 배치되어 있었다.

야포로는 6인치포, 60파운드(127mm)포, 4.5인치(114mm)포, 그리고 3.7인치(94mm)포를 합쳐 28문이 있었다.

포탄은 부족하여 1문당 평균 300발 가량이었으며 9.2인치 해안포는 1문당 25발에 불과했다.

 

정규보병대대로는 영국대대, 인도대대 및 캐나다대대가 2개씩 있었다.

영국대대는 왕립스코트연대 제2대대와 미들섹스연대 제1대대였는데 미들섹스대대는 비커스 기관총 48정을 가진 기관총대대였다.

인도대대는 제14펀잡연대 제2대대(제2/14펀잡대대)와 제7라지푸트연대 제5대대(제5/7라지푸트대대)였다.

캐나다대대는 캐나다왕립소총대대와 위니펙척탄병대대였다.

(비커스 기관총. 자세한 내용은 여기로.http://en.wikipedia.org/wiki/Vickers_machine_gun)

 

영국대대와 인도대대는 1937년부터 경험이 풍부하고 유능한 장교와 부사관들을 다른 곳으로 뺏기면서 전투력이 저하되었는데 왕립스코트 대대는 많은 병력이 군사재판을 받고 영창에 들어가 기강이 해이하다는 평을 들었다.

야포들을 관장하던 홍콩-싱가포르 왕립포병대(HongKong-Singapore Royal Artillery = HKSRA) 역시 경험이 풍부한 장교와 부사관들을 뺏겼다.

 

따라서 일본군이 침공했을 때 많은 병사들이 훈련이 부족한 보충병들이었다.

펀잡대대의 경우 전 병력의 40%가 1941년 10월에 도착했는데 훈련소를 갓 나온 신병이었다.

경험많은 장교가 부족하여 젊은 장교가 높은 직위를 감당해야 했으며 인도의 이슬람 병사로 이루어진 인도대대를 지휘하는 영국장교가 병사들의 언어인 우르두 어를 몰라서 지휘에 막대한 지장을 초래했다.

 

포병은 포탄이 부족하여 연습을 하지 못했으며 보병과의 합동훈련도 하지 않았다.

따라서 보병은 포병이 사용하는 시계문자판식 목표지시(clockface target indication)를 이해하지 못했다.

 

많은 병사들이 말라리아로 고통받고 있었다.

정원이 770명 정도인 왕립스코트연대에서 최소한 180명이 재발하는 말라리아에 걸려 있었다.

 

캐나다군의 도착은 수비대의 병력을 크게 늘렸지만 이들 또한 전투력이 약했다.

이들은 파견되기 전 수년간 주둔군 역할을 하여 전투훈련이 부족했으며 파견되기 전에 결원을 보충받았는데 전체의 12% 에 달하는 보충병들은 훈련소를 갓 나온 풋내기들이었다.

 

장비도 부족했다.

편성표에 따르면 캐나다군 1개 대대는 브렌건캐리어 22대, 1톤 트럭 13대, 3/4톤 트럭 37대 등 총 102대의 차량과 31대의 자전거, 22정의 보이스 대전차총을 보유했다.

그러나 홍콩에 파견된 캐나다군 2개 대대가 보유한 차량은 합쳐 브렌건캐리어 6대, 3/4톤 트럭 12대, 급수차 2대에 불과했고 보이스 대전차총은 1정 뿐이었다.

 

(브렌건캐리어. http://en.wikipedia.org/wiki/Universal_Carrier)

 

캐나다군은 3인치 박격포를 보유했으나 포탄이 없었다.

당시 캐나다 육군 전체에 3인치 박격포탄이 300발 밖에 없었으니 홍콩 파견군에 챙겨줄 포탄이 없을 만도 했다.

영국과 함께 독일과 이탈리아에 선전포고를 한지 오래된 캐나다의 임전 태세가 엉망이었음을 알 수 있는 사례다. 

뒤늦게 캐나다 군의 차량과 장비를 싣고 오던 돈 호세함은 도중에 전쟁이 일어나자 홍콩까지 가지 못하고 마닐라로 대피했다가 그곳에서 일본기의 폭격을 받았다.

 

알프레드 콜린슨 대령이 지휘하는 홍콩의 해군력은 미약했다.

주력은 제1차 대전형 구축함 3척이었는데 1척은 수리 중이었으며 2척은 상부의 명령에 따라 12월 8일 저녁 9시 30분에 싱가포르로 탈출했다.

수리 중이던 구축함 트라시안의 승조원들은 보병으로 전투에 참가했다.

홍콩 남해안의 애버딘에는 제라드 호레이스 간디 소령이 지휘하는 제2어뢰정전대가 8척의 어뢰정을 보유하고 있었다.

양자강에서 사용하던 흘수가 낮은 하천포정 4척도 있었는데 1척은 일본이 침공해 왔을 때 수리 중이었다.

수리 중이던 하천포정 모스의 승조원들 또한 보병으로 전투에 참가했다.

이외에 무장초계정 12척, 기뢰부설함 2척, 급유함 1척이 있었으며 항공기로는 왈루스 비행정 3대가 있었다.

로버트 클레멘트 자일스 대령이 지휘하는 47명의 해병대가 해군공창과 태고 조선소의 건선거를 지켰는데 이들은 정박한 함정 타마를 숙소로 사용했다.

해군 병력은 중국계 300명을 포함하여 약 1,300명이었다.

 

(슈퍼마린 왈루스 비행정. 자세한 내용은 여기로, http://en.wikipedia.org/wiki/Supermarine_Walrus)

 

공군은 구룡반도의 카이탁 비행장에 전개한 빌데비스트 3대와 의용대의 연습기 5대가 전부로서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비커스 빌데비스트 뇌격기. http://en.wikipedia.org/wiki/Vickers_Vildebeest)

 

1941년 11월이 되면서 일본군의 움직임이 활발하다는 첩보가 들어오자 몰트비 소장은 정보장교에게 평가를 요구했다.

11월 29일에 정보장교는 몰트비 소장에게 광동성에 주둔 중인 일본제23군이 3개 사단과 1개 여단으로 이루어져 포병 1개 연대의 지원을 받는다고 말했다.

또한 제23군이 홍콩상륙에 필요한 주정을 충분히 가지고 있으나 특별한 움직임은 없다고 보고했다.

실제로 당시 제23군은 4개 사단과 1개 연대로 이루어져 있었으며 포병의 규모는 1개 연대보다 훨씬 컸다.

 

일본군의 전력에 대한 정보 평가는 엉터리였다.

정보 평가에 따르면 일본군은 야전을 싫어하며 진부한 방식과 계획에 사로잡혀 있었다.

일본군의 기관총은 숫자도 적고 영국군 기관총에 비하여 낙후되어 있었다.

비록 일본군이 중국에서는 잘 싸웠으나 그건 저항이 약해서였다.

일본의 항공력은 유럽보다 열등했고 폭격실력은 형편없었으며 야간비행은 불가능했다.

 

홍콩에 배치된 캐나다군은 영국군에게 보낸 보고서에서 대적하고 있는 일본군은 숫자가 5,000 명에 불과하고 경무장이며 포병 지원도 없다고 적었다.

또한 일본 항공기는 낙후되고 조종사들이 근시라서 급강하폭격이 불가능하다고 주장했다.

 

이런 분위기에서 홍콩의 군인이나 민간인들이 적어도 홍콩 섬은 난공불락이라고 믿는 것도 당연했다.

물론 일부는 진실을 알고 있었지만 입을 놀려 사기를 떨어뜨리느니 입을 다물었다.

 

몰트비 소장은 11월 말에서 12월 초에 걸쳐 일본군의 침공에 대비하여 몇 가지 조치를 취했다. 

야간에는 항구가 폐쇄되었으며 홍콩으로 오던 배들은 싱가포르로 갔다.

방어에 참가하지 않는 사람들은 홍콩을 떠나라고 권고하는 공지가 나붙었다.

당국은 주요 지점에 대한 경비를 강화하고 해안감시대를 조직했다.

 

12월 2일에는 캐나다 군과 의용대를 제외한 병력이 방어지역에 배치되었으며 잉어문 해협은 방책을 쳐서 봉쇄했다.

 

(방책. http://hnsa.org/doc/netsandbooms/index.htm#pg73)

 

몰트비 소장은 일본군의 의도를 잘못 짚고 있었다.

12월 4일에 그는 중국 남부의 일본군이 홍콩을 공격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고 평가했다.

그로부터 48시간 이내에 일본기들이 3번이나 홍콩 영공을 침범했는데 대응태세를 떠보려는 것이 틀림없었다.

침공 전날인 12월 7일, 심천강 북쪽에 일본군 2만명이 집결했다는 정보가 들어왔다.

이 정보는 정확했으나 몰트비 소장은 여전히 중국 남부의 일본군은 병력이 부족하며 홍콩을 침공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고 보았다.

 

낙관적인 전망과는 별도로 몰트비 소장은 만약의 사태에 대비했다.

12월 5일에 의용대는 최종적으로 방어진지로 들어갔으며 홍콩 섬의 대공포대는 6일 밤부터 비상대기태세에 들어갔다.

구룡반도에 배치된 포병대는 7일 오전 7시까지 방열을 마쳤으며 의용대 1개 중대가 카이탁 비행장에 파견되어 일본군의 강행착륙에 대비했다.

7일 오후 5시까지 캐나다군이 방어진지에 포진을 마쳤다.

 

빅토리아 항에 있던 상선들 중 26척이 7일 오후 5시까지 싱가포르로 떠났고 이후 12시간 동안 8척이 뒤따랐다.

홍콩에서 남남서 방향으로 50km 떨어진 갭 락 등대는 7일 밤부터 소등했으며 해군은 홍콩 부근 해상을 기뢰원과 방책으로 둘러쌌다.

 

(홍콩 주변 기뢰 및 방책 설치 상황. http://indicatorloops.com/hongkong.htm)

 

빅토리아 시티의 상황은 7일에도 평소와 같았다.

구룡과 홍콩 섬 사이를 연락선이 부지런히 다녔으며 신문은 루스벨트 대통령이 일본 천황에게 평화를 요구하는 전문을 보냈다는 사실을 머릿기사로 다루었다.

7일 저녁이 되자 극장에서 수비대 병력은 근무지로 귀대하라는 공지가 나왔으나 민간인들은 바로 몇 시간 후 공격이 개시될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한 채 잠자리에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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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방어준비(1) - 계획

 

1937년에 중일전쟁이 발발하고 이듬해인 38년 5월에 일본군이 홍콩에서 북동쪽으로 480km 정도 떨어진 아모이(Amoi)에 상륙하자 7월에 영국참모본부는 홍콩방어에 대한 기본계획을 수립했다.

참모본부는 홍콩의 무장 해제는 거부했다.

피를 흘리지 않고 넘겨주면 전쟁이 끝나고 돌아오기 어려웠으므로 함락되더라도 최후까지 전투를 벌이는 것이 중요했다.

 

참모본부는 홍콩의 군사적 가치에는 환상을 갖지 않았다.

일본과 전쟁이 벌어지면 홍콩은 공습과 포격을 받아 함대 기지로는 물론 잠수함 기지로도 사용할 수 없을 것이었다.

참모본부가 생각한 방안은 일본군이 빅토리아 항을 사용하지 못하게 하면서 구원을 기다리는 것이었다.

이를 위하여 구룡 북쪽의 산악 지대에 방어선을 만들기로 하여 참호를 파고 벙커를 건설했으며 홍콩 섬에는 4달치 식량을 비축했다.

 

1938년 10월에 일본군이 광동성을 장악하면서 홍콩과 국민당 정부 간의 육상 교통로가 끊어졌으며 홍콩 수비대는 심천강을 경계로 일본군과 마주보게 되었다. 

이듬해인 39년 2월에 일본군이 남쪽의 해남도에 상륙하면서 홍콩은 고립되었다.

 

1939년 9월에는 독일이 폴란드를 침공하면서 유럽에서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했다.

이듬해인 40년 5월에는 독일이 프랑스를 침공했으며 영국은 육군의 주력을 파견했다가 패배했다.

 

이런 상황에서 영국참모본부는 1940년 8월에 전 세계에 걸쳐 정세를 검토하면서 중국 북부에 주둔 중이던 소규모의 영국군 수비대를 철수시키기로 결정했다.

참모본부는 이때 윈스턴 처칠 수상의 뜻에 따라 홍콩을 일본과 전쟁시 최대한 오래 유지해야 하지만 반드시 지켜야 할 대상은 아닌 전초기지(outpost)로 규정했다. 

프랑스 전투에 참가했다가 패하여 던커크에서 육군의 장비를 몽땅 잃고 병력만 겨우 빼낸 영국은 독일의 침공 위협 아래 처절한 공습을 받고 있었으며 북아프리카에서는 숫적으로 우세한 이탈리아 군의 압박을 받고 있었다.

처칠 수상은 이런 상황에서 일본과 전쟁이 일어나면 홍콩을 지킬 수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이후 참모본부는 홍콩에 대한 증원 요구는 무시했다.

지키기로 마음먹은 말레이로 보낼 병력과 장비도 모자라는데 버리기로 마음먹은 홍콩에 보낼 수는 없었다.

 

홍콩 방어를 책임지고 있던 중국사령관(GOC China, General Officer Commanding China) 아서 에드워드 그라셋 소장은 이런 여건에서 방어계획을 짰다.

휘하에 영국군 2개 대대, 인도군 2개 대대, 합계 4개 대대의 정규군을 가지고 있던 그라셋 장군은 1개 대대를 구룡반도에 배치하고 3개 대대를 홍콩 섬에 배치했다.

 

38년의 계획에 따르면 구룡반도 북쪽의 방어선에서 일본군을 막기로 되어 있었으나 홍콩이 전초기지로 규정되면서 병력 증원은 기대하기 어려웠다.

따라서 구룡반도에 배치된 대대의 임무는 방어선에 의지하여 일본군을 막는 것이 아니라 폭파반이 구룡반도의 항구 시설을 파괴하는 동안 일본군의 접근을 막는 것으로 바뀌었다.

계획에 따르면 폭파는 개전 이후 48시간 내에 완료하게 되어 있었으며 이후 구룡반도에 배치된 대대는 홍콩 섬으로 철수할 것이었다.

 

1941년 7월 20일에 그라셋 소장은 크리스토퍼 마이클 몰트비 소장에게 중국사령관 자리를 넘겨주고 홍콩을 떠났다.

그라셋 소장은 귀국하는 길에 캐나다에 들러 1달 가량 체류하면서 캐나다의 참모총장을 만났다.

캐나다 출신인 그라셋 소장은 친구인 참모총장에게 4개 대대, 아쉬운대로 2개 대대만 홍콩에 보내주면 방어에 큰 도움이 될 거라고 말하여 동의를 받았다.

 

1941년 9월 6일에 영국에 도착한 그라셋 소장은 영국참모본부에 캐나다가 홍콩 방어를 위하여 최소한 2개 대대, 최대 4개 대대를 내놓을 의향이 있다고 말했고 참모본부는 처칠 수상에게 보고했다.

수상이야 캐나다가 병력을 제공하겠다는데 마다할 까닭이 없었다.

 

영국 정부는 1941년 9월 19일에 정식으로 캐나다군 2개 대대를 홍콩에 파견할 것을 요청했는데 이때 홍콩을 전초기지로 규정한 1940년의 정책이 바뀐 것이 아니라는 점을 분명히 했다.

이는 말레이 주둔군의 불만과 의혹을 없애기 위한 것이었다.

1941년 11월 16일에 존 로슨 준장이 지휘하는 캐나다군 2개 대대, 1,975명이 홍콩에 도착했다.

 

휘하에 정규군 2개 대대가 새로 생기자 몰트비 소장은 방어계획을 수정하여 구룡반도에 1개 대대가 아니라 3개 대대를 배치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라셋 장군의 계획에 따르면 구룡반도의 영국군은 폭파 작업이 마무리될 때까지 48시간 동안 지연작전을 펼친 후 홍콩 섬으로 철수하게 되어 있었다.

따라서 교전은 가급적 피하게 되어 있었으며 야포의 지원도 없었다. 

 

그러나 몰트비 소장은 38년의 계획에 따라 벙커와 참호가 건설되어 있던 구룡 북쪽의 방어선에서 일본군을 막기로 결정했다.

그는 구룡 북쪽의 방어선에 진 드링커스 선이라는 이름을 붙이고 3개 대대를 투입하여 야포의 지원 하에 최대한 오래 버티기로 마음먹었다.

 

진 드링커스 선은 구룡반도 서해안의 진 드링커스 만에서 시작하여 성문 저수지와 타이드 코브의 남쪽을 통과하여 동해안으로 이어졌다. 

일부 지역에 참호와 벙커가 건설되어 있었지만 전반적으로 보아 소수 병력으로 지키기 어려운 지형이었다.

극동영국군총사령관 로버트 프룩포팸 공군대장은 진 드링커스 선을 제대로 지키려면 2개 사단이 필요하다고 말했으나 몰트비 소장은 야포의 지원을 받는 3개 대대로 오래 지킬 수 있다고 보았다.

진 드링커스 선이 최종 방어선은 아니었으며 이곳을 지키던 3개 대대는 구룡의 폭파 작업이 끝나고 철수명령이 떨어지면 구룡반도에 파견되었던 포병대와 함께 홍콩 섬으로 철수할 것이었다.

 

(진 드링커스 선. http://en.wikipedia.org/wiki/Gin_Drinkers_Line)

 

홍콩 섬에는 상륙에 적합한 지점이 많아 해안선을 모두 지켜야 했기 때문에 구룡반도에 파견되었던 부대도 철수하여 홍콩 섬 방어에 투입되어야 했다.

진 드링커스 선을 지키던 인도 대대 2개가 홍콩 섬의 북해안을 지키고 11월에 증원된 캐나다 대대 2개가 나머지 해안선을 지키며 진 드링커스 선에 파견되었던 영국대대 1개가 예비대 역할을 할 것이었다.

기관총을 많이 보유한 영국대대 1개는 해안선에 흩어진 특화점에 골고루 배치되어 현지 지휘관의 명령을 받을 것이었다.

 

(홍콩 섬의 방어태세. http://www.ibiblio.org/hyperwar/UN/Canada/CA/SixYears/SixYears-14.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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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홍콩

 

홍콩(香港)은 중국 남동부 광동성 남쪽에 있는 특별행정구로 오늘날 정식명칭은 중화인민공화국홍콩특별행정구(中華人民共和國香港特別行政區)이며 홍콩 섬, 구룡(九龍), 신계(新界), 그리고 230개의 부속 도서로 이루어져 있다.

 

홍콩에 사람이 살기 시작한 것은 구석기 시대로 거슬러 올라가며 진시황 때 중국에 합병되었다.

당나라와 송나라 시절에는 무역항과 해군기지가 있었으나 이후 한적한 어촌이 되어 역사에서 사라졌다.

19세기 초에 영국의 동인도회사가 광동성에 진출하면서 영국인들이 항구로서 천혜의 조건을 가진 홍콩을 주목했다.

 

1841년에 제1차 아편전쟁이 터지자 영국군이 홍콩 섬을 점령하고 이듬해 남경조약으로 청나라로부터 양도받았다.

영국은 1860년에 벌어진 제2차 아편전쟁의 결과 북경조약에서 좁은 바다를 건너 홍콩 섬을 마주보는 본토의 구룡을 양도받았고 1898년에는 구룡 북쪽의 신계를 99년간 조차했다.

홍콩 섬의 면적은 약 79㎢, 구룡은 약 47㎢, 그리고 신계는 약 952㎢이다.

 

(홍콩의 식민지화 과정. http://en.wikipedia.org/wiki/History_of_Hong_Kong_(1800s%E2%80%931930s)

 

영국은 항구로서 천혜의 입지 조건을 가진 홍콩 섬과 구룡 반도 사이의 바다를 세계적인 무역항으로 개발함으로써 홍콩을 중국 남부와 세계를 연결하는 중요한 물류 센터로 만들었다.

이후 홍콩은 발전을 거듭하여 1870년대부터는 아시아의 영국 식민지 중에서 가장 발달한 곳이 되었다.

1910년에는 구룡과 광동을 잇는 철도가 개통했으며 1941년 말에 일본의 침공을 받을 때까지 홍콩은 번영을 누렸다.

 

홍콩 섬의 지형은 여러 개의 언덕으로 이루져 있으며 가장 높은 곳은 빅토리아 피크로서 해발 552m 이다.

빅토리아 피크는 그냥 피크 또는 오스틴 산으로도 부르며 중국어로는 태평산이라고 부른다.

구룡 반도와 가장 가까운 곳은 섬의 북동쪽인 잉어문(鯉魚門)으로 해협의 폭이 400m 정도이다.

홍콩 섬의 부두 시설은 코즈웨이 만으로부터 벨처 만에 이르는 북해안을 따라 8 km 에 걸쳐 뻗어 있다.

1930년대에 중심지인 빅토리아 시티에는 성당, 대학을 비롯하여 관공서와 은행 및 회사 소유의 고층 빌딩들이 즐비했다.

 

(1940년 빅토리아 시티의 모습. http://commons.wikimedia.org/wiki/File:Central1940.jpg)

 

홍콩 섬의 해안선에는 여러 개의 만이 있어 들쭉날쭉했으며 북해안과 구룡반도 사이의 좁은 바다는 천혜의 정박지였다.

영국인들은 이 바다에 빅토리아 항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해안을 따라서는 훌륭한 자동차 도로가 나 있었으며 스탠리 반도, 다귈라 곶, 그리고 빅 웨이브 만까지 지선이 연결되어 있었다.

섬의 북쪽에서 남쪽으로 관통하는 황니천(黃泥川) 계곡을 따라 자동차 도로가 있었다.

이런 도로에서 뻗어나가는 지선 도로들은 차량 통행이 불가능했다.

 

홍콩 섬을 마주보는 구룡에는 부두, 건선거 및 관련 시설들이 있어 항구의 일부를 이루고 있었다.

구룡에서 북쪽으로 27km 올라가면 심천강(深圳江)이 나오고 그 너머는 중국 광동성의 심천시였다.

심천강에서 구룡 사이가 신계였다.

신계의 중앙에는 홍콩에서 가장 높은 해발 957m 의 대모산(大帽山)을 중심으로 한 산괴가 펼쳐져 있었는데 이곳에서 구룡까지는 훌륭한 도로가 이어져 있었다.

 

(홍콩. http://en.wikipedia.org/wiki/Geography_of_Hong_Kong)

 

늪지대와 심천강 남서쪽의 농경지를 제외하면 신계는 대부분 경사가 급한 언덕이 산재한 지형이었다.

이러한 언덕들의 낮은 부분은 소나무나 대나무로 덮여 있었으며 정상 부근은 관목이나 키가 큰 풀들로 덮여 있었다.

구룡에는 광동에서 연결된 철도가 있었는데 이 철도는 표준궤도에 단선이었으며 신계 지역에서 여러 개의 굴과 절삭지를 지나고 다리를 건너 심천으로 이어져 있었다.

신계의 남쪽인 골든 힐과 스머글러 능선에서는 북쪽으로부터 쳐들어오는 적을 감제할수 있었으나 만일 대모산과 니들 힐을 점령하면 이들 요지를 제압할 수 있었다.

구룡만의 남동쪽에는 해발 222m의 데빌스 피크가 있었는데 여기서는 레이어먼과 홍콩 섬의 북동쪽을 감제할 수 있었다.

 

홍콩 섬의 북동쪽에는 건선거를 갖춘 해군공창과 태고(太古) 조선소가 있었으며 바다 건너편에는 민간 조선소가 있었다.

1941년까지 홍콩에는 전함이 들어갈만한 건선거는 없었다.

 

주민들은 대부분 중국계로 1935년의 통계에 따르면 홍콩 주민 966,341명 중에서 중국계가 아닌 사람은 21,370명에 불과했다.

홍콩의 중국계는 대부분 홍콩에서 태어나 영국국적을 가지고 있었으나 1937년에 중일전쟁이 발발하자 많은 중국인 피난민들이 들어왔다.

1941년 12월 현재 홍콩 섬의 인구는 약 80만 명으로 대부분 빅토리아 시티에 거주했다.

해안에 띄워놓은 배에 살고 있던 사람들이 약15만 4,000명이었으며 신계에는 약 77만 5,000명이 있었다.

따라서 일본군이 쳐들어 왔을 때  홍콩에는 수비대를 제외하고 170만 명이 넘는 사람들이 몰려 있었다.

 

기후는 여름에는 아열대 기후였으나 겨울에는 최저 기온이 섭씨 15도 아래로 내려갔으며 심할 때는 5도 밑으로까지 떨어졌는데 항상 습기가 많아서 더울 때는 더 덥고 추울 때는 더 춥게 느껴졌다.

강수량은 1년에 2,400mm 로서 많았지만 계절에 따라 들쭉날쭉했다.

따라서 겨울에는 홍콩 섬에서 사용하는 물의 절반 가량을 구룡반도로부터 공급받았고, 나머지 절반은 지표수를 모으는 저수지로부터 송수관을 통해 빅토리아 시티로 공급했다.

이러한 급수 시스템은 방어에서 커다란 약점이었으며 실제로 일본군이 홍콩 섬에 상륙하여 급수 시스템을 장악한 것이 항복의 한 요인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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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9. 제3차 공습

 

진주만 기습을 둘러싼 오래된 신화의 하나가 일본군이 제3차 공습을 실시하여 진주만의 해군기지 자체를 타격하지 않은 것이 큰 실수라는 주장이다.

일부는 기지타격이 함정공격보다 더 큰 효과를 가져와 태평양함대를 미본토로 물러나게 만들고 전쟁을 상당히 연장했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결론부터 말하면 아무리 진주만 기습이 전략적으로 실익이 없었고 결국에는 일본에게 엄청난 재앙이 되었다지만 제3차 공습을 실시하지 않았다고 일본을 비난할 수는 없다.

 

먼저 알아두어야 할 것은 제3차 공습을 실시할 시간 여유가 없었다는 점이다.

제2차 공격대의 마지막 함재기가 착함한 시간은 12월 7일 오후 12시 15분이었는데 그날 하와이 근해의 일몰 시간은 오후 5시 12분이었다.

사전 계획이 없는 상태에서 각 항공모함에 연락하여 제3차 공격에 가용한 기체 수를 확인하고, 거기에 맞추어 목표를 결정하여 할당하고, 제3차 공습에 대한 사전 준비나 학습이 전혀 되어 있지 않던 조종사들에게 브리핑을 하여 임무를 숙지시키고, 함재기에 재급유하고 재무장시킨 다음 예열하고 발진시켜 제3차 공습을 실시하고 일몰 전에 귀함시킨다는 것은 시간적으로 불가능했다.

 

제1항공함대의 항공참모인 겐다 미노루 중좌도 이 사실을 알고 있었다.

겐다 중좌도 철수에 반대했지만 제3차 공습을 요구한 것은 아니었다.

놓쳐버린 미국 항공모함에 집착하던 그는 하와이 북방에 며칠이고 머무르면서 미국 항공모함을 끌어들여 격멸하자고 주장했다.

물론 제1항공함대 사령장관 나구모 주이치 중장은 이 주장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제1항공함대의 항공참모 겐다 미노루 중좌. 자세한 내용은 여기로)

 

나구모 중장의 기함인 아카기 함상에서 후치다 미츠오 중좌와 나구모 중장 사이에 제3차 공습을 둘러싼 치열한 논쟁이 있었다는 이야기는 후치다가 1963년에 미국의 역사학자 고든 프렌지와의 인터뷰에서 진술한 일방적인 주장일 뿐이다.

그날 아카기 함상에 있었던 사람들 모두 그러한 논쟁이 있었다는 사실을 부정했으며 후치다 자신도 종전 직후 미군에게 심문받을 때는 그러한 논쟁이 있었다는 말을 하지 않았다.

 

(후치다 미츠오 중좌. 자세한 내용은 여기로)

 

당시 조종사들 사이에 제3차 공습을 하자는 주장이 있었던 것은 사실이나 여러 사정을 알고 있는 좌관급의 선임 조종사들은 대체로 옳고 그름을 떠나 제3차 공습이 시간적으로 불가능하다고 생각했다.

하물며 공격대 전체를 지휘했던 후치다 중좌가 이런 명백한 사실을 모르거나 무시하고 나구모 중장에게 제3차 공습을 요구하면서 논쟁을 벌였을 가능성은 희박하다.

 

설사 시간적으로 제3차 공습이 가능했다고 쳐도 나구모 중장이 받아들일 이유가 없었다.

일본군은 하와이의 미군 항공력을 실제보다 훨씬 강하다고 믿고 있었으며 공격대가 미군 항공력에 큰 피해를 입혔음에도 불구하고 충분히 반격을 가할 능력이 있다고 보았다.

공습을 피한 미국 항공모함의 위치는 여전히 오리무중이었으며  미국 잠수함 또한 눈에 불을 켜고 일본함대를 찾고 있을 것이었다.

이미 충분한 전과를 올린 나구모 중장이 커다란 위험을 무릅쓰고 일몰 때까지 하와이 근해에 머물면서 제3차 공습을 실시할 까닭이 없었다.

 

(제1항공함대 사령장관 나구모 주이치 중장. 자세한 내용은 여기로)

 

제3차 공습을 실시하기에는 함정들의 연료도 부족했다.

미국 항공모함 격멸에 집착하던 겐다 중좌는 급유대를 남하시켜 해상급유를 받으면서 미국항모들을 기다리자고 말해 나구모 중장을 경악하게 만들었다.

 

제3차 공습에 나설 전력 자체도 강력하지 못했다.

후치다 자신의 주장에 따르면 그는 미군의 치열한 반격이 예상되는 제3차 공습에는 움직임이 둔한 함상공격기는 빼고 제로기의 호위 하에 급강하폭격기만 투입할 생각이었다.

편제상 제1항공함대는 총 144대의 급강하폭격기를 보유하고 있었으며 공습에 실제로 참가한 것은 130대였다.

이들 중 15대가 격추되고 58대가 피해를 입었다.

따라서 단순 계산으로 제3차 공습에 참가할 수 있는 급강하 폭격기는 71대이며 일부가 급히 수리를 마치고 참가한다고 해도 제3차 공습에 참가하는 급강하폭격기의 숫자는 제2차 공습에 참가했던 79대를 넘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준비를 갖춘 미군은 제3차 공격대가 접근하면 레이더로 탐지한 다음 아직 50대가 넘는 가용 전투기들을 모두 띄워 요격했을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제3차 공격대가 충분한 전과를 올릴 것으로 믿기는 어렵다.

 

해군공창같은 지상기지는 폭장량이 적은 함재기의 공습으로 큰 피해를 입히기 어렵다.

일본은 미드웨이 해전에서 36대의 급강하폭격기와 36대의 수평폭격기를 동원하여 손바닥만한 미드웨이를 폭격하면서 이렇다 할 피해를 입히지 못했으며 하나뿐인 활주로의 기능을 정지시키는 데도 실패했다.

해군공창같은 거대한 지상목표는 폭장량이 많은 4발 중폭격기를 대량으로 동원하여 반복적으로 폭격해야 제대로 피해를 입힐 수 있다.

 

제3차 공습의 목표로 가장 많이 거론되는 것이 진주만의 중유 저장소이다.

당시 진주만에는 27개씩 두 곳, 합계 54개의 탱크에 중유를 저장하고 있었다.

 

휘발유나 천연가스와 달리 중유는 탱크 1개가 파괴된다고 순식간에 주변의 모든 탱크가 유폭을 일으키지 않는다.

중유는 끓는점이 350도에 달하는 불이 붙기 어려운 물질이며 실제로 전함 중에서는 어뢰를 막는 수선하 방뢰구역에 중유를 채우는 경우도 있다.

따라서 급강하폭격기들은 중유 탱크마다 일일이 폭탄을 명중시켜야 했다.

 

제2차 공격대의 명중율을 생각해보면 제3차 공습에 투입된 급강하폭격기를 모두 중유 저장소 폭격에 투입해도 미군기의 요격과 지상의 대공포화를 뚫고 중유 탱크 54개를 모두 명중시킬 것이라고 장담하기는 어렵다.

저장된 중유의 절반만 건져도 태평양함대는 어떻게든 진주만에 머물 수 있었을 것이다.

 

(진주만의 중유 저장소. http://karbuz.blogspot.kr/2006/10/oil-logistics-lesson-from-wwii-2.html)

 

만일 급강하폭격기들이 놀라운 명중율을 과시하여 중유를 모두 불태워버리면 아시아함대 사령관 토머스 하트 대장의 지적처럼 태평양함대는 일시적으로 미본토 서해안으로 물러나야만 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럴 경우라도 이들이 진주만으로 돌아가는데는 그리 긴 시간이 필요치 않았다.

 

기습 당시 진주만에는 많은 중유가 저장되어 있지 않았다.

진주만의 중유 저장량은 56만 3천톤으로 부피로 환산하면 350만 배럴 정도였다.

 

진주만 기습 당시 태평양함대 기지사령관이었던 윌리엄 칼훈 소장의 증언에 따르면 진주만 기습 직후 9일 동안 함대에 75만 배럴, 즉 하루 평균 83,000 배럴을 급유했다고 한다.

이건 기름을 많이 퍼먹는 전함 8척이 움직이지 못하는 상태에서의 소비량이므로 전함들이 건재하면서 활발하게 훈련을 하던 진주만 기습 직전에는 중유 소비량이 더 많았으면 많았지 적지는 않았을 것임을 유추할 수 있다.

즉 기습 당시 진주만의 중유 저장량은 최대한으로 잡아도 40일치 남짓한 분량이었다.

 

원래 전방 기지의 중유 비축량은 그렇게 많지 않다.

진주만의 중유 비축량은 태평양전쟁 당시 최고로 올랐을 때에도 약 140만톤으로 880만 배럴 정도였다.

오키나와 전투 초기 중유를 가장 많이 쓰던 1945년 4월 4일부터 24일까지 3주일 동안 제58기동부대와 오키나와 침공함대가 평균적으로 하루에 약 22만 배럴을 소모했으니 진주만의 중유 저장량은 40일 치에 불과했다.

 

오키나와 침공 당시 태평양함대는 첫달에만 600만 배럴 이상의 중유가 필요할 것이라고 보았는데 발진기지인 울리시의 중유 저장량은 10만 배럴에 지나지 않았다.

사이판, 괌, 콰절린에 저장된 중유가 90만 배럴이었으며 진주만에 500만 배럴이 있었다.

오키나와 전투에서 태평양함대는 900만 배럴에 달하는 중유를 소모했는데 함정들은 대부분 민간 유조선이나 해군 소속의 급유함으로부터 직접 급유를 받았다.

 

함대가 울리시에 정박해 있을 때에는 진주만 또는 미본토에서 중유를 싣고 온 민간 유조선이 함정들에게 직접 급유했다.

작전이 시작되어 함대가 출동하면 미본토나 진주만에서 중유를 싣고 온 민간 유조선들은 울리시에서 해군 소속의 급유함에 중유를 옮겨 싣었고 해군 급유함들이 해상으로 나와 함대에 급유하러 다녔다.

태평양함대는 오키나와 전투 당시 함대에 급유하는 용도로 급유함 39척을 동원했다.

 

울리시까지 중유 수송을 맡았던 민간 유조선은 대부분 T2-SE-A1 급으로 전쟁 기간 중 무려 481척이 건조되었으며 약 12만 배럴의 중유를 수송할 수 있었는데 해군의 급유함들 또한 용량이 비슷했으므로 1:1로 중유를 주고 받을 수 있었다.

미국 해사국은 전쟁 기간 중 705척의 유조선을 건조했는데 이들 중에는 리버티선을 개조한 유조선 62척도 있었다.

리버티형 유조선은 약 64,000 배럴의 중유를 수송할 수 있었다.

 

진주만 기습 당시 진주만의 중유 저장량이 적었다는 것 이외에도 또하나 생각할 점은 미국이 그 정도 양은 금방 채울 능력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이다.

기습 이전의 몇 달 동안 태평양함대는 활발하게 훈련을 하면서 하루에 최소한 83,000 배럴, 1달에 250만 배럴 이상을 소모하고 있었지만 진주만의 중유 저장량은 줄어들지 않았다.

이 말은 유조선들이 미본토로부터 매달 250만 배럴 이상의 중유를 하와이로 수송하고 있었다는 뜻이다.

여기에 더하여 진주만 기습 당시 진주만의 중유를 꺼내 함대에 급유할 수 있는 급유함들의 용량이 76만 배럴이었다고 한다.

하와이와 미본토의 거리를 생각하면 급유함이 1달에 1번은 충분히 왕복할 수 있다.

 

즉 진주만 기습 당시 미국은 매달 최소한 300만 배럴 이상의 중유를 미본토에서 하와이로 수송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었으며 진주만의 중유가 홀랑 타버린다고 해도 넉넉잡고 2달이면 원래 있던 350만 배럴보다 훨씬 많은 양을 보충할 수 있었다.

만일 미본토 서해안의 유조선을 약간만 추가로 동원하면 1달 이내에 보충하는 것이 가능했다.

따라서 제3차 공격대가 진주만의 중유를 홀랑 태워버린다고 해도 미본토 서해안으로 물러났던 태평양함대는 1942년 1월 이후에는 언제든지 진주만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이렇듯 제3차 공습은 시간적으로 불가능했으며 설사 가능했다고 치더라도 예상되는 공격대의 피해에 비하여 별다른 효과를 기대할 수 없었다.

 

- 참고 문헌 및 웹사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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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t Dawn We Slept :: The Untold Story of Pearl Harbor> Gordon W. Prange, McGraw Hill, 19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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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ora!Tora!Tora! Pearl harbor 1941>,Mark Stille, Osprey Publishig, 2011

<Pearl Harbor, FDR Leads the Nation into War> Steven Gillon, Basic Books,2011

<Why Air Forces Fail> Robin Higham & Stephen Harris, The University Press of Kentucky, 2006

<Pearl Harbor, wy, How Fleet Salvageand final Appraisal>Homer Wallin, Naval History Division, 1968

<Battleship Arizona> Paul Stillwell, Naval Institute Press, 1991

 

<휴맨카인즈 승리와 패배- 2. 펄 하버>A.J. Barker 지음, 이창록,박대련 옮김, 동도문화사, 1982년

<타임라이프북스 - 회오리치는 일장기> 한국일보-타임라이프사, 1981년

<제2차세계대전해전사> 이정수. 남영문화사, 1981년

<니미츠 전기> E.B 포터 지음, 김주식 역, 신서원, 1997년

<연합함대 그 출범에서 침몰까지> 박재석, 남창훈 지음, 가람기획, 2005년

<대동아전쟁비사-제1권 태평양편> 한국출판사, 1971년

<대동아전사-제6권 태평양전쟁> 오바다 마츠시로 지음, 유준수 옮김, 한양문화사, 1974년

<실록대하소설 태평양전쟁 1 - 진주만 기습과 미드웨이 해전> 이호원 지음, 한림출판사, 1975년

 

http://www.wikipedia.org/

http://blog.naver.com/mirejet (도위창님 블로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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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 의의

 

진주만 기습은 전술 및 작전술적 수준에서 보았을 때 해전사에 길이 남을만한 성공적인 대규모 기습이었다.

일본연합함대 사령장관 야마모토 이소로쿠 대장은 여러 척의 항공모함으로부터 발진한 다수의 함재기를 집중 운용하여 전력을 극대화한다는 새로운 개념으로 대담한 기습을 구상하고 계획을 수립한 후 기밀을 유지하면서 현실화시켰다. 

일본함대는 5,600km 에 달하는 북태평양 항로를 들키지 않고 항해하는데 성공했으며 중유를 채운 드럼통을 항공모함 내부에 싣는 창의성을 발휘하여 짧은 항속거리를 극복했다.

일본군은 진주만의 얕은 수심을 극복하기 위하여 어뢰를 개량했으며 조종사들, 특히 뇌격기 조종사들은 맹훈련을 통하여 지형상의 어려움을 극복하고 실전에서 뛰어난 명중율을 보였다.  

 

(진주만 공격부대의 항로. http://en.wikipedia.org/wiki/Attack_on_Pearl_Harbor)

 

일본함대는 어려움을 뚫고 공습 가능 거리까지 몰래 접근하여 결정적인 일격을 가했다.

공격대는 기습에 성공하여 가벼운 피해만 입으면서 미태평양함대의 주력을 단번에 무력화시켰다.

진주만 기습이 성공하면서 일본군은 측면의 위협을 걱정하지 않고 남방작전에 전념할 수 있었으며 예정보다 훨씬 빠른 3개월 만에 제1단계를 마무리지었다. 

 

하지만 진주만 기습을 전략적 수준에서 바라보면 다른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

야마모토 제독은 남방작전의 측면 위협을 제거하기 위하여 진주만 기습을 단행했다.

그러나 사실 태평양함대는 진주만 기습이 없었더라도 남방작전을 방해할 수 없었다.

 

미군의 오렌지 계획에 따르면 일본과 전쟁이 벌어질 경우 태평양함대는 즉시 출격하여 마셜제도를 공격하게 되어 있었다.

그러나 1941년 5월에 태평양함대 세력의 상당 부분이 대서양으로 빠져 나가자 태평양함대는 약화된 상태로 연합함대와 정면대결을 할 수 없다고 판단하여 계획을 수정했다.

전쟁 발발시 마셜제도를 공격한다는 점은 그대로지만 즉시 출격하지 않고 대서양에서 증원 함대가 도착하기를 기다려 함께 출격한다는 것이었다.

수정된 계획에 따르면 마셜 제도 공격은 아무리 빨라도 개전 이후 3개월이 지나서야 실시하게 되어 있었는데 일본은 3개월 만에 남방작전의 제1단계를 마무리지었다.

 

실제로 진주만 기습이 성공한 데에는 이러한 사실이 영향을 끼쳤다.

태평양함대가 연합함대에 정면으로 도전할 수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던 미군 지휘관들은 일본이 위험을 무릅쓰고 진주만까지 찾아와서 허약한 함대를 공격할 것이라고 생각하지 못했다. 

 

일본은 진주만 기습을 통하여 해전의 패러다임을 바꾸었다.

전함은 함대 주력의 지위에서 물러나고 항공모함이 그 자리를 물려받았다.

해전의 패러다임을 바꿈으로써 일본은 스스로 진주만 기습의 의미를 퇴색시켰다.

 

집중운용되는 함재기의 무시무시한 위력을 겪어본 미해군은 진주만의 연기가 채 걷히기도 전에 전함 중심 교리를 미련없이 버리고 항공모함 중심 교리로 갈아탔다.

항공모함은 피해를 면한데 비해 전함은 쓰고 싶어도 쓸 수가 없었기 때문에 교리의 급격한 전환이 별다른 저항없이 하루아침에 이루어졌다.

그리하여 1941년 12월 7일 아침까지만 해도 함대의 꽃이자 주력이었던 전함들, 특히 속력이 느린 구형전함들은 순식간에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인 2선급 전력으로 추락했다.

 

실제로 1942년 6월 초의 미드웨이 해전 당시 태평양함대는 최대 7척(메릴랜드, 테네시, 펜실베이니아, 콜로라도, 뉴멕시코, 미시시피, 아이다호)의 구형전함을 동원할 수 있었다.

그러나 태평양함대 총사령관 체스터 니미츠 대장은 항공모함 기동부대에 구형전함을 포함시키라는 미함대총사령관 어네스트 킹 대장의 권고를 무시하고 순양함과 구축함의 호위를 받는 항공모함 기동부대로 미드웨이 해전을 치렀다.

속력이 느리고 어뢰에 취약한 구형전함은 항공모함 기동부대에 없는 것이 낫다고 본 것이었다.

구형전함은 1943년 이후 상륙작전시 함포사격을 담당하는 새로운 역할을 찾았지만 함대의 주력이라는 옛 영광을 되찾지는 못했다.

 

미해군의 항공모함 중심 교리는 철저하여 항모기동부대와 같이 행동할 수 있는 고속전함도 찬밥신세를 면하지 못했다.

태평양 함대가 사보섬 해전에서 중순양함을 4척이나 상실하자 킹 제독은 대신 고속전함들을 보내 주었다.

그러나 니미츠 제독은 고마워하기는 커녕 가뜩이나 급유함이 모자라는데 고속전함이 중순양함보다 기름을 많이 퍼먹는다고 타박했다.

 

진주만 기습에서 살아남은 태평양함대의 항공모함은 1942년 초에 중부 태평양의 일본군 기지를 공격했고 4월에는 도쿄를 공습하여 일본인에게 진주만 기습에 버금가는 충격을 안겨 주었다.

1942년 5월 초에는 산호해 해전에서 개전 이후 최초로 일본군의 전진을 막아내었으며 6월 4일에는 미드웨이 해전에서 일본의 주력 항공모함 4척을 격침하여 연합함대에게 치명타를 먹였다.

 

항구에서 공격을 받았기 때문에 숙련된 승조원이 대부분 살아남았다.

진주만 기습으로 미해군은 3,000 명 가까운 사상자를 기록했지만 그나마 다행이었다.

미함대가 마셜 제도로 출격하여 일본함대와 해상결전을 벌였다면 당시 전력 차로 보아 진주만 기습보다 훨씬 큰 피해를 입었을 것이다.

니미츠 제독은 진주만 기습 당시 일본함대의 접근을 알고 태평양함대가 진주만을 떠나 해전을 벌였으면 대부분의 함정이 침몰하고 사상자가 20,000 명에 달했을 것이라고 추산했다.

다행히 항구에서 공격당했기 때문에 숙련된 승조원이 대부분 살아남아 이후 무섭게 팽창하는 미함대의 기간 요원이 되었다.

진주만에서 숙련된 승조원이 대부분 살아남았음에도 급팽창한 미함대는 1943년 후반기부터 승조원의 미숙함 때문에 고생했다.

만일 전쟁 초기에 태평양함대의 숙련된 승조원 20,000명을 상실했다면 어려움은 훨씬 컸을 것이다.

 

진주만 기습 당시 태평양 함대의 가장 큰 관심사는 승조원의 훈련이었다.

이는 함대의 전투력 증강에도 직결되지만 앞으로 급팽창할 미함대의 기간 요원을 육성한다는 의미가 컸다. 

따라서 당시 태평양함대는 승조원의 훈련에 가장 높은 우선 순위를 두고 있었으며 정박 중인 함대의 안전 확보나 초계 등은 우선 순위가 떨어졌다.

카탈리나 정찰비행정도 훈련을 위하여 초계 비행을 늘리지 않은 면이 있으며 이는 진주만 기습의 성공에 중요한 요인이 되었다.

해상결전 대신 항구에서 공격을 당함으로써 태평양함대는 그렇게 애지중지하던 승조원을 대부분 구할 수 있었다.

 

격침된 전함 4척 또한 항구에서 격침된 관계로 2척은 인양하여 재취역할 수 있었으나 승조원에 비하면 부차적인 이익이었다.

미국은 태평양전쟁 기간 동안 정규항공모함 17척, 경항공모함 9척, 호위항공모함 76척, 고속전함 8척, 중순양함 12척, 경순양함 33척, 구축함 347척, 호위구축함 417척, 잠수함 205척을 취역시켰다.

이런 엄청난 전력증가에 2선급 전력인 구형전함 2척이 추가되었다고 한들 큰 의미는 없었다. 

 

항공기 또한 마찬가지로 전쟁 중 30만대가 넘는 군용 항공기를 생산한 미국에게 200대가 채 되지 않는 항공기의 손실은 큰 타격이 아니었다.

실제로 미군은 진주만 기습 직후 하와이에 항공기들을 대거 파견했다.

따라서 하와이의 항공기 숫자는 진주만 기습이 있은지 2주일 만에 기습 이전의 수준에 도달했고 이후 증강되었다.

전략적으로 보아 진주만 기습은 일본에게 별다른 군사적 이익을 안겨주지 못했다.

 

국가 대전략의 견지에서 보면 진주만 기습은 일본에게 엄청난 재앙이었다.

진주만 기습으로 격노한 미국인들은 하나로 똘똘 뭉쳐 전쟁에 임했으며 일본에게 무조건 항복을 받아낼 때까지 전열이 흐트러지지 않았다.

 

(진주만 기습 다음날 의회에서 연설 중인 루스벨트 대통령. http://en.wikipedia.org/wiki/Infamy_Speech)

 

일본이 미군을 공격하지 않고 영국과 네덜란드만 상대로 전쟁을 벌였어도 결국 미국이 참전했을 가능성이 높다.

하지만 그럴 경우 진주만 기습을 당했을 때처럼 거국적인 일치단결을 이루지 못했을 것이며 전쟁이 길어지면 피로감 또한 빨리 나타났을 것이다.

그랬다면 적당한 때에 협상으로 전쟁을 끝낼 수 있었을지 모르며 어떤 경우라도 실제 역사보다는 일본에게 좋은 결과로 끝났을 가능성이 많다.

그러나 진주만 기습 이후에는 일본에게 살아남을 기회가 없었다.

 

미국의 참전은 소련의 생존과 더불어 제2차 세계 대전의 승패를 결정한 사건이었다.

일본은 진주만을 기습함으로써 미국의 참전을 초래하여 제2차 세계대전의 승패를 결정지었다.

전쟁의 승패를 가르는 중요한 전투를 결전이라고 부른다면 진주만 기습이야말로 제2차 세계대전의 승패를 가른 결전이었다.

진주만 기습의 진정한 의의는 그것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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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7. 선전포고

 

1941년 12월 7일 오후 2시 25분, UP(Unired Press) 통신사는  방송국과 신문사에 다음과 같은 긴급 전문을 발신했다.

 

"워싱턴 - 백악관에서 일본이 진주만을 공격했다고 발표하다."

("Washington - White House announces Japanese have attacked Pearl Harbor.")

 

루스벨트 대통령이 프랭크 녹스 해군장관으로부터 진주만 기습을 알리는 전화를 받은지 37분 후, 백악관의 언론비서관 스티브 얼리가 3대 통신사에 진주만 기습을 알리는 대통령의 성명을 읽어주려고 동시 전화를 연결한 지 3분 후였다.

 

1분 후인 오후 2시 26분에 라디오 방송국인 WOR 이 다저스 대 자이언츠의 풋볼 경기 중계 방송을 중단하고 UP 통신사의 전문을 그대로 읽었다.

이로써 WOR 은 대중 매체 중 처음으로 진주만 기습 소식을 전했다.

2분 후인 2시 28분에는 NBC 방송국이, 2시 31분에는 CBS 방송국이 정규 프로그램을 중단하고 진주만 기습 소식을 전했다.

 

신문사들은 호외를 찍어내기 시작했다.

가장 먼저 호외를 발간한 신문사는 애틀랜타 저널로 오후 4시 40분에 나왔다.

진주만 기습의 소식은 하와이와의 지리적 거리와는 반대로 워싱턴이 있는 미동부에서 시작하여 서부로 퍼져나가는 양상을 보였다.

실제로 미서부에서 가장 먼저 호외를 발행한 것은 로스엔젤레스 타임즈였는데 오후 2시 20분에 나왔다.

미서부 시간은 동부보다 3시간이 늦으므로 동부시간으로는 오후 5시 20분이었다.

라디오나 지인의 전화를 통하여 진주만 기습 소식을 접한 사람들이 거리로 뛰쳐나와 앞다투어 호외를 사 보았다.

일요일에 평균적으로 25,000 부 정도 판매하던 로스엔젤레스 타임스는 이날 오후에 150,000 부를 판매했다.

 

(진주만 기습을 알리는 로스엔젤레스 타임즈 호외. http://edpadgett.blogspot.kr/2011/12/los-angeles-times-headline.html)

 

덕분에 신문팔이 소년들은 평생에 다시 없을 횡재를 했다.

이들은 평소 신문을 1부당 3센트에 공급받아 5센트를 받고 팔았는데 이날은 25센트, 심지어 더 불러도 순식간에 팔리는 바람에 신문 보급소로 달려가 다시 받아와야 했다.

많은 소년들이 3개월 동안 한푼도 쓰지 않고 매일 부지런히 일해야 겨우 만질 수 있을만한 목돈을 이날 오후 반나절만에 벌었다.

 

진주만 기습의 뉴스는 해외로도 퍼져나갔다.

1941년 12월 7일 일요일 저녁에 영국수상 윈스턴 처칠은 주영 미국대사 존 위넌트, 루스벨트 대통령의 특사인 애버럴 해리먼 및 그의 부인과 함께 관저에서 저녁 식사를 하고 있었다.

 

(영국수상 윈스턴 처칠. 자세한 내용은 여기로)

 

오후 9시가 가까워오자 급사가 라디오를 켰다.

이 15달러짜리 라디오는 루스벨트 대통령의 보좌관인 해리 홉킨스가 특사 자격으로 영국을 방문했을 때 선물한 것으로 처칠 수상은 이 라디오로 항상 저녁 9시 BBC 뉴스를 들었다.

런던은 미국 동부시간보다 5시간 빠르므로 런던의 오후 9시는 워싱턴의 오후 4시이며 하와이의 오전 10시 30분이다.

 

9시 뉴스가 시작되고 몇 분 후 아나운서가 정규 뉴스를 중단하고 속보를 전했다.

 

"루스벨트 대통령은 일본군이 진주만에 있는 미함대의 하와이 기지를 폭격했다고 발표했습니다."

("President Roosevelt has announced that the Japanese have bombed the Hawaiian base of the United States fleet at Pearl Harbor.")

 

해리먼이 놀라서 소리쳤다.

 

"맙소사, 그들이 진주만을 공격했다."

 

그러자 누군가 말했다.

 

"아니, 그것은 펄 리버였습니다."

 

처칠 수상이 말했다.

 

"맞아, 맞아, 우리도 들었소. 그들이 진주만의 미군을 공격했어."

 

처칠 수상은 일어나 라디오 앞에 가서 잠시 듣더니 위넌트 대사에게 말했다.

 

"우리는 일본에게 선전포고할 것이오."

 

당시 일본은 말레이도 공격했지만 아직 그 뉴스는 수상에게 도달하지 않은 상태였다.

수상의 말에 놀란 위넌트 대사는 그를 말렸다.

 

"이런, 라디오 뉴스를 듣고 선전포고를 할 수는 없습니다."

 

위넌트 대사는 수상에게 루스벨트 대통령과 전화를 연결해 주겠다고 말했다.

몇 분 내로 수상과 위넌트 대사는 관저의 작전실(war room)로 들어가 루스벨트 대통령과 통화했다.

 

"대통령 각하, 일본이 뭐 어쨌다는 겁니까?"

 

처칠 수상이 말문을 열자 방금 참모회의를 마친 대통령이 대답했다.

 

"틀림없는 사실이오. 그들이 진주만에서 우리를 공격했습니다. 우리는 이제 한배를 탄 거요."

("It's quite true. They have attcked us in Pearl Harbor. We are all same boat now.")

 

대통령은 다음날 의회에 선전포고를 요청할 것이라고 말했다.

처칠 수상은 전율했다.

그는 목소리가 들뜨지 않도록 조심하면서 루스벨트 대통령에게 신의 가호를 빈다고 말하고 전화를 끊었다.

수상은 훗날 회고록에 이렇게 적었다.

 

"이로써 일이 확실히 단순해졌다. 미국이 우리 편에 섰다는 것이 나로서는 가장 큰 기쁨이었다. 나는 바로 그때 그 순간부터 미국이 전쟁에 뛰어들었으며 끝장을 볼 때까지 철저하게 싸울 것임을 알았다. 그때 이미 우리가 이긴 것이다!...히틀러의 운명은 결정되었다. 무솔리니의 운명은 결정되었다. 그리고 일본인들은, 갈려서 가루가 될 것이었다."

("This certainly simplifies things. To have the Unite States at our side was to me the greatest joy. Now at this very moment I knew the United States was in the war, up to the neck and in to the death. So we had won after all!.. Hitler's fate was sealed. Mussolini's fate was sealed. As for the Japanese, they woud be ground to powder.")

 

반면 영국 국민들은 진주만 기습 소식에 처칠 수상처럼 기뻐하지 않았으며 담담하게 받아들였다.

가장 큰 이유는 대부분의 영국인들이 하와이를 중요한 군사기지라기보다 단순히 휴양지로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에 진주만 기습이 미국인에게 안겨준 엄청난 충격과 거기에 따르는 극심한 분노를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또한 미국이 일본과 전쟁을 하게 되면 영국의 생명선인 해상 교통로를 지켜주던 대서양의 함정을 태평양으로 가져가 버리고 영국과 소련에 대한 렌드리스를 줄일지 모른다는 걱정도 있었다.

물론 이것은 기우에 지나지 않았으며 역사는 처칠 수상이 옳았음을 증명했다.

 

독일 총통 히틀러는 베를린에서 북서쪽으로 720km 떨어진 숲 속에 자리잡은 지하벙커인 늑대소굴에서 진주만 기습 소식을 들었다.

그가 늦은 저녁을 먹고 장군들과 함께 동부전선에 대하여 토의를 하고 있을 때 통신장교가 뛰어 들어와 진주만 기습을 알렸다.

히틀러는 기뻐했다.

 

"전환점이다! 이제 우리에겐 지난 3,000년간 한번도 정복당하지 않았던 동맹국이 생겼다."

 

히틀러는 미국이 유대인들의 지배를 받고 열등한 흑인들로 더럽혀진 주제에 터무니없이 과대평가된 국가라고 생각했다.

그는 미국이 일본과 전쟁을 벌이게 되면 대서양의 함정이 태평양으로 전환배치될 뿐 아니라 유보트가 미국함정인지 영국함정인지 구별한 후에 공격할 필요가 없어짐으로써 대서양 전투에서 독일이 유리해질 것이라고 지엽말단적으로 생각했다.

히틀러는 거대한 잠재력을 가진 고도 공업국가인 미국의 참전이 가지는 무시무시한 의미를 이해하지 못했다.

 

이탈리아 총리 무솔리니 또한 진주만 기습 소식을 듣고 기뻐했다.

무솔리니도 히틀러와 마찬가지로 미국을 과소평가했는데 그는 특히 루스벨트 대통령의 신체적 결함을 들어 그와 그가 이끌던 국민을 폄하했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역사상 어떤 국민들도 마비 환자에게 통치를 받은 적이 없다. 역사를 돌이켜 볼 때 왕들 중에는 대머리도 있었고 뚱보도 있었고 미남도 있었고 심지어 바보도 있었다. 그러나 화장실에 가거나 식사를 할 때마다 남의 도움을 받아야 하는 왕은 결코 없었다."

 

일본에서는 8일 오전 6시에 대본영이 미국 및 영국과 전투에 들어갔다는 사실을 짤막하게 발표했다.

 

"대본영 육해군 발표. 제국 육해군은 금8일 미명 서태평양에서 미영군과 전투 상태에 들어감"

 

미국은 이 발표를 선전포고로 간주했다.

도쿄의 8일 오전 6시는 미동부시간으로 7일 오후 4시, 하와이 시간으로 오전 10시 30분이었다.

 

진주만 기습 다음날인 12월 8일 월요일 오전 7시에 위넌트 주영 미국대사가 백악관으로 전화를 걸어왔다.

영국의 처칠 수상이 하원에 가서 대일선전포고를 하려 한다는 것이었다.

긴급 사안이라고 판단한 교환수는 루스벨트 대통령을 깨웠다.

대통령은 영국의 선전포고가 오후 12시 30분으로 예정된 자신의 양원합동회의 연설 이후로 미루어지기를 원했으나 이미 늦었다.

 

처칠 수상은 런던 시간으로 오후 3시에 열린 의회에 출석하여 영국과 일본 사이에 전쟁상태가 존재한다고 선언했으며 의원들은 우레와 같은 박수로 대일선전포고를 승인했다.

런던의 오후 3시는 위싱턴의 오전 10시이다.

 

대통령은 오전 8시부터 밤새 들어온 보고를 살폈다.

홍콩, 웨이크, 미드웨이가 공격을 받았다.

가장 놀라운 것은 마닐라 인근의 클라크 비행장이 일본기의 기습을 받아 큰 피해를 입었다는 보고였다.

대통령은 진주만 기습을 이미 알고 있던 상황에서 또다시 기습을 허용한 클라크 비행장 피격 소식에 격노했다.

진주만에서는 공습 당시 이륙하여 요격을 실시한 미군 전투기는 불과 10대 정도이며 전함 애리조나의 승조원 대부분이 전사한 것을 비롯하여 사상자가 약 2,800 명에 달한다는 우울한 소식이 들어와 있었다.

 

국내 뉴스를 살펴본 대통령은 기분이 나아졌다.

언론들의 논조는 우호적이었다.

기사들은 대통령을 중심으로 뭉치자고 호소하고 있었으며 그의 실책을 지적하거나 비난하는 기사는 없었다.

정치권도 마찬가지였다.

민주당은 물론 지독한 고립주의자를 포함한 공화당 소속 주지사와 의원들도 대통령에게 전보를 보내어 충성을 맹세하고 초당적인 협력을 약속했다. 

미국은 루스벨트 대통령을 중심으로 단결했다.

 

아침 식사를 마친 대통령은 오전 11시부터 옷을 입기 시작했다.

정상인이라면 늦어도 5분 내에 끝날 일이었지만 대통령은 단단한 판자 위에 누운 상태로 집사 아서 프랫티만의 도움을 받아 45분이 걸려서야 힘겹게 옷을 입을 수 있었다.

 

이후 대통령은 오전 11시 55분부터 10분 간 백악관 내의 진료실에서 주치의 로스 맥킨타이어 소장으로부터 비점막을 축소시키는 치료를 받았다.

대중 매체의 힘을 잘 알고 있던 루스벨트 대통령은 전 세계에 전달되고 역사에 길이 남을 중요한 연설에서 코맹맹이 소리를 내기 싫었던 것이다.

 

잠시 후 그를 의회로 싣고 갈 자동차가 도착했는데 처음 보는 차량이었다.

당시 미국법에 따르면 정부 차량의 가격이 1대당 750달러를 넘길 수 없었기 때문에 대통령이라도 방탄차량을 탈 수 없었는데 진주만 기습 이후 대통령의 경호를 강화한 재무성 비밀경호국(Secret Service)은 방탄차량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비밀 경호국이 급히 준비한 방탄차량이 하필이면 재무성이 압수하여 보관 중이던 시카고의 악명높은 갱 두목 알 카포네의 방탄 리무진이었다.

경호를 책임진 마이크 라일리로부터 자초지종을 들은 대통령은 가벼운 농담으로 라일리의 마음을 편하게 해 주었다.

 

"카포네 씨도 이해해 주겠지."

("I hope Mr. Capone doesn't mind.")

 

대통령을 태운 리무진은 삼엄한 경호를 받으며 의사당에 도착했다.

루스벨트 대통령은 대중의 시선에서 벗어난 의사당 남쪽 입구 아래의 지하차도에서 내려 휠체어로 옮겨탔다.

비밀경호국 요원들이 경사로를 따라 휠체어를 밀어 대통령을 하원 회의장 바로 뒤에 있는 의장실로 옮겼다.

1933년에 루스벨트 대통령이 취임하자 비밀 경호국은 주요 관공서에 나무로 경사로를 만들어 대통령을 태운 휠체어가 다닐 수 있도록 했다.

 

의사당의 경비는 삼엄했다.

비밀경호국 요원 200명 이상이 배치되어 있었으며 착검한 해병대원들이 출입구를 지키고 있었다.

통행 허가증 없이는 누구도 들어갈 수 없었다.

비밀 경호국 요원들이 통행 허가증 없이 기자실에 들어가려던 몇몇 기자들을 쫓아냈다.

 

대통령이 연설할 하원 회의장은 의원과 취재진으로 발 디딜 틈이 없었다.

하원의원은 상원, 내각, 군사령관, 그리고 대법원을 위하여 앞줄 좌석을 비워두고 그 뒤에 앉아 있었다.

몇몇 의원은 역사적인 순간을 보여주기 위하여 자녀를 대동했다.

그 이외의 공간에는 기자가 바글거렸다.

기자들은 기자실 의자 위에 올라가고 통로에 늘어서고 벽에 기대어서 대통령을 기다렸다.

기자실에는 86개의 의자가 준비되어 있었으나 기자는 590명에 달했다.

 

12시 15분부터 부통령 헨리 월래스를 선두로 상원지도부가 입장했으며 이어서 코델 헐 국무장관을 선두로 내각의 각료들이 들어왔다.

각료들 뒤에는 정복을 갖추어 입은 육군참모총장 조지 마셜 대장과 해군참모총장 해럴드 스타크 대장이 들어왔으며 마지막으로 검은 법복을 입은 대법원 판사들이 들어와 앉았다.

 

12시 29분에

 

"미합중국 대통령 각하십니다."

("The President of United States.")

 

라는 방송이 울렸다.

그와 동시에 루스벨트 대통령이 연단 뒤에서 모습을 드러내자 우레같은 박수가 터졌다.

 

대통령은 아들 제임스 루스벨트 대위의 팔을 꽉 붙잡은 채 힘겹게 연단을 향해 걸어가기 시작했다.

그들 주위를 상원과 하원의 대표 6명이 둘러싸고 같이 걸었다.

이는 대통령 연설의 초당파적인 의미를 강조함과 동시에 연단으로 걸어가는 동안 대통령의 불편한 다리를 전 세계의 시선으로부터 숨기는 역할을 했다.

 

연단으로 향하는 대통령의 표정을 살펴본 기자들은 그가 중요한 연설에 대하여 깊은 생각에 잠겨 있다고 보았다.

그러나 사실 루스벨트 대통령은 연단까지 넘어지지 않고 걸어가는데 온 정신을 쏟고 있었다.

전 세계가 지켜보는 가운데 미군 최고 사령관이자 사실상 연합군을 대표하게 될 미국의 대통령이 연단까지 그 짧은 거리도 제대로 걸어가지 못하고 볼썽사납게 자빠져서 주변 사람들이 우루루 달려가 일으켜 세워야 하는 상황이 벌어지면 그 자체로 참사가 될 것이었다.

미국과 동맹국의 사기는 꺾일 것이고 적은 최고사령관의 비참한 모습을 마음껏 비웃으면서 두고두고 절호의 선전거리로 삼을 것이었다.

모든 사람들이 우레와 같은 박수로 힘겹게 연단으로 향하는 대통령에게 힘을 실어주었다. 

 

대통령이 연단에 도착하자 환호성이 터지면서 박수 소리가 더욱 커졌다. 

하원 의장 레이번 의원이 검지를 입술에 갖다대어 조용하라는 표시를 한 후 대통령을 소개했다.

 

루스벨트 대통령은 연단의 가장자리를 단단히 잡고 안경을 고쳐 쓰더니 실내를 천천히 둘러보았다.

연단 아래 앉아있는 상원의원들, 내각 각료들, 군 사령관들, 대법관들을 훑어본 대통령은 뒷쪽에 앉은 하원의원들을 거쳐 사진촬영용 조명까지 훑어보았다.

 

그러고 나서 대통령은 연설문을 넣어둔 노트의 가죽 표지를 펼쳤다.

연설문은 넘길 때 사각거리는 소리가 나지 않는 고급 종이에 타이핑되어 있었다.

 

오후 12시 33분, 대통령은 확신에 넘친 단호하고 낭랑한 목소리로 연설을 시작했다.

 

"어제, 1941년 12월 7일 - 치욕으로 남을 날 - 미합중국은 일본제국의 해군 및 항공 세력으로부터 의도적인 기습 공격을 받았습니다."

("Yesterday, December 7th, 1941 - a date which will live in infamy - the United States of America was suddenly and deliberately attacked by naval and air forces of the Empire of Japan.")

 

(의회에서 연설 중인 루스벨트 대통령. http://en.wikipedia.org/wiki/Infamy_Speech)

 

대통령은 화난 목소리로 일본정부의 비열한 자세를 성토했다.

 

"미합중국은 일본과 평화 상태에 있었으며 일본의 애원에 따라 일본정부 및 천황과 태평양의 평화를 유지하는 방안을 토의하고 있었습니다. " 

 

대통령은 일본이 미국 영토인 오아후 섬을 폭격한 지 1시간이 지난 후에 일본대사를 시켜 어떤 위협이나 전쟁 또는 무력 공격의 힌트도 없는 문건을 전달했다면서 일본의 목적은 오로지 평화에 대한 사탕발림을 늘어놓음으로써 미국을 속이려는 것이었다고 말했다. 

그는 진주만의 피해에 대해서는 얼버무리고 넘어갔다.

 

"미국의 해군과 군대는 큰 피해를 입었습니다. 유감스럽게도 많은 미국인들이 목숨을 잃었습니다."

 

이어서 대통령은 초고 작성 이후 추가된 내용을 말했다.

 

"미국함정들이 샌프란시스코와 호놀룰루 사이의 공해에서 어뢰공격을 받았다는 보고가 들어왔습니다. 어제 일본정부는 말레이를 공격했습니다. 어젯밤에 일본군이 홍콩을 공격했습니다. 어젯밤에 일본군이 괌을 공격했습니다. 어젯밤에 일본군이 필리핀 제도를 공격했습니다.어젯밤에 일본군이 웨이크 섬을 공격했습니다. 그리고 오늘 아침에 일본군이 미드웨이 섬을 공격했습니다."

 

분위기는 가라앉고 박수도 사라졌다.

이때 대통령이 선언했다.

 

"어쨌든, 시간이 얼마나 걸리든, 미국은 절대적인 승리를 쟁취할 것입니다."

 

잠잠해졌던 박수가 다시 터졌다.

이어서 연설은 클라이맥스에 도달했다.

 

"우리 군대의 대담함과, 우리 국민의 활달한 투지로 우리는 반드시 승리를 쟁취할 것입니다. 신이여, 저희를 도우소서."

("With confidence in our armed forces-with the unbinding determination of our people-we will gain inevitable triumph-so help us God.")

 

이제 사람들은 일어서서 미친듯이 박수를 쳤으며 근엄한 대법관들까지 일어나 박수를 쳤다.

대통령은 다음의 말로 연설을 끝맺었다.

 

"저는 의회가 12월 7일, 일요일에 일본이 자행한 부당하고 비열한 공격 이후 미합중국과 일본제국 사이에 전쟁상태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선포해 주실 것을 요청합니다."

("I ask that the Congress declare that since unprovoked and distardly attack by Japan on Sunday, December 7, a state of war has existed between the United States and the Japanese Empire.")

 

모든 사람이 일어나 박수를 쳤다.

일어나지 않은 사람은 공화당 소속의 하원의원인 저넷 랭킨과 클레어 호프만 뿐이었다.

 

연설을 마쳤을 때는 오후 12시 40분으로 6분 30초 밖에 걸리지 않았으나 대단히 성공적이었다.

반응은 폭발적으로 당시에도 언론의 찬사가 쏟아졌으며 오늘날까지 가장 유명한 연설의 하나로 남아있다.

 

상원은 12시 51분부터 선전포고를 위한 토의에 들어갔다.

제1차 대전 당시 상원은 4일 간의 치열한 논쟁을 거쳐 참전을 결정했으나 이번에는 달랐다.

발언을 요청한 사람은 상원에서 고립주의자들을 이끌던 공화당의 아서 반덴버그 의원 뿐이었다.

그는 전쟁을 앞둔 이 시점에서 미국에서 공화당이니 민주당이니 하는 것은 사라졌고 총사령관 밑에 결집한 하나의 미국만이 존재한다면서 고립주의를 버리고 대통령에게 절대적으로 협조할 것을 천명했다.

이후 투표는 일사천리로 진행되어 1시 6분에 끝났다.

결과는 82대 0으로 96명의 상원의원들 중 병석에 누웠거나 멀리 떨어져 있어 표결에 참가하지 못한 14명을 제외하고 참석자 82명 전원이 찬성표를 던졌다.

상원에서는 15분 만에 선전포고를 가결했다.

 

하원에서는 상원처럼 매끄럽게 진행되지는 않았다.

의원들은 토론을 생략하고 표결에 들어가자면서

 

"투표, 투표, 투표"

("Vote, vote, vote")

 

를 외쳤다.

 

하원의 공화당 대표인 조셉 마틴은 마이크를 잡고

 

"적이 저지른 비겁한 짓에 대한 응징이 이루어질 때까지 평화는 없습니다. 우리가 하나로 뭉친 나라라는 걸 세계에 보여줍시다."

 

라고 말한 다음 하원에서 고립주의자들의 대표로서 렌드리스를 가장 심하게 비난했던 해밀튼 피시에게 마이크를 넘겼다.

피시는 다음과 같은 말로 자신의 정치적 입장을 포기하고 대통령에게 적극 협조할 것임을 동료 의원들에게 약속했다.

 

"전쟁을 일으킨 일본 악마들을 요절내기 위해서라면 저는 어떤 희생이라도 마다하지 않을 것입니다."

 

이때 지독한 반전주의자인 랭킨 의원이 발언권을 요청했다.

하원 의장 레이번은 그녀를 무시하고 다른 의원 2명에게 발언 기회를 준 후 오후 1시 4분에 투표를 시작했다.

랭킨은 계속 발언권을 요구하면서 표결을 방해하려 했으나 모두들 그녀를 무시했다.

오후 1시 26분에 하원은 388:1로 선전포고안을 통과시켰는데 반대 1표는 랭킨이 던진 표였다.

그녀는 제1차 세계대전에서도 반대표를 던졌었다.

 

오후 1시 32분, 루스벨트 대통령이 연설을 마친지 52분 후에 의회는 선전포고안을 가결했다.

오후 3시 14분에 하원 의장 레이번이 하원을 대표하여 선전포고문에 서명했다.

오후 3시 25분에는 부통령 월래스가 상원을 대표하여 선전포고문에 서명했다.

선전포고문은 백악관으로 보내졌고 오후 4시 10분에 루스벨트 대통령이 서명했다.

그가 연설을 시작한 후 3시간 37분 만이었다.

 

일본과의 선전포고를 끌어낸 루스벨트 대통령은 이후 국민의 관심이 독일을 떠나 일본에게만 집중되지 않도록 신경을 썼다.

대일선전포고 다음날인 12월 9일에 방송된 노변담화에서 대통령은 독일과 일본의 친밀한 관계를 강조하면서 진주만 기습의 배후에는 독일이 있다면서 독일을 집중적으로 비난했다. 

 

히틀러가 루스벨트 대통령의 고민을 덜어 주었다.

1941년 12월 11일에 독일과 이탈리아는 미국에 선전포고를 했다.

이번에는 연설을 할 필요도 없었다.

대통령은 서면으로 의회에 선전포고를 요청했으며 의회에서는 두말없이 통과시켰다.

이번에는 랭킨 의원도 찬성표를 던졌다.

Posted by 대사(P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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