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 상륙

 

일본군은 1941년 12월 17일 밤에 홍콩섬 북해안에 2개의 정찰팀을 보냈다.

1팀은 상륙에 실패했다.

마쓰시마 젬페이 중위가 이끄는 다른 팀은 수영으로 해협을 건너 태고에 상륙하는데 성공했으나 상륙하자마자 발각되어 총격을 받았다.

젬페이 정찰대는 정찰을 포기하고 다시 물 속으로 뛰어들어 탈출했는데 사상자는 없었다.

 

홍콩섬에 대한 폭격은 광주에 기지를 둔 중폭격기 제14연대 소속 폭격기 18대가 담당했는데 12월 18일이 되자 대만의 대정에서 출격한 해군의 폭격기 18대와 전투기 26대가 가세했다.

영국군은 급강하 폭격을 비롯하여 점점 심해지는 폭격과 포격, 그리고 구룡반도에 집결 중인 주정을 보면서 일본군의 상륙이 임박했음을 알 수 있었다.

 

일본군의 일선 사령부는 상륙작전 지휘를 위하여 전방으로 이동했다.

제23군 사령부는 신계의 대포로 이동했고, 제38사단 사령부는 계덕 비행장 외곽의 마두위에 자리잡았다.

 

홍콩섬에 상륙할 일본군은 북해안에 상륙할 우익대와 북동해안에 상륙할 좌익대로 나뉘어졌다.

제38사단의 보병단장 이토 다케오 소장이 지휘하는 우익대는 제228연대와 제230연대로 이루어졌으며 독립속사포 제5대대와 산포 제38연대 제1포대의 화력지원을 받았다.

또한 공병제38연대가 전투를 지원했다.

제229연대장 다나카 류사부로 대좌가 지휘하는 좌익대는 제229연대로 이루어져 독립속사포 제2대대 및 독립산포 제10연대 제5중대의 화력지원을 받았다.

또한 공병 제38연대 제1중대가 전투를 지원했다.

 

우익대는 계덕 비행장 부근에서 승선했으며 좌익대는 데빌스 피크 부근에서 승선했다.

공격명령은 18일 오후 6시에 떨어졌다.

제23군 사령관 사카이 다카시 중장은 부참모장 히구치 게이시치로 소장과 함께 오후 7시 30분에 구룡시에 도착하여 상륙작전을 참관했다.

 

작전 개시 시간인 오후 8시가 되자 일본군의 야포들이 맹렬하게 포격을 가하는 가운데 선두 대대들이 주정에 올라타고 해협으로 나섰다.

첫번째 시도는 실패했다.

저유탱크가 불타는 연기 덕분에 일본군은 해협의 중간까지는 들키지 않았지만 중간을 넘어서자 영국군의 탐조등이 일본군을 찾아내었고 이어서 기관총탄이 쏟아졌다.

영국군의 총격으로 우익대의 선봉에 섰던 제2/228대대와 제3/230대대의 대대장들이 부상을 입고 주정들이 흩어졌다.

일본군은 일단 물러섰다가 야포로 상륙예정지역을 다시 한 번 치열하게 포격한 후 두번째 상륙을 시도했다.

이번에는 성공했다.

 

18일 오후 9시 45분에 일본군의 서쪽을 담당한 제3/230대대가 노스포인트에 상륙했고 9시 50분에 중앙을 담당한 제2/228대대가 브래머 곶에 상륙했으며 9시 58분에는 좌익대의 제1파인 제3/229대대가 알드리히 만에 상륙했다.

병력들은 내려놓은 주정들은 돌아가서 제2파를 싣고 왔다.

자정까지 일본군 6개 대대가 상륙을 마쳤으며 19일 새벽 1시에는 제38사단장 사노 타다요시 중장이 태고에 상륙했다.

 

(일본군이 홍콩섬에 상륙하는 순간. 일본군이 타고 온 주정들이 전용의 상륙주정이 아니라 일반주정임을 알 수 있다. 출처 : Hong Kong 1941-45, P.52)

 

일본군은 달도 없이 캄캄한 밤에 낯선 해안에 상륙하여 적지않은 혼란을 겪었으나 영국군의 강력한 반격이 없었으므로 위기를 벗어났다.

상륙 초기의 혼란을 극복한 일본군은 해안을 벗어나 내륙으로 진격을 시작했다.

 

좌익대의 제1파로 알드리히 만에 상륙한 제3/229대대는 파커 산을 향하여 남하했다. 

좌익대의 제2파로 상륙한 제2/229대대는 서환 언덕과 잉어문 계곡을 향하여 진격했다.

일본군의 중앙을 맡아 브레머 곶에 상륙한 제228연대는 버틀러 산을 향하여 남하했다.

우익을 맡아 노스포인트에 상륙한 제230연대는 자딘스 관측소와 황니천 계곡을 목표로 진격했다.

 

(홍콩 섬 상륙 및 전투.http://www.canadaatwar.ca/content-42/world-war-ii/the-battle-of-hong-kong/)

 
일본군이 상륙한 해안은 제5/7 라지푸트대대가 방어하고 있었다.

 

 

 

구룡반도에서 큰 피해를 입은데다가 1개 중대당 2개 대대의 일본군과 맞서야 했던 라지푸트 대대는 압도적인 전력을 가진 일본군에게 제압당하여 자정까지 해안에서 밀려났다.

 

동부여단장 세드릭 월리스 준장은 일본군이 상륙했다는 소식에 이어 서환언덕의 잉어문 요새가 점령되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월리스 준장은 잉어문 계곡 부근에 주둔 중이던 캐나다 왕립소총대대 C 중대에게 잉어문 요새를 즉시 반격하여 탈환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잉어문 계곡 북쪽에 배치된 6인치 포 2문이 화력지원을 맡았다.

 

C 중대장 비숍 소령은 부하들을 이끌고 요새의 6m 짜리 벽을 기어올랐으나 일본군의 사격을 받아 9명이 전사하자 19일 새벽 1시 30분에 공격을 포기하고 물러섰다.

6인치 포를 운용하던 병사들도 포를 포기하고 철수했으나 3인치 대공포로 무장한 의용대 제5대공포대는 철수 중에 일본군의 공격을 받아 퇴로가 끊겼다.

의용대 제5대공포대는 짧은 교전 끝에 포로로 잡혔는데 일본군은 생존자 29명을 총검으로 학살했다.

 

C중대는 잉어문 계곡 남쪽으로 물러나서 진형을 정비했다.

기관총 몇 정을 장비한 라지푸트 대대의 패잔병을 받아들여 전력을 강화한 C 중대는 추격해 온 일본군에게 강력한 반격을 가했다.

이 반격으로 급히 추격하던 일본군의 선두 중대는 65% 의 사상자를 내면서 진격을 멈추었다.

C 중대에서도 2개 소대에 달하는 사상자가 발생했다.

 

일본군은 C 중대에게 진로가 막히자 방향을 동쪽으로 틀어 파커산 쪽으로 진격했다.

도중에 일본군 제2/229대대 제8중대는 야전병원으로 쓰이고 있던 살레지안 선교원에 난입하여 의료진과 부상자를 모두 살해했다.

단지 3명만이 학살의 혼란 속에서 달아나 목숨을 부지했다.

종전 후에 전범재판소는 제229연대장 다나카 류사부로 대좌에게 학살의 책임을 물어 사형을 언도했다가 징역 20년으로 감형했다. 

 

(홍콩 섬 상륙 및 전투.출처 : Hong Kong 1941-45, P.57)

 

일본군이 파커 산쪽으로 이동하자 월리스 준장은 C 중대에게  일본군보다 먼저 가서 파커 산을 확보하라고 명령했으나 큰 피해를 입은 C 중대는 그럴 여력이 없었다.

그러자 월리스 준장은 다른 길을 찾았다.

 

블레이버 중위가 이끄는 A 중대의 1개 소대가 즉시 파커 산으로 파견되었다.

19일 새벽 3시에는 캐나다 왕립소총대대 본부의 클러크 대위에게 D 중대의 제16소대를 이끌고 파커 산으로 직행하여 블레이버 소대와 함께 파커 산을 확보하여 지키라는 명령이 떨어졌다.

하지만 지형에 어두운 클러크 대위는 도중에 길을 잃고 헤매다가 19일 아침 7시 30분이 되어서야 파커 산에 도착했다.

도착해보니 블레이버 소대가 이미 산을 점령한 100 명이 넘는 일본군을 상대로 치열한 전투를 벌이고 있었다.

클러크 대위는 화력 지원이 없는 상황에서 2개 소대로 100 명이 넘는 일본군을 무찌른다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판단하고 물러섰다.

이로써 파커 산은 일본군에게 넘어갔다.

Posted by 대사(P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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