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 성문보 전투(2) - 함락

 

카스가이 요시타로 중위가 지휘하는 제228연대 제3대대 제9중대는 주빌리 댐을 건너 9일 오후 9시 30분까지 401B 벙커 정면에 집결했다.

댐의 남쪽에는 감시 초소인 포스트 X 가 있었으나 병력이 배치되지 않았으므로 일본군은 들키지 않았다.

오후 10시까지 야마다 쇼지 소위가 지휘하는 제9중대 제1소대가 벙커 정면의 철조망을 제거했다.

현장에서 공격을 지휘하던 제3대대장 니시야나 하루자 소좌는 제10중대장 와카바야시 도이치 중위에게 남서쪽에 있는 403벙커를 공격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공격 시간은 오후 11시로 정했다.

 

(성문보 전투 상황도. 일본 측에서 본 모습으로 지도 아랫쪽이 북쪽이다. 출처 : Hong Kong 1941-45, P.44,45에서 발췌)

 

오후 11시가 되자 제9중대는 함성과 함께 401B 벙커로 돌진했다.

401B 벙커의 기관총사수 레어드 일병이 달려드는 일본군에게 기관총을 쏘기 시작했다.

일본군은 2대로 나뉘어 1대는 콘크리트 무개호를 통하여 터널로 뛰어들고 1대는 벙커 지붕으로 올라가 환기구에 수류탄을 던져 넣었으나 벙커를 침묵시키지 못했다.

401B 벙커는 이후 5시간 동안 저항을 계속했다.

 

402벙커의 기관총사수 캠벨 상병은 401벙커 쪽에서 총소리가 나자 그쪽으로 기관총을 쏘았다.

이때 노출된 위치에 있던 제3대대 본부에서 사상자가 발생했다. 

 

전투가 발생하자 소대부사관 롭 병장은 12명의 부하를 이끌고 일본군을 공격했다.

그러나 압도적인 전력을 가진 일본군의 반격으로 1명이 전사하고 4명이 부상을 입자 롭 병장은 후퇴명령을 내렸다.

부상자 4명 중 1명은 도망치는데 성공했으나 나머지 3명은 포로가 되었다.

생존자들은 남동쪽으로 후퇴하여 D/5/7 라지푸트 중대의 방어선에 도착했다.

전투가 발생하자 성문보의 북서쪽에서 경계를 하던 A 중대 병사 4명과 인도통신병 1명이 무단으로 위치를 이탈하여 지휘소로 도망쳤다.

 

성문보가 공격을 받고 있다는 보고를 받은 구룡보병여단장 세드릭 월리스 준장은 A 중대장 존스 대위에게 반격을 실시하여 적을 몰아내라고 명령했고 존스 대위는 제8소대장 톰슨 소위에게 반격명령을 내렸다.

톰슨 소위가 지휘소를 나가려고 할 때 일본군이 공격해 왔다.

모치즈키 소위가 이끄는 제10중대 제1소대가 비어있던 403벙커를 지나 지휘소에 도착한 것이었다.

일본군은 지휘소 지붕으로 올라가 해치를 열려고 했으나 실패하자 지휘소를 포위했다.

이로써 성문보의 장교 3명은 공격이 끝날 때까지 지휘소에 갇혀 있었다.

 

402벙커가 완강하게 버티자 니시야나 소좌는 공병을 투입했다.

10일 새벽 2시 30분에 후지모리 사카에 상병이 이끄는 공병 4명이 벙커의 통풍구를 통해 폭약을 집어넣어 폭파시킴으로써 402벙커를 침묵시켰다.

 

전투가 진행되는 동안 제2/228대대의 병력 약 200명이 주빌리 댐을 건너 성문 계곡을 따라 남하하다가 북상하고 있던 D/5/7 중대의 정찰대와 마주쳤다.

정찰대와 일본군 사이에 총격전이 벌어졌고 스머글러 능선에 주둔 중이던 D 중대 주력이 총격전에 가세했다.

D 중대는 치열한 총격전 끝에 일본군들을 성문보 쪽으로 몰아내었다.

 

지휘소에서는 3시간에 걸친 전투 끝에 일본군이 지휘소의 철제문을 폭파시켰다.

이 과정에서 포병관측반의 인도인 통신병 2명이 전사하고 나머지 15명은 폭발의 충격으로 얼이 빠진 상태에서 항복했는데 이들 중 11명은 부상을 입고 있었다.

 

지휘소의 함락과 함께 통신도 끊어졌다.

통신이 끊어지자 영국군의 야포들이 새벽 5시까지 2시간 동안 성문보를 포격했다.

 

이때까지도 401B 벙커는 계속 저항하고 있었다.

결국 일본군은 10일 오전 4시가 되어서야 벙커를 폭파시킬 수 있었다.

생존자 4명은 포로가 되었다.

 

이로써 일본군은 성문보를 차지했다.

10일 오전 4시에 성문보에 일장기가 올라갔다.

 

성문보 전투에서 영국군의 사상자는 기록이 미비하고 모순되는 점이 있어 정확한 숫자를 파악하기 어렵다.

39명의 수비병력 중 탈출에 성공한 병력은 10 여명이며 나머지는 전사하거나 포로가 되었다.

일본군 전사자는 2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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