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홍콩
홍콩(香港)은 중국 남동부 광동성 남쪽에 있는 특별행정구로 오늘날 정식명칭은 중화인민공화국홍콩특별행정구(中華人民共和國香港特別行政區)이며 홍콩 섬, 구룡(九龍), 신계(新界), 그리고 230개의 부속 도서로 이루어져 있다.
홍콩에 사람이 살기 시작한 것은 구석기 시대로 거슬러 올라가며 진시황 때 중국에 합병되었다.
당나라와 송나라 시절에는 무역항과 해군기지가 있었으나 이후 한적한 어촌이 되어 역사에서 사라졌다.
19세기 초에 영국의 동인도회사가 광동성에 진출하면서 영국인들이 항구로서 천혜의 조건을 가진 홍콩을 주목했다.
1841년에 제1차 아편전쟁이 터지자 영국군이 홍콩 섬을 점령하고 이듬해 남경조약으로 청나라로부터 양도받았다.
영국은 1860년에 벌어진 제2차 아편전쟁의 결과 북경조약에서 좁은 바다를 건너 홍콩 섬을 마주보는 본토의 구룡을 양도받았고 1898년에는 구룡 북쪽의 신계를 99년간 조차했다.
홍콩 섬의 면적은 약 79㎢, 구룡은 약 47㎢, 그리고 신계는 약 952㎢이다.
(홍콩의 식민지화 과정. http://en.wikipedia.org/wiki/History_of_Hong_Kong_(1800s%E2%80%931930s)
영국은 항구로서 천혜의 입지 조건을 가진 홍콩 섬과 구룡 반도 사이의 바다를 세계적인 무역항으로 개발함으로써 홍콩을 중국 남부와 세계를 연결하는 중요한 물류 센터로 만들었다.
이후 홍콩은 발전을 거듭하여 1870년대부터는 아시아의 영국 식민지 중에서 가장 발달한 곳이 되었다.
1910년에는 구룡과 광동을 잇는 철도가 개통했으며 1941년 말에 일본의 침공을 받을 때까지 홍콩은 번영을 누렸다.
홍콩 섬의 지형은 여러 개의 언덕으로 이루져 있으며 가장 높은 곳은 빅토리아 피크로서 해발 552m 이다.
빅토리아 피크는 그냥 피크 또는 오스틴 산으로도 부르며 중국어로는 태평산이라고 부른다.
구룡 반도와 가장 가까운 곳은 섬의 북동쪽인 잉어문(鯉魚門)으로 해협의 폭이 400m 정도이다.
홍콩 섬의 부두 시설은 코즈웨이 만으로부터 벨처 만에 이르는 북해안을 따라 8 km 에 걸쳐 뻗어 있다.
1930년대에 중심지인 빅토리아 시티에는 성당, 대학을 비롯하여 관공서와 은행 및 회사 소유의 고층 빌딩들이 즐비했다.
(1940년 빅토리아 시티의 모습. http://commons.wikimedia.org/wiki/File:Central1940.jpg)
홍콩 섬의 해안선에는 여러 개의 만이 있어 들쭉날쭉했으며 북해안과 구룡반도 사이의 좁은 바다는 천혜의 정박지였다.
영국인들은 이 바다에 빅토리아 항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해안을 따라서는 훌륭한 자동차 도로가 나 있었으며 스탠리 반도, 다귈라 곶, 그리고 빅 웨이브 만까지 지선이 연결되어 있었다.
섬의 북쪽에서 남쪽으로 관통하는 황니천(黃泥川) 계곡을 따라 자동차 도로가 있었다.
이런 도로에서 뻗어나가는 지선 도로들은 차량 통행이 불가능했다.
홍콩 섬을 마주보는 구룡에는 부두, 건선거 및 관련 시설들이 있어 항구의 일부를 이루고 있었다.
구룡에서 북쪽으로 27km 올라가면 심천강(深圳江)이 나오고 그 너머는 중국 광동성의 심천시였다.
심천강에서 구룡 사이가 신계였다.
신계의 중앙에는 홍콩에서 가장 높은 해발 957m 의 대모산(大帽山)을 중심으로 한 산괴가 펼쳐져 있었는데 이곳에서 구룡까지는 훌륭한 도로가 이어져 있었다.
(홍콩. http://en.wikipedia.org/wiki/Geography_of_Hong_Kong)
늪지대와 심천강 남서쪽의 농경지를 제외하면 신계는 대부분 경사가 급한 언덕이 산재한 지형이었다.
이러한 언덕들의 낮은 부분은 소나무나 대나무로 덮여 있었으며 정상 부근은 관목이나 키가 큰 풀들로 덮여 있었다.
구룡에는 광동에서 연결된 철도가 있었는데 이 철도는 표준궤도에 단선이었으며 신계 지역에서 여러 개의 굴과 절삭지를 지나고 다리를 건너 심천으로 이어져 있었다.
신계의 남쪽인 골든 힐과 스머글러 능선에서는 북쪽으로부터 쳐들어오는 적을 감제할수 있었으나 만일 대모산과 니들 힐을 점령하면 이들 요지를 제압할 수 있었다.
구룡만의 남동쪽에는 해발 222m의 데빌스 피크가 있었는데 여기서는 레이어먼과 홍콩 섬의 북동쪽을 감제할 수 있었다.
홍콩 섬의 북동쪽에는 건선거를 갖춘 해군공창과 태고(太古) 조선소가 있었으며 바다 건너편에는 민간 조선소가 있었다.
1941년까지 홍콩에는 전함이 들어갈만한 건선거는 없었다.
주민들은 대부분 중국계로 1935년의 통계에 따르면 홍콩 주민 966,341명 중에서 중국계가 아닌 사람은 21,370명에 불과했다.
홍콩의 중국계는 대부분 홍콩에서 태어나 영국국적을 가지고 있었으나 1937년에 중일전쟁이 발발하자 많은 중국인 피난민들이 들어왔다.
1941년 12월 현재 홍콩 섬의 인구는 약 80만 명으로 대부분 빅토리아 시티에 거주했다.
해안에 띄워놓은 배에 살고 있던 사람들이 약15만 4,000명이었으며 신계에는 약 77만 5,000명이 있었다.
따라서 일본군이 쳐들어 왔을 때 홍콩에는 수비대를 제외하고 170만 명이 넘는 사람들이 몰려 있었다.
기후는 여름에는 아열대 기후였으나 겨울에는 최저 기온이 섭씨 15도 아래로 내려갔으며 심할 때는 5도 밑으로까지 떨어졌는데 항상 습기가 많아서 더울 때는 더 덥고 추울 때는 더 춥게 느껴졌다.
강수량은 1년에 2,400mm 로서 많았지만 계절에 따라 들쭉날쭉했다.
따라서 겨울에는 홍콩 섬에서 사용하는 물의 절반 가량을 구룡반도로부터 공급받았고, 나머지 절반은 지표수를 모으는 저수지로부터 송수관을 통해 빅토리아 시티로 공급했다.
이러한 급수 시스템은 방어에서 커다란 약점이었으며 실제로 일본군이 홍콩 섬에 상륙하여 급수 시스템을 장악한 것이 항복의 한 요인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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