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 동부여단의 철수
서부여단장 존 라슨 준장은 상륙 소식을 듣자마자 위니펙척탄병대대본부에서 3개 소대를 편성하여 버틀러 산, 자딘 관측소, 그리고 자딘 관측소 남서쪽의 도로교차점으로 파견했다.
버틀러 산에 도착한 소대는 일본군이 이미 점령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소대는 엄청난 총탄을 뒤집어쓰면서 철수해야만 했다.
자딘 관측소에 도달한 소대는 곧 압도적인 병력의 일본군으로부터 공격을 받아 쫓겨났다.
도로 교차점을 점령한 소대는 자딘 관측소에서 쏟아지는 총탄을 받으면서 19일 아침까지 버텼다.
라슨 준장은 자딘 관측소를 뺏김으로써 홍콩섬의 중앙에 위치한 교통요충지인 황니천 계곡이 위험에 빠졌다는 걸 깨달았다.
19일 새벽 2시 30분에 라슨 준장은 딥워터 만 부근에 주둔 중이던 위니펙 척탄병 대대의 A 중대와 황니천 계곡의 서쪽에 주둔 중이던 D 중대에게 자딘 관측소를 탈환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몰트비 소장도 황니천 계곡에 증원군을 보내기 시작했다.
영국군 공병 70명과 중국인 공병 70명으로 이루어진 임시 중대가 편성되었으며 제2/14라지푸트 대대의 1개 중대가 자딘 관측소의 서쪽에 있는 언덕에 투입되었다.
남쪽 에버딘에 있는 해군본부에서도 몰트비 소장의 명령에 따라 유사시 황니천 계곡에 파견할 수 있도록 200 명 규모의 임시 중대를 편성했다.
그러나 몰트비 소장은 일본군의 의도를 오판했다.
그는 라지푸트 대대의 방어선에 상륙한 일본군은 양동부대일 뿐이며 적의 주력은 빅토리아시티에 직접 상륙할 것으로 보았다.
상륙한 일본군이 2개 대대라고 착각한 몰트비 소장은 소수의 병력만 황니천 계곡에 투입하고 예비대의 주력은 주력의 상륙에 대비하여 주둔지에 대기시켰다.
(홍콩 섬 상륙 및 전투.출처 : Hong Kong 1941-45, P.57)
19일 아침이 되었을 때 일본군의 좌익을 담당한 제229연대는 잉어문 계곡과 파커산을 점령했으며 중앙을 담당한 제228연대는 버틀러산을, 그리고 우익을 담당한 제230연대는 자딘 관측소를 점령하고 있었다.
영국군은 파커산 남동쪽의 대담계곡에서 홍콩섬 중앙의 황니천 계곡을 거쳐 북해안의 코즈웨이 만을 잇는 선에서 일본군과 대치하고 있었다.
동부여단장 세드릭 월리스 준장은 대담 계곡 부근에 캐나다 왕립소총대대, 미들섹스 대대의 2개 중대, 의용대의 2개 중대와 포대들을 거느리고 있었다.
서부여단장 존 라슨 준장은 황니천 계곡 서쪽 입구에 여단 예비대인 위니펙 척탄병 대대 D 중대와 경대공포대를 가지고 있었으며 계곡 내의 도로 교차점에 척탄병대대의 1개 소대, 자딘 관측소 서쪽의 언덕에 라지푸트 대대의 1개 중대를 가지고 있었다.
캐롤라인 언덕부터 북해안까지는 라지푸트 대대의 생존자들과 미들섹스 대대의 일부 병력이 지키고 있었다.
그밖에 소수 병력이 노스포인트의 발전소 부근과 대항 마을에 있었으며 자딘 관측소의 사면에도 일부가 달라붙어 있었다.
19일 오전 9시 30분에 몰트비 소장은 동부여단장 윌리스 준장과 통화했다.
몰트비 소장은 동부여단이 대담 계곡-게이지 분지-황니천 계곡에 이르는 방어선에서 일본군을 막아내길 원했으나 월리스 준장은 난색을 표했다.
월리스 준장은 동부여단이 직면한 일본군이 최소한 2개 대대로 강력한 박격포의 지원을 받고 있으며 계속 증원되고 있는데 반하여 동부여단의 병력은 흩어져 있다고 말했다.
그는 남쪽의 스탠리 마을 부근에서 병력을 집결시킨 다음 저녁에 반격을 실시하겠다고 제안하여 몰트비 소장의 승인을 받았다.
동부여단은 후퇴 과정에서 큰 대가를 치렀다.
많은 병사들이 후퇴 도중 흩어져 19일 저녁이 되자 동부여단의 보병은 절반으로 줄어들었다.
더 큰 문제는 화력의 손실이었다.
4.5인치(114mm) 곡사포를 지휘하던 영국인 장교들이 전사한 상황에서 철수 명령을 받은 인도인 장교들이 명령을 잘못 해석하여 4.5인치 곡사포 4문을 모두 파괴해 버렸다.
게이지 분지에 있던 대공포들은 일본군의 박격포 및 기관총 사격을 받고 있어서 철수할 수가 없었으므로 인도군 포수들은 조준기와 포미 폐쇄기를 제거한 후 탈출했다.
그리하여 19일 저녁이 되자 동부여단에게는 18파운드(83mm) 야포 1문과 3.7인치(94mm) 곡사포 2문만이 남았다.
4.5인치 곡사포를 비롯한 지원화기의 대량 상실은 동부여단의 운명에 큰 악영향을 끼쳤다.
19일 저녁에 월리스 준장은 몰트비 소장에게 전화를 걸어 20일 아침까지는 반격이 불가능하다고 말했다.
방어선을 펴는 것이 우선이며 병사들은 휴식이 필요하고 야간 행군은 위험하다는 논리였다.
19일 자정까지 동부여단은 홍콩섬 남동쪽의 스탠리산을 중심으로 동쪽으로 대담만과 서쪽으로 리펄스만을 잇는 방어선에 전개를 마쳤다.
이로써 동부여단은 담당 지역을 대부분 포기하고 홍콩섬의 남동쪽 스탠리반도에 틀어박힘으로써 서부여단과 연결이 끊어져 스스로 고립되었다.
반면 일본군으로서는 좌익을 위협하던 동부여단이 남쪽으로 물러가 버림으로써 결정적인 전장인 황니천 계곡에 자유롭게 병력을 집중할 수 있게 되었다.
일본군의 좌익을 담당한 제229연대는 19일 아침까지 파커산과 서환 언덕을 장악했다.
19일 날이 밝자 제229연대는 가벼운 저항을 물리치면서 남하하여 게이지 분지에 도달했다.
제229연대장 다나카 대좌는 게이지 분지를 장악한 다음 1개 중대를 남쪽으로 보내어 정찰했다.
명령에 따르면 제229연대는 황니천 계곡을 통과하여 서쪽으로 진격해야 했으나 정찰 결과에 따르면 황니천 계곡에서는 이미 제228 및 제230연대가 영국군과 치열한 전투를 벌이고 있었다.
다나카 연대장은 황니천 계곡은 이미 전투 중인 두 연대에게 맡기고 자신은 우선 남쪽으로 진격하여 남해안에 도달함으로 영국군을 동서로 분리한 다음 서쪽으로 진격하기로 했다.
그리하여 제229연대는 가벼운 저항을 받으면서 남진하여 바이올렛 언덕을 점령하고 20일 새벽에는 해안에 자리잡은 리펄스 호텔 부근에 도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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