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 에필로그

 

홍콩을 점령한 일본은 군정을 실시했는데 중국본토와 구별해 직접 통치했다.

최초의 홍콩총독은 제23군 사령관 사카이 다카시 중장이었고 1942년 1월 19일에 이소가이 렌스케 장군이 홍콩총독으로 임명되어 1944년 12월 24일까지 재임했으며 마지막 총독은 다나카 히사가즈 장군이었다.

이소가이 총독은 홍콩에서 일본군의 군표를 유통시켰는데 이것이 심각한 인플레이션을 일으켰다.

 

홍콩전투에서 포로가 된 영국군 병사들은 1942년 9월부터 일본으로 이송되어 강제 노동에 처해졌다.

1942년 9월 1일에 약 700 명의 포로가 처음으로 일본으로 이송되었다.

9월 25일에는 1,834명의 포로가 778명의 일본군과 함께 리스본마루에 실려 일본으로 향했다.

리스본마루는 10월 1일에 상해 부근 해상에서 미국잠수함 그루퍼가 쏜 어뢰를 맞고 침몰했다.

이 사고로 828명의 포로가 사망했는데 선창에 갇혀있던 포로들이 몰래 만든 칼로 빗장을 열고 탈출함으로써 몰살을 면했다.

리스본마루에 타고 있던 일본군들은 가라앉는 뱃전에 버티고 서서 탈출하는 포로들에게 사격을 가했다. 

살아남은 포로들은 일본배에게 구조되어 상해에 상륙했다가 10월 7일에 신세이마루와 워싱턴마루에 실려 일본으로 이송되었다.

일본에 도착한 포로들은 고베와 오사카에 나눠 수용된 다음 강제노동에 처해졌다.

종전시까지 기아와 질병으로 290명이 사망하여 리스본마루에 탔던 1,834명의 포로들 중 716 명만이 살아남았다.

 

(리스본마루. http://en.wikipedia.org/wiki/Lisbon_Maru)

 

1945년 8월 15일에 일본이 항복함으로써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났다.

1943년에 열린 카이로 회담의 결정에 의하여 홍콩의 일본군은 장개석 총통에게 항복하게 되어 있었으나 국민당군은 당장 홍콩에 들어갈 입장이 되지 않았다.

반면 영국은 중국군이 홍콩을 점령하고 주권을 주장하기 전에 함대를 파견하여 일본군의 무장을 해제시키려고 했다.

장개석 총통은 영국함대가 중국군보다 먼저 홍콩에 들어가지 못하게 해달라고 트루먼 대통령에게 요청했으나 거부당했다.

항공모함 5척, 전함 2척, 순양함 3척, 구축함 6척 등 총 55척으로 이루어진 영국함대는 제11항모전단사령관 세실 하코트 소장의 지휘 아래 1945년 8월 27일에 필리핀 수빅만을 떠나 29일 오후 3시에 홍콩 앞바다에 도착했다.

홍콩주둔 일본군의 항복을 위한 외교적인 최종 조율이 진행되는 동안 소해정들이 빅토리아 항을 소해하고 영국해병대는 주변의 작은 섬에 상륙하여 자살보트들을 찾아내어 파괴했다.

그동안 항공모함 일러스트리어스에서 이함한 아벤저 뇌격기가 계덕 비행장에 착륙하여 일본 측의 연락장교를 태우고 돌아왔다.

 

다음날인 8월 30일 오후에 영국함대는 소해정을 선두로 잉어문 해협을 통하여 빅토리아 항에 진입했다.

영국함대가 접근하자 자살보트 3대가 뛰쳐나왔으나 전투초계기들의 기총소사를 받고 격침되었다.

곧 영국해병대가 상륙하여 일본군을 무장해제시키고 심수보의 포로수용소를 해방시켰다.

 

홍콩주둔 일본군의 항복 조인식은 1945년 9월 16일에 있었다.

국민당에서 대표가 파견되어 조인식을 주재했으나 이미 영국군이 확고하게 지배하고 있는 홍콩에서 그의 역할은 얼굴마담일 뿐이었다.

이리하여 영국은 홍콩을 다시 차지했으며 1997년 7월 1일에 중화인민공화국으로 주권이 넘어갈 때까지 홍콩은 영국의 식민지로 남았다.

 

홍콩을 점령한 제38사단은 1942년 1월 4일에 제16군에 편입되어 네덜란드령 동인도제도 전투에 참가했으며 10월에는 과달카날 전투에 투입되어 큰 피해를 입었다.

성문보를 점령했던 와카바야시 중위도 1943년 1월 14일에 과달카날에서 전사했다.

과달카날에서 철수한 후 보병 제229연대는 뉴조지아 섬 전투에 참가했다.

이후 제38사단은 라바울을 방어하다가 종전을 맞이했다.

제38사단이 떠난 후 홍콩에 주둔한 일본군은 독립보병 제67, 제68 및 제69연대였다.

 

일본의 홍콩총독들은 모두 전후에 전쟁범죄로 단죄를 받았다.

초대 총독인 사카이 중장은 사형선고를 받고 1946년에 총살당했다.

2대 총독인 이소가이 장군은 종신형을 선고받고 복역하다가 1967년에 석방되었다.

마지막 총독인 다나카 장군은 중국에서의 전쟁범죄로 사형선고를 받고 1947년에 처형되었다.

 

제38사단장 사노 타다요시 중장은 사단을 이끌고 네덜란드령 동인도제도와 과달카날에서 싸웠으며 종전 직전인 1945년 7월에 센다이에서 병사했다.

 

제38사단의 보병단장 이토 다케오 소장은 네덜란드령 동인도 제도와 과달카날에서 싸웠으며 독립혼성 제40여단장으로 뉴아일랜드 섬을 수비하다가 종전을 맞았다.

전쟁범죄로 1946년 5월에 라바울의 호주군 법정에서 사형을 언도받았으나 10월에 무죄를 인정받고 석방되었으며 1965년에 75세를 일기로 사망했다.

 

홍콩전투 당시 제2견지함대사령관이었던 니이미 마사이치 해군중장도 전쟁에서 살아남았다.

84세에 제2차 세계대전사를 출간하기도 한 니이미 제독은 106세까지 장수를 누리고 1993년에 사망했다.

니이미 중장의 기함이었던 경순양함 이스즈는 솔로몬 제도와 레이테만에서 싸웠으며 1945년 4월 7일에 자바해에서 미국잠수함에게 격침되었다.

 

(일본해군의 경순양함 이스즈. 자세한 내용은 여기로. http://en.wikipedia.org/wiki/Japanese_cruiser_Isuzu)

 
마크 영 총독은 종전과 동시에 석방되었으며 1946년에 다시 홍콩총독으로 임명되었다.
그러나 영 총독은 홍콩에 자치권을 부여하는 문제로 영국정부와 갈등을 빚다가 1947년에 해임되었고 89세를 일기로 1974년에 사망했다.

 

 

크리스토퍼 몰트비 소장은 전쟁 기간 동안 홍콩, 상해, 대만을 거쳐 심양의 수용소에서 종전을 맞았다.

영국에 돌아온 몰트비 소장은 1946년에 퇴역했고 90세를 일기로 1980년에 사망했다.

 

동부여단장 세드릭 월리스 준장은 석방 후 캐나다로 이민가서 사업가로 변신했다.

뱅쿠버에서 살던 월리스 준장은 101세를 일기로 1996년에 사망했다.

 

캐나다 왕립소총대대장 윌리엄 홈 중령은 종전 이후 캐나다군에 돌아가 준장으로 퇴역했다.

제2왕립스코트대대장 사이먼 화이트 중령은 석방되어 영국에 돌아왔으나 곧 암으로 사망했다.

진책 소장은 중국으로 돌아간 후 국민당에서 일했고 종전 이후 광주 시장을 맡기도 했으나 1949년에 자택에서 수면제를 먹고 자살했다.

 

- 참고문헌 및 웹사이트

 

<대동아전사-제6권 태평양전쟁> 오바다 아츠시로 지음, 유준수 옮김, 한양문화사, 1974년

<대동아전쟁비사-제5권 중국편> 한국출판사, 1971년

 
<Hong Kong 1941-45, First strike in the Pacific War> Benjamin Lai, Osprey, 2014
<History of The second World War, The War Against Japan, Vol.1 The Loss of Singapore> Major-General Woodburn Hirby, Naval & Military Press, 1968

 

 

http://www.wikipedia.org/

http://blog.naver.com/mirejet (도위창님 블로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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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 총평

 

홍콩이 개전 18일 만에 함락되었다는 소식은 영국 조야에 큰 충격을 주었다.

윈스턴 처칠 수상과 전시 내각은 버린 카드인 홍콩이 언제까지나 버틸 것이라고 믿지는 않았으나 그렇게 일찍 항복할 줄은 몰랐다.

 

홍콩전투에서 일본군은 정확한 정보에 입각하여 주도면밀하게 준비했다.

일본군은 간첩들의 활약으로 전투가 시작되기 전에 영국군의 방어태세를 파악하고 약점을 이용할 준비를 갖출 수 있었다.

홍콩 전투를 18일 만에 성공적으로 마무리지을 수 있었던 배경에는 정보전의 승리가 있었다.

 

일본군의 전술에는 새롭거나 참신한 요소는 없었다.

중일전쟁에서와 마찬가지로 일본군 지휘관은 주도권을 중시했으며 병사의 감투정신에 크게 의존했다.

 

일본병사는 뛰어난 전투원이었다.

그들은 잘 훈련되었으며 대부분 중일전쟁에서 실전경험을 가지고 있었다.

억세고 야간전투에 능숙한 일본병사는 평지 뿐 아니라 산악전에도 익숙했으며 전장의 지형지물을 교묘하게 활용했다.

경무장한 일본병사는 빠르고 조용하게 기동했으며 용맹함과 교활함을 함께 갖추고 있었다.

영국군은 성문보를 점령하거나 홍콩섬에 최초로 상륙한 일본군이 특별강습부대라고 생각했으나 실제로는 일반 보병이었다.

 

일본군의 보병 숫자는 영국군을 압도하지 못했으나 포병은 압도적으로 우세했고 제공권을 완전히 장악했다.

일본제38사단은 잘 훈련되고 실전경험을 가진 병사들로 구성된 균질적인 조직이었다.

반면 영국군의 주력은 대부분 주둔 임무를 맡고 있던 병력들로서 실전경험은 커녕 전투훈련조차 제대로 받지 못했다.

홍콩수비대는 장비도 들쭉날쭉하고 국적이나 출신도 다양한 여러 잡다한 부대들을 급하게 끌어모은 즉흥적 조직에 지나지 않았다.

 

일본군은 기관총에 대량의 철갑탄을 보급했는데 철갑탄은 특화점이나 엄폐호에 달려 있는 철제문을 뚫을 수 있어서 위협적이었다.

소형 박격포의 일종인 척탄통은 전선 가까이에서 운용할 수 있었으며 보다 구경이 큰 박격포들 또한 효과적이었다.

일본군은 박격포탄의 보급에 중국인 인부들을 동원했다.

반면 영국군의 박격포는 도착이 늦어 훈련할 시간이 없었고 포탄도 절대적으로 부족했다.

일본군은 기존의 사단포병보다 크게 증강된 포병을 효율적으로 사용하여 영국군 포병을 압도하고 필요한 화력지원을 제공했다.

 

홍콩이 예상보다 빨리 함락된 데에는 구룡반도를 일찍 잃은 것도 한 원인이 되었다.

일본군 공병은 영국군의 예상보다 빨리 심천강에 도하 준비를 완료하고 대군을 도하시켰다.

구룡반도의 영국군은 가까스로 장비와 시설을 파괴할 수 있었으나 일본군은 어디에 어떤 시설이 있고 수리하려면 어떤 자재가 얼마나 필요한지를 정확하게 알고 미리 준비했다.

 

홍콩 전투에서 일본군의 통신, 수송 및 기타 지원부대들은 장비를 제대로 갖추고 잘 조직되어 임무를 완수했다.

반면 영국군의 차량은 중국 민간인들이 운전하는 경우가 많았는데 민간인 운전사들은 규율이 부족하여 자주 도망쳤다.

또한 수송용 노새가 부족하여 언덕 지형에서의 보급에 곤란을 겪었다.

 

홍콩전투에서 일본군은 항공력을 유감없이 과시했다.

제공권을 완전히 장악했기 때문에 폭격기는 전투기의 호위를 받을 필요가 없었고 지상의 일본군이 자신들의 위치를 조종사에게 알리기 위하여 표식을 설치해도 영국기의 공습을 받을 위험이 없었다.

또한 영국군의 대공포 세력이 미약하여 저공 폭격이나 탄착 관측 또한 자유롭고 안전하게 실시할 수 있었다.

이런 좋은 조건아래 일본기들은 맹활약했다.

고공폭격은 정확했으며 저공폭격 및 기총소사도 효과적이었다.

일본군의 항공력을 폄하하고 있던 영국군은 독일공군이 공습을 지도하고 있는 것이 틀림없다고 생각했다.

 

제공권의 상실은 필연적으로 제해권의 상실로 이어졌다.

애당초 홍콩의 영국해군 세력은 일본함대에 대들기 힘든 수준이었지만 제공권을 상실하면서 해안포의 사정거리 안에서 홍콩섬 주변을 초계하는 일도 불가능해졌다.

제해권이 없는 상황에서 홍콩섬은 기습적인 상륙위협에 시달렸으며 수비대의 배치에도 제약이 따랐다.

몰트비 소장은 상륙 위협이 가장 큰 북해안에 전력을 집중하는 대신 기습상륙을 염려하여 전 해안선에 걸쳐 병력을 분산 배치할 수 밖에 없었다.

 

(1941년 12월 18일 아침 현재 홍콩 섬의 방어태세.  출처 : Hong Kong 1941-45, P.51)

 
제해권의 상실 때문에 구룡반도의 방어도 약해졌다.

 

구룡반도의 3개 대대에 1-2개 대대라도 추가되었으면 훨씬 오랫동안 버틸 수 있었을 것이었다.

그러나 제해권을 잃어 홍콩섬이 기습 상륙의 위협에 놓여있는 상황에서 구룡반도에 병력을 더 파견할 수는 없었다.

 

영국군의 포정들은 일본군의 공습에 노출되어 활동에 큰 위협을 받으면서도 지상군 지원에 나름대로 활약했다.

어뢰정들은 무장이 적절하지 못했다.

주무장인 어뢰는 일본군이 해협횡단에 사용하는 주정들을 공격하는 데에는 무용지물이었으며 이런 임무에 사용할 수 있는 무기는 기관총 5정뿐이었다.

 

구룡반도의 전투에서 성문보 상실은 분기점이었다.

성문보를 잃으면서 진드링커스 선에 배치된 영국군 전체가 위험에 빠지자 서둘러 후퇴할 수 밖에 없었다.

영국군의 급속한 후퇴는 일본군으로서도 뜻밖이었다고 한다.

 

일본군의 홍콩섬 상륙은 성공적이었다.

제38사단은 달없는 밤, 만조 그리고 불타는 저유탱크 및 페인트 공장에서 나는 연기가 영국군의 시야를 가리는 조건을 활용하여 주정을 타고 큰 어려움없이 상륙했다.

상륙 성공은 일본군의 전술적 성취이기도 하지만 방어를 담당한 영국군 특화점들의 위치가 좋지 않았던 것도 사실이다.

특화점들은 상호 위치가 나빠서 교차사격이 불가능했으며 종심이 얕았다.

하지만 책임을 전적으로 영국군에게 돌릴 수는 없다.

홍콩섬 북해안은 번화한 지역으로 조선소, 작업장, 산업시설, 그리고 많은 민간 시설물들이 늘어서 있었으며 이런 곳에 군사시설을 만들 경우 수많은 이해관계자들의 저항을 받을 수 밖에 없다.

민주국가에서, 더군다나 전시가 아닌 평시에는 그런 경우 순전히 군사적인 면만을 고려하여 건설을 밀어붙이기는 불가능하다. 

 

일본군이 상륙하여 홍콩섬 내부로 진출하자 영국군에게는 의지할만한 강력한 방어선이 없었다.

또한 기습적 상륙에 대비하여 흩어져 있던 병력들은 시간에 맞추어 결정적인 전장에 달려오기 힘들었다.

 

전투가 끝난 후 뒤돌아 보면 영국군은 두가지 큰 실수를 저질렀다.

첫째는 19일에 동부여단이 홍콩섬 남동쪽의 스탠리 지역으로 물러나 버린 일이다.

이로써 서부여단과의 연결이 끊어지면서 방어선이 두동강났고 결과는 파멸적이었다.

몰트비 소장은 동부여단이 홍콩섬 중부의 대담계곡과 황니천계곡을 잇는 선에서 서부여단과 연결을 유지해 주기를 바랐지만 동부여단장 세드릭 월리스 준장의 주장에 밀려 철수를 허가했다.

 

두번째는 병력 이동에 관한 것이다.

12월 18일 밤부터 19일 새벽에 걸쳐 일본군의 주력이 북해안에 상륙하여 황니천 계곡으로 남하하는 것이 확실해졌을 때 몰트비 소장은 흩어져 있던 병력에게 과감한 이동 명령을 내려 결전장인 황니천 계곡에 투입해야 했다. 

물론 일본군은 동시에 남쪽으로도 양동작전을 개시했지만 규모로 보나 위험성으로 보나 일본의 주공이 판명나면 결전장으로 병력을 집결하는 결단이 필요했다.

결단을 못 내리는 바람에 일본군은 큰 저항을 받지 않고 결전장인 황니천 계곡에 진입했고 압도적인 병력의 열세에 몰린 수비대는 서부여단장 존 로슨 준장이 전사하는 등 큰 피해를 입으면서 참패했다.

훗날 몰트비 소장은 이러한 비판에 대해 당시 자신에게는 해상의 상황을 알 수 있는 정찰기나 초계 함정이 없었다는 사실을 강조했다.

그는 만일 24시간 내로 일본군의 기습상륙이 없을 것이라는 사실을 미리 알 수 있었다면 흩어져 있던 병력들을 늦지 않게 이동시켜 황니천 계곡에 투입했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게다가 로슨 준장의 전사가 몰트비 소장에게 전달되는 속도가 늦어져 19일에 황니천 계곡에서 실시된 반격은 중대 단위로 따로 실시되면서 실패했다.

새로운 서부여단장이 일찍 임명되어 반격을 조율했다면 어느 정도의 성공을 거둘 수 있었을 것이다. 

 

홍콩 전투에서 영국군의 반격은 흔히 반격명령을 받은 지휘관이 여러 부대의 병력을 끌어모은 혼성부대를 지휘하여 실시했다.

대부분 사전정찰이 불가능했고 통신의 미비로 부대 사이의 협조가 힘들었으며 야포 세력은 미약했다.

이런 상황에서 반격은 대부분 실패했으며 설사 목표를 점령해도 유지하기 어려웠다.

 

어려운 여건 속에서도 소부대 지휘관들과 병사들은 잘 싸웠다.

영국군, 캐나다군, 인도군, 의용대 할 것 없이 많은 부대들이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훌륭하게 싸웠으며 많은 포수, 공병, 그리고 항공대원들도 보병으로 투입되어 열심히 싸웠다.

빈약한 세력을 가진 해군도 어려운 여건하에서 최선을 다하여 임무를 수행했으며 해병대와 해군 수병들은 지상 전투에서도 일정한 몫을 담당했다.

 

몰트비 소장이 전후에 보고한 바에 따르면 홍콩전투에서 영국군의 피해는 전사 2,123명, 부상 1,332명이었다.

포로는 10,947명이었는데 영국군 약 5,000 명, 인도군 약 4,000 명, 캐나다군 약 2,000명이었다.

일본군의 피해는 전사 678명, 부상 1,413명인데 영국군 공식전사는 일본군의 피해를 전사 675명, 부상 2,079명으로 약간 높게 적고 있다.

영국군 공식전사에 따르면 제228연대가 약 800명, 제229연대가 약 600명, 제230연대가 약 1,000명의 사상자를 내었다.

민간인 피해는 사망 약 2,000 명, 부상 약 6,000 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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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 항복

 

1941년 12월 24일과 25일에 걸쳐 스탠리 반도에서 일본군과 동부여단 사이에 최후의 공방전이 진행되는 동안 일본군은 서부여단에 대해서도 공세를 실시했다.

일본군은 24일 저녁이 되자 빅토리아시티의 중심부인 해군조선소와 몰트비 소장의 요새사령부에 강력한 포격을 가했다.

 

자정을 막 넘긴 시각에 일본제229연대가 만자계곡을 공격했다.

일본군은 40mm 대공포를 대인용으로 사용하면서 착실하게 진격하여 만자 계곡의 영국군을 몰아내고 중국함대클럽(China Fleet Club)에 도달했다.

만자 광장에 배치되어 있던 제965포대의 18파운더(84mm)야포도 파괴되었으며 일본군은 해군조선소의 서쪽 변경에 접근했다.

라지푸트 대대는 일본군의 공격을 받아 경주로(Racecourse) 서쪽으로 밀려났다.

일본군은 남쪽에서도 공세를 가하여 베넷츠힐을 점령했다.

 

승리를 확신한 일본군은 사자를 보내어 항복을 요구했다.

일본군에게 포로로 잡혔던 마너스 예비역 소령과 실즈가 25일 아침에 항복을 요구하는 일본제23군 사령관 사카이 다카시 중장의 친서를 가지고 찰스 영 홍콩총독을 찾아왔다.

마너스 소령은 해군조선소장이었으며 실즈는 홍콩행정회의 구성원이었다. 

사카이 중장은 친서에서 25일 정오까지 항복하라고 요구했다.

 

영 총독은 방어위원회를 소집했다.

회의에서 몰트비 소장은 반격을 준비하고 있다고 말했으며 해군을 지휘하던 콜린슨 해군대령은 해군조선소를 끝까지 지키겠다고 다짐했다.

방어위원회는 항전을 결의했고 영 총독은 항복요구를 거절했다.

 

그러자 일본군은 무지막지한 포격과 공습을 가해왔다.

일본군의 공습으로 병력의 이동이 불가능하여 몰트비 소장은 반격을 위한 부대를 모을 수 없었으며 동부여단과의 통신도 끊어졌다.

 

25일 오후 2시 30분에 빅토리아시티 남쪽의 파리시 산이 점령되었다는 소식이 들어왔다.

파리시 산의 일본군과 빅토리아시티 사이에는 이제 아무것도 없었다.

일본군에게 빅토리아시티로 향하는 길이 활짝 열리자 몰트비 소장도 더는 버틸 재간이 없음을 깨달았다.

몰트비 소장은 해군지휘관 콜린슨 대령과 통화하여 항복이 불가피함을 설명했고 콜린슨 대령도 수긍했다.

 

25일 오후 3시 15분에 몰트비 소장은 영 총독에게 전화를 걸어 상황을 설명했다.

일본군은 만자 계곡을 지나 빅토리아시티를 굽어보는 파리시 산에 도달했으며 영국군의 전선은 곳곳에서 분단되어 있었다.

전선 남쪽에서는 일본군이 리틀홍콩의 탄약창을 점령하기 직전이었으며 그럴 경우 탄약 보급이 불가능해질 것이었다.

안 그래도 보유 탄약이 부족한 영국군 부대들은 탄약창이 함락되면 버틸 재간이 없었다.

이미 식수는 바닥을 드러내고 있었다.

보고를 받은 영 총독은 몰트비 소장에게 항복을 교섭할 권한을 부여했다.

일본군은 영 총독과 몰트비 소장이 직접 구룡반도에 와서 항복하라고 요구했다.

 

25일 오후에 영 총독과 몰트비 소장을 태운 배가 백기를 내걸고 해협을 가로질러 구룡반도에 도착했다.

1941년 12월 25일 오후 3시 30분, 일본군이 동아호텔로 이름을 바꾼 구룡반도의 페닌슐라 호텔 3층에서 영 총독은 일본제25군 사령관 사카이 중장에게 정식으로 항복했다.

항복 소식은 서부여단에게는 즉시 알려졌으나 동부여단과는 통신이 끊어진 상태였으므로 왕립공병대의 램 중령과 프라이어 중위가 항복 명령을 전달하기 위하여 파견되었다.

 

25일 오후에 동부여단 사령관 세드릭 월리스 준장은 일본군의 야간 공격에 대비하여 병력을 재배치하고 있었다.

이때 전방의 일본군 진영으로부터 백기를 매단 승용차 1대가 다가왔다.

승용차에 타고 있던 램 중령과 프라이어 중위는 월리스 준장에게 즉시  항복하라는 몰트비 소장의 명령을 구두로 전달했다.

월리스 준장은 구두명령에 따라 항복하기를 거부하면서 문서화된 정식 명령서를 요구했다.

제2왕립스코트대대의 할랜드 소령이 명령서를 받기 위하여 돌아가는 승용차를 타고 동행했다.

 

할랜드 소령은 항복을 명령하는 몰트비 소장의 정식 명령서를 들고 자정이 넘어서야 동부여단으로 돌아왔다.

1941년 12월 26일 새벽 2시 30분에 월리스 준장은 2,000 여명의 부하들과 함께 일본군에게 항복했다.

 

일본제38사단은 홍콩 함락 직후 병사들에게 공식적으로 3일 간의 휴가를 주었다.

이것은 약탈을 허용한다는 의미였으므로 일본 병사들은 3일간 홍콩 전역을 휩쓸면서 약탈과 강간을 자행했다.

1941년 12월 28일에 일본군은 2천명이 참가하는 승리 퍼레이드를 펼쳤다.

제38사단장 사노 중장이 말을 타고 선두에서 퍼레이드를 이끌었다.

퍼레이드가 진행되는 동안에도 일본군의 일부 병사들은 약탈과 강간을 저지르고 있었다.

 

(1941년 12월 28일 거행된 일본군의 퍼레이드 광경. http://en.wikipedia.org/wiki/Stanley_Internment_Camp)

 

홍콩에서 영국당국을 도와 일본군과 내통하는 제5열을 처단했던 진책 소장은 항복이 발효되기 전에 홍콩을 떠나기로 했다.

원래는 애버딘 항에서 어뢰정을 타기로 했으나 일본군이 브릭힐을 점령하자 어뢰정들은 애버딘 항을 떠나 애버딘 섬의 남쪽 해안에 숨어서 진책 소장을 기다렸다.

 

부하들과 함께 빅토리아시티를 떠난 진책 소장이 애버딘 항에 도착해보니 어뢰정은 보이지 않고 의용대의 란치(launch)인 콘플라워2 호만 있었는데 그마저 연료가 없었다.

마침 주변에서 연료가 들어있는 드럼통을 발견한 진책 소장 일행은 급히 연료를 채운 다음 바다로 나섰다.

이때 브릭힐의 일본군이 란치를 발견하고 기관총 사격을 가했다.

란치가 총탄에 맞아 해상에 멈추자 진책 소장은 의족을 벗어 던지고 바닷물에 뛰어들었다. 

그 순간 진책 소장은 왼쪽 손목에 총알을 맞았으나 한팔과 한다리만으로 헤엄을 쳐서 애버딘 섬 북해안에 상륙했다.

진책 소장의 부관만이 애버딘 섬에 같이 상륙했고 나머지 부하들은 가라앉은 란치에서 목숨을 잃거나 홍콩섬으로 헤엄쳐 돌아가 따로 탈출했다.

 

(란치. http://en.wikipedia.org/wiki/Launch_(boat))

 

란치를 격침한 일본군 기관총 사수는 애버딘 섬의 북해안에 상륙한 진책 소장과 부관에게 잠시 기관총을 쏘다가 두 사람이 시야에서 사라지자 흥미를 잃었다.

진책 소장이 애버딘 섬의 남해안에 가보니 어뢰정들이 숨어 있었다.

 

살아남은 영국해군의 어뢰정 5척(제7, 제9, 제10, 제11 및 제27정)은 25일 저녁까지 숨어 있다가 오후 9시 30분에 진책 소장을 태우고 홍콩 북동쪽의 미르스 만을 향하여 출발했다.

진책 소장과 어뢰정 승조원을 합친 68명은 26일 새벽에 미르스 만에 상륙하여 마중나온 공산계열의 항일게릴라와 만났다.

어뢰정을 모두 자침시킨 진책 소장과 승조원들은 게릴라의 보호 아래 육로로 이동하여 무사히 중경에 도착했으며 어뢰정 승조원들은 1942년 2월 14일에 항공기 편으로 중경을 떠나 버마의 랭군에 도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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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 스탠리 반도 전투

 

1941년 12월 24일 아침에 동부여단 사령관 세드릭 월리스 준장은 캐나다왕립소총대대장 윌리엄 홈 중령을 비롯한 장교들과 회의를 가졌다.

왕립소총대대의 장교들은 의기소침한 동시에 울분에 차 있었다.

대대의 병사들은 지난 5일간 거의 쉬지 못했으며 보급이 시원찮아서 제대로 먹지도 못하고 있었다.

훈련이 부족한 상태로 실전에 투입된 대대는 밤낮없이 치열한 전투를 치르면서 큰 인명피해를 입고 있었다.

 

로슨 준장의 전사로 홍콩에 파견된 캐나다 군의 선임장교가 된 왕립소총대대장 홈 중령은 다른 부대들이 제대로 싸우지 않고 캐나다 병사들만 총알받이로 내세운다면서 격앙된 어조로 월리스 준장에게 대들었다.

그 바람에 회의장에서는 한동안 고성이 오고갔으며 결국 월리스 준장은 캐나다왕립소총대대를 캐나다위니펙척탄병대대의 생존자들과 함께 방어선에서 철수시키기로 결정했다. 

이로써 캐나다 병사들은 후방의 스탠리 요새로 가서 동부여단의 예비대가 되었고 캐나다 군이 빠진 방어선은 재편되었다.

 

(1941년 12월 24일 - 25일에 걸친 스탠리 반도의 방어상황.출처 : Hong Kong 1941-45, P.80)

 

첫번째 방어선은 스탠리 경찰서를 중심으로 펼쳐져 있었다.

경찰서의 북쪽에 스탠리 소대가 배치되었다.

의용대 소속인 스탠리 소대는 스탠리 교도소의 경비를 맡던 부대로 피츠제럴드 중위가 지휘했으며 병력은 장교 1명을 포함하여 29명이었다.

스탠리 소대는 재소자들의 지원을 받았다.

일본군이 홍콩섬에 상륙하자 스탠리 교도소에서 복역 중이던 병사 약 40명이 의용대에 지원했다.

제1미들섹스대대에서 근무하다가 동성애 혐의로 2년 형을 선고받고 복역 중이던 채티 대위가 이들을 지휘했다.

그리하여 스탠리 소대는 자신이 감시하던 죄수와 힘을 합쳐 일본군을 막게 되었다.

경찰서 남쪽의 정음곡(舂坎角)에는 포시스 소령이 지휘하는 의용대 제2중대가 배치되었으며 1번 방갈로 부근의 특화점에는 시산 병장이 지휘하는 미들섹스대대의 기관총들이 배치되었다.

두번째 방어선은 성 스티븐 대학의 남쪽에 있는 스탠리 마을에 설정했다.

동해안의 27번 특화점에는 캐나다왕립소총대대 A 중대의 일부 병력이 들어가서 남쪽으로 향하는 도로를 감제했다.

스탠리 마을은 경찰병력이 지켰으며 드로운 상병이 지휘하는 의용대 제1중대의 1개 분대 10명이 가세했다.

마지막 방어선은 성 스티븐 대학 예비학교와 스탠리 교도소를 잇는 선으로 머피 병장이 지휘하는 의용대 제1중대의 1개 분대와 리스 대위가 지휘하는 의용대 제1포대가 지켰다.

남쪽의 스탠리 요새에는 캐나다왕립소총대대를 중심으로 한 대규모의 예비대가 주둔 중이었다.​

일본제1/229대대는 24일 오후에 영국군 방어선을 공격했다가 격퇴당했다.

그러자 일본군은 제1/230대대를 추가로 투입했다.

24일 저녁 9시에 일본군 2개 대대가 경전차 3대의 지원 하에 넓은 정면에서 동시에 공격해 왔다.​

영국군의 2파운더(40mm) 대전차포가 경전차 2대를 파괴했지만 첫번째 방어선을 지키던 의용대 병력들은 중과부적으로 패배했다.

의용대 제2중대는 철수 과정에서 대부분의 병력을 잃고 스탠리 마을로 밀려났다.​

자정이 지났을 때 일본군은 1번 방갈로 부근의 특화점들에 배치되었던 제1미들섹스대대 제1중대의 기관총들을 제압했다.

특화점들을 지키던 병력 중 폴리 이병을 제외한 전원이 전사했다.

첫번째 방어선을 돌파한 일본군은 남하하여 임시 병원으로 쓰이고 있던 성 스티븐 대학을 점령했다. ​

부상자와 피난민으로 붐비는 건물에 난입한 일본군은 부상자를 잔인하게 학살하고 여자란 여자는 모조리 강간했다.​

25일 오전 3시 30분에​ 일본군이 두번째 방어선에 도달했다.

비오듯 쏟아지는 총탄과 수류탄 세례 속에 의용대와 경찰이 지키던 방어선이 다시 무너졌으며 일본군은 화염방사기를 사용하여 동해안의 27번 특화점을 제압했다.

25일 동이 텄을 때 일본군은 마지막 방어선에 접근하고 있었다.

25일 아침에 월리스 준장은 캐나다왕립소총대대에게 반격명령을 내렸으나 대대장 홈 중령이 거부했다.

할 수 없이 윌리스 준장은 캐나다위니펙척탄병대대 D 중대장 파커 소령에게 반격명령을 내렸다.

파커 소령은 대대를 샅샅이 뒤져 148명을 찾아낸 다음 25일 오후1시 30분에 반격을 실시했다.​

일본군은 예상 외로 강력한 영국군에 반격에 허를 찔렸고 척탄병대대는 일본군에게 큰 피해를 주면서 진격했다.

선두인 제18소대는 맥도넬 병장의 지휘 하에 스탠리 마을까지 진격하여 백병전으로 일본군을 몰아내고 일시적으로 마을을 점령했다.

그러나 일본군이 정신을 차리고 본격적으로 반격하기 시작하자 척탄병 대대는 큰 피해를 입고 물러날 수 밖에 없었다.

척탄병대대는 반격에 참가한 148명​ 중 104명의 사상자를 기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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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 카메론 산 함락

 

1941년 12월 22일 아침이 밝았을 때 일본군의 배치를 보면 리펄스베이호텔 북쪽에 제2 및 제3/229대대가 있었고, 동쪽에서는 제1/229및 제1/230대대가 스탠리 반도 입구에 방어선을 펴고 있는 동부여단과 대치하고 있었다.

서쪽에서는 제228연대가 니콜슨 산에서 카메론 산을 노리고 있었다.

 

세드릭 월리스 준장의 동부여단은 캐나다왕립소총대대 B, C 및 D 중대, 미들섹스 대대 B 및 D 중대, 의용대 제1, 제2중대 및 스탠리 교도소를 경비하던 스탠리 소대, 이외에 잡다한 부대의 잔존병들로 이루어져 홍콩섬 남동쪽의 스탠리 반도에 3중의 방어선을 형성하고 있었다.

야포 세력은 2파운더(40mm) 대전차포 2문, 18파운더(84mm) 야포 3문 및 3.7인치 곡사포 2문이었으며, 9.2인치 해안포 3문 및 6인치 해안포 2문도 가세했다.

 

헨리 로즈 대령이 지휘하는 서부여단의 방어선은 남북으로 얕고 넓게 늘어져 있었다.

북해안은 제2/14펀잡대대 C 중대가 지키고 있었고 그 남쪽의 레이튼 힐에는 미들섹스 대대 Z 중대가 배치되어 있었다.

Z 중대 남쪽으로는 제4/7라지푸트 대대 B중대 및 제2/14펀잡대대 B중대가 차례로 배치되어 있었다.

카메론 산에는 왕립스코트대대와 위니펙척탄병대대 C중대가 배치되어 있었고 그 남쪽에는 척탄병대대 B 및 D 중대가 배치되어 있었다.

남해안은 의용대와 영국군의 잡다한 병력들이 방어하고 있었다.

 

22일 정오가 되자 일본군 2개 대대가 동부여단이 지키던 스탠리 언덕과 그 북쪽의 슈가로프를 공격해 왔다.

이곳을 지키던 병력은 캐나다왕립소총대대 B중대, D 중대의 2개 소대, 그리고  본부중대의 1개 소대였다.

캐나다군은 일본군의 공격을 몇 차례나 막아내었으나 탄약이 부족해지자 스탠리 언덕 정상을 내어주고 남쪽 사면으로 물러섰다.

 

그동안 일본제229연대의 주력은 리펄스베이호텔의 영국군을 거세게 몰아쳤다.

2개 대대의 일본군은 강력한 화력지원을 받으면서 진격하여 캐나다왕립소총대대 병력을 중심으로 한 수비대를 호텔 본관 내로 몰아넣었다.

22일 오후에 수비대에게 철수 명령이 떨어졌다.

호텔에는 피난 중이던 영국인 여자들과 아이들이 있었지만 이들을 철수시킬 방법이 없었으므로 이들은 수비대가 떠난 후 일본군에게 항복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날이 어두워지자 병사들은 몇 명씩 짝지어서 호텔을 떠났지만 이들중 소수만이 스탠리 반도에 자리잡은 동부여단의 방어선에 도착했다.

템플러 소령을 위시한 약 30명의 병력은 후퇴를 거부하고 다음날 저녁까지 호텔을 방어했다.

 

23일 밤에 템플러 소령 일행이 호텔을 빠져나가자 일본군이 리펄스베이호텔을 점령했다.

템플러 소령 일행은 해안에서 보트를 타고 라운드 섬에 좌초한 트라시안의 잔해로 가서 숨었다.

이들이 최종적으로 텔레그라프 만에 상륙했을 때는 이미 홍콩 수비대가 항복한 후였다.

 

(홍콩 섬 상륙 및 전투 상황도.출처 : Hong Kong 1941-45, P.57

 
황니천 계곡을 제압한 일본군은 카메론 산을 노렸다.
카메론 산은 황니천 계곡을 굽어보는 요충지로 서부여단의 새로운 사령부와 위니펙척탄병대대의 본부가 있었다.
22일 오후에 실시된 제228연대의 공격은 카메론 산 북쪽을 방어하고 있던 캄프타 프라사드 소령의 제2/14펀잡대대 B 중대에 떨어졌다.
 
압도적 열세의 B 중대는 엄청난 사상자를 내면서 무너졌다.
B 중대에서 살아남은 병사는 8명에 불과했으며 남아있는 공용화기는 기관총 2정 뿐이었다.
펀잡대대의 방어선이 무너지는 순간 북쪽에 있던 제4/7라지푸트대대 B  중대가 일본군의 북익에 날카로운 반격을 가했다.
예기치 않은 일격을 얻어맞은 일본군이 주춤하는 사이 억지로 쥐어짜낸 영국군 예비병력이 달려가서 전선의 구멍을 겨우 메꾸었다.

 

 

그러자 일본제228연대는 방향을 바꾸어 카메론 산 남쪽을 공격했다.

일본군은 카메론 산 남쪽 사면과 리틀홍콩 사이 약 1km 정도의 좁은 전선에 많은 병력을 밀어넣었으나 위니펙척탄병대대 D 중대에게 격퇴당했다.

 

이로써 카메론 산은 안전해진 듯 보였으나 그것도 잠시였다.

22일 밤 10시에 제3/228대대로부터 1개 중대를 증원받은 제2/228대대가 동쪽으로부터 카메론 산에 들이닥쳤다.

제228연대장 도이 데이히치 대좌는 노획한 영국군의 박격포와 기관총을 포함하여 자신이 동원할 수 있는 모든 화력을 동원했다.

혼란 속에서 왕립스코트대대를 주축으로 한 영국군의 방어선이 무너지면서 병사들은 카메론 산의 정상을 뺏기고 서쪽 사면으로 밀려났다.

23일 새벽 1시 30분에 서부여단장 헨리 로즈 대령은 몰트비 소장에게 전화를 걸어 카메론 산이 함락되었다고 보고했다.

 

다행히 카메론 산 서쪽의 만자 계곡에는 22일 오후에 이미 의용대 제4 및 제7중대가 배치되어 있었다.

로즈 대령이 만약을 대비하여 배치해 둔 이 병력 덕분에 서부여단은 방어선의 전면적인 붕괴를 모면했다.

하루 종일 격전을 치른 일본제228연대도 추격을 포기하고 재정비에 들어갔다.

 

이맘때쯤 빅토리아시티의 상황은 악화되고 있었다.

일본군이 대담 저수지에 있던 급수시설을 발견하고 펌프를 멈추자 홍콩섬 전역에 급수가 중단되었다.

동부여단이 방어하고 있던 스탠리 요새에는 커다란 물탱크가 있었으나 23일에 일본군의 포격으로 파괴되어 저장하고 있던 식수가 유실되었다.

급수 중단과 저장식수 유실은 수비대의 사기를 떨어뜨렸다.

누구도 식수없이는 오래 버틸 수 없었다.

 

12월 23일 아침에 동부여단 세드릭 월리스 준장은 스톤힐과 스탠리 언덕을 탈환하기 위하여 공격을 실시했다.

캐나다왕립소총대대가 주력을 담당했고 미들섹스 대대가 얼마 안 되는 야포와 기관총을 동원하여 화력지원을 맡았다.

왕립소총대대는 일본군의 허를 찔러 일단 스톤힐과 스탠리 언덕을 탈환했으나 오래 지킬 여력이 없었다.

오전 10시부터 일본군의 야포와 박격포가 무시무시한 포격을 가해오자 왕립소총대대는 물러날 수 밖에 없었다.

 

영국군이 철수하자 일본제1/229대대가 스톤힐과 스탠리 언덕을 다시 점령했다.

왕립소총대대는 스탠리 언덕 남쪽의 평지에 방어선을 편성했는데 일본군은 방어선에 포격을 가할 뿐 추격하거나 방어선을 공격하지는 않았다.

지난 이틀 간의 전투에서 큰 피해를 입은 제1/229대대도 재정비가 필요했다.

 

23일 오전 8시에 일본군이 레이튼 힐의 남쪽 절반을 지키던 라지푸트대대 C 중대를 공격했다.

C 중대는 몇 번의 공격을 물리쳤으나 탄약이 떨어지면서 남서쪽의 경주로(Racecourse) 지역으로 밀려났다.

레이튼 힐의 북쪽 절반을 지키던 미들섹스대대 Z 중대는 전선을 유지했으나 우익을 지키던 라지푸트대대가 밀려나자 약간 후퇴하여 방어선을 재편했다.

 

23일 아침에 해군조선소를 방어하던 영국해병대가 카메론 산의 북쪽 사면에 도착하여 서쪽 사면을 지키던 왕립스코트대대와 연결했다.

새벽에 카메론 산의 정상을 점령했던 일본제228연대가 오전9시에 서쪽 사면으로 진출하여 왕립스코트대대를 공격했다가 격퇴되었다.

이후 일본군은 포격과 공습만 실시했는데 일본기들은 저공비행을 하면서 폭격과 기총소사를 가했다.

 

23일 오후가 되자 지속적인 포격과 공습에 시달리던 스코트 대대는 카메론 산의 북서쪽 사면으로 물러나 그날 오전에 경주로(Racecourse) 지역으로 밀려나 있던 라지푸트대대 C 중대와 연결했다.

위니펙척탄병대대는 23일 저녁까지 재집결한 다음 만자 계곡과 베넷츠힐 사이를 방어했다.

리틀홍콩 지역의 탄약창을 방어하던 영국군도 아직 버티고 있었으며 덕분에 야간에는 탄약을 꺼내어 보급할 수 있었다.

 

23일에 일본군은 다음날로 예정된 빅토리아시티 공격을 위하여 제38사단의 마지막 예비대였던 제3/230대대를 북해안에 상륙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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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 시칼라 침몰

 

1941년 12월 21일 아침에 동부여단장 세드릭 월리스 준장은 대담 계곡을 거쳐 북상한 다음 서쪽으로부터 황니천 계곡을 공격하기로 결심했다.

공격대는 캐나다왕립소총대대 D 중대, 의용대 제1중대로 이루어졌으며  의용대 제2중대의 기관총반이 가세했다.

D 중대장 맥콜리 소령이 지휘하는 공격대가 21일 오전 9시 15분에 스탠리 언덕을 출발하여 북상하자 동쪽의 레드힐로부터 총탄이 쏟아졌다.

D 중대는 총검돌격을 실시하여 북쪽의 브리지힐을 점령했으며 의용대 제1중대는 브리지힐과 레드힐 사이의 노팅힐을 점령했다.

그러나 더 이상 전진할 수 없었다.

브리지힐과 노팅힐에는 하루종일 일본군의 총탄과 포탄이 떨어졌다.

오후가 되자 맥콜리 소령과 의용대의 모든 장교들이 부상을 입는 등 사상자가 크게 늘어났으나 동부여단에는 예비대가 없었다.

또한 영국군이 보유한 3인치 박격포의 포탄과 식량이 떨어졌는데 일본군의 포격으로 보급이 불가능했다. 

이 상태로 밤이 되면 일본군의 공격을 버텨낼 수 없었으므로 월리스 준장은 오후5시에 철수명령을 내렸다.

 

21일 오후에 브리지힐과 노팅힐의 영국군을 공격한 일본군은 제1/229대대로서 포병과 경전차 3대의 지원을 받고 있었다.

일본군은 제38사단의 예비대로 구룡 반도에 대기하던 제1/230대대를 오전 10시 30분에 북해안에 상륙시킨 다음 스탠리 방면으로 남하시켰다.

따라서 2개 중대 규모의 맥콜리 공격대가 철수하지 않았다면 21일 밤에 일본군 2개 대대의 공격을 받았을 것이다.

 

(홍콩 섬 상륙 및 전투 상황도.출처 : Hong Kong 1941-45, P.57)

 

몰트비 소장은 월리스 준장과는 별도로 리펄스베이호텔 방면에서 바이올렛힐을 거쳐 황니천 계곡을 공격하길 원했다.

그는 제30해안포대장이었던 템플러 소령에게 공격명령을 내렸다.

템플러 소령은 캐나다 왕립소총대대의 C 중대와 본부중대에서 각각 1개 소대를 짜내고 비커스 기관총을 가진 의용대의 브렌건캐리어 2대와 트럭 4대도 확보했다.

템플러 소령은 리펄스베이호텔로 가는 도중에 왕립소총대대 A 중대의 2개 소대와 약간의 의용대 병력을 만나 지휘 하에 넣었다.

리펄스베이호텔에 도착한 템플러 소령은 의용대 병력들을 호텔 방어를 위하여 남겨두고 도로를 따라 북상했다.

도중에 일본군의 기관총 사격을 받아 탄약을 싣고 있던 트럭이 파괴되었으나 나머지 트럭 3대는 브렌건캐리어와 함께 계속 북상했다.

도로를 따라 북상한 템플러 공격대는 21일 오후에 황니천 계곡 남쪽의 경찰서를 공격했으나 전력이 약한 데다가 마침 브렌기관총마저 고장나는 등 불운이 겹쳐 실패했다.

저녁이 되자 템플러 공격대는 리펄스베이호텔로 후퇴했다.

 

리펄스베이호텔로부터 황니천 계곡을 공격하려는 영국군의 거듭된 시도는 많은 희생을 내며 실패했지만 무익한 것은 아니었다.

영국군의 공세때문에 제229연대장 다나카 류사부로 대좌는 지휘를 위하여 3일 동안 리펄스베이호텔에서 460m 떨어진 지점에 머물러야만 했으며 제3/229대대는 영국군의 거듭된 공세를 막으면서 큰 피해를 입었다.

이러한 공세 때문에 빅토리아시티에 대한 일본군의 본격적인 공격이 늦어졌다. 

 

21일 오후가 되자 일본제230연대는 전날에 이어 버틀러 산 맞은 편의 언덕에 집중 공격을 가했다.

언덕을 지키던 펀잡대대는 증원된 왕립스코트대대의 1개 소대와 함께 맞섰으나 중과부적으로 필터베드까지 밀려났다.

그러나 영국군은 서둘러 방어선을 정비하여 필터베드에서 레이튼 힐을 거쳐 북해안에 이르는 방어선을 유지했다.

 

북해안에서도 일본군이 서쪽으로 진격했다.

일본군은 코즈웨이 만의 왓슨 공장에 배치되어 있던 의용대 제6포대의 대공포들을 제압하고 빅토리아시티의 동쪽 끝에 도달했다.

빅토리아시티의 해군조선소가 포격을 받았고 북해안의 모든 영국군 야포가 일본군의 포격으로 침묵했다.

 

서부여단장 헨리 로즈 대령은 위니펙척탄병대대의 생존자들을 긁어모아 100 여명을 확보한 다음 일본군의 공격이 예상되는 카메론 산에 배치했다.

카메론 산에 배치된 척탄병대대의 병사들은 21일 오후 내내 일본군의 포격을 받았다.

 

포정 시칼라는 전날에 이어 21일에도 맹활약했다.

21일 아침에 일본군이 브릭힐을 공격했는데 이곳을 지키던 영국군 수비대는 미들섹스 대대의 소규모 분견대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나 수비대는 숫적 열세에도 불구하고 딥워터 만에서 시칼라가 쏘아주는 6인치 함포의 화력지원에 힘입어 일본군의 공격을 막아내었다.

이어서 시칼라는 포격을 가하여 황니천 계곡 내의 일본군 포대를 침묵시켰다.

그러자 일본군은 육군항공대에 지원을 요청했고 결국 시칼라는 공습을 받아 21일 오후에 람마 해협에 침몰했다.

시칼라가 침몰하자 일본군이 다시 브릭힐을 공격하여 끝내 점령했다.

 

(HMS 시칼라. 배수량 : 635톤, 길이 : 72m, 폭 : 11m, 속력 : 14노트, 승조원 : 55명, 무장 : 6인치 함포 2문, 12파운더(76mm)함포 2문, 7.7mm 기관총 6정 https://www.flickr.com/photos/hammersmithrob/7077889917/)

 

시칼라가 침몰함으로써 영국해군의 세력은 포정 2척과 어뢰정 5척으로 줄어들었으나 저항을 멈추지 않았다.

실제로 포정 로빈은 21일에 애버딘 항에서 포격을 가하여 미들스퍼의 일본군 포대를 침묵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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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 황니천 계곡 함락

 

1941년 12월 20일 아침이 되었을 때 일본군의 배치 상황은 다음과 같다.

 

동쪽에는 제1/229 및 제2/228대대가 대담 및 서환방면에 있었다.

자딘 관측소 남동쪽의 스탠리 계곡에는 제2 및 제3/229대대가 있었고 자딘 관측소에는 제1및 제2/230대대가 있었다.

자딘 관측소의 남서쪽에는 제1/228대대가 있었으며 예비대인 제3/228대대는 막 홍콩섬 북해안에 상륙한 상태였다.

 

(홍콩 섬 상륙 및 전투 상황도.출처 : Hong Kong 1941-45, P.57)

 

서부여단의 방어선은 북쪽에서는 제1미들섹스대대 Z 중대와 펀잡 대대의 잔존병들이 레이튼 힐을 중심으로 방어선의 북쪽을 맡고 있었다.

중앙에서는 제2왕립스코트 대대와 위니펙척탄병대대의 병력들이 뒤섞인 채 니콜슨 산에서 황니천 계곡에 걸쳐 있었고 척탄병대대 D 중대는 황니천 계곡 내의 특화점에서 버티고 있었다.

 

20일 날이 밝자 황니천 계곡의 서쪽에 있던 제1/228대대가 남하하여 포스트브리지하우스에서 저항하고 있던 해군병력들을 쫓아냄으로써 딥워터 만으로 향하는 길을 열었다.

 

일본제1/229대대는 20일 아침에 바이올렛힐 너머 리펄스베이호텔 쪽으로 소대 규모의 정찰대를 파견했다.

정찰대는 호텔의 방어가 허술하다고 보고 공격을 가했으나 착각이었다.

호텔에는 미들섹스 대대의 소위가 지휘하는 수십명의 영국 육군 및 해군 패잔병들이 있었는데 이들은 사기가 떨어져 있었지만 그래도 경무장의 소대 병력이 무찌를 수 있는 상대는 아니었다.

게다가 정찰대가 호텔을 공격하는 도중 배후에 영국군이 나타났다.

 

동부여단장 세드릭 월리스 준장은 21일 오전 8시에 캐나다왕립소총대대의 1개 중대에다가 의용대 2개 소대를 증원하여 바이올렛 힐로 파견했다.

이들의 임무는 바이올렛 힐을 거쳐 남동쪽으로부터 황니천 계곡을 공격하는 것이었다.

동부여단이 가진 야포 세력의 전부인 18파운드 곡사포 1문 및 3.7인치 곡사포 2문이 화력지원을 담당했다.

왕립소총중대가 오전 10시에 리펄스베이호텔에 도착했을 때 일본정찰대는 호텔의 차고와 별채를 점령하고 본관을 공격하던 중이었다.

중대는 배후에서 일본군을 덮쳐 장교 1명을 포함하여 26명을 사살하고 나머지를 쫓아버렸다.

 

왕립소총중대가 호텔을 지나 북상하려고 하자 북쪽의 바이올렛 힐 및 서쪽의 미들스퍼로부터 일본군의 총탄이 쏟아져 진격할 수 없었다.

20일 저녁이 되자 월리스 준장은 왕립소총중대가 고립될 것을 우려하여 동부여단의 방어선 내로 철수하라고 명령했다.

 

일본제3/229대대가 남하하여 리펄스 만 북쪽에 나타나자 몰트비 소장은 애버딘에 제2/14펀잡대대 A 중대를 파견하여 애버딘과 리펄스베이호텔 사이의 도로를 확보하라고 명령했다.

펀잡대대장 키드 중령이 직접 A 중대를 이끌고 빅토리아시티를 떠나 애버딘에 도착했다.

A 중대는 말이 중대지 병력이 키드 중령을 포함한 장교 3명과 부사관 및 병사 25명에 지나지 않았으므로 애버딘에서 증원을 받았다.

애버딘 섬에서 위니펙척탄병 대대의 1개 소대가 상륙하여 합류했고 해군수병 35명도 가세했다.

세력이 증가된 A 중대는 리펄스 만 북쪽의 도로를 따라 동진하다가 해발 150m 의 사신산(壽臣山)에서 일본제3/229대대의 방어선에 맞닥뜨렸다.

영국군은 용감하게 공격했으나 압도적인 전력차를 극복하지 못한 채 큰 피해를 입고 쫓겨나 브릭힐 부근에 방어선을 폈다.

A 중대의 28명 중 펀잡대대장 키드 중령을 포함하여  20명이 전사했고 살아남은 8명은 전원 부상을 입었으며 척탄병 소대와 해군병력들도 많은 사상자를 기록했다.

다행히 일본군은 리펄스베이호텔에서 북상하려는 왕립소총중대를 신경쓰느라 A 중대를 추격하지는 않았다.

 

브릭힐 북쪽에 있는 리틀홍콩에는 의용대, 해군, 척탄병대대 및 미들섹스대대 소속의 소수 병력이 모여 탄약창을 지켰다.

포함 시칼라는 딥워터 만에 떠서 함포 지원을 계속했다.

 

20일 오후에 자딘 관측소에 주둔 중이던 일본제230연대가 서쪽의 언덕을 장악하고 있던 중대 규모의 펀잡대대 병력을 공격했다.

펀잡대대는 큰 피해를 입었고 전선의 붕괴를 막기 위하여 왕립스코트대대의 1개 소대가 펀잡대대의 우익에 급히 투입되었다.

그러나 일본군은 더 이상 진격하지 않고 다음날의 공격에 대비하여 병력의 재정비에 주력했다.

 

서부여단장 론슨 준장이 전사하자 몰트비 소장은 의용대장 헨리 로즈 대령을 서부여단장으로 임명하고 반격을 명했다.

로즈 대령은 서해안의 폭풀람에 주둔하고 있던 위니펙척탄병대대 B 중대를 주력으로 삼아 21일 아침에 반격을 가하기로 하고 이동을 명했다.

트리스트 소령이 지휘하던 B 중대는 약 100 명의 병력을 가지고 있었으며 홍콩전투 개시 이래 한번도 전투에 투입되지 않은 생생한 중대였다.

 

B 중대가 동쪽으로 이동하는 동안 로즈 대령은 니콜슨 산 주변에서 복잡하게 뒤섞여 있던 위니펙척탄병대대와  왕립스코트대대의 병력들에게 재집결을 명했다.

영국군이 재집결을 위하여 이동하는 와중에 니콜슨 산 정상이 비고 말았다.

 

일본군은 다음날인 21일에 150mm 중포를 포함한 야포의 화력지원 하에 공격을 실시할 예정이었다.

제230연대가 버틀러 산 서쪽의 언덕을 담당하고 제228연대가 니콜슨 산을 공격할 계획이었다.

그런데 20일 오후에 제228연대의 정찰대가 니콜슨 산 정상이 비었다고 보고했다.

제228연대장 도이 데이히치 대좌는 성문보 전투에서와 마찬가지로 이번에도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20일 오후 5시, 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가운데 제228연대의 3개 중대가 아무런 저항도 받지 않고 전진하여 니콜슨 산 정상을 점령했다.

 

서해안에서 이동해 온 위니펙 척탄병대대 B 중대가 21일 새벽에 니콜슨 산에 도착했다.

B 중대는 도착하자마자 일본군 3개 중대로부터 공격을 받았다.

치열한 전투 끝에 B 중대는 장교 전원을 포함하여 전체 병력의 절반 가까운 사상자를 기록하면서 니콜슨 산 서쪽의 미들 계곡을 지나 만자 계곡까지 쫓겨났다.

 

황니천 계곡 안에서는 위니펙척탄병대대 D 중대가 고립된 채 특화점에 의지하여 처절한 저항을 계속하고 있었다.

중대장 보우만 대위가 전사하자 필립스 대위가 이어받았으며 필립스 대위가 부상을 입자 블랙우드 중위가 지휘했다.

블랙우드 중위는 22일까지 저항한 다음 탄약, 식량 및 식수가 떨어지자 할 수 없이 항복했다.

그때까지 살아남은 D 중대원은 37명이었으며 전원 부상을 입고 있었다.

D 중대가 사살한 일본군은 200명이 넘었다.

필립스 대위와 블랙우드 대위는 나중에 군사십자장(Military Cross)을 받았다.

 

(군사십자장. http://en.wikipedia.org/wiki/Military_Cross)

 

20일 저녁이 되자 황니천 계곡은 사실상 일본군이 지배하고 있었다.

황니천 계곡 전투는 일본군에게도 결코 쉬운 전투가 아니었다.

일본군은 19일과 20일에 걸친 황니천 계곡 전투에서 제3/230대대장 우네다 안페이 소좌가 중상을 입는 등 800 명이 넘는 사상자를 기록했다.

 

20일 저녁에 진책 소장이 몰트비 소장에게 60,000 명의 중국군이 일본군의 후방에 집결하고 있다고 말했다.

몰트비 소장은 즉시 병사들에게 이 기쁜 소식을 전했으며 병사들의 사기가 크게 올랐다.

그러나 결국은 틀린 정보로 판명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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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 반격 실패

 

1941년 12월 19일 오후 1시 30분에 몰트비 소장은 오후 3시를 기하여 전면적인 반격을 실시하라는 내용의 '작전명령 제6호' 를 발령했다.

명령에 따르면 제2/14펀잡대대의 A 및 D 중대는 빅토리아시티로부터 노스포인트로 진격하여 휴질리어 중대를 구해야 했다.

그러나 이 명령은 펀잡대대장인 키드 중령에게 도달하지 않았다.

 

가장 먼저 반격을 시작한 것은 위니펙척탄병대대의 본부중대였다.

중대장 호킨슨 소령은 황니천 계곡에 진입하여 파커 산을 점령하는 명령을 받았다.

본부중대는 척탄병대대 A 중대 및 제2왕립스코트대대로부터 약간의 증원을 받은 후 블랙 연결로를 통해 계곡에 접근했다.

 

조심스럽게 전진하던 본부중대는 경계도 하지 않은 채 앉아서 식사 중이던 일본제3/230대대의 병사 약 500명을 발견했다.

본부중대는 즉시 공격을 가했고 일본군은 제3/230대대장 우네다 안페이 소좌가 중상을 입는 등 큰 피해를 입고 달아났다.

 

19일 오후 5시 45분에 본부중대는 황니천 계곡에서 남서쪽으로 빠지는 리펄스만 도로 300m 앞까지 접근했다.

호킨슨 소령은 2인치 박격포 1문을 보유한 1개 소대를 이끌고 버려진 서부여단사령부에 도착하여 방어선을 폈다.

오후 10시에 경찰서를 공격하여 점령하라는 명령이 떨어졌다.

비커스 기관총을 장착한 장갑차 2대가 화력지원을 담당했다.

본부중대는 경찰서를 거의 점령할 뻔 했으나 끝내 점령하지 못하고 호킨슨 소령이 중상을 입는 등 큰 피해를 입고 물러나야만 했다.

호킨슨 소령은 이날의 활약으로 영국수훈장(Distinguished Service Oreder = DSO)를 받았다.

 

(영국 수훈장. http://en.wikipedia.org/wiki/Distinguished_Service_Order)

 

19일 오후 반격의 주력은 핑커튼 대위가 지휘하는 왕립스코트 대대 D 중대였다.

핑커튼 대위는 약간의 증원을 받았는데 위니펙 척탄병대대 D 중대의 일부와 의용대 토머스 중위가 지휘하는 중국인 공병 70명이었다.

중국인 공병은 보병으로 참가했는데 톰슨 기관단총으로 무장하여 화력이 강했고 훈련 또한 충실하게 받아 잘 싸웠다.

핑커튼 대위는 스코트 대대 A 중대가 아침에 시도했던 대로 황니천 도로를 따라 북쪽으로부터 계곡에 진입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이유는 그쪽 방면에 적의 저항이 약하다는 것이었는데 정찰이 전혀 되어 있지 않은 상태에서 내린 결론이라는 것이 문제였다.

 

선봉은 슬레이터-브라운 대위가 지휘하는 브렌건캐리어 3대와 중국군 공병이었으며 이들의 바로 뒤를 스코트 대대 D 중대, 이어서 척탄병대대 D중대의 일부 병력이 도보로 뒤를 따르고 있었다.

선두의 브렌건캐리어가 7시간 전에 A 중대가 매복 공격을 당했던 곳에 도착했을 때 다시 일본군의 매복 공격이 시작되었다.

자딘 관측소에서 박격포탄과 기관총탄이 날아들었고 일본군들이 의용대의 특화점에 들어가서 사격을 가했다.

브렌건캐리어를 지휘하던 슬레이터-브라운 대위와 스코트 대대의 정보장교인 벨 소위가 교전 시작과 동시에 전사했으며 D 중대는 길가의 도랑에 엎드린 채 꼼짝하지 못했다.

D 중대는 20일 새벽 2시가 되어서야 남하하여 경찰서를 공격했으나 핑커튼 대위가 중상을 입는 등 큰 피해를 입으면서 점령에 실패했다.

 

(1941년 12월 19일 황니천계곡 전투 상황도.출처 : Hong Kong 1941-45, P.68-69)

 
20일 새벽 3시에는 스코트대대 B 중대장 포드 대위가 B 중대와 본부중대 병력으로 구성한 혼성중대를 이끌고 독자적으로 경찰서를 공격했다가 실패했다.

 

 

비슷한 시간에 스코트 대대 C 중대장 슈타이너 대위도 독자적으로 자딘 관측소를 공격했다가 역시 실패했다.

이러한 중구난방식의 공격으로 스코트 대대는 76명의 전사자를 기록하면서도 전과를 올리지 못했다.

 

19일 밤 10시부터 20일 새벽 3시까지 영국군의 3개 중대가 경찰서를, 1개 중대가 자딘 관측소를 공격했다.

영국군의 반격은 부대 사이의 협조가 없이 따로 실시됨으로써 목표 달성에 실패했다.

만일 경찰서를 공격한 3개 중대가 긴밀하게 협동하면서 동시에 공격했다면 충분히 탈환할 수 있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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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 로슨 준장의 전사

 

노스포인트에서 휴질리어 중대가 처절하게 저항하는 동안 홍콩섬 중앙의 황니천 계곡에서는 서부여단이 일본군과 결전을 치르고 있었다.

황니천 계곡은 홍콩섬의 교통요충지였으므로 서부여단장 존 로슨 준장은 이곳에 사령부를 두고 있었다.

일본군의 상륙이 임박하자 로슨 준장의 참모인 린든 소령은 사령부가 지나치게 노출되어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니콜스 산 남쪽에 새로운 사령부 자리를 물색했다.

이동은 12월 19일로 예정되어 있었다.

 

18일 밤에 일본군이 상륙하자 로슨 준장은 일본군의 황니천 진입을 막기 위하여 위니펙척탄병대대의 3개 소대를 파견했다.

프렌치 중위의 제18소대는 버틀러 산으로, 버켓 중위의 제17소대는 자딘 관측소로, 그리고 코리간 중위가 지휘하는 제16소대는 자딘 관측소 남서쪽의 도로 교차점으로 파견되었다.

 

제18소대가 버틀러 산에 도착해 보니 일본제1/228대대가 이미 장악하고 있었다.

일본군의 총탄을 뒤집어 쓴 제18소대는 소대장 프렌치 중위가 전사하는 등 큰 피해를 입고 쫓겨났다.

 

제17소대는 일단 자딘 관측소에 도달해 방어선을 폈다.

그러나 19일 오전 5시가 되자 일본제2/230대대가 도착하여 공격을 가했다.

제17소대도 소대장 버켓 중위가 전사하는 등 큰 피해를 입고 쫓겨났다.

일본군에게 쫓겨난 제17 및 제18소대의 병력들은 주변에 있던 의용대의 특화점에 들어가서 19일 오후까지 버텼다.

 

도로 교차로에 자리잡은 제16소대는 자딘 관측소에서 쏟아지는 총탄을 피해 니콜스 산 남쪽으로 이동했다.

제16소대는 19일 오후에 몰트비 소장의 명령에 따라 황니천 도로 300m 전방까지 진격했다.  

 

자딘 관측소 부근의 특화점에는 의용대 제3중대가 배치되어 있었으며 자딘 관측소 동쪽의 쿼리 계곡에는 의용대 제1중대의 특화점이 있었다.

일본군은 이 특화점들을 결국 다 제압했지만 그 과정에서 큰 피해를 입었다.

어떤 특화점은 24시간을 버텼다.

의용대 제3중대장 스튜어트 소령은 황니천 계곡에 자리잡은 중대본부에서 12월 22일까지 4일간 끊임없이 전투를 치르면서 버티다가 탄약, 식량, 식수가 바닥나자 어쩔 수 없이 항복했다.

의용대 제3중대는 황니천 전투에서 80% 이상의 사상자를 내면서 편제가 무너졌다.

 

(1941년 12월 18일 아침 현재 홍콩 섬의 방어태세. 출처 : Hong Kong 1941-45, P.51)

 
일본군이 버틀러 산까지 몰려오자 19일 아침에 로슨 준장은 남쪽 딥워터만 부근에 주둔 중이던 위니펙척탄병 대대의 A 중대에게 반격을 명령했다.

 

 A 중대장 그레샴 소령은 명령에 따라 19일 아침에 서쪽으로부터 황니천 계곡에 진입했다.

이때 서부여단사령부 부근에 주둔해 있던 D 중대에서 1개 소대가 증원되었다.

A 중대는 오스본 준위의 지휘 하에 버틀러 산을 점령하고 있던 일본제1/228대대 선발대의 방어선에 기습적인 총검돌격을 가하여 일단 버틀러 산을 점령했다.

그러나 정오가 되자 3개 중대의 일본군이 반격했다.

 

오후 3시가 되어 A 중대의 탄약이 거의 떨어지자 그레샴 소령은 항복할 수 밖에 없었다.

그레샴 소령이 항복하기 위하여 백기를 들고 일본군 장교 쪽으로 가는 순간 일본군이 총을 쏘아 그레샴 소령이 숨졌다.

그러자 A 중대원들도 총을 쏘아 그레샴 소령의 항복을 받으려던 일본군 장교를 사살했다.

전투가 재개되었고 탄약이 떨어진 A 중대는 버틀러 산의 서쪽 사면을 내려가 자딘 관측소 쪽으로 도망칠 수 밖에 없었다.

그 과정에서 A 중대의 장교들은 모두 전사하거나 부상을 입었다.

 

(1941년 12월 19일 황니천계곡 전투 상황도.출처 : Hong Kong 1941-45, P.68-69)

 

일본제1/228대대는 A 중대를 추격하여 포위한 다음 사방에서 수류탄을 던졌다.

A 중대를 지휘하던 오스본 준위는 일본군의 수류탄이 떨어지는 대로 주워서 일본군에게 되던졌다.

그러다가 수류탄 1발이 줍기 곤란한 구멍에 떨어졌고 주워 던질 시간이 없다고 판단한 오스본 준위는 자신의 몸으로 구멍을 막아 부하들을 구했다.

목숨을 바쳐 부하를 구한 오스본 준위에게는 빅토리아 십자훈장이 추서되었다.

오스본 준위는 제2차 세계대전에서 최초로 빅토리아 십자훈장을 받은 캐나다 군인이다.

A 중대의 생존자들은 모두 포로가 되었다.

 

(빅토리아 십자훈장. http://en.wikipedia.org/wiki/Victoria_Cross)

 

일본제1/228대대는 A 중대를 제압한 다음 스탠리 계곡의 대공포들도 제압하고 19일 저녁에 황니천 계곡으로 진입하여 제230연대와 연결했다.

A 중대의 분전 때문에 계획보다 늦어진 것이었다.

 

로슨 준장의 증원 요청을 받은 몰트비 소장은 19일 오전 7시 30분에 캠벨 대위가 지휘하는 제2왕립스코트대대 A 중대를 파견했다.

A 중대는 자동차를 타고 이동하다가 황니천 계곡 북쪽 90m 지점에서 일본제3/230대대로부터 사격을 받았다.

장교 모두가 전사하는 등 커다란 피해를 입은 A 중대에서 단지 15명만이 살아서 서부여단사령부에 도착했다.

 

그 시각 남쪽의 애버딘 해군기지에서도 3개 소대의 병력을 황니천 계곡으로 파견했다.

피어스 해군중령이 지휘하는 해군병력들은 트럭을 타고 북상하다가 오전 9시 45분에 황니천 남쪽에서 일본군의 매복공격을 받아 큰 피해를 입었다.

잔존 수병들은 황니천 계곡에서 남쪽으로 이어지는 도로가의 포스트브리지하우스에 의지하여 방어선을 펼 수 밖에 없었다.

 

서부여단사령부가 지나치게 노출되어 있다는 린든 소령의 걱정은 기우가 아니었다.

19일 오전 7시에 일본제3/230대대가 세실승마로를 따라 서부여단사령부에 접근했고 1시간 후에는 제2/230대대가 뒤따랐다.

오전 10시가 되자 일본군은 황니천 도로를 건너와서 서부여단사령부에 총격을 가했다.

로슨 준장은 몰트비 소장에게 전화를 걸어 일본군이 사령부 바로 앞에서 사격을 가하고 있다면서 밖으로 나가 응사하겠다고 말했다.

부시 대위가 엄호 사격을 가하는 동안 로슨 준장은 양손에 권총을 든 채로 참모들을 이끌고 사령부 밖으로 나와 일본군 쪽으로 사격을 가한 후 뒷쪽의 언덕으로 올라가려고 했다.

그 순간 계곡 건너편의 일본군 기관총이 길게 연사를 가했다. 

로슨 준장의 시체는 이틀 후에 일본군에 의하여 언덕 중간에서 발견되었는데 허벅지에 총상을 입은 후 과다출혈로 숨진 상태였다.

포병장교들을 포함한 서부여단의 사령부 요원 대부분이 로슨 준장과 함께 전사했으며 아침에 여단사령부에 도착했던 왕립스코트대대 A 중대의 병사들도 함께 전사했다.

불과 몇 분 후에 제2/14펀잡대대의 커풋 중위가 로슨 준장을 구하기 위하여 브렌건캐리어 3대를 이끌고 사령부에 도착했으나 이미 늦었다. 

로슨 준장의 전사에도 불구하고 서부여단의 병사들은 전투를 계속했다.

 

(서부여단장 존 로슨 준장. https://www.idmarch.org/document/John+K.+Lawson/JXD-show/)

 

서부여단사령부를 제압한 일본제3/230대대는 계속 남진하여 황니천 계곡 남쪽에 있는 언덕까지 도달했다.

제3/230대대는 언덕에 있던 경찰서를 장악하고 3.7인치 대공포를 장비한 홍콩-싱가포르포병대의 제7대공포대를 제압했다.

이어서 제3/230대대는 남쪽의 대담 언덕에 올라가 영국군의 3.7인치 및 6인치 곡사포들을 제압했다.

몰트비 소장의 명령에 따라 해피밸리의 영국군 포병이 포격을 가하여 제3/230대대에 큰 피해를 입혔지만 진격을 저지하지는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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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 노스포인트 발전소 전투

 

일본군의 우익에 상륙한 제3/230대대는 제5/7 라지푸트 대대 D 중대를 분쇄했다.

이어서 상륙한 제2/230연대는 빅토리아시티를 향하여 서쪽으로 진격하게 되어 있었으나 노스포인트의 발전소에서 발목을 잡혔다.

 

노스포인트 발전소 전투는 한편의 서사시같은 전투였다.

발전소를 지키던 병력은 의용대의 임시 중대로서 일본군에 쫓겨 발전소로 피신한 미들섹스 대대의 부상병들이 소수 가담했다.

 

부대 창설을 주창한 오웬 휴즈 예비역 중령의 이름을 따서 휴질리어 중대라고 부르던 임시 중대는 총 88명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장교 4명과 병사 36명은 의용대 소속이었고, 39명은 홍콩전기회사의 기술자와 관리자들이었으며 9명은 자유프랑스군 소속의 프랑스인들로서 지휘는 의용대의 존 페터슨 소령이 맡았다.

 

(1941년 12월 18일 아침 현재 홍콩 섬의 방어태세. 북해안 노스포인트에 자리잡은 휴질리어 중대가 보인다. 출처 : Hong Kong 1941-45, P.51)

 
휴질리어 중대는 홍콩전투 뿐 아니라 제2차 세계대전 전체로 보아서도 특이한 부대로서 가장 어린 중대원의 나이가 55세였다.

 

중대원 전원이 참전 경험을 가지고 있었는데 대부분 제1차 세계대전에 참전했고 일부는 보어전쟁에도 참전했으며 프랑스인들은 스페인 내전에 참전했다.

휴질리어 중대원 중 의용대의 장교와 병사들은 대부분 저명한 사업가들로서 고령인데다 명망가들이라 의용대에 이름만 올렸을 뿐 실제로는 동원되지 않았다.

그러나 홍콩의 의회 격인 홍콩입법회의 전직 의원이었던 휴즈 예비역 중령의 주창으로 한 자리에 모여 부대를 편성하고 노스포인트 발전소의 방어를 자청했다.

 

중대장인 존 패터슨 소령은 제1차 대전 당시 시나이 반도와 팔레스타인에서 싸우는 등 6번이나 해외 원정에 참가한 베테랑이었다.

페터슨 소령은 홍콩전투 당시 무역회사로서 엄청난 대기업이었던 자딘 매터슨의 회장이었으며 홍콩입법회 의원이었다.

홍콩전기회사의 기술자 및 관리자 39명을 이끌고 휴질리어 중대에 합류한 빈센트 소비 이병은 발전소장이었다.

프랑스인들을 이끌던 자끄 에갈 대위는 상해에서 자유 프랑스를 대표했었으며 부유한 포도주 판매상이었다.

 

에드워드 드 부 이병은 8대 남작인 귀족으로 전임 홍콩 총독의 조카였으며 부유한 귀금속 판매상이었다.

최고 수준의 사교클럽인 홍콩클럽의 총무였던 에드워드 남작은 77세라는 고령 때문에 의용대의 동원에서 제외되자 휴질리어 중대에 이병으로 자원했다.

67세였던 피어스 이병은 허친슨 사의 회장이었으며 홍콩클럽과 쌍벽을 이루는 최고 수준의 클럽인 홍콩조키클럽의 총무였다.

부중대장인 브루치 대위는 무역회사인 무티어 사의 회장이었는데 당시 60세로 중대에서 젊은 편이었다.

 

제5/7라지푸트 대대 D 중대를 분쇄한 일본군은 여세를 몰아 발전소를 단번에 점령하려다가 휴질리어 중대에게 얻어터지고 물러섰다.

일본군의 압력이 가중되자 패터슨 소령은 몰트비 소장에게 지원을 요청했다.

몰트비 소장은 의용대의 장갑차 1대와 함께 미들섹스 대대 Z 중대로부터 1개 소대를 파견했다.

증원군은 발전소로 달려가던 도중 일본군의 매복 공격을 받아 장갑차와 병력의 대부분을 잃고 장갑차의 차장인 카루터 소위를 포함한 9명만이 휴질리어 중대에 합류했다.

 

첫 공격에서 휴질리어 중대를 몰아내는데 실패한 일본군은 발전소에 맹렬한 포격을 가하면서 항복을 요구했다.

이 포격으로 77세의 고령이던 에드워드 남작이 박격포탄에 맞아 사망하는 등 휴질리어 중대에서 많은 사상자가 생겼다.

 

(발전소를 포격 중인 일본군의 41형 75mm 산포. 출처 :Hong Kong 1941-45, P.56)

 

19일 오전 1시 45분이 되자 발전소는 완전히 포위되었고 이어서 일본군이 발전소 내부로 진입하면서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다.

압도적인 병력의 열세 속에서 휴질리어 중대는 대부분 전사하거나 부상을 입고 포로가 되었다.

 

던롭 상병, 피어스 이병, 지오간 이병, 소비 이병, 로스코 이병은 19일 아침에 발전소를 빠져나와 발전소 부근 도로에 넘어져 있던 버스에 의존하여 마지막까지 저항했다.

일본군은 버스에 돌격을 감행했다.

던롭 분대는 치열한 전투 끝에 가까스로 돌격을 물리쳤으나 던롭 상병과 로스코 이병은 총검에 찔려 전사했다.

그러자 일본군은 3정의 기관총을 끌고와서 버스에 총격을 가하여 피어스 이병과 소비 이병을 사살했다.

혼자 남은 지오간 이병은 부상을 입자 죽은 척하고 엎드렸다.

영국군이 모두 죽은 줄 알고 일본군이 접근하자 지오간 일병은 기습적으로 사격을 가해 장교 1명과 그를 따르던 일본군 4명을 사살했다.

지오간 이병은 포로가 되었고 이로써 휴질리어 중대는 소멸했다.

 

노병으로 이루어진 휴질리어 중대는 20대 1이라는 압도적인 전력의 열세를 무릅쓰고 무려 18시간 동안 발전소를 지키면서 일본군의 서진을 가로막았다.

휴질리어 중대는 홍콩전투 전체를 통틀어 가장 잘 싸운 영국군 부대 중 하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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