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방어준비(1) - 계획
1937년에 중일전쟁이 발발하고 이듬해인 38년 5월에 일본군이 홍콩에서 북동쪽으로 480km 정도 떨어진 아모이(Amoi)에 상륙하자 7월에 영국참모본부는 홍콩방어에 대한 기본계획을 수립했다.
참모본부는 홍콩의 무장 해제는 거부했다.
피를 흘리지 않고 넘겨주면 전쟁이 끝나고 돌아오기 어려웠으므로 함락되더라도 최후까지 전투를 벌이는 것이 중요했다.
참모본부는 홍콩의 군사적 가치에는 환상을 갖지 않았다.
일본과 전쟁이 벌어지면 홍콩은 공습과 포격을 받아 함대 기지로는 물론 잠수함 기지로도 사용할 수 없을 것이었다.
참모본부가 생각한 방안은 일본군이 빅토리아 항을 사용하지 못하게 하면서 구원을 기다리는 것이었다.
이를 위하여 구룡 북쪽의 산악 지대에 방어선을 만들기로 하여 참호를 파고 벙커를 건설했으며 홍콩 섬에는 4달치 식량을 비축했다.
1938년 10월에 일본군이 광동성을 장악하면서 홍콩과 국민당 정부 간의 육상 교통로가 끊어졌으며 홍콩 수비대는 심천강을 경계로 일본군과 마주보게 되었다.
이듬해인 39년 2월에 일본군이 남쪽의 해남도에 상륙하면서 홍콩은 고립되었다.
1939년 9월에는 독일이 폴란드를 침공하면서 유럽에서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했다.
이듬해인 40년 5월에는 독일이 프랑스를 침공했으며 영국은 육군의 주력을 파견했다가 패배했다.
이런 상황에서 영국참모본부는 1940년 8월에 전 세계에 걸쳐 정세를 검토하면서 중국 북부에 주둔 중이던 소규모의 영국군 수비대를 철수시키기로 결정했다.
참모본부는 이때 윈스턴 처칠 수상의 뜻에 따라 홍콩을 일본과 전쟁시 최대한 오래 유지해야 하지만 반드시 지켜야 할 대상은 아닌 전초기지(outpost)로 규정했다.
프랑스 전투에 참가했다가 패하여 던커크에서 육군의 장비를 몽땅 잃고 병력만 겨우 빼낸 영국은 독일의 침공 위협 아래 처절한 공습을 받고 있었으며 북아프리카에서는 숫적으로 우세한 이탈리아 군의 압박을 받고 있었다.
처칠 수상은 이런 상황에서 일본과 전쟁이 일어나면 홍콩을 지킬 수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이후 참모본부는 홍콩에 대한 증원 요구는 무시했다.
지키기로 마음먹은 말레이로 보낼 병력과 장비도 모자라는데 버리기로 마음먹은 홍콩에 보낼 수는 없었다.
홍콩 방어를 책임지고 있던 중국사령관(GOC China, General Officer Commanding China) 아서 에드워드 그라셋 소장은 이런 여건에서 방어계획을 짰다.
휘하에 영국군 2개 대대, 인도군 2개 대대, 합계 4개 대대의 정규군을 가지고 있던 그라셋 장군은 1개 대대를 구룡반도에 배치하고 3개 대대를 홍콩 섬에 배치했다.
38년의 계획에 따르면 구룡반도 북쪽의 방어선에서 일본군을 막기로 되어 있었으나 홍콩이 전초기지로 규정되면서 병력 증원은 기대하기 어려웠다.
따라서 구룡반도에 배치된 대대의 임무는 방어선에 의지하여 일본군을 막는 것이 아니라 폭파반이 구룡반도의 항구 시설을 파괴하는 동안 일본군의 접근을 막는 것으로 바뀌었다.
계획에 따르면 폭파는 개전 이후 48시간 내에 완료하게 되어 있었으며 이후 구룡반도에 배치된 대대는 홍콩 섬으로 철수할 것이었다.
1941년 7월 20일에 그라셋 소장은 크리스토퍼 마이클 몰트비 소장에게 중국사령관 자리를 넘겨주고 홍콩을 떠났다.
그라셋 소장은 귀국하는 길에 캐나다에 들러 1달 가량 체류하면서 캐나다의 참모총장을 만났다.
캐나다 출신인 그라셋 소장은 친구인 참모총장에게 4개 대대, 아쉬운대로 2개 대대만 홍콩에 보내주면 방어에 큰 도움이 될 거라고 말하여 동의를 받았다.
1941년 9월 6일에 영국에 도착한 그라셋 소장은 영국참모본부에 캐나다가 홍콩 방어를 위하여 최소한 2개 대대, 최대 4개 대대를 내놓을 의향이 있다고 말했고 참모본부는 처칠 수상에게 보고했다.
수상이야 캐나다가 병력을 제공하겠다는데 마다할 까닭이 없었다.
영국 정부는 1941년 9월 19일에 정식으로 캐나다군 2개 대대를 홍콩에 파견할 것을 요청했는데 이때 홍콩을 전초기지로 규정한 1940년의 정책이 바뀐 것이 아니라는 점을 분명히 했다.
이는 말레이 주둔군의 불만과 의혹을 없애기 위한 것이었다.
1941년 11월 16일에 존 로슨 준장이 지휘하는 캐나다군 2개 대대, 1,975명이 홍콩에 도착했다.
휘하에 정규군 2개 대대가 새로 생기자 몰트비 소장은 방어계획을 수정하여 구룡반도에 1개 대대가 아니라 3개 대대를 배치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라셋 장군의 계획에 따르면 구룡반도의 영국군은 폭파 작업이 마무리될 때까지 48시간 동안 지연작전을 펼친 후 홍콩 섬으로 철수하게 되어 있었다.
따라서 교전은 가급적 피하게 되어 있었으며 야포의 지원도 없었다.
그러나 몰트비 소장은 38년의 계획에 따라 벙커와 참호가 건설되어 있던 구룡 북쪽의 방어선에서 일본군을 막기로 결정했다.
그는 구룡 북쪽의 방어선에 진 드링커스 선이라는 이름을 붙이고 3개 대대를 투입하여 야포의 지원 하에 최대한 오래 버티기로 마음먹었다.
진 드링커스 선은 구룡반도 서해안의 진 드링커스 만에서 시작하여 성문 저수지와 타이드 코브의 남쪽을 통과하여 동해안으로 이어졌다.
일부 지역에 참호와 벙커가 건설되어 있었지만 전반적으로 보아 소수 병력으로 지키기 어려운 지형이었다.
극동영국군총사령관 로버트 프룩포팸 공군대장은 진 드링커스 선을 제대로 지키려면 2개 사단이 필요하다고 말했으나 몰트비 소장은 야포의 지원을 받는 3개 대대로 오래 지킬 수 있다고 보았다.
진 드링커스 선이 최종 방어선은 아니었으며 이곳을 지키던 3개 대대는 구룡의 폭파 작업이 끝나고 철수명령이 떨어지면 구룡반도에 파견되었던 포병대와 함께 홍콩 섬으로 철수할 것이었다.
(진 드링커스 선. http://en.wikipedia.org/wiki/Gin_Drinkers_Line)
홍콩 섬에는 상륙에 적합한 지점이 많아 해안선을 모두 지켜야 했기 때문에 구룡반도에 파견되었던 부대도 철수하여 홍콩 섬 방어에 투입되어야 했다.
진 드링커스 선을 지키던 인도 대대 2개가 홍콩 섬의 북해안을 지키고 11월에 증원된 캐나다 대대 2개가 나머지 해안선을 지키며 진 드링커스 선에 파견되었던 영국대대 1개가 예비대 역할을 할 것이었다.
기관총을 많이 보유한 영국대대 1개는 해안선에 흩어진 특화점에 골고루 배치되어 현지 지휘관의 명령을 받을 것이었다.
(홍콩 섬의 방어태세. http://www.ibiblio.org/hyperwar/UN/Canada/CA/SixYears/SixYears-14.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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