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 노스포인트 발전소 전투

 

일본군의 우익에 상륙한 제3/230대대는 제5/7 라지푸트 대대 D 중대를 분쇄했다.

이어서 상륙한 제2/230연대는 빅토리아시티를 향하여 서쪽으로 진격하게 되어 있었으나 노스포인트의 발전소에서 발목을 잡혔다.

 

노스포인트 발전소 전투는 한편의 서사시같은 전투였다.

발전소를 지키던 병력은 의용대의 임시 중대로서 일본군에 쫓겨 발전소로 피신한 미들섹스 대대의 부상병들이 소수 가담했다.

 

부대 창설을 주창한 오웬 휴즈 예비역 중령의 이름을 따서 휴질리어 중대라고 부르던 임시 중대는 총 88명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장교 4명과 병사 36명은 의용대 소속이었고, 39명은 홍콩전기회사의 기술자와 관리자들이었으며 9명은 자유프랑스군 소속의 프랑스인들로서 지휘는 의용대의 존 페터슨 소령이 맡았다.

 

(1941년 12월 18일 아침 현재 홍콩 섬의 방어태세. 북해안 노스포인트에 자리잡은 휴질리어 중대가 보인다. 출처 : Hong Kong 1941-45, P.51)

 
휴질리어 중대는 홍콩전투 뿐 아니라 제2차 세계대전 전체로 보아서도 특이한 부대로서 가장 어린 중대원의 나이가 55세였다.

 

중대원 전원이 참전 경험을 가지고 있었는데 대부분 제1차 세계대전에 참전했고 일부는 보어전쟁에도 참전했으며 프랑스인들은 스페인 내전에 참전했다.

휴질리어 중대원 중 의용대의 장교와 병사들은 대부분 저명한 사업가들로서 고령인데다 명망가들이라 의용대에 이름만 올렸을 뿐 실제로는 동원되지 않았다.

그러나 홍콩의 의회 격인 홍콩입법회의 전직 의원이었던 휴즈 예비역 중령의 주창으로 한 자리에 모여 부대를 편성하고 노스포인트 발전소의 방어를 자청했다.

 

중대장인 존 패터슨 소령은 제1차 대전 당시 시나이 반도와 팔레스타인에서 싸우는 등 6번이나 해외 원정에 참가한 베테랑이었다.

페터슨 소령은 홍콩전투 당시 무역회사로서 엄청난 대기업이었던 자딘 매터슨의 회장이었으며 홍콩입법회 의원이었다.

홍콩전기회사의 기술자 및 관리자 39명을 이끌고 휴질리어 중대에 합류한 빈센트 소비 이병은 발전소장이었다.

프랑스인들을 이끌던 자끄 에갈 대위는 상해에서 자유 프랑스를 대표했었으며 부유한 포도주 판매상이었다.

 

에드워드 드 부 이병은 8대 남작인 귀족으로 전임 홍콩 총독의 조카였으며 부유한 귀금속 판매상이었다.

최고 수준의 사교클럽인 홍콩클럽의 총무였던 에드워드 남작은 77세라는 고령 때문에 의용대의 동원에서 제외되자 휴질리어 중대에 이병으로 자원했다.

67세였던 피어스 이병은 허친슨 사의 회장이었으며 홍콩클럽과 쌍벽을 이루는 최고 수준의 클럽인 홍콩조키클럽의 총무였다.

부중대장인 브루치 대위는 무역회사인 무티어 사의 회장이었는데 당시 60세로 중대에서 젊은 편이었다.

 

제5/7라지푸트 대대 D 중대를 분쇄한 일본군은 여세를 몰아 발전소를 단번에 점령하려다가 휴질리어 중대에게 얻어터지고 물러섰다.

일본군의 압력이 가중되자 패터슨 소령은 몰트비 소장에게 지원을 요청했다.

몰트비 소장은 의용대의 장갑차 1대와 함께 미들섹스 대대 Z 중대로부터 1개 소대를 파견했다.

증원군은 발전소로 달려가던 도중 일본군의 매복 공격을 받아 장갑차와 병력의 대부분을 잃고 장갑차의 차장인 카루터 소위를 포함한 9명만이 휴질리어 중대에 합류했다.

 

첫 공격에서 휴질리어 중대를 몰아내는데 실패한 일본군은 발전소에 맹렬한 포격을 가하면서 항복을 요구했다.

이 포격으로 77세의 고령이던 에드워드 남작이 박격포탄에 맞아 사망하는 등 휴질리어 중대에서 많은 사상자가 생겼다.

 

(발전소를 포격 중인 일본군의 41형 75mm 산포. 출처 :Hong Kong 1941-45, P.56)

 

19일 오전 1시 45분이 되자 발전소는 완전히 포위되었고 이어서 일본군이 발전소 내부로 진입하면서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다.

압도적인 병력의 열세 속에서 휴질리어 중대는 대부분 전사하거나 부상을 입고 포로가 되었다.

 

던롭 상병, 피어스 이병, 지오간 이병, 소비 이병, 로스코 이병은 19일 아침에 발전소를 빠져나와 발전소 부근 도로에 넘어져 있던 버스에 의존하여 마지막까지 저항했다.

일본군은 버스에 돌격을 감행했다.

던롭 분대는 치열한 전투 끝에 가까스로 돌격을 물리쳤으나 던롭 상병과 로스코 이병은 총검에 찔려 전사했다.

그러자 일본군은 3정의 기관총을 끌고와서 버스에 총격을 가하여 피어스 이병과 소비 이병을 사살했다.

혼자 남은 지오간 이병은 부상을 입자 죽은 척하고 엎드렸다.

영국군이 모두 죽은 줄 알고 일본군이 접근하자 지오간 일병은 기습적으로 사격을 가해 장교 1명과 그를 따르던 일본군 4명을 사살했다.

지오간 이병은 포로가 되었고 이로써 휴질리어 중대는 소멸했다.

 

노병으로 이루어진 휴질리어 중대는 20대 1이라는 압도적인 전력의 열세를 무릅쓰고 무려 18시간 동안 발전소를 지키면서 일본군의 서진을 가로막았다.

휴질리어 중대는 홍콩전투 전체를 통틀어 가장 잘 싸운 영국군 부대 중 하나였다.

Posted by 대사(P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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