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 구룡반도 함락
구룡보병여단장 세드릭 월리스 준장은 제2왕립스코트대대장 사이먼 화이트 중령에게 12월 10일 날이 밝는대로 반격을 실시하여 성문보를 탈환하라고 명령했다.
반격을 위하여 라지푸트 대대로부터 1개 중대가 증원되고 구룡반도의 포병대와 홍콩 섬의 포병대 일부가 화력지원을 담당할 것이었다.
홍콩수비대 사령관 크리스토퍼 몰트비 소장은 캐나다 위니펙척탄병대대의 1개 중대를 구룡보병여단에 배속시켰다.
그러나 화이트 중령은 난색을 보였다.
말라리아 때문에 왕립스코트대대의 병력이 정원의 절반 이하로 떨어져 있고, 일본군이 참호에 단단히 틀어박혀 있으며 지형이 불리하고 접근로가 노출되어 있다는 것이 핑계였다.
그러자 월리스 준장은 반격명령을 취소해 버렸다.
자신없어하는 대대장을 윽박질러 반격을 실시해 봐야 성공할 수 없다는 생각에서였다.
영국군의 반격이 없자 일본군이 공격에 나섰다.
10일 오전 7시 30분에 야포가 포격을 실시한 후에 성문보의 일본군이 남동쪽으로 진출하여 스머글러 능선에 있던 D/5/7 라지푸트중대를 공격했다.
D 중대는 캐슬피크 만에 떠있는 포함 시칼라가 쏘아주는 6인치 함포의 화력지원을 받으면서 1시간 동안 치열한 전투를 벌인 끝에 일본군의 공격을 물리쳤다.
그러자 일본군은 성문보로 물러났고 이후 일본군은 하루종일 영국군 방어선에 포격을 가했을 뿐 공격을 실시하지 않았다.
D/5/7 라지푸트중대는 몰트비 소장이 전선 단축을 위하여 서쪽의 제2왕립스코트대대에게 진드링커스 선을 떠나 골든힐 선까지 남하하라는 명령을 내리자 10일 오후에 스머글러 능선에서 물러나 남동쪽의 데빌스피크 방면으로 철수했다.
캐슬피크 만에 떠있던 포함 시칼라도 10일 오후에 일본기로부터 폭탄 1발을 얻어맞고 수리를 위하여 철수하고 포함 턴(Tern)이 임무를 이어받았다.
일본군은 10일 새벽에 성문보를 함락함으로써 진드링커스 선에 커다란 구멍을 뚫었으나 이러한 절호의 기회를 활용하기에는 내부 사정이 복잡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제228연대장 도이 데이히치 대좌는 성문보를 함락하자 제38사단사령부에 알렸는데 놀랍게도 사단에서는 작전계획을 헝클어뜨린다는 이유로 성문보에서 철수하라고 명령했다.
도이 대좌는 철수명령을 거부하고 보병단장 이토 소장 및 사단장 사노 중장과 무전으로 옥신각신했다.
이 문제는 제23군 사령관 사카이 중장이 도이 대좌에게 군령 위반을 이유로 11일 오전에 대포로 출두하라고 명령하는 사태로 발전했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일본군은 10일 하루 동안 성문보에 병력을 투입하여 공세를 이어가기는 커녕 수비를 위한 증원이나 보급조차 실시하지 않았다.
제38사단장 사노 중장은 10일 정오에 도이 연대장에게 전화를 걸어 성문보에 머물러도 좋다고 허락했으나 추가 공격은 금지했다.
성문보를 탈취했던 병력들은 10일 오전의 스머글러 능선 공격에 실패한 이후 하루종일 증원이나 보급은 고사하고 명확한 지침도 받지 못한 어정쩡한 상태에서 성문보를 방어하고 있었다.
따라서 10일에 영국군이 성문보에 단호하게 반격을 실시했으면 좋은 결과를 얻었을 가능성이 많았다.
성문보 공격과 관련하여 제23군 사령관 사카이 중장은 도이 대좌의 월권행위가 심각하기는 하지만 영국군 방어선에 커다란 구멍을 뚫는 전과를 올린 사실을 외면하기는 어려웠다.
결국 제23군은 제228연대 제3대대 제10중대장 와카바야시 중위가 정찰하다가 성문보의 방어가 허술한 것을 보고 그대로 돌격하여 점령한 것으로 얼버무리는 선에서 사건을 마무리지었다.
서쪽에서는 10일 오후에 제229연대가 타이드코브를 건넜다.
이날 오후 12시 40분에 개전 이후 최초로 영국군의 대공포가 타이드코브에서 일본기를 격추했다.
(1941년 12월 8일 - 13일에 걸친 홍콩전투상황도. 출처 : Hong Kong 1941-45, P.36)
몰트비 소장은 성문보가 함락되자 구룡반도 방어에 자신감을 잃고 10일 정오를 기하여 구룡보병연대에 철수 명령을 내리려 했다.
해군지휘관 콜린슨 대령은 시간이 너무 촉박하다면서 반발했다.
그러자 몰트비 소장은 24시간 늦춘 11일 정오에 철수명령을 내리기로 했다.
카이탁 비행장의 영국공군 병력들에게는 비행장을 폐쇄하고 홍콩 섬 남부의 애버딘으로 가서 해군의 지휘를 받으라는 명령이 떨어졌다.
한편 10일 하루 동안 성문보를 둘러싼 내부의 혼란을 수습한 일본군은 11일 아침부터 공세를 시작했다.
전날 스머글러 능선을 공격했다가 실패한 일본군은 방향을 바꾸어 남쪽의 골든힐을 공격했다.
제2왕립스코트대대장 화이트 중령은 휘하의 B, C 및 D 중대를 모두 골든 힐에 투입하여 일본군에 맞섰다.
핑커튼 대위가 이끄는 D 중대가 11일 새벽에 골든 힐에 도착하니 몇몇 일본군이 올라와 있었다.
D 중대는 총검돌격을 실시하여 일본군을 몰아내고 방어준비를 했다.
골든 힐은 진 드링커스 선의 후방이어서 미리 만들어 둔 방어 시설이 없었다.
곧이어 B 및 C 중대가 도착하여 일본군의 거센 공격에 맞섰다.
백병전까지 벌어지는 격전 속에서 B 중대장과 C 중대장이 전사했고 결국 제2왕립스코트대대는 골든 힐에서 밀려났다.
제2왕립스코트대대의 뒤에는 캐나다 위니펙척탄병대대의 1개 중대와 브렌건 캐리어 3대, 장갑차 2대를 보유한 의용대 제1중대가 버티고 있어 전선의 전면적인 붕괴는 막을 수 있었다.
그러나 방어선의 중앙을 담당하던 펀잡대대의 서쪽이 열려 버렸다.
11일 정오에 몰트비 소장으로부터 구룡보병여단에게 구룡반도에서 철수하라는 명령이 떨어졌다.
구룡시에서는 폭파작업이 진행되었다.
공병은 연료저장고를 폭파하고 구룡조선소를 파괴했다.
발전소도 폭파하여 저녁이 되자 구룡시는 암흑 천지로 변했으며 스톤커터 섬의 해안포도 폭파했다.
영국해군은 연합국 선박들을 침몰시켰는데 중립국인 스웨덴 선박까지 침몰시켰다.
당연히 선장은 격렬하게 항의했으나 소용없었다.
철수는 홍콩 섬에서 보내온 연락선들이 담당했는데 중국인 선원들이 달아나 버려 해군 수병들이 운용했다.
11일 오후 3시 15분부터 야포와 중장비, 차량 등이 홍콩 섬으로 철수하기 시작했다.
일본군이 야포로 철수를 방해했지만 막지는 못했다.
일본해군은 11일 새벽에 홍콩 남서쪽의 남아섬(南丫島)을 경유하여 홍콩 섬 남해안의 애버딘에 해군육전대 병력을 상륙시키려고 시도했다.
해군육전대는 남아섬에서 삼판을 타고 애버딘 해군기지에서 불과 270m 떨어진 거리까지 접근했다가 위니펙척탄병대대의 기관총 사격과 의용대 제3포대의 포격을 받고 뱃머리를 돌렸다.
오후에 일본군이 다시 남아 해협을 건너려고 시도하자 해안포가 불을 뿜어 저지했다.
구룡보병여단은 철수를 시작했다.
제2왕립스코트대대와 캐나다 중대는 구룡시의 부두를 통하여 철수하고 펀잡대대와 라지푸트대대 그리고 포병대는 구룡반도 동쪽의 마유당(馬游塘)으로 철수했다.
몰트비 소장은 이 시점에서 구룡보병여단장 월리스 준장의 의견에 따라 마유당 방어선을 최대한 오래 지킬 생각이었다.
마유당 남쪽의 데빌스 피크를 넘겨주면 일본군이 레이어먼 해협과 홍콩 섬의 북동쪽을 감제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물러서는 영국군을 일본군이 추격했다.
12일 새벽까지 일본제3/230대대 병력 350명이 구룡시에 진입하여 영국군의 퇴로를 끊으려 했다.
방어선의 서쪽을 담당했던 제2왕립스코트대대와 캐나다 중대는 일본군이 도달하기 전에 구룡시 북쪽의 심수보 막사를 통과하여 구룡시 북서쪽의 조단로드 부두에서 승선했다.
승선은 11일 오후 7시 30분부터 시작되었으며 별다른 방해를 받지 않고 진행되었다.
선단은 승선을 마치자 부두를 떠나 자정을 전후하여 무사히 빅토리아 시티에 도착했다.
방어선의 중앙을 담당했던 펀잡대대는 철수 과정에서 혼란을 겪었다.
대대의 주력은 목적지인 구룡반도 동쪽의 마유당에 도착했지만 대대본부는 11일 밤에 길을 잃어 카이탁 비행장으로 남하해 버렸다.
본부는 첨사저(尖沙咀)에서 스타페리를 타고 철수했는데 배가 부두를 떠나는 순간까지 추격하는 일본군과 총격전을 벌여야 했다.
펀잡대대의 주력은 마유당을 통과하여 라지푸트 대대의 1개 중대 및 제25중형포 포대와 함께 12일 새벽 4시까지 레이어먼 해협을 건너 홍콩 섬으로 철수했다.
일본군은 12일 오후 3시에 마유당에 접근하여 오후 5시에 강력한 공격을 가했으나 마유당 방어선을 지키던 라지푸트 대대는 야포의 지원을 받아 일본군의 공격을 물리쳤다.
구룡보병여단장 월리스 준장은 데빌스 피크를 지켜야 한다는 생각이 확고했지만 몰트비 소장은 이때부터 데빌스 피크를 지키는 것보다 라지푸트 대대를 온전한 상태로 홍콩 섬으로 철수시키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하기 시작했다.
몰트비 소장은 12일 오후 9시에 라지푸트 대대에게 마유당 방어선을 떠나 남쪽으로 철수하라고 명령했으며 13일 새벽 3시 30분에는 홍콩 섬으로 철수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이 명령에 따라 라지푸트 대대는 레이어먼 해협을 건너 홍콩 섬으로 철수했다.
13일 아침에 철수한 C/2/14 라지푸트 중대를 마지막으로 영국군은 구룡반도에서 완전히 물러났다.
철수는 12일 오후에 마유당 방어선을 공격했다가 격퇴당한 일본군이 야포를 끌어와서 마유당 방어선에 포격을 가하면서 대대적인 공격을 준비하던 와중에 이루어졌기 때문에 별다른 방해를 받지 않았다.
덕분에 병력 뿐 아니라 야포 및 장갑차 모두와 차량 대부분을 싣고 올 수 있었으나 선박이 부족하여 노새 170마리와 탄약의 상당량은 두고와야 했다.
일본해군이 철수를 방해하려 했으나 홍콩 섬의 9.2인치 해안포가 불을 뿜자 기겁하여 물러섰다.
철수 작전에 가장 큰 장애는 빅토리아 항에 들어찬 중국인들의 정크선들이었다.
생각다 못한 빅토리아 항의 항무관(harbor master)이 정크선 15,000척을 태풍 피항지인 구룡반도의 유마지(油麻地) 정박지에 몰아넣고 입구에 하천기선 3척을 침몰시켜 봉쇄했다.
극단적인 방법이었으나 철수에 도움이 되었다.
침공 초기에 홍콩 섬의 민간인들은 평정을 유지하고 있었으나 구룡반도에서 철수한 군인들이 도착하자 동요하기 시작했다.
빅토리아 시티에 유언비어가 돌아다니고 일부 지역에서는 폭도들이 약탈을 자행했으나 경찰이 진압했다.
12일 밤에 한척의 배가 그린 아일랜드에서 수톤의 다이너마이트를 싣고 홍콩 섬으로 철수했다.
이 배의 도착은 고지가 되어 있었지만 신경이 날카로워진 북해안의 병사가 접근하는 배를 향하여 발포했다.
다이너마이트가 폭발하면서 승조원이 전멸하고 배는 가라앉았다.
수톤에 달하는 폭발물의 손실은 큰 타격이었다.
영국군은 예정보다 빠른 5일 만에 구룡반도에서 철수했다.
구룡반도 전투에서 영국군 전사자는 165명이며 49명이 포로가 되었다.
일본군 전사자는 22명, 부상자는 121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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