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 항복 권유
구룡반도를 장악한 일본군은 홍콩섬 상륙을 준비하는 한편 항복을 권유하는 사자를 파견했다.
1941년 12월 13일 오전 9시에 일보군 사절단을 태운 작은 보트가 백기를 휘날리며 구룡시의 부두를 떠나 빅토리아 항을 가로질러 홍콩섬 북해안에 상륙했다.
(1941년 12월 13일 아침에 구룡시의 부두를 떠나는 일본 사절단의 모습. Homg Kong 1941-45, P.49)
일본제21군 참모 다마 중좌가 이끄는 사절단에서는 미즈노 중위가 안내 및 통역을 맡았다.
정보장교인 미즈노 중위는 불과 1주일 전만 해도 홍콩섬의 운동용품점에서 지배인으로 일하고 있었다.
사절단은 영국부녀자 2명을 포함하고 있었는데 1명은 홍콩총독 비서의 부인인 리 여사였으며 1명은 리 여사의 친구로 당시 만삭이었던 맥도날드 부인이었다.
다마 중좌는 자신들을 맞이한 복서 소령에게 제21군 사령관 사카이 다카시 중장이 마크 영 홍콩총독에게 보내는 친서를 전달했다.
사카이 중장은 친서에서 항복을 요구하면서 항복하지 않을 경우 폭격과 포격으로 홍콩섬을 파괴하겠다고 위협했다.
영 총독은 항복요구를 거부하는 강경한 내용의 답신을 적어 복서 소령을 통하여 전달했다.
일본사절단은 만삭의 맥도날드 부인을 영국 측에 넘겨주고 구룡반도로 돌아갔다.
(홍콩전투 당시 일본군이 영국군에게 항복을 종용하면서 뿌린 전단. Homg Kong 1941-45, P.48)
사카이 중장의 경고는 허풍이 아니었다.
사절단이 빈손으로 돌아오자 구룡반도의 일본군은 13일 오후부터 홍콩섬의 표적에 대하여 조직적으로 포격과 폭격을 가하기 시작했다.
이날 오후에 데이비스 산에 있던 영국군의 9.2인치 해안포가 포격을 받아 침묵했으며 14일에는 3인치 포가 파괴되었다.
중국인 포수들 사이에서 사상자가 발생하면서 사기가 떨어졌다.
빅토리아시티도 포격을 받아 화재가 발생했는데 급수 시설이 포격을 받아 망가지는 바람에 제대로 진화할 수가 없었다.
남쪽의 애버딘 해군기지는 일본기로부터 공습을 받았다.
건선거에서 수리 중이던 구축함 트라시안이 심한 피해를 입어 할 수 없이 라운드 섬에 좌초시켜야 했다.
어뢰정 2척을 포함한 다른 함선들도 폭탄을 맞았으며 많은 인명피해가 발생했다.
15일부터 일본군은 홍콩섬 북동해안의 특화점들을 목표로 포격을 가했다.
일본군의 포격은 4일 동안 지속적으로 이루어져 군사 및 민간 시설을 파괴했을 뿐 아니라 레이어먼 탄약창에서 일선으로 탄약을 보급하지 못하게 방해했다.
15일 오전 9시경 예비 포격이 쏟아진 후에 일본군 3개 중대가 고무보트와 임시로 만든 뗏목을 타고 해협을 건너 백사만에 상륙하려다가 기관총 사격을 받고 물러났다.
홍콩 섬의 제5열도 일본군의 포격에 호응하여 활동했다.
이들은 북해안에 가서 거울이나 손전등으로 구룡반도의 일본군과 통신하려고 시도했으며 소총을 가지고 수비대를 저격하기도 했다.
또한 홍콩 섬의 중국인들을 선동하여 폭동을 일으키려고 시도했으며 어둠을 틈타 대공포 진지를 공격하다가 격퇴되기도 했다.
전반적으로 제5열의 활동은 부진했다.
진책 소장이 무장시킨 폭력배들이 토미건을 들고 홍콩섬 전역을 돌아 다니면서 제5열을 제거했으며 홍콩섬의 중국인들은 대체로 차분한 분위기에서 영국당국의 지시에 순응했다.
구룡반도의 일본군은 포격을 실시하는 한편 홍콩섬에 상륙하기 위하여 주정을 모았다.
영국군은 야포와 빈약한 함정 세력을 동원하여 일본군 주정의 집결을 막으려 했으나 역부족이었다.
16일이 되자 북동해안의 특화점들은 절반이 파괴되었는데 포격이 계속되어 수리할 수 없었다.
17일 오전 9시 30분에 일본기들이 빅토리아시티와 홍콩섬의 군사적 목표를 공습했다.
이어서 빅토리아시티 중심부에 일본군의 포탄이 대량으로 떨어졌다.
잠시 후 사카이 중장과 제2견지함대 사령관 니이미 마사이치 해군중장이 연대 서명한 친서를 가진 일본군의 두번째 사절단이 2척의 보트를 타고 북해안에 상륙했다.
영 총독은 다음과 같은 답신을 보내어 또다시 항복을 거절했다.
"홍콩 총독과 총사령관은 홍콩 항복에 관한 협상에 들어갈 것을 가장 단호하게 거부하며 앞으로 이러한 주제에 대하여 어떠한 교섭도 하지 않을 것임을 사카이 다카시 중장과 니이미 마사이치 해군중장에게 통고한다."
몰트비 소장은 영국군이 당분간 일본군의 상륙을 저지하면서 버티고 있으면 중국군이 일본군의 배후를 들이쳐서 홍콩이 살아남을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그날 저녁에 일본함정들이 애버딘 해군기지를 포격했다.
18일이 되자 일본군의 포격과 폭격이 더욱 거세어져 상륙이 임박했음을 예고했다.
노스포인트의 저유탱크가 폭탄에 맞아 불타면서 영국군은 열기 때문에 주변에 있던 탐조등을 포기해야 했으며 검은 연기가 북동해안을 자욱하게 덮어 일본군의 행동을 은폐했다.
빅토리아시티도 심한 폭격을 받아 거리는 공포에 질려 탈출하려는 피난민으로 가득찼다.
18일 오후가 되자 일본군의 포격과 폭격은 동쪽으로 옮겨져 대담 계곡, 레이어먼 계곡, 스탠리 요새 지역이 공격을 받았으며 서환 언덕의 관측소는 집요한 급강하 폭격과 연속적인 포격에 의하여 파괴되었다.
저녁이 가까워오자 일본군의 야포와 박격포들이 레이어먼 반도에 집중적인 포격을 퍼부었다.
영국군도 탄약 부족을 무릅쓰고 반격을 가했다.
데빌스피크 반도를 남하하는 일본군들이 영국 야포의 포격을 받았다.
18일 해가 지고나면 일본군이 상륙하리라는 것은 확실했다.
조건은 완벽했다.
만조는 오후 9시였으며 달은 자정이 되어야 뜰 것이었다.
북동해안은 불타는 저유탱크와 페인트 공장에서 나는 연기로 덮여 있었으며 소기만(筲箕灣)의 고무공장이 불타는 열기 때문에 주변의 방어선이 흐트러진 상태였다.
라지푸트 대대 구역의 탐조등 16개 중 4개 만이 작동하고 있었고 전방의 특화점 및 기타 방어시설과 이어지는 통신선은 대부분 끊어진 채 수리가 불가능한 상황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북동해안으로 접근하는 일본군은 연기에 가려 제대로 보이지 않을 것이었고 통신망의 미비로 상륙한 일본군이 교두보를 강화하기 전에 전력을 집중하여 격퇴하기도 힘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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