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 여파

 

Z 부대의 구축함들이 구조작업을 하는 동안 말레이 해전의 결과는 세계로 퍼져 나갔다.

극동 지역의 영국함정들은 싱가포르와 동시에 Z 부대의 통신을 들었으며 통신장교는 암호를 해독한 다음 함장에게 전달했다.

 

싱가포르에 잔류했던 동양함대 참모장 팔리서 소장은 프린스오브웨일스가 침몰한 지 21분 후인 10일 오후 1시 45분에 런던의 해군성에 프린스오브웨일스와 리펄스가 적의 어뢰에 의하여 격침되었다고 타전했다.

여객선을 타고 막 싱가포르를 떠났던 전임 중국총사령관 제프리 레이튼 해군중장은 돌아가서 동양함대 사령관을 맡으라는 명령을 받았다.

 

싱가포르 당국은 프린스오브웨일스와 리펄스의 침몰 뉴스를 어떻게 다루어야 할지 고민했다.

숨길 수는 없었다.

일본은 자신의 영광스러운 승리를 발표할 것이었다.

또한 12월 10일 밤이 되면 구축함들이 생존자를 싣고 싱가포르 해군기지에 도착할 것인데 기지에는 수백명의 민간인 노동자가 일하고 있었다.

1941년 9월부터 싱가포르에서 전쟁내각을 대표하던 더프 쿠퍼는 솔직하게 발표하기로 결정했다.

10일 저녁에 싱가포르의 지역 라디오가 프린스오브웨일스와 리펄스의 침몰 사실을 보도했고 다음날 지역 신문이 일제히 보도했다.

극동 지역 영국군의 사기가 크게 떨어졌고 결코 회복되지 않았다.

 

일본은 더프 쿠퍼보다 빨리 자신들의 승전 소식을 전했다.

대본영은 아직도 생존자 구조작업이 진행 중이던 싱가포르 시간 10일 오후 2시 35분에 프린스오브웨일스와 리펄스를 격침했다는 사실을 해전의 간단한 전개 과정과 더불어 의기양양한 어조로 발표했다.

1시간 18분 뒤인 오후 3시 53분에는 일본 도메이 통신사가 영어로 대본영 발표 내용을 방송했다.

 

처칠 수상은 런던 시간으로 10일 새벽에 침몰 소식을 들었다.

늦게 자는 버릇이 있던 처칠이 자기 전에 서류함을 정리하고 있을 때 해군참모총장 파운드 제독이 전화를 걸어왔던 것이다.

처칠은 큰 충격을 받았다.

영국해군은 개전 이래 전함 몇 척을 상실하긴 했으나 2척을 한꺼번에, 그것도 이번처럼 일방적인 전투 끝에 허망하게 상실한 적은 없었다.

게다가 해군성의 반대를 무릅쓰고 그 전함들을 싱가포르로 보낸 사람은 처칠 자신이었다.

 

(영국수상 윈스턴 처칠. 자세한 내용은 여기로. 사진 출처 : https://en.wikipedia.org/wiki/Winston_Churchill)

 

더프 쿠퍼와 마찬가지로 처칠도 침몰 소식을 대중에게 숨기기는 불가능하다고 생각했다.

처칠은 10일 오전 11시 32분에 하원에 출석하여 일본군의 항공공격을 받아 프린스오브웨일스와 리펄스가 격침되었다고 보고했다.

같은 시각 해군성도 공식 논평을 내어 프린스오브웨일스와 리펄스의 상실을 확인했다.

BBC 라디오의 정오 뉴스가 프린스오브웨일스와 리펄스의 격침 소식을 전하면서 3척의 구축함에 구조된 생존자들이 싱가포르에 도착하기 전에 세계가 침몰 사실을 알았다.

10일 오후 영국 석간 신문의 헤드라인은 단연 침몰 소식이 차지했다.

 

프린스오브웨일스의 생존자를 싣고 남하하던 익스프레스는 고속으로 북상하던 구축함 5척을 만났다.

영국구축함 스트롱홀드와 미국구축함 4척(알덴, 에솔, 존D에드워드, 휘플)은 필립스 제독의 요청에 따라 북상 중이었다.

익스프레스는 전투가 끝났다고 알렸으나 미국구축함 4척은 전투해역으로 가서 생존자를 찾았다.

 

생존자를 찾지 못한 미국구축함들이 싱가포르로 돌아오려 할 때 에솔이 일본어선 쇼푸푸마루를 발견했다.

4척의 작은 보트를 끌고 있던  쇼푸푸마루는 전날 Z 부대가 발견했던 선박이었다.

에솔은 쇼푸푸마루를 나포하여 싱가포르로 끌고 왔고 영국군은 선원들을 강도높게 조사했다.

철저한 조사에도 불구하고 쇼푸푸마루와 일본군의 연관성은 나오지 않았으며 끌고 다니던 보트는 그물을 치기 위하여 필요한 것이었다.

조사가 끝난 후 쇼푸푸마루의 선원들은 억류되었다.

 

익스프레스는 10일 밤 11시 10분에 싱가포르 해군기지에 도착했고 이어서 호주구축함 뱀파이어가, 마지막으로 엘렉트라가 자정에 도착했다.

생존자들이 상륙하자 힘든 하루를 겪은 구축함 승조원에게 마침내 휴식이 주어졌다.

승조원은 대부분 즉시 곯아 떨어졌으며 상부에서는 12시간 동안 휴식을 허락했다.

 

상륙한 생존자들에게는 담배, 샌드위치 그리고 럼주가 지급되었다.

럼주는 무제한 공급했는데 과음을 유도하여 위에 남아있는 중유를 토해내게 하려는 의도였다.

배를 채우고 한숨돌린 생존자들은 지상근무 장교들이 앉아있는 책상 앞에 줄을 서서 계급, 이름, 군번을 이야기 한 후 승조원 숙소(Fleet Shore Accommodation)에 들어가 잤다.

 

일본군 비행장이 있는 사이공의 분위기는 침울한 싱가포르와 정반대였다.

호아시 소위는 제453전투비행대대의 버팔로에게 쫓겨 구름 속으로 도망치기 직전에 프린스오브웨일스가 전복되는 모습을 똑똑히 보았기 때문에 리펄스 뿐만 아니라 프린스오브웨일스도 침몰했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따라서 프린스오브웨일스가 살아남을 경우에 대비하여 현장으로 달려가던 수상함대와 잠수함들은 돌아오라는 명령을 받았고 수송선들은 도망칠 필요없이 양륙을 계속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일본군은 말레이 침공의 가장 큰 장애를 제거했다.

 

제22항공전대의 육상공격기들은 돌아오는 길에 사이공에 보내는 호아시 소위의 보고를 같이 들었기 때문에 자신들이 리펄스 뿐 아니라 프린스오브웨일스도 격침했다는 사실을 알았다.

연료가 모자라는 몇 대는 코타바루 비행장에 착륙했고 나머지는 사이공 부근의 기지에 착륙했다.

영국군의 대공포화에 맞아 심하게 피해를 입은 육상공격기 1대가 착륙 도중 망가졌다.

마지막으로 착륙한 것은 호아시 소위의 96식 육상공격기였는데 무려 13시간을 비행했다.

그날밤 일본 비행장에서는 밤새 잔치가 벌어졌으며 승무원들은 떡이 되도록 취했다.

 

영국해군에게 있어 1916년에 건조한 낡은 순양전함 리펄스가 5발의 어뢰를 맞고 격침된 것은 받아들일 수 있는 일이었다.

그러나 신형전함인 프린스오브웨일스가 단 1발의 어뢰로 치명적인 피해를 입었다는 사실은 가볍게 넘길 수 없었다.

프린스오브웨일스에 탔던 스킵워스 소령은 생존자들과 함께 6일간 강도높은 자체 조사를 진행한 후 보고서를 제출했다.

이 보고서는 안전을 위하여 2부가 제작되어 서로 다른 경로로 런던에 보내졌다.

스킵워스 보고서를 시작으로 프린스오브웨일스의 침몰에 관한 수많은 연구가 이루어졌다. 

 

호주제453전투비행대대장 팀 비거스 대위는 전투 다음날인 12월 11일에 동양함대 사령관에게 흥미로운 편지를 보냈다. 

편지에서 비거스 대위는 중유를 흠뻑 뒤집어 쓴 채 바다에서 구조를 기다리던 프린스오브웨일스와 리펄스의 승조원들이 자신의 버팔로를 보고 손을 흔들면서 환호성을 질렀다면서 어떤 난관에도 굴하지 않고 여유만만하게 헤쳐 나가는 영국해군의 강인한 모습에 가슴이 뭉클했다고 적었다.

 

비거스 대위는 편지를 항공사령부에 제출했으며 항공사령부는 해군에 전달했다.

해군성은 편지를 보관했다가 1954년에 출간한 공식전사에 실었다.

공식전사에서 비거스 대위의 편지를 읽어 본 프린스오브웨일스와 리펄스의 생존자들은 쓴웃음을 지었다.

당시 생존자들은 비거스 대위에게 손을 흔들면서 환호한 것이 아니라 너무 늦게 도착한 아군 전투기에게 주먹질을 하면서 쌍욕을 퍼부었던 것이다.

익스프레스에 구조된 프린스오브웨일스의 대공포 사수는 퇴함하기 전에 버팔로가 도착했다면 대공포로 쏴 버렸을 것이라고 말했다. 

 

프린스오브웨일스와 리펄스의 승조원 대부분을 훈련시킨 영국의 데븐포트에는 슬픔이 밀어 닥쳤다.

BBC 뉴스를 들은 승조원 가족들이 훈련소로 몰려와 생사 확인을 요구했다.

훈련소는 해군성에서 보내준 명단에 따라 해당 승조원이 최종 전투에서 프린스오브웨일스와 리펄스에 승함했는지부터 확인해 주었다.

양 함에 승함한 것이 확인된 승조원 가족들은 이제 피말리는 기다림의 시간을 겪어야 했다.

생존자들이 싱가포르에 상륙하면서 명단이 들어오기 시작했고 무사하다는 사실이 확인된 승조원의 가족은 가슴을 쓸어내렸다.

그러나 840명에 달하는 승조원의 가족은 사랑하는 아버지, 남편, 아들, 오빠 또는 동생의 죽음을 의미하는 '실종'(missing on the war service)이라는 통보를 받아야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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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 구조

 

전투가 끝난 후에도 일본기 몇 대는 상공에 남아 있었다.

늦게 이륙하여 연료가 남아있던 미호로 항공대와 마지막 공격을 감행했던 가노야 항공대의 일본기 몇 대가 남아 구조 작업을 지켜봤다.

 

그 중 1대가 리펄스가 가라앉은 해역에 저공으로 날아왔다.

퇴함하여 칼리뗏목에 타고 있던 생존자들이 공포에 질려 바다로 뛰어들었으나 일본기 승무원들은 리펄스가 가라앉은 해역에 거수경례를 하고는 날아가 버렸다.

 

일본기들은 퇴함한 생존자를 공격하거나 구조작업을 방해하지 않았다.

심지어 구조작업 중이던 영국구축함이 간간이 대공사격을 가해도 피하기만 할 뿐 반격하지 않았다.

일본기 승무원이 보여준 이런 신사적인 모습은 중일전쟁이나 태평양전쟁에서 보여준 일본군의 통상적인 모습과는 달랐다.

긍지 높은 정예병사인 일본기 승무원은 자신의 압승으로 끝난 전투에서 무력한 패자를 해칠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을 것이다.

 

다음날 가노야 항공대 제3분대장 이키 대위는 전투해역에 돌아와 바다에 화환을 던졌다.

적이지만 용감하게 싸웠던 영국해군 전사자에 대한 경의의 표시인지, 전날 격추되어 전사한 일본기 승무원의 넋을 기리기 위한 것인지 아니면 둘 다인지 그 의도에 대해서는 해석이 엇갈리지만 어쨌든 이례적인 행동인 것은 틀림없다.

 

일본정찰기 조종사 호아시 소위는 쿠안탄 비행장을 폭격하고 오후 1시경 전투 해역에 돌아와 해상의 상황을 사이공에 보고했다.

리펄스는 침몰했고 프린스오브웨일스는 침몰 중이며 구조 작업이 진행 중이라는 내용이었다.

 

호아시 소위를 제외한 일본기들은 오후 1시 10분까지 현장을 떠나 사이공으로 돌아갔다.

10분 후에 호아시 소위도 황급히 현장을 떠나야 했다.

호주군의 버팔로 전투기가 도착했던 것이다.

 

(브류스터 F2A 버펄로 전투기. 자세한 내용은 여기로 사진 출처 : http://en.wikipedia.org/wiki/Brewster_F2A_Buffalo)

 

호주제453전투비행대대장 팀 비거스 대위는 오후 12시 20분에 싱가포르 셈바왕 기지에서 이륙했다.

항공사령부로부터 전화로 출격 명령을 받은 지 1분 만에 이륙했기 때문에 브리핑 받을 시간이 없었다.

그가 받은 명령은 쿠안탄에서 남남동 방향으로 90km 떨어진 해상으로 가서 일본기의 공격을 받고 있는 영국함정을 도우라는 구두 명령이 전부였다.

5분 만에 버팔로 11대가 이륙했으나 1대는 이륙 직후 엔진 고장으로 돌아가고 10대가 이륙 1시간 만인 오후 1시 20분에 현장에 도착했다.

팀 비거스 대위가 현장에 도착했을 때 리펄스는 이미 가라앉은 후였고 프린스오브웨일스는 전복된 상태였으며 4분 후에 완전히 가라앉았다.

 

버팔로 조종사 1명이 현장 상공에서 호아시 소위 탑승기를 발견했으나 호아시 소위 또한 동시에 버팔로를 발견하고 전속력으로 도망쳤다.

마침 부근에 있던 구름 속으로 뛰어든 호아시 소위는 쫓아오던 버팔로를 따돌리고 무사히 돌아갔다.

버팔로들은 편대별로 고도를 달리해가며 주변을 뒤졌으나 일본기들은 이미 사라진 후였다.

제453전투비행대대는 구조작업 중인 영국구축함의 상공을 1시간 가량 지키다가 연료가 떨어지자 셈바왕 기지로 돌아갔다.

 

프린스오브웨일스의 침몰로 구축함 엘렉트라의 함장 메이 중령이 Z 부대의 선임 장교가 되었다.

1941년 12월 10일 오후 1시 18분, 엘렉트라는 말레이 해전이 시작된 이래 9번째이자 세계를 놀라게 한 마지막 전문을 발신했다.

 

<프린스오브웨일스 침몰>

(H.M.S. PRINCE OF WALES SUNK.)

 

이 전문은 3분 후인 1시 21분에 싱가포르 총사령부(G.H.Q. Singapore)에 도착했다.

 

일본기가 사라진 후 영국구축함은 구조에 전념했다.

날씨는 따뜻하고 바다는 잔잔하며 일본기도 없었으므로 구조에 유리했다.

구축함들은 양현에 스크램블 넷(scramble net)을 늘어뜨려 생존자가 타고 올라오게 했으며 멀리 떨어져 있는 생존자에게는 밧줄을 던져주기도 했는데 밧줄은 중유로 뒤덮인 바다에서는 미끌거려서 잡기가 어려웠다.

 

(스크램블 넷. http://coenshse.com/equipment/equipment0201.php)

 

구축함에 구조된 생존자 중 부상자를 제외하고는 대부분 햇볕이 작열하는 구축함의 강철갑판에 수용되었다.

생존자들은 갑판에 도착하면 대부분 바닷물이나 중유를 토해내었고 그러면 승조원들이 럼주와 담배를 가져다 주었다.

정신을 차린 생존자 중 일부는 자신의 직별을 살려 구조작업을 도왔다.

가령 대공포 사수가 구축함의 대공포를 담당하여 기존 사수가 구조작업에 동참할 수 있었다.

 

비극도 있었다.

심한 화상 환자를 비롯한 중상자는 구축함의 선실에서 치료를 받았는데 시설이 미비하여 군의관은 모르핀을 주는 이외에 달리 치료할 방법이 없었다.

부상자 중 일부는 구조된 이후에 구축함에서 사망했다.

 

리펄스가 침몰한 지 90분쯤 지난 오후 2시가 되자 리펄스 생존자의 구조는 일단락되었다.

엘렉트라의 함장 메이 중령은 호주구축함 뱀파이어에게 한번 더 리펄스의 생존자를 찾아보라고 명령한 후 몇 km 떨어진 프린스오브웨일스의 침몰 지점으로 갔다.

프린스오브웨일스의 생존자를 구하던 익스프레스는 이미 수용한계에 달했는데 아직 바다에는 생존자 약 300명이 구조를 기다리고 있었다.

익스프레스는 나머지 생존자의 구조는 엘렉트라에 맡기고 싱가포르로 철수했다.

1시간 후에는 리펄스 생존자 수색을 마친 뱀파이어도 메이 중령의 명령에 따라 싱가포르로 철수했다.

 

3척의 구축함은 2,100명 정도를 구했는데 중상자 몇 명은 싱가포르까지 오는 도중 사망하여 싱가포르에 도착한 생존자 수는 2,081명이다.

가장 많이 구조한 것은 익스프레스로 프린스오브웨일스의 생존자 약 1,000명을 구했고, 엘렉트라는 리펄스의 승조원 571명을 포함하여 약 900명을 구했다.

유일하게 정확한 기록이 남아있는 것은 크기가 작은 호주구축함 뱀파이어로서 리펄스의 함장 테넌트 대령을 포함한 리펄스 승조원 222명과 프린스오브웨일스의 승조원 2명, 그리고 민간인 종군기자인 데일리 익스프레스의 오다우드 갤러허를 구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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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 침몰

 

리펄스는 가노야 항공대의 공격으로 12월 10일 12시 22분에서 26분 사이에 5발의 어뢰를 얻어맞고 치명타를 입었다.

함장 테넌트 대령은 리펄스가 살아날 수 없다는 점을 깨닫고 함체가 왼쪽으로 10도까지 기울어지자 예비 명령을 내렸다.

 

"전원 갑판으로. 퇴함 준비. 하느님께서 제군과 함께 하시길." 

("All hands on deck. Prepare to abandon ship. God be with you.")

 

모든 구역에서 승조원들이 쏟아져 나와 갑판으로 올라왔다.

테넌트 함장은 기울기가 30도에 이르자 명령을 내렸다.

 

"퇴함"

("Abandon ship.")

 

승조원들은 바다에 뛰어들었다.

명령에 따라 모든 승조원들은 24시간 전부터 고무로 만든 구명동의를 입고 있었다. 

입으로 공기를 불어넣어 부풀려야 하는 구식이었으나 부풀리는 데에 몇 초면 충분했다.

일부 승조원은 칼리뗏목을 탔다.

모터가 달린 구명정은 띄우는데 시간이 많이 걸려 사용하지 못했다.

 

(칼리 뗏목. http://cs.finescale.com/fsm/modeling_subjects/f/7/t/153205.aspx?pi240=3)

 

퇴함은 바쁜 와중에도 질서정연하게 이루어졌으며 수영이 능숙한 승조원들은 수영을 못하면서 구명동의를 잃어버린 승조원들에게 기꺼이 자신의 구명동의를 벗어주었다. 

몇 분 만에 수백명의 승조원들이 안전하게 함을 떠났다.

많은 승조원들이 퇴함 과정에서 중요한 소지품들을 잃었는데 해군성 사진사인 아브라함 대위는 퇴함 과정에서 전투 장면을 찍은 귀중한 필름을 몽땅 분실했다.

 

리펄스의 침몰이 빨랐기 때문에 장갑판 아래의 탄약고, 기관실 및 보일러실에 있던 승조원들은 반응 시간에 따라 생사가 갈렸다.

함의 아래쪽에서 탈출하려면 해치를 열면서 여러 층을 통과해 올라와야 했는데 주 장갑판에 달린 해치는 무거웠기 때문에 특히 배가 기울어진 상태에서는 아래에서 열지 못할 위험이 있었다. 

뇌격의 여파로 스피커가 작동하지 않는 곳이 많았기 때문에 피격 직후 함이 기울어지는 것을 느끼자마자 퇴함 명령에 관계없이 탈출을 감행한 승조원은 살 수 있었다.

그러나 책임감이 강하여 퇴함 명령을 기다리다가 탈출 시간을 놓치거나 아니면 일찍 출발했음에도 운이 나빴던 승조원은 갑판에 도달하지 못했다.

리펄스에서는 후드와 달리 대규모의 내부 폭발이 없었음에도 전체 승조원의 40% 가까운 전사 및 실종자를 기록했는데 대부분 함체 깊숙한 곳에 있다가 탈출에 실패한 경우였다.

 

리펄스는 왼쪽으로 쓰러진 후 뒤쪽부터 가라앉았다.

수심이 60m 밖에 되지 않았기 때문에 함미가 먼저 바닥에 닿았고 이어서 함수가 사라졌다.

그때 시간이 오후 12시 33분..리펄스가 최초의 어뢰를 맞은지 11분, 마지막 어뢰를 맞은지 불과 7분 후였다.

시간이 급박했기 때문에 부상자를 따로 챙길 시간이 없어서 희생자가 늘어났다.

 

프린스오브웨일스는 리펄스와 달리 가노야 항공대의 공격으로 치명상을 입고도 1시간을 더 버텼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시간 여유가 있었다.

따라서 부상자들까지도 칼리뗏목에 태우거나 구축함 익스프레스로 옮겨 퇴함시킬 수 있었다.

 

오후 1시에 구축함 익스프레스가 프린스오브웨일스의 우현으로 다가와 건널판자를 걸쳤다.

그러자 일단의 장교들이 건너갔고 이 광경을 지켜보던 승조원 일부가 장교들의 등에 대고 쌍욕을 퍼부었다.

장교들은 고개를 푹 숙인 채 아무 대꾸도 하지 않았으나 이들은 사실 억울했다.

함장 존 리치 대령이 필수 인원이 아닌 장교에게 퇴함을 명했고 이들은 명령에 따라 중요한 서류를 챙겨 익스프레스로 옮겨탔던 것이다. 

 

오후 1시 10분에 퇴함 명령이 떨어졌다.

승조원들은 단정을 묶은 밧줄을 끌러서 배가 가라앉으면 자동적으로 뜨도록 만들었고 단정갑판에 있던 통나무를 묶어놓은 밧줄도 끊었다.

널빤지 약 50장도 배의 양옆으로 던져놓아 퇴함한 승조원들이 잡고 매달릴 수 있게 했다.

 

퇴함 과정에서 진기한 광경도 벌어졌다.

구내 매점에서는 담배와 초컬릿을 모두 내놓아 마음대로 집어갈 수 있게끔 했으며 심지어는 파운드화와 싱가포르 달러까지 모두 내놓아 퇴함하는 승조원이 한 웅큼씩 집어갔다.

취사병은 그 와중에 샌드위치와 커피를 만들어 퇴함하는 승조원에게 나눠 주었다.

 

오후 1시 15분부터 프린스오브웨일스의 경사가 심해지면서 우현에 붙어서 부상자를 받아들이고 있던 구축함 익스프레스가 물러서야 할 시간이 다가왔다.

거대한 전함이 급격하게 왼쪽으로 쓰러질 경우 익스프레스는 우현의 빌지 킬에 부딪혀 전복될 수 있었다.

그러나 익스프레스의 함장 카트라이트 소령은 한명의 부상자라도 더 받기 위하여 마지막 순간까지 우현에 붙어 있었다.

 

오후 1시 20분 경 프린스오브웨일스가 왼쪽으로 쓰러지자 익스프레스는 재빨리 물러섰다.

프린스오브웨일스의 거대한 우현 빌지 킬이 솟구치면서 익스프레스의 좌현 빌지 킬에 걸렸다.

익스프레스는 우현으로 크게 기울었으나 전복은 면했다.

 

(빌지 킬. https://en.wikipedia.org/wiki/Bilge_keel)

 

많은 승조원들이 익스프레스에 가까이 가기 위하여 우현으로 뛰어내렸고 더 많은 승조원들이 상갑판 앞쪽에서 10m 아래의 해면으로 뛰어내렸다.

 

톰 필립스 제독은 프린스오브웨일스가 전복되기 10분 전 퇴함권유를 받았으나 거부하고 참모들에게 퇴함을 명했다.

참모들은 대부분 목숨을 건졌다.

 

필립스 제독의 마지막 모습을 본 사람은 함대어뢰관인 힐러리 노만 중령이다.

노만 중령은 침몰 직후 바다에 떠다니는 필립스 제독의 시체를 보았다.

처음에 노만 중령은 시체에 다가가서 유족을 위하여 사관학교 졸업반지를 비롯한 유품을 회수하려 했으나 너무 엽기적이라는 생각이 들어 포기했다.

 

대공포를 지휘하던 그레이엄 대위는 구명동의를 입은 채로 바다를 떠돌던 함장 리치 대령을 발견했다.

다가가서 확인해보니 리치 대령은 목이 부러져 숨져 있었다.

그레이엄 대위는 부하들과 함께 리치 대령의 시체를 익스프레스로 끌고 가려고 했으나 너무 힘들어 포기했다.

리치 대령의 전사 소식을 들은 아들 헨리 리치는 자신의 아버지가 함이 가라앉으니 함장으로서 운명을 함께 한다는 따위의 구닥다리 사고 방식을 가진 사람이 아니라며 톰 필립스 제독이 퇴함 허가를 늦게 내주는 바람에 탈출 기회를 놓쳤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실제로 리치 대령은 일단 탈출했다가 프리스오브웨일스가 침몰할 때 소용돌이에 빨려 들어가 사망했을 가능성이 크다.

프린스오브웨일스의 사망 및 실종자는 전체 승조원의 20% 정도였다.

 

최후의 시간이 다가왔다.

프린스오브웨일스는 왼쪽으로 쓰러진 다음 완전히 뒤집혀서 배 밑바닥을 드러내더니 함미부터 바닷속으로 사라졌다.

1941년 12월 10일 오후 1시 24분의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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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 결전

 

Z 부대에 주어진 휴식은 20분에 지나지 않았다.

1941년 12월 10일 오후 12시 20분, Z 부대의 견시가 동쪽에서 접근하는 일본기들을 발견했다.

 

기함 프린스오브웨일스와 리펄스는 4km 정도 떨어져 있었다.

프린스오브웨일스는 좌현으로 10도 기울어진 상태로 오른쪽 기관만을 사용하여 15노트의 속력을 내고 있었고 조향이 불가능했다.

리펄스의 상태는 양호했다.

280km 떨어진 셈바왕 비행장에서는 버팔로 전투기들이 이륙하고 있었다.

 

일본기들을 발견했을 때 필립스 제독은 구조 요청을 발신했다.

 

<지급

좌현에 어뢰 1발이 명중함. NYTW022R06.어뢰 4발. 리펄스도 1발의 어뢰에 맞음. 구축함 파견을 요청함.>

(EMERGENCY

HAVE BEEN STRUCK BY A TORPEDO ON PORT SIDE. NYTW022R06. 4 TORPEDOES. REPULSE HHIT BY 1 TORPEDO. SEND DESTROYERS.)

 

리펄스보다 22분 늦게 12시 20분에 발신된 필립스 제독의 구조 요청은 2가지 사실을 보여준다.

 

첫째, 필립스 제독은 리펄스도 어뢰에 맞은 것으로 알고 있었다. 즉 Z 부대의 상황을 정확하게 파악하지 못하고 있었다.

둘째, 놀랍게도 전투기가 아닌 구축함을 보내달라고 요청했다. 이것은 항공력에 대한 필립스 제독의 낮은 인식 수준을 보여준다.

 

이때 Z 부대에 접근하던 일본기들은 가노야 항공대 소속의 1식 육상공격기 3개 분대 26대로 204kg 짜리 탄두를 장착한 91식 2형 항공어뢰를 장비하고 있었다.

가노야 항공대는 싱가포르와 같은 위도까지 남하했다가 호아시 소위의 보고를 듣고 북서쪽으로 향했는데 Z 부대 상공 도착했을 때 구름이 끼어 해면이 보이지 않았다.

연료가 달랑거렸으므로 귀환 경로로 변침했는데 그 순간 구름 사이로 왈루스 수상기를 보았다.

가노야 항공대 공격대장 미야우치 소좌는 방향을 바꾸어 접근했고 곧 Z 부대를 발견했다.

 

(미츠비시 G4M 1식 육상공격기. 자세한 내용은 여기로. 사진출처 : https://en.wikipedia.org/wiki/Mitsubishi_G4M)

 

제1분대(나베타 대위, 9대)와 제2분대(히가시모리 대위, 8대)는 프린스오브웨일스를 목표로 삼았고 제3분대(이키 대위, 9대)는 리펄스를 목표로 정했다.

프린스오브웨일스를 노린 17대 중에서 6대만 공격했고 나머지 11대는 마음을 바꾸어 리펄스를 공격했다.

 

가노야 항공대는 연료가 부족하여 대형을 갖추고 공격할 여유가 없었다.

따라서 앞선 공격과는 달리 일본기들은 열을 짓지 않고 개별적으로 다가와서 어뢰를 떨구고 이탈했다.

 

(영국전함 프린스오브웨일스. 자세한 내용은 여기로.

사진 출처 : https://en.wikipedia.org/?title=Sinking_of_Prince_of_Wales_and_Repulse)

 

프린스오브웨일스의 처지는 절망적이었다.

오른쪽 두 개의 프로펠러 회전속도를 분당 204회에서 220회로 올렸으나 조향이 불가능한 상황에서 15노트의 속력으로 약간 왼쪽으로 나아갈 뿐이었다.

일본기가 접근 중인 우현에 자리잡은 5.25인치 대공포 연장포탑 4개 중에서 전방 2개 포탑(S1, S2)만이 사격할 수 있었다.

폼폼대공포 일부도 전원이 끊겼으며 일부는 고질적인 걸림이 발생했다. 

따라서 일본기들은 뇌격 과정에서 피해를 입지 않았다.

 

선두의 6대가 프린스오브웨일스의 우현에 500m 까지 접근하여 어뢰를 떨어뜨렸다.

거리가 가까웠으므로 프린스오브웨일스의 콜즈 하사가 루이스 기관총으로 투하된 어뢰 1발이 해면에 닿기 전에 명중시켜 폭파했으나 나머지 어뢰는 그대로 다가왔다.

조향이 불가능한 상황에서 프린스오브웨일스의 함장 리치 대령은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3발의 어뢰가 프린스오브웨일스의 우현에 차례차례 명중했다.

12시 23분에 2발의 어뢰가 함수와 함미에 명중했고 30초 후에 3번째 어뢰가 B 주포탑 아래 명중했다.

함미에 명중한 어뢰는 우현 바깥쪽 추진축을 안쪽으로 휘게 만들었으며 휘어진 바깥쪽 추진축은 안쪽 추진축과 함체 사이에 끼어 회전을 멈추었다.

 

(프린스오브웨일스의 우현 피격 상황. 출처 : http://www.pacificwrecks.com/ships/hms/prince_of_wales/death-of-a-battleship-2012-update.pdf P.43)

 

우현에 3발의 어뢰를 추가로 맞은 프린스오브웨일스는 치명적 피해를 입었다.

바닷물이 들어찬 격실은 공기가 들어있을 때보다 충격파를 훨씬 잘 전달했다.

탄두의 폭발로 생긴 충격파는 역침수를 위하여 바닷물을 채운 격실을 통하여 함체에 피해를 주었고 충격파를 맞아 찢어진 함체 내부로 중유와 바닷물이 섞여 들어왔다.

이제 프린스오브웨일스에는 18,000톤이 넘는 바닷물이 들어찼다.

4개의 기관 중 구동하는 것은 1개로서 속력은 8노트로 떨어졌고 8개의 발전기 가운데 2개만이 살아남았다.

대공포의 전원이 나갔고 함의 많은 구역에서 조명, 환기 및 펌프를 이용한 배수가 불가능해졌다. 

 

불행 중 다행이라면 뇌격으로 인한 사상자가 많지 않았다는 점과 화재가 발생하지 않았다는 점 정도일 것이다.

게다가 우현에 대량 침수가 일어나면서 좌현 9도에 달했던 함체의 기울기가 3도로 줄어들었다.

하지만 배의 흘수가 깊어지면서 프린스오브웨일스는 가라앉기 시작했다.

 

프린스오브웨일스를 노렸던 17대의 뇌격기 중 선두의 6대를 제외한 11대는 마음을 바꾸어 리펄스에게 달려들었다.

이제 리펄스는 우현에서 접근하는 이키 분대 이외에 프린스오브웨일스를 공격하려다가 방향을 바꾸어 함수 쪽에서 달려드는 나베타 분대 및 히가시모리 분대와도 교전해야 했다.

그나마 다행인 점은 리펄스의 피해가 250kg 폭탄 1발에 맞은 것이 전부로서 함의 기동력에 문제가 없었고 대공포도 대부분 작동했다는 점이었다.

 

(순양전함 리펄스. 자세한 내용은 여기로.사진 출처 : https://en.wikipedia.org/wiki/HMS_Repulse_(1916)

 

먼저 공격한 것은 프린스오브웨일스를 공격하려던 나베타 및 히가시모리 분대의 뇌격기 11대였다.

일본기들은 2개로 갈라졌다.

나베타 분대 3대와 히가시모리 분대 5대, 함계 8대는 함수 우현, 2,280m 거리에서 어뢰를 떨어뜨렸다.

리펄스가 변침하는 순간 나머지 3대의 일본기가 함수 좌현, 1,900m 거리에서 어뢰를 떨어뜨렸다.

함장 테넌트 대령은 리펄스가 함정에 빠졌다는 것을 깨달았다.

어느 한쪽의 어뢰를 피하려고 방향을 바꾸면 반대쪽에서 달려오는 어뢰에 옆구리를 내줄 수 밖에 없었다.

리펄스는 3발의 어뢰에 맞을 위험을 감수하고 8발의 어뢰가 달려오는 오른쪽으로 꺾을 수 밖에 없었다.

 

거대한 함체가 27.5노트의 속력으로 우회전하면서 우현에서 다가오는 8발의 어뢰를 모두 피했다.

리펄스는 좌현에서 다가오는 어뢰 2발도 피했으나 마지막 1발만은 피하지 못했다.

오후 12시 22분, 좌현에서 발사된 어뢰 중 1발이 리펄스의 좌현 중앙에 명중했는데 다행히 벌지에 맞았다.

벌지 안으로 침수가 진행되었으나 보수관 덴디 중령이 재빨리 역침수를 실시하여 기울기를 바로잡았고 리펄스는 여전히 25노트의 속력을 낼 수 있었다.

그러나 리펄스의 행운도 이제 끝나가고 있었다.

숨돌릴 틈도 없이 이키 분대의 뇌격이 시작되었다.

 

분대장 이키 대위는 3개 소대 9대로 이루어진 자신의 분대를 2개로 나누었다.

자신이 이끄는 1개 소대 3대는 좌현에서, 나머지 2개 소대 6대는 우현에서 공격했다.

이키 대위의 소대는 리펄스가 첫번째 어뢰를 맞는 순간 리펄스의 좌현 500m 거리에서 어뢰를 떨어뜨렸다.

어뢰를 떨어뜨린 3대의 일본기 중 이키 대위 탑승기를 제외한 2대는 리펄스의 함수 상공을 통과하다가 대공포화에 맞아 격추되었고 승무원들은 모두 사망했다.

그러나 이키 소대가 떨어뜨린 3발의 어뢰는 모두 명중했다.

 

1발은 좌현 기관실, 1발은 후방 15인치 포탑 부근, 마지막 1발은 함미에 명중했다.

이키 대위가 떨어뜨린 마지막 어뢰는 함미에 명중하면서 방향타에 충격을 가해 고정시켰다.

오른쪽으로 돌고 있던 리펄스는 이제 조향이 불가능해져 오른쪽으로 큰 원을 그리며 돌았다.

우현에서 공격한 6대는 먼거리에서 어뢰를 떨어뜨렸는데 6발의 어뢰 중 1발이 오후 12시 26분에 우현 E 보일러실 부근에 명중했다.

 

4분 만에 5발의 어뢰를 얻어맞은 리펄스는 치명적 피해를 입었다.

함장 태넌트 대령은 리펄스가 버티지 못할 것을 알고 칼리 뗏목을 펴라고 명령하는 동시에 승조원들에게 빨리 갑판으로 나오라고 명령했다.

 

(칼리 뗏목. http://cs.finescale.com/fsm/modeling_subjects/f/7/t/153205.aspx?pi240=3)

 

가노야 항공대는 뛰어난 실력을 보여주었다.

10분 간의 전투에서 가노야 항공대는 26발의 어뢰 중 3발을 프린스오브웨일스에, 5발을 리펄스에 명중시켜 양함의 숨통을 끊어놓았다.

그 댓가로 2대가 격추되었고 3대가 심각한 피해를 입었으며 5대가 가벼운 피해를 입었다.

가노야 항공대의 공격이 끝났을 때는 오전 12시 30분으로 미호로 항공대의 폭격이 시작된 지 1시간 30분이 지났다.

 

말레이 해전의 승패는 이미 결정났지만 전투는 완전히 끝나지 않았다.

아직 미호로 항공대 제2분대(다케다 대위, 8대) 및 제3분대(오히라 대위, 9대)가 남아 있었다.

96식 육상공격기 2개 분대 17대는 모두 500kg짜리 고폭탄 1발씩을 가지고 있었다.

 

(미츠비시 G3M 96식 육상공격기, 자세한 내용은 여기로. 사진출처 : https://en.wikipedia.org/wiki/Mitsubishi_G3M)

 

9대로 이루어진 오히라 분대의 공격은 어이없이 끝났다.

오히라 분대는 가노야 항공대의 공격이 끝난 직후인 오후 12시 33분에 Z 부대를 발견하고 접근했다.

이때 오히라 대위 탑승기의 폭격수가 실수로 폭탄을 떨어뜨리자 나머지 폭격기도 모두 폭탄을 떨어뜨렸다.

Z 부대의 승조원들은 수평선에 떨어지는 폭탄을 보고 피해를 입은 일본기가 폭탄을 버리는 것으로 생각했다.

 

12시 41분, 프린스오브웨일스의 견시가 접근 중인 다케다 분대의 폭격기 8대를 발견했다.

사격이 가능한 5.25인치 양용포 연장 3개 포대(S1, S2, P2)가 사격을 시작했으나 P2 포탑은 곧 윤활유가 새면서 작동을 멈추었다.

나머지 2개 포대의 사격도 부정확했다.

거리측정수가 오른쪽 눈을 다쳐 거리 측정이 되지 않았다.

폼폼대공포를 비롯한 근접 대공화기들이 불을 뿜었으나 2,560m의 고도로 다가오는 다케다 분대에게는 위협이 되지 않았다.

오후 12시 44분, 다케다 분대는 프린스오브웨일스를 좌현 함수에서 우현 함미로 가로지르면서 7발의 500kg 짜리 고폭탄을 떨어뜨려 1발을 명중시켰다.

1대는 고장으로 폭탄을 떨어뜨리지 못했다.

 

명중탄은 좌현 후방의 사출기 갑판을 관통한 다음 127mm 두께의 주장갑판 위에서 폭발하여 함체에 추가적인 피해를 주면서 엄청난 인명손실을 가했다.

폭탄이 떨어진 곳은 영화갑판이라고 불리던 곳으로 임시 의무실로 쓰이고 있었다.

당시 영화갑판에는 의무대와 부상병을 포함하여 200 명 이상이 있었는데 폭탄이 그 한가운데서 폭발하여 대부분 사망했다.

또한 폭발의 충격으로 함체의 좌현 장갑판 사이가 벌어지면서 침수가 일어났다.

 

명중탄 이외에 지근탄도 추가 침수를 일으켰다.

지근탄은 주로 함체의 왼쪽에 떨어졌는데 수압으로 인하여 좌현 장갑판 사이가 벌어져 빈 격실 안으로 침수가 일어났고 좌현에 명중한 어뢰에 의한 침수와 더해져서 함을 왼쪽으로 전복시켰다.

프린스오브웨일스는 좌현에 1발, 우현에 3발의 어뢰를 맞았음에도 불구하고 왼쪽으로 넘어져 전복되었다.

 

다케다 분대의 폭격을 끝으로 말레이 해전이 끝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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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 피해

 

12월 10일 정오에 다카이 대위가 리펄스에 마지막 어뢰를 발사하고 이탈하면서 전반전이 끝났다.

이제 Z 부대는 약간의 여유를 얻게 되었고 이 시간을 이용하여 프린스오브웨일스와 리펄스에서는 고장난 대공포를 수리하고 탄약을 운반했다.

함내 깊숙한 곳에 있는 탄약고에서 대공포까지 몇 개 갑판을 지나 대량의 탄약을 운반하는 일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승조원들은 죽 늘어서서 탄약상자를 릴레이 식으로 운반한 다음 계단에서는 밧줄로 탄약상자를 끌어올려 다시 릴레이 식으로 운반했다.

따라서 많은 인원이 필요했고 대공전투에 필수적인 인원을 뺀 승조원이 탄약운반에 투입되었다.

 

프린스오브웨일스의 보수관은 어뢰에 의한 피해를 조사했다.

킹조지5세급 전함은 수중방어대책이 충실한 편이었다.

수선 하의 외부 함체를 뚫고 들어온 어뢰는 공기로 들어찬 외부 격실을 만나게 된다.

외부 격실 안쪽은 중유나 바닷물로 채워진 연료탱크였고 그 안쪽은 다시 빈 격실이었으며 그 너머에 함체가 있었다.

 

(킹조지5세급 전함의 장갑구조. 출처 : https://en.wikipedia.org/wiki/King_George_V-class_battleship_(1939)#cite_ref-48)

 

보수관은 프린스오브웨일스를 맞춘 어뢰가 설계자들이 예상하지 못했던 피해를 입혔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어뢰는 좌현 바깥쪽 추진축을 잡아주던 지지대(bracket) 부근에 명중하여 지지대를 날려버렸다.

 

(프린스오브웨일스의 피격 상황. 2발의 어뢰를 맞은 것으로 나오지만 2007년의 잠수 조사 결과 좌현에 명중한 어뢰는 첫번째 어뢰뿐이다.출처 : The Sinking Of The Prince Of Wales & Repulse : The End Of The Battleship Era., P.199)

 

그 결과 길이 70m 의 추진축이 회전 중심을 벗어나 분당 204회의 고속으로 돌다가 철근들을 연결해 주는 플랜지의 볼트가 부서지면서 5개로 부러졌다.

어뢰에 맞은 직후 배가 심하게 아래위로 흔들리면서 심하게 진동한 이유가 바로 그것이었다.

이때 프로펠러도 떨어져 나갔다.

 

(플랜지. https://en.wikipedia.org/wiki/Flange)

 

B 기관실을 맡고 있던 딕 와일디시 대위가 손상된 추진축의 회전을 정지시키라는 명령을 내리면서 회전이 멈추었다.

와일디시 대위는 상부에 보고할 시간이 없다고 판단하여 직권으로 정지 명령을 내렸다.

 

(프린스오브웨일스의 침수상황. 출처 : The Sinking Of The Prince Of Wales & Repulse : The End Of The Battleship Era., P.203)

 

그러나 이미 함체는 큰 피해를 입었다.

어뢰의 폭발로 추진축이 고속으로 회전하다가 부러지면서 주변의 격벽과 배관들을 망가뜨렸다. 

추진축의 뒷쪽이 지나가던 격벽은 수병 3명이 나란히 서서 통과할 수 있을만큼 큰 구멍이 뚫렸고 이 구멍을 통해 바닷물이 밀려 들어왔다.

어뢰를 맞은 지 4분 이내에 2,400톤의 바닷물이 밀려들어와 좌현의 화물갑판과 하갑판이 90m 길이로 침수되었다.

좌현 바깥쪽 추진축을 돌리던 A 기관실은 침수되었고 좌현 안쪽 추진축을 돌리던 Y 기관실은 충격으로 기관의 윤활유 배관이 터지면서 기관이 멈추었다.

따라서 프린스오브웨일스는 피격 몇 분만에 동력의 절반을 잃었다. 

또한 전력을 공급하던 발전기 8개 중에서 5개가 침수나 충격으로 인하여 작동을 멈추었다.

5.25인치 대공포 탄약고 8개 가운데 3개도 침수되었다.

 

프린스오브웨일스의 보수반은 추가 침수를 막고 우현에 역침수를 실시했으나 발전기 문제는 해결할 수 없었다.

함체 후방에 전기를 공급하던 발전기 4대가 모두 작동을 멈추면서 전기 공급이 끊어졌다.

이럴 경우에 대비하여 전기를 필요한 곳에 분배할 수 있는 체계가 있었으나 작동하지 않았으므로 함체 후방에서는 비상용 축전지로 최소한의 전력만을 확보할 수 있었다.

어뢰의 피격으로 프린스오브웨일스가 직면한 문제는 다음과 같다.

 

펌프

프린스오브웨일스는 1시간에 350톤을 퍼낼 수 있는 소형펌프 14개와 1,000톤짜리 대형펌프 4개를 가지고 있어서 시간당 8,900톤의 물을 퍼낼 수 있었다.

그러나 전기부족으로 후방에 위치한 소형펌프 6개와 대형펌프 3개가 작동을 멈추어 후방 함체에 들어찬 바닷물을 빼낼 수 없었다.

따라서 역침수를 실시했어도 기울기는 11.5도에서 9도로 줄어들었을 뿐이었다.

 

통신

함체 후방에 전화가 되지 않아 전령이 보고와 명령을 전해야 했다.

이로 인하여 보수활동이 비효율적으로 이루어졌다.

예를 들어 전기 분배 체계에 문제가 생겨 후방 전체에 전기가 들어오지 않는 상황에서 전기보수반의 한 팀은 5.25인치 대공포 1개 포좌의 전기문제를 해결하느라 매달려 있었다. 

 

환기 및 조명

함체 후방은 비상용 축전지를 사용하여 최소한의 조명만 유지했기 때문에 환기가 멈추었다.

이에 따라 작업 중인 보수반원들이 쉽게 지쳤으며 보일러실이나 기관실의 인원들은 섭씨 66도까지 올라가는 더위에 직면했다.

의무실도 문제였다.

수술에 필요한 조명이 불가능해지자 의무대는 의무실을 떠나 집중방어구역 밖의 영화갑판(Cinema Flat)이라고 불리던 곳으로 옮겨 부상자를 치료했다.

이는 나중에 큰 비극의 원인이 된다.

 

조향

키를 움직이던 전동기 자체는 어뢰의 피격으로 피해를 입지 않았으나 전기가 끊어진 후 전동기도 고장나서 조향이 불가능해졌다.

 

대공포

함체 후방에 자리잡은 5.25인치 대공포좌 4개(P3, P4, S3, S4)에 전원이 공급되지 않아 사격이 불가능해졌다.

폼폼대공포는 전력 문제는 없었으나 포탄 걸림 때문에 제대로 사격을 하지 못했다.

 

프린스오브웨일스는 단 1발의 어뢰에 맞아 비록 가라앉을 염려는 없었으나 추가 전투가 곤란할 정도로 큰 피해를 입었다.

 

반면 250kg 짜리 고폭탄 1발을 맞은 리펄스의 상태는 양호했다.

폭탄에 의한 화재는 약간의 잔불만 남기고 진화되었으며 승조원들은 고장난 대공포를 고치고 대공포탄을 탄약고에서 포좌로 운반했다.

리펄스의 기관은 멀쩡했고 승조원들의 사기는 높았다.

 

리펄스의 함장 테넌트 대령은 필립스 제독이 아직 구원요청을 보내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고 놀랐다.

테넌트 대령은 독자적인 판단으로 1941년 12월 10일 오전 11시 58분에 구원을 요청했다. 

 

<리펄스로부터 영국군에게

적기가 폭격 중. 위치는 134NYTW22X09>

(FROM REPULSE TO ANY BRITISHMAN OF WAR

ENEMY AIRCRAFT BOMBING. MY POSITION 134NYTW22X09)

 

이것이 Z 부대가 출항 이후 최초로 발신한 전문이었다.

 

구원 요청을 받은 싱가포르의 해군통신소에서 암호를 풀고 통신문을 처리하는데 6분이 걸렸다.

오후 12시 4분에 해군통신소를 떠난 구원요청이 싱가포르 시내의 사임로에 있던 항공사령부의 작전실에 도달하는데 15분이 추가로 걸렸다.

항공사령부는 즉시 전화로 셈바왕 기지에서 대기하고 있던 호주군 제453전투비행대대에 출격명령을 내렸다.

1분 후인 12시 20분부터 팀 비거스 대위가 지휘하는 제453전투비행대대의 버팔로 전투기들이 이륙을 시작하여 5분 내로 11대의 버팔로가 이륙을 마쳤다.

구원요청 이후 22분 만에 전투기가 이륙했으니 결코 느린 대응은 아니었다. 

그러나 셈바왕 기지에서 전투현장까지의 거리는 280km 로 1시간이 걸리는 거리였다.

구원요청은 너무 늦었다.

 

3척의 구축함도 빈약한 대공화기로 최선을 다해 싸웠으나 일본기에게 피해를 주지 못했다.

익스프레스는 프린스오브웨일스와 일본기 사이에 끼어 어뢰공격을 받았다.

2발의 어뢰가 다가왔는데 1발은 익스프레스가 고속으로 기동하면서 일으킨 물살에 부딪혀 폭발했고 다른 1발은 함체 중앙에 뛰어들었으나 아슬아슬하게 함저를 지나쳤다.

엘렉트라와 호주구축함 뱀파이어도 열심히 일본기를 공격했으나 피해를 입히지 못했다.

 

리펄스에서 이함한 왈루스 수상정찰기 1대는 전투해역 주변을 날아다니면서 말레이 해전을 처음부터 끝까지 지켜보았다.

많은 일본기들이 왈루스를 보았으나 무시했다.

왈루스는 싱가포르로 돌아오다가 연료가 떨어져 해상에 불시착했고 구조요청을 받은 구축함 스트롱홀드가 출동하여 싱가포르로 예인했다.

 

Z 부대를 발견했던 호아시 소위의 정찰기는 정오 직전에 쿠안탄 비행장으로 가서 활주로에 50kg 짜리 폭탄 2발을 떨어뜨리고는 1 시간 후에 전투현장으로 돌아와 영국전함들의 최후를 지켜보았다.

 

영국상선 할디스도 말레이 해전을 처음부터 끝까지 지켜보았다.

홀 선장은 전투에 휘말리기 싫어 최대 속력으로 현장을 떠나면서 선교에서 관찰한 전투 과정을 일지에 기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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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 리펄스의 용전

 

다카이 사다오 대위가 이끄는 원산항공대 제2분대는 이시하라 대위의 제1분대와 헤어져 리펄스를 공격하기 위하여 접근했다.

미호로항공대 제1분대의 폭탄을 맞은 리펄스의 함미에서는 한줄기 연기가 오르고 있었다.

 

이 광경을 바라보던 다카이 대위의 머릿 속에 갑자기 자신이 보고있는 함정이 공고급일지 모른다는 걱정이 생겨났다.

전날 죠카이를 공격할 뻔했던 경험이 강렬했던 것이다.

다카이 대위는 승무원 1명을 불러 의견을 물어보았는데 그 승무원도 공고급처럼 보인다고 대답했다.

이때 제1분대인 이시하라 분대는 프린스오브웨일스를 공격하면서 치열한 대공포 세례를 받고 있었는데 아군이라면 저렇게 대공포를 쏘아대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어 다카이 대위는 다시 혼란해졌다. 

 

(순양전함 리펄스. 자세한 내용은 여기로.사진 출처 : https://en.wikipedia.org/wiki/HMS_Repulse_(1916)

 

(공고급 전함 하루나. 자세한 내용은 여기로. 사진출처 : https://en.wikipedia.org/wiki/Kong%C5%8D-class_battlecruiser)

 

다카이 대위는 영국전함의 특징을 기억해내려 했지만 불가능했다.

당시 일본해군 조종사들은 미국함정에 대해서는 철저하게 공부했지만 영국함정에 대해서는 가볍게 지나쳤던 것이었다.

3년 전에 공고를 방문했던 다카이 대위는 그 당시의 기억을 떠올려 보려 했지만 실패했다.

결국 쌍안경으로 국기를 자세히 관찰한 후 영국함정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따라서 다카이 분대는 이시하라 분대보다 12분 늦게 공격을 시작했다.

 

다카이 분대가 공격을 시작했을 때 리펄스는 프린스오브웨일스에서 남쪽으로 1.6km 정도 떨어져 있었다.

필립스 제독으로부터 행동의 자유를 인정받은 함장 테넌트 대령은 침로를 계속 오른쪽으로 꺾어 리펄스의 함수를 접근하는 일본기 쪽으로 돌림으로써 뇌격에 유리한 각도를 주지 않으려고 했다.

다카이 분대는 각도를 잡기 위하여 시속 370km 가 넘는 속력으로 기동했다.

 

일본기가 접근하자 리펄스의 대공포가 불을 뿜기 시작했다.

리펄스의 대공화력은 프린스오브웨일스보다 약했다.

리펄스는 4인치 포 20문을 가지고 있어서 겉보기에는 5.25인치 양용포 16문을 가진 프린스오브웨일스에 크게 뒤지지 않았으나 실상은 달랐다.

4인치 포 20문 중에서 부앙각이 높아 대공포로 분류되는 것은 6문이었는데 이 대공포들은 수동으로 포좌를 움직여야 했고 프린스오브웨일스보다 성능이 떨어지는 사격통제장치를 가지고 있었다.

부앙각이 낮은 나머지 14문의 4인치 부포도 저공으로 접근하는 뇌격기에 대해서는 사격이 가능했으나 당시 부포들에게는 시한신관이 공급되지 않아서 접촉신관으로 사격해야 했다.

따라서 여러 문의 4인치 부포가 불을 뿜는 광경은 보기에는 화려해도 대공포로서의 가치는 거의 없었다.

8연장 폼폼대공포는 3대가 있었는데 1대는 폭탄에 맞을 당시 모터가 고장났고 1대는 사격을 시작하자마자 8개의 포신 가운데 6개에 고질적인 걸림이 발생했다.

이외에 오리콘 기관포 4문과 12.7mm 기관총 4정이 대공화망을 구성했다.

 

리펄스에 접근한 다카이 분대는 일제히 어뢰를 떨어뜨리고 리펄스 상공을 지나 이탈했다.

역시 몇 대의 일본기는 리펄스에 기총소사를 가하여 대공포수 1명과 탄약을 나르던 승조원 몇 명을 사살했다.

이때 리펄스에 접근하던 다카하시 대위의 미호로항공대 제4분대도 역시 어뢰를 떨어뜨렸다.

8대의 96식 육상공격기로 이루어진 다카하시 분대는 너무 먼 거리에서 어뢰를 떨어뜨렸다.

따라서 다카하시 분대가 떨어뜨린 어뢰는 1발도 맞지 않았지만 육상공격기들 또한 리펄스의 대공포화로부터 아무런 피해를 입지 않았다.

 

어뢰가 접근하자 리펄스의 함장 테넌트 대령은 노련하게 조함했다.

25노트로 달리는 거대한 함체가 구축함처럼 날렵하게 변침하면서 어뢰를 모조리 피했다.

훗날 테넌트 대령은 자신이 확인하고 피한 어뢰가 최소한 12발이라고 보고했고 리펄스의 승조원들은 19발이라고 말했다.

일본측 기록에 따르면 리펄스를 노린 어뢰는 다카이 분대 7발, 다카하시 분대 8발, 이시하라 분대 1발로 16발이다. 

 

리펄스가 현란한 움직임으로 어뢰를 피하고 있을 때 시라이 분대가 돌아왔다.

수평폭격으로 250kg짜리 고폭탄 1발을 리펄스에 명중시켰던 시라이 분대는 그 댓가로 2대가 피해를 입어 사이공으로 돌아가고 이제 6대로 줄어 있었다.

시라이 분대는 3,600m 고도로 리펄스 상공을 통과하면서 6발의 폭탄을 떨어뜨렸으나 명중탄을 내지 못했다.

어뢰에 집중하고 있던 리펄스의 승조원들은 폭격을 받았다는 사실조차 몰랐다. 

 

마지막 어뢰는 다카이 대위의 육상공격기가 투하했다.

첫번째 시도에서 어뢰가 투하되지 않았던 것이다.

다카이 대위는 단독으로 리펄스에 다시 접근하여 어뢰를 투하했다.

이 과정에서 리펄스의 대공포화를 혼자 뒤집어썼지만 다행히 아무 피해도 없었다.

그러나 어뢰 또한 빗나갔다.

테넌트 함장은 16발의 어뢰와 6발의 폭탄을 모두 피하는 뛰어난 조함술을 발휘했다.

 

이로써 전반전이 끝났다.

25대의 뇌격기와 8대의 폭격기로 이루어진 일본군은 프린스오브웨일스에 어뢰 1발, 리펄스에 폭탄 1발을 명중시켰다.

대공포로 반격한 Z 부대는 일본기 1대를 격추하고 2대에 심한 피해를, 그리고 10대에 가벼운 피해를 입혔다.

 

Z 부대의 위기는 끝난 것이 아니었으며 26대의 뇌격기와 17대의 폭격기가 현장으로 달려오고 있었다.

그러나 그때까지는 짧은 막간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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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프린스오브웨일스 피격

 

1941년 12월 10일 오전 11시 30분, Z 부대의 레이더가 남동쪽에서 북상하는 일본기 2개 집단을 발견했다.

시라이 분대의 폭격이 끝난지 10분 만이었다.

 

일본기는 원산항공대 제1분대(이시하라 가오루 대위) 및 제2분대(다카이 사다오 대위)였다.

그 뒤에는 미호로항공대 제4분대(다카하시 대위)가 따라오고 있었으나 Z 분대는 인지하지 못했다.

96식 육상공격기 24대로 이루어진 3개 분대는 모두 149.5kg 짜리 탄두를 가진 91식 1형 항공어뢰를 1발씩 장비하고 있었다.

폭탄을 장비한 원산항공대 제3분대는 싱가포르 근해에서 테네도스를 공격한 후 사이공으로 귀환하고 있었다.

원산항공대 제1분대장 이시하라 대위 탑승기에는 원산항공대공격대장인 나카니시 니이치 소좌가 탑승하여 제1분대와 제2분대의 공격을 조율했다.

 

(미츠비시 G3M 96식 육상공격기, 자세한 내용은 여기로. 사진출처 : https://en.wikipedia.org/wiki/Mitsubishi_G3M)

 

2,500m 고도로 날아오던 일본기들은 오전 11시 33분에 Z 부대를 발견했고 5분 후에 Z 부대에서도 일본기들을 육안으로 확인했다.

원산항공대는 계획대로 제1분대가 가장 중요한 표적인 프린스오브웨일스를 공격했고 제2분대가 리펄스를 공격했다.

제1분대는 9대로 정수를 채웠으며 제2분대는 8대가 이륙했는데 1대가 엔진 고장으로 돌아가버려 7대였다. 

Z 부대의 위치는 쿠안탄에서 약 130km, 싱가포르에서 약 280km 떨어진 해상이었다.

1941년 12월 10일 오전 11시 40분, Z 부대에 대한 어뢰공격이 시작되었다.

 

이시하라 대위가 지휘하는 제1분대는 다카이 대위가 지휘하는 제2분대와 헤어진 후 고도를 낮추면서 대공포 사정거리 밖에서 프린스오브웨일스의 함수를 우현에서 좌현으로 가로질렀다.

일본기들은 그 직후 왼쪽으로 선회하면서 소대별로 나뉘어 3줄로 좌현 함수 쪽에서 프린스오브웨일스에 쇄도했는데 그 동안에도 고도를 계속 낮추었다.

이 모습을 지켜보던 프린스오브웨일스의 어뢰담당관 할랜드 소령이 필립스 제독에게 일본기들이 뇌격을 가하려는 것 같다고 보고했으나 필립스 제독은 믿지 않았다.

 

사실 Z 부대의 승조원은 일본기의 속력과 접근 고도에 놀라고 있었다.

영국의 주력 뇌격기인 소드피시는 시속 160km 의 속력으로 날면서 15m 높이에서 어뢰를 투하했다.

그러나 말레이 해전에서 일본기들은 평균 시속 280km 의 속력으로 날면서 33m 높이에서 어뢰를 투하했다. 

영국수병들은 항공기가 그렇게 높게, 또 빠르게 날면서 어뢰를 투하할 수 있다고 생각해 본 적이 없었기 때문에 일본기가 초저공 폭격을 시도하는 것으로 생각했다.  

 

프린스오브웨일스의 함장 리치 대령은 일본기가 뇌격을 가하려는 생각임을 알고 변침 기회를 노리고 있었다.

거대한 전함은 25노트로 항진하고 있었으며 필립스 제독은 휘하 함정들에게 자유행동을 허가한 상태였다.

항공기의 뇌격을 받는 함정이 언제 변침하느냐는 함장에게 중요하고도 어려운 문제였다.

일찍 변침하면 아군 대공포의 겨냥만 방해할 뿐 적기는 방향을 바꾸어 뇌격을 시도할 것이었다.

늦게 변침하면 적의 어뢰에 길다란 함체의 옆면을 내어주게 될 것이었다.

 

(영국전함 프린스오브웨일스. 자세한 내용은 여기로.

사진 출처 : https://en.wikipedia.org/?title=Sinking_of_Prince_of_Wales_and_Repulse)

 

좌현 함수쪽으로부터 일본기가 접근하자 프린스오브웨일스의 대공포가 사격을 시작했다.

먼저 좌현에 위치한 5.25인치 양용포 8문이 사격을 시작했고 이어서 후갑판에 있던 보포스 대공포가 불을 뿜었다.

잠시 후 8연장 2파운드 폼폼 대공포 4대가 불을 뿜기 시작했고 마지막으로 오리콘 기관포와 대공기관총이 사격을 시작했다.

 

일본기가 어뢰를 투하하기 직전 리치 대령은 좌현전타의 명령을 내렸고 25노트로 달리는 거대한 함체가 급격히 왼쪽으로 방향을 바꾸기 시작했다.

그 직후 3열로 달려드던 일본기가 600m에서 1,500m 거리에 걸쳐 어뢰를 떨어뜨렸다.

일본기 중 좌익 선두에서 달려들던 기체는 프린스오브웨일스의 변침에 따라 공격 기회를 놓치고 전방을 그대로 지나쳤다.

이 일본기는 대신 리펄스에게 어뢰를 투하했으나 명중시키지 못했다.

투하된 8발의 어뢰 중 1발은 일본기와 프린스오브웨일스 사이에 끼인 구축함 익스프레스가 일으킨 물결에 부딪혀 조기 폭발했다.

나머지 7발의 어뢰는 6m 깊이로 프린스오브웨일스를 향하여 질주했다.

 

프린스오브웨일스의 대공포화는 일본기를 저지하는데 실패했다.

5.25인치 양용포가 8회의 일제사격을 실시한 후 프린스오브웨일스는 개별 일본기를 겨냥하는 것을 포기하고 탄막사격을 펼쳤다.

프린스오브웨일스는 탄막사격으로 일본기들이 어뢰를 빨리 투하하도록 강요하려고 했으나 실패했다.

일본기는 자신이 원하는 거리에서 어뢰를 투하한 후 대공포화를 뚫고 상승하면서 프린스오브웨일스 상공을 통과했으며 일부는 기총소사를 가했다. 

대공포 사수는 일본기가 예상보다 높은 고도에서 빠른 속력으로 날면서 어뢰를 떨어뜨리고 높은 상승율로 이탈하자 당황하여 제대로 겨냥하지 못했다.

 

놀라운 발사속도로 기대를 모았던 2파운드 폼폼대공포는 결함을 드러내었다.

폼폼대공포의 탄약은 카트리지에서 분배되어 각 포신으로 전달되었는데 그 과정에서 걸림이 발생했다.

8연장 폼폼대공포 1대는 짧은 교전 동안 12번, 다른 1대는 8번이나 걸림이 발생하여 사격을 중단해야 했다.

B 포탑 윗면에 자리잡은 폼폼 대공포에 걸림이 발생했을 때 일본기 1대가 바로 위를 지나갔다.

포대장 이안 포브스 대위는 폼폼 대공포가 제대로 작동했다면 간단히 격추시킬 수 있었다면서 분통을 터뜨렸다.

 

프린스오브웨일스의 대공포가 완전히 실패한 것은 아니었다.

이시하라 분대의 육상공격기 9대 중 가와다 가츠지로 비조가 조종하는 기체가 격추되어 승조원 전원이 사망했으며 이외에도 3대가 가벼운 피해를 입었다.

 

어뢰를 떨어뜨린 일본기들은 25초 후에 프린스오브웨일스의 상공을 통과했으며 어뢰들은 그로부터 1분 30초 후에 도달했다.

오전 11시 44분, 7발의 어뢰 중 1발이 프린스오브웨일스의 좌현 후방을 강타했다.

어뢰가 명중하면서 높이 60m 의 물보라가 치솟았으며 거대한 함체가 번쩍 들렸다가 아래로 곤두박질쳤다.

이어서 30초간 강력한 진동이 배를 흔들었다.

어뢰 탄두의 폭발보다 훨씬 심각한 문제가 발생한 것이었다.

불과 30초 만에 속력은 25노트에서 15노트로 떨어졌고 함체는 좌현 뒷쪽으로 11.5도나 기울어져 평소 해면에서 7.3m 에 달하던 좌현 후갑판의 높이가 60cm 까지 내려갔다. 

후방 구역에서 전기가 나갔고 이로 인해 후방의 통신, 조명 및 환기가 지장을 받았으며 많은 대공포들이 작동불능이 되었다.

 

프린스오브웨일스는 4분 간의 교전에서 좌현 후방에 1발의 어뢰를 맞아 큰 피해를 입었다.

하지만 실제로 당시 Z 부대 상공에 있던 일본기들의 공격을 주로 감당한 것은 리펄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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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최초의 공격

 

1941년 12월 10일 오전10시 55분에 Z 부대 상공에 가장 먼저 나타난 육상공격기는 시라이 요시미 대위가 지휘하는 미호로항공대 제1분대의 96식육상공격기 8대였다.

폭탄을 장착한 육상공격기 4개 분대 중에서 3개 분대는 500kg 짜리 고폭탄 1발씩 장착하고 있었고 시라이 분대만이 유일하게 250kg 짜리 고폭탄 2발씩 장착하고 있었다.

 

시라이 대위는 먼저 적 함대에게 항공엄호가 붙어 있는지를 살폈으나 영국전투기는 보이지 않았다.

안도한 시라이 대위는 남쪽으로 우회한 다음 태양을 등지고 북상하면서 폭격을 가하기로 했다.

영국함대를 관찰한 시라이 대위는 후방의 대형함이 리펄스인 것을 알고 장갑이 얇은 리펄스를 표적으로 삼았다.

 

(미츠비시 G3M 96식 육상공격기, 자세한 내용은 여기로. 사진출처 : https://en.wikipedia.org/wiki/Mitsubishi_G3M)

 

접근하는 일본기들을 발견한 프린스오브웨일스는 전투깃발을 내걸고 이어서 깃발신호로 30도 우현 선회를 명했다.

프린스오브웨일스의 우현에 위치한 5.25인치 양용포 8문은 사격준비에 들어갔다.

접근하는 일본기의 거리, 고도 및 속력을 표시기(Plotting Table)에 입력하자 신관조정 수치가 대공포좌로 전달되었다.

포수들이 11,000m 로 신관을 조정한 포탄을 장전하자 우현 전방 고각포 지휘장교(Starboard Forward High-Angle Control Officer)인 켐프슨 대위가 앉아있는 지휘책상의 불이 켜지면서 사이렌이 울렸다.

켐프슨 대위가 버튼을 누르자 대공포는 발사되었다.

그동안 표시기는 새로운 정보를 입력받아 새로운 신관조정 수치를 대공포좌로 전달했고 같은 일이 반복되었다.

우현 후방 고각포 지휘장교도 같은 일을 반복하고 있었다.

리펄스에서도 우현에 자리잡은 4인치 대공포들이 사격을 시작했다.

 

Z 부대가 우현으로 변침하면서 일본기의 침로와 속도에 적응하여 탄막을 점점 접근시키던 우현의 대공포들은 사격을 멈추었고 좌현 대공포들이 사격을 시작했다.

필립스 제독이 다시 깃발신호로 좌현 50도 선회를 명하자 일본기들의 침로와 속력에 적응하고 있던 좌현 대공포들이 침묵하고 다시 우현 대공포가 사격을 시작했다.

문제는 필립스 제독이 함대 행동을 고집하고 있었다는 점으로서 이런 상황에서는 함장에게 기동 권한을 주어 자유롭게 개별적으로 기동하면서 대공포를 사용할 수 있도록 해주어야 했다.

프린스오브웨일스와 리펄스의 대공포는 최초의 공격에서 일정한 속력으로 일정한 고도와 침로를 따라 접근하는 일본기들을 1대도 격추하지 못했는데 여기에는 필립스 제독의 책임이 컸다.

필립스 제독도 실수를 깨닫고 다음 공습에는 함정들의 자유행동을 허락했다.

 

최종 폭격 항정에 들어간 시라이 분대는 프린스오브웨일스의 상공을 함수부터 함미까지 가로질렀다.

프린스오브웨일스의 승조원들은 공포에 질린 눈으로 일본기들을 바라보았으나 일본기들은 프린스오브웨일스의 상공을 지나 뒤따르던 리펄스에게 폭탄을 떨어뜨렸다.

앞장선 시라이 대위 탑승기의 폭격수가 폭탄을 떨어뜨리자 나머지 7대도 따라서 폭탄을 떨어뜨렸는데 시라이 대위는 250kg 짜리 폭탄 2발 중 1발만 떨어뜨리라고 명령했다.

오전 11시 13분에 8발의 폭탄이 리펄스의 우현 방향에서 좌현 방향으로 가로질러 떨어졌으며 1발이 명중했다.

 

(리펄스의 피격 순간. 위에 보이는 함정은 프린스오브웨일스이다.

https://en.wikipedia.org/wiki/Sinking_of_Prince_of_Wales_and_Repulse)

 

명중탄은 리펄스의 우현 후방에 위치한 수상기 격납고와 그 아래에 있던 해병숙소를 관통한 후 보일러실을 덮고 있는 장갑판 위에서 폭발했다.

이 폭발로 해병숙소와 사출기 부근에 불이 났으며 왈루스 수상기 1대가 파괴되어 바다에 버려야 했다.

1명이 죽었고 몇 명이 다쳤는데 부상자 중에는 폭발의 충격으로 보일러실 천정의 증기배관이 파열되면서 증기가 누출되어 화상을 입은 화부들이 포함되어 있었다.

 

피해는 가벼운 편이었다.

순양전함인 리펄스의 장갑판은 얇아서 폭탄에 맞은 곳에서는 두께가 25mm 에 불과했다.

만일 철갑탄이었거나 500kg 짜리 고폭탄이었으면 장갑판을 관통하여 아래의 보일러실을 분쇄했겠지만 250kg 짜리 고폭탄은 관통력이 모자랐다.

명중탄은 리펄스의 함체에 가벼운 피해만을 입혔으며 함장 테넌트 대령은 필립스 제독에게 명중탄이 없다고 보고했다.

 

폭격을 끝낸 시라이 분대는 북쪽으로 물러가서 진형을 정비했다.

첫번째 교전에서 프린스오브웨일스의 5.25인치 양용포는 108발, 리펄스의 4인치 대공포는 36발을 쏘았다.

양함의 대공포는 일본기를 1대도 격추하지 못했지만 8대 중 5대에 피해를 입혔고 2대는 피해가 심하여 2번째 폭격을 포기하고 기지로 돌아가야 했다.

만약 필립스 제독의 실수가 아니었다면 1-2대 정도는 격추할 수 있었을 것이다. 

 

오전 11시 20분에 시라이 분대가 Z 부대의 시야를 벗어나면서 첫번째 공격이 끝났다.

시라이 분대는 3,000m 높이에서 수평폭격으로 해상에서 기동 중인 리펄스에 8발의 폭탄을 떨어뜨려 1발을 명중시키는 뛰어난 명중율을 보여주었으나 폭탄의 위력 부족으로 큰 피해를 주는데는 실패했다.

시라이 분대의 폭격은 시작에 불과했다.

오전 11시 30분, Z 부대의 레이더가 남동쪽에서 북상하는 더 많은 숫자의 일본기를 발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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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출격

 

일본제2함대 사령장관 곤도 노부다케 중장이 10일 오전 1시 52분에 발신한 I-58함의 접촉보고를 받은 것은 오전 2시 11분이었다.

영국함대가 남쪽으로 변침하여 빠른 속력으로 싱가포르로 돌아가고 있다는 내용이었다.

이후  I-58함은 영국함대가 쿠안탄 방향인 240도로 항진 중이라는 후속 보고를 타전했으나 이 보고는 곤도 중장에게 도달하지 않았다.

 

접촉 보고를 받은 곤도 중장은 함대결전을 치르기로 결심했다.

제2함대는 속력을 24노트로 올리라는 명령을 받았으며 제2함대와 합류하기 위하여 북상 중이던 오자와 지사부로 중장의 남파함대도 남쪽으로 변침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10일 동이 트자 일본함대는 속력을 28노트로 올렸다.

 

하지만 잠시 후 곤도 제독은 추격하기에 늦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무리 빨리 달려가도 영국함대가 싱가포르에 접근하기 전에 포착하기 어려웠는데 곤도 제독은 자신의 함대를 싱가포르의 영국군 비행장에 접근시키기 싫었다.

결국 28노트로 속력을 올린지 1시간 30분 만에 곤도 제독은 추격을 중단하고 침로를 북쪽으로 되돌렸다.

이로써 수상함대는 영국함대를 처리하는 임무에서 물러났다.

만일 영국함대가 쿠안탄으로 갔다는 사실을 알았다면 곤도 제독은 추격을 계속했을 것이다.

 

이제 제22항공전대가 영국함대를 처리하는 역할을 맡았다.

수상함대는 추격을 포기했다.

밤새 영국함대를 찾아 흩어진 잠수함들은 영국전함에게 치명타를 먹일 능력을 가지고 있었지만 잠수함의 공격은 계획을 세워 진행하기보다는 운에 맡겨야 할 상황이었다.

일본해군항공대에게 있어 수상함대가 저지에 실패한 영국함대를 처리하는 임무는 자신들의 능력을 과시할 기회였다.

 

제22항공전대 사령관 마츠나가 사다이치 소장은 휘하의 3개 해군항공대에 재급유하고 무장을 장착한 다음 10일 날이 밝으면 출격하라고 명령했다.

99대의 육상공격기 중 94대가 작전가능했는데 지난 며칠동안 지속적으로 작전에 투입되었다는 점을 감안하면 놀라운 가동율이었다.

95% 가까운 가동율은 육상공격기의 높은 신뢰성과 정비병들의 뛰어난 숙련도를 보여준다.

 

일본해군의 지상기지항공대는 3대의 항공기가 모여 소대를 이루고  3개의 소대가 모여 분대를 이루었다.

1944년부터 전투기 소대는 4대로 늘었다.

9대의 항공기로 이루어지는 지상기지항공대의 분대는 항공모함항공대의 중대와 같다고 보면 된다.

이러한 분대가 3개 또는 4개가 모여 항공대를 이루었다.

96식 육상공격기를 장비한 원산 및 미호로 해군항공대는 4개 분대 36대, 1식 육상공격기를 장비한 가노야 해군항공대는 3개 분대 27대로 이루어져 있었다.

 

마츠나가 소장은 육상공격기 11개 분대 중 1개 분대는 정찰, 4개 분대는 폭격, 6개 분대는 뇌격으로 임무를 분담했다.

정찰을 담당한 1개 분대는 50kg 짜리 소형폭탄 2개만 매단 채 연료를 최대한 싣고 가장 먼저 이륙한 다음 부채꼴로 퍼져 해상을 수색할 것이었다.

폭격을 담당한 육상공격기 중 3개 분대는 500kg 짜리 고폭탄 1개를 달았으며 미호로항공대 제1분대는 250kg 짜리 고폭탄 2개를 장비했다.

전함에게는 철갑탄이 효과가 컸으나 당시 일본해군이 보유한 철갑탄은 모두 진주만 공격에 배정해서 제22항공전대에는 재고가 없었다.

공격의 주력은 뇌격으로서 항공어뢰 1발씩 장비했는데 원산 및 미호로 항공대의 3개 분대는 149.5kg 짜리 탄두를 가진 91식 1형을, 가노야 항공대의 3개 분대는 204kg 짜리 탄두를 가진 91식 2형을 장비했다.

 

1941년 12월 10일 아침에 이륙한 제22항공전대의 전력은 다음과 같다.

 

정찰기

원산항공대의 96식 육상공격기 9대

사이공 비행장에서 오전 5시 이륙

 

원산항공대(나카하시 소좌, 96식 육상공격기)

제1분대 이시하라 대위 9대 뇌격

제2분대 다카이 대위 8대 뇌격

제3분대 니카이도 대위 9대 폭격

사이공 비행장에서 오전 6시 25분에 이륙

 

가노야항공대(미야우치 소좌, 1식 육상공격기)

제1분대 나베타 대위 9대 뇌격

제2분대 히가시모리 대위 8대 뇌격

제3분대 이키 대위 9대 뇌격

투두암 비행장에서 오전 6시 44분에 이륙

 

미호로항공대(96식 육상공격기)

제1분대 시라이 대위 8대 폭격

제2분대 다케다 대위 8대 폭격

제3분대 오히라 대위 9대 폭격

제4분대 다카하시 대위 8대 뇌격

투두암 비행장에서 오전 6시 50분 - 8시에 걸쳐 이륙

 

합계 : 정찰기 9대, 폭격기 34대, 뇌격기 51대

 

미호로 항공대장 마에다 코세이 대좌는 마츠나가 소장에게 요청하여 옵저버로서 제3분대의 폭격기 중 1대에 탑승했다.

조종사들은 영국함대가 얼마나 남쪽으로 멀리 갔든 상관없이, 심지어 싱가포르에 입항했어도 공격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전날 늦게 착륙하여 잠깐 눈을 붙인 항공기 승조원들은 새벽에 일어나서 오하기를 담은 도시락과 달콤한 커피를 담은 보온병을 들고 오전 5시부터 8시에 걸쳐 차례로 이륙했다.

마지막으로 이륙한 것은 미호로항공대의 제3분대로서 어뢰를 장비했다가 마지막 순간에 사다이치 소장의 명령에 따라 폭탄으로 바꾸는 바람에 이륙이 늦어졌다.

 

(오하기. https://ja.wikipedia.org/wiki/%E3%81%BC%E3%81%9F%E3%82%82%E3%81%A1)

 

이륙한 정찰기는 부채꼴로 퍼졌고 폭격기와 뇌격기는 분대 단위로 뒤를 따랐다.

날씨가 맑았으므로 고도는 2,500m - 3,000m 를 유지했다.

폭격기와 뇌격기는 영국함대가 있을 것으로 생각되는 싱가포르 근해를 목표로 날았다.

 

사이공에서 740km 이상 날아도 영국함대가 보이지 않자 일본기 승조원들은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어뢰를 장비한 원산항공대 제2분대는 연료를 아끼려고 엔진의 공기 흡입 비율을 무리하게 조정하다가 1대가 엔진 고장을 일으켜 사이공으로 돌아가는 바람에 숫자가 8대에서 7대로 줄었다.

 

9대의 정찰기 중 4번 정찰기는 남쪽 한계인 티오만 섬 상공에서 동쪽으로 선회했다.

동쪽으로 짧은 거리를 비행한 다음 북쪽으로 꺾어 사이공으로 돌아갈 것이었다.

오전 9시 43분에 4번 정찰기는 해상에서 영국구축함 테네도스를 발견했다.

정찰기는 사이공에 보고한 다음 접근하여 50kg 짜리 폭탄 2개를 떨어뜨렸으나 빗나갔다.

이어서 4번 정찰기를 뒤따르던 원산항공대의 육상공격기 26대가 테네도스 상공에 나타났다.

이들 중 제3분대가 500kg 짜리 폭탄 9발을 떨어뜨렸으나 90m 이내로 떨어진 폭탄은 하나도 없었으며 테네도스의 피해는 일본군 폭탄 파편에 허벅지를 맞은 수병 1명 뿐이었다.

공격을 받은 테네도스는 오전 10시 5분에 구원요청을 한 후 전속력으로 싱가포르로 도망쳤다.

테네도스의 구원 요청은 멀리 떨어진 쿠안탄 앞바다의  Z 부대에서는 똑똑히 들었으나 가까운 싱가포르에서는 듣지 못했다.

따라서 싱가포르의 영국전투기들은 일본기를 공격할 기회를 놓쳤다.

 

오전 10시가 넘어가면서 일본기 조종사들은 초조해졌다.

이제 원산 및 가노야 항공대의 육상공격기들은 싱가포르와 같은 위도까지 내려와 항속거리의 한계에 가까워졌으며 일부 승조원들은 남쪽으로 멀리 수마트라까지 볼 수 있었다. 

늦게 이륙한 미호로 항공대는 아직 북쪽에 있었다.

 

정찰기 조종사인 호아시 마사메 소위는 정찰 해역의 남쪽 끝에 도착하여 오른쪽으로 꺾었다.

서쪽으로 잠시 비행하다가 북쪽으로 꺾어 사이공으로 돌아갈 것이었다.

오전 10시 15분, 호아시의 승조원 중 1명이 해상에서 Z 부대를 발견했고 호아시 소위는 즉시 보고했다.

 

적함대 발견 북위 4도, 동경 103도 55분, 침로 60도

 

적함대는 킹급 전함 1척 및 리펄스로 이루어져 구축함 3척의 호위를 받고 있음 

 

호아시 소위는 반복하여 보고하는 동시에 자신의 위치를 육상공격기들이 알 수 있도록 장파 신호를 보냈다.

소식을 들은 육상공격기들이 몰려들기 시작했다.

가장 먼저 도착한 것은 폭격기 8대로 이루어진 시라이 요시미 대위의 미호로항공대 제1분대로서 호아시 소위의 보고가 나간 지 40분 후인 10시 55분에 도착했다.

 

(Z 부대의 행동. 출처 : History Of The Second World War, The War At Sea, P. 565)

 

호아시 소위에게 발견되었을 때 Z 부대는 바지선들을 조사하러 북상하고 있었는데 잠시 후 다른 선박을 발견하고 남동쪽으로 침로를 바꾸었다.

이 선박은 홍콩에서 탈출하여 싱가포르로 향하던 영국상선 할디스였다.

할디스의 승무원들은 본의 아니게 말레이 해전을 처음부터 끝까지 지켜보게 된다.

 

쿠안탄을 떠난 이후 필립스 제독은 경계태세를 다시 2급으로 떨어뜨렸다.

따라서 비번인 수병들은 2번째 아침식사를 하고 밀린 잠을 자거나 휴식을 취하고 있었다.

 

오전 10시 55분, Z 부대의 레이더가 접근하는 한 무리의 일본기를 발견했다.

즉시 함대 전체에 전원배치 명령이 떨어졌고 수병들은 서둘러 전투위치로 달려갔다.

놀라운 점은 이 상황에서도 필립스 제독이 싱가포르에 전투기 파견요청을 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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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쿠안탄

 

1941년 12월 9일 오후 8시 15분에 남쪽으로 변침한 Z 부대는 20노트의 속력으로 싱가포르를 향하여 철수했다.

제2급 경계태세가 지속되고 있었기 때문에 Z 부대의 승조원들 중 비번인 약 3,000 명은 잠자리에 들었다.

 

자정이 되기 직전에 싱가포르의 팔리서 소장으로부터 놀라운 전문이 들어왔다.

 

지급

적이 쿠안탄에 상륙 중이라는 보고가 들어옴. 북위 3도 50분

 

쿠안탄은 코타바루와 싱가포르의 중간에 있었으며 도로가 남북으로 통하고 있었다.

만약 일본군이 쿠안탄을 점령하면 말레이 북부에서 퇴각 중인 영국군의 퇴로가 막힐 수 있었다.

게다가 쿠안탄은 Z 부대의 항로에서 멀리 떨어지지 않았으며 10일 아침에 도달할 수 있었다.

일본군은 북상 중인 Z 부대를 마지막으로 보았으므로 밤새 남쪽으로 갈 것이라고는 생각지 못할 것이었다.

따라서 10일 아침에 쿠안탄에 대한 기습이 가능할 것으로 생각한 필립스 제독은 참모들과 의논한 후 결단을 내렸다.

12월 10일 오전 0시 50분, Z 부대는 쿠안탄으로 항로를 바꾸고 속력을 25노트로 올렸다.

 

Z 부대는 쿠안탄으로 향하면서 팔리서 제독에게 그 사실을 알리지 않고 무선침묵을 유지했다.

쿠안탄의 일본군에게 기습을 가하기 위해서였다.

필립스 제독은 해군참모차장으로서 해군성에서 해전을 지휘하면서 무선침묵을 유지하는 함대를 지휘해 본 경험이 많았다.

그럴 경우 필립스 제독은 함대에 정보를 전달하면서 현장의 함대 지휘관이 그 정보를 받고 어떻게 행동할지를 예측하여 미리 거기에 맞는 지원을 준비하곤 했었다.

필립스 제독은 팔리서 소장도 자신처럼 행동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즉 일본군이 쿠안탄에 상륙했다는 정보를 알려주면 Z 부대는 당연히 거기로 갈 것이니 팔리서 소장이 손을 써서 10일 오전에 쿠안탄 상공에 항공엄호를 준비할 것이라고 예상했다.

쿠안탄은 싱고라보다 훨씬 가까웠으므로 싱가포르에서 이륙한 전투기들이 충분히 도달할 수 있었고 부근에는 비행장도 있었다.

비록 쿠안탄 비행장의 항공기들은 일본기의 공습에 시달리다가 9일 오후에 싱가포르로 철수했지만 아직 지상요원들이 상주하고 있었기 때문에 재급유가 가능했다.

그러나 Z 부대의 움직임을 전혀 모르는 상태에서 팔리서 소장이 Z 부대가 쿠안탄으로 갈 것임을 예측한 후 극동총사령부에 요청하여 10일 오전에 쿠안탄 상공에 대한 항공엄호를 실시한다는 것은 지나치게 앞서나간 기대였다.

 

쿠안탄으로 달려가던 Z 부대는 일본잠수함 I-58함에 들켰다.

기타무라 소이치 소좌가 지휘하는 I-58함은 부상한 상태에서 접근하는 함영을 발견했다.

영국함대가 틀림없다고 생각한 기타무라 소좌는 접촉보고를 한 다음 공격을 위하여 잠항했다.

그러나 1928년에 취역한 낡은 잠수함인 I-58함의 어뢰계통이 말썽을 일으켜 발사가 늦어지면서 프린스오브웨일스와 리펄스가 불과 600m 앞을 통과하는 절호의 기회를 놓쳤다.

겨우 문제를 해결한 I-58함은 뒤쪽의 리펄스를 노리고 6개의 전방 발사관 중에서 고장난 1개를 제외하고 5발의 어뢰를 발사했으나 이미 늦었다.

리펄스 후방에서 발사된 어뢰는 1발도 맞지 않았으며 실제로 리펄스는 자신이 공격받았는지도 몰랐다.

 

어뢰 공격에 실패한 I-58함은 부상하여 Z 부대를 뒤따라 가다가 오전 4시 45분에 놓쳤다.

I-58함은 오전 1시 52분, 2시 11분, 2시 55분, 4시 45분에 보고를 했는데 이 보고는 제3구축대에서 받아 중계했다.

제3구축대는 중계하면서 2시 55분의 3번째 보고를 빼먹었는데 하필이면 이 3번째 보고에 영국함대의 침로가 쿠안탄 방향인 240도라는 내용이 들어 있었다.

따라서 일본군 수뇌부는 I-58함의 보고를 받고 영국함대가 북상을 포기하고 남하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으나 도중에 쿠안탄으로 변침했다는 사실은 모른 채 그대로 싱가포르로 후퇴했다고 믿게 된다.

 

(Z 부대의 행동. 출처 : History Of The Second World War, The War At Sea, P. 565)

 

쿠안탄으로 달려가던 Z 부대는 런던의 해군성으로부터 싱가포르에 정박한 상태로 일본항공기에게 뇌격을 당하지 말라고 주의를 환기시키는 전문을 받았다.

이 전문은 해군성이 Z 부대의 움직임을 모르고 있다는 사실과 함께 의미심장한 암시를 담고 있었다.

즉 해군성은 일본항공기가 사이공에서 싱가포르까지 날아와 뇌격을 가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는데 필립스 제독이나 참모들 중 이 암시를 알아차린 사람은 없었다.

실제로 필립스 제독은 일본항공기들이 사이공에서 740km 떨어진 쿠안탄까지 날아와 뇌격을 가할 능력이 없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사이공의 일본기들이 싱가포르까지 날아가 뇌격을 가할 수 있다면 그보다 가까운 쿠안탄에서는 당연히 뇌격을 가할 수 있었다. 

 

Z 부대의 승조원들은 10일 새벽 4시에 새벽밥을 먹었고 오전 5시에 전원 전투배치명령이 떨어졌다.

오전 5시 15분에 견시가 수평선에서 4개의 작은 점을 발견했다.

자세히 살펴보니 작은 배가 바지처럼 보이는 것 3척을 끌고 있었다.

일본군을 수송하는 바지일지 모른다고 생각한 필립스 제독은 더 큰 목표인 일본선단의 본대를 찾아 계속 쿠안탄으로 접근했다.

 

오전 7시 18분, 프린스오브웨일스가 왈루스 수상정찰기를 사출했다.

조종사 베이트먼 중위가 쿠안탄 상공에 도달해 보니 일본함정이 보이지 않았으므로 프린스오브웨일스에 보고한 후 싱가포르로 향했다.

왈루스는 착수하다가 망가졌으나 조종사 베이트먼 중위는 구조되었다.

 

오전 8시에 Z 부대에서도 쿠안탄이 보였는데 침공의 흔적은 보이지 않았다.

Z 부대는 속력을 15노트로 떨어뜨리면서 변침하여 해안선과 나란히 항진했는데 해상에서는 숲에 가려져 쿠안탄 항이 보이지 않았다.

왈루스 정찰기의 보고에도 불구하고 상황을 다시 확인하고 싶었던 필립스 제독은 구축함 익스프레스를 쿠안탄으로 파견했다.

 

익스프레스는 쿠안탄에 접근하여 자세히 살폈으나 수영하는 사람 1명과 도로를 지나가는 오토바이 1대를 보았을 뿐 침공징후는 없었다.

1시간 후에 돌아온 익스프레스는 정찰결과를 보고했다.

 

익스프레스의 보고를 받고도 Z 부대는 즉시 싱가포르로 후퇴하지 않았다.

필립스 제독은 리펄스의 함장 테넌트 대령의 제안에 따라 북쪽으로 가서 새벽에 보았던 작은 배와 바지 3척을 조사하기로 했다.

리펄스에서 왈루스 수상기가 사출되어 함대 주변에서 대잠초계를 실시했고 Z 부대는 침로를 80도로 돌려 북상하기 시작했다.

조사를 위해서는 구축함 1척만 파견해도 충분했으나 필립스 제독은 2가지 요인 때문에 Z 부대 전체를 이끌고 가기로 결정했다.

 

1. 만일 그 선박이 일본 수송선단의 일부라면 수평선 너머에 공격할 표적이 더 있을 것이고 당연히 방어하는 일본함정들도 있을 것이다.

2. 사이공 부근의 일본기들이 쿠안탄까지 날아와서 주력함에게 피해를 입히지는 못할 것이다.

 

북상을 시작한지 30분이 지난 10일 오전 10시 5분에 놀라운 소식이 들어왔다.

연료부족으로 전날 Z 부대에서 떨어져 싱가포르로 남하했던 구축함 테네도스가 아남바스 제도 부근에서 일본기에게 공습을 당하고 있다고 싱가포르에 구원요청을 한 것이다.

테네도스는 Z 부대보다 220km 나 남쪽에 있었으므로 일본기가 테네도스에 도달할 수 있다면 Z 부대에도 도달할 수 있었다.

10분 후 Z 부대의 견시가 접근하는 일본정찰기를 발견했다.

 

Z 부대를 파멸로 몰아넣은 쿠안탄 상륙의 진실은 무엇이었을까?

당시 쿠안탄을 방어하던 부대는 제22인도여단 소속의 제5/11시크대대와 제2/18왕립가르왈소총대대였는데 둘 다 실전경험이 없었다.

9일 저녁 7시에 가르왈 소총대대의 관측소에서 거룻배들을 끌면서 해안에 접근하는 배를 몇 척 발견했다.

일본군의 침공이라고 생각한 가르왈 대대 병사들은 3시간 동안 총격을 가했는데 이것이 팔리서 소장이 보고한 쿠안탄 상륙이었다.

가르왈 대대는 밤새 간헐적으로 사격을 가했는데 새벽이 되었을 때 바다와 해안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상부에서는 경험이 부족한 병사들이 지나가던 배를 잘못 보고 사격을 가했다고 생각했으나 가르왈 대대 병사들은 분명히 소규모 부대가 상륙하려고 했으며 자신들이 총격을 가해 물리쳤다는 주장을 굽히지 않았다.

나흘 뒤 쿠안탄에서 몇 km 정도 남쪽으로 떨어진 해안에서 몇 척의 작은 보트가 발견되었는데 일부에는 총알 구멍이 나 있었고 1척에는 일본소총과 일본엽서, 그리고 약간의 일본군 장비가 남아 있었다.

따라서 대규모 상륙은 오보가 틀림없으나 실제로 9일 밤에 소규모의 일본정찰대가 쿠안탄에 상륙을 시도하다가 총격을 받자 남쪽으로 내려가 상륙했을 가능성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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