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 스탠리 반도 전투

 

1941년 12월 24일 아침에 동부여단 사령관 세드릭 월리스 준장은 캐나다왕립소총대대장 윌리엄 홈 중령을 비롯한 장교들과 회의를 가졌다.

왕립소총대대의 장교들은 의기소침한 동시에 울분에 차 있었다.

대대의 병사들은 지난 5일간 거의 쉬지 못했으며 보급이 시원찮아서 제대로 먹지도 못하고 있었다.

훈련이 부족한 상태로 실전에 투입된 대대는 밤낮없이 치열한 전투를 치르면서 큰 인명피해를 입고 있었다.

 

로슨 준장의 전사로 홍콩에 파견된 캐나다 군의 선임장교가 된 왕립소총대대장 홈 중령은 다른 부대들이 제대로 싸우지 않고 캐나다 병사들만 총알받이로 내세운다면서 격앙된 어조로 월리스 준장에게 대들었다.

그 바람에 회의장에서는 한동안 고성이 오고갔으며 결국 월리스 준장은 캐나다왕립소총대대를 캐나다위니펙척탄병대대의 생존자들과 함께 방어선에서 철수시키기로 결정했다. 

이로써 캐나다 병사들은 후방의 스탠리 요새로 가서 동부여단의 예비대가 되었고 캐나다 군이 빠진 방어선은 재편되었다.

 

(1941년 12월 24일 - 25일에 걸친 스탠리 반도의 방어상황.출처 : Hong Kong 1941-45, P.80)

 

첫번째 방어선은 스탠리 경찰서를 중심으로 펼쳐져 있었다.

경찰서의 북쪽에 스탠리 소대가 배치되었다.

의용대 소속인 스탠리 소대는 스탠리 교도소의 경비를 맡던 부대로 피츠제럴드 중위가 지휘했으며 병력은 장교 1명을 포함하여 29명이었다.

스탠리 소대는 재소자들의 지원을 받았다.

일본군이 홍콩섬에 상륙하자 스탠리 교도소에서 복역 중이던 병사 약 40명이 의용대에 지원했다.

제1미들섹스대대에서 근무하다가 동성애 혐의로 2년 형을 선고받고 복역 중이던 채티 대위가 이들을 지휘했다.

그리하여 스탠리 소대는 자신이 감시하던 죄수와 힘을 합쳐 일본군을 막게 되었다.

경찰서 남쪽의 정음곡(舂坎角)에는 포시스 소령이 지휘하는 의용대 제2중대가 배치되었으며 1번 방갈로 부근의 특화점에는 시산 병장이 지휘하는 미들섹스대대의 기관총들이 배치되었다.

두번째 방어선은 성 스티븐 대학의 남쪽에 있는 스탠리 마을에 설정했다.

동해안의 27번 특화점에는 캐나다왕립소총대대 A 중대의 일부 병력이 들어가서 남쪽으로 향하는 도로를 감제했다.

스탠리 마을은 경찰병력이 지켰으며 드로운 상병이 지휘하는 의용대 제1중대의 1개 분대 10명이 가세했다.

마지막 방어선은 성 스티븐 대학 예비학교와 스탠리 교도소를 잇는 선으로 머피 병장이 지휘하는 의용대 제1중대의 1개 분대와 리스 대위가 지휘하는 의용대 제1포대가 지켰다.

남쪽의 스탠리 요새에는 캐나다왕립소총대대를 중심으로 한 대규모의 예비대가 주둔 중이었다.​

일본제1/229대대는 24일 오후에 영국군 방어선을 공격했다가 격퇴당했다.

그러자 일본군은 제1/230대대를 추가로 투입했다.

24일 저녁 9시에 일본군 2개 대대가 경전차 3대의 지원 하에 넓은 정면에서 동시에 공격해 왔다.​

영국군의 2파운더(40mm) 대전차포가 경전차 2대를 파괴했지만 첫번째 방어선을 지키던 의용대 병력들은 중과부적으로 패배했다.

의용대 제2중대는 철수 과정에서 대부분의 병력을 잃고 스탠리 마을로 밀려났다.​

자정이 지났을 때 일본군은 1번 방갈로 부근의 특화점들에 배치되었던 제1미들섹스대대 제1중대의 기관총들을 제압했다.

특화점들을 지키던 병력 중 폴리 이병을 제외한 전원이 전사했다.

첫번째 방어선을 돌파한 일본군은 남하하여 임시 병원으로 쓰이고 있던 성 스티븐 대학을 점령했다. ​

부상자와 피난민으로 붐비는 건물에 난입한 일본군은 부상자를 잔인하게 학살하고 여자란 여자는 모조리 강간했다.​

25일 오전 3시 30분에​ 일본군이 두번째 방어선에 도달했다.

비오듯 쏟아지는 총탄과 수류탄 세례 속에 의용대와 경찰이 지키던 방어선이 다시 무너졌으며 일본군은 화염방사기를 사용하여 동해안의 27번 특화점을 제압했다.

25일 동이 텄을 때 일본군은 마지막 방어선에 접근하고 있었다.

25일 아침에 월리스 준장은 캐나다왕립소총대대에게 반격명령을 내렸으나 대대장 홈 중령이 거부했다.

할 수 없이 윌리스 준장은 캐나다위니펙척탄병대대 D 중대장 파커 소령에게 반격명령을 내렸다.

파커 소령은 대대를 샅샅이 뒤져 148명을 찾아낸 다음 25일 오후1시 30분에 반격을 실시했다.​

일본군은 예상 외로 강력한 영국군에 반격에 허를 찔렸고 척탄병대대는 일본군에게 큰 피해를 주면서 진격했다.

선두인 제18소대는 맥도넬 병장의 지휘 하에 스탠리 마을까지 진격하여 백병전으로 일본군을 몰아내고 일시적으로 마을을 점령했다.

그러나 일본군이 정신을 차리고 본격적으로 반격하기 시작하자 척탄병 대대는 큰 피해를 입고 물러날 수 밖에 없었다.

척탄병대대는 반격에 참가한 148명​ 중 104명의 사상자를 기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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