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1년 4월 18일, 태평양함대 사령관 Husband E. Kimmel 대장은 당시 미해군 참모총장(Chief of Naval Operations, CNO) 이었던 Harold Raynsford Stark 대장에게 웨이크 섬에 1개 대대 규모의 해병대를 주둔시켜야 한다고 강력하게 주장하는 내용의 보고서를 제출했다.
이 보고서에 담긴 주장이 옳다고 판단한 스타크 대장은 1941년 6월 23일, 제1해병방어대대와 해병전투비행대를 웨이크 섬에 배치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완편된 해병방어대대(marine defense battalion)의 병력은 장교 43명, 사병 939 명이며, 화력으로는 5인치(127mm) 해안포 3개 포대(6문), 3인치(76.2mm) M3 대공포 3개 포대(12문), 18정의 12.7mm Browning M2 중기관총, 30정의 7.62mm 기관총 등을 보유하고 있었다.
이외에 서치라이트와 청음기도 있었고, 특히 웨이크 섬에는 SCR-268 사격통제 레이더와 SCR-270B 탐지 레이더가 하나씩 배치될 예정이었다.
그러나 미해병대의 병력 부족으로 인하여 실제로 전쟁이 일어났을 때 웨이크 섬에 배치된 제1해병방어대대는 화포와 기관총은 모두 정수를 보유하고 있었으나, 병력은 정수의 40%가 채 못되는 장교 15명, 사병 373 명뿐이었고, 레이더도 없었다.
1941년 8월 8일, 수송선 USS Regulus 가 Lewis A. Hohn 소령이 지휘하는 장교 5명, 사병 173명으로 이루어진 제1해병방어대대의 선발대를 싣고 진주만을 출항하여, 19일에 웨이크 섬에 도착했다.
그들은 곧 웨이크 섬 남쪽의 버려진 벌목캠프가 있던 자리에 대대지휘소를 설치하여 이곳을 캠프1 이라고 불렀고, 웨이크 섬 북쪽에 있던 민간인 건설노동자들의 거주지역을 캠프2 라고 명명했다.
8월말까지에는 웨이크 섬에 길이 1,500m , 폭 60m 짜리 활주로도 완성되고, 주요 도로망도 정비되어 웨이크 섬의 풍경은 마치 미국의 소읍같은 모습으로 바뀌어갔으나 정작 중요한 방어시설의 건설은 지지부진했다.
해군항공대가 민간인 건설노동자들과 맺은 계약에는 방어시설에 대한 내용이 빠져 있었기 때문에, 해병대는 방어시설을 만드는데 민간인 건설노동자들을 동원할 수 없었음은 물론이고, 그들이 보유한 중장비도 사용할 수 없었다.
건설용 중장비가 부족한 해병대는 할 수 없이 인력으로 무거운 76.2mm 대공포와 5인치 해안포들을 이동시켜 배치하고, 삽과 곡괭이로 교통호와 개인호를 파고, 톱과 망치를 이용하여 필요한 건물들을 직접 지어야만 했다.
1941년 10월 15일, 혼 소령은 Devereux 소령에게 지휘권을 넘기고, 웨이크 섬을 떠났다.
지휘권을 넘겨받은 직후, 웨이크 섬의 방어태세를 점검해 본 데브루 소령은 곧 자신이
“해야 할 일은 엄청나게 많은데, 마땅한 방법도 없고, 시간도 없는”
진퇴양난의 처지에 빠졌다는 것을 알았다.
(데브루 소령)
엎친데 덮친 격으로 웨이크 섬의 해병대에게 또다른 임무가 떨어졌다.
즉 필리핀의 방위를 강화하기 위하여 B-17 기들이 태평양을 건너 필리핀으로 파견되었는데 웨이크 섬이 중간 기착지로 결정된 것이다.
그런데, 미육군항공대는 장교 1명, 사병 4명으로 이루어진 소규모의 연락반을 파견하는 이외에 추가로 이곳에 지상근무요원을 파견할 처지가 못 되었기 때문에 기착하는 B-17 을 재급유하는 임무가 해병대에게 떨어진 것인데, 시설이 열악하여 급유방식 또한 원시적이었다.
즉 해군의 급유선이 웨이크 섬의 유류저장소에 항공유를 가득 채운 후에 떠나버리면 해병대원들이 일일이 펌프를 이용해서 그 항공유들을 190L 짜리 드럼통에 옮겨담은 다음 활주로 부근에 쌓아두었다가, B-17 이 도착하면 그 드럼통의 항공유를 다시 펌프를 이용해서 급유차에 옮겨실으면 그 급유차가 B-17에 급유하는 방식이었다.
이때 급유를 좀 더 빨리 하기 위하여 해병대원들이 직접 드럼통을 굴려 활주로에 가져가서 펌프를 이용하여 급유차 옆에서 나란히 B-17에 급유하는 일도 비일비재했다.
이런 식으로 B-17 이 도착하기만 하면 밤이든 낮이든 달려나가서 B-17 한 기당 드럼통 60개에 가까운 11,000L 씩이나 급유해야 했다.
아이러니칼하게도 이렇게 해병대가 죽을 고생을 해가며 겨우 필리핀에 보내준 B-17 들은 진주만 기습 당일 정오에 실시된 일본군의 클라크 기지와 니콜스 기지 공습에서 대부분 지상에 주기한 채 파괴되고 말았다.
해병대는 여기에 더하여 배가 도착할 때마다 하역을 돕고, 배가 초호 안에서 제대로 회전하거나 방향을 잡을 수 있도록 서치라이트를 비추어 주는 등 힘들고 시간을 많이 잡아먹는 일들에 매달려야 했다.
데브루 소령이 부임한 지 2주일쯤 지난 후인 1941년 11월 2일, 진주만으로부터 수송선 USS Castor 를 타고 온 9명의 장교와 200 명의 사병으로 이루어진 제1해병방어대대 소속 장병들이 추가로 도착하여 웨이크 섬의 해병대 병력은 장교 15명, 사병 373 명으로 늘어났다.
1941년, 11월 29일, 웨이크 섬의 상공을 지켜줄 제211해병전투비행대(VMF-211)를 지원하기 위하여 Walter L.J. Bayler 소령이 인솔하는 50명의 지상정비요원들이 장비와 함께 수상기 모함인 USS Wright 호에 실려 웨이크 섬에 도착했다.
그리고, 라이트 호의 항해장교였던 Winfield S. Cunningham 해군중령이 상륙하여 데브루 소령에게서 웨이크 섬의 사령관직을 인수했다.
(커닝햄 중령)
또한 웨이크 섬을 기지로 하는 장거리 정찰을 위하여 해군의 PBY Catalina 기를 배치하기로 하여 이의 지원을 위하여 해군항공대 소속 8명의 장교와 58명의 기술병이 Campbell Keene 해군중령의 지휘 하에 상륙했다.
실제로 해군의 카탈리나 기 12대가 12월 2일에 웨이크 섬에 도착하여 장거리 정찰활동을 폈으나, 제211해병전투비행대가 도착한 다음 날인 12월 5일에 웨이크 섬 남쪽에 대한 정찰활동을 마지막으로 모두 철수해 버렸다.
웨이크 섬에 배치될 제211해병전투비행대 소속 조종사들은 11월 27일, 겨우 옷만 갈아입을 여유밖에 없을 정도로 갑작스럽게 이동명령을 받았다.
그들은 즉시 새로 수령한 F4F-3 Wildcat 을 몰고 오아후 섬의 Ewa 해병대 비행장을 이륙, 진주만의 Ford 섬에 있는 해군 비행장으로 이동하여, 다음날인 28일 아침 일찍 USS Enterprise 의 비행갑판에 착함했다.
원래 해병대 항공기가 해군의 항공모함에 이착함하는 일은 정규적인 훈련의 일부였으나, 제211해병전투비행대의 조종사들은 그들의 임무에 대하여 사전에 전혀 들은 바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이번에는 상당히 중요한 임무를 맡게 되리라고 예상하고 있었다.
즉 28일 아침에 포드 섬의 비행장을 이륙할 때 와일드캣 한 기의 시동장치가 말썽을 일으켜서 이륙을 못했는데, 그러자 즉각 엔터프라이즈에서 Devastater 뇌격기를 한 대 보내와서 그 조종사는 뇌격기의 뒷좌석에 타고, 엔터프라이즈에 착함했다.
그런데 그곳에는 이미 엔터프라이즈의 전투항공대인 VF-6에서 차출된 완전 신품인 와일드캣 하나가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제211해병전투비행대 소속의 조종사들은 훈련도 충실하게 받은 편이었고, 웨이크 섬으로 가는 도중에 엔터프라이즈에서도 이들에게 최대한으로 신경을 써 주어서, 조종사들과 와일드캣들의 상태는 최상이었다.
다만 이들은 와일드캣을 수령한지 얼마 되지 않았기 때문에 이 신형 비행기에 걸맞는 전술이나 사격법등을 연마할 시간이 절대적으로 부족했다.
1941년 12월 4일 아침, 엔터프라이즈가 웨이크 섬에서 마중나온 카탈리나 기와 만나자 제211해병전투비행대 소속 12기의 와일드캣은 즉시 엔터프라이즈를 이함하여, 2시간 후에 웨이크 섬의 활주로에 착륙했다.
배일러 소령이 지휘하는 50명의 해병대 지상정비요원들은 제211해병전투비행대를 지원하기 위하여 최선을 다했지만 웨이크 섬 비행장의 상황은 대단히 열악했다.
웨이크 섬이 원래 카탈리나 기 같은 장거리 초계비행정의 기지로서 건설되었기 때문에 다른 종류의 항공기를 지원하는 설비는 상당히 원시적인 편이었다.
활주로의 길이는 충분했으나, 폭이 좁아서 한번에 한 기씩만 이착륙을 할 수 있었으며, 적의 공습에서 비행기를 보호할 수 있는 셸터나 방호벽 등이 전혀 없었고, 주기장소는 활주로 부근의 공터 이곳저곳에 철판매트를 몇 장 깔아놓은 곳에 불과했는데, 유도로의 끝에 멈춤 표지판조차 없었다.
공터 자체도 그리 넓지 않았고, 일부 구역은 경사져 있어서 잘못하면 비행기가 미끄러져 내려가서 크게 부서질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급유시설은 B-17 에 급유할 때와 마찬가지였고, 해병대의 지상정비요원들 중 와일드캣을 잘 아는 사람은 거의 없는데다가 정비 매뉴얼도 없었으며, 예비부품이 전혀 없어서 중요한 부품에 조그만 손상이나 말썽이 생겨도 비행이 불가능해질 상황이었다.
게다가 기지에 보관되어 있던 45kg 짜리 폭탄의 형태가 와일드캣의 폭탄걸이와 맞지 않았다.
비행대의 무장담당장교였던 Freuler 대위가 고민 끝에 와일드캣의 폭탄걸이를 개조했다.
시설과 장비가 불충분한 상황에서 임시변통으로 개조했기 때문에 조종사들이 보기에 폭탄이 매달린 모양이 영 불안하게 보였지만 실전에서 사용해 본 결과 아무 문제없이 잘 작동했다.
그리하여 웨이크 섬의 와일드캣들은 12월 8일부터 1기당 45kg짜리 폭탄 2발씩을 운용할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이런 문제들 중 무엇보다도 조종사들이 와일드캣에 익숙하지 못하다는 점이 가장 큰 문제라고 판단한 제211해병전투비행대장 Paul A. Putnam 소령은 사령관 커닝엄 중령에게 허가를 받은 후 즉시 와일드캣들을 초계비행에 내보내기 시작했다.
(푸트넘 소령)
이 초계비행은 아침과 저녁에 실시되며 한번에 4대씩 이륙하여 웨이크 섬의 주변 80km 정도까지 정찰하는 방식이었는데 이때 조종사들은 정찰과 동시에 항법 및 계기훈련을 병행했다.
웨이크 섬의 비행장에는 귀환하는 조종사들에게 도움이 될 수 있는 전파식 귀환유도장비나 항법보조장비 등이 전혀 없었기 때문에 이런 훈련은 상당히 중요한 것이었다.
한편,1941년 12월 6일 현재 웨이크 섬의 지상 방어태세를 살펴보면,
우선 5인치(127mm) 해안포 3개 포대(6문)와 3인치(76.2mm) M3 대공포 6개 포대(12문)는 해병대원들이 하루에 12시간씩 일하면서 고생한 덕분에 모두 제자리에 배치되어 있었다.
이 포대들 중 필 섬에 있던 B포대(5인치 해안포)와 D포대(76.2mm 대공포)는 포대 주위에 모래주머니를 쌓아서 어느 정도의 방어력을 갖추고, 위장되어 있었으며, D포대의 경우 땅을 파서 1,400 발의 76.2mm 대공포탄을 저장할 공간을 가지고 있었다.
다만 해병대의 병력이 정수에서 크게 모자랐기 때문에 대공포대 중 윌크스 섬에 있던 F포대는 비어 있었고, D포대에는 정원인 8명 대신 6명이 배치되어 있어서 인원이 완전히 배치된 곳은 E포대 뿐이었다.
이들 중 오직 D포대만이 완전한 사격통제장치를 가지고 있었고, 웨이크 섬에 있던 E 포대는 방향지시기는 있으나, 고도계가 없어서 D포대로부터 전화로 적기의 고도에 관한 정보를 듣고 사격하도록 되어 있었다.
(76.2mm M3 대공포)
인원 부족은 기관총좌도 마찬가지여서 18정의 12.7mm Browning M2 중기관총이나 30정의 7.62mm 기관총좌 중 절반 이상이 운용에 필요한 최소인원을 채우지 못했다.
3개소의 5인치 해안포대들만이 그나마 인원이 완전히 배치되어 상태가 가장 양호했으나, 이곳에서도 공구, 예비 부품, 기타 자잘한 소모품들의 부족 현상이 있었다.
그리고, 5인치 해안포들은 설치된 이후 단 한발도 시험사격을 실시한 적이 없었다.
그럴 여유가 없었다.
각 포대들과 중요 지점, 그리고 사령부 사이에는 모두 전화선들이 가설되어 있었으며, 특히 중요한 곳에는 2중 3중으로 가설되었으나, 모두 지하에 묻지는 못하여서, 적의 포격이나 폭격에 의하여 끊어질 위험이 있었다.
그리고, 전화선 중 'J-line' 이라고 불리는 회선이 있어서, 회선 상의 누군가가 J-line 으로 전화를 하면, 모든 포대와 중요지점 및 사령관 등 회선에 연결된 모든 지점에서 동시에 들을 수 있었다.
2대의 대공서치라이트가 윌크스 섬에 배치되어 있었으나, 청음기가 없어서 그 효과는 반감되었다.
(웨이크 섬의 방어시설)
민간인 1,221 명을 제외하고, 웨이크 섬의 총 병력은 38명의 장교와 485명의 사병이었다.
그 중에서 제1해병방어대대가 장교 15명, 사병 373명, 제211해병전투비행대 소속 조종사와 지상정비요원들이 장교 12명과 사병 49명, 미해군항공대 소속 지상요원들이 장교 10명, 사병 58명, 미육군항공대 소속 연락반원들이 장교 1명, 사병 4명, 그리고 11월 26일에 웨이크 섬에 들렀던 잠수함 Triton에서 상륙한 수병 1명 등이었다.
미육군항공대 소속 연락반원들은 B-17 의 필리핀 파견과 관련하여 연락업무를 위하여 웨이크 섬에 파견된 인원들이었다.
이들 중 해군과 육군 소속 군인들은 비무장이었으므로, 실제로 전투에 투입될 수 있는 인원은 제1해병방어대대와 제211해병전투비행대 소속의 장교 27명, 사병 422명등 총 449명이었다.
보급상황을 보면 비록 일부 품목의 결핍은 심각했지만 전반적으로는 양호한 편이었다.
병사 개개인이 각각 90일분의 비상식량을 가지고 있었고, 창고에는 따로 6개월분의 식량이 저장되어 있었다.
웨이크 섬에는 물이 없었지만 빗물저장장치와 충분한 숫자의 증류장치가 있었기 때문에 물의 공급은 넉넉했다.
탄약과 항공기용 무장의 비축량은 단기간의 방어전을 치르기에는 충분했으나, 장기간의 방어전을 치르기에는 무리였다.
의료지원체계 또한 망망대해의 고도라는 지리적 위치를 생각하면 양호한 편이었다.
캠프1에 기본적 설비를 갖춘 해군의무실이 있어서 의과전문의인 해군군의관이 상주하고 있었고, 캠프2에는 2개의 병실에다가 격리실, 수술실까지 완벽한 설비를 갖춘 민간인 건설노동자들을 위한 병원이 있어서 그곳에도 역시 민간인 외과전문의가 한명 상주하고 있었다.
11월이 되자, 진주만으로부터 적의 공격에 대비하라는 경고가 들어오기 시작했다.
데브루 소령은 경고를 받자 민간인 건설노동자들에게 건설작업의 우선순위를 군사시설과 방어시설로 전환해 달라고 요청했지만 거절당했다.
이때부터 해병대는 병사들이 취침하는 각 텐트마다 개인탄약을 분배했고, 각 포대마다 유사시 즉각 사용할 수 있는 포탄의 재고량을 증가시키기 시작했다.
토요일이었던 12월 6일, 데브루 소령은 대대 전체가 참가하는 훈련을 실시했다.
훈련 결과에 비교적 만족한 그는 상륙 이후 일주일내내 평일과 같이 진행되던 해병대의 일과를 바꾸어서, 토요일 오후와 일요일은 휴식을 취하도록 명령을 내렸다.
그리하여 그날 오후부터 웨이크 섬의 해병대는 처음이자 마지막인 토요일 오후와 일요일의 느긋한 휴식을 즐길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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