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1년 12월 8일 월요일 아침, 어제 웨이크 섬에 날아왔던 판아메리칸 항공사의 Martin M-130 ‘필리핀 클리퍼‘ 비행정이 승객들을 태우고 잔잔한 초호 안에서 이수를 위한 준비를 서두르고 있었다.
(웨이크 섬은 날짜변경선의 서쪽에 있기 때문에 8일 월요일 아침은 바로 진주만의 7일 일요일 아침이다.)
이 비행정은 6시 55분에 괌을 향하여 이수했다.

오전 6시, 웨이크 섬의 해병대들은 기상나팔에 맞추어 기상하여 아침 식사를 하고, 텐트를 걷고, 하루의 일과를 시작할 준비를 했다.
상륙 이후 처음으로 토요일 오후와 일요일에 걸쳐 휴식을 가진 뒤라 병사들의 컨디션은 상당히 양호한 편이었다.
데브루 소령도 기상하여 면도를 했다.

오전 6시 50분, 육군항공대 연락반의 Wilson 대위가 활주로 옆에 배치되어 있던 자신의 통신용 밴에서 놀라운 내용을 들었다.
이 밴의 통신기 주파수는 기본적으로 하와이의 Hickam 비행장에 맞추어져 있었는데 갑자기 히캄 비행장에서 흥분한 목소리로 암호도 쓰지 않고 통신절차도 무시한 채

“하와이가 공습을 받고 있다.”

고 교신하는 내용이 잡혔다.
윌슨 대위는 지체없이 데브루 소령의 텐트로 달려가서 이 놀라운 소식을 전했다.
데브루 소령은 즉시 전화를 들어 커닝엄 중령을 찾았는데 연결이 되지 않자, 사령부의 통신실로 전화를 걸어 확인한 결과 진주만과 우선(priority) 등급의 통신조차 불가능해졌다는 사실을 알았다.
통신수준의 4단계(urgent, priority, routine, deferred) 중 제2단계인 우선 등급의 통신이 불가능해졌다는 것은 진주만의 통신센터가 현재 교전 중인 부대와의 통신에나 부여되는 최고등급인 긴급(urgent) 등급의 통신들을 처리하고 있다는 뜻이었다.
데브루 소령은 수화기를 내려놓은 다음 마침 눈에 띈 방송요원을 불러  “전투준비” 명령을 방송하도록 했다.

전투준비 명령이 떨어지자 해병대원들은 잽싸게 트럭에 뛰어올라서 각자 지정된 위치로 달렸다.
오전 7시 35분까지는 전원 배치가 완료되었고, 대대의 장교들이 모여 간단한 회의를 가진 후에 미리 준비했던 대로 섬에서 가장 높은 곳인 캠프1 의 물탱크 위에 설치된 감시초소에 인원을 배치했다.
트럭이 온 섬을 달리면서 각 방어진지와 포대마다 최대한의 탄약을 실어날랐고, 무기고를 뒤져서 몇 정 안되는 여분의 소총들을 찾아내어 비무장인 해군항공기술병들과 육군항공대 연락반에게 건네주었다.
각 포대에는 당시 해병대만 가지고 있던 제1차대전 당시의 디자인으로 만들어진 구식 헬멧들과 함께 가스마스크가 지급되었다.

커닝엄 중령은 전쟁이 발발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자 즉각 판아메리칸 항공사의 수상기 기지 책임자인 John B. Cooke 에게 괌을 향하여 날아가고 있는 ‘필리핀 클리퍼’ 비행정의 조종사 John H. Hamilton 에게 연락해서 웨이크 섬으로 회항하도록 요구했다.
연락을 받은 ‘필리핀 클리퍼’ 비행정은 곧 웨이크 섬으로 돌아왔고, 커닝엄 중령은 해밀턴 기장에게 와일드캣 2대와 함께 섬의 남쪽을 정찰해 줄 것을 요구했다.
즉시 비행정의 승객들과 화물이 내려지고, 장거리 정찰을 위하여 연료탱크를 가득 채웠다.
정찰은 오후 1시에 실시하기로 했다.

이제 전쟁이 발발한 이상 제211해병전투비행대의 와일드캣을 보호하는 일이 급선무로 떠올랐다.
와일드캣 중에서 4대는 이미 이륙하여 초계에 임하고 있었고, 지상에는 8대가 주기하고 있었는데, 비행대장 푸트넘 소령은 와일드캣의 보호에 관하여 어려운 선택의 기로에 서 있었다.
즉 기지 내의 띄엄띄엄 산재된 위치에 불도저를 이용하여 옹벽을 열심히 만들고 있어서 오후 2시면 사용이 가능했지만 활주로에서 그 곳까지 가는 유도로를 만들려면 최소한 24시간이 걸릴 예정이었다.
그 전까지는 지상의 와일드캣들을 가능한 여기저기 분산해 놓았으면 좋겠지만 만에 하나 울퉁불퉁한 지면 위를 이리저리 끌고 다니다가 일부가 망가지기라도 한다면 예비부품이 전혀 없기 때문에 바로 비행불능이 되고 말 것이었다.
할 수 없이 푸트넘 소령은 지상의 와일드캣들을 여기저기 분산시키지 않고 주기장소로 쓰던 공터 안에서 최대한 분산시켜 배치하기로 했지만, 공터 자체가 그리 넓지 않아서 비행기 사이의 간격은 채 100m 를 넘지 못했다.

 

(F4F 와일드캣 전투기, 승무원 : 1명, 길이 : 8.8m, 폭 : 11.6m, 최고속력 : 531km/hr, 항속거리 : 1,360km, 무장 : 12.7mm 기관총 4정, 45kg 짜리 폭탄 2발)

 

커닝엄 중령의 사령부는 민간인 거주지역인 웨이크 섬 북쪽의 캠프2에 있었고, 데브루 소령의 사령부는 섬 남쪽의 캠프1에 있었는데, 이곳이 사실상의 방어사령부였다.
비행대장 푸트넘 소령은 활주로 부근에 쳐놓은 텐트를 사령부로 썼다.

일본측에서 웨이크 섬을 공략할 임무를 맡은 것은 마샬 제도와 캐롤라인 제도에 주둔하고 있던 제4함대였다.
1941년 11월 5일에 도꾜에서 열린 어전회의 결과 미국 및 영국과 개전한다는 방침이 정해지자 트럭 섬에 있는 제4함대 사령부에도 곧 연합함대로부터의 명령이 도착했다.
그 명령서에는

“남양군도를 방어하고, 순찰하고, 해상교통로를 유지하고, 웨이크 섬을 탈취하라.”

고 되어 있었다.
제4함대 사령관이었던 이노우에 중장은 이 명령에 따라 우선 웨이크 섬에 폭격을 가하여 방어력을 약화시킨 뒤에 미국의 해병대에 해당하는 특별해군육전대 450명을 상륙시켜서 웨이크 섬을 점령할 계획을 짰다.

한편 웨이크 섬에서는 아침에 초계비행에 나섰던 4대의 와일드캣이 오전 9시에 잠시 착륙했다가 재급유를 마치고 다시 날아올랐다.
이들은 2대씩 짝지어서 3,600m 상공까지 상승한 다음, 적기가 접근할 가능성이 가장 높은 남쪽부터 초계하기 시작했다.
남쪽의 초계를 마친 와일드캣들이 북쪽으로 방향을 돌렸을 때, 1,200km 남쪽에 있는 로이 섬의 기지를 이륙한 일본의 제24항공함대 소속의 96식육상공격기(Nell) 34대가 3개의 V 자형 편대를 형성한 채 3,000m 고도로 웨이크 섬을 목표로 북상하고 있었다.
마침 그때 웨이크 섬의 남쪽에 스콜이 쏟아져서, 비구름이 불과 600m 높이까지 짙게 깔려 있었다.
일본군 폭격기들은 비구름을 뚫고 급강하하여 웨이크 섬의 남동쪽 끝인 Peacock Point, 즉 활주로가 끝나는 지점의 상공에 갑자기 나타났다.

 

(96식 육상공격기, Nell, 승무원 : 7명, 길이 : 16.5m, 폭 : 25m, 최고속력 : 375km/hr, 항속거리 : 4,400km, 무장 : 7.7mm 기관총 4정, 20mm 기관포 1문, 폭탄 800kg 또는 어뢰 1발)

 

 

피칵 포인트에 있는 E 대공포대장인 루이스 중위가 급강하 중인 일본기를 발견한 시간은 오전 11시 58분이었다.
루이스 중위는 즉시 J-line 을 통하여 공습경보를 발령했고, 이어서 일본기의 폭탄이 웨이크 섬에 떨어지기 시작했다.
원래 루이스 중위가 지휘하는 E 포대는 적기의 방위를 알려주는 방위지시기는 있지만 고도를 알려주는 고도계가 없어서, 필 섬의 D 포대가 보내주는 고도정보를 전화로 받아서 사격하게 되어 있었다.
하지만 시간이 없었으므로 E 포대는 루이스 중위의 눈짐작에 의존하여 고도를 결정하고 사격을 시작했다.
이이서 웨이크 섬의 모든 대공포 및 12.7mm 브라우닝 중기관총들이 대공사격을 시작했다.
일본기들은 와일드캣이 주기되어 있는 공터를 주로 겨냥하여 집중적으로 50kg 짜리 폭탄을 투하하고, 20mm 기관포탄과 7.7mm 기관총탄을 마구 퍼부었으며, 비행기지 건물에도 폭격을 가하여 큰 피해를 입혔다.

비행복을 입은 채로 활주로 근처의 텐트 속에서 비상대기 중이던 Robert "J" Conderman 소위와 George A. Graves 중위는 공습경보가 울리자 즉시 텐트에서 튀어나와 가장 가까운 와일드캣을 향하여 달렸다.
그레이브스 중위가 와일드캣에 도착하여 조종석을 향하여 기어오르는 순간 일본기가 투하한 폭탄 한발이 정확하게 명중하여, 기체가 불덩어리가 되면서 그레이브스 중위는 즉사했다.
콘더맨 소위는 와일드캣 바로 앞에서 일본기가 쏘아대는 7.7mm 기관총에 맞아 땅에 쓰러졌다. 이어서 일본기가 투하한 폭탄 한발이 와일드캣에 명중하여, 불타는 커다란 파편 하나가 날아와 그는 파편 아래 깔리고 말았다.
주변에 있던 해병대원들이 그를 겨우 끌어내었으나, 중상을 입은 콘더맨 소위는 그날 밤에 사망했다.
일본기들 중 일부는 필 섬 남쪽의 PAAville 지역을 폭격했다.

폭격을 시작한 지 10분 후인 12시 10분, 폭탄을 다 소모한 일본기들이 웨이크 섬 상공을 떠나 기지로 귀환하기 시작했다.
일본기들 중 8대가 대공포화에 맞아 피해를 입었으나 격추된 건 단 한 대도 없었다.

이 폭격으로 웨이크 섬은 상당한 피해를 입었다.
우선 지상에 주기되어 있던 8대의 와일드캣 중 7대가 전소하거나 완전히 박살이 나 버렸으며, 한 대는 예비연료탱크에 큰 구멍이 뚫렸으나 다른 곳은 멀쩡해서 예비연료탱크만 떼어내 버리면 비행이 가능했다.
지상에서 항공기와 통신할 수 있는 통신기도 부서져 버렸고, 각각 95,000 리터의 항공유를 저장하고 있던 2곳의 유류 저장소가 모두 폭발하여 하늘을 찌를듯이 치솟는 화염 속에서 190L 짜리 드럼통들이 마치 팝콘처럼 사방으로 튀어다녔다.
인명피해도 상당하여 2명의 조종사와 해병대 지상정비부대의 장교 1명을 포함하여 22명이 전사했고, 11명이 중상을 입었다.
민간인 건설노동자 25명도 사망했다.
또한, 활주로 부근에 설치되어 있던 정비물품 보관용 텐트가 일본기의 20mm 기관포탄에 맞아 벌집이 되는 바람에 많은 정비용 공구와 몇 개 되지도 않는 예비부품들이 망가지거나 불에 타 버렸다.

필 섬의 PAAville 도 공격을 받아서 이곳의 호텔과 판아메리칸 항공사의 비행정 접안설비 등 많은 시설물들이 불타 버렸고, 마침 초호에 정박해 있던 ‘필리핀 클리퍼’ 비행정도 23발의 20mm 기관포탄 및 7.7mm 기관총탄을 맞았으나, 다행히 비행에는 지장이 없었다.
호텔에서 일하던 차모로 출신의 종업원 5명과 판아메리칸 항공사 직원 9명이 사망했다.
‘필리핀 클리퍼’ 비행정의 승무원 2명도 부상을 입었다.
자신의 승무원들이 부상을 당하자 해밀턴 기장은 커닝엄 중령에게 웨이크 섬을 떠날 수 있도록 허락해 줄 것을 요청했다.
커닝엄 중령은 그의 요청을 받아들여 예정되었던 정찰비행을 취소하고, 웨이크 섬을 떠나는 것을 허락했다.
오후 1시 30분, ‘필리핀 클리퍼’ 비행정은 승객들과 판아메리칸 항공사의 직원들을 태우고 미드웨이를 향하여 이수했다.

공습 당시 하필이면 섬의 북쪽을 초계중이던 4대의 와일드캣 중 2대가 뒤늦게 철수하는 일본기들을 추격했으나, 요격에 실패하고, 아수라장이 된 활주로에 착륙했다.
그날 오후, Frank C. Tharin 대위가 실수로 드럼통을 쌓아놓은 곳에 와일드캣을 몰고 들어가 버렸다.
이 사고로 다행히 부상자는 없었으나, 고속으로 회전하면서 드럼통에 부딪힌 와일드캣의 프로펠러가 휘고, 엔진에 심한 진동이 생겨서 프로펠러 수리와 엔진 정비가 필요하게 되었다.
이제 제211해병전투비행단에서 비행가능한 와일드캣은 초계 비행 중이던 3대와 지상에 주기되어 있다가 예비연료탱크에 피해를 입은 1대등 총 4대에 불과했다.
단 한번의 공습으로 제211해병전투비행단은 60% 이상의 전력을 상실하고 말았다.  

일본군의 제1차 공습은 대단히 성공적이었다.
일본기들의 공습이 성공한 가장 큰 이유는 역시 비구름 속에서 갑자기 튀어나와 기습에 성공했기 때문인데, 이는 웨이크 섬에 레이더가 있었다면 불가능한 일이었다.
해병대에게 있어서 예정되었던 레이더의 설치가 늦어진 것은 참으로 아쉬운 일이었다.
레이더가 없는 이상 와일드캣을 제외하면 웨이크 섬에서 일본기의 공습을 가장 멀리서 알아낼 수 있는 방법은 높이 15m 짜리 물탱크 위에 설치된 감시초소에서 쌍안경으로 찾아내는 것 뿐이었는데 그곳에서도 수평선까지의 거리는 15km 에 불과했다.
게다가 웨이크 섬같은 환초에서는 섬을 둘러싼 얕은 산호초에 부딪히는 파도소리가 상당히 크기 때문에 아주 가깝게 접근하지 않는 한 비행기 엔진소리를 들을 수가 없었다.

일본기들이 물러가자 해병대는 즉시 피해복구를 시작했다.
사망자들과 중상자들은 즉시 캠프2 의 민간인 병원으로 후송되었다.

그곳에서는 외과전문의인 해군군의관 Gustav M. Kahn 대위가 민간인 외과전문의인 Lawton M. Shank 박사의 도움을 받아서 부상자들을 치료했다.
섕크 박사는 일본군의 제2차 공습에서 민간인의 신분으로 일신의 위험을 무릅쓰고, 불타는 병원에 뛰어들어가 의료기구와 의약품 등을 밖으로 끌어내는 비상한 용기를 보여주었다.

이후로도 그는 웨이크 섬 전투 기간 내내 비오듯 쏟아지는 포화 속에서도 시종일관 침착하고 의연한 태도로 부상자들을 치료하여 해병대원들 사이에서 많은 존경을 받았다.
그는 비록 포로생활 도중에 사망하고 말았지만, 민간인으로서는 드물게 해군십자훈장이 추서되었다.

비행이 가능한 3대의 와일드캣은 급유를 마치고, 다시 이륙했다.
전사한 Graves 중위의 뒤를 이어 기술장교(Engineering Officer)로 임명된 Kinney 소위는 조종사인 Hamilton 기술중사(Technical Sergeant)의 도움을 받아 불타거나 파괴된 와일드캣들을 일일이 뒤져가며 쓸만한 부품들을 주워 모았다.

 

(키니 소위)

 

제211해병전투비행대의 지상요원들 중 많은 수가 전사하거나 중상을 입었기 때문에 조직도 재편해야만 했다.
킨 중령이 지휘하던 해군항공대에서 해병대에게 인원들을 파견해 주었다.
방어대대에는 13명이 파견되었는데 이들은 트럭운전병, 취사병, 그리고 불침번 역할을 했다.
전투비행대에는 3명이 파견되었는데 그 중의 한 명은 해군에 입대하기 전에 항공사에서 일했던 경력이 있어서 와일드캣 정비업무에 큰 도움이 되었다.
그 외에도 민간인 건설노동자들 중 엔지니어 2명이 자원하여 전투비행대의 정비를 도왔고, 한 사람은 전투비행대의 트럭운전사로 자원봉사했다.  

해병대는 비행장 주변의 방위를 위하여 개인호와 방공호도 만들었고, 와일드캣을 보호하기 위한 옹벽 공사도 계속했다.
또한 크레테 섬에서 독일군의 공정부대가 했던 것처럼 일본군의 수송기가 웨이크 섬의 활주로에 강행착륙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하여 활주로 바닥에 45m 간격마다 다이너마이트를 묻었다.

그리고, 비행장 주변에서 강행착륙이 가능한 공터에는 전부 불도저로 깊은 도랑을 파 놓았으며, 야간에는 물론 낮에도 아군 비행기가 이착륙하지 않을 때에는 활주로에 일정한 간격으로 건설용 중기계들을 놓아두었다.

각 포대는 포의 거치 상태를 다시 점검하고, 개인호를 파고, 위장을 개선하고, 모래주머니를 더 쌓아서 방어력을 높였다.
초호로 들어가는 입구인 윌크스 수로에는 대량의 다이너마이트 위에 콘크리트 덩어리들을 적재한 해군의 거룻배를 정박시켰다.
지상에 노출된 전화선들 중 일부가 폭격에 끊어졌기 때문에 재가설해야 했고, 중요한 전화선은 2중3중으로 다시 설치하고, 가급적 땅에 묻었다.
좀 더 튼튼하고, 영구적인 전투지휘소나 엄폐호도 만들기 시작했다.

마지막으로 사망자들을 처리해야 했는데, 관이 없었기 때문에 정식으로 장례를 치를 여건이 될 때까지 캠프2에 있던 빈 의류상자에 시체를 넣어둘 수 밖에 없었다.

이 모든 일들을 폭격 직후부터 시작하여 해가 지기 전에 다 처리했다.
이미 일본군의 위력을 목격한 이후라 해병대원들의 작업속도는 비약적으로 빨라졌다.
민간인 건설자들 중에서도 일부가 자원봉사자로서 해병대원들의 작업을 도왔다.
커닝엄 중령은 전쟁이 발발한 후에도 민간인 건설노동자들에게 자신의 명령을 따르도록 강요하지 않았다.
따라서 해병대는 민간인 건설노동자들에게 자발적으로 피해복구와 방어준비를 도와줄 것을 호소했는데 민간인 건설노동자들 일부가 그 호소에 응하여 자원했다.
그들 중 일부는 인원이 모자란 대공포대나 기관총좌에 배치되었고, 대부분은 토목공사나 건설공사에서 해병대를 도왔다.
자원봉사자들의 숫자는 그리 많지는 않았으나, 일본군의 위력을 눈으로 직접 본 이후에 자진하여 해병대를 도우려고 나선 사람들인만큼 모두들 대단한 정열을 가지고 있었다.

또한 원래가 건설분야의 전문가들인데다가 자신들이 보유한 중장비들을 자유롭게 사용할 수 있어서 매우 효과적으로 작업했다.

따라서 이들은 웨이크 섬 전투 기간 내내 해병대에게 큰 도움이 되었으며, 그들 중 일부는 해병대에 자원입대의사를 밝히기도 했다.

밤이 되었지만 해병대원들은 자원봉사자들의 도움을 받아서 와일드캣을 위한 옹벽건설에 전력을 다했다.
그리하여, 다음날 새벽까지에는 지붕이 함석으로 덮인 셀터 8개를 완성하여, 비행가능한 4대의 와일드캣들을 좀 더 안전하게 보호할 수 있게 되었다. 
전날 택싱 중에 드럼통 사이에 뛰어든 와일드캣은 아직 프로펠러 수리와 엔진 오버홀 작업중이었다.

Posted by 대사(P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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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1년 4월 18일, 태평양함대 사령관 Husband E. Kimmel 대장은  당시 미해군 참모총장(Chief of Naval Operations, CNO) 이었던 Harold Raynsford Stark 대장에게 웨이크 섬에 1개 대대 규모의 해병대를 주둔시켜야 한다고 강력하게 주장하는 내용의 보고서를 제출했다.
이 보고서에 담긴 주장이 옳다고 판단한 스타크 대장은 1941년 6월 23일, 제1해병방어대대와 해병전투비행대를 웨이크 섬에 배치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완편된 해병방어대대(marine defense battalion)의 병력은 장교 43명, 사병 939 명이며, 화력으로는 5인치(127mm) 해안포 3개 포대(6문), 3인치(76.2mm) M3 대공포 3개 포대(12문), 18정의 12.7mm Browning M2 중기관총, 30정의 7.62mm 기관총 등을 보유하고 있었다.
이외에 서치라이트와 청음기도 있었고, 특히 웨이크 섬에는 SCR-268 사격통제 레이더와 SCR-270B 탐지 레이더가 하나씩 배치될 예정이었다.
그러나 미해병대의 병력 부족으로 인하여 실제로 전쟁이 일어났을 때 웨이크 섬에 배치된 제1해병방어대대는 화포와 기관총은 모두 정수를 보유하고 있었으나, 병력은 정수의 40%가 채 못되는 장교 15명, 사병 373 명뿐이었고, 레이더도 없었다.  

1941년 8월 8일, 수송선 USS Regulus 가 Lewis A. Hohn 소령이 지휘하는 장교 5명, 사병 173명으로 이루어진 제1해병방어대대의 선발대를 싣고 진주만을 출항하여, 19일에 웨이크 섬에 도착했다.
그들은 곧 웨이크 섬 남쪽의 버려진 벌목캠프가 있던 자리에 대대지휘소를 설치하여 이곳을 캠프1 이라고 불렀고, 웨이크 섬 북쪽에 있던 민간인 건설노동자들의 거주지역을 캠프2 라고 명명했다.

8월말까지에는 웨이크 섬에 길이 1,500m , 폭 60m 짜리 활주로도 완성되고, 주요 도로망도 정비되어 웨이크 섬의 풍경은 마치 미국의 소읍같은 모습으로 바뀌어갔으나 정작 중요한 방어시설의 건설은 지지부진했다.
해군항공대가 민간인 건설노동자들과 맺은 계약에는 방어시설에 대한 내용이 빠져 있었기 때문에, 해병대는 방어시설을 만드는데 민간인 건설노동자들을 동원할 수 없었음은 물론이고, 그들이 보유한 중장비도 사용할 수 없었다.
건설용 중장비가 부족한 해병대는 할 수 없이 인력으로 무거운 76.2mm 대공포와 5인치 해안포들을 이동시켜 배치하고, 삽과 곡괭이로 교통호와 개인호를 파고, 톱과 망치를 이용하여 필요한 건물들을 직접 지어야만 했다.  

1941년 10월 15일, 혼 소령은 Devereux 소령에게 지휘권을 넘기고, 웨이크 섬을 떠났다.
지휘권을 넘겨받은 직후, 웨이크 섬의 방어태세를 점검해 본 데브루 소령은 곧 자신이

“해야 할 일은 엄청나게 많은데, 마땅한 방법도 없고, 시간도 없는”

진퇴양난의 처지에 빠졌다는 것을 알았다.

 

(데브루 소령)

엎친데 덮친 격으로 웨이크 섬의 해병대에게 또다른 임무가 떨어졌다.
즉 필리핀의 방위를 강화하기 위하여 B-17 기들이 태평양을 건너 필리핀으로 파견되었는데 웨이크 섬이 중간 기착지로 결정된 것이다.
그런데, 미육군항공대는 장교 1명, 사병 4명으로 이루어진 소규모의 연락반을 파견하는 이외에 추가로 이곳에 지상근무요원을 파견할 처지가 못 되었기 때문에 기착하는 B-17 을 재급유하는 임무가 해병대에게 떨어진 것인데, 시설이 열악하여 급유방식 또한 원시적이었다.
즉 해군의 급유선이 웨이크 섬의 유류저장소에 항공유를  가득 채운 후에 떠나버리면 해병대원들이 일일이 펌프를 이용해서 그 항공유들을 190L 짜리 드럼통에 옮겨담은 다음 활주로 부근에 쌓아두었다가, B-17 이 도착하면 그 드럼통의 항공유를 다시 펌프를 이용해서 급유차에 옮겨실으면 그 급유차가 B-17에 급유하는 방식이었다.
이때 급유를 좀 더 빨리 하기 위하여 해병대원들이 직접 드럼통을 굴려 활주로에 가져가서 펌프를 이용하여 급유차 옆에서 나란히 B-17에 급유하는 일도 비일비재했다.
이런 식으로 B-17 이 도착하기만 하면 밤이든 낮이든 달려나가서 B-17 한 기당 드럼통 60개에 가까운 11,000L 씩이나 급유해야 했다.
아이러니칼하게도 이렇게 해병대가 죽을 고생을 해가며 겨우 필리핀에 보내준 B-17 들은 진주만 기습 당일 정오에 실시된 일본군의 클라크 기지와 니콜스 기지 공습에서 대부분 지상에 주기한 채 파괴되고 말았다.
해병대는 여기에 더하여 배가 도착할 때마다 하역을 돕고, 배가 초호 안에서 제대로 회전하거나 방향을 잡을 수 있도록 서치라이트를 비추어 주는 등 힘들고 시간을 많이 잡아먹는 일들에 매달려야 했다.

데브루 소령이 부임한 지 2주일쯤 지난 후인 1941년 11월 2일, 진주만으로부터 수송선 USS Castor 를 타고 온 9명의 장교와 200 명의 사병으로 이루어진 제1해병방어대대 소속 장병들이 추가로 도착하여 웨이크 섬의 해병대 병력은 장교 15명, 사병 373 명으로 늘어났다.

1941년, 11월 29일, 웨이크 섬의 상공을 지켜줄 제211해병전투비행대(VMF-211)를 지원하기 위하여 Walter L.J. Bayler 소령이 인솔하는 50명의 지상정비요원들이 장비와 함께 수상기 모함인 USS Wright 호에 실려 웨이크 섬에 도착했다.
그리고, 라이트 호의 항해장교였던 Winfield S. Cunningham 해군중령이 상륙하여 데브루 소령에게서 웨이크 섬의 사령관직을 인수했다.

 

(커닝햄 중령)


또한 웨이크 섬을 기지로 하는 장거리 정찰을 위하여 해군의 PBY Catalina 기를 배치하기로 하여 이의 지원을 위하여 해군항공대 소속 8명의 장교와 58명의 기술병이 Campbell Keene 해군중령의 지휘 하에 상륙했다.
실제로 해군의 카탈리나 기 12대가 12월 2일에 웨이크 섬에 도착하여 장거리 정찰활동을 폈으나, 제211해병전투비행대가 도착한 다음 날인 12월 5일에 웨이크 섬 남쪽에 대한 정찰활동을 마지막으로 모두 철수해 버렸다.

웨이크 섬에 배치될 제211해병전투비행대 소속 조종사들은 11월 27일, 겨우 옷만 갈아입을 여유밖에 없을 정도로 갑작스럽게 이동명령을 받았다.
그들은 즉시 새로 수령한 F4F-3 Wildcat 을 몰고 오아후 섬의 Ewa 해병대 비행장을 이륙, 진주만의 Ford 섬에 있는 해군 비행장으로 이동하여, 다음날인 28일 아침 일찍 USS Enterprise 의 비행갑판에 착함했다.
원래 해병대 항공기가 해군의 항공모함에 이착함하는 일은 정규적인 훈련의 일부였으나, 제211해병전투비행대의 조종사들은 그들의 임무에 대하여 사전에 전혀 들은 바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이번에는 상당히 중요한 임무를 맡게 되리라고 예상하고 있었다.
즉 28일 아침에 포드 섬의 비행장을 이륙할 때 와일드캣 한 기의 시동장치가 말썽을 일으켜서 이륙을 못했는데, 그러자 즉각 엔터프라이즈에서 Devastater 뇌격기를 한 대 보내와서 그 조종사는 뇌격기의 뒷좌석에 타고, 엔터프라이즈에 착함했다.
그런데 그곳에는 이미 엔터프라이즈의 전투항공대인 VF-6에서 차출된 완전 신품인 와일드캣 하나가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제211해병전투비행대 소속의 조종사들은 훈련도 충실하게 받은 편이었고, 웨이크 섬으로 가는 도중에 엔터프라이즈에서도 이들에게 최대한으로 신경을 써 주어서, 조종사들과 와일드캣들의 상태는 최상이었다.
다만 이들은 와일드캣을 수령한지 얼마 되지 않았기 때문에 이 신형 비행기에 걸맞는 전술이나 사격법등을 연마할 시간이 절대적으로 부족했다.

1941년 12월 4일 아침, 엔터프라이즈가 웨이크 섬에서 마중나온 카탈리나 기와 만나자 제211해병전투비행대 소속 12기의 와일드캣은 즉시 엔터프라이즈를 이함하여, 2시간 후에 웨이크 섬의 활주로에 착륙했다.
배일러 소령이 지휘하는 50명의 해병대 지상정비요원들은 제211해병전투비행대를 지원하기 위하여 최선을 다했지만 웨이크 섬 비행장의 상황은 대단히 열악했다.
웨이크 섬이 원래 카탈리나 기 같은 장거리 초계비행정의 기지로서 건설되었기 때문에 다른 종류의 항공기를 지원하는 설비는 상당히 원시적인 편이었다.

활주로의 길이는 충분했으나, 폭이 좁아서 한번에 한 기씩만 이착륙을 할 수 있었으며, 적의 공습에서 비행기를 보호할 수 있는 셸터나 방호벽 등이 전혀 없었고, 주기장소는 활주로 부근의 공터 이곳저곳에 철판매트를 몇 장 깔아놓은 곳에 불과했는데, 유도로의 끝에 멈춤 표지판조차 없었다.
공터 자체도 그리 넓지 않았고, 일부 구역은 경사져 있어서 잘못하면 비행기가 미끄러져 내려가서 크게 부서질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급유시설은 B-17 에 급유할 때와 마찬가지였고, 해병대의 지상정비요원들 중 와일드캣을 잘 아는 사람은 거의 없는데다가 정비 매뉴얼도 없었으며, 예비부품이 전혀 없어서 중요한 부품에 조그만 손상이나 말썽이 생겨도 비행이 불가능해질 상황이었다.

게다가 기지에 보관되어 있던 45kg 짜리 폭탄의 형태가 와일드캣의 폭탄걸이와 맞지 않았다.
비행대의 무장담당장교였던 Freuler 대위가 고민 끝에 와일드캣의 폭탄걸이를 개조했다.
시설과 장비가 불충분한 상황에서 임시변통으로 개조했기 때문에 조종사들이 보기에 폭탄이 매달린 모양이 영 불안하게 보였지만 실전에서 사용해 본 결과 아무 문제없이 잘 작동했다.
그리하여 웨이크 섬의 와일드캣들은 12월 8일부터 1기당 45kg짜리 폭탄 2발씩을 운용할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이런 문제들 중 무엇보다도 조종사들이 와일드캣에 익숙하지 못하다는 점이 가장 큰 문제라고 판단한 제211해병전투비행대장 Paul A. Putnam 소령은 사령관 커닝엄 중령에게 허가를 받은 후 즉시 와일드캣들을 초계비행에 내보내기 시작했다.

 

(푸트넘 소령)


이 초계비행은 아침과 저녁에 실시되며 한번에 4대씩 이륙하여 웨이크 섬의 주변 80km 정도까지 정찰하는 방식이었는데 이때 조종사들은 정찰과 동시에 항법 및 계기훈련을 병행했다.
웨이크 섬의 비행장에는 귀환하는 조종사들에게 도움이 될 수 있는 전파식 귀환유도장비나 항법보조장비 등이 전혀 없었기 때문에 이런 훈련은 상당히 중요한 것이었다.

한편,1941년 12월 6일 현재 웨이크 섬의 지상 방어태세를 살펴보면,

우선 5인치(127mm) 해안포 3개 포대(6문)와 3인치(76.2mm) M3 대공포 6개 포대(12문)는 해병대원들이 하루에 12시간씩 일하면서 고생한 덕분에 모두 제자리에 배치되어 있었다.
이 포대들 중 필 섬에 있던 B포대(5인치 해안포)와 D포대(76.2mm 대공포)는 포대 주위에 모래주머니를 쌓아서 어느 정도의 방어력을 갖추고, 위장되어 있었으며, D포대의 경우 땅을 파서 1,400 발의 76.2mm 대공포탄을 저장할 공간을 가지고 있었다.  
다만 해병대의 병력이 정수에서 크게 모자랐기 때문에 대공포대 중 윌크스 섬에 있던 F포대는 비어 있었고, D포대에는 정원인 8명 대신 6명이 배치되어 있어서 인원이 완전히 배치된 곳은 E포대 뿐이었다.
이들 중 오직 D포대만이 완전한 사격통제장치를 가지고 있었고, 웨이크 섬에 있던 E 포대는 방향지시기는 있으나, 고도계가 없어서 D포대로부터 전화로 적기의 고도에 관한 정보를 듣고 사격하도록 되어 있었다.

 

(76.2mm M3 대공포)


인원 부족은 기관총좌도 마찬가지여서 18정의 12.7mm Browning M2 중기관총이나 30정의 7.62mm 기관총좌 중 절반 이상이 운용에 필요한 최소인원을 채우지 못했다.
3개소의 5인치 해안포대들만이 그나마 인원이 완전히 배치되어 상태가 가장 양호했으나, 이곳에서도 공구, 예비 부품, 기타 자잘한 소모품들의 부족 현상이 있었다.
그리고, 5인치 해안포들은 설치된 이후 단 한발도 시험사격을 실시한 적이 없었다.
그럴 여유가 없었다.

각 포대들과 중요 지점, 그리고 사령부 사이에는 모두 전화선들이 가설되어 있었으며, 특히 중요한 곳에는 2중 3중으로 가설되었으나, 모두 지하에 묻지는 못하여서, 적의 포격이나 폭격에 의하여 끊어질 위험이 있었다.
그리고, 전화선 중 'J-line' 이라고 불리는 회선이 있어서, 회선 상의 누군가가 J-line 으로 전화를 하면, 모든 포대와 중요지점 및 사령관 등 회선에 연결된 모든 지점에서 동시에 들을 수 있었다.
2대의 대공서치라이트가 윌크스 섬에 배치되어 있었으나, 청음기가 없어서 그 효과는 반감되었다.

 

(웨이크 섬의 방어시설)

민간인 1,221 명을 제외하고, 웨이크 섬의 총 병력은 38명의 장교와 485명의 사병이었다.
그 중에서 제1해병방어대대가 장교 15명, 사병 373명, 제211해병전투비행대 소속 조종사와 지상정비요원들이 장교 12명과 사병 49명, 미해군항공대 소속 지상요원들이 장교 10명, 사병 58명, 미육군항공대 소속 연락반원들이 장교 1명, 사병 4명, 그리고 11월 26일에 웨이크 섬에 들렀던 잠수함 Triton에서 상륙한 수병 1명 등이었다.
미육군항공대 소속 연락반원들은 B-17 의 필리핀 파견과 관련하여 연락업무를 위하여 웨이크 섬에 파견된 인원들이었다.
이들 중 해군과 육군 소속 군인들은 비무장이었으므로, 실제로 전투에 투입될 수 있는 인원은 제1해병방어대대와 제211해병전투비행대 소속의 장교 27명, 사병 422명등 총 449명이었다.

보급상황을 보면 비록 일부 품목의 결핍은 심각했지만 전반적으로는 양호한 편이었다.
병사 개개인이 각각 90일분의 비상식량을 가지고 있었고, 창고에는 따로 6개월분의 식량이 저장되어 있었다.
웨이크 섬에는 물이 없었지만 빗물저장장치와 충분한 숫자의 증류장치가 있었기 때문에 물의 공급은 넉넉했다.
탄약과 항공기용 무장의 비축량은 단기간의 방어전을 치르기에는 충분했으나, 장기간의 방어전을 치르기에는 무리였다.
의료지원체계 또한 망망대해의 고도라는 지리적 위치를 생각하면 양호한 편이었다.
캠프1에 기본적 설비를 갖춘 해군의무실이 있어서 의과전문의인 해군군의관이 상주하고 있었고, 캠프2에는 2개의 병실에다가 격리실, 수술실까지 완벽한 설비를 갖춘 민간인 건설노동자들을 위한 병원이 있어서 그곳에도 역시 민간인 외과전문의가 한명 상주하고 있었다.

11월이 되자, 진주만으로부터 적의 공격에 대비하라는 경고가 들어오기 시작했다.
데브루 소령은 경고를 받자 민간인 건설노동자들에게 건설작업의 우선순위를 군사시설과 방어시설로 전환해 달라고 요청했지만 거절당했다.
이때부터 해병대는 병사들이 취침하는 각 텐트마다 개인탄약을 분배했고, 각 포대마다 유사시 즉각 사용할 수 있는 포탄의 재고량을 증가시키기 시작했다.

토요일이었던 12월 6일, 데브루 소령은 대대 전체가 참가하는 훈련을 실시했다.
훈련 결과에 비교적 만족한 그는 상륙 이후 일주일내내 평일과 같이 진행되던 해병대의 일과를 바꾸어서, 토요일 오후와 일요일은 휴식을 취하도록 명령을 내렸다.
그리하여 그날 오후부터 웨이크 섬의 해병대는 처음이자 마지막인 토요일 오후와 일요일의 느긋한 휴식을 즐길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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웨이크 섬 전투(Battle of Wake Island)는 진주만 기습 직후인 1941년 12월 8일부터 23일까지 웨이크 섬과 그 주변에서 벌어진 미해병대와 일본군 사이의 전투를 말한다.
이 웨이크 섬 전투에서 449명으로 이루어진 미해병대는 열세한 병력과 장비에도 불구하고, 놀라운 투혼과 강력한 전투력을 발휘하여 12월 11일에 이 섬에 상륙하려던 일본군의 기도를 좌절시키면서 그들에게 태평양 전쟁 개전 이래 최초의 패배를 안겨 주었다.
결국 웨이크 섬의 미해병대는 미해군의 구원이 너무 늦어짐에 따라 12월 23일에 실시된 일본군의 제2차 공격에서 엄청난 전력의 열세를 극복하지 못하고 무릎을 꿇고 말았지만, 전투 기간 내내 그들이 보여주었던 용맹성은 일본군의 진주만 기습으로 공황상태에 빠져있던 미국의 일반 국민들과 미군 장병들에게 큰 감명을 주었다.

1. 역사적 배경  

웨이크 섬(Wake Island)은 호놀룰루에서 서쪽으로 약 3,700km, 괌에서 북쪽으로 약 2,400km 떨어진 북태평양에 위치하고 있다.
이 섬은 환초(Atoll)로서 Wake, Wilkes, Peale 이라는 이름을 가진 3개의 섬이 최장직경 1km 가량의 작은 초호(lagoon)을 둘러싸고 있다.
따라서 엄밀하게 말하면 웨이크 환초와 웨이크 섬은 서로 다른 의미이나, 일반적으로 웨이크 환초를 의미하는 용어로 웨이크 섬이 널리 쓰이고 있는 관계로 (이건 영어로도 마찬가지다. 대부분의 기술에서 웨이크 섬 전투는 Battle of Wake Island 로 표기하지 Battle of Wake Atoll 로 표기하지는 않는다.)앞으로 웨이크 환초도 뭉뚱그려서 웨이크 섬으로 부르도록 하겠다.
웨이크 섬의 총 면적은 약 6.5 제곱킬로미터, 표고는 가장 높은 곳이 해발 6m 정도이다.

웨이크 섬을 처음 발견한 서양인은 Los reyes 와 Tos Santos 라는 두 척의 배를 이끌던 스페인의 탐험가 Álvaro de Mendaña de Neyra 이다.
1568년 10월 26일, 식량과 물을 조달하기 위하여 이 섬에 상륙했던 그는 ‘걸어서 한 바퀴 도는데 8시간 정도 걸리는 불모의 섬'  인 이곳에는 물과 식량이 전혀 없다는 것을 깨닫고, 이 섬에 ‘San Francisco'  라는 이름을 붙여서 지도에 기입하고는 서둘러 떠났다.

1796년에 영국의 무역선 Prince William Henry 호를 타고 이곳을 방문한 William Wake 선장이 자신의 성을 따서 웨이크 섬이라고 명명했고, 이후 이 명칭으로 불리게 되었다.

1840년 12월 20일에 미국의 탐험대를  이끌던 Charles Wilkes 준장이 웨이크 섬에 도착하여, 환초를 이루는 세 개의 섬들과 초호를 조사한 후, 웨이크 섬보다 작은 두 개의 섬에 자신의 성과 탐험대 소속의 박물학자 Titian Peale 의 성을 따서 윌크스 섬과 필 섬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웨이크 섬이 최초로 유명해지게 된 계기는 Libelle 호 침몰사건이다.
1866년 3월 4일, 샌프란시스코를 떠나 호놀룰루를 경유하여 홍콩으로 가던 독일 선적의 650 톤급 범선 리벨 호가 항해 중에 폭풍우를 만나 웨이크 섬의 산호초에 부딪혀서 침몰했다.
Tobias 선장을 비롯한 30여명의 승객들이 웨이크 섬에 상륙했는데 그 중에는 세계적인 오페라 가수인 Anna Bishop 과 그녀의 남편인 Martin Shultz, 그리고 영국오페라 단원 3명이 포함되어 있었다.
섬에 상륙한지 21일째 되던 3월 25일, 그들은 리벨 호에 실려있던 대형보트와 그보다 소형인 구명정에 나누어 타고 섬을 떠났는데, 오페라 단원들과 슐츠 씨 및 다른 승객들을 태운 대형보트는 4월 8일에 괌에 도착하였으나, 토비아스 선장이 인솔한 구명정은 도중에 실종되고 말았다.
토비아스 선장은 웨이크 섬에 머물 때 금화와 보석 등 당시 가치로 약 15만 달러에서 30만 달러에 달하는 보물을 이곳에 묻었다.
이후 최소한 5 척 이상의 선박들이 그 보물을 찾기 위하여 웨이크 섬을 찾았으나 모두 보물을 찾는데 실패했고, 현재까지도 보물의 행방은 묘연하다.
리벨 호의 침몰과 웨이크 섬의 보물에 관한 이야기는 당시 전 세계의 많은 신문에 소개되어 사람들의 비상한 관심을 끌었다.
리벨 호의 잔해는 1940년까지도 남아 있었다고 한다.

1899년 1월 17일, 웨이크 섬은 정식으로 미국령이 되었다.

1922년에 잠수모함인 USS Beaver 가 웨이크 섬을 조사했고, 이듬해에는 소해함 USS Tanager 가 예일 대학교와 호놀룰루에 있는 비숍 기념관의 후원을 받는 과학자들을 싣고 이곳에 와서 7월 27일부터 8월 5일까지 10일간 과학적인 데이터를 모으고, 환초를 이루는 섬들의 면적을 측량하는 등 탐사를 했다.

1934년, 미행정부의 행정 명령에 따라 웨이크 섬의 관할권은 미해군에게 귀속되었다.

1935년, Pan American Airways 가 하와이에서 중국, 필리핀, 괌 등으로 향하는 항공기의 중계기지로서 웨이크 섬의 가치에 주목하여, 이곳에 여객용 대형 비행정을 위한 수상기 기지를 건설할 수 있도록 미해군에 허가를 요청했다.
해군 측에서는 이 계획을 허가하면서 이 기회에 해군기지도 만들기로 하여, 수송선 USS Nitro 를 파견하였으나, 섬에 상륙하려던 니트로의 보트 2대가 해상에서 실종되는 사고가 나면서 해군기지 건설 계획은 흐지부지하다가 결국 중단되고 말았다.

하지만 판아메리칸 항공사의 기지 건설은 착착 진행되어 수송선 North Haven 호가 1935년 5월 5일에 윌크스 섬에 도착하여 인원과 자재의 양륙을 시작했고, 곧이어 필 섬에 수상기 기지가 건설되어, 그해 8월 9일에는 판아메리칸 항공사 소속의  Martin M130   '필리핀 클리퍼' 대형비행정이 처음으로 웨이크 섬 부근의 해상에 착수하여 초호에 들어왔다.

 

(웨이크 섬의 초호에서 택싱 중인 필리핀 클리퍼 비행정)

 

당시 판아메리칸 항공사의 건설노동자들은 필 섬의 남쪽에 PAAville(Pan Amerian Airways village) 이라고 불리는 거주지역을 건설했는데 이것이 웨이크 섬의 첫번째 주거지였다.
PAAville 에는 작지만 호텔도 있었고, 소수의 가축을 기르고, 수경재배로 약간의 채소도 생산했으나, 대부분의 식량과 물, 그리고 생필품은 외부로부터의 보급에 의존했다.

1940년 12월 26일, 수송선 USS William Ward Burrows 호가 웨이크 섬에 해군항공대를 위한 수상기 기지와 지상 비행장을 건설할 공병대 80명과 2,000 톤의 물자를 싣고 진주만을 떠나서, 41년 1월 9일에 웨이크 섬에 도착했다.  
이렇듯 웨이크 섬에 군용비행장을 건설하게 된 배경에는 하와이, 괌, 웨이크 섬을 비롯한 태평양과 대서양의 미국 영토들을 요새화할 것을 주장한 헵번 보고서의 영향이 컸다.
이 보고서는 웨이크 섬의 가치를 높게 평가하면서, 향후 3년간 750만 달러를 들여서 이곳을 장거리 정찰기의 기지로서, 그리고 아시아 지역에 항공력을 전개할 때 중간기착지로서 개발할 것을 강력하게 권고했다.

이 권고에 따라 웨이크 섬의 기지화가 시작되었지만, 아직까지는 전시가 아니었기 때문에 평화시의 예에 따라서 막사와 비행정 접안 시설, 부두 등의 건설이 우선이고, 방어시설은 그 다음으로 우선순위가 떨어지는 형편이었다.
그리고 해군항공대는 PAAville 의 민간인 건설노동자들과 따로 계약을 맺어서, 버로우 호에 타고 상륙한 80명의 해군공병대와 함께 3개의 섬 중 가장 큰 웨이크 섬에 활주로와 주요 도로 및 각종 비행장 시설들을 건설했다.
이 민간인 건설노동자들은 해군항공대로부터 의뢰받은 공사를 위하여 PAAville 의 맞은 편인 웨이크 섬 북쪽에 나중에 해병대가 캠프2로 부르게 되는 민간인 거주구역을 따로 건설했다.
그리하여 전쟁이 발발했을 때 민간인 건설노동자들은 모두 캠프2 로 옮겨와 있었고, PAAville 에는 판아메리칸 항공사의 직원들과 호텔에서 일하는 인력만이 남아 있었다.

웨이크 섬 전투 당시 PAAville과 캠프2 에 거주하던 민간인의 수는 판아메리칸 항공사 직원 66명을 포함하여 총 1,221 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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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 에필로그

 

홍콩을 점령한 일본은 군정을 실시했는데 중국본토와 구별해 직접 통치했다.

최초의 홍콩총독은 제23군 사령관 사카이 다카시 중장이었고 1942년 1월 19일에 이소가이 렌스케 장군이 홍콩총독으로 임명되어 1944년 12월 24일까지 재임했으며 마지막 총독은 다나카 히사가즈 장군이었다.

이소가이 총독은 홍콩에서 일본군의 군표를 유통시켰는데 이것이 심각한 인플레이션을 일으켰다.

 

홍콩전투에서 포로가 된 영국군 병사들은 1942년 9월부터 일본으로 이송되어 강제 노동에 처해졌다.

1942년 9월 1일에 약 700 명의 포로가 처음으로 일본으로 이송되었다.

9월 25일에는 1,834명의 포로가 778명의 일본군과 함께 리스본마루에 실려 일본으로 향했다.

리스본마루는 10월 1일에 상해 부근 해상에서 미국잠수함 그루퍼가 쏜 어뢰를 맞고 침몰했다.

이 사고로 828명의 포로가 사망했는데 선창에 갇혀있던 포로들이 몰래 만든 칼로 빗장을 열고 탈출함으로써 몰살을 면했다.

리스본마루에 타고 있던 일본군들은 가라앉는 뱃전에 버티고 서서 탈출하는 포로들에게 사격을 가했다. 

살아남은 포로들은 일본배에게 구조되어 상해에 상륙했다가 10월 7일에 신세이마루와 워싱턴마루에 실려 일본으로 이송되었다.

일본에 도착한 포로들은 고베와 오사카에 나눠 수용된 다음 강제노동에 처해졌다.

종전시까지 기아와 질병으로 290명이 사망하여 리스본마루에 탔던 1,834명의 포로들 중 716 명만이 살아남았다.

 

(리스본마루. http://en.wikipedia.org/wiki/Lisbon_Maru)

 

1945년 8월 15일에 일본이 항복함으로써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났다.

1943년에 열린 카이로 회담의 결정에 의하여 홍콩의 일본군은 장개석 총통에게 항복하게 되어 있었으나 국민당군은 당장 홍콩에 들어갈 입장이 되지 않았다.

반면 영국은 중국군이 홍콩을 점령하고 주권을 주장하기 전에 함대를 파견하여 일본군의 무장을 해제시키려고 했다.

장개석 총통은 영국함대가 중국군보다 먼저 홍콩에 들어가지 못하게 해달라고 트루먼 대통령에게 요청했으나 거부당했다.

항공모함 5척, 전함 2척, 순양함 3척, 구축함 6척 등 총 55척으로 이루어진 영국함대는 제11항모전단사령관 세실 하코트 소장의 지휘 아래 1945년 8월 27일에 필리핀 수빅만을 떠나 29일 오후 3시에 홍콩 앞바다에 도착했다.

홍콩주둔 일본군의 항복을 위한 외교적인 최종 조율이 진행되는 동안 소해정들이 빅토리아 항을 소해하고 영국해병대는 주변의 작은 섬에 상륙하여 자살보트들을 찾아내어 파괴했다.

그동안 항공모함 일러스트리어스에서 이함한 아벤저 뇌격기가 계덕 비행장에 착륙하여 일본 측의 연락장교를 태우고 돌아왔다.

 

다음날인 8월 30일 오후에 영국함대는 소해정을 선두로 잉어문 해협을 통하여 빅토리아 항에 진입했다.

영국함대가 접근하자 자살보트 3대가 뛰쳐나왔으나 전투초계기들의 기총소사를 받고 격침되었다.

곧 영국해병대가 상륙하여 일본군을 무장해제시키고 심수보의 포로수용소를 해방시켰다.

 

홍콩주둔 일본군의 항복 조인식은 1945년 9월 16일에 있었다.

국민당에서 대표가 파견되어 조인식을 주재했으나 이미 영국군이 확고하게 지배하고 있는 홍콩에서 그의 역할은 얼굴마담일 뿐이었다.

이리하여 영국은 홍콩을 다시 차지했으며 1997년 7월 1일에 중화인민공화국으로 주권이 넘어갈 때까지 홍콩은 영국의 식민지로 남았다.

 

홍콩을 점령한 제38사단은 1942년 1월 4일에 제16군에 편입되어 네덜란드령 동인도제도 전투에 참가했으며 10월에는 과달카날 전투에 투입되어 큰 피해를 입었다.

성문보를 점령했던 와카바야시 중위도 1943년 1월 14일에 과달카날에서 전사했다.

과달카날에서 철수한 후 보병 제229연대는 뉴조지아 섬 전투에 참가했다.

이후 제38사단은 라바울을 방어하다가 종전을 맞이했다.

제38사단이 떠난 후 홍콩에 주둔한 일본군은 독립보병 제67, 제68 및 제69연대였다.

 

일본의 홍콩총독들은 모두 전후에 전쟁범죄로 단죄를 받았다.

초대 총독인 사카이 중장은 사형선고를 받고 1946년에 총살당했다.

2대 총독인 이소가이 장군은 종신형을 선고받고 복역하다가 1967년에 석방되었다.

마지막 총독인 다나카 장군은 중국에서의 전쟁범죄로 사형선고를 받고 1947년에 처형되었다.

 

제38사단장 사노 타다요시 중장은 사단을 이끌고 네덜란드령 동인도제도와 과달카날에서 싸웠으며 종전 직전인 1945년 7월에 센다이에서 병사했다.

 

제38사단의 보병단장 이토 다케오 소장은 네덜란드령 동인도 제도와 과달카날에서 싸웠으며 독립혼성 제40여단장으로 뉴아일랜드 섬을 수비하다가 종전을 맞았다.

전쟁범죄로 1946년 5월에 라바울의 호주군 법정에서 사형을 언도받았으나 10월에 무죄를 인정받고 석방되었으며 1965년에 75세를 일기로 사망했다.

 

홍콩전투 당시 제2견지함대사령관이었던 니이미 마사이치 해군중장도 전쟁에서 살아남았다.

84세에 제2차 세계대전사를 출간하기도 한 니이미 제독은 106세까지 장수를 누리고 1993년에 사망했다.

니이미 중장의 기함이었던 경순양함 이스즈는 솔로몬 제도와 레이테만에서 싸웠으며 1945년 4월 7일에 자바해에서 미국잠수함에게 격침되었다.

 

(일본해군의 경순양함 이스즈. 자세한 내용은 여기로. http://en.wikipedia.org/wiki/Japanese_cruiser_Isuzu)

 
마크 영 총독은 종전과 동시에 석방되었으며 1946년에 다시 홍콩총독으로 임명되었다.
그러나 영 총독은 홍콩에 자치권을 부여하는 문제로 영국정부와 갈등을 빚다가 1947년에 해임되었고 89세를 일기로 1974년에 사망했다.

 

 

크리스토퍼 몰트비 소장은 전쟁 기간 동안 홍콩, 상해, 대만을 거쳐 심양의 수용소에서 종전을 맞았다.

영국에 돌아온 몰트비 소장은 1946년에 퇴역했고 90세를 일기로 1980년에 사망했다.

 

동부여단장 세드릭 월리스 준장은 석방 후 캐나다로 이민가서 사업가로 변신했다.

뱅쿠버에서 살던 월리스 준장은 101세를 일기로 1996년에 사망했다.

 

캐나다 왕립소총대대장 윌리엄 홈 중령은 종전 이후 캐나다군에 돌아가 준장으로 퇴역했다.

제2왕립스코트대대장 사이먼 화이트 중령은 석방되어 영국에 돌아왔으나 곧 암으로 사망했다.

진책 소장은 중국으로 돌아간 후 국민당에서 일했고 종전 이후 광주 시장을 맡기도 했으나 1949년에 자택에서 수면제를 먹고 자살했다.

 

- 참고문헌 및 웹사이트

 

<대동아전사-제6권 태평양전쟁> 오바다 아츠시로 지음, 유준수 옮김, 한양문화사, 1974년

<대동아전쟁비사-제5권 중국편> 한국출판사, 1971년

 
<Hong Kong 1941-45, First strike in the Pacific War> Benjamin Lai, Osprey, 2014
<History of The second World War, The War Against Japan, Vol.1 The Loss of Singapore> Major-General Woodburn Hirby, Naval & Military Press, 1968

 

 

http://www.wikipedia.org/

http://blog.naver.com/mirejet (도위창님 블로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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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 총평

 

홍콩이 개전 18일 만에 함락되었다는 소식은 영국 조야에 큰 충격을 주었다.

윈스턴 처칠 수상과 전시 내각은 버린 카드인 홍콩이 언제까지나 버틸 것이라고 믿지는 않았으나 그렇게 일찍 항복할 줄은 몰랐다.

 

홍콩전투에서 일본군은 정확한 정보에 입각하여 주도면밀하게 준비했다.

일본군은 간첩들의 활약으로 전투가 시작되기 전에 영국군의 방어태세를 파악하고 약점을 이용할 준비를 갖출 수 있었다.

홍콩 전투를 18일 만에 성공적으로 마무리지을 수 있었던 배경에는 정보전의 승리가 있었다.

 

일본군의 전술에는 새롭거나 참신한 요소는 없었다.

중일전쟁에서와 마찬가지로 일본군 지휘관은 주도권을 중시했으며 병사의 감투정신에 크게 의존했다.

 

일본병사는 뛰어난 전투원이었다.

그들은 잘 훈련되었으며 대부분 중일전쟁에서 실전경험을 가지고 있었다.

억세고 야간전투에 능숙한 일본병사는 평지 뿐 아니라 산악전에도 익숙했으며 전장의 지형지물을 교묘하게 활용했다.

경무장한 일본병사는 빠르고 조용하게 기동했으며 용맹함과 교활함을 함께 갖추고 있었다.

영국군은 성문보를 점령하거나 홍콩섬에 최초로 상륙한 일본군이 특별강습부대라고 생각했으나 실제로는 일반 보병이었다.

 

일본군의 보병 숫자는 영국군을 압도하지 못했으나 포병은 압도적으로 우세했고 제공권을 완전히 장악했다.

일본제38사단은 잘 훈련되고 실전경험을 가진 병사들로 구성된 균질적인 조직이었다.

반면 영국군의 주력은 대부분 주둔 임무를 맡고 있던 병력들로서 실전경험은 커녕 전투훈련조차 제대로 받지 못했다.

홍콩수비대는 장비도 들쭉날쭉하고 국적이나 출신도 다양한 여러 잡다한 부대들을 급하게 끌어모은 즉흥적 조직에 지나지 않았다.

 

일본군은 기관총에 대량의 철갑탄을 보급했는데 철갑탄은 특화점이나 엄폐호에 달려 있는 철제문을 뚫을 수 있어서 위협적이었다.

소형 박격포의 일종인 척탄통은 전선 가까이에서 운용할 수 있었으며 보다 구경이 큰 박격포들 또한 효과적이었다.

일본군은 박격포탄의 보급에 중국인 인부들을 동원했다.

반면 영국군의 박격포는 도착이 늦어 훈련할 시간이 없었고 포탄도 절대적으로 부족했다.

일본군은 기존의 사단포병보다 크게 증강된 포병을 효율적으로 사용하여 영국군 포병을 압도하고 필요한 화력지원을 제공했다.

 

홍콩이 예상보다 빨리 함락된 데에는 구룡반도를 일찍 잃은 것도 한 원인이 되었다.

일본군 공병은 영국군의 예상보다 빨리 심천강에 도하 준비를 완료하고 대군을 도하시켰다.

구룡반도의 영국군은 가까스로 장비와 시설을 파괴할 수 있었으나 일본군은 어디에 어떤 시설이 있고 수리하려면 어떤 자재가 얼마나 필요한지를 정확하게 알고 미리 준비했다.

 

홍콩 전투에서 일본군의 통신, 수송 및 기타 지원부대들은 장비를 제대로 갖추고 잘 조직되어 임무를 완수했다.

반면 영국군의 차량은 중국 민간인들이 운전하는 경우가 많았는데 민간인 운전사들은 규율이 부족하여 자주 도망쳤다.

또한 수송용 노새가 부족하여 언덕 지형에서의 보급에 곤란을 겪었다.

 

홍콩전투에서 일본군은 항공력을 유감없이 과시했다.

제공권을 완전히 장악했기 때문에 폭격기는 전투기의 호위를 받을 필요가 없었고 지상의 일본군이 자신들의 위치를 조종사에게 알리기 위하여 표식을 설치해도 영국기의 공습을 받을 위험이 없었다.

또한 영국군의 대공포 세력이 미약하여 저공 폭격이나 탄착 관측 또한 자유롭고 안전하게 실시할 수 있었다.

이런 좋은 조건아래 일본기들은 맹활약했다.

고공폭격은 정확했으며 저공폭격 및 기총소사도 효과적이었다.

일본군의 항공력을 폄하하고 있던 영국군은 독일공군이 공습을 지도하고 있는 것이 틀림없다고 생각했다.

 

제공권의 상실은 필연적으로 제해권의 상실로 이어졌다.

애당초 홍콩의 영국해군 세력은 일본함대에 대들기 힘든 수준이었지만 제공권을 상실하면서 해안포의 사정거리 안에서 홍콩섬 주변을 초계하는 일도 불가능해졌다.

제해권이 없는 상황에서 홍콩섬은 기습적인 상륙위협에 시달렸으며 수비대의 배치에도 제약이 따랐다.

몰트비 소장은 상륙 위협이 가장 큰 북해안에 전력을 집중하는 대신 기습상륙을 염려하여 전 해안선에 걸쳐 병력을 분산 배치할 수 밖에 없었다.

 

(1941년 12월 18일 아침 현재 홍콩 섬의 방어태세.  출처 : Hong Kong 1941-45, P.51)

 
제해권의 상실 때문에 구룡반도의 방어도 약해졌다.

 

구룡반도의 3개 대대에 1-2개 대대라도 추가되었으면 훨씬 오랫동안 버틸 수 있었을 것이었다.

그러나 제해권을 잃어 홍콩섬이 기습 상륙의 위협에 놓여있는 상황에서 구룡반도에 병력을 더 파견할 수는 없었다.

 

영국군의 포정들은 일본군의 공습에 노출되어 활동에 큰 위협을 받으면서도 지상군 지원에 나름대로 활약했다.

어뢰정들은 무장이 적절하지 못했다.

주무장인 어뢰는 일본군이 해협횡단에 사용하는 주정들을 공격하는 데에는 무용지물이었으며 이런 임무에 사용할 수 있는 무기는 기관총 5정뿐이었다.

 

구룡반도의 전투에서 성문보 상실은 분기점이었다.

성문보를 잃으면서 진드링커스 선에 배치된 영국군 전체가 위험에 빠지자 서둘러 후퇴할 수 밖에 없었다.

영국군의 급속한 후퇴는 일본군으로서도 뜻밖이었다고 한다.

 

일본군의 홍콩섬 상륙은 성공적이었다.

제38사단은 달없는 밤, 만조 그리고 불타는 저유탱크 및 페인트 공장에서 나는 연기가 영국군의 시야를 가리는 조건을 활용하여 주정을 타고 큰 어려움없이 상륙했다.

상륙 성공은 일본군의 전술적 성취이기도 하지만 방어를 담당한 영국군 특화점들의 위치가 좋지 않았던 것도 사실이다.

특화점들은 상호 위치가 나빠서 교차사격이 불가능했으며 종심이 얕았다.

하지만 책임을 전적으로 영국군에게 돌릴 수는 없다.

홍콩섬 북해안은 번화한 지역으로 조선소, 작업장, 산업시설, 그리고 많은 민간 시설물들이 늘어서 있었으며 이런 곳에 군사시설을 만들 경우 수많은 이해관계자들의 저항을 받을 수 밖에 없다.

민주국가에서, 더군다나 전시가 아닌 평시에는 그런 경우 순전히 군사적인 면만을 고려하여 건설을 밀어붙이기는 불가능하다. 

 

일본군이 상륙하여 홍콩섬 내부로 진출하자 영국군에게는 의지할만한 강력한 방어선이 없었다.

또한 기습적 상륙에 대비하여 흩어져 있던 병력들은 시간에 맞추어 결정적인 전장에 달려오기 힘들었다.

 

전투가 끝난 후 뒤돌아 보면 영국군은 두가지 큰 실수를 저질렀다.

첫째는 19일에 동부여단이 홍콩섬 남동쪽의 스탠리 지역으로 물러나 버린 일이다.

이로써 서부여단과의 연결이 끊어지면서 방어선이 두동강났고 결과는 파멸적이었다.

몰트비 소장은 동부여단이 홍콩섬 중부의 대담계곡과 황니천계곡을 잇는 선에서 서부여단과 연결을 유지해 주기를 바랐지만 동부여단장 세드릭 월리스 준장의 주장에 밀려 철수를 허가했다.

 

두번째는 병력 이동에 관한 것이다.

12월 18일 밤부터 19일 새벽에 걸쳐 일본군의 주력이 북해안에 상륙하여 황니천 계곡으로 남하하는 것이 확실해졌을 때 몰트비 소장은 흩어져 있던 병력에게 과감한 이동 명령을 내려 결전장인 황니천 계곡에 투입해야 했다. 

물론 일본군은 동시에 남쪽으로도 양동작전을 개시했지만 규모로 보나 위험성으로 보나 일본의 주공이 판명나면 결전장으로 병력을 집결하는 결단이 필요했다.

결단을 못 내리는 바람에 일본군은 큰 저항을 받지 않고 결전장인 황니천 계곡에 진입했고 압도적인 병력의 열세에 몰린 수비대는 서부여단장 존 로슨 준장이 전사하는 등 큰 피해를 입으면서 참패했다.

훗날 몰트비 소장은 이러한 비판에 대해 당시 자신에게는 해상의 상황을 알 수 있는 정찰기나 초계 함정이 없었다는 사실을 강조했다.

그는 만일 24시간 내로 일본군의 기습상륙이 없을 것이라는 사실을 미리 알 수 있었다면 흩어져 있던 병력들을 늦지 않게 이동시켜 황니천 계곡에 투입했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게다가 로슨 준장의 전사가 몰트비 소장에게 전달되는 속도가 늦어져 19일에 황니천 계곡에서 실시된 반격은 중대 단위로 따로 실시되면서 실패했다.

새로운 서부여단장이 일찍 임명되어 반격을 조율했다면 어느 정도의 성공을 거둘 수 있었을 것이다. 

 

홍콩 전투에서 영국군의 반격은 흔히 반격명령을 받은 지휘관이 여러 부대의 병력을 끌어모은 혼성부대를 지휘하여 실시했다.

대부분 사전정찰이 불가능했고 통신의 미비로 부대 사이의 협조가 힘들었으며 야포 세력은 미약했다.

이런 상황에서 반격은 대부분 실패했으며 설사 목표를 점령해도 유지하기 어려웠다.

 

어려운 여건 속에서도 소부대 지휘관들과 병사들은 잘 싸웠다.

영국군, 캐나다군, 인도군, 의용대 할 것 없이 많은 부대들이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훌륭하게 싸웠으며 많은 포수, 공병, 그리고 항공대원들도 보병으로 투입되어 열심히 싸웠다.

빈약한 세력을 가진 해군도 어려운 여건하에서 최선을 다하여 임무를 수행했으며 해병대와 해군 수병들은 지상 전투에서도 일정한 몫을 담당했다.

 

몰트비 소장이 전후에 보고한 바에 따르면 홍콩전투에서 영국군의 피해는 전사 2,123명, 부상 1,332명이었다.

포로는 10,947명이었는데 영국군 약 5,000 명, 인도군 약 4,000 명, 캐나다군 약 2,000명이었다.

일본군의 피해는 전사 678명, 부상 1,413명인데 영국군 공식전사는 일본군의 피해를 전사 675명, 부상 2,079명으로 약간 높게 적고 있다.

영국군 공식전사에 따르면 제228연대가 약 800명, 제229연대가 약 600명, 제230연대가 약 1,000명의 사상자를 내었다.

민간인 피해는 사망 약 2,000 명, 부상 약 6,000 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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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 항복

 

1941년 12월 24일과 25일에 걸쳐 스탠리 반도에서 일본군과 동부여단 사이에 최후의 공방전이 진행되는 동안 일본군은 서부여단에 대해서도 공세를 실시했다.

일본군은 24일 저녁이 되자 빅토리아시티의 중심부인 해군조선소와 몰트비 소장의 요새사령부에 강력한 포격을 가했다.

 

자정을 막 넘긴 시각에 일본제229연대가 만자계곡을 공격했다.

일본군은 40mm 대공포를 대인용으로 사용하면서 착실하게 진격하여 만자 계곡의 영국군을 몰아내고 중국함대클럽(China Fleet Club)에 도달했다.

만자 광장에 배치되어 있던 제965포대의 18파운더(84mm)야포도 파괴되었으며 일본군은 해군조선소의 서쪽 변경에 접근했다.

라지푸트 대대는 일본군의 공격을 받아 경주로(Racecourse) 서쪽으로 밀려났다.

일본군은 남쪽에서도 공세를 가하여 베넷츠힐을 점령했다.

 

승리를 확신한 일본군은 사자를 보내어 항복을 요구했다.

일본군에게 포로로 잡혔던 마너스 예비역 소령과 실즈가 25일 아침에 항복을 요구하는 일본제23군 사령관 사카이 다카시 중장의 친서를 가지고 찰스 영 홍콩총독을 찾아왔다.

마너스 소령은 해군조선소장이었으며 실즈는 홍콩행정회의 구성원이었다. 

사카이 중장은 친서에서 25일 정오까지 항복하라고 요구했다.

 

영 총독은 방어위원회를 소집했다.

회의에서 몰트비 소장은 반격을 준비하고 있다고 말했으며 해군을 지휘하던 콜린슨 해군대령은 해군조선소를 끝까지 지키겠다고 다짐했다.

방어위원회는 항전을 결의했고 영 총독은 항복요구를 거절했다.

 

그러자 일본군은 무지막지한 포격과 공습을 가해왔다.

일본군의 공습으로 병력의 이동이 불가능하여 몰트비 소장은 반격을 위한 부대를 모을 수 없었으며 동부여단과의 통신도 끊어졌다.

 

25일 오후 2시 30분에 빅토리아시티 남쪽의 파리시 산이 점령되었다는 소식이 들어왔다.

파리시 산의 일본군과 빅토리아시티 사이에는 이제 아무것도 없었다.

일본군에게 빅토리아시티로 향하는 길이 활짝 열리자 몰트비 소장도 더는 버틸 재간이 없음을 깨달았다.

몰트비 소장은 해군지휘관 콜린슨 대령과 통화하여 항복이 불가피함을 설명했고 콜린슨 대령도 수긍했다.

 

25일 오후 3시 15분에 몰트비 소장은 영 총독에게 전화를 걸어 상황을 설명했다.

일본군은 만자 계곡을 지나 빅토리아시티를 굽어보는 파리시 산에 도달했으며 영국군의 전선은 곳곳에서 분단되어 있었다.

전선 남쪽에서는 일본군이 리틀홍콩의 탄약창을 점령하기 직전이었으며 그럴 경우 탄약 보급이 불가능해질 것이었다.

안 그래도 보유 탄약이 부족한 영국군 부대들은 탄약창이 함락되면 버틸 재간이 없었다.

이미 식수는 바닥을 드러내고 있었다.

보고를 받은 영 총독은 몰트비 소장에게 항복을 교섭할 권한을 부여했다.

일본군은 영 총독과 몰트비 소장이 직접 구룡반도에 와서 항복하라고 요구했다.

 

25일 오후에 영 총독과 몰트비 소장을 태운 배가 백기를 내걸고 해협을 가로질러 구룡반도에 도착했다.

1941년 12월 25일 오후 3시 30분, 일본군이 동아호텔로 이름을 바꾼 구룡반도의 페닌슐라 호텔 3층에서 영 총독은 일본제25군 사령관 사카이 중장에게 정식으로 항복했다.

항복 소식은 서부여단에게는 즉시 알려졌으나 동부여단과는 통신이 끊어진 상태였으므로 왕립공병대의 램 중령과 프라이어 중위가 항복 명령을 전달하기 위하여 파견되었다.

 

25일 오후에 동부여단 사령관 세드릭 월리스 준장은 일본군의 야간 공격에 대비하여 병력을 재배치하고 있었다.

이때 전방의 일본군 진영으로부터 백기를 매단 승용차 1대가 다가왔다.

승용차에 타고 있던 램 중령과 프라이어 중위는 월리스 준장에게 즉시  항복하라는 몰트비 소장의 명령을 구두로 전달했다.

월리스 준장은 구두명령에 따라 항복하기를 거부하면서 문서화된 정식 명령서를 요구했다.

제2왕립스코트대대의 할랜드 소령이 명령서를 받기 위하여 돌아가는 승용차를 타고 동행했다.

 

할랜드 소령은 항복을 명령하는 몰트비 소장의 정식 명령서를 들고 자정이 넘어서야 동부여단으로 돌아왔다.

1941년 12월 26일 새벽 2시 30분에 월리스 준장은 2,000 여명의 부하들과 함께 일본군에게 항복했다.

 

일본제38사단은 홍콩 함락 직후 병사들에게 공식적으로 3일 간의 휴가를 주었다.

이것은 약탈을 허용한다는 의미였으므로 일본 병사들은 3일간 홍콩 전역을 휩쓸면서 약탈과 강간을 자행했다.

1941년 12월 28일에 일본군은 2천명이 참가하는 승리 퍼레이드를 펼쳤다.

제38사단장 사노 중장이 말을 타고 선두에서 퍼레이드를 이끌었다.

퍼레이드가 진행되는 동안에도 일본군의 일부 병사들은 약탈과 강간을 저지르고 있었다.

 

(1941년 12월 28일 거행된 일본군의 퍼레이드 광경. http://en.wikipedia.org/wiki/Stanley_Internment_Camp)

 

홍콩에서 영국당국을 도와 일본군과 내통하는 제5열을 처단했던 진책 소장은 항복이 발효되기 전에 홍콩을 떠나기로 했다.

원래는 애버딘 항에서 어뢰정을 타기로 했으나 일본군이 브릭힐을 점령하자 어뢰정들은 애버딘 항을 떠나 애버딘 섬의 남쪽 해안에 숨어서 진책 소장을 기다렸다.

 

부하들과 함께 빅토리아시티를 떠난 진책 소장이 애버딘 항에 도착해보니 어뢰정은 보이지 않고 의용대의 란치(launch)인 콘플라워2 호만 있었는데 그마저 연료가 없었다.

마침 주변에서 연료가 들어있는 드럼통을 발견한 진책 소장 일행은 급히 연료를 채운 다음 바다로 나섰다.

이때 브릭힐의 일본군이 란치를 발견하고 기관총 사격을 가했다.

란치가 총탄에 맞아 해상에 멈추자 진책 소장은 의족을 벗어 던지고 바닷물에 뛰어들었다. 

그 순간 진책 소장은 왼쪽 손목에 총알을 맞았으나 한팔과 한다리만으로 헤엄을 쳐서 애버딘 섬 북해안에 상륙했다.

진책 소장의 부관만이 애버딘 섬에 같이 상륙했고 나머지 부하들은 가라앉은 란치에서 목숨을 잃거나 홍콩섬으로 헤엄쳐 돌아가 따로 탈출했다.

 

(란치. http://en.wikipedia.org/wiki/Launch_(boat))

 

란치를 격침한 일본군 기관총 사수는 애버딘 섬의 북해안에 상륙한 진책 소장과 부관에게 잠시 기관총을 쏘다가 두 사람이 시야에서 사라지자 흥미를 잃었다.

진책 소장이 애버딘 섬의 남해안에 가보니 어뢰정들이 숨어 있었다.

 

살아남은 영국해군의 어뢰정 5척(제7, 제9, 제10, 제11 및 제27정)은 25일 저녁까지 숨어 있다가 오후 9시 30분에 진책 소장을 태우고 홍콩 북동쪽의 미르스 만을 향하여 출발했다.

진책 소장과 어뢰정 승조원을 합친 68명은 26일 새벽에 미르스 만에 상륙하여 마중나온 공산계열의 항일게릴라와 만났다.

어뢰정을 모두 자침시킨 진책 소장과 승조원들은 게릴라의 보호 아래 육로로 이동하여 무사히 중경에 도착했으며 어뢰정 승조원들은 1942년 2월 14일에 항공기 편으로 중경을 떠나 버마의 랭군에 도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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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 스탠리 반도 전투

 

1941년 12월 24일 아침에 동부여단 사령관 세드릭 월리스 준장은 캐나다왕립소총대대장 윌리엄 홈 중령을 비롯한 장교들과 회의를 가졌다.

왕립소총대대의 장교들은 의기소침한 동시에 울분에 차 있었다.

대대의 병사들은 지난 5일간 거의 쉬지 못했으며 보급이 시원찮아서 제대로 먹지도 못하고 있었다.

훈련이 부족한 상태로 실전에 투입된 대대는 밤낮없이 치열한 전투를 치르면서 큰 인명피해를 입고 있었다.

 

로슨 준장의 전사로 홍콩에 파견된 캐나다 군의 선임장교가 된 왕립소총대대장 홈 중령은 다른 부대들이 제대로 싸우지 않고 캐나다 병사들만 총알받이로 내세운다면서 격앙된 어조로 월리스 준장에게 대들었다.

그 바람에 회의장에서는 한동안 고성이 오고갔으며 결국 월리스 준장은 캐나다왕립소총대대를 캐나다위니펙척탄병대대의 생존자들과 함께 방어선에서 철수시키기로 결정했다. 

이로써 캐나다 병사들은 후방의 스탠리 요새로 가서 동부여단의 예비대가 되었고 캐나다 군이 빠진 방어선은 재편되었다.

 

(1941년 12월 24일 - 25일에 걸친 스탠리 반도의 방어상황.출처 : Hong Kong 1941-45, P.80)

 

첫번째 방어선은 스탠리 경찰서를 중심으로 펼쳐져 있었다.

경찰서의 북쪽에 스탠리 소대가 배치되었다.

의용대 소속인 스탠리 소대는 스탠리 교도소의 경비를 맡던 부대로 피츠제럴드 중위가 지휘했으며 병력은 장교 1명을 포함하여 29명이었다.

스탠리 소대는 재소자들의 지원을 받았다.

일본군이 홍콩섬에 상륙하자 스탠리 교도소에서 복역 중이던 병사 약 40명이 의용대에 지원했다.

제1미들섹스대대에서 근무하다가 동성애 혐의로 2년 형을 선고받고 복역 중이던 채티 대위가 이들을 지휘했다.

그리하여 스탠리 소대는 자신이 감시하던 죄수와 힘을 합쳐 일본군을 막게 되었다.

경찰서 남쪽의 정음곡(舂坎角)에는 포시스 소령이 지휘하는 의용대 제2중대가 배치되었으며 1번 방갈로 부근의 특화점에는 시산 병장이 지휘하는 미들섹스대대의 기관총들이 배치되었다.

두번째 방어선은 성 스티븐 대학의 남쪽에 있는 스탠리 마을에 설정했다.

동해안의 27번 특화점에는 캐나다왕립소총대대 A 중대의 일부 병력이 들어가서 남쪽으로 향하는 도로를 감제했다.

스탠리 마을은 경찰병력이 지켰으며 드로운 상병이 지휘하는 의용대 제1중대의 1개 분대 10명이 가세했다.

마지막 방어선은 성 스티븐 대학 예비학교와 스탠리 교도소를 잇는 선으로 머피 병장이 지휘하는 의용대 제1중대의 1개 분대와 리스 대위가 지휘하는 의용대 제1포대가 지켰다.

남쪽의 스탠리 요새에는 캐나다왕립소총대대를 중심으로 한 대규모의 예비대가 주둔 중이었다.​

일본제1/229대대는 24일 오후에 영국군 방어선을 공격했다가 격퇴당했다.

그러자 일본군은 제1/230대대를 추가로 투입했다.

24일 저녁 9시에 일본군 2개 대대가 경전차 3대의 지원 하에 넓은 정면에서 동시에 공격해 왔다.​

영국군의 2파운더(40mm) 대전차포가 경전차 2대를 파괴했지만 첫번째 방어선을 지키던 의용대 병력들은 중과부적으로 패배했다.

의용대 제2중대는 철수 과정에서 대부분의 병력을 잃고 스탠리 마을로 밀려났다.​

자정이 지났을 때 일본군은 1번 방갈로 부근의 특화점들에 배치되었던 제1미들섹스대대 제1중대의 기관총들을 제압했다.

특화점들을 지키던 병력 중 폴리 이병을 제외한 전원이 전사했다.

첫번째 방어선을 돌파한 일본군은 남하하여 임시 병원으로 쓰이고 있던 성 스티븐 대학을 점령했다. ​

부상자와 피난민으로 붐비는 건물에 난입한 일본군은 부상자를 잔인하게 학살하고 여자란 여자는 모조리 강간했다.​

25일 오전 3시 30분에​ 일본군이 두번째 방어선에 도달했다.

비오듯 쏟아지는 총탄과 수류탄 세례 속에 의용대와 경찰이 지키던 방어선이 다시 무너졌으며 일본군은 화염방사기를 사용하여 동해안의 27번 특화점을 제압했다.

25일 동이 텄을 때 일본군은 마지막 방어선에 접근하고 있었다.

25일 아침에 월리스 준장은 캐나다왕립소총대대에게 반격명령을 내렸으나 대대장 홈 중령이 거부했다.

할 수 없이 윌리스 준장은 캐나다위니펙척탄병대대 D 중대장 파커 소령에게 반격명령을 내렸다.

파커 소령은 대대를 샅샅이 뒤져 148명을 찾아낸 다음 25일 오후1시 30분에 반격을 실시했다.​

일본군은 예상 외로 강력한 영국군에 반격에 허를 찔렸고 척탄병대대는 일본군에게 큰 피해를 주면서 진격했다.

선두인 제18소대는 맥도넬 병장의 지휘 하에 스탠리 마을까지 진격하여 백병전으로 일본군을 몰아내고 일시적으로 마을을 점령했다.

그러나 일본군이 정신을 차리고 본격적으로 반격하기 시작하자 척탄병 대대는 큰 피해를 입고 물러날 수 밖에 없었다.

척탄병대대는 반격에 참가한 148명​ 중 104명의 사상자를 기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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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 카메론 산 함락

 

1941년 12월 22일 아침이 밝았을 때 일본군의 배치를 보면 리펄스베이호텔 북쪽에 제2 및 제3/229대대가 있었고, 동쪽에서는 제1/229및 제1/230대대가 스탠리 반도 입구에 방어선을 펴고 있는 동부여단과 대치하고 있었다.

서쪽에서는 제228연대가 니콜슨 산에서 카메론 산을 노리고 있었다.

 

세드릭 월리스 준장의 동부여단은 캐나다왕립소총대대 B, C 및 D 중대, 미들섹스 대대 B 및 D 중대, 의용대 제1, 제2중대 및 스탠리 교도소를 경비하던 스탠리 소대, 이외에 잡다한 부대의 잔존병들로 이루어져 홍콩섬 남동쪽의 스탠리 반도에 3중의 방어선을 형성하고 있었다.

야포 세력은 2파운더(40mm) 대전차포 2문, 18파운더(84mm) 야포 3문 및 3.7인치 곡사포 2문이었으며, 9.2인치 해안포 3문 및 6인치 해안포 2문도 가세했다.

 

헨리 로즈 대령이 지휘하는 서부여단의 방어선은 남북으로 얕고 넓게 늘어져 있었다.

북해안은 제2/14펀잡대대 C 중대가 지키고 있었고 그 남쪽의 레이튼 힐에는 미들섹스 대대 Z 중대가 배치되어 있었다.

Z 중대 남쪽으로는 제4/7라지푸트 대대 B중대 및 제2/14펀잡대대 B중대가 차례로 배치되어 있었다.

카메론 산에는 왕립스코트대대와 위니펙척탄병대대 C중대가 배치되어 있었고 그 남쪽에는 척탄병대대 B 및 D 중대가 배치되어 있었다.

남해안은 의용대와 영국군의 잡다한 병력들이 방어하고 있었다.

 

22일 정오가 되자 일본군 2개 대대가 동부여단이 지키던 스탠리 언덕과 그 북쪽의 슈가로프를 공격해 왔다.

이곳을 지키던 병력은 캐나다왕립소총대대 B중대, D 중대의 2개 소대, 그리고  본부중대의 1개 소대였다.

캐나다군은 일본군의 공격을 몇 차례나 막아내었으나 탄약이 부족해지자 스탠리 언덕 정상을 내어주고 남쪽 사면으로 물러섰다.

 

그동안 일본제229연대의 주력은 리펄스베이호텔의 영국군을 거세게 몰아쳤다.

2개 대대의 일본군은 강력한 화력지원을 받으면서 진격하여 캐나다왕립소총대대 병력을 중심으로 한 수비대를 호텔 본관 내로 몰아넣었다.

22일 오후에 수비대에게 철수 명령이 떨어졌다.

호텔에는 피난 중이던 영국인 여자들과 아이들이 있었지만 이들을 철수시킬 방법이 없었으므로 이들은 수비대가 떠난 후 일본군에게 항복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날이 어두워지자 병사들은 몇 명씩 짝지어서 호텔을 떠났지만 이들중 소수만이 스탠리 반도에 자리잡은 동부여단의 방어선에 도착했다.

템플러 소령을 위시한 약 30명의 병력은 후퇴를 거부하고 다음날 저녁까지 호텔을 방어했다.

 

23일 밤에 템플러 소령 일행이 호텔을 빠져나가자 일본군이 리펄스베이호텔을 점령했다.

템플러 소령 일행은 해안에서 보트를 타고 라운드 섬에 좌초한 트라시안의 잔해로 가서 숨었다.

이들이 최종적으로 텔레그라프 만에 상륙했을 때는 이미 홍콩 수비대가 항복한 후였다.

 

(홍콩 섬 상륙 및 전투 상황도.출처 : Hong Kong 1941-45, P.57

 
황니천 계곡을 제압한 일본군은 카메론 산을 노렸다.
카메론 산은 황니천 계곡을 굽어보는 요충지로 서부여단의 새로운 사령부와 위니펙척탄병대대의 본부가 있었다.
22일 오후에 실시된 제228연대의 공격은 카메론 산 북쪽을 방어하고 있던 캄프타 프라사드 소령의 제2/14펀잡대대 B 중대에 떨어졌다.
 
압도적 열세의 B 중대는 엄청난 사상자를 내면서 무너졌다.
B 중대에서 살아남은 병사는 8명에 불과했으며 남아있는 공용화기는 기관총 2정 뿐이었다.
펀잡대대의 방어선이 무너지는 순간 북쪽에 있던 제4/7라지푸트대대 B  중대가 일본군의 북익에 날카로운 반격을 가했다.
예기치 않은 일격을 얻어맞은 일본군이 주춤하는 사이 억지로 쥐어짜낸 영국군 예비병력이 달려가서 전선의 구멍을 겨우 메꾸었다.

 

 

그러자 일본제228연대는 방향을 바꾸어 카메론 산 남쪽을 공격했다.

일본군은 카메론 산 남쪽 사면과 리틀홍콩 사이 약 1km 정도의 좁은 전선에 많은 병력을 밀어넣었으나 위니펙척탄병대대 D 중대에게 격퇴당했다.

 

이로써 카메론 산은 안전해진 듯 보였으나 그것도 잠시였다.

22일 밤 10시에 제3/228대대로부터 1개 중대를 증원받은 제2/228대대가 동쪽으로부터 카메론 산에 들이닥쳤다.

제228연대장 도이 데이히치 대좌는 노획한 영국군의 박격포와 기관총을 포함하여 자신이 동원할 수 있는 모든 화력을 동원했다.

혼란 속에서 왕립스코트대대를 주축으로 한 영국군의 방어선이 무너지면서 병사들은 카메론 산의 정상을 뺏기고 서쪽 사면으로 밀려났다.

23일 새벽 1시 30분에 서부여단장 헨리 로즈 대령은 몰트비 소장에게 전화를 걸어 카메론 산이 함락되었다고 보고했다.

 

다행히 카메론 산 서쪽의 만자 계곡에는 22일 오후에 이미 의용대 제4 및 제7중대가 배치되어 있었다.

로즈 대령이 만약을 대비하여 배치해 둔 이 병력 덕분에 서부여단은 방어선의 전면적인 붕괴를 모면했다.

하루 종일 격전을 치른 일본제228연대도 추격을 포기하고 재정비에 들어갔다.

 

이맘때쯤 빅토리아시티의 상황은 악화되고 있었다.

일본군이 대담 저수지에 있던 급수시설을 발견하고 펌프를 멈추자 홍콩섬 전역에 급수가 중단되었다.

동부여단이 방어하고 있던 스탠리 요새에는 커다란 물탱크가 있었으나 23일에 일본군의 포격으로 파괴되어 저장하고 있던 식수가 유실되었다.

급수 중단과 저장식수 유실은 수비대의 사기를 떨어뜨렸다.

누구도 식수없이는 오래 버틸 수 없었다.

 

12월 23일 아침에 동부여단 세드릭 월리스 준장은 스톤힐과 스탠리 언덕을 탈환하기 위하여 공격을 실시했다.

캐나다왕립소총대대가 주력을 담당했고 미들섹스 대대가 얼마 안 되는 야포와 기관총을 동원하여 화력지원을 맡았다.

왕립소총대대는 일본군의 허를 찔러 일단 스톤힐과 스탠리 언덕을 탈환했으나 오래 지킬 여력이 없었다.

오전 10시부터 일본군의 야포와 박격포가 무시무시한 포격을 가해오자 왕립소총대대는 물러날 수 밖에 없었다.

 

영국군이 철수하자 일본제1/229대대가 스톤힐과 스탠리 언덕을 다시 점령했다.

왕립소총대대는 스탠리 언덕 남쪽의 평지에 방어선을 편성했는데 일본군은 방어선에 포격을 가할 뿐 추격하거나 방어선을 공격하지는 않았다.

지난 이틀 간의 전투에서 큰 피해를 입은 제1/229대대도 재정비가 필요했다.

 

23일 오전 8시에 일본군이 레이튼 힐의 남쪽 절반을 지키던 라지푸트대대 C 중대를 공격했다.

C 중대는 몇 번의 공격을 물리쳤으나 탄약이 떨어지면서 남서쪽의 경주로(Racecourse) 지역으로 밀려났다.

레이튼 힐의 북쪽 절반을 지키던 미들섹스대대 Z 중대는 전선을 유지했으나 우익을 지키던 라지푸트대대가 밀려나자 약간 후퇴하여 방어선을 재편했다.

 

23일 아침에 해군조선소를 방어하던 영국해병대가 카메론 산의 북쪽 사면에 도착하여 서쪽 사면을 지키던 왕립스코트대대와 연결했다.

새벽에 카메론 산의 정상을 점령했던 일본제228연대가 오전9시에 서쪽 사면으로 진출하여 왕립스코트대대를 공격했다가 격퇴되었다.

이후 일본군은 포격과 공습만 실시했는데 일본기들은 저공비행을 하면서 폭격과 기총소사를 가했다.

 

23일 오후가 되자 지속적인 포격과 공습에 시달리던 스코트 대대는 카메론 산의 북서쪽 사면으로 물러나 그날 오전에 경주로(Racecourse) 지역으로 밀려나 있던 라지푸트대대 C 중대와 연결했다.

위니펙척탄병대대는 23일 저녁까지 재집결한 다음 만자 계곡과 베넷츠힐 사이를 방어했다.

리틀홍콩 지역의 탄약창을 방어하던 영국군도 아직 버티고 있었으며 덕분에 야간에는 탄약을 꺼내어 보급할 수 있었다.

 

23일에 일본군은 다음날로 예정된 빅토리아시티 공격을 위하여 제38사단의 마지막 예비대였던 제3/230대대를 북해안에 상륙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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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 시칼라 침몰

 

1941년 12월 21일 아침에 동부여단장 세드릭 월리스 준장은 대담 계곡을 거쳐 북상한 다음 서쪽으로부터 황니천 계곡을 공격하기로 결심했다.

공격대는 캐나다왕립소총대대 D 중대, 의용대 제1중대로 이루어졌으며  의용대 제2중대의 기관총반이 가세했다.

D 중대장 맥콜리 소령이 지휘하는 공격대가 21일 오전 9시 15분에 스탠리 언덕을 출발하여 북상하자 동쪽의 레드힐로부터 총탄이 쏟아졌다.

D 중대는 총검돌격을 실시하여 북쪽의 브리지힐을 점령했으며 의용대 제1중대는 브리지힐과 레드힐 사이의 노팅힐을 점령했다.

그러나 더 이상 전진할 수 없었다.

브리지힐과 노팅힐에는 하루종일 일본군의 총탄과 포탄이 떨어졌다.

오후가 되자 맥콜리 소령과 의용대의 모든 장교들이 부상을 입는 등 사상자가 크게 늘어났으나 동부여단에는 예비대가 없었다.

또한 영국군이 보유한 3인치 박격포의 포탄과 식량이 떨어졌는데 일본군의 포격으로 보급이 불가능했다. 

이 상태로 밤이 되면 일본군의 공격을 버텨낼 수 없었으므로 월리스 준장은 오후5시에 철수명령을 내렸다.

 

21일 오후에 브리지힐과 노팅힐의 영국군을 공격한 일본군은 제1/229대대로서 포병과 경전차 3대의 지원을 받고 있었다.

일본군은 제38사단의 예비대로 구룡 반도에 대기하던 제1/230대대를 오전 10시 30분에 북해안에 상륙시킨 다음 스탠리 방면으로 남하시켰다.

따라서 2개 중대 규모의 맥콜리 공격대가 철수하지 않았다면 21일 밤에 일본군 2개 대대의 공격을 받았을 것이다.

 

(홍콩 섬 상륙 및 전투 상황도.출처 : Hong Kong 1941-45, P.57)

 

몰트비 소장은 월리스 준장과는 별도로 리펄스베이호텔 방면에서 바이올렛힐을 거쳐 황니천 계곡을 공격하길 원했다.

그는 제30해안포대장이었던 템플러 소령에게 공격명령을 내렸다.

템플러 소령은 캐나다 왕립소총대대의 C 중대와 본부중대에서 각각 1개 소대를 짜내고 비커스 기관총을 가진 의용대의 브렌건캐리어 2대와 트럭 4대도 확보했다.

템플러 소령은 리펄스베이호텔로 가는 도중에 왕립소총대대 A 중대의 2개 소대와 약간의 의용대 병력을 만나 지휘 하에 넣었다.

리펄스베이호텔에 도착한 템플러 소령은 의용대 병력들을 호텔 방어를 위하여 남겨두고 도로를 따라 북상했다.

도중에 일본군의 기관총 사격을 받아 탄약을 싣고 있던 트럭이 파괴되었으나 나머지 트럭 3대는 브렌건캐리어와 함께 계속 북상했다.

도로를 따라 북상한 템플러 공격대는 21일 오후에 황니천 계곡 남쪽의 경찰서를 공격했으나 전력이 약한 데다가 마침 브렌기관총마저 고장나는 등 불운이 겹쳐 실패했다.

저녁이 되자 템플러 공격대는 리펄스베이호텔로 후퇴했다.

 

리펄스베이호텔로부터 황니천 계곡을 공격하려는 영국군의 거듭된 시도는 많은 희생을 내며 실패했지만 무익한 것은 아니었다.

영국군의 공세때문에 제229연대장 다나카 류사부로 대좌는 지휘를 위하여 3일 동안 리펄스베이호텔에서 460m 떨어진 지점에 머물러야만 했으며 제3/229대대는 영국군의 거듭된 공세를 막으면서 큰 피해를 입었다.

이러한 공세 때문에 빅토리아시티에 대한 일본군의 본격적인 공격이 늦어졌다. 

 

21일 오후가 되자 일본제230연대는 전날에 이어 버틀러 산 맞은 편의 언덕에 집중 공격을 가했다.

언덕을 지키던 펀잡대대는 증원된 왕립스코트대대의 1개 소대와 함께 맞섰으나 중과부적으로 필터베드까지 밀려났다.

그러나 영국군은 서둘러 방어선을 정비하여 필터베드에서 레이튼 힐을 거쳐 북해안에 이르는 방어선을 유지했다.

 

북해안에서도 일본군이 서쪽으로 진격했다.

일본군은 코즈웨이 만의 왓슨 공장에 배치되어 있던 의용대 제6포대의 대공포들을 제압하고 빅토리아시티의 동쪽 끝에 도달했다.

빅토리아시티의 해군조선소가 포격을 받았고 북해안의 모든 영국군 야포가 일본군의 포격으로 침묵했다.

 

서부여단장 헨리 로즈 대령은 위니펙척탄병대대의 생존자들을 긁어모아 100 여명을 확보한 다음 일본군의 공격이 예상되는 카메론 산에 배치했다.

카메론 산에 배치된 척탄병대대의 병사들은 21일 오후 내내 일본군의 포격을 받았다.

 

포정 시칼라는 전날에 이어 21일에도 맹활약했다.

21일 아침에 일본군이 브릭힐을 공격했는데 이곳을 지키던 영국군 수비대는 미들섹스 대대의 소규모 분견대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나 수비대는 숫적 열세에도 불구하고 딥워터 만에서 시칼라가 쏘아주는 6인치 함포의 화력지원에 힘입어 일본군의 공격을 막아내었다.

이어서 시칼라는 포격을 가하여 황니천 계곡 내의 일본군 포대를 침묵시켰다.

그러자 일본군은 육군항공대에 지원을 요청했고 결국 시칼라는 공습을 받아 21일 오후에 람마 해협에 침몰했다.

시칼라가 침몰하자 일본군이 다시 브릭힐을 공격하여 끝내 점령했다.

 

(HMS 시칼라. 배수량 : 635톤, 길이 : 72m, 폭 : 11m, 속력 : 14노트, 승조원 : 55명, 무장 : 6인치 함포 2문, 12파운더(76mm)함포 2문, 7.7mm 기관총 6정 https://www.flickr.com/photos/hammersmithrob/7077889917/)

 

시칼라가 침몰함으로써 영국해군의 세력은 포정 2척과 어뢰정 5척으로 줄어들었으나 저항을 멈추지 않았다.

실제로 포정 로빈은 21일에 애버딘 항에서 포격을 가하여 미들스퍼의 일본군 포대를 침묵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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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 황니천 계곡 함락

 

1941년 12월 20일 아침이 되었을 때 일본군의 배치 상황은 다음과 같다.

 

동쪽에는 제1/229 및 제2/228대대가 대담 및 서환방면에 있었다.

자딘 관측소 남동쪽의 스탠리 계곡에는 제2 및 제3/229대대가 있었고 자딘 관측소에는 제1및 제2/230대대가 있었다.

자딘 관측소의 남서쪽에는 제1/228대대가 있었으며 예비대인 제3/228대대는 막 홍콩섬 북해안에 상륙한 상태였다.

 

(홍콩 섬 상륙 및 전투 상황도.출처 : Hong Kong 1941-45, P.57)

 

서부여단의 방어선은 북쪽에서는 제1미들섹스대대 Z 중대와 펀잡 대대의 잔존병들이 레이튼 힐을 중심으로 방어선의 북쪽을 맡고 있었다.

중앙에서는 제2왕립스코트 대대와 위니펙척탄병대대의 병력들이 뒤섞인 채 니콜슨 산에서 황니천 계곡에 걸쳐 있었고 척탄병대대 D 중대는 황니천 계곡 내의 특화점에서 버티고 있었다.

 

20일 날이 밝자 황니천 계곡의 서쪽에 있던 제1/228대대가 남하하여 포스트브리지하우스에서 저항하고 있던 해군병력들을 쫓아냄으로써 딥워터 만으로 향하는 길을 열었다.

 

일본제1/229대대는 20일 아침에 바이올렛힐 너머 리펄스베이호텔 쪽으로 소대 규모의 정찰대를 파견했다.

정찰대는 호텔의 방어가 허술하다고 보고 공격을 가했으나 착각이었다.

호텔에는 미들섹스 대대의 소위가 지휘하는 수십명의 영국 육군 및 해군 패잔병들이 있었는데 이들은 사기가 떨어져 있었지만 그래도 경무장의 소대 병력이 무찌를 수 있는 상대는 아니었다.

게다가 정찰대가 호텔을 공격하는 도중 배후에 영국군이 나타났다.

 

동부여단장 세드릭 월리스 준장은 21일 오전 8시에 캐나다왕립소총대대의 1개 중대에다가 의용대 2개 소대를 증원하여 바이올렛 힐로 파견했다.

이들의 임무는 바이올렛 힐을 거쳐 남동쪽으로부터 황니천 계곡을 공격하는 것이었다.

동부여단이 가진 야포 세력의 전부인 18파운드 곡사포 1문 및 3.7인치 곡사포 2문이 화력지원을 담당했다.

왕립소총중대가 오전 10시에 리펄스베이호텔에 도착했을 때 일본정찰대는 호텔의 차고와 별채를 점령하고 본관을 공격하던 중이었다.

중대는 배후에서 일본군을 덮쳐 장교 1명을 포함하여 26명을 사살하고 나머지를 쫓아버렸다.

 

왕립소총중대가 호텔을 지나 북상하려고 하자 북쪽의 바이올렛 힐 및 서쪽의 미들스퍼로부터 일본군의 총탄이 쏟아져 진격할 수 없었다.

20일 저녁이 되자 월리스 준장은 왕립소총중대가 고립될 것을 우려하여 동부여단의 방어선 내로 철수하라고 명령했다.

 

일본제3/229대대가 남하하여 리펄스 만 북쪽에 나타나자 몰트비 소장은 애버딘에 제2/14펀잡대대 A 중대를 파견하여 애버딘과 리펄스베이호텔 사이의 도로를 확보하라고 명령했다.

펀잡대대장 키드 중령이 직접 A 중대를 이끌고 빅토리아시티를 떠나 애버딘에 도착했다.

A 중대는 말이 중대지 병력이 키드 중령을 포함한 장교 3명과 부사관 및 병사 25명에 지나지 않았으므로 애버딘에서 증원을 받았다.

애버딘 섬에서 위니펙척탄병 대대의 1개 소대가 상륙하여 합류했고 해군수병 35명도 가세했다.

세력이 증가된 A 중대는 리펄스 만 북쪽의 도로를 따라 동진하다가 해발 150m 의 사신산(壽臣山)에서 일본제3/229대대의 방어선에 맞닥뜨렸다.

영국군은 용감하게 공격했으나 압도적인 전력차를 극복하지 못한 채 큰 피해를 입고 쫓겨나 브릭힐 부근에 방어선을 폈다.

A 중대의 28명 중 펀잡대대장 키드 중령을 포함하여  20명이 전사했고 살아남은 8명은 전원 부상을 입었으며 척탄병 소대와 해군병력들도 많은 사상자를 기록했다.

다행히 일본군은 리펄스베이호텔에서 북상하려는 왕립소총중대를 신경쓰느라 A 중대를 추격하지는 않았다.

 

브릭힐 북쪽에 있는 리틀홍콩에는 의용대, 해군, 척탄병대대 및 미들섹스대대 소속의 소수 병력이 모여 탄약창을 지켰다.

포함 시칼라는 딥워터 만에 떠서 함포 지원을 계속했다.

 

20일 오후에 자딘 관측소에 주둔 중이던 일본제230연대가 서쪽의 언덕을 장악하고 있던 중대 규모의 펀잡대대 병력을 공격했다.

펀잡대대는 큰 피해를 입었고 전선의 붕괴를 막기 위하여 왕립스코트대대의 1개 소대가 펀잡대대의 우익에 급히 투입되었다.

그러나 일본군은 더 이상 진격하지 않고 다음날의 공격에 대비하여 병력의 재정비에 주력했다.

 

서부여단장 론슨 준장이 전사하자 몰트비 소장은 의용대장 헨리 로즈 대령을 서부여단장으로 임명하고 반격을 명했다.

로즈 대령은 서해안의 폭풀람에 주둔하고 있던 위니펙척탄병대대 B 중대를 주력으로 삼아 21일 아침에 반격을 가하기로 하고 이동을 명했다.

트리스트 소령이 지휘하던 B 중대는 약 100 명의 병력을 가지고 있었으며 홍콩전투 개시 이래 한번도 전투에 투입되지 않은 생생한 중대였다.

 

B 중대가 동쪽으로 이동하는 동안 로즈 대령은 니콜슨 산 주변에서 복잡하게 뒤섞여 있던 위니펙척탄병대대와  왕립스코트대대의 병력들에게 재집결을 명했다.

영국군이 재집결을 위하여 이동하는 와중에 니콜슨 산 정상이 비고 말았다.

 

일본군은 다음날인 21일에 150mm 중포를 포함한 야포의 화력지원 하에 공격을 실시할 예정이었다.

제230연대가 버틀러 산 서쪽의 언덕을 담당하고 제228연대가 니콜슨 산을 공격할 계획이었다.

그런데 20일 오후에 제228연대의 정찰대가 니콜슨 산 정상이 비었다고 보고했다.

제228연대장 도이 데이히치 대좌는 성문보 전투에서와 마찬가지로 이번에도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20일 오후 5시, 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가운데 제228연대의 3개 중대가 아무런 저항도 받지 않고 전진하여 니콜슨 산 정상을 점령했다.

 

서해안에서 이동해 온 위니펙 척탄병대대 B 중대가 21일 새벽에 니콜슨 산에 도착했다.

B 중대는 도착하자마자 일본군 3개 중대로부터 공격을 받았다.

치열한 전투 끝에 B 중대는 장교 전원을 포함하여 전체 병력의 절반 가까운 사상자를 기록하면서 니콜슨 산 서쪽의 미들 계곡을 지나 만자 계곡까지 쫓겨났다.

 

황니천 계곡 안에서는 위니펙척탄병대대 D 중대가 고립된 채 특화점에 의지하여 처절한 저항을 계속하고 있었다.

중대장 보우만 대위가 전사하자 필립스 대위가 이어받았으며 필립스 대위가 부상을 입자 블랙우드 중위가 지휘했다.

블랙우드 중위는 22일까지 저항한 다음 탄약, 식량 및 식수가 떨어지자 할 수 없이 항복했다.

그때까지 살아남은 D 중대원은 37명이었으며 전원 부상을 입고 있었다.

D 중대가 사살한 일본군은 200명이 넘었다.

필립스 대위와 블랙우드 대위는 나중에 군사십자장(Military Cross)을 받았다.

 

(군사십자장. http://en.wikipedia.org/wiki/Military_Cross)

 

20일 저녁이 되자 황니천 계곡은 사실상 일본군이 지배하고 있었다.

황니천 계곡 전투는 일본군에게도 결코 쉬운 전투가 아니었다.

일본군은 19일과 20일에 걸친 황니천 계곡 전투에서 제3/230대대장 우네다 안페이 소좌가 중상을 입는 등 800 명이 넘는 사상자를 기록했다.

 

20일 저녁에 진책 소장이 몰트비 소장에게 60,000 명의 중국군이 일본군의 후방에 집결하고 있다고 말했다.

몰트비 소장은 즉시 병사들에게 이 기쁜 소식을 전했으며 병사들의 사기가 크게 올랐다.

그러나 결국은 틀린 정보로 판명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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