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 로슨 준장의 전사
노스포인트에서 휴질리어 중대가 처절하게 저항하는 동안 홍콩섬 중앙의 황니천 계곡에서는 서부여단이 일본군과 결전을 치르고 있었다.
황니천 계곡은 홍콩섬의 교통요충지였으므로 서부여단장 존 로슨 준장은 이곳에 사령부를 두고 있었다.
일본군의 상륙이 임박하자 로슨 준장의 참모인 린든 소령은 사령부가 지나치게 노출되어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니콜스 산 남쪽에 새로운 사령부 자리를 물색했다.
이동은 12월 19일로 예정되어 있었다.
18일 밤에 일본군이 상륙하자 로슨 준장은 일본군의 황니천 진입을 막기 위하여 위니펙척탄병대대의 3개 소대를 파견했다.
프렌치 중위의 제18소대는 버틀러 산으로, 버켓 중위의 제17소대는 자딘 관측소로, 그리고 코리간 중위가 지휘하는 제16소대는 자딘 관측소 남서쪽의 도로 교차점으로 파견되었다.
제18소대가 버틀러 산에 도착해 보니 일본제1/228대대가 이미 장악하고 있었다.
일본군의 총탄을 뒤집어 쓴 제18소대는 소대장 프렌치 중위가 전사하는 등 큰 피해를 입고 쫓겨났다.
제17소대는 일단 자딘 관측소에 도달해 방어선을 폈다.
그러나 19일 오전 5시가 되자 일본제2/230대대가 도착하여 공격을 가했다.
제17소대도 소대장 버켓 중위가 전사하는 등 큰 피해를 입고 쫓겨났다.
일본군에게 쫓겨난 제17 및 제18소대의 병력들은 주변에 있던 의용대의 특화점에 들어가서 19일 오후까지 버텼다.
도로 교차로에 자리잡은 제16소대는 자딘 관측소에서 쏟아지는 총탄을 피해 니콜스 산 남쪽으로 이동했다.
제16소대는 19일 오후에 몰트비 소장의 명령에 따라 황니천 도로 300m 전방까지 진격했다.
자딘 관측소 부근의 특화점에는 의용대 제3중대가 배치되어 있었으며 자딘 관측소 동쪽의 쿼리 계곡에는 의용대 제1중대의 특화점이 있었다.
일본군은 이 특화점들을 결국 다 제압했지만 그 과정에서 큰 피해를 입었다.
어떤 특화점은 24시간을 버텼다.
의용대 제3중대장 스튜어트 소령은 황니천 계곡에 자리잡은 중대본부에서 12월 22일까지 4일간 끊임없이 전투를 치르면서 버티다가 탄약, 식량, 식수가 바닥나자 어쩔 수 없이 항복했다.
의용대 제3중대는 황니천 전투에서 80% 이상의 사상자를 내면서 편제가 무너졌다.
(1941년 12월 18일 아침 현재 홍콩 섬의 방어태세. 출처 : Hong Kong 1941-45, P.51)
A 중대장 그레샴 소령은 명령에 따라 19일 아침에 서쪽으로부터 황니천 계곡에 진입했다.
이때 서부여단사령부 부근에 주둔해 있던 D 중대에서 1개 소대가 증원되었다.
A 중대는 오스본 준위의 지휘 하에 버틀러 산을 점령하고 있던 일본제1/228대대 선발대의 방어선에 기습적인 총검돌격을 가하여 일단 버틀러 산을 점령했다.
그러나 정오가 되자 3개 중대의 일본군이 반격했다.
오후 3시가 되어 A 중대의 탄약이 거의 떨어지자 그레샴 소령은 항복할 수 밖에 없었다.
그레샴 소령이 항복하기 위하여 백기를 들고 일본군 장교 쪽으로 가는 순간 일본군이 총을 쏘아 그레샴 소령이 숨졌다.
그러자 A 중대원들도 총을 쏘아 그레샴 소령의 항복을 받으려던 일본군 장교를 사살했다.
전투가 재개되었고 탄약이 떨어진 A 중대는 버틀러 산의 서쪽 사면을 내려가 자딘 관측소 쪽으로 도망칠 수 밖에 없었다.
그 과정에서 A 중대의 장교들은 모두 전사하거나 부상을 입었다.
(1941년 12월 19일 황니천계곡 전투 상황도.출처 : Hong Kong 1941-45, P.68-69)
일본제1/228대대는 A 중대를 추격하여 포위한 다음 사방에서 수류탄을 던졌다.
A 중대를 지휘하던 오스본 준위는 일본군의 수류탄이 떨어지는 대로 주워서 일본군에게 되던졌다.
그러다가 수류탄 1발이 줍기 곤란한 구멍에 떨어졌고 주워 던질 시간이 없다고 판단한 오스본 준위는 자신의 몸으로 구멍을 막아 부하들을 구했다.
목숨을 바쳐 부하를 구한 오스본 준위에게는 빅토리아 십자훈장이 추서되었다.
오스본 준위는 제2차 세계대전에서 최초로 빅토리아 십자훈장을 받은 캐나다 군인이다.
A 중대의 생존자들은 모두 포로가 되었다.
(빅토리아 십자훈장. http://en.wikipedia.org/wiki/Victoria_Cross)
일본제1/228대대는 A 중대를 제압한 다음 스탠리 계곡의 대공포들도 제압하고 19일 저녁에 황니천 계곡으로 진입하여 제230연대와 연결했다.
A 중대의 분전 때문에 계획보다 늦어진 것이었다.
로슨 준장의 증원 요청을 받은 몰트비 소장은 19일 오전 7시 30분에 캠벨 대위가 지휘하는 제2왕립스코트대대 A 중대를 파견했다.
A 중대는 자동차를 타고 이동하다가 황니천 계곡 북쪽 90m 지점에서 일본제3/230대대로부터 사격을 받았다.
장교 모두가 전사하는 등 커다란 피해를 입은 A 중대에서 단지 15명만이 살아서 서부여단사령부에 도착했다.
그 시각 남쪽의 애버딘 해군기지에서도 3개 소대의 병력을 황니천 계곡으로 파견했다.
피어스 해군중령이 지휘하는 해군병력들은 트럭을 타고 북상하다가 오전 9시 45분에 황니천 남쪽에서 일본군의 매복공격을 받아 큰 피해를 입었다.
잔존 수병들은 황니천 계곡에서 남쪽으로 이어지는 도로가의 포스트브리지하우스에 의지하여 방어선을 펼 수 밖에 없었다.
서부여단사령부가 지나치게 노출되어 있다는 린든 소령의 걱정은 기우가 아니었다.
19일 오전 7시에 일본제3/230대대가 세실승마로를 따라 서부여단사령부에 접근했고 1시간 후에는 제2/230대대가 뒤따랐다.
오전 10시가 되자 일본군은 황니천 도로를 건너와서 서부여단사령부에 총격을 가했다.
로슨 준장은 몰트비 소장에게 전화를 걸어 일본군이 사령부 바로 앞에서 사격을 가하고 있다면서 밖으로 나가 응사하겠다고 말했다.
부시 대위가 엄호 사격을 가하는 동안 로슨 준장은 양손에 권총을 든 채로 참모들을 이끌고 사령부 밖으로 나와 일본군 쪽으로 사격을 가한 후 뒷쪽의 언덕으로 올라가려고 했다.
그 순간 계곡 건너편의 일본군 기관총이 길게 연사를 가했다.
로슨 준장의 시체는 이틀 후에 일본군에 의하여 언덕 중간에서 발견되었는데 허벅지에 총상을 입은 후 과다출혈로 숨진 상태였다.
포병장교들을 포함한 서부여단의 사령부 요원 대부분이 로슨 준장과 함께 전사했으며 아침에 여단사령부에 도착했던 왕립스코트대대 A 중대의 병사들도 함께 전사했다.
불과 몇 분 후에 제2/14펀잡대대의 커풋 중위가 로슨 준장을 구하기 위하여 브렌건캐리어 3대를 이끌고 사령부에 도착했으나 이미 늦었다.
로슨 준장의 전사에도 불구하고 서부여단의 병사들은 전투를 계속했다.
(서부여단장 존 로슨 준장. https://www.idmarch.org/document/John+K.+Lawson/JXD-show/)
서부여단사령부를 제압한 일본제3/230대대는 계속 남진하여 황니천 계곡 남쪽에 있는 언덕까지 도달했다.
제3/230대대는 언덕에 있던 경찰서를 장악하고 3.7인치 대공포를 장비한 홍콩-싱가포르포병대의 제7대공포대를 제압했다.
이어서 제3/230대대는 남쪽의 대담 언덕에 올라가 영국군의 3.7인치 및 6인치 곡사포들을 제압했다.
몰트비 소장의 명령에 따라 해피밸리의 영국군 포병이 포격을 가하여 제3/230대대에 큰 피해를 입혔지만 진격을 저지하지는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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