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1년 및 그 이전/홍콩 전투'에 해당되는 글 24건

  1. 2018.02.16 홍콩전투(4)-공격준비(1)
  2. 2018.02.15 홍콩전투(3)-방어준비(2)
  3. 2018.02.15 홍콩전투(2)-방어준비(1)
  4. 2018.02.14 홍콩전투(1)-홍콩

4. 공격준비(1) - 계획

 

일본은 1940년 2월 9일에 중국 남부의 작전을 담당하는 남지나파견군을 창설했다.

창설 당시 지나파견군 예하였던 남지나파견군은 7월 23일에 대본영 직속이 되었다.

이듬해인 1941년 6월 28일에 대본영은 남지나파견군을 제23군으로 개편하고 초대 사령관으로 이마무라 히토시 중장을 임명했다.

태평양 전쟁 개전을 1달 앞둔 11월 6일에 이마무라 중장은 네덜란드령 동인도제도 공략을 책임진 제16군 사령관이 되었다.

이마무라 중장의 뒤를 이어 사카이 다카시 중장이 제23군 사령관이 되었으며 기병제1여단장 구리바야시 타다미치 소장이 참모장에 임명되었다.

제23군은 사카이 사령관 부임 당시 제18, 제38, 제51 및 제104사단의 4개 사단을 보유하고 있었다.

 

(제23군 사령관 사카이 다카시 중장. http://en.wikipedia.org/wiki/Takashi_Sakai)

 

사카이 사령관은 부임과 동시에 홍콩 공략을 준비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대본영은 말레이 상륙 직후 해군의 지원 하에 제38사단으로 홍콩을 공격하여 열흘 안에 함락시키라고 명령했다.

 

홍콩 수비대에 캐나다 군이 증원되자 사카이 사령관은 대본영에 열흘 만에 홍콩을 함락시키라는 요구는 비현실적이라고 항의하는 동시에 증원을 요구했다.

대본영은 본토에 있던 위수연대(경비연대) 하나를 보내주었다.

위수연대를 공격 작전에 사용하기는 힘들었으나 대신 사카이 사령관은 제51사단에서 제66연대를 빼내어 홍콩전투에 참가시킬 수 있었다.

제66연대장 아라키 가츠토시 대좌의 이름을 따서 아라키 지대라고 이름붙인 제66연대는 전투에 참가하지는 않았지만 제38사단이 구룡반도를 점령한 후 방어를 맡았다.

덕분에 제38사단은 홍콩 섬 상륙에 모든 전력을 투입할 수 있었다.

 

일본군은 침공 몇 년전부터 홍콩에 간첩을 침투시켰는데 홍콩 경찰의 대응 능력이 미약했기 때문에 간첩들은 활발하게 활동했다.

실제로 일본군이 침공했을 때 사용한 지도는 홍콩 당국의 행정용 지도나 군대용 지도에 보기 편하도록 일본어로 몇몇 내용을 추가 인쇄한 것이었다.

일본군은 또한 홍콩의 조직폭력배들에게 자금과 무기를 대주면서 포섭하여 침공시 후방에서 소요를 일으키려 했으나 진책 소장의 대응에 막혀 실패했다.

 

침공계획은 3단계로 나뉘어져 있었다.

제1단계는 심천강을 건너 구룡반도를 점령하고 제2단계에서는 홍콩 섬 상륙을 준비할 것이었다.

제3단계는 홍콩 섬에 상륙하여 점령하는 것이었다.

 

 

(홍콩전투의 전개 과정. http://en.wikipedia.org/wiki/Battle_of_hong_kong)

 

제1단계에서 제38사단은 크게 2개로 나뉘어 전진할 것이었다.

주력은 우익으로 제38사단의 보병단장 이토 다케오 소장이 지휘할 것이었다.

우익은 제228 및 제230연대와 산포대대, 대전차대대 및 공병대대 각 1개로 이루어져 산포연대의 지원을 받을 것이었다.

제228 및 제230연대의 제3대대는 우익의 예비대이며 화력 지원을 담당한 산포연대의 1개 대대는 보병과 동행할 것이었다.

 

좌익은 제229연대를 중심으로 소규모의 포병 및 공병 분견대가 딸려 있었다.

화력지원은 1개 산포연대, 1개 독립야포대대 및 1개 박격포대대가 담당할 것이었다.

 

우익은 대모산의 남서쪽을 통하여 영국군의 방어선을 공격할 것이었다.

좌익은 대모산과 대포 방면으로 남하하여 방어선을 공격할 것이었다. 

구룡반도의 점령은 1주일 내로 끝내게 되어 있었다.

 

구룡반도를 점령하면 제2단계로 들어가 3일 간 홍콩 섬 상륙을 준비하며 이 기간 동안 그린 섬과 스톤커터 섬을 점령하게 되어 있었다.

 

(홍콩 섬 상륙 및 전투.http://www.canadaatwar.ca/content-42/world-war-ii/the-battle-of-hong-kong/)

 

제3단계인 홍콩 섬 상륙은 침공 이후 열흘 째에 실시하게 되어 있었다.

상륙은 홍콩 섬의 북동해안인 백사만과 노스 포인트 사이에 실시하며 3개 연대가 모두 참가할 것이었다.

제230연대가 우익, 제228연대가 중앙, 제229연대가 좌익을 담당하며 일단 상륙하면 빅토리아 시티를 향하여 서쪽으로 진격하게 되어 있었다. 

상륙은 야간에 실시하며 다음날 아침까지는 빅토리아 피크에 도달하여 빅토리아 시티를 고립시키도록 되어 있었다.

각 연대는 2개 대대를 상륙에 동원하며 제3/228대대와 제1/230대대는 소속 연대의 예비대로, 제1/229대대는 사단예비대로 구룡에서 대기할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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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방어준비(2) - 배치

 

일본군의 침공을 받을 당시 중국사령관 크리스토퍼 마이클 몰트비 소장이 지휘하던  홍콩수비대는 의무대 및 세인트 존 야전병원 관계자를 포함하여 13,981명이었다.

영국 및 캐나다인이 8,919명, 인도 및 중국인이 4,402명, 나머지는 의료 관계자였다.

정규군 보병은 5,422명이었으며 약 6,000명은 포병, 공병, 해군 및 홍콩의용방위군단(Hong Kong Volunteer Defence Corps = HKVDC)소속이었다.

 

(중국사령관 크리스토퍼 몰트비 소장. http://en.wikipedia.org/wiki/Christopher_Maltby)

 

홍콩의용방위군단(=이후 줄여서 의용대)은 1854년부터 이어져 온 유서깊은 지역의용방어조직으로 침공을 받을 당시 7개 보병중대, 5개 기관총중대, 5개 포대, 브렌건캐리어를 가진 1개 장갑차소대로 이루어져 있었으며 병력은 약 2,200명이었다.

장비에서 보듯 의용대는 단순히 머리 수만 맞추는 수준이 아니었으며 정규군에 버금가는 전투력을 가지고 있었다. 

 

의용대의 보병중대는 약 100명으로 이루어져 있었으며 각 중대는 인종별로 구성되어 있었다.

제3중대는 기관총중대로서 백인과 중국인의 혼혈인 유라시아 중대, 제4중대는 보병중대로서 중국인 중대, 제5중대는 기관총중대로서 포르투갈인 중대라는 식이었다.

 

홍콩의 인구 구성에 비하여 수비대에서 중국계의 비중은 낮았는데 이는 대다수 중국인들이 홍콩의 중국 귀속을 바라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영국은 자국 국적을 가진 홍콩의 중국계도 수비대에 뽑으려고 하지 않았다.

중일 전쟁 이후 병력 수요가 늘어나면서 중국인을 뽑으려고 했으나 이번에는 일본이 침투시킨 중국 또는 대만 간첩이 끼어들까봐 과감하게 뽑지 못했다.

실제로 일본은 홍콩에 많은 간첩을 심었으며 수비대의 군복을 만들어주는 재단사나 수비대가 주로 가는 이발사 중에서도 간첩이 있었다.

이들의 활약으로 일본군은 침공 때 공습이나 포격을 정확하게 실시할 수 있었다.

 

일본은 광동성을 점령하자 광동의 조직폭력배 200개 파, 12,000명을 모아 자금을 대고 무장시켜 앞잡이로 써먹었는데 홍콩에도 많은 조직폭력배들이 일본군의 침공시 영국군 후방에서 소요를 일으킨다는 조건으로 일본으로부터 자금과 무기를 지원받고 있었다.

이러한 제5열을 소탕하는 데에는 중화민국 해군 소장인 진책 제독의 공이 컸다.

 

국민당 정부의 장개석 총통은 광동성이 함락되어 홍콩과 육로를 통한 연결이 끊어지자 진책 소장을 연락관으로 홍콩에 파견했다.

다리가 하나 뿐인 진책 소장은 증권회사의 중역으로 위장했는데 홍콩과 국민당 정부와의 연락업무라는 본연의 임무 이외에 홍콩의 제5열을 분쇄하는 데에도 앞장섰다.

홍콩 경찰의 능력으로 제5열을 찾아내어 잡아들이는 것은 불가능했으므로 당국도 진책 소장을 후원했다.

 

진책 소장은 경찰의 묵인 아래 조직폭력배들을 모아 톰슨 기관총으로 무장시킨 다음 제5열로 의심되는 자들을 습격하여 사살했다.

법을 무시한 살인이었으나 당시로서는 불가피했다.

정보를 입수하고 가치를 판단하는데 뛰어난 능력을 가진 진책 소장은 정확한 정보를 입수하여 평가한 다음 적이 숨거나 달아나기 전에 신속하게 제거하는 방식으로 일본의사주를 받은 홍콩의 제5열을 효과적으로 제압했다.

따라서 일본이 심혈을 기울였음에도 홍콩이 침공을 받았을 때 제5열에 의한 소요 사태는 발생하지 않았다.

 

홍콩의 해안선에는 해안포 29문이 배치되어 있었다.

9.2인치(234mm)포 8문, 6인치(152mm)포 15문(3문은 스톤커터 섬에 배치), 4.7인치(120mm)포 2문, 4인치(102mm)포 4문이었으며 포신이 바다를 향하고 있었지만 구룡 쪽으로도 포격이 가능했다.

또한 해안에 상륙하는 적을 공격하기 위하여 18파운드(83.8mm) 및 2파운드(40mm) 포 10문이 배치되어 있었다.

야포로는 6인치포, 60파운드(127mm)포, 4.5인치(114mm)포, 그리고 3.7인치(94mm)포를 합쳐 28문이 있었다.

포탄은 부족하여 1문당 평균 300발 가량이었으며 9.2인치 해안포는 1문당 25발에 불과했다.

 

정규보병대대로는 영국대대, 인도대대 및 캐나다대대가 2개씩 있었다.

영국대대는 왕립스코트연대 제2대대와 미들섹스연대 제1대대였는데 미들섹스대대는 비커스 기관총 48정을 가진 기관총대대였다.

인도대대는 제14펀잡연대 제2대대(제2/14펀잡대대)와 제7라지푸트연대 제5대대(제5/7라지푸트대대)였다.

캐나다대대는 캐나다왕립소총대대와 위니펙척탄병대대였다.

(비커스 기관총. 자세한 내용은 여기로.http://en.wikipedia.org/wiki/Vickers_machine_gun)

 

영국대대와 인도대대는 1937년부터 경험이 풍부하고 유능한 장교와 부사관들을 다른 곳으로 뺏기면서 전투력이 저하되었는데 왕립스코트 대대는 많은 병력이 군사재판을 받고 영창에 들어가 기강이 해이하다는 평을 들었다.

야포들을 관장하던 홍콩-싱가포르 왕립포병대(HongKong-Singapore Royal Artillery = HKSRA) 역시 경험이 풍부한 장교와 부사관들을 뺏겼다.

 

따라서 일본군이 침공했을 때 많은 병사들이 훈련이 부족한 보충병들이었다.

펀잡대대의 경우 전 병력의 40%가 1941년 10월에 도착했는데 훈련소를 갓 나온 신병이었다.

경험많은 장교가 부족하여 젊은 장교가 높은 직위를 감당해야 했으며 인도의 이슬람 병사로 이루어진 인도대대를 지휘하는 영국장교가 병사들의 언어인 우르두 어를 몰라서 지휘에 막대한 지장을 초래했다.

 

포병은 포탄이 부족하여 연습을 하지 못했으며 보병과의 합동훈련도 하지 않았다.

따라서 보병은 포병이 사용하는 시계문자판식 목표지시(clockface target indication)를 이해하지 못했다.

 

많은 병사들이 말라리아로 고통받고 있었다.

정원이 770명 정도인 왕립스코트연대에서 최소한 180명이 재발하는 말라리아에 걸려 있었다.

 

캐나다군의 도착은 수비대의 병력을 크게 늘렸지만 이들 또한 전투력이 약했다.

이들은 파견되기 전 수년간 주둔군 역할을 하여 전투훈련이 부족했으며 파견되기 전에 결원을 보충받았는데 전체의 12% 에 달하는 보충병들은 훈련소를 갓 나온 풋내기들이었다.

 

장비도 부족했다.

편성표에 따르면 캐나다군 1개 대대는 브렌건캐리어 22대, 1톤 트럭 13대, 3/4톤 트럭 37대 등 총 102대의 차량과 31대의 자전거, 22정의 보이스 대전차총을 보유했다.

그러나 홍콩에 파견된 캐나다군 2개 대대가 보유한 차량은 합쳐 브렌건캐리어 6대, 3/4톤 트럭 12대, 급수차 2대에 불과했고 보이스 대전차총은 1정 뿐이었다.

 

(브렌건캐리어. http://en.wikipedia.org/wiki/Universal_Carrier)

 

캐나다군은 3인치 박격포를 보유했으나 포탄이 없었다.

당시 캐나다 육군 전체에 3인치 박격포탄이 300발 밖에 없었으니 홍콩 파견군에 챙겨줄 포탄이 없을 만도 했다.

영국과 함께 독일과 이탈리아에 선전포고를 한지 오래된 캐나다의 임전 태세가 엉망이었음을 알 수 있는 사례다. 

뒤늦게 캐나다 군의 차량과 장비를 싣고 오던 돈 호세함은 도중에 전쟁이 일어나자 홍콩까지 가지 못하고 마닐라로 대피했다가 그곳에서 일본기의 폭격을 받았다.

 

알프레드 콜린슨 대령이 지휘하는 홍콩의 해군력은 미약했다.

주력은 제1차 대전형 구축함 3척이었는데 1척은 수리 중이었으며 2척은 상부의 명령에 따라 12월 8일 저녁 9시 30분에 싱가포르로 탈출했다.

수리 중이던 구축함 트라시안의 승조원들은 보병으로 전투에 참가했다.

홍콩 남해안의 애버딘에는 제라드 호레이스 간디 소령이 지휘하는 제2어뢰정전대가 8척의 어뢰정을 보유하고 있었다.

양자강에서 사용하던 흘수가 낮은 하천포정 4척도 있었는데 1척은 일본이 침공해 왔을 때 수리 중이었다.

수리 중이던 하천포정 모스의 승조원들 또한 보병으로 전투에 참가했다.

이외에 무장초계정 12척, 기뢰부설함 2척, 급유함 1척이 있었으며 항공기로는 왈루스 비행정 3대가 있었다.

로버트 클레멘트 자일스 대령이 지휘하는 47명의 해병대가 해군공창과 태고 조선소의 건선거를 지켰는데 이들은 정박한 함정 타마를 숙소로 사용했다.

해군 병력은 중국계 300명을 포함하여 약 1,300명이었다.

 

(슈퍼마린 왈루스 비행정. 자세한 내용은 여기로, http://en.wikipedia.org/wiki/Supermarine_Walrus)

 

공군은 구룡반도의 카이탁 비행장에 전개한 빌데비스트 3대와 의용대의 연습기 5대가 전부로서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비커스 빌데비스트 뇌격기. http://en.wikipedia.org/wiki/Vickers_Vildebeest)

 

1941년 11월이 되면서 일본군의 움직임이 활발하다는 첩보가 들어오자 몰트비 소장은 정보장교에게 평가를 요구했다.

11월 29일에 정보장교는 몰트비 소장에게 광동성에 주둔 중인 일본제23군이 3개 사단과 1개 여단으로 이루어져 포병 1개 연대의 지원을 받는다고 말했다.

또한 제23군이 홍콩상륙에 필요한 주정을 충분히 가지고 있으나 특별한 움직임은 없다고 보고했다.

실제로 당시 제23군은 4개 사단과 1개 연대로 이루어져 있었으며 포병의 규모는 1개 연대보다 훨씬 컸다.

 

일본군의 전력에 대한 정보 평가는 엉터리였다.

정보 평가에 따르면 일본군은 야전을 싫어하며 진부한 방식과 계획에 사로잡혀 있었다.

일본군의 기관총은 숫자도 적고 영국군 기관총에 비하여 낙후되어 있었다.

비록 일본군이 중국에서는 잘 싸웠으나 그건 저항이 약해서였다.

일본의 항공력은 유럽보다 열등했고 폭격실력은 형편없었으며 야간비행은 불가능했다.

 

홍콩에 배치된 캐나다군은 영국군에게 보낸 보고서에서 대적하고 있는 일본군은 숫자가 5,000 명에 불과하고 경무장이며 포병 지원도 없다고 적었다.

또한 일본 항공기는 낙후되고 조종사들이 근시라서 급강하폭격이 불가능하다고 주장했다.

 

이런 분위기에서 홍콩의 군인이나 민간인들이 적어도 홍콩 섬은 난공불락이라고 믿는 것도 당연했다.

물론 일부는 진실을 알고 있었지만 입을 놀려 사기를 떨어뜨리느니 입을 다물었다.

 

몰트비 소장은 11월 말에서 12월 초에 걸쳐 일본군의 침공에 대비하여 몇 가지 조치를 취했다. 

야간에는 항구가 폐쇄되었으며 홍콩으로 오던 배들은 싱가포르로 갔다.

방어에 참가하지 않는 사람들은 홍콩을 떠나라고 권고하는 공지가 나붙었다.

당국은 주요 지점에 대한 경비를 강화하고 해안감시대를 조직했다.

 

12월 2일에는 캐나다 군과 의용대를 제외한 병력이 방어지역에 배치되었으며 잉어문 해협은 방책을 쳐서 봉쇄했다.

 

(방책. http://hnsa.org/doc/netsandbooms/index.htm#pg73)

 

몰트비 소장은 일본군의 의도를 잘못 짚고 있었다.

12월 4일에 그는 중국 남부의 일본군이 홍콩을 공격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고 평가했다.

그로부터 48시간 이내에 일본기들이 3번이나 홍콩 영공을 침범했는데 대응태세를 떠보려는 것이 틀림없었다.

침공 전날인 12월 7일, 심천강 북쪽에 일본군 2만명이 집결했다는 정보가 들어왔다.

이 정보는 정확했으나 몰트비 소장은 여전히 중국 남부의 일본군은 병력이 부족하며 홍콩을 침공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고 보았다.

 

낙관적인 전망과는 별도로 몰트비 소장은 만약의 사태에 대비했다.

12월 5일에 의용대는 최종적으로 방어진지로 들어갔으며 홍콩 섬의 대공포대는 6일 밤부터 비상대기태세에 들어갔다.

구룡반도에 배치된 포병대는 7일 오전 7시까지 방열을 마쳤으며 의용대 1개 중대가 카이탁 비행장에 파견되어 일본군의 강행착륙에 대비했다.

7일 오후 5시까지 캐나다군이 방어진지에 포진을 마쳤다.

 

빅토리아 항에 있던 상선들 중 26척이 7일 오후 5시까지 싱가포르로 떠났고 이후 12시간 동안 8척이 뒤따랐다.

홍콩에서 남남서 방향으로 50km 떨어진 갭 락 등대는 7일 밤부터 소등했으며 해군은 홍콩 부근 해상을 기뢰원과 방책으로 둘러쌌다.

 

(홍콩 주변 기뢰 및 방책 설치 상황. http://indicatorloops.com/hongkong.htm)

 

빅토리아 시티의 상황은 7일에도 평소와 같았다.

구룡과 홍콩 섬 사이를 연락선이 부지런히 다녔으며 신문은 루스벨트 대통령이 일본 천황에게 평화를 요구하는 전문을 보냈다는 사실을 머릿기사로 다루었다.

7일 저녁이 되자 극장에서 수비대 병력은 근무지로 귀대하라는 공지가 나왔으나 민간인들은 바로 몇 시간 후 공격이 개시될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한 채 잠자리에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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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방어준비(1) - 계획

 

1937년에 중일전쟁이 발발하고 이듬해인 38년 5월에 일본군이 홍콩에서 북동쪽으로 480km 정도 떨어진 아모이(Amoi)에 상륙하자 7월에 영국참모본부는 홍콩방어에 대한 기본계획을 수립했다.

참모본부는 홍콩의 무장 해제는 거부했다.

피를 흘리지 않고 넘겨주면 전쟁이 끝나고 돌아오기 어려웠으므로 함락되더라도 최후까지 전투를 벌이는 것이 중요했다.

 

참모본부는 홍콩의 군사적 가치에는 환상을 갖지 않았다.

일본과 전쟁이 벌어지면 홍콩은 공습과 포격을 받아 함대 기지로는 물론 잠수함 기지로도 사용할 수 없을 것이었다.

참모본부가 생각한 방안은 일본군이 빅토리아 항을 사용하지 못하게 하면서 구원을 기다리는 것이었다.

이를 위하여 구룡 북쪽의 산악 지대에 방어선을 만들기로 하여 참호를 파고 벙커를 건설했으며 홍콩 섬에는 4달치 식량을 비축했다.

 

1938년 10월에 일본군이 광동성을 장악하면서 홍콩과 국민당 정부 간의 육상 교통로가 끊어졌으며 홍콩 수비대는 심천강을 경계로 일본군과 마주보게 되었다. 

이듬해인 39년 2월에 일본군이 남쪽의 해남도에 상륙하면서 홍콩은 고립되었다.

 

1939년 9월에는 독일이 폴란드를 침공하면서 유럽에서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했다.

이듬해인 40년 5월에는 독일이 프랑스를 침공했으며 영국은 육군의 주력을 파견했다가 패배했다.

 

이런 상황에서 영국참모본부는 1940년 8월에 전 세계에 걸쳐 정세를 검토하면서 중국 북부에 주둔 중이던 소규모의 영국군 수비대를 철수시키기로 결정했다.

참모본부는 이때 윈스턴 처칠 수상의 뜻에 따라 홍콩을 일본과 전쟁시 최대한 오래 유지해야 하지만 반드시 지켜야 할 대상은 아닌 전초기지(outpost)로 규정했다. 

프랑스 전투에 참가했다가 패하여 던커크에서 육군의 장비를 몽땅 잃고 병력만 겨우 빼낸 영국은 독일의 침공 위협 아래 처절한 공습을 받고 있었으며 북아프리카에서는 숫적으로 우세한 이탈리아 군의 압박을 받고 있었다.

처칠 수상은 이런 상황에서 일본과 전쟁이 일어나면 홍콩을 지킬 수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이후 참모본부는 홍콩에 대한 증원 요구는 무시했다.

지키기로 마음먹은 말레이로 보낼 병력과 장비도 모자라는데 버리기로 마음먹은 홍콩에 보낼 수는 없었다.

 

홍콩 방어를 책임지고 있던 중국사령관(GOC China, General Officer Commanding China) 아서 에드워드 그라셋 소장은 이런 여건에서 방어계획을 짰다.

휘하에 영국군 2개 대대, 인도군 2개 대대, 합계 4개 대대의 정규군을 가지고 있던 그라셋 장군은 1개 대대를 구룡반도에 배치하고 3개 대대를 홍콩 섬에 배치했다.

 

38년의 계획에 따르면 구룡반도 북쪽의 방어선에서 일본군을 막기로 되어 있었으나 홍콩이 전초기지로 규정되면서 병력 증원은 기대하기 어려웠다.

따라서 구룡반도에 배치된 대대의 임무는 방어선에 의지하여 일본군을 막는 것이 아니라 폭파반이 구룡반도의 항구 시설을 파괴하는 동안 일본군의 접근을 막는 것으로 바뀌었다.

계획에 따르면 폭파는 개전 이후 48시간 내에 완료하게 되어 있었으며 이후 구룡반도에 배치된 대대는 홍콩 섬으로 철수할 것이었다.

 

1941년 7월 20일에 그라셋 소장은 크리스토퍼 마이클 몰트비 소장에게 중국사령관 자리를 넘겨주고 홍콩을 떠났다.

그라셋 소장은 귀국하는 길에 캐나다에 들러 1달 가량 체류하면서 캐나다의 참모총장을 만났다.

캐나다 출신인 그라셋 소장은 친구인 참모총장에게 4개 대대, 아쉬운대로 2개 대대만 홍콩에 보내주면 방어에 큰 도움이 될 거라고 말하여 동의를 받았다.

 

1941년 9월 6일에 영국에 도착한 그라셋 소장은 영국참모본부에 캐나다가 홍콩 방어를 위하여 최소한 2개 대대, 최대 4개 대대를 내놓을 의향이 있다고 말했고 참모본부는 처칠 수상에게 보고했다.

수상이야 캐나다가 병력을 제공하겠다는데 마다할 까닭이 없었다.

 

영국 정부는 1941년 9월 19일에 정식으로 캐나다군 2개 대대를 홍콩에 파견할 것을 요청했는데 이때 홍콩을 전초기지로 규정한 1940년의 정책이 바뀐 것이 아니라는 점을 분명히 했다.

이는 말레이 주둔군의 불만과 의혹을 없애기 위한 것이었다.

1941년 11월 16일에 존 로슨 준장이 지휘하는 캐나다군 2개 대대, 1,975명이 홍콩에 도착했다.

 

휘하에 정규군 2개 대대가 새로 생기자 몰트비 소장은 방어계획을 수정하여 구룡반도에 1개 대대가 아니라 3개 대대를 배치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라셋 장군의 계획에 따르면 구룡반도의 영국군은 폭파 작업이 마무리될 때까지 48시간 동안 지연작전을 펼친 후 홍콩 섬으로 철수하게 되어 있었다.

따라서 교전은 가급적 피하게 되어 있었으며 야포의 지원도 없었다. 

 

그러나 몰트비 소장은 38년의 계획에 따라 벙커와 참호가 건설되어 있던 구룡 북쪽의 방어선에서 일본군을 막기로 결정했다.

그는 구룡 북쪽의 방어선에 진 드링커스 선이라는 이름을 붙이고 3개 대대를 투입하여 야포의 지원 하에 최대한 오래 버티기로 마음먹었다.

 

진 드링커스 선은 구룡반도 서해안의 진 드링커스 만에서 시작하여 성문 저수지와 타이드 코브의 남쪽을 통과하여 동해안으로 이어졌다. 

일부 지역에 참호와 벙커가 건설되어 있었지만 전반적으로 보아 소수 병력으로 지키기 어려운 지형이었다.

극동영국군총사령관 로버트 프룩포팸 공군대장은 진 드링커스 선을 제대로 지키려면 2개 사단이 필요하다고 말했으나 몰트비 소장은 야포의 지원을 받는 3개 대대로 오래 지킬 수 있다고 보았다.

진 드링커스 선이 최종 방어선은 아니었으며 이곳을 지키던 3개 대대는 구룡의 폭파 작업이 끝나고 철수명령이 떨어지면 구룡반도에 파견되었던 포병대와 함께 홍콩 섬으로 철수할 것이었다.

 

(진 드링커스 선. http://en.wikipedia.org/wiki/Gin_Drinkers_Line)

 

홍콩 섬에는 상륙에 적합한 지점이 많아 해안선을 모두 지켜야 했기 때문에 구룡반도에 파견되었던 부대도 철수하여 홍콩 섬 방어에 투입되어야 했다.

진 드링커스 선을 지키던 인도 대대 2개가 홍콩 섬의 북해안을 지키고 11월에 증원된 캐나다 대대 2개가 나머지 해안선을 지키며 진 드링커스 선에 파견되었던 영국대대 1개가 예비대 역할을 할 것이었다.

기관총을 많이 보유한 영국대대 1개는 해안선에 흩어진 특화점에 골고루 배치되어 현지 지휘관의 명령을 받을 것이었다.

 

(홍콩 섬의 방어태세. http://www.ibiblio.org/hyperwar/UN/Canada/CA/SixYears/SixYears-14.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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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홍콩

 

홍콩(香港)은 중국 남동부 광동성 남쪽에 있는 특별행정구로 오늘날 정식명칭은 중화인민공화국홍콩특별행정구(中華人民共和國香港特別行政區)이며 홍콩 섬, 구룡(九龍), 신계(新界), 그리고 230개의 부속 도서로 이루어져 있다.

 

홍콩에 사람이 살기 시작한 것은 구석기 시대로 거슬러 올라가며 진시황 때 중국에 합병되었다.

당나라와 송나라 시절에는 무역항과 해군기지가 있었으나 이후 한적한 어촌이 되어 역사에서 사라졌다.

19세기 초에 영국의 동인도회사가 광동성에 진출하면서 영국인들이 항구로서 천혜의 조건을 가진 홍콩을 주목했다.

 

1841년에 제1차 아편전쟁이 터지자 영국군이 홍콩 섬을 점령하고 이듬해 남경조약으로 청나라로부터 양도받았다.

영국은 1860년에 벌어진 제2차 아편전쟁의 결과 북경조약에서 좁은 바다를 건너 홍콩 섬을 마주보는 본토의 구룡을 양도받았고 1898년에는 구룡 북쪽의 신계를 99년간 조차했다.

홍콩 섬의 면적은 약 79㎢, 구룡은 약 47㎢, 그리고 신계는 약 952㎢이다.

 

(홍콩의 식민지화 과정. http://en.wikipedia.org/wiki/History_of_Hong_Kong_(1800s%E2%80%931930s)

 

영국은 항구로서 천혜의 입지 조건을 가진 홍콩 섬과 구룡 반도 사이의 바다를 세계적인 무역항으로 개발함으로써 홍콩을 중국 남부와 세계를 연결하는 중요한 물류 센터로 만들었다.

이후 홍콩은 발전을 거듭하여 1870년대부터는 아시아의 영국 식민지 중에서 가장 발달한 곳이 되었다.

1910년에는 구룡과 광동을 잇는 철도가 개통했으며 1941년 말에 일본의 침공을 받을 때까지 홍콩은 번영을 누렸다.

 

홍콩 섬의 지형은 여러 개의 언덕으로 이루져 있으며 가장 높은 곳은 빅토리아 피크로서 해발 552m 이다.

빅토리아 피크는 그냥 피크 또는 오스틴 산으로도 부르며 중국어로는 태평산이라고 부른다.

구룡 반도와 가장 가까운 곳은 섬의 북동쪽인 잉어문(鯉魚門)으로 해협의 폭이 400m 정도이다.

홍콩 섬의 부두 시설은 코즈웨이 만으로부터 벨처 만에 이르는 북해안을 따라 8 km 에 걸쳐 뻗어 있다.

1930년대에 중심지인 빅토리아 시티에는 성당, 대학을 비롯하여 관공서와 은행 및 회사 소유의 고층 빌딩들이 즐비했다.

 

(1940년 빅토리아 시티의 모습. http://commons.wikimedia.org/wiki/File:Central1940.jpg)

 

홍콩 섬의 해안선에는 여러 개의 만이 있어 들쭉날쭉했으며 북해안과 구룡반도 사이의 좁은 바다는 천혜의 정박지였다.

영국인들은 이 바다에 빅토리아 항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해안을 따라서는 훌륭한 자동차 도로가 나 있었으며 스탠리 반도, 다귈라 곶, 그리고 빅 웨이브 만까지 지선이 연결되어 있었다.

섬의 북쪽에서 남쪽으로 관통하는 황니천(黃泥川) 계곡을 따라 자동차 도로가 있었다.

이런 도로에서 뻗어나가는 지선 도로들은 차량 통행이 불가능했다.

 

홍콩 섬을 마주보는 구룡에는 부두, 건선거 및 관련 시설들이 있어 항구의 일부를 이루고 있었다.

구룡에서 북쪽으로 27km 올라가면 심천강(深圳江)이 나오고 그 너머는 중국 광동성의 심천시였다.

심천강에서 구룡 사이가 신계였다.

신계의 중앙에는 홍콩에서 가장 높은 해발 957m 의 대모산(大帽山)을 중심으로 한 산괴가 펼쳐져 있었는데 이곳에서 구룡까지는 훌륭한 도로가 이어져 있었다.

 

(홍콩. http://en.wikipedia.org/wiki/Geography_of_Hong_Kong)

 

늪지대와 심천강 남서쪽의 농경지를 제외하면 신계는 대부분 경사가 급한 언덕이 산재한 지형이었다.

이러한 언덕들의 낮은 부분은 소나무나 대나무로 덮여 있었으며 정상 부근은 관목이나 키가 큰 풀들로 덮여 있었다.

구룡에는 광동에서 연결된 철도가 있었는데 이 철도는 표준궤도에 단선이었으며 신계 지역에서 여러 개의 굴과 절삭지를 지나고 다리를 건너 심천으로 이어져 있었다.

신계의 남쪽인 골든 힐과 스머글러 능선에서는 북쪽으로부터 쳐들어오는 적을 감제할수 있었으나 만일 대모산과 니들 힐을 점령하면 이들 요지를 제압할 수 있었다.

구룡만의 남동쪽에는 해발 222m의 데빌스 피크가 있었는데 여기서는 레이어먼과 홍콩 섬의 북동쪽을 감제할 수 있었다.

 

홍콩 섬의 북동쪽에는 건선거를 갖춘 해군공창과 태고(太古) 조선소가 있었으며 바다 건너편에는 민간 조선소가 있었다.

1941년까지 홍콩에는 전함이 들어갈만한 건선거는 없었다.

 

주민들은 대부분 중국계로 1935년의 통계에 따르면 홍콩 주민 966,341명 중에서 중국계가 아닌 사람은 21,370명에 불과했다.

홍콩의 중국계는 대부분 홍콩에서 태어나 영국국적을 가지고 있었으나 1937년에 중일전쟁이 발발하자 많은 중국인 피난민들이 들어왔다.

1941년 12월 현재 홍콩 섬의 인구는 약 80만 명으로 대부분 빅토리아 시티에 거주했다.

해안에 띄워놓은 배에 살고 있던 사람들이 약15만 4,000명이었으며 신계에는 약 77만 5,000명이 있었다.

따라서 일본군이 쳐들어 왔을 때  홍콩에는 수비대를 제외하고 170만 명이 넘는 사람들이 몰려 있었다.

 

기후는 여름에는 아열대 기후였으나 겨울에는 최저 기온이 섭씨 15도 아래로 내려갔으며 심할 때는 5도 밑으로까지 떨어졌는데 항상 습기가 많아서 더울 때는 더 덥고 추울 때는 더 춥게 느껴졌다.

강수량은 1년에 2,400mm 로서 많았지만 계절에 따라 들쭉날쭉했다.

따라서 겨울에는 홍콩 섬에서 사용하는 물의 절반 가량을 구룡반도로부터 공급받았고, 나머지 절반은 지표수를 모으는 저수지로부터 송수관을 통해 빅토리아 시티로 공급했다.

이러한 급수 시스템은 방어에서 커다란 약점이었으며 실제로 일본군이 홍콩 섬에 상륙하여 급수 시스템을 장악한 것이 항복의 한 요인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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