웨이크 섬 전투(Battle of Wake Island)는 진주만 기습 직후인 1941년 12월 8일부터 23일까지 웨이크 섬과 그 주변에서 벌어진 미해병대와 일본군 사이의 전투를 말한다.
이 웨이크 섬 전투에서 449명으로 이루어진 미해병대는 열세한 병력과 장비에도 불구하고, 놀라운 투혼과 강력한 전투력을 발휘하여 12월 11일에 이 섬에 상륙하려던 일본군의 기도를 좌절시키면서 그들에게 태평양 전쟁 개전 이래 최초의 패배를 안겨 주었다.
결국 웨이크 섬의 미해병대는 미해군의 구원이 너무 늦어짐에 따라 12월 23일에 실시된 일본군의 제2차 공격에서 엄청난 전력의 열세를 극복하지 못하고 무릎을 꿇고 말았지만, 전투 기간 내내 그들이 보여주었던 용맹성은 일본군의 진주만 기습으로 공황상태에 빠져있던 미국의 일반 국민들과 미군 장병들에게 큰 감명을 주었다.

1. 역사적 배경  

웨이크 섬(Wake Island)은 호놀룰루에서 서쪽으로 약 3,700km, 괌에서 북쪽으로 약 2,400km 떨어진 북태평양에 위치하고 있다.
이 섬은 환초(Atoll)로서 Wake, Wilkes, Peale 이라는 이름을 가진 3개의 섬이 최장직경 1km 가량의 작은 초호(lagoon)을 둘러싸고 있다.
따라서 엄밀하게 말하면 웨이크 환초와 웨이크 섬은 서로 다른 의미이나, 일반적으로 웨이크 환초를 의미하는 용어로 웨이크 섬이 널리 쓰이고 있는 관계로 (이건 영어로도 마찬가지다. 대부분의 기술에서 웨이크 섬 전투는 Battle of Wake Island 로 표기하지 Battle of Wake Atoll 로 표기하지는 않는다.)앞으로 웨이크 환초도 뭉뚱그려서 웨이크 섬으로 부르도록 하겠다.
웨이크 섬의 총 면적은 약 6.5 제곱킬로미터, 표고는 가장 높은 곳이 해발 6m 정도이다.

웨이크 섬을 처음 발견한 서양인은 Los reyes 와 Tos Santos 라는 두 척의 배를 이끌던 스페인의 탐험가 Álvaro de Mendaña de Neyra 이다.
1568년 10월 26일, 식량과 물을 조달하기 위하여 이 섬에 상륙했던 그는 ‘걸어서 한 바퀴 도는데 8시간 정도 걸리는 불모의 섬'  인 이곳에는 물과 식량이 전혀 없다는 것을 깨닫고, 이 섬에 ‘San Francisco'  라는 이름을 붙여서 지도에 기입하고는 서둘러 떠났다.

1796년에 영국의 무역선 Prince William Henry 호를 타고 이곳을 방문한 William Wake 선장이 자신의 성을 따서 웨이크 섬이라고 명명했고, 이후 이 명칭으로 불리게 되었다.

1840년 12월 20일에 미국의 탐험대를  이끌던 Charles Wilkes 준장이 웨이크 섬에 도착하여, 환초를 이루는 세 개의 섬들과 초호를 조사한 후, 웨이크 섬보다 작은 두 개의 섬에 자신의 성과 탐험대 소속의 박물학자 Titian Peale 의 성을 따서 윌크스 섬과 필 섬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웨이크 섬이 최초로 유명해지게 된 계기는 Libelle 호 침몰사건이다.
1866년 3월 4일, 샌프란시스코를 떠나 호놀룰루를 경유하여 홍콩으로 가던 독일 선적의 650 톤급 범선 리벨 호가 항해 중에 폭풍우를 만나 웨이크 섬의 산호초에 부딪혀서 침몰했다.
Tobias 선장을 비롯한 30여명의 승객들이 웨이크 섬에 상륙했는데 그 중에는 세계적인 오페라 가수인 Anna Bishop 과 그녀의 남편인 Martin Shultz, 그리고 영국오페라 단원 3명이 포함되어 있었다.
섬에 상륙한지 21일째 되던 3월 25일, 그들은 리벨 호에 실려있던 대형보트와 그보다 소형인 구명정에 나누어 타고 섬을 떠났는데, 오페라 단원들과 슐츠 씨 및 다른 승객들을 태운 대형보트는 4월 8일에 괌에 도착하였으나, 토비아스 선장이 인솔한 구명정은 도중에 실종되고 말았다.
토비아스 선장은 웨이크 섬에 머물 때 금화와 보석 등 당시 가치로 약 15만 달러에서 30만 달러에 달하는 보물을 이곳에 묻었다.
이후 최소한 5 척 이상의 선박들이 그 보물을 찾기 위하여 웨이크 섬을 찾았으나 모두 보물을 찾는데 실패했고, 현재까지도 보물의 행방은 묘연하다.
리벨 호의 침몰과 웨이크 섬의 보물에 관한 이야기는 당시 전 세계의 많은 신문에 소개되어 사람들의 비상한 관심을 끌었다.
리벨 호의 잔해는 1940년까지도 남아 있었다고 한다.

1899년 1월 17일, 웨이크 섬은 정식으로 미국령이 되었다.

1922년에 잠수모함인 USS Beaver 가 웨이크 섬을 조사했고, 이듬해에는 소해함 USS Tanager 가 예일 대학교와 호놀룰루에 있는 비숍 기념관의 후원을 받는 과학자들을 싣고 이곳에 와서 7월 27일부터 8월 5일까지 10일간 과학적인 데이터를 모으고, 환초를 이루는 섬들의 면적을 측량하는 등 탐사를 했다.

1934년, 미행정부의 행정 명령에 따라 웨이크 섬의 관할권은 미해군에게 귀속되었다.

1935년, Pan American Airways 가 하와이에서 중국, 필리핀, 괌 등으로 향하는 항공기의 중계기지로서 웨이크 섬의 가치에 주목하여, 이곳에 여객용 대형 비행정을 위한 수상기 기지를 건설할 수 있도록 미해군에 허가를 요청했다.
해군 측에서는 이 계획을 허가하면서 이 기회에 해군기지도 만들기로 하여, 수송선 USS Nitro 를 파견하였으나, 섬에 상륙하려던 니트로의 보트 2대가 해상에서 실종되는 사고가 나면서 해군기지 건설 계획은 흐지부지하다가 결국 중단되고 말았다.

하지만 판아메리칸 항공사의 기지 건설은 착착 진행되어 수송선 North Haven 호가 1935년 5월 5일에 윌크스 섬에 도착하여 인원과 자재의 양륙을 시작했고, 곧이어 필 섬에 수상기 기지가 건설되어, 그해 8월 9일에는 판아메리칸 항공사 소속의  Martin M130   '필리핀 클리퍼' 대형비행정이 처음으로 웨이크 섬 부근의 해상에 착수하여 초호에 들어왔다.

 

(웨이크 섬의 초호에서 택싱 중인 필리핀 클리퍼 비행정)

 

당시 판아메리칸 항공사의 건설노동자들은 필 섬의 남쪽에 PAAville(Pan Amerian Airways village) 이라고 불리는 거주지역을 건설했는데 이것이 웨이크 섬의 첫번째 주거지였다.
PAAville 에는 작지만 호텔도 있었고, 소수의 가축을 기르고, 수경재배로 약간의 채소도 생산했으나, 대부분의 식량과 물, 그리고 생필품은 외부로부터의 보급에 의존했다.

1940년 12월 26일, 수송선 USS William Ward Burrows 호가 웨이크 섬에 해군항공대를 위한 수상기 기지와 지상 비행장을 건설할 공병대 80명과 2,000 톤의 물자를 싣고 진주만을 떠나서, 41년 1월 9일에 웨이크 섬에 도착했다.  
이렇듯 웨이크 섬에 군용비행장을 건설하게 된 배경에는 하와이, 괌, 웨이크 섬을 비롯한 태평양과 대서양의 미국 영토들을 요새화할 것을 주장한 헵번 보고서의 영향이 컸다.
이 보고서는 웨이크 섬의 가치를 높게 평가하면서, 향후 3년간 750만 달러를 들여서 이곳을 장거리 정찰기의 기지로서, 그리고 아시아 지역에 항공력을 전개할 때 중간기착지로서 개발할 것을 강력하게 권고했다.

이 권고에 따라 웨이크 섬의 기지화가 시작되었지만, 아직까지는 전시가 아니었기 때문에 평화시의 예에 따라서 막사와 비행정 접안 시설, 부두 등의 건설이 우선이고, 방어시설은 그 다음으로 우선순위가 떨어지는 형편이었다.
그리고 해군항공대는 PAAville 의 민간인 건설노동자들과 따로 계약을 맺어서, 버로우 호에 타고 상륙한 80명의 해군공병대와 함께 3개의 섬 중 가장 큰 웨이크 섬에 활주로와 주요 도로 및 각종 비행장 시설들을 건설했다.
이 민간인 건설노동자들은 해군항공대로부터 의뢰받은 공사를 위하여 PAAville 의 맞은 편인 웨이크 섬 북쪽에 나중에 해병대가 캠프2로 부르게 되는 민간인 거주구역을 따로 건설했다.
그리하여 전쟁이 발발했을 때 민간인 건설노동자들은 모두 캠프2 로 옮겨와 있었고, PAAville 에는 판아메리칸 항공사의 직원들과 호텔에서 일하는 인력만이 남아 있었다.

웨이크 섬 전투 당시 PAAville과 캠프2 에 거주하던 민간인의 수는 판아메리칸 항공사 직원 66명을 포함하여 총 1,221 명이었다.

Posted by 대사(P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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