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1년 12월 8일 월요일 아침, 어제 웨이크 섬에 날아왔던 판아메리칸 항공사의 Martin M-130 ‘필리핀 클리퍼‘ 비행정이 승객들을 태우고 잔잔한 초호 안에서 이수를 위한 준비를 서두르고 있었다.
(웨이크 섬은 날짜변경선의 서쪽에 있기 때문에 8일 월요일 아침은 바로 진주만의 7일 일요일 아침이다.)
이 비행정은 6시 55분에 괌을 향하여 이수했다.
오전 6시, 웨이크 섬의 해병대들은 기상나팔에 맞추어 기상하여 아침 식사를 하고, 텐트를 걷고, 하루의 일과를 시작할 준비를 했다.
상륙 이후 처음으로 토요일 오후와 일요일에 걸쳐 휴식을 가진 뒤라 병사들의 컨디션은 상당히 양호한 편이었다.
데브루 소령도 기상하여 면도를 했다.
오전 6시 50분, 육군항공대 연락반의 Wilson 대위가 활주로 옆에 배치되어 있던 자신의 통신용 밴에서 놀라운 내용을 들었다.
이 밴의 통신기 주파수는 기본적으로 하와이의 Hickam 비행장에 맞추어져 있었는데 갑자기 히캄 비행장에서 흥분한 목소리로 암호도 쓰지 않고 통신절차도 무시한 채
“하와이가 공습을 받고 있다.”
고 교신하는 내용이 잡혔다.
윌슨 대위는 지체없이 데브루 소령의 텐트로 달려가서 이 놀라운 소식을 전했다.
데브루 소령은 즉시 전화를 들어 커닝엄 중령을 찾았는데 연결이 되지 않자, 사령부의 통신실로 전화를 걸어 확인한 결과 진주만과 우선(priority) 등급의 통신조차 불가능해졌다는 사실을 알았다.
통신수준의 4단계(urgent, priority, routine, deferred) 중 제2단계인 우선 등급의 통신이 불가능해졌다는 것은 진주만의 통신센터가 현재 교전 중인 부대와의 통신에나 부여되는 최고등급인 긴급(urgent) 등급의 통신들을 처리하고 있다는 뜻이었다.
데브루 소령은 수화기를 내려놓은 다음 마침 눈에 띈 방송요원을 불러 “전투준비” 명령을 방송하도록 했다.
전투준비 명령이 떨어지자 해병대원들은 잽싸게 트럭에 뛰어올라서 각자 지정된 위치로 달렸다.
오전 7시 35분까지는 전원 배치가 완료되었고, 대대의 장교들이 모여 간단한 회의를 가진 후에 미리 준비했던 대로 섬에서 가장 높은 곳인 캠프1 의 물탱크 위에 설치된 감시초소에 인원을 배치했다.
트럭이 온 섬을 달리면서 각 방어진지와 포대마다 최대한의 탄약을 실어날랐고, 무기고를 뒤져서 몇 정 안되는 여분의 소총들을 찾아내어 비무장인 해군항공기술병들과 육군항공대 연락반에게 건네주었다.
각 포대에는 당시 해병대만 가지고 있던 제1차대전 당시의 디자인으로 만들어진 구식 헬멧들과 함께 가스마스크가 지급되었다.
커닝엄 중령은 전쟁이 발발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자 즉각 판아메리칸 항공사의 수상기 기지 책임자인 John B. Cooke 에게 괌을 향하여 날아가고 있는 ‘필리핀 클리퍼’ 비행정의 조종사 John H. Hamilton 에게 연락해서 웨이크 섬으로 회항하도록 요구했다.
연락을 받은 ‘필리핀 클리퍼’ 비행정은 곧 웨이크 섬으로 돌아왔고, 커닝엄 중령은 해밀턴 기장에게 와일드캣 2대와 함께 섬의 남쪽을 정찰해 줄 것을 요구했다.
즉시 비행정의 승객들과 화물이 내려지고, 장거리 정찰을 위하여 연료탱크를 가득 채웠다.
정찰은 오후 1시에 실시하기로 했다.
이제 전쟁이 발발한 이상 제211해병전투비행대의 와일드캣을 보호하는 일이 급선무로 떠올랐다.
와일드캣 중에서 4대는 이미 이륙하여 초계에 임하고 있었고, 지상에는 8대가 주기하고 있었는데, 비행대장 푸트넘 소령은 와일드캣의 보호에 관하여 어려운 선택의 기로에 서 있었다.
즉 기지 내의 띄엄띄엄 산재된 위치에 불도저를 이용하여 옹벽을 열심히 만들고 있어서 오후 2시면 사용이 가능했지만 활주로에서 그 곳까지 가는 유도로를 만들려면 최소한 24시간이 걸릴 예정이었다.
그 전까지는 지상의 와일드캣들을 가능한 여기저기 분산해 놓았으면 좋겠지만 만에 하나 울퉁불퉁한 지면 위를 이리저리 끌고 다니다가 일부가 망가지기라도 한다면 예비부품이 전혀 없기 때문에 바로 비행불능이 되고 말 것이었다.
할 수 없이 푸트넘 소령은 지상의 와일드캣들을 여기저기 분산시키지 않고 주기장소로 쓰던 공터 안에서 최대한 분산시켜 배치하기로 했지만, 공터 자체가 그리 넓지 않아서 비행기 사이의 간격은 채 100m 를 넘지 못했다.
(F4F 와일드캣 전투기, 승무원 : 1명, 길이 : 8.8m, 폭 : 11.6m, 최고속력 : 531km/hr, 항속거리 : 1,360km, 무장 : 12.7mm 기관총 4정, 45kg 짜리 폭탄 2발)
커닝엄 중령의 사령부는 민간인 거주지역인 웨이크 섬 북쪽의 캠프2에 있었고, 데브루 소령의 사령부는 섬 남쪽의 캠프1에 있었는데, 이곳이 사실상의 방어사령부였다.
비행대장 푸트넘 소령은 활주로 부근에 쳐놓은 텐트를 사령부로 썼다.
일본측에서 웨이크 섬을 공략할 임무를 맡은 것은 마샬 제도와 캐롤라인 제도에 주둔하고 있던 제4함대였다.
1941년 11월 5일에 도꾜에서 열린 어전회의 결과 미국 및 영국과 개전한다는 방침이 정해지자 트럭 섬에 있는 제4함대 사령부에도 곧 연합함대로부터의 명령이 도착했다.
그 명령서에는
“남양군도를 방어하고, 순찰하고, 해상교통로를 유지하고, 웨이크 섬을 탈취하라.”
고 되어 있었다.
제4함대 사령관이었던 이노우에 중장은 이 명령에 따라 우선 웨이크 섬에 폭격을 가하여 방어력을 약화시킨 뒤에 미국의 해병대에 해당하는 특별해군육전대 450명을 상륙시켜서 웨이크 섬을 점령할 계획을 짰다.
한편 웨이크 섬에서는 아침에 초계비행에 나섰던 4대의 와일드캣이 오전 9시에 잠시 착륙했다가 재급유를 마치고 다시 날아올랐다.
이들은 2대씩 짝지어서 3,600m 상공까지 상승한 다음, 적기가 접근할 가능성이 가장 높은 남쪽부터 초계하기 시작했다.
남쪽의 초계를 마친 와일드캣들이 북쪽으로 방향을 돌렸을 때, 1,200km 남쪽에 있는 로이 섬의 기지를 이륙한 일본의 제24항공함대 소속의 96식육상공격기(Nell) 34대가 3개의 V 자형 편대를 형성한 채 3,000m 고도로 웨이크 섬을 목표로 북상하고 있었다.
마침 그때 웨이크 섬의 남쪽에 스콜이 쏟아져서, 비구름이 불과 600m 높이까지 짙게 깔려 있었다.
일본군 폭격기들은 비구름을 뚫고 급강하하여 웨이크 섬의 남동쪽 끝인 Peacock Point, 즉 활주로가 끝나는 지점의 상공에 갑자기 나타났다.
(96식 육상공격기, Nell, 승무원 : 7명, 길이 : 16.5m, 폭 : 25m, 최고속력 : 375km/hr, 항속거리 : 4,400km, 무장 : 7.7mm 기관총 4정, 20mm 기관포 1문, 폭탄 800kg 또는 어뢰 1발)
피칵 포인트에 있는 E 대공포대장인 루이스 중위가 급강하 중인 일본기를 발견한 시간은 오전 11시 58분이었다.
루이스 중위는 즉시 J-line 을 통하여 공습경보를 발령했고, 이어서 일본기의 폭탄이 웨이크 섬에 떨어지기 시작했다.
원래 루이스 중위가 지휘하는 E 포대는 적기의 방위를 알려주는 방위지시기는 있지만 고도를 알려주는 고도계가 없어서, 필 섬의 D 포대가 보내주는 고도정보를 전화로 받아서 사격하게 되어 있었다.
하지만 시간이 없었으므로 E 포대는 루이스 중위의 눈짐작에 의존하여 고도를 결정하고 사격을 시작했다.
이이서 웨이크 섬의 모든 대공포 및 12.7mm 브라우닝 중기관총들이 대공사격을 시작했다.
일본기들은 와일드캣이 주기되어 있는 공터를 주로 겨냥하여 집중적으로 50kg 짜리 폭탄을 투하하고, 20mm 기관포탄과 7.7mm 기관총탄을 마구 퍼부었으며, 비행기지 건물에도 폭격을 가하여 큰 피해를 입혔다.
비행복을 입은 채로 활주로 근처의 텐트 속에서 비상대기 중이던 Robert "J" Conderman 소위와 George A. Graves 중위는 공습경보가 울리자 즉시 텐트에서 튀어나와 가장 가까운 와일드캣을 향하여 달렸다.
그레이브스 중위가 와일드캣에 도착하여 조종석을 향하여 기어오르는 순간 일본기가 투하한 폭탄 한발이 정확하게 명중하여, 기체가 불덩어리가 되면서 그레이브스 중위는 즉사했다.
콘더맨 소위는 와일드캣 바로 앞에서 일본기가 쏘아대는 7.7mm 기관총에 맞아 땅에 쓰러졌다. 이어서 일본기가 투하한 폭탄 한발이 와일드캣에 명중하여, 불타는 커다란 파편 하나가 날아와 그는 파편 아래 깔리고 말았다.
주변에 있던 해병대원들이 그를 겨우 끌어내었으나, 중상을 입은 콘더맨 소위는 그날 밤에 사망했다.
일본기들 중 일부는 필 섬 남쪽의 PAAville 지역을 폭격했다.
폭격을 시작한 지 10분 후인 12시 10분, 폭탄을 다 소모한 일본기들이 웨이크 섬 상공을 떠나 기지로 귀환하기 시작했다.
일본기들 중 8대가 대공포화에 맞아 피해를 입었으나 격추된 건 단 한 대도 없었다.
이 폭격으로 웨이크 섬은 상당한 피해를 입었다.
우선 지상에 주기되어 있던 8대의 와일드캣 중 7대가 전소하거나 완전히 박살이 나 버렸으며, 한 대는 예비연료탱크에 큰 구멍이 뚫렸으나 다른 곳은 멀쩡해서 예비연료탱크만 떼어내 버리면 비행이 가능했다.
지상에서 항공기와 통신할 수 있는 통신기도 부서져 버렸고, 각각 95,000 리터의 항공유를 저장하고 있던 2곳의 유류 저장소가 모두 폭발하여 하늘을 찌를듯이 치솟는 화염 속에서 190L 짜리 드럼통들이 마치 팝콘처럼 사방으로 튀어다녔다.
인명피해도 상당하여 2명의 조종사와 해병대 지상정비부대의 장교 1명을 포함하여 22명이 전사했고, 11명이 중상을 입었다.
민간인 건설노동자 25명도 사망했다.
또한, 활주로 부근에 설치되어 있던 정비물품 보관용 텐트가 일본기의 20mm 기관포탄에 맞아 벌집이 되는 바람에 많은 정비용 공구와 몇 개 되지도 않는 예비부품들이 망가지거나 불에 타 버렸다.
필 섬의 PAAville 도 공격을 받아서 이곳의 호텔과 판아메리칸 항공사의 비행정 접안설비 등 많은 시설물들이 불타 버렸고, 마침 초호에 정박해 있던 ‘필리핀 클리퍼’ 비행정도 23발의 20mm 기관포탄 및 7.7mm 기관총탄을 맞았으나, 다행히 비행에는 지장이 없었다.
호텔에서 일하던 차모로 출신의 종업원 5명과 판아메리칸 항공사 직원 9명이 사망했다.
‘필리핀 클리퍼’ 비행정의 승무원 2명도 부상을 입었다.
자신의 승무원들이 부상을 당하자 해밀턴 기장은 커닝엄 중령에게 웨이크 섬을 떠날 수 있도록 허락해 줄 것을 요청했다.
커닝엄 중령은 그의 요청을 받아들여 예정되었던 정찰비행을 취소하고, 웨이크 섬을 떠나는 것을 허락했다.
오후 1시 30분, ‘필리핀 클리퍼’ 비행정은 승객들과 판아메리칸 항공사의 직원들을 태우고 미드웨이를 향하여 이수했다.
공습 당시 하필이면 섬의 북쪽을 초계중이던 4대의 와일드캣 중 2대가 뒤늦게 철수하는 일본기들을 추격했으나, 요격에 실패하고, 아수라장이 된 활주로에 착륙했다.
그날 오후, Frank C. Tharin 대위가 실수로 드럼통을 쌓아놓은 곳에 와일드캣을 몰고 들어가 버렸다.
이 사고로 다행히 부상자는 없었으나, 고속으로 회전하면서 드럼통에 부딪힌 와일드캣의 프로펠러가 휘고, 엔진에 심한 진동이 생겨서 프로펠러 수리와 엔진 정비가 필요하게 되었다.
이제 제211해병전투비행단에서 비행가능한 와일드캣은 초계 비행 중이던 3대와 지상에 주기되어 있다가 예비연료탱크에 피해를 입은 1대등 총 4대에 불과했다.
단 한번의 공습으로 제211해병전투비행단은 60% 이상의 전력을 상실하고 말았다.
일본군의 제1차 공습은 대단히 성공적이었다.
일본기들의 공습이 성공한 가장 큰 이유는 역시 비구름 속에서 갑자기 튀어나와 기습에 성공했기 때문인데, 이는 웨이크 섬에 레이더가 있었다면 불가능한 일이었다.
해병대에게 있어서 예정되었던 레이더의 설치가 늦어진 것은 참으로 아쉬운 일이었다.
레이더가 없는 이상 와일드캣을 제외하면 웨이크 섬에서 일본기의 공습을 가장 멀리서 알아낼 수 있는 방법은 높이 15m 짜리 물탱크 위에 설치된 감시초소에서 쌍안경으로 찾아내는 것 뿐이었는데 그곳에서도 수평선까지의 거리는 15km 에 불과했다.
게다가 웨이크 섬같은 환초에서는 섬을 둘러싼 얕은 산호초에 부딪히는 파도소리가 상당히 크기 때문에 아주 가깝게 접근하지 않는 한 비행기 엔진소리를 들을 수가 없었다.
일본기들이 물러가자 해병대는 즉시 피해복구를 시작했다.
사망자들과 중상자들은 즉시 캠프2 의 민간인 병원으로 후송되었다.
그곳에서는 외과전문의인 해군군의관 Gustav M. Kahn 대위가 민간인 외과전문의인 Lawton M. Shank 박사의 도움을 받아서 부상자들을 치료했다.
섕크 박사는 일본군의 제2차 공습에서 민간인의 신분으로 일신의 위험을 무릅쓰고, 불타는 병원에 뛰어들어가 의료기구와 의약품 등을 밖으로 끌어내는 비상한 용기를 보여주었다.
이후로도 그는 웨이크 섬 전투 기간 내내 비오듯 쏟아지는 포화 속에서도 시종일관 침착하고 의연한 태도로 부상자들을 치료하여 해병대원들 사이에서 많은 존경을 받았다.
그는 비록 포로생활 도중에 사망하고 말았지만, 민간인으로서는 드물게 해군십자훈장이 추서되었다.
비행이 가능한 3대의 와일드캣은 급유를 마치고, 다시 이륙했다.
전사한 Graves 중위의 뒤를 이어 기술장교(Engineering Officer)로 임명된 Kinney 소위는 조종사인 Hamilton 기술중사(Technical Sergeant)의 도움을 받아 불타거나 파괴된 와일드캣들을 일일이 뒤져가며 쓸만한 부품들을 주워 모았다.
(키니 소위)
제211해병전투비행대의 지상요원들 중 많은 수가 전사하거나 중상을 입었기 때문에 조직도 재편해야만 했다.
킨 중령이 지휘하던 해군항공대에서 해병대에게 인원들을 파견해 주었다.
방어대대에는 13명이 파견되었는데 이들은 트럭운전병, 취사병, 그리고 불침번 역할을 했다.
전투비행대에는 3명이 파견되었는데 그 중의 한 명은 해군에 입대하기 전에 항공사에서 일했던 경력이 있어서 와일드캣 정비업무에 큰 도움이 되었다.
그 외에도 민간인 건설노동자들 중 엔지니어 2명이 자원하여 전투비행대의 정비를 도왔고, 한 사람은 전투비행대의 트럭운전사로 자원봉사했다.
해병대는 비행장 주변의 방위를 위하여 개인호와 방공호도 만들었고, 와일드캣을 보호하기 위한 옹벽 공사도 계속했다.
또한 크레테 섬에서 독일군의 공정부대가 했던 것처럼 일본군의 수송기가 웨이크 섬의 활주로에 강행착륙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하여 활주로 바닥에 45m 간격마다 다이너마이트를 묻었다.
그리고, 비행장 주변에서 강행착륙이 가능한 공터에는 전부 불도저로 깊은 도랑을 파 놓았으며, 야간에는 물론 낮에도 아군 비행기가 이착륙하지 않을 때에는 활주로에 일정한 간격으로 건설용 중기계들을 놓아두었다.
각 포대는 포의 거치 상태를 다시 점검하고, 개인호를 파고, 위장을 개선하고, 모래주머니를 더 쌓아서 방어력을 높였다.
초호로 들어가는 입구인 윌크스 수로에는 대량의 다이너마이트 위에 콘크리트 덩어리들을 적재한 해군의 거룻배를 정박시켰다.
지상에 노출된 전화선들 중 일부가 폭격에 끊어졌기 때문에 재가설해야 했고, 중요한 전화선은 2중3중으로 다시 설치하고, 가급적 땅에 묻었다.
좀 더 튼튼하고, 영구적인 전투지휘소나 엄폐호도 만들기 시작했다.
마지막으로 사망자들을 처리해야 했는데, 관이 없었기 때문에 정식으로 장례를 치를 여건이 될 때까지 캠프2에 있던 빈 의류상자에 시체를 넣어둘 수 밖에 없었다.
이 모든 일들을 폭격 직후부터 시작하여 해가 지기 전에 다 처리했다.
이미 일본군의 위력을 목격한 이후라 해병대원들의 작업속도는 비약적으로 빨라졌다.
민간인 건설자들 중에서도 일부가 자원봉사자로서 해병대원들의 작업을 도왔다.
커닝엄 중령은 전쟁이 발발한 후에도 민간인 건설노동자들에게 자신의 명령을 따르도록 강요하지 않았다.
따라서 해병대는 민간인 건설노동자들에게 자발적으로 피해복구와 방어준비를 도와줄 것을 호소했는데 민간인 건설노동자들 일부가 그 호소에 응하여 자원했다.
그들 중 일부는 인원이 모자란 대공포대나 기관총좌에 배치되었고, 대부분은 토목공사나 건설공사에서 해병대를 도왔다.
자원봉사자들의 숫자는 그리 많지는 않았으나, 일본군의 위력을 눈으로 직접 본 이후에 자진하여 해병대를 도우려고 나선 사람들인만큼 모두들 대단한 정열을 가지고 있었다.
또한 원래가 건설분야의 전문가들인데다가 자신들이 보유한 중장비들을 자유롭게 사용할 수 있어서 매우 효과적으로 작업했다.
따라서 이들은 웨이크 섬 전투 기간 내내 해병대에게 큰 도움이 되었으며, 그들 중 일부는 해병대에 자원입대의사를 밝히기도 했다.
밤이 되었지만 해병대원들은 자원봉사자들의 도움을 받아서 와일드캣을 위한 옹벽건설에 전력을 다했다.
그리하여, 다음날 새벽까지에는 지붕이 함석으로 덮인 셀터 8개를 완성하여, 비행가능한 4대의 와일드캣들을 좀 더 안전하게 보호할 수 있게 되었다.
전날 택싱 중에 드럼통 사이에 뛰어든 와일드캣은 아직 프로펠러 수리와 엔진 오버홀 작업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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