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 황니천 계곡 함락

 

1941년 12월 20일 아침이 되었을 때 일본군의 배치 상황은 다음과 같다.

 

동쪽에는 제1/229 및 제2/228대대가 대담 및 서환방면에 있었다.

자딘 관측소 남동쪽의 스탠리 계곡에는 제2 및 제3/229대대가 있었고 자딘 관측소에는 제1및 제2/230대대가 있었다.

자딘 관측소의 남서쪽에는 제1/228대대가 있었으며 예비대인 제3/228대대는 막 홍콩섬 북해안에 상륙한 상태였다.

 

(홍콩 섬 상륙 및 전투 상황도.출처 : Hong Kong 1941-45, P.57)

 

서부여단의 방어선은 북쪽에서는 제1미들섹스대대 Z 중대와 펀잡 대대의 잔존병들이 레이튼 힐을 중심으로 방어선의 북쪽을 맡고 있었다.

중앙에서는 제2왕립스코트 대대와 위니펙척탄병대대의 병력들이 뒤섞인 채 니콜슨 산에서 황니천 계곡에 걸쳐 있었고 척탄병대대 D 중대는 황니천 계곡 내의 특화점에서 버티고 있었다.

 

20일 날이 밝자 황니천 계곡의 서쪽에 있던 제1/228대대가 남하하여 포스트브리지하우스에서 저항하고 있던 해군병력들을 쫓아냄으로써 딥워터 만으로 향하는 길을 열었다.

 

일본제1/229대대는 20일 아침에 바이올렛힐 너머 리펄스베이호텔 쪽으로 소대 규모의 정찰대를 파견했다.

정찰대는 호텔의 방어가 허술하다고 보고 공격을 가했으나 착각이었다.

호텔에는 미들섹스 대대의 소위가 지휘하는 수십명의 영국 육군 및 해군 패잔병들이 있었는데 이들은 사기가 떨어져 있었지만 그래도 경무장의 소대 병력이 무찌를 수 있는 상대는 아니었다.

게다가 정찰대가 호텔을 공격하는 도중 배후에 영국군이 나타났다.

 

동부여단장 세드릭 월리스 준장은 21일 오전 8시에 캐나다왕립소총대대의 1개 중대에다가 의용대 2개 소대를 증원하여 바이올렛 힐로 파견했다.

이들의 임무는 바이올렛 힐을 거쳐 남동쪽으로부터 황니천 계곡을 공격하는 것이었다.

동부여단이 가진 야포 세력의 전부인 18파운드 곡사포 1문 및 3.7인치 곡사포 2문이 화력지원을 담당했다.

왕립소총중대가 오전 10시에 리펄스베이호텔에 도착했을 때 일본정찰대는 호텔의 차고와 별채를 점령하고 본관을 공격하던 중이었다.

중대는 배후에서 일본군을 덮쳐 장교 1명을 포함하여 26명을 사살하고 나머지를 쫓아버렸다.

 

왕립소총중대가 호텔을 지나 북상하려고 하자 북쪽의 바이올렛 힐 및 서쪽의 미들스퍼로부터 일본군의 총탄이 쏟아져 진격할 수 없었다.

20일 저녁이 되자 월리스 준장은 왕립소총중대가 고립될 것을 우려하여 동부여단의 방어선 내로 철수하라고 명령했다.

 

일본제3/229대대가 남하하여 리펄스 만 북쪽에 나타나자 몰트비 소장은 애버딘에 제2/14펀잡대대 A 중대를 파견하여 애버딘과 리펄스베이호텔 사이의 도로를 확보하라고 명령했다.

펀잡대대장 키드 중령이 직접 A 중대를 이끌고 빅토리아시티를 떠나 애버딘에 도착했다.

A 중대는 말이 중대지 병력이 키드 중령을 포함한 장교 3명과 부사관 및 병사 25명에 지나지 않았으므로 애버딘에서 증원을 받았다.

애버딘 섬에서 위니펙척탄병 대대의 1개 소대가 상륙하여 합류했고 해군수병 35명도 가세했다.

세력이 증가된 A 중대는 리펄스 만 북쪽의 도로를 따라 동진하다가 해발 150m 의 사신산(壽臣山)에서 일본제3/229대대의 방어선에 맞닥뜨렸다.

영국군은 용감하게 공격했으나 압도적인 전력차를 극복하지 못한 채 큰 피해를 입고 쫓겨나 브릭힐 부근에 방어선을 폈다.

A 중대의 28명 중 펀잡대대장 키드 중령을 포함하여  20명이 전사했고 살아남은 8명은 전원 부상을 입었으며 척탄병 소대와 해군병력들도 많은 사상자를 기록했다.

다행히 일본군은 리펄스베이호텔에서 북상하려는 왕립소총중대를 신경쓰느라 A 중대를 추격하지는 않았다.

 

브릭힐 북쪽에 있는 리틀홍콩에는 의용대, 해군, 척탄병대대 및 미들섹스대대 소속의 소수 병력이 모여 탄약창을 지켰다.

포함 시칼라는 딥워터 만에 떠서 함포 지원을 계속했다.

 

20일 오후에 자딘 관측소에 주둔 중이던 일본제230연대가 서쪽의 언덕을 장악하고 있던 중대 규모의 펀잡대대 병력을 공격했다.

펀잡대대는 큰 피해를 입었고 전선의 붕괴를 막기 위하여 왕립스코트대대의 1개 소대가 펀잡대대의 우익에 급히 투입되었다.

그러나 일본군은 더 이상 진격하지 않고 다음날의 공격에 대비하여 병력의 재정비에 주력했다.

 

서부여단장 론슨 준장이 전사하자 몰트비 소장은 의용대장 헨리 로즈 대령을 서부여단장으로 임명하고 반격을 명했다.

로즈 대령은 서해안의 폭풀람에 주둔하고 있던 위니펙척탄병대대 B 중대를 주력으로 삼아 21일 아침에 반격을 가하기로 하고 이동을 명했다.

트리스트 소령이 지휘하던 B 중대는 약 100 명의 병력을 가지고 있었으며 홍콩전투 개시 이래 한번도 전투에 투입되지 않은 생생한 중대였다.

 

B 중대가 동쪽으로 이동하는 동안 로즈 대령은 니콜슨 산 주변에서 복잡하게 뒤섞여 있던 위니펙척탄병대대와  왕립스코트대대의 병력들에게 재집결을 명했다.

영국군이 재집결을 위하여 이동하는 와중에 니콜슨 산 정상이 비고 말았다.

 

일본군은 다음날인 21일에 150mm 중포를 포함한 야포의 화력지원 하에 공격을 실시할 예정이었다.

제230연대가 버틀러 산 서쪽의 언덕을 담당하고 제228연대가 니콜슨 산을 공격할 계획이었다.

그런데 20일 오후에 제228연대의 정찰대가 니콜슨 산 정상이 비었다고 보고했다.

제228연대장 도이 데이히치 대좌는 성문보 전투에서와 마찬가지로 이번에도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20일 오후 5시, 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가운데 제228연대의 3개 중대가 아무런 저항도 받지 않고 전진하여 니콜슨 산 정상을 점령했다.

 

서해안에서 이동해 온 위니펙 척탄병대대 B 중대가 21일 새벽에 니콜슨 산에 도착했다.

B 중대는 도착하자마자 일본군 3개 중대로부터 공격을 받았다.

치열한 전투 끝에 B 중대는 장교 전원을 포함하여 전체 병력의 절반 가까운 사상자를 기록하면서 니콜슨 산 서쪽의 미들 계곡을 지나 만자 계곡까지 쫓겨났다.

 

황니천 계곡 안에서는 위니펙척탄병대대 D 중대가 고립된 채 특화점에 의지하여 처절한 저항을 계속하고 있었다.

중대장 보우만 대위가 전사하자 필립스 대위가 이어받았으며 필립스 대위가 부상을 입자 블랙우드 중위가 지휘했다.

블랙우드 중위는 22일까지 저항한 다음 탄약, 식량 및 식수가 떨어지자 할 수 없이 항복했다.

그때까지 살아남은 D 중대원은 37명이었으며 전원 부상을 입고 있었다.

D 중대가 사살한 일본군은 200명이 넘었다.

필립스 대위와 블랙우드 대위는 나중에 군사십자장(Military Cross)을 받았다.

 

(군사십자장. http://en.wikipedia.org/wiki/Military_Cross)

 

20일 저녁이 되자 황니천 계곡은 사실상 일본군이 지배하고 있었다.

황니천 계곡 전투는 일본군에게도 결코 쉬운 전투가 아니었다.

일본군은 19일과 20일에 걸친 황니천 계곡 전투에서 제3/230대대장 우네다 안페이 소좌가 중상을 입는 등 800 명이 넘는 사상자를 기록했다.

 

20일 저녁에 진책 소장이 몰트비 소장에게 60,000 명의 중국군이 일본군의 후방에 집결하고 있다고 말했다.

몰트비 소장은 즉시 병사들에게 이 기쁜 소식을 전했으며 병사들의 사기가 크게 올랐다.

그러나 결국은 틀린 정보로 판명되었다.

Posted by 대사(P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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