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 어뢰정의 반격

 

일본군은 1941년 12월 19일 하루 종일 각종 주정을 사용하여 홍콩섬과 구룡반도 사이의 해협을 건너 병력과 장비를 실어날랐다.

관측소를 상실한 영국의 해안포들은 이러한 움직임을 저지하지 못했다.

홍콩의 영국해군을 지휘하던 알프레드 콜린슨 대령은 제2어뢰정편대(2nd MTB flitilla)를 투입하여 일본군의 수송을 방해하기로 결심했다.

그는 어뢰정 7호(MTB 7)의 정장 론 애슈비 중위에게 어뢰정 6척(어뢰정 7호, 9호, 11호, 12호, 26호, 27호)를 이끌고 해협에 진입하여 일본군 주정들을 공격하라고 명령했다.

 

애슈비 중위는 어뢰정들을 이끌고 홍콩섬의 서해안을 돌아 북상했다.

공격은 2척씩 짝을 지어 차례로 실시하기로 했다.

우선 애슈비 중위의 어뢰정7호가 어뢰정 9호와 함께 공격에 나섰다

 

(1941년 12월 19일에 실시한 영국어뢰정의 반격. 출처 :Hong Kong 1941-45, P.53 )

 

19일 오전 8시 45분, 어뢰정 7호와 9호가 나란히 30노트의 속력으로 서쪽으로부터 해협에 진입했다.

왐포아 부두를 지났을 때 어뢰정 7호가 북쪽 구룡만에서 일본군의 모터보트 3척을 발견했다.

모터보트마다 15명에서 20명 정도의 일본군이 타고 있었으며 역시 일본군이 가득 올라탄 소형주정 1척씩을 매달고 홍콩섬을 향하여 남진하고 있었다.

 

애슈비 중위는 즉시 공격명령을 내렸고 어뢰정 7호는 속력을 37노트로 올리면서 북상하여 달려들었다.

일본군의 모터보트는 깜짝 놀라 뱃머리를 돌려 북쪽으로 달아났으나 37노트로 달려드는 어뢰정에게서 도망칠 수는 없었다.

어뢰정 7호는 일본군의 모터보트로부터 100m 까지 접근하자 루이스 기관총으로 공격을 가했다.

영국어뢰정은 뱃머리와 후미에 루이스 연장 기관총 각 1정씩, 그리고 중앙에 단장 1정으로 합계 5정의 루이스 기관총을 장착하고 있었다.

모터보트에 탄 일본군들도 궁지에 몰리자 소총과 기관총으로 반격했다.

어뢰정 7호는 기관총을 난사하면서 일본군 모터보트의 불과 5m 전방까지 접근하여 2척을 침몰시키고 타고있던 일본군을 몰살시켰다.

이어서 폭뢰를 2발 떨어뜨렸으나 수심이 얕아 폭발하지 않았다.

그 순간 일본군의 총탄이 기관에 맞아 속력이 떨어지자 어뢰정 7호는 뱃머리를 돌려 서쪽으로 빠져나갔다.

 

한편 전투가 벌어지던 순간 어뢰정 7호의 남쪽에 있던 어뢰정 9호는 7호에 가려서 제대로 사격을 하지 못했다.

어뢰정 7호가 일본군의 반격으로 속력이 떨어지면서 오른쪽으로 선회하자 9호가 북쪽으로 치고 나가 도망치는 일본군의 3번째 모터보트를 추격하면서 총격을 가했으나 피해만 입히고 격침하지는 못했다. 

 

일본군의 총격으로 기관에 손상을 입어 속력이 떨어진 어뢰정 7호는 서쪽으로 빠져나가다가 홍콩섬에 병력을 내려놓고 돌아가던 일본군의 보트를 발견하고 총격을 가했으나 피해만 입혔을 뿐 격침하지 못했다.

이때 어뢰정 7호는 홍콩섬 북해안의 태고 조선소에 상륙한 일본군이 쏘아대는 총탄에 맞아 추가로 피해를 입고 속력이 더 떨어졌다.

비실거리며 해협을 빠져나오던 어뢰정 7호는 구룡시 앞바다에서 일본군 보트를 만나 다시 2척에게 피해를 입혔으나 역시 격침하는데는 실패했다.

어뢰정 7호는 해협을 빠져나오자마자 기관이 멈추는 바람에 동료 어뢰정에 이끌려 철수해야 했다.

애슈비 중위는 이날의 활약으로 수훈십자훈장(Distingushed Service Cross)을 받았다.

 

(수훈십자훈장. http://en.wikipedia.org/wiki/Distinguished_Service_Cross_(United_Kingdom)

 

한편 어뢰정 9호는 빠져나오다가 구룡만 동쪽에서 일본군 보트 2척에게 피해를 입혔으나 격침에는 실패했다.

해협을 빠져나오던 어뢰정 9호는 왐포아 부두 쪽으로 접근하여 일본군 보트에 추가로 피해를 입힌 후 무사히 탈출했다.

 

이어서 2척의 어뢰정이 진입했을 때는 일본군이 대비하고 있다가 반격을 가했으며 육군의 Ki-27 전투기까지 가세하여 저공비행을 하면서 기총소사를 가했다.

결국 적에게 피해를 입히지 못한 채 1척이 침몰하자 애슈비 중위는 추가 공격을 취소했다.

그러나 어뢰정 1척이 명령을 어기고 해협으로 진입했다.

이 용감하지만 무모한 어뢰정은 구룡부두를 공격하다가 일본군의 반격을 받아 격침되었다. 

 

19일 아침에 실시한 어뢰정의 공격으로 일본군의 모터보트 2척이 침몰했고 여러 척이 피해를 입었으며 고속항진하는 어뢰정이 일으킨 물살에 의하여 모터보트에 매달려 해협을 건너던 무동력의 소형 주정 몇 척이 뒤집어져 타고 있던 일본군이 익사했다.

어뢰정의 반격은 영국해군의 용기를 보여주는 쾌거였고 나름대로 성과도 거두었다.

그러나 전세를 돌이키기에는 늦었고 홍콩섬 전투 전체를 놓고 보았을 때 전과 또한 미약했으므로 홍콩 전투의 향방에 영향을 끼칠 수는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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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동부여단의 철수

 

서부여단장 존 라슨 준장은 상륙 소식을 듣자마자 위니펙척탄병대대본부에서 3개 소대를 편성하여 버틀러 산, 자딘 관측소, 그리고 자딘 관측소 남서쪽의 도로교차점으로 파견했다.

버틀러 산에 도착한 소대는 일본군이 이미 점령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소대는 엄청난 총탄을 뒤집어쓰면서 철수해야만 했다.

자딘 관측소에 도달한 소대는 곧 압도적인 병력의 일본군으로부터 공격을 받아 쫓겨났다.

도로 교차점을 점령한 소대는 자딘 관측소에서 쏟아지는 총탄을 받으면서 19일 아침까지 버텼다. 

 

라슨 준장은 자딘 관측소를 뺏김으로써 홍콩섬의 중앙에 위치한 교통요충지인 황니천 계곡이 위험에 빠졌다는 걸 깨달았다.

19일 새벽 2시 30분에 라슨 준장은 딥워터 만 부근에 주둔 중이던 위니펙 척탄병 대대의 A 중대와 황니천 계곡의 서쪽에 주둔 중이던 D 중대에게 자딘 관측소를 탈환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몰트비 소장도 황니천 계곡에 증원군을 보내기 시작했다.

영국군 공병 70명과 중국인 공병 70명으로 이루어진 임시 중대가 편성되었으며 제2/14라지푸트 대대의 1개 중대가 자딘 관측소의 서쪽에 있는 언덕에 투입되었다.

남쪽 에버딘에 있는 해군본부에서도 몰트비 소장의 명령에 따라 유사시 황니천 계곡에 파견할 수 있도록 200 명 규모의 임시 중대를 편성했다.

 

그러나 몰트비 소장은 일본군의 의도를 오판했다.

그는 라지푸트 대대의 방어선에 상륙한 일본군은 양동부대일 뿐이며 적의 주력은 빅토리아시티에 직접 상륙할 것으로 보았다.

상륙한 일본군이 2개 대대라고 착각한 몰트비 소장은 소수의 병력만 황니천 계곡에 투입하고 예비대의 주력은 주력의 상륙에 대비하여 주둔지에 대기시켰다.

 

(홍콩 섬 상륙 및 전투.출처 : Hong Kong 1941-45, P.57)

 

19일 아침이 되었을 때 일본군의 좌익을 담당한 제229연대는 잉어문 계곡과 파커산을 점령했으며 중앙을 담당한 제228연대는 버틀러산을, 그리고 우익을 담당한 제230연대는 자딘 관측소를 점령하고 있었다.

영국군은 파커산 남동쪽의 대담계곡에서 홍콩섬 중앙의 황니천 계곡을 거쳐 북해안의 코즈웨이 만을 잇는 선에서 일본군과 대치하고 있었다.

동부여단장 세드릭 월리스 준장은 대담 계곡 부근에 캐나다 왕립소총대대, 미들섹스 대대의 2개 중대, 의용대의 2개 중대와 포대들을 거느리고 있었다.

서부여단장 존 라슨 준장은 황니천 계곡 서쪽 입구에 여단 예비대인 위니펙 척탄병 대대 D 중대와 경대공포대를 가지고 있었으며 계곡 내의 도로 교차점에 척탄병대대의 1개 소대, 자딘 관측소 서쪽의 언덕에 라지푸트 대대의 1개 중대를 가지고 있었다.

캐롤라인 언덕부터 북해안까지는 라지푸트 대대의 생존자들과 미들섹스 대대의 일부 병력이 지키고 있었다.

그밖에 소수 병력이 노스포인트의 발전소 부근과 대항 마을에 있었으며 자딘 관측소의 사면에도 일부가 달라붙어 있었다.

 

19일 오전 9시 30분에 몰트비 소장은 동부여단장 윌리스 준장과 통화했다.

몰트비 소장은 동부여단이 대담 계곡-게이지 분지-황니천 계곡에 이르는 방어선에서 일본군을 막아내길 원했으나 월리스 준장은 난색을 표했다.

월리스 준장은 동부여단이 직면한 일본군이 최소한 2개 대대로 강력한 박격포의 지원을 받고 있으며 계속 증원되고 있는데 반하여 동부여단의 병력은 흩어져 있다고 말했다.

그는 남쪽의 스탠리 마을 부근에서 병력을 집결시킨 다음 저녁에 반격을 실시하겠다고 제안하여 몰트비 소장의 승인을 받았다.

 

동부여단은 후퇴 과정에서 큰 대가를 치렀다.

많은 병사들이 후퇴 도중 흩어져 19일 저녁이 되자 동부여단의 보병은 절반으로 줄어들었다.

더 큰 문제는 화력의 손실이었다.

4.5인치(114mm) 곡사포를 지휘하던 영국인 장교들이 전사한 상황에서 철수 명령을 받은 인도인 장교들이 명령을 잘못 해석하여 4.5인치 곡사포 4문을 모두 파괴해 버렸다.

게이지 분지에 있던 대공포들은 일본군의 박격포 및 기관총 사격을 받고 있어서 철수할 수가 없었으므로 인도군 포수들은 조준기와 포미 폐쇄기를 제거한 후 탈출했다. 

그리하여 19일 저녁이 되자 동부여단에게는 18파운드(83mm) 야포 1문과 3.7인치(94mm) 곡사포 2문만이 남았다.

4.5인치 곡사포를 비롯한 지원화기의 대량 상실은 동부여단의 운명에 큰 악영향을 끼쳤다.

 

19일 저녁에 월리스 준장은 몰트비 소장에게 전화를 걸어 20일 아침까지는 반격이 불가능하다고 말했다.

방어선을 펴는 것이 우선이며 병사들은 휴식이 필요하고 야간 행군은 위험하다는 논리였다.

19일 자정까지 동부여단은 홍콩섬 남동쪽의 스탠리산을 중심으로 동쪽으로 대담만과 서쪽으로 리펄스만을 잇는 방어선에 전개를 마쳤다.

이로써 동부여단은 담당 지역을 대부분 포기하고 홍콩섬의 남동쪽 스탠리반도에 틀어박힘으로써 서부여단과 연결이 끊어져 스스로 고립되었다.

반면 일본군으로서는 좌익을 위협하던 동부여단이 남쪽으로 물러가 버림으로써 결정적인 전장인 황니천 계곡에 자유롭게 병력을 집중할 수 있게 되었다.

 

일본군의 좌익을 담당한 제229연대는 19일 아침까지 파커산과 서환 언덕을 장악했다.

19일 날이 밝자 제229연대는 가벼운 저항을 물리치면서 남하하여 게이지 분지에 도달했다.

제229연대장 다나카 대좌는 게이지 분지를 장악한 다음 1개 중대를 남쪽으로 보내어 정찰했다.

명령에 따르면 제229연대는 황니천 계곡을 통과하여 서쪽으로 진격해야 했으나 정찰 결과에 따르면 황니천 계곡에서는 이미 제228 및 제230연대가 영국군과 치열한 전투를 벌이고 있었다.

다나카 연대장은 황니천 계곡은 이미 전투 중인 두 연대에게 맡기고 자신은 우선 남쪽으로 진격하여 남해안에 도달함으로 영국군을 동서로 분리한 다음 서쪽으로 진격하기로 했다.

그리하여 제229연대는 가벼운 저항을 받으면서 남진하여 바이올렛 언덕을 점령하고 20일 새벽에는 해안에 자리잡은 리펄스 호텔 부근에 도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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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상륙

 

일본군은 1941년 12월 17일 밤에 홍콩섬 북해안에 2개의 정찰팀을 보냈다.

1팀은 상륙에 실패했다.

마쓰시마 젬페이 중위가 이끄는 다른 팀은 수영으로 해협을 건너 태고에 상륙하는데 성공했으나 상륙하자마자 발각되어 총격을 받았다.

젬페이 정찰대는 정찰을 포기하고 다시 물 속으로 뛰어들어 탈출했는데 사상자는 없었다.

 

홍콩섬에 대한 폭격은 광주에 기지를 둔 중폭격기 제14연대 소속 폭격기 18대가 담당했는데 12월 18일이 되자 대만의 대정에서 출격한 해군의 폭격기 18대와 전투기 26대가 가세했다.

영국군은 급강하 폭격을 비롯하여 점점 심해지는 폭격과 포격, 그리고 구룡반도에 집결 중인 주정을 보면서 일본군의 상륙이 임박했음을 알 수 있었다.

 

일본군의 일선 사령부는 상륙작전 지휘를 위하여 전방으로 이동했다.

제23군 사령부는 신계의 대포로 이동했고, 제38사단 사령부는 계덕 비행장 외곽의 마두위에 자리잡았다.

 

홍콩섬에 상륙할 일본군은 북해안에 상륙할 우익대와 북동해안에 상륙할 좌익대로 나뉘어졌다.

제38사단의 보병단장 이토 다케오 소장이 지휘하는 우익대는 제228연대와 제230연대로 이루어졌으며 독립속사포 제5대대와 산포 제38연대 제1포대의 화력지원을 받았다.

또한 공병제38연대가 전투를 지원했다.

제229연대장 다나카 류사부로 대좌가 지휘하는 좌익대는 제229연대로 이루어져 독립속사포 제2대대 및 독립산포 제10연대 제5중대의 화력지원을 받았다.

또한 공병 제38연대 제1중대가 전투를 지원했다.

 

우익대는 계덕 비행장 부근에서 승선했으며 좌익대는 데빌스 피크 부근에서 승선했다.

공격명령은 18일 오후 6시에 떨어졌다.

제23군 사령관 사카이 다카시 중장은 부참모장 히구치 게이시치로 소장과 함께 오후 7시 30분에 구룡시에 도착하여 상륙작전을 참관했다.

 

작전 개시 시간인 오후 8시가 되자 일본군의 야포들이 맹렬하게 포격을 가하는 가운데 선두 대대들이 주정에 올라타고 해협으로 나섰다.

첫번째 시도는 실패했다.

저유탱크가 불타는 연기 덕분에 일본군은 해협의 중간까지는 들키지 않았지만 중간을 넘어서자 영국군의 탐조등이 일본군을 찾아내었고 이어서 기관총탄이 쏟아졌다.

영국군의 총격으로 우익대의 선봉에 섰던 제2/228대대와 제3/230대대의 대대장들이 부상을 입고 주정들이 흩어졌다.

일본군은 일단 물러섰다가 야포로 상륙예정지역을 다시 한 번 치열하게 포격한 후 두번째 상륙을 시도했다.

이번에는 성공했다.

 

18일 오후 9시 45분에 일본군의 서쪽을 담당한 제3/230대대가 노스포인트에 상륙했고 9시 50분에 중앙을 담당한 제2/228대대가 브래머 곶에 상륙했으며 9시 58분에는 좌익대의 제1파인 제3/229대대가 알드리히 만에 상륙했다.

병력들은 내려놓은 주정들은 돌아가서 제2파를 싣고 왔다.

자정까지 일본군 6개 대대가 상륙을 마쳤으며 19일 새벽 1시에는 제38사단장 사노 타다요시 중장이 태고에 상륙했다.

 

(일본군이 홍콩섬에 상륙하는 순간. 일본군이 타고 온 주정들이 전용의 상륙주정이 아니라 일반주정임을 알 수 있다. 출처 : Hong Kong 1941-45, P.52)

 

일본군은 달도 없이 캄캄한 밤에 낯선 해안에 상륙하여 적지않은 혼란을 겪었으나 영국군의 강력한 반격이 없었으므로 위기를 벗어났다.

상륙 초기의 혼란을 극복한 일본군은 해안을 벗어나 내륙으로 진격을 시작했다.

 

좌익대의 제1파로 알드리히 만에 상륙한 제3/229대대는 파커 산을 향하여 남하했다. 

좌익대의 제2파로 상륙한 제2/229대대는 서환 언덕과 잉어문 계곡을 향하여 진격했다.

일본군의 중앙을 맡아 브레머 곶에 상륙한 제228연대는 버틀러 산을 향하여 남하했다.

우익을 맡아 노스포인트에 상륙한 제230연대는 자딘스 관측소와 황니천 계곡을 목표로 진격했다.

 

(홍콩 섬 상륙 및 전투.http://www.canadaatwar.ca/content-42/world-war-ii/the-battle-of-hong-kong/)

 
일본군이 상륙한 해안은 제5/7 라지푸트대대가 방어하고 있었다.

 

 

 

구룡반도에서 큰 피해를 입은데다가 1개 중대당 2개 대대의 일본군과 맞서야 했던 라지푸트 대대는 압도적인 전력을 가진 일본군에게 제압당하여 자정까지 해안에서 밀려났다.

 

동부여단장 세드릭 월리스 준장은 일본군이 상륙했다는 소식에 이어 서환언덕의 잉어문 요새가 점령되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월리스 준장은 잉어문 계곡 부근에 주둔 중이던 캐나다 왕립소총대대 C 중대에게 잉어문 요새를 즉시 반격하여 탈환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잉어문 계곡 북쪽에 배치된 6인치 포 2문이 화력지원을 맡았다.

 

C 중대장 비숍 소령은 부하들을 이끌고 요새의 6m 짜리 벽을 기어올랐으나 일본군의 사격을 받아 9명이 전사하자 19일 새벽 1시 30분에 공격을 포기하고 물러섰다.

6인치 포를 운용하던 병사들도 포를 포기하고 철수했으나 3인치 대공포로 무장한 의용대 제5대공포대는 철수 중에 일본군의 공격을 받아 퇴로가 끊겼다.

의용대 제5대공포대는 짧은 교전 끝에 포로로 잡혔는데 일본군은 생존자 29명을 총검으로 학살했다.

 

C중대는 잉어문 계곡 남쪽으로 물러나서 진형을 정비했다.

기관총 몇 정을 장비한 라지푸트 대대의 패잔병을 받아들여 전력을 강화한 C 중대는 추격해 온 일본군에게 강력한 반격을 가했다.

이 반격으로 급히 추격하던 일본군의 선두 중대는 65% 의 사상자를 내면서 진격을 멈추었다.

C 중대에서도 2개 소대에 달하는 사상자가 발생했다.

 

일본군은 C 중대에게 진로가 막히자 방향을 동쪽으로 틀어 파커산 쪽으로 진격했다.

도중에 일본군 제2/229대대 제8중대는 야전병원으로 쓰이고 있던 살레지안 선교원에 난입하여 의료진과 부상자를 모두 살해했다.

단지 3명만이 학살의 혼란 속에서 달아나 목숨을 부지했다.

종전 후에 전범재판소는 제229연대장 다나카 류사부로 대좌에게 학살의 책임을 물어 사형을 언도했다가 징역 20년으로 감형했다. 

 

(홍콩 섬 상륙 및 전투.출처 : Hong Kong 1941-45, P.57)

 

일본군이 파커 산쪽으로 이동하자 월리스 준장은 C 중대에게  일본군보다 먼저 가서 파커 산을 확보하라고 명령했으나 큰 피해를 입은 C 중대는 그럴 여력이 없었다.

그러자 월리스 준장은 다른 길을 찾았다.

 

블레이버 중위가 이끄는 A 중대의 1개 소대가 즉시 파커 산으로 파견되었다.

19일 새벽 3시에는 캐나다 왕립소총대대 본부의 클러크 대위에게 D 중대의 제16소대를 이끌고 파커 산으로 직행하여 블레이버 소대와 함께 파커 산을 확보하여 지키라는 명령이 떨어졌다.

하지만 지형에 어두운 클러크 대위는 도중에 길을 잃고 헤매다가 19일 아침 7시 30분이 되어서야 파커 산에 도착했다.

도착해보니 블레이버 소대가 이미 산을 점령한 100 명이 넘는 일본군을 상대로 치열한 전투를 벌이고 있었다.

클러크 대위는 화력 지원이 없는 상황에서 2개 소대로 100 명이 넘는 일본군을 무찌른다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판단하고 물러섰다.

이로써 파커 산은 일본군에게 넘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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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수비대 배치

 

구룡반도에서 홍콩섬으로 철수한 영국군 병력들은 1941년 12월 14일 저녁까지 새로운 위치에 전개했다.

세드릭 월리스 준장이 지휘하는 구룡보병여단은 이제 동부여단(East Brigade)으로 이름이 바뀌어 사령부를 대담 계곡에 두고 홍콩 섬의 동쪽 절반을 담당했다.

존 라슨 준장의 홍콩보병여단은 서부여단(West Brigade)이 되어 사령부를 황니천 계곡에 두고 서쪽 절반을 방어했다.

 

(홍콩 섬의 방어태세. http://www.ibiblio.org/hyperwar/UN/Canada/CA/SixYears/SixYears-14.html)

 

동부여단의 주력은 제5/7라지푸트 대대와 캐나다 왕립소총대대였다.

구룡반도에서 철수한 제5/7 라지푸트 대대가 코즈웨이 만에서 백사만에 이르는 동북해안 약 3,500m 를 담당했다.

2개 중대는 해안선에 투입되었으며 태고 조선소 남쪽의 언덕과 대항 마을에 각각 1개 중대씩 예비대를 주둔시켰다.

대대본부는 D 중대와 함께 태고 조선소 남쪽의 언덕에 자리잡았다.

 

제1미들섹스 대대의 2개 중대가 서환만에서 웨스트베이 사이에 만들어진 특화점에 배치되었다.

특화점에 배치된 제1미들섹스 대대의 병력들은 특화점이 위치한 지역을 담당하는 대대의 지휘를 받았다. 

 

제5/7라지푸트 대대의 동쪽은 캐나다 왕립소총대대가 담당했다. 

C중대가 북동쪽의 잉어문을 방어했고, 나머지 중대는 홍콩 섬의 남동쪽을 맡았으며 대대본부는 대담계곡에 있었다.

 

동부여단의 예비대로 의용대 제1중대가 대담 계곡에, 제2중대가 포팅거 계곡에 주둔했으며 노병들로 이루어진 휴이 중대가 노스포인트의 발전소를 지켰다.

 

상륙가능성이 가장 높은 홍콩 섬의 북동해안에 대한 화력지원을 위하여 홍콩-싱가포르 포병대 소속의 이동가능한 6인치 야포 4문, 4.5인치 포 4문, 그리고 3.7인치 곡사포 3문이 배치되었다.

의용대 소속 제1, 제2, 제3 및 제5포대도 화력지원을 담당했는데 제5포대는 대공포대였다.

또한 홍콩 섬 남동쪽에 대한 상륙에 대비하여 대담 만과 스탠리 만 입구에도 강력한 야포 세력이 집결했다.

 

(1941년 12월 18일 아침 현재 홍콩 섬의 방어태세.  출처 : Hong Kong 1941-45, P.51)

 

홍콩섬의 서부를 담당한 서부여단의 주력은 제2/14펀잡대대와 캐나다 위니펙 대대였다.

제2/14 펀잡대대가 코즈웨이 만으로부터 벨처 곶에 이르는 홍콩섬의 북서해안을 담당했다.

여기에는 빅토리아 시티의 대부분이 포함되었으며 총독 관저와 요새사령부(Fortress Headquarter)라고 불리던 몰트비 장군의 사령부 또한 포함되어 있었다.

펀잡대대의 본부는 맥도넬 가에 있었다.

 

홍콩의 서해안은 만자(灣仔)계곡에 본부를 둔 캐나다 위니펙 대대가 담당했다.

​A, B 및 C 중대는 서해안을 따라 배치되었으며  D 중대는 서부여단의 예비대로서 황니천 계곡에 파견되었다.

 

제1미들섹스 대대의 2개 중대는 서부 여단이 담당한 해안의 72개 특화점에 배치되었다.

미들섹스 대대는 명목상 요새사령부의 직접 지휘를 받았으나 실제로 특화점에 파견된 병력들은 해당 지역을 지휘하는 대대로부터 전술적 명령을 받았다.​

대대는 또한  취사병이나 군악병 등으로 Z 중대라는 이름의 임시중대를 만들어 코즈웨이 만을 내려다보는 레이튼 힐을 방어했다.

전력이 심하게 저하된 왕립스코트 대대는 의용대로부터 보충병을 받아들인 후에 요새 사령부의 예비대로서 만자 계곡에 대기했다.

​요새 사령부의 예비대로는 의용대의 4개 중대도 있었다.

제4중대는 하이 웨스트에, 제5중대는 데이비스 산에, 제6중대는 홍콩섬 북해안에, 제7중대는 탄약고 계곡에 배치되어 있었다.

서부여단에 대한 화력지원은 데이비스 산의 9.2인치와 6인치 해안포, 그리고 벨처 곶의 4.7인치 야포가 담당했다.

4인치 해군포 2문을 가진 의용대 제3포대는 애버딘 섬에 배치되어 해군기지를 방어했다.

대공포들은 주로 황니천 계곡, 만자 계곡, 그리고 애버딘 부근에 배치되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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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항복 권유

 

구룡반도를 장악한 일본군은 홍콩섬 상륙을 준비하는 한편 항복을 권유하는 사자를 파견했다.

1941년 12월 13일 오전 9시에 일보군 사절단을 태운 작은 보트가 백기를 휘날리며 구룡시의 부두를 떠나 빅토리아 항을 가로질러 홍콩섬 북해안에 상륙했다.

 

(1941년 12월 13일 아침에 구룡시의 부두를 떠나는 일본 사절단의 모습. Homg Kong 1941-45, P.49)

 

일본제21군 참모 다마 중좌가 이끄는 사절단에서는 미즈노 중위가 안내 및 통역을 맡았다.

정보장교인 미즈노 중위는 불과 1주일 전만 해도 홍콩섬의 운동용품점에서 지배인으로 일하고 있었다.

사절단은 영국부녀자 2명을 포함하고 있었는데 1명은 홍콩총독 비서의 부인인 리 여사였으며 1명은 리 여사의 친구로 당시 만삭이었던 맥도날드 부인이었다.

 

다마 중좌는 자신들을 맞이한 복서 소령에게 제21군 사령관 사카이 다카시 중장이 마크 영 홍콩총독에게 보내는 친서를 전달했다.

사카이 중장은 친서에서 항복을 요구하면서 항복하지 않을 경우 폭격과 포격으로 홍콩섬을 파괴하겠다고 위협했다.

영 총독은 항복요구를 거부하는 강경한 내용의 답신을 적어 복서 소령을 통하여 전달했다.

일본사절단은 만삭의 맥도날드 부인을 영국 측에 넘겨주고 구룡반도로 돌아갔다.

(홍콩전투 당시 일본군이 영국군에게 항복을 종용하면서 뿌린 전단. Homg Kong 1941-45, P.48)

 

사카이 중장의 경고는 허풍이 아니었다.

사절단이 빈손으로 돌아오자 구룡반도의 일본군은 13일 오후부터 홍콩섬의 표적에 대하여 조직적으로 포격과 폭격을 가하기 시작했다.

 

이날 오후에 데이비스 산에 있던 영국군의 9.2인치 해안포가 포격을 받아 침묵했으며 14일에는 3인치 포가 파괴되었다.

중국인 포수들 사이에서 사상자가 발생하면서 사기가 떨어졌다.

빅토리아시티도 포격을 받아 화재가 발생했는데 급수 시설이 포격을 받아 망가지는 바람에 제대로 진화할 수가 없었다.

 

남쪽의 애버딘 해군기지는 일본기로부터 공습을 받았다.

건선거에서 수리 중이던 구축함 트라시안이 심한 피해를 입어 할 수 없이 라운드 섬에 좌초시켜야 했다.

어뢰정 2척을 포함한 다른 함선들도 폭탄을 맞았으며 많은 인명피해가 발생했다.

 

15일부터 일본군은 홍콩섬 북동해안의 특화점들을 목표로 포격을 가했다.

일본군의 포격은 4일 동안 지속적으로 이루어져 군사 및 민간 시설을 파괴했을 뿐 아니라 레이어먼 탄약창에서 일선으로 탄약을 보급하지 못하게 방해했다.

 

15일 오전 9시경 예비 포격이 쏟아진 후에 일본군 3개 중대가 고무보트와 임시로 만든 뗏목을 타고 해협을 건너 백사만에 상륙하려다가 기관총 사격을 받고 물러났다.

 

홍콩 섬의 제5열도 일본군의 포격에 호응하여 활동했다.

이들은 북해안에 가서 거울이나 손전등으로 구룡반도의 일본군과 통신하려고 시도했으며 소총을 가지고 수비대를 저격하기도 했다.

또한 홍콩 섬의 중국인들을 선동하여 폭동을 일으키려고 시도했으며 어둠을 틈타 대공포 진지를 공격하다가 격퇴되기도 했다.

전반적으로 제5열의 활동은 부진했다.

진책 소장이 무장시킨 폭력배들이 토미건을 들고 홍콩섬 전역을 돌아 다니면서 제5열을 제거했으며 홍콩섬의 중국인들은 대체로 차분한 분위기에서 영국당국의 지시에 순응했다.

 

구룡반도의 일본군은 포격을 실시하는 한편 홍콩섬에 상륙하기 위하여 주정을 모았다.

영국군은 야포와 빈약한 함정 세력을 동원하여 일본군 주정의 집결을 막으려 했으나 역부족이었다.

 

16일이 되자 북동해안의 특화점들은 절반이 파괴되었는데 포격이 계속되어 수리할 수 없었다.

 

17일 오전 9시 30분에 일본기들이 빅토리아시티와 홍콩섬의 군사적 목표를 공습했다.

이어서 빅토리아시티 중심부에 일본군의 포탄이 대량으로 떨어졌다. 

잠시 후 사카이 중장과 제2견지함대 사령관 니이미 마사이치 해군중장이 연대 서명한 친서를 가진 일본군의 두번째 사절단이  2척의 보트를 타고 북해안에 상륙했다.

영 총독은 다음과 같은 답신을 보내어 또다시 항복을 거절했다.

 

"홍콩 총독과 총사령관은 홍콩 항복에 관한 협상에 들어갈 것을 가장 단호하게 거부하며 앞으로 이러한 주제에 대하여 어떠한 교섭도 하지 않을 것임을 사카이 다카시 중장과 니이미 마사이치 해군중장에게 통고한다."

 

몰트비 소장은 영국군이 당분간 일본군의 상륙을 저지하면서 버티고 있으면 중국군이 일본군의 배후를 들이쳐서 홍콩이 살아남을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그날 저녁에 일본함정들이 애버딘 해군기지를 포격했다.

 

18일이 되자 일본군의 포격과 폭격이 더욱 거세어져 상륙이 임박했음을 예고했다.

노스포인트의 저유탱크가 폭탄에 맞아 불타면서 영국군은 열기 때문에 주변에 있던 탐조등을 포기해야 했으며 검은 연기가 북동해안을 자욱하게 덮어 일본군의 행동을 은폐했다.

빅토리아시티도 심한 폭격을 받아 거리는 공포에 질려 탈출하려는 피난민으로 가득찼다.

 

18일 오후가 되자 일본군의 포격과 폭격은 동쪽으로 옮겨져 대담 계곡, 레이어먼 계곡, 스탠리 요새 지역이 공격을 받았으며 서환 언덕의 관측소는 집요한 급강하 폭격과 연속적인 포격에 의하여 파괴되었다.

저녁이 가까워오자 일본군의 야포와 박격포들이 레이어먼 반도에 집중적인 포격을 퍼부었다.

 

영국군도 탄약 부족을 무릅쓰고 반격을 가했다.

데빌스피크 반도를 남하하는 일본군들이 영국 야포의 포격을 받았다.

 

18일 해가 지고나면 일본군이 상륙하리라는 것은 확실했다.

조건은 완벽했다.

만조는 오후 9시였으며 달은 자정이 되어야 뜰 것이었다.

북동해안은 불타는 저유탱크와 페인트 공장에서 나는 연기로 덮여 있었으며 소기만(筲箕灣)의 고무공장이 불타는 열기 때문에 주변의 방어선이 흐트러진 상태였다.

라지푸트 대대 구역의 탐조등 16개 중 4개 만이 작동하고 있었고 전방의 특화점 및 기타 방어시설과 이어지는 통신선은 대부분 끊어진 채 수리가 불가능한 상황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북동해안으로 접근하는 일본군은 연기에 가려 제대로 보이지 않을 것이었고 통신망의 미비로 상륙한 일본군이 교두보를 강화하기 전에 전력을 집중하여 격퇴하기도 힘들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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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구룡반도 함락

 

구룡보병여단장 세드릭 월리스 준장은 제2왕립스코트대대장 사이먼 화이트 중령에게 12월 10일 날이 밝는대로 반격을 실시하여 성문보를 탈환하라고 명령했다. 

반격을 위하여 라지푸트 대대로부터 1개 중대가 증원되고 구룡반도의 포병대와 홍콩 섬의 포병대 일부가 화력지원을 담당할 것이었다.

홍콩수비대 사령관 크리스토퍼 몰트비 소장은 캐나다 위니펙척탄병대대의 1개 중대를 구룡보병여단에 배속시켰다.

그러나 화이트 중령은 난색을 보였다.

말라리아 때문에 왕립스코트대대의 병력이 정원의 절반 이하로 떨어져 있고, 일본군이 참호에 단단히 틀어박혀 있으며 지형이 불리하고 접근로가 노출되어 있다는 것이 핑계였다.

 

그러자 월리스 준장은 반격명령을 취소해 버렸다.

자신없어하는 대대장을 윽박질러 반격을 실시해 봐야 성공할 수 없다는 생각에서였다.

 

영국군의 반격이 없자 일본군이 공격에 나섰다.

10일 오전 7시 30분에 야포가 포격을 실시한 후에 성문보의 일본군이 남동쪽으로 진출하여 스머글러 능선에 있던 D/5/7 라지푸트중대를 공격했다.

D 중대는 캐슬피크 만에 떠있는 포함 시칼라가 쏘아주는 6인치 함포의 화력지원을 받으면서 1시간 동안 치열한 전투를 벌인 끝에 일본군의 공격을 물리쳤다.

그러자 일본군은 성문보로 물러났고 이후 일본군은 하루종일 영국군 방어선에 포격을 가했을 뿐 공격을 실시하지 않았다.

 

D/5/7 라지푸트중대는 몰트비 소장이 전선 단축을 위하여 서쪽의 제2왕립스코트대대에게 진드링커스 선을 떠나 골든힐 선까지 남하하라는 명령을 내리자 10일 오후에 스머글러 능선에서 물러나 남동쪽의 데빌스피크 방면으로 철수했다.

캐슬피크 만에 떠있던 포함 시칼라도 10일 오후에 일본기로부터 폭탄 1발을 얻어맞고 수리를 위하여 철수하고 포함 턴(Tern)이 임무를 이어받았다.

 

일본군은 10일 새벽에 성문보를 함락함으로써 진드링커스 선에 커다란 구멍을 뚫었으나 이러한 절호의 기회를 활용하기에는 내부 사정이 복잡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제228연대장 도이 데이히치 대좌는 성문보를 함락하자 제38사단사령부에 알렸는데 놀랍게도 사단에서는 작전계획을 헝클어뜨린다는 이유로 성문보에서 철수하라고 명령했다.

 

도이 대좌는 철수명령을 거부하고 보병단장 이토 소장 및 사단장 사노 중장과 무전으로 옥신각신했다.

이 문제는 제23군 사령관 사카이 중장이 도이 대좌에게 군령 위반을 이유로 11일 오전에 대포로 출두하라고 명령하는 사태로 발전했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일본군은 10일 하루 동안 성문보에 병력을 투입하여 공세를 이어가기는 커녕 수비를 위한 증원이나 보급조차 실시하지 않았다. 

 

제38사단장 사노 중장은 10일 정오에 도이 연대장에게 전화를 걸어 성문보에 머물러도 좋다고 허락했으나 추가 공격은 금지했다.

성문보를 탈취했던 병력들은 10일 오전의 스머글러 능선 공격에 실패한 이후 하루종일 증원이나 보급은 고사하고 명확한 지침도 받지 못한 어정쩡한 상태에서 성문보를 방어하고 있었다.

따라서 10일에 영국군이 성문보에 단호하게 반격을 실시했으면 좋은 결과를 얻었을 가능성이 많았다.

 

성문보 공격과 관련하여 제23군 사령관 사카이 중장은 도이 대좌의 월권행위가 심각하기는 하지만 영국군 방어선에 커다란 구멍을 뚫는 전과를 올린 사실을 외면하기는 어려웠다.

결국 제23군은 제228연대 제3대대 제10중대장 와카바야시 중위가 정찰하다가 성문보의 방어가 허술한 것을 보고 그대로 돌격하여 점령한 것으로 얼버무리는 선에서 사건을 마무리지었다.

 

서쪽에서는 10일 오후에 제229연대가 타이드코브를 건넜다.

이날 오후 12시 40분에 개전 이후 최초로 영국군의 대공포가 타이드코브에서 일본기를 격추했다. 

 

(1941년 12월 8일 - 13일에 걸친 홍콩전투상황도. 출처 : Hong Kong 1941-45, P.36)

 

몰트비 소장은 성문보가 함락되자 구룡반도 방어에 자신감을 잃고 10일 정오를 기하여 구룡보병연대에 철수 명령을 내리려 했다.

해군지휘관 콜린슨 대령은 시간이 너무 촉박하다면서 반발했다.

그러자 몰트비 소장은 24시간 늦춘 11일 정오에 철수명령을 내리기로 했다.

카이탁 비행장의 영국공군 병력들에게는 비행장을 폐쇄하고 홍콩 섬 남부의 애버딘으로 가서 해군의 지휘를 받으라는 명령이 떨어졌다.

 

한편 10일 하루 동안 성문보를 둘러싼 내부의 혼란을 수습한 일본군은 11일 아침부터 공세를 시작했다.

전날 스머글러 능선을 공격했다가 실패한 일본군은 방향을 바꾸어 남쪽의 골든힐을 공격했다.

 

제2왕립스코트대대장 화이트 중령은 휘하의 B, C 및 D 중대를 모두 골든 힐에 투입하여 일본군에 맞섰다.

핑커튼 대위가 이끄는 D 중대가 11일 새벽에 골든 힐에 도착하니 몇몇 일본군이 올라와 있었다.

D 중대는 총검돌격을 실시하여 일본군을 몰아내고 방어준비를 했다.

골든 힐은 진 드링커스 선의 후방이어서 미리 만들어 둔 방어 시설이 없었다.

곧이어 B 및 C 중대가 도착하여 일본군의 거센 공격에 맞섰다.

백병전까지 벌어지는 격전 속에서 B 중대장과 C 중대장이 전사했고 결국 제2왕립스코트대대는 골든 힐에서 밀려났다.

 

제2왕립스코트대대의 뒤에는 캐나다 위니펙척탄병대대의 1개 중대와  브렌건 캐리어 3대, 장갑차 2대를 보유한 의용대 제1중대가 버티고 있어 전선의 전면적인 붕괴는 막을 수 있었다.

그러나 방어선의 중앙을 담당하던 펀잡대대의 서쪽이 열려 버렸다.

11일 정오에 몰트비 소장으로부터 구룡보병여단에게 구룡반도에서 철수하라는 명령이 떨어졌다.

 

구룡시에서는 폭파작업이 진행되었다.

공병은 연료저장고를 폭파하고 구룡조선소를 파괴했다.

발전소도 폭파하여 저녁이 되자 구룡시는 암흑 천지로 변했으며 스톤커터 섬의 해안포도 폭파했다.

영국해군은 연합국 선박들을 침몰시켰는데 중립국인 스웨덴 선박까지 침몰시켰다.

당연히 선장은 격렬하게 항의했으나 소용없었다. 

철수는 홍콩 섬에서 보내온 연락선들이 담당했는데 중국인 선원들이 달아나 버려 해군 수병들이 운용했다.

11일 오후 3시 15분부터 야포와 중장비, 차량 등이 홍콩 섬으로 철수하기 시작했다.

일본군이 야포로 철수를 방해했지만 막지는 못했다.

 

일본해군은 11일 새벽에 홍콩 남서쪽의 남아섬(南丫島)을 경유하여 홍콩 섬 남해안의 애버딘에 해군육전대 병력을 상륙시키려고 시도했다.

해군육전대는 남아섬에서 삼판을 타고 애버딘 해군기지에서 불과 270m 떨어진 거리까지 접근했다가 위니펙척탄병대대의 기관총 사격과 의용대 제3포대의 포격을 받고 뱃머리를 돌렸다.

오후에 일본군이 다시 남아 해협을 건너려고 시도하자 해안포가 불을 뿜어 저지했다.

 

구룡보병여단은 철수를 시작했다.

제2왕립스코트대대와 캐나다 중대는 구룡시의 부두를 통하여 철수하고 펀잡대대와 라지푸트대대 그리고 포병대는 구룡반도 동쪽의 마유당(馬游塘)으로 철수했다.

몰트비 소장은 이 시점에서 구룡보병여단장 월리스 준장의 의견에 따라 마유당 방어선을 최대한 오래 지킬 생각이었다.

마유당 남쪽의 데빌스 피크를 넘겨주면 일본군이 레이어먼 해협과 홍콩 섬의 북동쪽을 감제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물러서는 영국군을 일본군이 추격했다.

12일 새벽까지 일본제3/230대대 병력 350명이 구룡시에 진입하여 영국군의 퇴로를 끊으려 했다.

방어선의 서쪽을 담당했던 제2왕립스코트대대와 캐나다 중대는 일본군이 도달하기 전에 구룡시 북쪽의 심수보 막사를 통과하여 구룡시 북서쪽의 조단로드 부두에서 승선했다.

승선은 11일 오후 7시 30분부터 시작되었으며 별다른 방해를 받지 않고 진행되었다.

선단은 승선을 마치자 부두를 떠나 자정을 전후하여 무사히 빅토리아 시티에 도착했다.

 

방어선의 중앙을 담당했던 펀잡대대는 철수 과정에서 혼란을 겪었다.

대대의 주력은 목적지인 구룡반도 동쪽의 마유당에 도착했지만 대대본부는 11일 밤에 길을 잃어 카이탁 비행장으로 남하해 버렸다. 

본부는 첨사저(尖沙咀)에서 스타페리를 타고 철수했는데 배가 부두를 떠나는 순간까지 추격하는 일본군과 총격전을 벌여야 했다.

펀잡대대의 주력은 마유당을 통과하여 라지푸트 대대의 1개 중대 및 제25중형포 포대와 함께 12일 새벽 4시까지 레이어먼 해협을 건너 홍콩 섬으로 철수했다.

 

일본군은 12일 오후 3시에 마유당에 접근하여 오후 5시에 강력한 공격을 가했으나 마유당 방어선을 지키던 라지푸트 대대는 야포의 지원을 받아 일본군의 공격을 물리쳤다.

구룡보병여단장 월리스 준장은 데빌스 피크를 지켜야 한다는 생각이 확고했지만 몰트비 소장은 이때부터 데빌스 피크를 지키는 것보다 라지푸트 대대를 온전한 상태로 홍콩 섬으로 철수시키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하기 시작했다.

몰트비 소장은 12일 오후 9시에 라지푸트 대대에게 마유당 방어선을 떠나 남쪽으로 철수하라고 명령했으며 13일 새벽 3시 30분에는 홍콩 섬으로 철수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이 명령에 따라 라지푸트 대대는 레이어먼 해협을 건너 홍콩 섬으로 철수했다.

 

13일 아침에 철수한 C/2/14 라지푸트 중대를 마지막으로 영국군은 구룡반도에서 완전히 물러났다.

철수는 12일 오후에 마유당 방어선을 공격했다가 격퇴당한 일본군이 야포를 끌어와서 마유당 방어선에 포격을 가하면서 대대적인 공격을 준비하던 와중에 이루어졌기 때문에 별다른 방해를 받지 않았다.

덕분에 병력 뿐 아니라 야포 및 장갑차 모두와 차량 대부분을 싣고 올 수 있었으나 선박이 부족하여 노새 170마리와 탄약의 상당량은 두고와야 했다. 

 

일본해군이 철수를 방해하려 했으나 홍콩 섬의 9.2인치 해안포가 불을 뿜자 기겁하여 물러섰다.

철수 작전에 가장 큰 장애는 빅토리아 항에 들어찬 중국인들의 정크선들이었다.

생각다 못한 빅토리아 항의 항무관(harbor master)이 정크선 15,000척을 태풍 피항지인 구룡반도의 유마지(油麻地) 정박지에 몰아넣고 입구에 하천기선 3척을 침몰시켜 봉쇄했다.

극단적인 방법이었으나 철수에 도움이 되었다.

 

침공 초기에 홍콩 섬의 민간인들은 평정을 유지하고 있었으나 구룡반도에서 철수한 군인들이 도착하자 동요하기 시작했다.

빅토리아 시티에 유언비어가 돌아다니고 일부 지역에서는 폭도들이 약탈을 자행했으나 경찰이 진압했다.

 

12일 밤에 한척의 배가 그린 아일랜드에서 수톤의 다이너마이트를 싣고 홍콩 섬으로 철수했다.

이 배의 도착은 고지가 되어 있었지만 신경이 날카로워진 북해안의 병사가 접근하는 배를 향하여 발포했다.

다이너마이트가 폭발하면서 승조원이 전멸하고 배는 가라앉았다.

수톤에 달하는 폭발물의 손실은 큰 타격이었다.

 

영국군은 예정보다 빠른 5일 만에 구룡반도에서 철수했다.

구룡반도 전투에서 영국군 전사자는 165명이며 49명이 포로가 되었다.

일본군 전사자는 22명, 부상자는 121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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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성문보 전투(2) - 함락

 

카스가이 요시타로 중위가 지휘하는 제228연대 제3대대 제9중대는 주빌리 댐을 건너 9일 오후 9시 30분까지 401B 벙커 정면에 집결했다.

댐의 남쪽에는 감시 초소인 포스트 X 가 있었으나 병력이 배치되지 않았으므로 일본군은 들키지 않았다.

오후 10시까지 야마다 쇼지 소위가 지휘하는 제9중대 제1소대가 벙커 정면의 철조망을 제거했다.

현장에서 공격을 지휘하던 제3대대장 니시야나 하루자 소좌는 제10중대장 와카바야시 도이치 중위에게 남서쪽에 있는 403벙커를 공격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공격 시간은 오후 11시로 정했다.

 

(성문보 전투 상황도. 일본 측에서 본 모습으로 지도 아랫쪽이 북쪽이다. 출처 : Hong Kong 1941-45, P.44,45에서 발췌)

 

오후 11시가 되자 제9중대는 함성과 함께 401B 벙커로 돌진했다.

401B 벙커의 기관총사수 레어드 일병이 달려드는 일본군에게 기관총을 쏘기 시작했다.

일본군은 2대로 나뉘어 1대는 콘크리트 무개호를 통하여 터널로 뛰어들고 1대는 벙커 지붕으로 올라가 환기구에 수류탄을 던져 넣었으나 벙커를 침묵시키지 못했다.

401B 벙커는 이후 5시간 동안 저항을 계속했다.

 

402벙커의 기관총사수 캠벨 상병은 401벙커 쪽에서 총소리가 나자 그쪽으로 기관총을 쏘았다.

이때 노출된 위치에 있던 제3대대 본부에서 사상자가 발생했다. 

 

전투가 발생하자 소대부사관 롭 병장은 12명의 부하를 이끌고 일본군을 공격했다.

그러나 압도적인 전력을 가진 일본군의 반격으로 1명이 전사하고 4명이 부상을 입자 롭 병장은 후퇴명령을 내렸다.

부상자 4명 중 1명은 도망치는데 성공했으나 나머지 3명은 포로가 되었다.

생존자들은 남동쪽으로 후퇴하여 D/5/7 라지푸트 중대의 방어선에 도착했다.

전투가 발생하자 성문보의 북서쪽에서 경계를 하던 A 중대 병사 4명과 인도통신병 1명이 무단으로 위치를 이탈하여 지휘소로 도망쳤다.

 

성문보가 공격을 받고 있다는 보고를 받은 구룡보병여단장 세드릭 월리스 준장은 A 중대장 존스 대위에게 반격을 실시하여 적을 몰아내라고 명령했고 존스 대위는 제8소대장 톰슨 소위에게 반격명령을 내렸다.

톰슨 소위가 지휘소를 나가려고 할 때 일본군이 공격해 왔다.

모치즈키 소위가 이끄는 제10중대 제1소대가 비어있던 403벙커를 지나 지휘소에 도착한 것이었다.

일본군은 지휘소 지붕으로 올라가 해치를 열려고 했으나 실패하자 지휘소를 포위했다.

이로써 성문보의 장교 3명은 공격이 끝날 때까지 지휘소에 갇혀 있었다.

 

402벙커가 완강하게 버티자 니시야나 소좌는 공병을 투입했다.

10일 새벽 2시 30분에 후지모리 사카에 상병이 이끄는 공병 4명이 벙커의 통풍구를 통해 폭약을 집어넣어 폭파시킴으로써 402벙커를 침묵시켰다.

 

전투가 진행되는 동안 제2/228대대의 병력 약 200명이 주빌리 댐을 건너 성문 계곡을 따라 남하하다가 북상하고 있던 D/5/7 중대의 정찰대와 마주쳤다.

정찰대와 일본군 사이에 총격전이 벌어졌고 스머글러 능선에 주둔 중이던 D 중대 주력이 총격전에 가세했다.

D 중대는 치열한 총격전 끝에 일본군들을 성문보 쪽으로 몰아내었다.

 

지휘소에서는 3시간에 걸친 전투 끝에 일본군이 지휘소의 철제문을 폭파시켰다.

이 과정에서 포병관측반의 인도인 통신병 2명이 전사하고 나머지 15명은 폭발의 충격으로 얼이 빠진 상태에서 항복했는데 이들 중 11명은 부상을 입고 있었다.

 

지휘소의 함락과 함께 통신도 끊어졌다.

통신이 끊어지자 영국군의 야포들이 새벽 5시까지 2시간 동안 성문보를 포격했다.

 

이때까지도 401B 벙커는 계속 저항하고 있었다.

결국 일본군은 10일 오전 4시가 되어서야 벙커를 폭파시킬 수 있었다.

생존자 4명은 포로가 되었다.

 

이로써 일본군은 성문보를 차지했다.

10일 오전 4시에 성문보에 일장기가 올라갔다.

 

성문보 전투에서 영국군의 사상자는 기록이 미비하고 모순되는 점이 있어 정확한 숫자를 파악하기 어렵다.

39명의 수비병력 중 탈출에 성공한 병력은 10 여명이며 나머지는 전사하거나 포로가 되었다.

일본군 전사자는 2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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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성문보 전투(1) - 부실한 방어태세

 

1941년 12월 9일 아침이 되자 몰트비 소장은 일본군의 진격이 예상보다 빠르다는 것을 느꼈다.

몰트비 소장은 해군을 지휘하던 콜린슨 대령에게 구룡반도에서의 철수가 빨라질 수 있으니 구룡에서 애버딘으로 장비와 보급품을 옮기는 일에 속력을 내어 달라고 요청했다.

빅토리아 항은 구룡반도에서 탈출하는 중국인들의 작은 배로 가득차서 보급품을 실은 주정들이 이동하는데 애를 먹었다. 

 

중경에서는 장개석 총통이 영국군 연락관 데니스 장군에게 홍콩을 구원하기 위하여 병력을 동원하겠다고 말했다.

중국군의 3개 군(Army)이 남쪽으로부터 광동을 공격하여 일본군을 묶어두는 동안  유한모 장군이 지휘하는 또다른 3개 군이 광동-구룡 간 철도를 따라 공세를 가한다는 것이었다.

중국군의 군은 보통 사단 3개로 이루어지지만 중국군 사단은 규모가 작았으므로 1개 군의 화력은 영국사단과 비슷했다.

그러나 장개석 총통은 공격이 1942년 1월 10일 이후에야 가능하다고 말했는데 홍콩은 그때까지 버티지 못했다.

 

12월 9일 오후가 되자 일본군들이 진드링커스 선에 접근했다.

서쪽에서는 제229연대의 선두가 버팔로 힐에 도달했으며 중앙에서는 제228연대가 니들 힐에 도착했다.

 

(1941년 12월 8일 - 13일에 걸친 홍콩전투상황도. 출처 : Hong Kong 1941-45, P.36)

 

9일 오후 3시에 니들 힐에 도착한 제228연대장 도이 데이히치 대좌는 성문저수지 남쪽에 있는 강력한 진지인 성문보에 빨래가 널려 있다는 정찰대의 보고를 받았다.

이것은 성문보를 지키는 병사들의 기강이 해이하다는 증거였다.

도이 대좌는 즉시 공격하고 싶었으나 문제가 있었다.

 

성문보는 그의 관할이 아니라 서쪽의 제230연대 관할이었다.

실전에서 상부의 허락없이 연대지경선을 넘는 것은 중대한 명령위반으로 큰 벌을 받을 수 있었다.

게다가 갑자기 자욱한 안개가 끼면서 시계가 20m 아래로 떨어져 즉시 공격하기는 불가능했다.

도이 연대장은 밤에 성문보를 공격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는 다케요시 이나가키 소좌의 제2/228대대를 성문보 동쪽으로 보내어 적이 접근하는지 감시하고 니시야나 하주라 소좌의 제3/228대대에게 성문보를 공격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하주라 소좌는 제9중대장 카스가이 요시타로 중위와 제10중대장 와카바야시 도이치 중위에게 지원자 150명을 뽑아 성문보를 공격하라고 명령했다.

 

성문보는 진드링커스 선에서 가장 강력한 진지로 성문저수지의 남쪽을 이루는 주빌리 댐에서 180m 정도 떨어진 곳에서 시작하여 스머글러 능선의 서쪽 사면에 걸쳐 있었다.

진지는 5개의 강화 콘크리트 벙커(400, 401A, 401B, 402 및 403벙커)와 역시 강화 콘크리트로 만들어진  해발 341m 의 포병관측소로 이루어져 있었으며 관측소가 지휘소를 겸하고 있었다.

관측소에는 철문이 달려 있었고 벙커와 관측소 사이는 콘크리트 터널로 연결되어 있었는데 영국군은 이 터널에 런던의 유명한 거리 이름을 붙였다.

터널은 중간에 콘크리트로 만들어진 무개호를 통하여 바깥과 연결되어 있었다.

벙커 주변에는 참호를 파 놓았고 접근하는 길에는 철조망을 쳐 놓았으나 지뢰는 없었다. 

 

성문보를 지키던 병력은 시릴 존스 대위가 지휘하는 제2왕립스코트대대 A 중대였다.

A 중대는 말이 중대지 실제로는 소대 규모로서 중대본부는 10명으로 이루어져 있었고, 휘하에는 소대장  톰슨 소위를 포함하여 25명으로 이루어진 제8소대 밖에 없었다.

이외에 윌콕스 중위가 이끄는 홍콩싱가포르포병대 제1홍콩연대 제2포대의 관측반이 있었는데 영국군 2명, 인도인 통신병 2명으로 4명이었다.

이렇게 39명이 성문보를 지키는 모두였으며 기관총은 401B 와 402 벙커에만 있었다.

 

제2왕립스코트대대장 사이먼 화이트 중령은 성문보의 병사들에게 비커스 기관총반을 제외한 병력들은 적의 포격이 쏟아질 때를 제외하고는 벙커에 들어가지 말라는 명령을 내렸다.

이런 명령이 필요했다는 점에서 당시 성문보를 지키던 병력들의 기강이 좋은 편이 아니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9일 밤11시에 일본군이 공격해 왔을 때 성문보의 병력 중 장교 3명 모두를 포함한 10명 이상이 지휘소 안에 있었고 포병관측반의 인도통신병 1명과 A 중대의 병사 4명은 성문보의 북서쪽에서 경계를 서고 있었으며 나머지 병력들은 기관총이 장비된 401B 및 402 벙커 안과 그 주변에 있었다.

제2왕립스코트대대본부는 성문보에서 캐슬피크 도로를 따라 남서쪽으로 내려가 스머글러 능선 아랫쪽의 도로 주위에 자리잡고 있었다.

성문보의 남동쪽에는 로버트 뉴튼 대위가 지휘하는 D/2/7 라지푸트 중대가 진드링커스 방어선의 빈 틈을 메우기 위하여 배치되어 있었다.

D 중대는 성문보 남동쪽의 성문계곡을 화력으로 감제하면서 북쪽으로 주빌리 댐과 니들힐 사이를 정찰하라는 명령을 받고 있었다.

 

(성문보 전투 상황도. 일본 측에서 본 모습으로 지도 아랫쪽이 북쪽이다. 출처 : Hong Kong 1941-45, P.44,45에서 발췌)

 

9일 오후 6시에 일본제228연대의 주력이 주빌리 댐에서 북쪽으로 500m 떨어진 지점까지 접근했다.

오후 8시에 제2왕립스코트대대장 화이트 중령은 성문보의 A중대에게 명령을 내렸다.

정찰대를 보내어 성문계곡을 따라 성문저수지 북쪽의 니들힐까지 정찰하고 내려오는 길에 스머글러 능선의 D/5/7 라지푸트 중대의 주둔지까지 정찰한 다음 귀환하라는 내용이었다.

이 명령에 따라 제8소대장 톰슨 소위는 9명의 부하를 이끌고 정찰을 나섰다.

 

오후 10시 30분에 돌아온 톰슨 소위는 관측소로 가서 A중대장 존스 대위에게 일본군을 발견하지 못했다고 말했다.

당시 일본군이 주빌리 댐에서 북쪽으로 불과 500m 떨어진 곳까지 진출한 상태였는데 이해할 수 없는 보고였다.

정찰에 걸린 시간을 계산해보면 톰슨 소위가 주빌리 댐 북쪽을 정찰하지 않고 바로 남쪽으로 내려가 D/5/7 라지푸트 중대와 접촉한 다음 성문보로 돌아왔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성문보를 공격할 150명의 일본군이 주빌리 댐을 건너 401B 벙커 앞에 집결한 시간은 오후 9시30분이었다.

따라서 톰슨 소위가 명령에 따라 북쪽을 정찰했다면 남하하던 일본군과 마주쳤을 것이다.

톰슨 소위가 존스 대위에게 정찰보고를 하는 동안 전투가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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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침공

 

홍콩 침공을 담당한 일본육군제38사단은 1941년 12월 1일부터 본격적으로 이동을 시작했다.

제229 및 제230연대는 1941년 12월 1일에 주둔 중이던 불산(佛山)을 떠나 광저우를 지나 6일 저녁까지 심천강 대안에 도달했다.

제228연대는 12월 5일 밤 - 6일 새벽에 걸쳐 홍콩 북동쪽의 미르스(Mirs) 만에 상륙하여 6일 저녁까지 심천에 도착했다.

몰트비 소장은 일본군이 미르스 만에 상륙했다는 보고를 받고도 일본군의 침공 의도를 반신반의했다.

 

홍콩의용방위군단은 12월 5일에 전면적으로 소집되었으나 홍콩의 민간인들은 전쟁이 임박했다는 사실을 믿지 않았다.

침공 전날인 7일은 일요일이었는데 식당, 상점 및 영화관이 정상 영업했으며 해피밸리 경마장은 개장 이래 최대 관객 수를 기록했다.

 

홍콩수비대는 구룡반도를 책임진 구룡보병여단(Kowloon Infantry Brigade, KIB)과 홍콩 섬 방어를 책임진 홍콩보병여단(Hong Kong Infantry Brige, HKIB)로 나위어져 있었다.

세드릭 월리스 준장이 지휘하는 구룡보병여단은 홍콩섬으로 철수한 후에는 동부 여단(East Brigade)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존 라슨 준장이 지휘하는 홍콩보병여단은 구룡보병여단이 홍콩섬으로 철수한 후에는 서부여단(West Brigde)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구룡보병여단은 구룡반도의 서쪽에 제2왕립스코트대대, 중앙에 제5/7라지푸트대대, 동쪽에 제2/14 펀잡대대를 배치했다.

제2왕립스코트대대의 C 중대는 스탠포드 번스 소령의 지휘 아래 캐슬피크도로를 원랑(元朗)까지 순찰했다.

제2/14펀잡대대의 C 중대는 의용대 소속의 장갑차 2대 및 브렌건캐리어 4대와 함께 상수(上水)에서 대포시장에 이르는 지역을 감시했다.

C/2/14펀잡 중대에는 또한 의용대의 공병과 함께 제22왕립공병요새중대가 동행했다.

구룡보병여단에 대한 화력지원은 홍콩싱가포르왕립포병대 제1홍콩연대 제1 및 제2포대와 제25중형포 포대가 담당했다.   

 

(1941년 12월 8일 - 13일에 걸친 홍콩전투상황도. 출처 : Hong Kong 1941-45, P.36)

 

일본제23군은 1941년 12월 8일 오전 3시 55분에 대본영으로부터 '사쿠라 사쿠라' 라는 암호전문을 받았다.

홍콩 공격을 시작하라는 명령이었다.

11분 후인 오전 4시 6분에 제23군 사령관 사카이 중장은 홍콩 공격 명령을 내렸다.

홍콩 시간은 진주만보다 18시간 30분 빠르므로 홍콩시간 8일 새벽 3시 55분은 하와이 시간으로 7일 오전 8시 25분으로 진주만 기습이 시작되고 34분이 지난 시점이었다.

 

오전 4시 45분에 몰트비 소장의 정보참모로 일본어에 능통한 찰스 복서 소령이 라디오 도쿄에서 일본국민들에게 전쟁이 임박했다고 보도하는 것을 듣고 몰트비 소장에게 보고했다.

오전 5시에는 일본군이 말레이에 상륙하려 한다고 싱가포르에서 보고하는 전문을 홍콩의 해군기지에서 청취했다.

오전 6시 45분에 몰트비 소장은 병사들에게 영국과 일본 사이에 전쟁이 일어났다는 사실을 통보했다. 

 

심천강에서는 영국공병들이 다리를 파괴하기 시작했다.

보톰리 소령의 지휘를 받는 의용대 공병중대는 그레이 소령이 지휘하는 C/2/14 라지푸트 중대의 지원을 받아 8일 오전 7시 30분까지 심천강의 모든 다리를 폭파시켰다.

하지만 일본군은 부교를 만들어 심천강을 건너기 시작했다.

 

일본기들은 오전 7시 20분에 광저우 비행장을 이륙하여 오전 8시부터 구룡반도의 카이탁 비행장과 수상기 계류장을 공격했다.

98식 경전투기 12대가 97식 전투기 9대의 호위를 받으면서 카이탁 비행장을 공격하여 영국군의 빌데비스트 뇌격기 및 의용대의 연습기 모두와 민간기까지 12대를 파괴하고 비행장에 피해를 입혔다.

또다른 일본기들은 수상기 계류장을 공격하여 왈루스 비행정과 마침 홍콩에 도착해 계류 중이던 판 아메리칸 항공의 시콜스키 S-42B 비행정을 파괴했다.

 

카이탁 비행장에서는 유라시아 항공사의 융커스 52 여객기 2대와 중국항공공사의 T32 콘도르 여객기 1대만이 파괴를 면했다.

살아남은 이들 여객기들은 중화민국 건국자인 손문의 미망인과 장개석 총통의 처형인 송씨 자매 등 요인들을 태우고 그날 안으로 홍콩을 떠났다.

 

일본기들은 이어서 구룡반도의 심수보(深水埗)에 있던 막사를 폭격했는데 이곳은 캐나다 위니펙척탄병대대가 사용하고 있었다.

병사들이 홍콩 섬으로 가기 위하여 아침 일찍 막사를 떠난 덕분에 사망자는 없었으나 통신부사관 1명과 통신병 1명이 부상을 입었다.

두 사람은 제2차 세계대전에서 최초로 부상을 입은 캐나다군이었다.

일본기들은 태고 조선소와 구룡 시의 건선거도 폭격했는데 이 순간에도 홍콩 섬의 빅토리아시티에서는 식당과 영화관이 정상 영업을 하고 있었다.

이날 캐슬피크도로를 순찰 중이던 의용대 제1중대의 장갑차와 브렌건캐리어도 일본기의 공격을 받았고 영국해군의 포정 시칼라는 캐슬피크만에서 2번에 걸쳐 일본기의 공습을 받았으나 살아남았다.

 

일본군은 연대별로 3곳에서 심천강을 건넜다.

서쪽을 담당한 제223연대는 낙마주(落馬洲)에서 강을 건넌 뒤 2개로 갈라져 1개 부대는 신전(新田)-원랑-캐슬피크를 거쳐 서쪽을 토벌하면서 내려오고 다른 1개 부대는 바로 남진하여 해발 957m 로 홍콩의 최고봉인 대모산 북쪽 기슭을 향했다.

 

중앙을 담당한 제228연대는 나호(羅湖)에서 강을 건넌 뒤 상수-대포-구룡을 잇는 도로를 따라 그래시 힐(Grassy Hill)로 남하했다.

그래시 힐의 남서쪽에는 성문저수지가 있었고 저수지 남쪽에는 성문보(城門堡)가 있었다.

성문보는 강화 콘크리트로 만들어진 벙커 사이를 콘크리트 터널로 연결한 강력한 방어진지였다.

 

동쪽에서는 제229연대가 사두각(沙头角)에서 강을 건넌 뒤 녹경(鹿頸)과 사라동(沙羅洞)을 거쳐 대포로 향했다.

대포를 통과한 연대는 타이드 코브(Tide Cove)를 건너  대수항(大水坑) 마을에 상륙한 다음 마안산(馬鞍山)을 거쳐 진격할 것이었다.

일본군은 강력한 저항을 만나면 우회한 다음 계속 진격하라는 명령을 받고 있었다. 

 

8일 하루 동안 구룡반도 곳곳에서 교전이 벌어졌다.

펀잡대대는 오후 1시경에 일본군과 처음으로 교전했고 오후 6시 30분에는 대포 남쪽의 둑길에 매복했다가 기습을 가하여 선두의 몇개 소대를 쓸어버렸다.

대포 남쪽의 도로에서는 장갑차와 브렌건캐리어로 무장한 의용대가 일본군 선봉을 격파했다.

제2왕립스코트대대의 정찰대는 원랑에서 일본군을 만나 교전했다.

포병대는 일본구축함과 포탄을 주고 받았으며 대포 방면의 일본군에게 포격을 가하여 피해를 입혔다.

 

영국군이 초전에 작은 승리를 몇 번 거두었지만 일본군의 진격을 막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압도적인 병력을 가진 일본군은 정확한 지도를 가지고 있었으며 미리 심어놓았던 간첩들의 길안내를 받아 빠르게 전진했다.

8일 저녁이 되자 펀잡대대가 포위를 피해 그래시 힐까지 후퇴했다.

오후 10시에는 일본군 선봉이 대포-구룡 사이의 도로를 따라 사전(沙田)까지 진격했으며 의용대 공병은 가까스로 성문강에 걸려있던 다리를 파괴했다. 

 

8일 밤에 몰트비 소장은 구룡보병여단에게 진드링커스선에 집결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진드링커스 선의 중앙을 담당한 펀잡대대는 타이드 코브의 머릿부분인 사전위(沙田圍)를 중심으로 방어망을 펴고 의용대의 지원을 받아 이틀간 버텼다.

방어선의 동쪽은 제2왕립스코트대대가 담당했으며 펀잡대대와 스코트대대 사이의 스머글러 능선은 비어있는 상태였다.

구룡보병여단장 윌리스 준장은 유일한 예비대인 로버트 뉴튼 대위의 D/5/7 라지푸트 중대를 스머글러 능선에 투입했다.

서쪽을 담당한 라지푸트대대는 아직 일본군과 접촉하지 않고 있었다.

 

영국해군은 구룡에 있던 장비와 보급품들을 주정에 실어 홍콩 섬 남부의 애버딘으로 옮겼다.

일본군의 공습이 시작되면서 구룡 반도의 주민들이 앞다투어 배를 타고 홍콩 섬으로 건너오는 바람에 해상이 혼잡하여 장비와 보급품을 옮기는 일은 쉽지 않았다.

 

일본해군의 순양함 이스즈가 구축함 몇 척과 함께 해안포 사정거리 바깥에서 왔다갔다하면서 홍콩을 봉쇄했다.

그러나 영국해군의 구축함 타넷과 스카우트는 8일 저녁 9시 30분에 일본해군의 봉쇄를 뚫고 싱가포르로 탈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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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공격준비(2) - 편제

 

사카이 다카시 중장이 지휘하는 제23군에서 홍콩 공략의 주력은 사노 타다요시 중장의 보병제38사단이었으며 아라키 가츠토시 대좌가 지휘하는 보병제66연대(아라키 지대)는 점령지를 방어했다.

화력 지원을 위하여 제38사단의 사단포병에 더하여 기타시마 기네오 소장이 지휘하는 제1포병대가 추가되었다.

제23군의 비행대인 제1비행단이 항공지원을 담당했고 해군에서는 제2견지함대(중국파견함대)를 투입하여 지원했다.

 

제38사단은 3각 편제 사단인 1940년식 B형 사단이었다.

사단의 주력은 보병단장 이토 다케오 소장이 지휘하는 3개 보병연대(도이 데이히치 대좌의 제228연대, 다나카 류사부로 대좌의 제229연대, 쇼지 도시시게 대좌의 제230연대)였으며 간키 다케요시 대좌가 지휘하는 산포연대가 화력지원을 담당했다.

지원부대로는 유바타 슈이치 중좌의 치중대, 이와부치 츠네오 중좌의 공병대, 가바야시 오토카즈 중좌의 수송제3연대, 아타미 주로 대위의 전차중대, 그밖에 의무대, 통신대, 헌병 등이 있었다.

1940년식 B 형 사단의 정원은 20,000명이었으나 홍콩 침공 당시 제38사단은 경전차로 이루어진 전차중대가 포함되고 포병, 공병 및 수송 부문이 강화되어 23,228명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산포연대의 정원은 약 3,400명, 말은 약 1,400필로 산포대대 3개와 관측반 및 연대수송대로 이루어져 41식 75mm 산포 36문을 운용했다.

산포대대의 정원은 약 980명으로 산포중대 3개와 관측반 및 대대수송대로 이루어져 산포 12문을 보유했다.

산포중대의 정원은 218명으로 산포소대 2개와 관측반 및 중대수송대로 이루어져 산포 4문을 보유했다.

산포소대의 정원은 28명으로 75mm 산포 2문을 보유했다.

홍콩 침공 당시 산포제38연대는 75mm 산포 28문을 보유했으나 추가로 33문을 배속받아 제38사단의 75mm 산포는 61문이었다.

 

(41식 75mm 산포. 자세한 내용은 여기로. http://en.wikipedia.org/wiki/Type_41_75_mm_Mountain_Gun)

 

보병연대의 정원은 3,845명이며, 700필이 넘는 군마를 보유하고 있었다.

주력은 보병대대 3개였으며 전포중대(戰砲中隊) 또는 대대가 화력지원을 담당했고 대전차중대와 통신중대를 가지고 있었다.

이외에 공병중대, 의무대, 통신반이 배속되었으며 필요하면 포병대대나 노무대를 배속받기도 했다.

 

보병대대의 정원은 1,071명으로 보병중대 4개와 기관총중대, 그리고 전포소대 또는 중대를 가지고 있었다.

기관총중대의 정원은 174명으로 3개의 기관총소대로 이루어져 92식 중기관총 12정을 보유했다.

기관총소대의 정원은 46명으로 4개의 전총분대(戰銃分隊)와 1개의 탄약분대로 이루어져 중기관총 4정을 보유했다.

전총분대의 정원은 11명으로 중기관총 1정을 운용했다.

 

(92식 중기관총. 자세한 내용은 여기로. http://commons.wikimedia.org/wiki/File:Type_92_Heavy_Machine_Gun_from_1933_book.jpg)

 

전포중대의 정원은 122명으로 탄약소대와 2개의 전포소대로 이루어져 91식 70mm 보병포 4문을 보유했다.

전포소대의 정원은 55명으로 탄약분대와 2개의 전포분대로 이루어져 보병포 2문을 보유했다.

전포분대는 15명으로 이루어져 보병포 1문을 운용했다.

 

(92식 보병포. 자세한 내용은 여기로 . http://en.wikipedia.org/wiki/Type_92_Battalion_Gun)

 

보병중대의 정원은 181명으로 보병소대 3개로 이루어져 있었으며 화기소대를 배속받는 경우도 있었다.

보병소대의 정원은 54명으로 기관총분대 3개와 척탄통분대 1개로 이루어져 있었다.

기관총분대의 정원은 13명으로 분대장, 기관총 요원 4명, 소총수 8명으로 이루어져 경기관총 3정을 보유하고 있었다.

척탄통분대의 정원은 13명으로 분대장, 척탄통 사수 6명, 소총수6명으로 이루어져 척탄통 3문을 보유하고 있었다.

 

제38사단의 사단포병은 증강되었다.

75mm 산포 28문을 가진 기존의 산포제38연대에 더하여 75mm 산포 33문을 갖춘 독립산포제10 및 제20연대가 가세했다.

150mm 박격포 15문을 보유한 독립박격포제21대대와 37mm 대전차포 20문을 가진 독립속사포 제2 및 제5대대도 투입되었다.

 

사단포병과는 별도로 중포를 가진 기타시마 기네오 소장의 제1포병대가 추가로 화력지원을 했다.

제1포병대는 240mm 곡사포 8문, 150mm 곡사포 22문, 그리고 150mm 박격포 15문을 보유하고 있었다.

 

구룡반도의 방어를 맡은 아라키 지대는 제51사단 제66연대를 기간으로 하여 5,892명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제23군의 비행대인 하부 히데하루 대좌의 제1비행단은 98식 경폭격기 34대, 97식 전투기 13대, 97식 사령부정찰기 3대, 98식 직접협동정찰기 6대 등 56대를 보유하고 있었다.

제1비행단은 비행장대대를 포함하여 약 1,300명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98식 경폭격기. 자세한 내용은 여기로. http://en.wikipedia.org/wiki/Kawasaki_Army_Type_98_LIght_Bomber)

 

해군은 니이미 마사이치 중장이 지휘하는 제2견지함대 소속으로 포격부대와 공격부대로 이루어져 있었다.

포격부대는 경순양함 이스즈를 기함으로 하여 구축함 3척, 수뢰정 4척, 무장수송함 1척, 수상기모함 가미카와마루로 이루어져 있었다.

가미카와마루는 94식 수상기 2대와 92식 뇌격기 3대를 운용했으며 해군항공대원은 약 200명이었다.

 

(일본해군의 경순양함 이스즈. 자세한 내용은 여기로. http://en.wikipedia.org/wiki/Japanese_cruiser_Isuzu)

 

공격부대는 기함 우이지를 포함한 포정 3척, 무장수송함 5척, 수송함 1척, 기뢰부설함 2척, 소해함 1척 및 급유함 2척으로 이루어져 있었으며 약 300명의 해군육전대를 홍콩 섬 남쪽에 상륙시키는 양동작전을 펼칠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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