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 성문보 전투(1) - 부실한 방어태세
1941년 12월 9일 아침이 되자 몰트비 소장은 일본군의 진격이 예상보다 빠르다는 것을 느꼈다.
몰트비 소장은 해군을 지휘하던 콜린슨 대령에게 구룡반도에서의 철수가 빨라질 수 있으니 구룡에서 애버딘으로 장비와 보급품을 옮기는 일에 속력을 내어 달라고 요청했다.
빅토리아 항은 구룡반도에서 탈출하는 중국인들의 작은 배로 가득차서 보급품을 실은 주정들이 이동하는데 애를 먹었다.
중경에서는 장개석 총통이 영국군 연락관 데니스 장군에게 홍콩을 구원하기 위하여 병력을 동원하겠다고 말했다.
중국군의 3개 군(Army)이 남쪽으로부터 광동을 공격하여 일본군을 묶어두는 동안 유한모 장군이 지휘하는 또다른 3개 군이 광동-구룡 간 철도를 따라 공세를 가한다는 것이었다.
중국군의 군은 보통 사단 3개로 이루어지지만 중국군 사단은 규모가 작았으므로 1개 군의 화력은 영국사단과 비슷했다.
그러나 장개석 총통은 공격이 1942년 1월 10일 이후에야 가능하다고 말했는데 홍콩은 그때까지 버티지 못했다.
12월 9일 오후가 되자 일본군들이 진드링커스 선에 접근했다.
서쪽에서는 제229연대의 선두가 버팔로 힐에 도달했으며 중앙에서는 제228연대가 니들 힐에 도착했다.
(1941년 12월 8일 - 13일에 걸친 홍콩전투상황도. 출처 : Hong Kong 1941-45, P.36)
9일 오후 3시에 니들 힐에 도착한 제228연대장 도이 데이히치 대좌는 성문저수지 남쪽에 있는 강력한 진지인 성문보에 빨래가 널려 있다는 정찰대의 보고를 받았다.
이것은 성문보를 지키는 병사들의 기강이 해이하다는 증거였다.
도이 대좌는 즉시 공격하고 싶었으나 문제가 있었다.
성문보는 그의 관할이 아니라 서쪽의 제230연대 관할이었다.
실전에서 상부의 허락없이 연대지경선을 넘는 것은 중대한 명령위반으로 큰 벌을 받을 수 있었다.
게다가 갑자기 자욱한 안개가 끼면서 시계가 20m 아래로 떨어져 즉시 공격하기는 불가능했다.
도이 연대장은 밤에 성문보를 공격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는 다케요시 이나가키 소좌의 제2/228대대를 성문보 동쪽으로 보내어 적이 접근하는지 감시하고 니시야나 하주라 소좌의 제3/228대대에게 성문보를 공격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하주라 소좌는 제9중대장 카스가이 요시타로 중위와 제10중대장 와카바야시 도이치 중위에게 지원자 150명을 뽑아 성문보를 공격하라고 명령했다.
성문보는 진드링커스 선에서 가장 강력한 진지로 성문저수지의 남쪽을 이루는 주빌리 댐에서 180m 정도 떨어진 곳에서 시작하여 스머글러 능선의 서쪽 사면에 걸쳐 있었다.
진지는 5개의 강화 콘크리트 벙커(400, 401A, 401B, 402 및 403벙커)와 역시 강화 콘크리트로 만들어진 해발 341m 의 포병관측소로 이루어져 있었으며 관측소가 지휘소를 겸하고 있었다.
관측소에는 철문이 달려 있었고 벙커와 관측소 사이는 콘크리트 터널로 연결되어 있었는데 영국군은 이 터널에 런던의 유명한 거리 이름을 붙였다.
터널은 중간에 콘크리트로 만들어진 무개호를 통하여 바깥과 연결되어 있었다.
벙커 주변에는 참호를 파 놓았고 접근하는 길에는 철조망을 쳐 놓았으나 지뢰는 없었다.
성문보를 지키던 병력은 시릴 존스 대위가 지휘하는 제2왕립스코트대대 A 중대였다.
A 중대는 말이 중대지 실제로는 소대 규모로서 중대본부는 10명으로 이루어져 있었고, 휘하에는 소대장 톰슨 소위를 포함하여 25명으로 이루어진 제8소대 밖에 없었다.
이외에 윌콕스 중위가 이끄는 홍콩싱가포르포병대 제1홍콩연대 제2포대의 관측반이 있었는데 영국군 2명, 인도인 통신병 2명으로 4명이었다.
이렇게 39명이 성문보를 지키는 모두였으며 기관총은 401B 와 402 벙커에만 있었다.
제2왕립스코트대대장 사이먼 화이트 중령은 성문보의 병사들에게 비커스 기관총반을 제외한 병력들은 적의 포격이 쏟아질 때를 제외하고는 벙커에 들어가지 말라는 명령을 내렸다.
이런 명령이 필요했다는 점에서 당시 성문보를 지키던 병력들의 기강이 좋은 편이 아니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9일 밤11시에 일본군이 공격해 왔을 때 성문보의 병력 중 장교 3명 모두를 포함한 10명 이상이 지휘소 안에 있었고 포병관측반의 인도통신병 1명과 A 중대의 병사 4명은 성문보의 북서쪽에서 경계를 서고 있었으며 나머지 병력들은 기관총이 장비된 401B 및 402 벙커 안과 그 주변에 있었다.
제2왕립스코트대대본부는 성문보에서 캐슬피크 도로를 따라 남서쪽으로 내려가 스머글러 능선 아랫쪽의 도로 주위에 자리잡고 있었다.
성문보의 남동쪽에는 로버트 뉴튼 대위가 지휘하는 D/2/7 라지푸트 중대가 진드링커스 방어선의 빈 틈을 메우기 위하여 배치되어 있었다.
D 중대는 성문보 남동쪽의 성문계곡을 화력으로 감제하면서 북쪽으로 주빌리 댐과 니들힐 사이를 정찰하라는 명령을 받고 있었다.
(성문보 전투 상황도. 일본 측에서 본 모습으로 지도 아랫쪽이 북쪽이다. 출처 : Hong Kong 1941-45, P.44,45에서 발췌)
9일 오후 6시에 일본제228연대의 주력이 주빌리 댐에서 북쪽으로 500m 떨어진 지점까지 접근했다.
오후 8시에 제2왕립스코트대대장 화이트 중령은 성문보의 A중대에게 명령을 내렸다.
정찰대를 보내어 성문계곡을 따라 성문저수지 북쪽의 니들힐까지 정찰하고 내려오는 길에 스머글러 능선의 D/5/7 라지푸트 중대의 주둔지까지 정찰한 다음 귀환하라는 내용이었다.
이 명령에 따라 제8소대장 톰슨 소위는 9명의 부하를 이끌고 정찰을 나섰다.
오후 10시 30분에 돌아온 톰슨 소위는 관측소로 가서 A중대장 존스 대위에게 일본군을 발견하지 못했다고 말했다.
당시 일본군이 주빌리 댐에서 북쪽으로 불과 500m 떨어진 곳까지 진출한 상태였는데 이해할 수 없는 보고였다.
정찰에 걸린 시간을 계산해보면 톰슨 소위가 주빌리 댐 북쪽을 정찰하지 않고 바로 남쪽으로 내려가 D/5/7 라지푸트 중대와 접촉한 다음 성문보로 돌아왔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성문보를 공격할 150명의 일본군이 주빌리 댐을 건너 401B 벙커 앞에 집결한 시간은 오후 9시30분이었다.
따라서 톰슨 소위가 명령에 따라 북쪽을 정찰했다면 남하하던 일본군과 마주쳤을 것이다.
톰슨 소위가 존스 대위에게 정찰보고를 하는 동안 전투가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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