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 총평
홍콩이 개전 18일 만에 함락되었다는 소식은 영국 조야에 큰 충격을 주었다.
윈스턴 처칠 수상과 전시 내각은 버린 카드인 홍콩이 언제까지나 버틸 것이라고 믿지는 않았으나 그렇게 일찍 항복할 줄은 몰랐다.
홍콩전투에서 일본군은 정확한 정보에 입각하여 주도면밀하게 준비했다.
일본군은 간첩들의 활약으로 전투가 시작되기 전에 영국군의 방어태세를 파악하고 약점을 이용할 준비를 갖출 수 있었다.
홍콩 전투를 18일 만에 성공적으로 마무리지을 수 있었던 배경에는 정보전의 승리가 있었다.
일본군의 전술에는 새롭거나 참신한 요소는 없었다.
중일전쟁에서와 마찬가지로 일본군 지휘관은 주도권을 중시했으며 병사의 감투정신에 크게 의존했다.
일본병사는 뛰어난 전투원이었다.
그들은 잘 훈련되었으며 대부분 중일전쟁에서 실전경험을 가지고 있었다.
억세고 야간전투에 능숙한 일본병사는 평지 뿐 아니라 산악전에도 익숙했으며 전장의 지형지물을 교묘하게 활용했다.
경무장한 일본병사는 빠르고 조용하게 기동했으며 용맹함과 교활함을 함께 갖추고 있었다.
영국군은 성문보를 점령하거나 홍콩섬에 최초로 상륙한 일본군이 특별강습부대라고 생각했으나 실제로는 일반 보병이었다.
일본군의 보병 숫자는 영국군을 압도하지 못했으나 포병은 압도적으로 우세했고 제공권을 완전히 장악했다.
일본제38사단은 잘 훈련되고 실전경험을 가진 병사들로 구성된 균질적인 조직이었다.
반면 영국군의 주력은 대부분 주둔 임무를 맡고 있던 병력들로서 실전경험은 커녕 전투훈련조차 제대로 받지 못했다.
홍콩수비대는 장비도 들쭉날쭉하고 국적이나 출신도 다양한 여러 잡다한 부대들을 급하게 끌어모은 즉흥적 조직에 지나지 않았다.
일본군은 기관총에 대량의 철갑탄을 보급했는데 철갑탄은 특화점이나 엄폐호에 달려 있는 철제문을 뚫을 수 있어서 위협적이었다.
소형 박격포의 일종인 척탄통은 전선 가까이에서 운용할 수 있었으며 보다 구경이 큰 박격포들 또한 효과적이었다.
일본군은 박격포탄의 보급에 중국인 인부들을 동원했다.
반면 영국군의 박격포는 도착이 늦어 훈련할 시간이 없었고 포탄도 절대적으로 부족했다.
일본군은 기존의 사단포병보다 크게 증강된 포병을 효율적으로 사용하여 영국군 포병을 압도하고 필요한 화력지원을 제공했다.
홍콩이 예상보다 빨리 함락된 데에는 구룡반도를 일찍 잃은 것도 한 원인이 되었다.
일본군 공병은 영국군의 예상보다 빨리 심천강에 도하 준비를 완료하고 대군을 도하시켰다.
구룡반도의 영국군은 가까스로 장비와 시설을 파괴할 수 있었으나 일본군은 어디에 어떤 시설이 있고 수리하려면 어떤 자재가 얼마나 필요한지를 정확하게 알고 미리 준비했다.
홍콩 전투에서 일본군의 통신, 수송 및 기타 지원부대들은 장비를 제대로 갖추고 잘 조직되어 임무를 완수했다.
반면 영국군의 차량은 중국 민간인들이 운전하는 경우가 많았는데 민간인 운전사들은 규율이 부족하여 자주 도망쳤다.
또한 수송용 노새가 부족하여 언덕 지형에서의 보급에 곤란을 겪었다.
홍콩전투에서 일본군은 항공력을 유감없이 과시했다.
제공권을 완전히 장악했기 때문에 폭격기는 전투기의 호위를 받을 필요가 없었고 지상의 일본군이 자신들의 위치를 조종사에게 알리기 위하여 표식을 설치해도 영국기의 공습을 받을 위험이 없었다.
또한 영국군의 대공포 세력이 미약하여 저공 폭격이나 탄착 관측 또한 자유롭고 안전하게 실시할 수 있었다.
이런 좋은 조건아래 일본기들은 맹활약했다.
고공폭격은 정확했으며 저공폭격 및 기총소사도 효과적이었다.
일본군의 항공력을 폄하하고 있던 영국군은 독일공군이 공습을 지도하고 있는 것이 틀림없다고 생각했다.
제공권의 상실은 필연적으로 제해권의 상실로 이어졌다.
애당초 홍콩의 영국해군 세력은 일본함대에 대들기 힘든 수준이었지만 제공권을 상실하면서 해안포의 사정거리 안에서 홍콩섬 주변을 초계하는 일도 불가능해졌다.
제해권이 없는 상황에서 홍콩섬은 기습적인 상륙위협에 시달렸으며 수비대의 배치에도 제약이 따랐다.
몰트비 소장은 상륙 위협이 가장 큰 북해안에 전력을 집중하는 대신 기습상륙을 염려하여 전 해안선에 걸쳐 병력을 분산 배치할 수 밖에 없었다.
(1941년 12월 18일 아침 현재 홍콩 섬의 방어태세. 출처 : Hong Kong 1941-45, P.51)
구룡반도의 3개 대대에 1-2개 대대라도 추가되었으면 훨씬 오랫동안 버틸 수 있었을 것이었다.
그러나 제해권을 잃어 홍콩섬이 기습 상륙의 위협에 놓여있는 상황에서 구룡반도에 병력을 더 파견할 수는 없었다.
영국군의 포정들은 일본군의 공습에 노출되어 활동에 큰 위협을 받으면서도 지상군 지원에 나름대로 활약했다.
어뢰정들은 무장이 적절하지 못했다.
주무장인 어뢰는 일본군이 해협횡단에 사용하는 주정들을 공격하는 데에는 무용지물이었으며 이런 임무에 사용할 수 있는 무기는 기관총 5정뿐이었다.
구룡반도의 전투에서 성문보 상실은 분기점이었다.
성문보를 잃으면서 진드링커스 선에 배치된 영국군 전체가 위험에 빠지자 서둘러 후퇴할 수 밖에 없었다.
영국군의 급속한 후퇴는 일본군으로서도 뜻밖이었다고 한다.
일본군의 홍콩섬 상륙은 성공적이었다.
제38사단은 달없는 밤, 만조 그리고 불타는 저유탱크 및 페인트 공장에서 나는 연기가 영국군의 시야를 가리는 조건을 활용하여 주정을 타고 큰 어려움없이 상륙했다.
상륙 성공은 일본군의 전술적 성취이기도 하지만 방어를 담당한 영국군 특화점들의 위치가 좋지 않았던 것도 사실이다.
특화점들은 상호 위치가 나빠서 교차사격이 불가능했으며 종심이 얕았다.
하지만 책임을 전적으로 영국군에게 돌릴 수는 없다.
홍콩섬 북해안은 번화한 지역으로 조선소, 작업장, 산업시설, 그리고 많은 민간 시설물들이 늘어서 있었으며 이런 곳에 군사시설을 만들 경우 수많은 이해관계자들의 저항을 받을 수 밖에 없다.
민주국가에서, 더군다나 전시가 아닌 평시에는 그런 경우 순전히 군사적인 면만을 고려하여 건설을 밀어붙이기는 불가능하다.
일본군이 상륙하여 홍콩섬 내부로 진출하자 영국군에게는 의지할만한 강력한 방어선이 없었다.
또한 기습적 상륙에 대비하여 흩어져 있던 병력들은 시간에 맞추어 결정적인 전장에 달려오기 힘들었다.
전투가 끝난 후 뒤돌아 보면 영국군은 두가지 큰 실수를 저질렀다.
첫째는 19일에 동부여단이 홍콩섬 남동쪽의 스탠리 지역으로 물러나 버린 일이다.
이로써 서부여단과의 연결이 끊어지면서 방어선이 두동강났고 결과는 파멸적이었다.
몰트비 소장은 동부여단이 홍콩섬 중부의 대담계곡과 황니천계곡을 잇는 선에서 서부여단과 연결을 유지해 주기를 바랐지만 동부여단장 세드릭 월리스 준장의 주장에 밀려 철수를 허가했다.
두번째는 병력 이동에 관한 것이다.
12월 18일 밤부터 19일 새벽에 걸쳐 일본군의 주력이 북해안에 상륙하여 황니천 계곡으로 남하하는 것이 확실해졌을 때 몰트비 소장은 흩어져 있던 병력에게 과감한 이동 명령을 내려 결전장인 황니천 계곡에 투입해야 했다.
물론 일본군은 동시에 남쪽으로도 양동작전을 개시했지만 규모로 보나 위험성으로 보나 일본의 주공이 판명나면 결전장으로 병력을 집결하는 결단이 필요했다.
결단을 못 내리는 바람에 일본군은 큰 저항을 받지 않고 결전장인 황니천 계곡에 진입했고 압도적인 병력의 열세에 몰린 수비대는 서부여단장 존 로슨 준장이 전사하는 등 큰 피해를 입으면서 참패했다.
훗날 몰트비 소장은 이러한 비판에 대해 당시 자신에게는 해상의 상황을 알 수 있는 정찰기나 초계 함정이 없었다는 사실을 강조했다.
그는 만일 24시간 내로 일본군의 기습상륙이 없을 것이라는 사실을 미리 알 수 있었다면 흩어져 있던 병력들을 늦지 않게 이동시켜 황니천 계곡에 투입했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게다가 로슨 준장의 전사가 몰트비 소장에게 전달되는 속도가 늦어져 19일에 황니천 계곡에서 실시된 반격은 중대 단위로 따로 실시되면서 실패했다.
새로운 서부여단장이 일찍 임명되어 반격을 조율했다면 어느 정도의 성공을 거둘 수 있었을 것이다.
홍콩 전투에서 영국군의 반격은 흔히 반격명령을 받은 지휘관이 여러 부대의 병력을 끌어모은 혼성부대를 지휘하여 실시했다.
대부분 사전정찰이 불가능했고 통신의 미비로 부대 사이의 협조가 힘들었으며 야포 세력은 미약했다.
이런 상황에서 반격은 대부분 실패했으며 설사 목표를 점령해도 유지하기 어려웠다.
어려운 여건 속에서도 소부대 지휘관들과 병사들은 잘 싸웠다.
영국군, 캐나다군, 인도군, 의용대 할 것 없이 많은 부대들이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훌륭하게 싸웠으며 많은 포수, 공병, 그리고 항공대원들도 보병으로 투입되어 열심히 싸웠다.
빈약한 세력을 가진 해군도 어려운 여건하에서 최선을 다하여 임무를 수행했으며 해병대와 해군 수병들은 지상 전투에서도 일정한 몫을 담당했다.
몰트비 소장이 전후에 보고한 바에 따르면 홍콩전투에서 영국군의 피해는 전사 2,123명, 부상 1,332명이었다.
포로는 10,947명이었는데 영국군 약 5,000 명, 인도군 약 4,000 명, 캐나다군 약 2,000명이었다.
일본군의 피해는 전사 678명, 부상 1,413명인데 영국군 공식전사는 일본군의 피해를 전사 675명, 부상 2,079명으로 약간 높게 적고 있다.
영국군 공식전사에 따르면 제228연대가 약 800명, 제229연대가 약 600명, 제230연대가 약 1,000명의 사상자를 내었다.
민간인 피해는 사망 약 2,000 명, 부상 약 6,000 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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