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 지트라 전투(1) - 서전의 참패

 

투우사 작전 실시를 책임지고 있던 제11인도사단은 개전과 동시에 작전 실시가 불가능해지자 지트라 방어에 주력했다. 지트라 방어선은 미완성이었다. 노동력이 부족하여 병사들이 직접 방어공사를 해야 했다. 또한 없는 시간을 쪼개어서 병사들이 훈련한 내용은 방어 훈련이 아니라 대부분 투우사 작전에 대비한 이동 및 공격 훈련이었다. 설상가상으로 이틀 동안 내린 폭우로 참호에는 물이 가득 고였다. 병사들은 투우사 작전에 쓰려고 차량과 기차에 실어두었던 장비를 꺼내와서 철조망을 치고 지뢰를 묻었다. 시간이 없어 땅에 노출된 상태로 전화선을 설치할 수 밖에 없었기 때문에 나중에 통신문제가 발생했다.

 

제11인도사단은 좌익에 제6인도보병여단, 우익에 제15인도보병여단을 배치하고 제28인도보병여단을 예비로 보유했다. 제6여단은 좌익에 제2/16 펀자브대대, 우익에 제2이스트서레이대대를 배치하여 해안에서부터 지트라 서쪽까지 약 16,500m의 전선을 담당했다. 오른쪽의 제15여단은 도로를 가운데 두고 좌익은 제1레스터셔대대, 우익에 제2/9자츠대대를 배치했다. 제2/9자츠대대의 동쪽은 울창한 정글로 뒤덮인 언덕이었다. 제15여단의 방어선 길이는 약 5,500m 였다. 제1/14펀자브대대는 지트라에서 북쪽으로 15km 떨어진 창글룬에 전진 방어선을 펴고 있었다. 

 제11사단의 화력지원은 제155야포연대의 2개 포대, 제22산포연대의 2개 포대 및 제80대전차연대의 2개 포대가 맡았다.

 

(지트라 전투. History of The second World War, The War Against Japan, Vol.1 The Loss of Singapore, P.208-209)

 

지트라 방어선을 공격한 일본군 선두는 사에키 시즈오 중좌의 수색제5연대였다.(일본군 수색연대는 중대의 집합체로 보병대대 규모이다.) 수색제5연대는 8일 오후 9시 국경 부근의 사다오에서 강행정찰을 나온 제1/8펀자브대대를 만나 가벼운 교전 끝에 물리치고 오후 11시 30분에 사다오를 점령했다. 9일 아침부터 사다오에 제5사단 주력이 도착하기 시작했다. 대부분 차량과 열차로 이동했으며 일부는 자전거를 탔다. 

수색제5연대는 오후 3시 30분에 남쪽으로 돌진하여 국경을 넘으라는 명령을 받고 오후 5시 30분에 사다오를 출발했다. 조금 가다보니 국경으로 통하는 모든 다리가 끊겨 있었다. 할 수 없이 전차부대와 차량들은 공병과 함께 뒤따르고 수색제5연대는 도보로 남진하여 밤에 국경에 도착했다.

수색제5연대는 어두운 밤에 배수구를 통하여 몰래 국경을 넘은 다음 제1/14펀자브대대의 전초를 기습했다. 기습을 받은 영국군은 황급히 후퇴했고 일본군은 전초 2개를 추가로 격파하면서 전진했다. 10일 새벽에 일본군 선두가 창글룬에 도착하여 제1/14펀자브대대의 주력과 접촉했다. 제1/14펀자브대대는 야포의 화력지원을 받아 일본군의 진격을 저지했다.

1941년 12월 10일 하루 동안 수색제5연대는 다리를 수리한 후 뒤따라 온 보병제41연대제2대대, 치하 중형전차를 보유한 전차제3중대, 1개 산포중대, 1개 공병소대, 위생대 및 방역급수부 일부를 지원받아 자정에 사에키 정진대를 편성했다. 정진대의 목표는 지트라를 돌파한 후 단번에 남쪽 페락 강까지 진출하는 것이었다.

 

(97식 中전차 치하. 자세한 내용은 여기로. https://en.wikipedia.org/wiki/Type_97_Chi-Ha)

 

10일 아침에 지트라 북쪽에 배치된 제1/14펀자브 대대가 일본군과 접촉하자 제11사단장 머레이-라이언 소장은 예비대인 제28여단에서 제1/2구르카소총대대를 떼어내 제15여단에 배속시켰다. 제15여단장 가렛 준장은 제1/2구르카대대를 지트라에서 북쪽으로 3km 정도 떨어진 아순에 배치했다.

제6여단 소속의 제1/8펀자브대대는 8일 오후에 국경을 넘어 싱고라 방면으로 강행정찰을 나섰다가 남하 중이던 일본군 주력과 만나 짧은 교전 후 후퇴하여 페를리스에 주둔 중이었다. 머레이-라이언 소장은 10일 오후 제1/8펀자브대대에게 코디앙 남쪽으로 후퇴하라고 명령했다. 페를리스의 유일한 정규군인 제1/8펀자브대대가 남쪽으로 빠져나가자 페를리스의 술탄이 격렬하게 항의했으나 어쩔 수 없었다.

 

(케다주 전투 상황. History of The second World War, The War Against Japan, Vol.1 The Loss of Singapore. P.201)

 

11일 아침 8시에 사에키 정진대의 보병제41연대제2대대가 제1/14펀자브대대를 공격하여 방어선 일부를 점령하고 대전차포 2문을 뺏었다.

일본군은 오전 11시부터 총공격을 실시했다. 영국군은 오후3시까지 버티다가 남쪽으로 후퇴하기 시작했다. 제15여단장 가렛 준장은 제1/14펀자브대대를 지트라 방어선 이남으로 철수시키려 했으나 머레이-라이언 소장은 아순 복쪽 3km 지점에 있는 낭카에서 일본군을 저지하라고 명령했다.

 

영국군이 철수하자 사에키 정진대는 전차를 앞세우고 추격했다. 오후 4시 30분에 낭카 북쪽에서 일본군이 후퇴하는 제1/14펀자브대대의 꼬리를 잡았다. 선두의 일본전차가 순식간에 제1/14펀자브대대의 후위를 유린하고 대열로 뛰어들었고 수색제4중대의 장갑차가 뒤따랐다. 이어서 트럭을 타고 따라오던 보병이 하차하여 공격했다. 결과는 파멸적이었다. 전차를 본 적이 없었던 제1/14펀자브대대의 병사들은 행군 중에 적의 전차로부터 기습을 받자 공포에 질려 달아났다. 제2대전차포대는 일본전차에게 치명적인 대전차포 10문을 보유하고 있었으나 이동 중이던 대전차포를 방열할 시간도, 정신도 없었다. 대전차포는 1발의 포탄도 쏘아보지 못하고 일본군에게 뺏겼다. 제1/14펀자브대대는 20분 간의 전투로 붕괴했다. 비록 약 200명이 다음날 제15여단에 복귀했지만 전투부대로서 제1/14펀자브대대는 사라졌다. 난리통에 제15여단장 가렛 준장도 실종되었다가 나중에 복귀했다. 제11사단장 머레이-라이언 소장은 제28여단장 카펜데일 준장에게 임시로 제15여단의 지휘를 맡겼다.

 

제1/14펀자브대대를 순식간에 유린한 일본군은 그대로 남하하여 아순을 방어하던 제2/1구르카소총대대를 덮쳤다. 일본전차들이 강한 저항을 받자 뒤따르던 보병들이 우회하여 측면을 공격했다. 격렬한 전투가 벌어졌으나 영국군은 오래 버티지 못했다. 측면으로 우회한 일본군에게 영국군의 주의가 쏠린 사이 강력한 일격으로 전방이 뚫리면서 도로가 개방되었다. 일단 도로가 뚫리자 전차가 난입하여 영국군 내에 공포와 혼란을 일으켰다. 일본군은 기회를 놓치지 않고 잇달아 영국군 방어선을 점령했으며 잠시 후 영국군은 도망치기 시작했다. 질서있게 퇴각하려는 모든 노력은 물거품이 되었고 일본군은 영국군의 2번째 대대를 제거했다.

일본군은 잠시 숨을 돌리면서 전상자를 수용한 후 남하했다.

 

그동안 지트라 방어선에서는 어이없는 일이 벌어졌다. 페를리스에 주둔 중이던 제1/8펀자브대대는 전날 철수명령을 받고 남하했다. 대열이 지트라 서쪽 망고이에 접근하자 다리를 지키던 장교가 일본군이라고 지레 겁을 먹고 다리를 폭파해 버렸다. 따라서 제1/8펀자브대대는 대전차포 7문, 야포 4문 그리고 브렌건캐리어 몇 대를 강 건너편에 놓아두고 철수해야만 했다. 당시 영국군 처지에서 전투 한 번 치르지 못하고 이만한 장비와 무기를 잃는다는 것은 뼈아픈 일로서 훈련이 부족하고 사기가 떨어진 영국군의 단면이었다.

 

11일 오후 8시 20분에 일본전차가 전조등을 밝힌 채 도로를 따라 내려와 10분 만에 제1레스터셔대대의 전초를 유린했으나 제215대전차포대가 선두 전차 2대를 파괴하자 진격을 멈추었다. 대신 일본군은 저격병을 내보내어 동쪽을 맡고 있는 제2/9자츠대대를 저격하면서 방어선을 정찰했다.

 

그동안 영국군 내에서는 일본군이 이미 지트라 방어선 남동쪽의 부킷 잔탐과 부킷 알루를 점령했다는 헛소문이 돌았다. 임시로 제15여단을 지휘하던 제28여단장 카펜데일 준장은 일본군이 방어선의 오른쪽을 우회하려 한다고 생각했다. 시간이 없다고 생각한 그는 머레이-라이언 소장을 거치지 않고 제6여단장 레이 준장에게 지원을 요청했다. 레이 준장은 제1/8 및 제2/16펀자브대대에서 2개 중대씩 4개 중대를 보내주었다. 카펜데일 준장은 자신의 예비대인 제2/2구르카소총대대를 제2자츠대대의 남쪽인 바타강 다리 동쪽에 배치했다. 그 우익에는 제1/8펀자브대대의 1개 중대를, 다시 오른쪽인 켈루비에는 제2/16펀자브대대의 2개 중대를 배치했다. 부대들은 12일 날이 밝기 전에 이동을 마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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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 항공작전(41.12.9-12)

 

일본 육해군은 말레이 상륙 당시 육군항공대는 코타바루 및 케다 주의 항공력을, 해군항공대는 싱가포르의 항공기, 함정 및 군사시설을 공격하기로 합의했다. 공습 시간에 있어서 육군과 해군의 의견이 엇갈렸다. 해군은 공격대의 피해를 줄이기 위하여 해뜨기 전에 공습하는 방안을 내세웠다. 육군은 적의 항공기를 확실하게 제거하기 위하여 해가 뜬 후에 공격하기를 원했다. 육해군은 조율에 실패하여 해군항공대가 먼저 공격하게 되었다.

 

1941년 12월 8일 오전 0시 10분에 일본해군 제22항공전대의 중형공격기 68대가 사이공 부근에서 이륙하여 싱가포르로 향했다. 그러나 도중에 난기류를 만나 원산항공대 모두와 미호로항공대 일부가 돌아가고 미호로항공대의 17대만이 오전 4시에 싱가포르에 도달하여 텡가 비행장을 폭격했다. 이 폭격으로 블레넘 3대가 망가졌고 빗나간 폭탄이 중국인 거주구역에 떨어져 61명이 사망하고 133명이 부상을 입었다. 레이더가 일본기의 접근을 알리자 호주제453전투비행대대의 버팔로 3대가 출격준비를 갖추었으나 대공포에 의한 오폭을 염려하여 출격을 허가하지 않았다. 대신 대공포가 반격했으나 일본기들은 무사히 빠져나갔다. 싱가포르의 민방위 태세는 불만스러웠다. 공습 경보가 울리지 않았으며 가로등도 켜진 채였다. 

 

같은 시각 연합군 공군도 코타바루 앞바다에서 다쿠미 지대를 싣고 온 일본수송선을 공격하고 있었다. 코타바루 비행장에 전개한 호주제1정찰비행대대의 허드슨 폭격기들은 이날 새벽에 17번 출격하여 일본수송선 아와지산마루를 격침하고 아야토산마루와 사쿠라마루에게 피해를 입혔다. 일본 함정의 대공포화에 맞아 격추된 허드슨은 2대였다.

 

말레이 전투를 지원한 일본육군항공대는 스가와라 미치히로 중장의 제3비행집단이었으며 남부 인도차이나에 주둔한 제3비행단이 8일에 코타바루 전투를 지원했다. 

12월 8일 새벽에 프놈펜 남쪽의 캄퐁프라치에서 제3비행단의 전투기 11대와 경폭격기 28대로 이루어진 제1차 공격대가 이륙하여 오전 8시부터 쿠알라페스토를 비롯한 쿠알라룸푸르 부근의 비행장들을 공습했다. 일본기들은 반격에 나선 연합군 전투기 15대와 교전하여 10대를 격추하고 활주로에서 3대를 파괴했다. 격추된 일본기는 없었으며 5대가 크게 망가졌으나 무사히 귀환했다. 일본기들이 코타바루 비행장 부근을 통과할 때 쌍발기 약 10대가 활주로에 있는 것을 보았으나 다쿠미 지대에 대한 오폭을 우려하여 제1차 공격대에게는 코타바루 비행장 공습이 금지되어 있었다.

이어서 전투기 5대, 경폭격기 48대로 이루어진 제2차 공격대가 쿠알라페스토 비행장을 공습하여 소형기 3대를 활주로에서 파괴했다.

 

제12비행단과 해군항공대는 8일 오전에 교대로 싱고라와 파타니 상공을 지켰다. 비행제1전대는 싱고라 상공에 도착하여 상공을 엄호하다가 오전 11시 10분에 싱고라 비행장이 확보되자 착륙했다. 파타니로 향한 비행제11전대는 1,000m 고도에서 접근 중인 영국전투기 2대를 발견하고 쫓아버렸다. 안도 지대가 싱고라 비행장을 점령했으나 활주로의 배수가 되지 않아 착륙이 불가능했으므로 비행제11전대는 오후 1시 30분에 싱고라 비행장에 착륙했다. 이후 양 전대는 싱고라 비행장을 기지로 삼아 싱고라와 파타니 상공을 지켰다.

 

제7비행단의 전투기 18대, 중폭격기 75대는 프놈펜과 사이공의 비행장을 이륙하여 오전 8시부터 말레이 북서부 케다 주의 승게파타니, 알로스타, 페낭, 버터워스 등지의 비행장을 공격했다. 이 공습으로 영국기 23대를 지상에서 파괴하고 격납고를 비롯한 시설물에 피해를 입혔다. 격추된 일본기는 없었으나 3대가 큰 피해를 입고 불시착하여 대파되었다.

 

말레이에 주둔 중이던 연합군 공군은 개전 당일인 12월 8일에 커다란 피해를 입었다. 전투기 전력이 열세하고 비행장을 지키는 대공화력도 약한데다가 조기경보체계도 시원찮아서 많은 비행기들이 지상에서 급유하거나 무장 장착 중에 공격을 받아 망가졌다. 알로스타와 승게파타니에서 공격을 받고 살아남은 항공기는 제62폭격비행대대의 블레넘 2대, 호주제21전투비행대대의 버팔로 4대, 제27야간전투비행대대의 야간전투기형 블레넘 4대가 전부였으며 그나마 버팔로는 기총이 말썽을 일으켜 무용지물이었다. 12월 8일 아침에 약 110대이던 북부 말레이의 연합군 항공기 숫자는 8일 저녁이 되자 약 50대로 줄어들었다. 극동총사령관과 극동함대 사령관은 8일 공동으로 참모본부에 전문을 보내어 항공기 증원을 요청했으나 이미 늦었다. 일본군은 개전 24시간 내에 제공권을 장악했다.

 

(말레이, 태국, 프랑스령 인도차이나)

 

9일 아침에 제3비행단은 전투기 6대, 경폭격기 39대를 내보냈다. 이들 중 일부는 오전 11시부터 코타바루 비행장을 공격하고 주력은 쿠알라페스토 비행장을 공격하여 11대의 영국기를 활주로에서 파괴했다. 당시 코타바루 비행장은 일본군이 점령한 상태로 오폭이었다.

제10비행단 비행제62전대의 중폭격기들은 오후 1시 50분에 쿠알라룸푸르 북서쪽의 타나메라 비행장을 공격하여 8대를 활주로에서 파괴했다. 격추된 일본기는 없었으며 1대가 불시착하여 중파되었다. 이어서 제12비행단의 전투기 1개 중대와 습격기 1개 중대가 타나메라 비행장을 공격하여 1대를 지상에서 파괴하고 대공기관총 2정을 파괴했다.

 

제3비행단은 9일에 케다 주의 비행장들을 노리고 전투기 17대, 중폭격기  76대를 출격시켰으나 날씨가 나빠 공습을 하지 못했다. 이들 중 제64전대의 전투기들은 싱고라 비행장에 착륙했다. 이 전투기들은 오후에 제12비행단의 전투기 1개 중대 및 습격기 1개 중대와 함께 버터워스 비행장을 공격하여 싱고라 공격을 위하여 집결해 있던 블레넘들에게 큰 피해를 입히고 버팔로와 야간전투기형 블레넘들을 파괴했다.

 

12월 9일에 극동항공사령관 펄포드 소장은 전날의 괴멸적인 타격에도 불구하고 싱고라에 대한 폭격을 실시했다.

9일 아침에 싱가포르의 텡가 비행장에 주둔해 있던 제34폭격비행대대의 블레넘 폭격기 6대가 이륙했다. 블레넘 폭격기는 북서부 말레이의 버터워스 상공에서 호주제21전투비행대대의 버팔로를 만나 싱고라까지 호위를 받게 되어 있었으나 당시 그 지역의 버팔로는 기총에 문제가 생겨 호위를 해줄 입장이 아니었다. 결국 블레넘 6대는 전투기의 호위없이 싱고라 비행장을 폭격했으며 그 과정에서 일본기의 요격을 받아 5대가 격추되었다. 싱고라 비행장의 피해는 미미했다.

 

9일 오후에 펄포드 소장은 알로스타의 제62폭격비행대대와 텡가의 제34폭격비행대대를 버터워스에 집결시켜 제62폭격비행대대장 아서 스카프 대위의 지휘 아래 싱고라를 폭격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버터워스에서 스카프 대위가 이륙하는 순간 일본기들이 비행장에 달려들어 나머지 블레넘들을 모조리 파괴했다. 그는 단독으로 싱고라에 날아가 폭탄을 떨어뜨렸으나 일본전투기의 총탄에 등과 왼팔을 맞아 치명상을 입었다. 스카프 대위는 가까스로 알로스타 부근에 돌아와 논바닥에 불시착했으나 과다출혈로 그날 밤에 숨졌다. 영국정부는 단독으로 용감하게 폭격임무를 완수하고 중상을 입은 몸으로 비행기를 안전하게 불시착시켜 승무원들을 구한 스카프 대위에게 말레이 전투 최초의 빅토리아 십자장을 추서했다.

 

(아서 스카프 대위. https://en.wikipedia.org/wiki/Arthur_Scarf)

 

영국과 네덜란드의 사전 협정에 따라 네덜란드령 동인도제도의 버팔로 전투기 9대와 글렌 마틴 폭격기 22대가 9일 오후에 싱가포르 섬에 도착했다. 펄포드 소장은 지난 이틀 간의 경험으로 주간폭격은 자살행위이며 오직 야간폭격만이 가능하다는 사실을 깨달았는데 네덜란드 조종사들은 야간전투 훈련을 받지 못했으므로 훈련을 위하여 네덜란드령 동인도제도로 돌아갔다.

9일 오전 현재 쿠안탄 비행장에는 기존 비행기에 더하여 코타바루에서 철수한 비행기들로 북적거리고 있었는데 오후에 일본기들이 공격하여 비행기 7대를 지상에서 파괴했다. 펄포드 소장은 쿠안탄에서 살아남은 비행기들을 모두 싱가포르 섬으로 불러들였다. 이후 쿠안탄 비행장은 재급유를 위한 착륙장으로만 사용했다.

케다 주의 비행기들도 말레이 중부로 철수했다. 제62폭격비행대대에서 살아남은 블레넘 2대는 타이핑으로 철수했으며 호주제21전투비행대대의 버펄로 6대는 이포로 철수했다. 제27야간전투비행대대는 전멸하여 철수할 비행기도 없었다.

9일 저녁이 되자 말레이 북부에 남은 연합군 비행기는 10대 미만으로 떨어졌다.

 

일본군의 피해는 가벼웠다. 12월 8일과 9일의 항공작전으로 제3비행집단이 상실한 기체는 97식 전투기 2대, 97식 사령부정찰기 2대, 99식 중폭격기 9대이다.

해군항공대는 싱가포르를 폭격한 후 프린스오브웨일스와 리펄스를 추적하여 10일에 쿠안탄 앞바다에서 격침했다.(관련 내용은 여기로)

 

영국군의 비행장 철수는 불완전했다. 8일에 철수한 승게파타니와 10일에 철수한 쿠안탄에서는 막대한 항공유를 비롯한 보급품들을 그대로 두고 도망쳐서 일본군에게 넘어갔다. 반면 10일에 벌어진 알로스타 비행장 철수 당시 항공유를 태우는 연기는 북쪽에서 방어에 임하고 있던 지상군의 사기를 크게 꺾었다. 이후로 비행장 철수시 항공유는 태우지 말고 그냥 연료탱크에 구멍을 뚫어 땅에 쏟아버리는 방식으로 폐기했다.

9일 이후 연합군 항공작전의 목표는 싱가포르 해군기지의 방어와 증원군을 실은 선단 상공 엄호에 집중되어 모든 전투기들은 싱가포르에 집결했다. 극동항공사령관 펄포드 소장은 항공엄호를 전혀 받지 못하는 제3군단을 위하여 12일에 호주제453전투비행대대를 버터워스 비행장에 파견했다. 제453전투비행대대의 버팔로들은 일본군과 전력이 워낙 차이나서 공중전은 엄두도 내지 못하고 주로 장거리 정찰을 맡았는데 그나마 지상군에게 큰 도움이 되었다. 

12일에 싱가포르를 이륙한 블레넘 3대가 싱고라를 폭격했지만 거의 피해를 주지 못했다. 펄포드 소장은 전투기의 호위가 없는 상태에서 주간 폭격은 무리라는 사실을 다시금 확인하고 이후 야간폭격으로 전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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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 태국 침공

 

태평양전쟁이 발발했을 때 태국육군은 5개 사단, 약 50,000명의 병력을 가지고 있었으나 제대로 훈련된 병력은 26,500명 정도였다. 공군은 약 240대의 항공기를 보유했는데 93대는 1940년 12월에 일본이 제공한 기체였다. 해군은 규모가 작고 훈련도 불충분한데다가 1941년 1월에 벌어진 프랑스령 인도차이나 해군과의 해전에서 큰 피해를 입었다.

 

개전을 앞두고 일본과 태국은 일본군의 통과를 위한 비밀 협상을 벌였다. 1941년 12월 2일의 협상에서 피분 송크람 태국수상은 태국 남부 크라 지협에 대한 일본군 상륙은 받아들였지만 일본군이 태국의 중심부인 방콕 평원을 통과하는 문제에는 난색을 드러내었다. 그러자 일본은 태국이 1905년에 영국에게 빼앗겼던 버마의 샨 지방을 되돌려주겠다는 조건을 내걸어 다음날인 3일에 방콕평원 통과를 인정받았다.

문제는 통과 방식이었다. 일본은 당연히 프랑스령 인도차이나의 경우처럼 태국정부의 허락을 받아 평화롭게 통과하기를 바랬지만 피분 수상의 생각은 달랐다. 그는 일본 편에 서면서도 만약을 위하여 연합국의 눈에는 태국이 일본의 침공을 받는 것으로 비치길 원했다. 이를 위하여 피분 수상은 일본군의 방콕 평원 통과를 합의한 다음날인 4일, 영국 측에

 

"태국이 일본의 침공을 받을 것 같다."

 

는 언질을 남기고는 5일에 돌연 연락을 끊고 잠적해 버렸다. 피분 수상은 다음날인 6일 나타났으나 7일이 되어 개전이 임박하자 다시 사라졌다. 다급해진 일본은 태국주재 일본대사를 태국외상에게 보내어 일본군의 진주를 받아들이라고 윽박질렀지만 외상에게는 그럴 권한이 없었다. 결국 일본제5사단은 8일 새벽부터 태국 정부의 허락없이 싱고라와 파타니에 상륙하여 태국군과 충돌했으며 오전 7시에는 근위사단이 태국의 동쪽 국경을 넘었다. 피분 수상은 8일 오전 7시에 자동차를 타고 청사에 나타났으며 곧 일본 측과 협상을 시작해 오전 11시 30분에 일본군의 통과를 위한 협정을 맺었다. 이로써 태국은 일본에 침공당하는 모양이 되었다. 

 

(피분 송크람 태국수상. 자세한 내용은 여기로https://en.wikipedia.org/wiki/Japanese_invasion_of_Thailand)

 

태국 침공의 선두는 근위사단이었으며 그 뒤를 제15군 소속인 제33 및 제55사단이 뒤따랐다. 근위사단도 초기에는 제15군 소속이었으며 나중에 태국 남부를 거쳐 영령 말레이로 진입하면서 제25군 휘하에 들어갔다.

 

근위사단 중 가장 먼저 태국에 진입한 부대는 개전과 동시에 태국 정부를 제압하라는 명령을 받은 근위보병제4연대제3대대였다. 제3대대를 주력으로 속사포 1개 소대 및 연대포 1개 중대를 합친 1,100명의 병력은 수송선 1척에 타고 제25군을 수송하는 선단과 함께 항해하다가 7일 오전 10시 30분에 태국만의 G 점에서 헤어져 북상, 8일 오전 4시에 방콕 남쪽 방푸 해안에 상륙했다. 대발 1척, 소발 3척을 이용한 상륙은 저항을 받지 않았다. 제3대대는 함께 양륙한 차량 20대에 분승하여 방콕으로 달렸으며 해가 뜰 때쯤 방콕 시가지 남쪽에 도착하여 허겁지겁 방어태세를 갖춘 태국군과 대치했다. 제3대대의 출현으로 신변에 위협을 느낀  피분 수상은 칩거를 풀고 오전 7시에 청사로 출근하여 일본대사와 협상에 임했다. 제3대대는 다음날 오후에 근위보병제4연대 주력이 방콕에 도착하자 복귀했다.

태국 정부와의 협상이 여의치 않을 경우 제4연대제3대대를 도와 방콕을 장악할 목적으로 근위보병제5연대제3대대의 2개 중대가 수송기를 타고 돈무앙 비행장에 강행착륙할 예정이었으나 태국정부와의 협정이 성립함에 따라 계획을 중단했다.

 

개전 당시 근위사단은 1941년 5월에 태국이 프랑스령 인도차이나로부터 얻은 영토에 맞닿은 톤레사프 호의 남북에 배치되어 있었다. 호수의 북쪽에는 근위보병제5연대제1대대와 전차 1개 중대를 중심으로 한 선견대가 자리잡고 호수 남쪽에는 사단 주력이 자리했다.

선견대는 톤레사프 호 북쪽의 시엠레아프를 출발하여 신국경을 건너 시소폰, 프라친부리를 거쳐 방콕으로 들어갈 것이었다. 근위사단 주력은 호수 남쪽에서 출발하여 시소폰에 도달한 다음 선견대의 뒤를 따라 방콕으로 향할 것이었다. 근위사단은 대부분 차량화가 되어 있었다.

 

(태국 중부 및 동부)

 

근위사단 선견대는 1941년 12월 8일 오전 7시에 국경으로 쇄도하여 저항을 받지 않고 태국군의 국경초소를 무장해제했다. 이후 선견대는 쾌속으로 시소폰을 통과한 다음 구국경선을 넘었다. 구국경선부터 방콕까지는 아스팔트 도로가 펼쳐져 있었는데 잠시 후 일본비행기가 나타나

 

"금일 오전 11시 30분 평화진주협정 성립"

 

이라는 통신통을 떨어뜨렸다. 이제 태국군의 매복을 두려워 할 필요가 없어진 선견대는 더욱 속력을 내어 9일 아침에 방콕 북쪽 돈무앙 비행장에 도착했다. 

 

근위사단 주력은 톤레사프 호 남쪽에서 출발하여 바탐방을 거쳐 시소폰에 도달하여 선견대와 같은 경로로 9일 저녁까지 대부분 방콕에 도착했다. 차량화가 잘 된 근위사단 주력의 이동 모습은 끝없이 늘어선 자동차의 행렬로 장관을 이루었다. 근위사단사령부는 9일 오후 3시에 방콕에 도착하여 촐라롱콘 대학에 자리잡았다.

근위사단의 태국진입과 동시에 제15군 철도부대는 시스폰에서 태국의 구국경선까지 철도연결공사를 시작했다. 

 

제3비행집단은 8일 오전에 방콕에서 일본군의 진주를 위한 회담이 진행되는 동안 방콕 상공에 비행77전대 소속 전투기 11대와 비행제31전대 소속 경폭격기 9대를 띄웠다. 이때 태국전투기 3대가 달려들다가 격추되었으며 일본기의 피해는 없었다. 그러자 일본기들이 협정 타결 사실이 알려질 때까지 태국군 막사를 폭격했다.

 

이후 진주만 기습으로 미태평양함대가 큰 피해를 입었다는 사실이 알려지고 12월 10일에는 영국전함 프린스오브웨일스와 리펄스가 격침되면서 일본의 승세가 확실해지자 태국정부는 11일 오전 11시를 기하여 일본과 동맹조약을 체결했다.

근위사단은 방콕 점령임무를 후속부대에 넘기고 차례로 말레이 방면으로 이동했다. 근위보병제4연대는 12월 11일부터 철도편으로 남쪽으로 이동을 시작했고  제5연대는 42년 1월 초에 방콕을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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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제143연대의 상륙

 

싱고라 북쪽에서는 제15군 소속인 제55사단의 보병제143연대가 태국 남부에 상륙하고 있었다. 제143연대를 실은 수송선 7척은 제25군을 실은 선단과 함께 항해하다가 1941년 12월 7일 오전 10시 30분에 태국만 해상의 G 점에서 헤어져 목표지점인 나콘시탐마랏, 수랏타니(반돈), 춤폰, 그리고 프라추압키리칸으로 향했다.

 

(일본군의 태국 침공. https://en.wikipedia.org/wiki/Japanese_invasion_of_Thailand)

 

나콘으로 향한 선단은 수송선 2척, 공작선 1척으로 이루어져 해방함 시무슈의 호위를 받았다. 상륙병력은 보병제143연대 제1대대(제3중대와 기관총 1개 소대 제외)와 항공부대 일부 및 기타 부대로서 총 2,607명으로 자동차 50대를 보유했다. 상륙을 담당한 제1양륙대는 장갑정 1척,  대발 15척, 소발 11척, 얀마 6척, 소증기선 1척, 수선 1척, 대부주 4척을 보유했다.

 

얀마(ヤンマー)는 나무로 만들어 소형 엔진을 장착한 작은 주정을 통칭하는 말로 일본 회사인 얀마사가 만든 소형 디젤 엔진이 중일전쟁에서 크게 호평을 받으면서 보통명사화된 것이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미국이 만든 소형상륙정을 통틀어 히긴스 보트라고 부르던 것과 비슷한 경우이다.

 

나콘 선단이 시무슈의 유도를 따라 정박지에 닻을 내린 시간은 8일 오전 1시였다. 양륙대는 곧 주정을 내리고 병력이 옮겨탔는데 바다가 거칠어서 시간이 오래 걸렸다. 따라서 주정들이 해안으로 발진한 것은 오전 4시가 되어서였는데 바다가 거칠어서 많은 주정이 도중에 길을 잃었다. 양륙대장이 탄 지휘정이 흩어진 주정을 모아 오전 10시부터 상륙을 시작했는데 일본군 주정이 해안에 접근하자 태국군이 사격을 가했다. 장갑정이 앞에 나서서 태국군을 견제하는 동안 상륙을 감행하여 오전 10시 40분까지 상륙을 마쳤다. 일본군은 곧 태국군을 무장해제시키고 나콘 역과 비행장을 장악했다. 나콘 선단의 양륙이 끝난 것은 13일이었다.

 

프라추압으로 향한 1척에는 보병제143연대제3대대와 항공부대 일부 및 기타 부대가 탑승했다. 병력은 1,007명이었으며, 자동차 40대와 말 100필을 보유했다. 상륙을 담당한 제4양륙대는 대발 5척과 소발5척을 보유했다.

프라추압으로 향한 수송선은 8일 오전 4시 30분에 정박지에 진입했으며 주정에 올라탄 병력이 오전 6시 20분에 해안에 상륙했다. 태국군은 해안에서는 저항하지 않았으나 상륙 후에 총격전이 벌어졌다. 일본군은 30분 간의 교전 끝에 태국군을 제압하고 무장해제를 실시한 후 비행장을 점령했다.

 

수랏타니와 춤폰으로 향한 선단은 3척으로 이루어져 경순양함 가시이의 호위를 받았다. 수랏타니로 향한 수송선 1척은 7일 저녁 9시에 춤폰으로 향한 수송선과 헤어져 서쪽으로 항진했다. 수랏타니 상륙부대는 보병제143연대제1대대제3중대와 1개 기관총소대, 그리고 항공부대 일부 및 기타부대로서 총 1,048명에 자동차 20대를 보유했다. 상륙을 담당한 제2양륙대는 대발 6척, 소발 6척, 얀마 2척을 보유했다.

수랏타니로 향한 수송선은 8일 오전 2시에 정박지에 닻을 내렸다. 양륙부대가 주정을 내리고 병력들이 올라탔다. 주정들은 오전 4시 10분에 발진하여 어둠 속에서 나침반에 의지하여 항해한 끝에 오전 10시에 상륙을 시작했다. 상륙 직후 태국군 일부가 사격을 가했으나 일본군은 곧 태국군을 무장해제시키고 비행장을 점령했다. 수랏타니의 양륙은 16일에 끝났다.

 

(일본경순양함 카시이. 자세한 내용은 여기로. https://en.wikipedia.org/wiki/Japanese_cruiser_Kashii)

 

춤폰으로 향한 수송선 2척에는 보병제143연대본부, 제3대대, 산포병제55연대제4중대,공병제55연대제3중대, 항공부대 일부 및 기타 부대가 탑승했다. 상륙부대의 병력은 2,233명이며 자동차 20대, 말 330필을 보유했다. 양륙을 맡은 제3양륙대는 대발 6척, 소발 10척, 얀마 12척, 소증기선 1척, 예인선 1척, 수선 1척, 대부주 6척을 보유했다.

보병제143연대의 주력을 실은 춤폰 선단은 8일 오전 3시에 정박지에 진입했다. 이어서 양륙대가 주정을 내리고 병력이 올라탄 다음 발진하여 상륙했다. 상륙은 힘들었다. 상륙 해안에 뻘밭이 넓게 펼쳐져 병사들은 주정에서 내린 다음 단단한 땅을 밟을 때까지 1시간 이상을 뻘에서 허우적거리며 전진해야 했다. 다행히 약 300명의 병력을 가진 태국군은 상륙 중인 일본군을 공격하지 않았다. 일본군이 춤폰 시내로 진입하자 교전이 벌어졌으나 곧 방콕으로부터 휴전 명령이 내려왔다. 일본군은 태국군을 무장해제하고 주변 비행장을 점령했다.

 

(빅토리아포인트)

 

춤폰에 상륙한 보병제143연대의 주력은 버마 남부로 진격하여 빅토리아포인트의 비행장을 점령하라는 임무를 받고 있었다. 제143연대 주력은 11일 아침에 자동차를 타고 춤폰을 떠났다. 일본군은 티티왕사 산맥을 넘고 팍찬을 거쳐 다음날인 12일 오후 2시에 크라부리 마을에 도착했다. 여기서 제143연대 주력은 둘로 갈라졌다. 제143연대제3대대(1개 중대 감편)는 산포 및 공병 1개 중대와 함께 강을 건너 버마로 들어가 마란을 거쳐 육로로 크라부리 강의 서안을 따라 남하했다.

 

제143연대본부는 1개 중대와 함께 접이식 보트에 타고 강을 따라 내려갔다. 접이식 보트를 타고 크라부리 강을 따라 내려갈수록 물살이 거세져서 위험해졌다. 일본군은 14일 오전 6시 10분에 빅토리아포인트에서 북쪽으로 40km 정도 떨어진 말리완 부근에 상륙하여 자동차를 뺏어타고 남하했다. 연대본부와 1개 중대로 이루어진 일본군은 14일 오후 8시 20분에 가벼운 저항을 물리치고 빅토리아포인트를 점령했다. 제3대대 주력은 이틀 후에 도착했다. 이쪽 방면의 버마군은 일본군을 보자 도망쳤다.

빅토리아포인트를 점령한 일본군은 19일 오전 6시에 주정에 1개 소대를 실어 북쪽으로 145km 떨어진 복핀에 파견했다. 소대는 무사히 복핀에 상륙하여 주변 비행장을 점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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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싱고라 상륙

 

제5사단 주력을 실은 수송선 10척과 병원선 1척은 1941년 12월 7일 오전 10시 30분에 태국만 해상의 G점을 떠나 싱고라로 향했다. 제5사단의 주력은 제25군사령부, 제5사단사령부, 보병제9여단사령부, 보병제11연대, 보병제41연대, 수색제5연대, 전차제1연대 주력, 야포병제5연대 등으로 이루어져 보병 6개 대대, 전차 3개 중대, 그리고 야포 4개 중대를 보유하고 있었다. 여기에 공병, 통신, 치중병, 의무부대와 독립속사포 및 독립고사포 부대 등을 합쳐 약 13,500명이었다. 파타니에 상륙한 병력이 약 7,550명, 코타바루에 상륙한 병력이 5,503명이므로 이 날  태국 및 영령 말레이에 상륙한 제25군의 병력은 합쳐서 약 26,550명이다. 제5사단 주력의 임무는 싱고라에 상륙하여 주변 비행장과 철도를 장악한 다음 남쪽으로 진격하여 케다 주를 비롯한 영령 말레이 북서쪽의 비행장들을 점령하면서 남하하여 페락 강에 도달하는 것이었다.

 

제5사단 주력을 태운 선단은 7일 오후 4시에 파타니로 향하는 6척과 헤어졌고 8일 새벽 0시 35분에 싱고라 정박지에 진입하여 닻을 내렸다. 이때 풍속은 초속 7m, 파고는 2m 로 상륙하기에는 바다가 거칠었다. 따라서 주정을 내리는데 시간이 오래 걸려 오전 1시 57분에야 다 내렸으며 병사들이 주정으로 옮겨타는 데에도 역시 시간이 걸려 주정들이 해안으로 출발한 시간은 오전 3시 40분이었다. 보병제41연대가 최초로 상륙한 시간은 오전 4시 12분이었다. 태국군의 저항은 약했으며 일본군은 사전 계획대로 싱고라와 주변의 요지를 점령했다. 보병제41연대 일부가 싱고라 신비행장 남쪽의 태국제41보병대대와 제13포병대대를 공격하는 동안 보병제41연대 제2대대가 신비행장을 점령하고 비행기 3대와 자동화차 1대를 포획했다. 보병제41연대 제2대대는 나중에 보병제11연대 제2대대에게 비행장 방어를 맡기고 남쪽으로 향했다. 보병제41연대제1대대의 2개 중대로 이루어진 철도돌진대는 철도역으로 신속하게 진격하여 오전 5시 40분에 남쪽으로 향할 예정이던 기차를 탈취했다. 수색제5연대와 보병제41연대 제3대대는 싱고라 시내에서 태국군과 교전하여 제압하고 차량 50대를 포획했다.

 

싱고라에서 가장 먼저 남하를 시작한 것은 수색제5연대였다. 이어서 보병제41연대 제3대대가 양륙한 차량에 태국군으로부터 노획한 차량 50대를 더한 다음 오전 9시 20분에 남쪽으로 출발했다.  

제5사단은 수송선 용적의 부족 때문에 치중병 차량 모두, 보병차량 절반, 그리고 포병 차량 1/4 가량을 상하이에 남겨두고 왔다. 따라서 태국에서 차량과 기차를 탈취하는 것이 중요했다. 차량 탈취는 주로 수색제5연대가 맡았다. 수색제5연대는 핫야이에서 방콕 및 싱가포르로 가려던 화물열차를 잡아서 기관차 8대, 객차 9대, 화차 158대를 얻었으며 추가로 자동차 50대를 포획했다.

 

제25군 사령관 야마시타 도모유키 중장은 8일 오전 5시 20분에 대발동정을 타고 상륙한 후 오전 8시에 싱고라 지사관저에 들어가 태국당국과 교섭에 들어갔다. 그 결과 오후 1시에 휴전 합의가 이루어졌고 오후 11시에는 태국 측이 정식으로 제25군의 통과를 허용했다. 휴전 합의에 따라 싱고라 지역의 태국군은 오후 2시 30분에 항복했다. 싱고라 지역에서 태국군의 피해는 전사 15명, 부상 55명이었으며 일본군의 피해는 전사 9명 부상 8명이었다.

태국군이 항복하자 일본군 주력은 8일 저녁에 팟야이로 남하했으며 철도돌진대 또한 기차를 타고 남하하여 오후 6시에 팟야이로 들어섰다. 비행장에는 방공대가 진지를 파고 방공임무에 들어갔으며 공병 일부가 비행장을 정비했다. 공병 주력은 싱고라 항으로 계속 들어올 전차, 자동차 및 후속부대를 맞이할 준비를 서둘렀다.

8일 오후에 일본정찰기로부터 영국군 기계화부대가 사다오 방면으로 북상중이라는 보고가 들어왔다. 일본군은 영국군을 보다 남쪽에서 격파하기 위하여 남하를 서둘렀다.

 

(싱고라)

 

일본이 침공했을 때 말레이 수비대는 결단이 늦어져 제11사단장 머레이-라이언 소장이 태국 진입 명령을 받은 것은 8일 오부 1시 30분이 되어서였다. 아침에 영국 정찰기가 싱고라와 파타니로 날아가 이미 일본군이 상륙했다는 사실을 알아내었으므로 머레이-라이언 소장은  투우사 작전을 포기하고 지트라에서 일본군의 남하를 막기로 했다. 다만 싱고라에서 지트라로 이어지는 도로와 싱고라에서 페를리스로 이어지는 철도를 따라 소규모의 정찰대를 파견하여 일본군의 남진 상황을 탐지하고 진격을 방해하기로 했다.

 

8일 오후에 제1/8펀잡대대의 2개 중대, 1개 브렌건캐리어 소대, 제273대전차포대의 1개 소대(section), 제17공병중대의 2개 소대(section)로 이루어진 정찰대가 지트라 북쪽에서 국경을 넘어 싱고라-지트라 도로를 따라 북상했다. 일본군 정찰기가 이 모습을 보고 일본제5사단에게 보고했다. 제1/8펀잡대대는 8일 오후 9시에 사다오에서 전차를 앞세운 일본제5사단 주력과 만났다. 일본전차가 제1/8펀잡대대를 고착시키는 동안 뒤따르던 트럭에서 내린 일본군 보병이 뒤로 돌아가 제1/8펀잡대대를 포위하려고 했다. 일본군의 속셈을 알아차린 제1/8펀잡대대는 포위망에 걸리기 전에 후퇴했다. 다리를 끊으면서 후퇴한 제1/8펀잡대대는 국경을 다시 넘어 지트라 북쪽 6km 지점에 있던 제1/14펀잡대대의 전진 방어선을 통과하여 제11사단 지역으로 돌아왔다.

 

8일 오후에 북쪽의 페를리스에서도 태국령 내로 기계화 부대를 파견했다. 이 정찰대는 철도를 따라 클라웅 응가에까지 진출하여 커다란 철교를 폭파한 후에 남하하여 페당 베사르를 거쳐 제6보병여단 지역으로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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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크로 함락

 

제5사단 보병제42연대장 안도 타다오 대좌의 이름을 딴 안도지대는 태국 남부의 파타니에 상륙했다. 안도지대는 보병제42연대를 기간으로 전차제1연대제1중대, 수색제5연대제2중대, 야포병제5연대제3대대(제9중대 제외), 독립속사포제5중대를 비롯하여 공병, 통신, 위생, 치중병, 가교자재 및 항공부대(지상요원) 등으로 이루어져 7,750명의 병력을 가지고 있었다.

 

안도지대가 받은 명령은 다음과 같다.

우선 파타니에 상륙하여 주변 비행장을 점령한다. 이후 파타니-크로 도로를 따라 남하하여 태국 최남단의 베통에서 국경을 돌파하여 영령 말레이로 들어가 국경지대의 크로를 점령한다. 이후 남하하여 게릭에서 페락 강에 도달한 후 페락 강의 북안을 따라 내려오면서 렝공을 거쳐 쿠알라캉사르에서 제5사단 주력과 합류한다. 이후 페락 강을 건너 이포 공격에 참가한다.

 

(크로)

 

안도지대를 실은 수송선 6척은 7일 오전 10시 30분에 G점을 떠났다. 선단은 제5사단 주력을 실은 수송선 10척과 함께 항해하다가 7일 오후 4시에 헤어져 구축함 8척의 호위를 받으며 파타니로 향했다. 수송선들은 8일 오전 2시 30분에 무사히 파타니에 도착하여 주정을 내리고 병력을 옮겨 실었는데 코타바루와 마찬가지로 파도가 높아 고생했다. 안도지대는 오전 4시 30분부터 상륙을 시작했는데 저항은 없었다.

 

안도 대좌는 가장 먼저 상륙한 제42연대 제2대대를 이끌고 파타니 시가지로 돌입하여 전투를 벌였다. 파타니를 지키던 태국군은 태국제42보병대대, 파타니 주 경찰(1개 중대) 그리고 비행장 경비대 약 200명으로 제2대대가 쉽게 제압할 수 있는 수준은 아니었다. 전투는 아침까지 이어졌으며 일시적으로 지대본부가 포위되는 상황까지 겪었다. 그러나 오전 7시부터 제1대대가 전투에 개입하자 태국군은 오전 11시 40분에 항복했다.  태국군 전사자는 42명이었고 민간인 9명이 희생되었다. 일본군 사상자는 45명이었다.

 

제2대대가 태국군을 무장해제하는 동안 제1대대는 8일 오후 3시에 파타니-크로 도로를 따라 남쪽으로 떠났다.

수송선 2척에 탄 제3대대는 파타니 동쪽에 상륙하여 오후 7시에 비행장을 점령했다. 안도지대의 양륙이 완료된 것은 다음날인 9일 저녁이었다.

8일 저녁에 무장해제가 완료되자 안도 대좌는 통신부대와 함께 제1대대를 쫓아 남쪽으로 떠났고 이어서 제2대대가 전차, 장갑차 및 중화기와 함께 뒤를 따랐다. 비행장을 점령했던 제3대대도 비행장부대를 남겨두고 남하했다.

진격은 느렸다. 파타니-크로 도로는 비가 오면 진창이 되어 자동차 운행이 곤란했다.

 

선두로 남하하던 제1대대는 10일 오후에 삼삼오오 후퇴하던 태국병사를 만났다. 병사들은 이틀 전인 8일 오후에 강력한 영국군 부대가 태국수비대를 격파하고 태국 내로 진입하여 북상중이며 지금 남쪽으로 2km 떨어진 곳에서 태국군을 공격하고 있다고 말했다. 제1대대가 달려가보니 영국군 1개 중대가 태국군을 공격하고 있었다. 제1대대는 영국군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태국군을 공격하던 영국군은 헨리 무어헤드 중령이 이끌던 크로부대의 선두중대였다.

전쟁이 시작되었을 때 영국군 수뇌부는 대처가 느렸다. 코타바루에서 전투가 벌어지고 있는 동안 투우사 작전을 승인하는 영국참모본부의 전문이 8일 오전 8시에 도착했다. 말레이 사령관 퍼시발 중장은 즉시 태국 내로 진입하자고 주장했으나 극동총사령관 브룩포팸 대장은 날이 밝자마자 싱고라 방면으로 파견한 정찰기가 돌아올 때까지 기다렸다. 일본이 영국군의 태국 진입을 유도하기 위하여 코타바루에만 제한적으로 공격을 가했을 가능성을 두려워했던 것이다. 

오전 9시 15분에 만신창이가 된 정찰기가 싱고라와 파타니에 대규모의 일본군이 상륙했다는 정보를 가지고 코타바루에 착륙했다. 일본군의 전면 침공을 확신한 브룩포팸 대장은 퍼시발 중장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런데 이번에는 퍼시발 중장이 해협식민지 의회에 출석하고 있었다. 퍼시발 중장은 오전11시에야 브룩포팸 대장으로부터 태국 진입 명령을 받고 말레이 북서쪽 페낭 부근의 부킷메르타잠에 사령부를 차리고 있던 제3군단장 히스 중장에게 전화를 걸었는데 연결이 되지 않았다. 당시 말레이 수비대의 장거리 통신은 민간 통신선에 의지하고 있었기 때문에 필요할 때 연결하기가 쉽지 않았다. 오전 11시 30분까지 연결이 되지 않자 퍼시발 중장은 전화교환대에 태국 내로 진입하라는 명령을 전달했다.

이 명령은 제3군단 내의 혼란 때문에 오후 1시가 되어서야 히스 중장에게 도달했다. 히스 중장은 오후 1시 10분에 다시 퍼시발 중장에게 전화를 걸어 태국 진입 명령을 확인했다. 오후 1시 30분에 히스 중장은 제11사단장 머레이-라이언 소장에게 전화를 걸어 사단 직속의 크로부대를 편성하여 태국 내로 진입시키라고 명령했다. 크로에 주둔 중이던 제3/16펀잡대대장 무어헤드 중령이 크로부대장을 겸했다.

무어헤드 중령이 머레이-라이언 소장으로부터 국경을 돌파하여 태국내 50km 거리에 있는 레제 지점(Ledge position)을 점령하라는 명령을 받은 것은 오후 2시 가까이 되어서였으며 제3/16펀잡대대가 실제로 국경을 통과한 것은 오후 3시가 되어서였다. 파타니에 일본군이 상륙한 지 10시간이 지난 후였으며 이 지연 때문에 크로부대는 6시간 차이로 방어에 유리한 레제 지점을 점령하지 못하게 된다.

 

크로부대는 제3/16펀잡대대, 제5/14펀잡대대의 2개 중대, 그리고 제273대전차포대의 1개 중대(troop)로 이루어졌으나 제5/14펀잡대대는 페낭에 있었고 대전차중대는 지트라에 있어서 당장 출발할 수 있는 것은 제3/16펀잡대대 뿐이었다. 제3/16펀잡대대가 국경선에 도착하자 도로는 봉쇄되어 있었고 태국무장경찰 약 300 명이 숲에 숨어서 사격을 가해왔다. 태국무장경찰의 저항은 예상 외로 강하여 제3/16대대는 9일 오후 3시까지 만 하루동안 전투를 벌여야 했다. 제3/16대대가 태국무장경찰을 쫓아내고 국경에서 불과 5km 떨어진 베통을 점령한 것은 9일 해가 떨어진 후였다.

다음날인 10일 아침에 제3/16펀잡대대는 트럭을 타고 베통을 떠나  북상했다. 선두 중대는 레제 지점에서 10km 떨어진 곳에서 하차하여 도보로 조심스럽게 북상했다. 아니나다를까 2km도 가기 전에 태국군 방어선에 부딪혔다. 선두 중대는 후속 부대를 기다리지 않고 공격을 시작했는데 잠시 후 북쪽으로부터 강력한 일본군이 출현했다.

대대 규모의 일본군으로부터 공격을 받은 제3/16펀잡대대의 선두 중대는 1시간 동안 싸우다가 남쪽으로 도망쳤다. 제3/16펀잡대대의 주력은 북상하다가 선두 중대가 쫓겨 오는 것을 보고 황급히 방어준비를 하여 안도지대 제1대대를 저지했다. 오후가 되자 안도 지대장이 도착하여 공격을 독려했다. 오후 내내 이어진 일본군의 공격으로 제3/16펀잡대대는 큰 피해를 입으면서 방어선을 지켰다. 지친 일본군은 다음날 아침에 공격하기로 했다. 

 

한편 제3/16펀잡대대는 밤이 되자 방어에 불리한 기존 위치를 포기하고 남쪽으로 2km 정도 물러나 작은 강을 건너 다시 방어선을 폈다. 이때 다리를 끊어서 적 전차의 돌입을 막았다. 10일 하루 동안 제3/16펀잡대대는 병력의 1/3을 잃었다.

이날 페낭에 주둔하고 있던 제5/14펀잡대대와 지트라에 있던 제273대전차포대의 1개 중대가 크로에 도착했다. 무어헤드 중령은 제5/14펀잡대대와 대전차중대에게 베통 북쪽 15km 지점에 방어선을 펴라고 명령했다.

 

안도지대 제1대대는 10일 밤에 영국군이 물러나자 추격했으나 2km 정도 추격한 후 영국군의 새로운 방어선에서 저지당했다. 일본군은 11일 아침부터 공격했다. 이날 안도지대 제1대대는 영국군 전방 100m 까지 접근하여 하루 종일 전투를 벌였으나 방어선을 뚫지 못했다. 저녁이 되어 안도지대의 제2대대와 전차 및 야포들이 도착하자 안도 대좌는 다음날 아침에 총공격을 실시하기로 했다.

 

한편 영국군은 일본군의 공격을 막아내었으나 피해가 누적되고 있었다. 게다가 무어헤드 중령은 저녁이 되어 일본군에게 전차를 포함한 대규모 증원군이 도착했다는 사실을 알았다. 무어헤드 중령은 제11사단장 머레이-라이언 소장에게 철수허가를 받아 두었다. 

 

일본군이 12일 오전 8시 30분부터 야포와 전차의 지원 아래 공격하자 1시간 만인 오전 9시 30분에 영국군이 철수했다. 이제 350명으로 줄어든 제3/16펀잡대대는 방어선에서 물러나 정오 경에 베통 북쪽 약 15km 지점에 펼쳐진 제5/14펀잡대대의 방어선을 통과했다. 무어헤드 중령은 제5/14펀잡대대에게 일본군의 진격을 견제하면서 후퇴하라고 명령했다. 제3/16펀잡대대는 베통과 크로를 통과하여 저녁에 크로 서쪽 5km 지점의 도로 옆에 미리 파놓은 방어진지에 도착했다. 이날 밤 크로부대는 제11사단의 지휘를 벗어나 제3군단의 직접 지휘 아래 들어갔다. 

안도지대에서는 지쳐버린 제1대대를 대신하여 제2대대가 전면으로 나서 남진했다.

 

13일 오전 10시에 안도지대의 선두에서 남하하던 제2대대가 베통 북쪽 15km 지점에서 제5/14펀잡대대로부터 박격포 공격을 받았다. 우세한 일본군은 야포와 전차의 지원 아래 반격했고 저녁이 되자 제5/14펀잡대대는 방어선을 버리고 철수했다. 제5/14펀잡대대는 베통과 크로를 지나 14일 오전에 크로 서쪽에 주둔하고 있던 제3/16펀잡대대에 합류했다.

제5/14펀잡대대의 후퇴로 크로에서 페락 강 북안의 게릭까지 통로가 열렸다. 만일 일본군이 게릭을 거쳐 쿠알라캉사르에 도달하면 제3군단 전체의 보급로가 위험했다. 제3군단장 히스 중장은 이런 사태를 막기 위하여 이포에 주둔하고 있던 제2아길서덜랜드하이랜더(2nd Argyll and Sutherland Highlandes)대대에서 1개 중대를 떼내어 장갑차 소대와 함께 게릭으로 파견했다. 

 

안도지대는 14일 아침에 베통 북쪽에 도달했으며 오후 3시에는 국경에서 불과 5km 떨어진 베통 시가지에 들어섰다. 14일 밤을 베통에서 지낸 일본군은 역습에 주의하면서 15일 정오에 국경을 통과하여 크로에 입성했다. 안도지대장이 크로에서 쌍안경으로 서쪽을 바라보니 영국군은 발링으로 통하는 도로를 지킬 뿐 크로를 탈환하려는 움직임은 없었다. 따라서 안도지대는 계획대로 남쪽으로 꺾어 게릭으로 향했다. 파타니를 떠난 이후 크로를 점령하기까지 안도지대는 약 120명의 사상자를 기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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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코타바루 함락

 

코타바루 해안에 상륙한 다쿠미 지대는 해안을 지키던 영국제3/17도그라스대대로부터 강력한 저항을 받았다.

제1차 상륙은 1941년 12월 8일 오전 2시 15분부터 시작되었다. 상륙 해안은 서쪽의 바당과 동쪽의 사박 사이 해안이었다. 우익인 제3대대 제11중대 주력이 탄 특대발 1척은 해안 가까이에서 제21산포대의 포격을 받아 침몰했다. 탑승자 중 1/3은 해안까지 헤엄쳐 상륙했고 1/3은 다른 주정에게 구조되어 상륙했으며 1/3은 목숨을 잃었다.

 

제11중대의 참사를 제외하면 서쪽에 상륙한 제3대대는 약한 저항을 받았다. 제9중대가 벙커를 제압하는데 성공하자 제3대대장은 접이식 보트를 타고 눈 앞에 보이는 작은 섬으로 진격하기로 했다. 제3대대는 접이식 보트 12척을 가지고 상륙했으나 4척은 제11중대를 실은 특대발이 침몰할 때 같이 잃어버렸고 5척은 해안에서 가져올 수 없었다. 제3대대장은 수중에 있는 접이식 보트 3척에 1개 분대씩 3개 분대를 싣고 강을 건너 작은 섬에 상륙하여 점령했다. 휘하 부대 중에 제9중대를 제외하고는 연락이 닿지 않아서 제3대대본부는 그곳에 머물렀다. 

 

(코타바루 전투 상황도. 지도의 위쪽이 서쪽이다. http://www.oocities.org/dutcheastindies/kota_bharu.html)

 

동쪽인 사박 부근 해안에 상륙한 제1대대는 강력한 저항을 받았다. 해안에서 약 50m -70m 떨어진 곳에 철조망이 쳐져 있었고 앞에는 지뢰를 묻어 놓았다. 철조망 뒤에는 기관총을 장착한 콘크리트 벙커가 자리잡고 있었으며 벙커 주변의 참호에는 영국군 소총병이 가득 들어 있었다. 벙커의 기관총이 뭍에 올라오는 일본군을 보이는 족족 사살했으므로 일본군은 머리도 제대로 못들고 물가에 엎드려 있을 수 밖에 없었다. 제1대대장이 총탄에 맞아 중상을 입는 등 사상자가 속출했다. 제3중대가 돌파를 시도했으나 중대장이 전사하는 등 장교 전원이 전사하거나 부상을 입고 전력의 2/3를 상실하면서 실패했다.

제1대대의 교착상황은 제2차 상륙부대로 제4중대와 기관총소대가 상륙하면서 겨우 풀렸다. 제4중대장은 중상은 입은 제1대대장을 대신하여 대대의 지휘권을 장악하고 전진을 명했다. 새로 상륙한 기관총 소대의 엄호 아래 피해가 적은 제4중대가 앞장서고 제1, 제3중대 병력 및 제5중대의 일부 병력이 뒤따랐다. 일본군은 필사적으로 벙커에 접근하여 공격했다. 이 과정에서 공격을 지휘하던 제4중대장이 전사하는 등 큰 피해를 입었으나 오전 7시까지 영국군의 제1방어선을 돌파함으로써  제1대대는 겨우 한숨을 돌릴 수 있었다.

 

제56연대장 나스 대좌는 제3대대 제12중대와 함께 서쪽 해안에 상륙했다. 상륙 후 전진하던 연대본부는 지뢰를 밟은데다가 영국군의 집중 사격을 받아 통신대장을 비롯한 몇 명의 사상자가 생겼다. 나스 대좌는 제3대대본부가 있는 작은 섬으로 건너가려고 했으나 접이식 보트가 없었다. 공병이 용감하게 해안으로 돌아가 접이식 보트 2척을 가져왔다. 접이식 보트 2척이 부지런히 강을 왕복하면서 연대본부, 제12중대 및 기관총소대를 실어날랐다. 섬에 오른 나스 대좌는 오전 4시에 제3대대장을 만나 연대본부를 차렸다. 바당 방면의 영국군은 최후 방어선으로 물러났는데 이 과정에서 해안선에 배치되어 있던 3.7인치 산포 2문을 방기했다. 다음날 오후에 일본군이 산포를 발견하여 사용했다.

 

지대사령부는 속사포를 비롯한 중화기 및 제2대대 주력과 함께 3차로 상륙했다. 상륙 직후 제2대대는 제1대대를 도와 동쪽 해안의 제2방어선을 돌파했으나 그 과정에서 제2대대장이 중상을 입는 등 큰 피해를 입었다. 하지만 덕분에 사박 방면의 일본군도 오전 9시까지 제3/17도그라스대대의 최후 방어선에 도달했다. 이때 영국군의 반격이 시작되었다.

 

(코타바루)

 

코타바루에 사령부를 두고 있던 제8인도보병여단장 베르톨트 키 준장은 일본군이 상륙하자 촌동에 자리잡고 있던 제2/12FFR대대(2개 중대)를 사박 방면으로, 그리고 페리갓에 주둔 중이던 제1/13FF소총대대를  바당으로 북상시켰다. 역시 촌동에 있던 제73야포대는 코타바루 비행장 부근에 방열했고, 제21산포대도 후퇴하여 비행장 부근에 방열했다. 다만 해안선에 배치되었던 1개 소대는 시간이 없어 포는 버려두고 병사들만 빠져나왔다. 키 준장의 직속 상관인 제9사단장 바스토우 소장은 말레이 사령부에 요청하여 예비대인 제12여단에서 제4/19하이드라바드대대를 받아 8일 아침에 철도편으로 쿠알라크라이에 파견했다.

 

키 준장의 계획에 따르면 제2/12FFR대대는 사박에서 출발하여 서쪽으로, 제1/13FF소총대대는 바당에서 출발하여 동쪽으로 일본군을 공격할 것이었다. 해안선에서 3km 떨어진 코타바루 비행장 부근에 방열한 제73야포대와 제21산포대가 화력지원을 담당했다. 공격은 8일 오전 9시에 실시되었으나 실패했다. 훈련이 부족한 5개 중대가 강을 건너 연대 규모의 다쿠미 지대를 섬멸하는 것은 무리였다. 오전 11시에 재차 공격을 시도했으나 역시 실패했다. 이후 해안 부근은 영국군과 일본군의 소규모 부대들이 어지럽게 섞여 돌아다니는 혼란한 상태가 되었다. 공격은 실패했지반 소득은 있었다. 본의 아니게 영국군 2개 대대는 일본군이 해안두보에서 강력한 제3/17도그라스대대의 최후방어선을 피하여 옆으로 진출할 통로를 막아버린 셈이 되었다.

8일 오후가 되자 해안의 상황은 지쳐버린 씨름선수가 샅바를 쥐고 대치하는 형국이 되었다. 영국군은 일본군을 바다로 밀어넣을 힘이 부족했지만 일본군 또한 영국군의 방어를 뚫을 힘이 없었다. 다쿠미 지대의 정면에는 제3/17바그라스대대의 최후방어선이 있었다. 비록 제1선과 제2선 진지는 점령당했지만 후퇴한 병력들이 최후 방어선의 기관총 벙커를 중심으로 강력한 방어 태세를 갖추고 있었다. 해안의 양쪽 출구인 바당과 사박은 제2/12FFR대대와 제1/13FF소총대대가 막고 있었다. 일본군이 방어선의 일부를 공격하면 영국군의 야포가 불을 뿜었다.

 

팽팽한 균형을 깬 것은 엉뚱하게 코타바루 비행장의 영국공군 지상요원들이었다. 코타바루 비행장은 8일 오전부터 일본기의 폭격과 기총소사를 당하면서 피해가 누적되고 있었다. 오후 4시가 되자 지쳐버린 비행장 요원들 사이에 해안의 일본군이 영국군 방어선을 뚫고 비행장 외곽에 도달했다는 뜬소문이 퍼졌다. 당황한 공군장교가 자세히 알아보지도 않고 철수명령을 내렸다. 지상요원들은 비행장 건물에 불을 지른 다음 트럭을 타고 쿠알라크라이로 달아났고 덩달아 비행장 방어부대도 대공포와 박격포, 장갑차 등을 버려둔 채 달아났다. 이들은 급히 달아나느라 파괴도 제대로 하지 않았다. 건물에만 불을 질렀을 뿐 정작 중요한 폭탄이나 항공유는 그대로 남아 있었으며 활주로도 멀쩡했다. 한편 전화로 일본군이 비행장에 진입했다는 보고를 들은 극동총사령곤 펄포드 소장은 코타바루와 공케다에 남아있던 비행기에게 즉시 쿠안탄으로 철수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등 뒤에서 비행장이 불타고 이어서 비행기들이 황급히 이륙해서 남쪽으로 도망치는 모습을 본 제8여단 병사들은 맥이 풀렸다. 제8여단이 일본군을 필사적으로 막고 있는 이유가 비행장을 지키는 것이었는데 이제 비행장을 포기한 이상 싸울 이유가 사라진 것이었다. 제8여단장 키 준장은 제9사단장 바스토우 소장에게 요청하여 필요하면 언제든지 철수해도 좋다는 허가를 받았다.

 

8일 오후 7시가 되자 제8여단사령부에 또다른 일본군 선단이  파타니로부터 코타바루로 남하 중이라는 잘못된 보고가 들어왔다. 키 준장은 이 선단이 일본이 파견한 증원군이라고 생각하여 오후 8시에 해안선의 3개 대대에게 비행장을 포기하고 여단사령부가 위치한 코타바루 시가지의 북쪽까지 후퇴하라고 명령했다. 사박과 쿠알라베숫 사이의 해안선을 지키던 제2/10발루치대대도 페리갓으로 후퇴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오후 10시에 제73야포대가 비행장에 직접 사격을 가하여 항공유를 불태웠다. 이후 제73야포대와 제21산포대는 200대의 차량과 함께 안전하게 코타바루 시가지를 지나 남쪽으로 후퇴했다. 다쿠미 지대와 접촉하고 있던 3개 대대의 후퇴는 어려웠다. 억수같은 비가 쏟아지는 가운데 3개 대대는 추격하는 일본군과 전투를 벌여가면서 남하하여 9일 새벽에 지정된 위치에 도달했다.

 

영국군이 후퇴하자 다쿠미 지대는 진격하여 8일 오후 10시가 좀 지난 시각에 코타바루 비행장에 진입했다. 비록 항공유는 불타버렸지만 수천발의 폭탄과 60발의 항공어뢰를 비롯한 대량의 군수품은 물론 대공포와 대공기관포, 박격포와 자동차 및 장갑차까지 남아 있었다. 9일 새벽에 제56연대장 나스 대좌는 추격에 나섰다.

 

코타바루 시가지 북쪽에 급히 편성한 영국군 방어선은 9일 오전 6시 30분부터 박격포의 화력지원을 받는 일본군의 공격으로 동쪽 일부가 뚫렸다. 전선을 시찰한 키 준장은 부하들이 더 이상 버티기 어렵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어차피 부녀자와 어린이, 그리고 케란탄의 술탄을 비롯한 주요 인사들은 모두 떠났으므로 코타바루 시가지를 애써 지킬 필요도 없었다. 영국군은 9일 오후에 페리갓-물롱 선까지 후퇴했으며 9일 아침에 도착한 제4/19하이드라바드대대는 예비대로 케테레에 주둔했다. 오후 늦게 키 준장은 여단사령부를 케테레 남쪽의 촌동으로 옮겼다.

 

영국군이 후퇴하자 다쿠미 지대는 9일 오후 12시 30분에 코타바루 시가지에 진입했다.

코타바루 상륙작전에서 다쿠미 지대는 약 700명의 사상자를 기록했다. 일선 대대장의 피해가 커서 3명 중 2명이 중상을 입었으며 보병중대장 12명 중에서 3명이 전사했다. 별도로 양륙작업대에서는 49명이 전사하고 85명이 부상을 입었다.

주정 피해는 다음과 같다.

 

특대발 : 3척 중 2척 침몰

대발 : 24척 중 6척 침몰, 3척 손상

소발 : 21척 중 7척 침몰, 7척 손상

장갑정 : 3척 중 1척 손상

 

영국군의 사상자는 약 600명, 포로는 약 100명이었다.

 

남방군 사령관 데라우치 히사이치 원수는 12월 13일에 코타바루 점령에 대하여 다쿠미 지대를 축하하는 내용의 전문을 보냈는데 이 과정에서 제25군 사령부와 협의를 하지 않았다. 애당초 데라우치 원수와 사이가 좋지 않았던 제25군 사령관 야마시타 중장은 이 사건으로 큰 모욕감을 느끼고 남방군 사령부를 나쁘게 생각했다.

 

코타바루를 점령한 다쿠미 지대가 전진을 멈추면서 10일에는 페리갓-물롱에 걸친 제8여단 방어선이 하루종일 조용했다.

10일 오후에 일본군이 남쪽의 쿠알라베숫에 상륙했다는 잘못된 보고가 들어왔다. 키 준장은 포위를 피하기 위하여 마창 및 공케다 비행장을 포기하고 마창 바로 남쪽까지 후퇴하기로 결정했다. 영국군은 철수하면서 도로와 철도, 그리고 비행장에 대해 파괴활동을 실시했다. 비행장의 건물과 항공유는 불태웠으나 활주로를 파괴할 여유는 없었다. 제8여단은 11일 아침에 마창 바로 남쪽에 새로 방어선을 폈다. 

 

(북부 말레이)

 

당시 마창으로 연결되는 보급로는 쿠알라크라이에서 북상하는 한 가닥의 철도뿐이었는데 이 철도는 후방의 파괴활동으로 쉽게 차단될 수 있었다. 게다가 동북부 말레이의 3개 비행장(코타바루, 공케다, 마창)을 모두 포기한 이상 제8여단이 그곳에 머물 이유도 없어진 셈이었다. 제9사단장 바스토우 소장은 이런 논리로 제3군단장 히스 중장에게 제8여단을 남쪽 쿠알라리피스 지역까지 철수시키자고 건의했다. 히스 중장은 찬성했으나 말레이 사령관 퍼시발 중장이 불허했다. 그러자 히스 중장은 발끈하여 퍼시발 중장과 직접 만나 자신의 의견을 관철하겠다면서 11일 밤에 열차를 타고 페낭 부근 부킷메르타잠에 있는 제3군단사령부를 떠나 싱가포르로 달렸다. 물론 히스 중장은 12일 오후에 항공편으로 복귀할 예정이었지만 결정적인 전투 초기에 군단장이 자리를 비운 것은 전황에 악영향을 끼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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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코타바루 상륙

 

1941년 12월 7일 오전 9시 30분에 태국 만의 상봉 지점(G점)에 도달한 일본선단은 1시간 후 각자의 목적지를 향하여 흩어졌다. 다쿠미 지대를 실은 선단은 영령 말레이 북단의 코타바루로 향했다.

보병제23여단장 다쿠미 히로시 소장의 이름을 딴 다쿠미 지대의 총 병력은 5,503명으로 다음과 같은 부대로 이루어져 있었다.

 

보병제23여단 사령부

보병제56연대

산포병제18연대제1중대

공병제12연대

기타 통신, 수송, 의무부대

 

이외에 비행장 점령 후 수리, 방어 및 관리를 위하여 건설 및 근무부대,  독립속사포 2개 중대 및 야전고사포 1개 중대, 그리고 비행장 중대등이 동행했다. 상륙은 독립공병제14연대가 맡았으며 정박장 사령부와 수상근무부대 등도 투입되었다. 또한 수송선의 대공방어를 위하여 선박고사포제1 및 제2연대의 분견대가 배치되어 있었다.

 

다쿠미 지대를 실은 선단은 아와지산마루(9,475톤), 아야토산마루(9,475톤), 그리고 사쿠라마루(7,170톤)로 이루어져 있었다. 

아와지산마루에는 보병여단사령부, 보병제56연대 제1대대 및 제5중대, 연대포중대, 사단공병 1개 소대, 기타를 합쳐 1,653명이 타고 있었다. 아야토산마루에는 보병제56연대본부, 보병제56연대제3대대, 연대속사포중대, 공병제12연대의 1개 소대, 기타를 합쳐 1,700명이 타고 있었다. 사쿠라마루에는 보병제56연대제2대대(제5중대 제외), 공병제12연대의 1개 소대, 기타를 합쳐 2,150명이 타고 있었다.

 

독립공병제14연대가 보유한 주정은 특수대발동정(특대발) 3척, 대발동정(대발) 24척, 소발동정(소발) 21척, 장갑정 3척, 고속정 및 전령정 각 1척이었다. 주정의 수송능력은 경우에 따라 다르지만 일반적으로 특대발 100명, 대발 70명, 소발 30명이었다. 따라서 한번에 2,000 명 정도를 중화기, 탄약, 접이식 보트 등과 함께 상륙시킬 수 있었다. 최초 상륙에 제1 및 제3대대 주력과 제5중대가 상륙했다.

 

(대발동정. 자세한 내용은 여기로. https://en.wikipedia.org/wiki/Daihatsu-class_landing_craft)

 

다쿠미 지대는 상륙 이후 작은 강을 건너는데 사용할 수 있는 접이식 보트를 준비했다. 판자로 만들어지고 중간에 고무로 이어진 이 보트는 접어서 운반하다가 강을 만나면 펴는데 길이 4.5m, 폭 1.5m, 흘수 90cm 로 1명이 2분 내로 펼 수 있었다. 완전 무장한 병사 12명이나 산포 1문을 4명의 포반원과 함께 운반할 수 있었으며 외부 모터를 사용하여 8노트를 낼 수 있었다. 이동은 트레일러에 실어 자동차로 끌어야 했으나 12명이 들고 옮길 수도 있었다. 제1차 상륙부대인 제3대대 주력은 12척, 제1대대 주력은 8척의 접이식 보트를 가지고 상륙했다.

 

상륙하는 병사의 소지품은 소정의 탄약과 수류탄 2-3발, 식량 5일치, 피복 등으로 군장 무게는 37kg 정도였고 전원 구명동의를 착용했다.

제56연대의 완편 인원은 3,525명이지만 환자, 물품감시자, 추후 상륙인원 등을 제외하자 상륙 인원은 2,900 명 정도로 줄어들었다.

호위대는 제3수뢰전대 기함인 경순양함 센다이, 제19구축대(아야나미, 우라나미, 시키나미, 이소나미), 소해함 2척, 구잠함 1척으로 총 8척이었다.

 

(일본경순양함 센다이. 자세한 내용은 여기로. https://en.wikipedia.org/wiki/Japanese_cruiser_Sendai)

 

다쿠미 지대를 실은 선단은 1941년 12월 7일 오전 10시 30분에 상봉점을 떠나 센다이를 기함으로하는 8척의 호위를 받으면서 16노트의 속력으로 코타바루로 향했다. 오후 8시에 센다이로부터 코타바루 앞바다의 풍속 7m, 파고 1m 로 상륙작전에 적합하다는 보고가 들어왔다. 오후 9시부터 선단은 해안에 접근하여 남하했다. 오후 11시가 되자 달이 떠올랐다. 양륙작업대는 주정을 결박한 밧줄을 푸는 등 준비에 들어갔고 보병들도 갑판에 집결했다. 오후 11시 55분, 선단은 해안에서 3km 떨어진 해역에 닻을 내렸으며 센다이와 구축함들은 해안 방어선과 코타바루 비행장에 대해 함포사격을 실시했다.

이때부터 바람이 심해져 파고가 상륙 한계인 2m 로 높아졌으므로 주정을 내리는 일은 어려웠다. 아와지산마루에서 기중기로 최초의 대발을 내리려고 할 때 선체가 기우뚱하면서 대발이 선체에 부딪히자 엄청난 소음과 함께 고속정이 대발 위에 떨어졌다. 주정을 모두 물에 띄우는데 1시간이 걸렸다.

이어서 병사들이 선체를 내려가 주정에 올라탔는데 이 과정도 어렵고 위험했다. 1인당 37kg 의 군장을 메어 움직임이 둔해진 병사가 파도에 넘실거리는 주정에 내리다가 바다에 빠지기도 했으며 일부 주정은 파도에 밀려 수송선에 세차게 부딪히거나 심지어 전복되었다.

이런 어려움을 딛고 탑승은 오전 1시 14분에 끝났으며 주정들은 수송선을 떠나 발진 지점으로 나아갔다. 오전 1시 35분에 제1차 상륙부대가 발진했다.

상륙주정은 우익에 제3대대 주력, 좌익에 제1대대 주력의 2열 종대로 나란히 나아가다 해안에서 1km 까지 접근했을 때 일렬 횡대로 늘어서서 전진했다. 가장 왼쪽은 제2대대의 선발대인 제5중대, 좌익은 제1대대 주력, 우익은 제3대대 주력이었다. 해안에서 500m 까지 접근하자 육지의 영국군 벙커에서 기관총이 불을 뿜었다. 특히 영국 방어선의 서쪽인 바당 부근 해안에는 제27산포대의 3.7인치 산포 2문이 배치되어 우익인 제3대대 쪽에 강력한 포격을 가해왔다. 제1차 상륙부대는 오전 2시 15분에 상륙했다.

 

(코타바루 전투 상황도. 지도의 위쪽이 서쪽이다. http://www.oocities.org/dutcheastindies/kota_bharu.html)

 

공병들은 제1차 상륙부대를 실은 주정들이 수송선을 떠나자마자 제2차 상륙에 배당된 주정들을 내렸으며 곧 병력들이 옮겨타기 시작했다. 보병제56연대장 나스 요시오 대좌가 지휘하는 제2차 상륙부대의 우익은 제56연대본부 및 제3대대의 나머지 병력으로 이루어졌고, 좌익은 제1대대의 나머지 병력 및 지대 참모 일부로 이루어졌다. 제2차 상륙부대는 큰 피해를 입지 않고 오전 3시 30분 상륙했다. 수송선에는 제1차 상륙에서 돌아온 주정들이 도착하기 시작하여 제3차 상륙부대가 옮겨타기 시작했다. 이때 영국 공군의 반격이 시작되었다.

 

코타바루 지역을 방어하고 있던 것은 베르톨트 키 준장의 제8인도보병여단으로 4개 보병대대, 감편된 1개 산포대, 그리고 1개 야포대로 이루어져 있었다. 보병대대 중 제2/12FFR대대(2/12th Frontier Force Regiment)는 제22여단으로부터 임시로 배속된 부대로 2개 중대로 이루어져 있었다. 25파운더 8문을 가진 제73야포대(73rd field Battery)도 임시로 배속된 부대였다. 편제부대인 제21산포대(21st Mountain Battery)는 원래 3.7인치 산포 8문을 보유했지만 1개 소대(section)를 제22여단에 배속시켜 6문으로 줄어든 상태였다.

 

(QF 3.7 인치 산포. 자세한 내용은 여기로. https://en.wikipedia.org/wiki/QF_3.7-inch_mountain_howitzer)

 

일본군이 상륙한 바당과 사박 사이 해안선은 제3/17도그라스대대가 지키고 있었고, 사박부터 남쪽의 쿠알라베숫까지는 제2/10발루치대대가 담당했다. 제1/13FF소총대대(1/13th Frontier Force Rifle)는 예비대로 페리갓에 주둔하고 있었고 제22여단에서 임시 배속된 제2/12FFR대대의 2개 중대는 역시 임시배속된 제73야포대대와 함께 남쪽인 촌동에 주둔하고 있었다. 제21산포대는 2문으로 이루어진 소대(section) 별로 나뉘었다. 1개 소대는 바당 부근의 해안선에 배치되었고 나머지 2개 소대는 해안선과 코타바루 비행장 사이에 전개했다. 해안선을 방어하는 제3/17도그라스대대는 기관총이 설치된 콘크리트 벙커들을 중심으로 방어선을 펴고 있었으며 벙커 앞에는 철조망을 두르고 지뢰를 깔았다.

 

일본군 상륙 보고를 받은 극동공군총사령관 펄포드 소장은 반격을 명령했다. 코타바루 비행장에 주둔 중이던 제1호주정찰비행대대의 허드슨 2대가 날아올라 오전 3시 30분에 일본선단 상공에 도달하여 정찰했다. 이어서 폭탄을 장비한 허드슨들이 날아올라 일본수송선 상공을 낮게 지나가면서 폭격을 가했다. 허드슨들은 밤새 15회 출격하여 아와지산마루에 3발, 아야토산마루에 3발, 사쿠라마루에 2발을 명중시켜 아와지산마루를 격침하고 아야토산마루롸 사쿠라마루를 소파했다.

 

일본선단의 호위함정들과 수송선에 배치된 고사포들이 조준을 방해하여 첫번째 폭격은 실패했으나 폭격이 진행되면서 점차 정확해졌다.

당시 일본수송선에는 방공을 위하여 선박고사포 부대가 탑승해 있었다. 아와지산마루와 아야토산마루는 고사포 6문, 고사기관포 8문씩 장비하고 있었으며 방공함 역할을 부여받은 사쿠라마루는 고사포 8문, 고사기관포 12문을 장비하고 있었다. 이외에도 아직 상륙하지 않은 고사포, 경기관총에 소총까지 사격했다. 폭격을 마친 허드슨들은 수송선 갑판에 기총소사를 가했다. 이 와중에 제3차 상륙부대는 기를 쓰고 수송선에서 주정으로 옮겨탔다.

아와지산마루는 제2번창 부근에 명중한 폭탄을 시작으로 3발을 맞았다. 갑판에 쌓아두었던 탄약과 연료에 불이 붙어 폭발과 함께 선체는 연기에 휩싸였다. 아야토산마루는 좌현에 명중탄을 맞아 단정들이 부서지고 제4번창 부근의 선실이 박살났다. 10분 후 아야토산마루는 다시 제5 및 제6번창 부근에 각각 명중탄을 맞아 하역이 불가능해졌다. 아야토산마루의 인명 피해는 전사51명, 중상 34명, 경상 15명이었다. 상대적으로 강력한 대공화력을 갖추고 일종의 방공함 역할을 부여받았던 사쿠라마루도 명중탄 2발을 맞아 수선 하에 지름 1m 의 구멍이 뚫렸고 전사 3명, 중상 수명의 인명피해를 입었다.

 

오전 3시 35분에 해안에서 돌아온 주정 1척이 아와지산마루에 다가와 큰 소리로 "02시 15분 상륙 성공" 이라고 외쳤다. 무전기가 젖어 먹통이 되었던 것이다. 다쿠미 소장은 즉시 제25군 사령부에 전보를 쳤다.

 

"8일 02시 15분 제1회 상륙성공. 적의 저항이 강하여 치열한 전투가 벌어짐. 해안에서 요란한 총포성이 들림. 선단은 적기의 습격을 받아 피해를 입음"

 

호위를 맡은 제3수뢰전대는 제3차 상륙을 연기하고 철수할 것을 권고했으나 다쿠미 지대장은 강하게 반대했다. 그는 해안에서 병력들이 고전 중이므로 제3차 상륙을 마치고 선단은 오전 6시 30분에 철수해야 한다고 주장한 다음 오전 4시 30분에 주정을 타고 해안으로 출발해 버렸다.

결국 선단은 제3차 상륙을 마치고 오전 6시에 철수했다. 제3수뢰전대는 수송선 2척을 이끌고 파타니 방면으로 철수했고 구잠함과 소해함이 약 30분간 아와지산 마루의 생존자 약 260명을 구한 후 뒤따랐다. 날이 밝자 코타바루와 공케다에서 이륙한 빌데비스트가 파타니로 철수 중인 일본선단을 쫓아와 경순양함 센다이에 뇌격을 가했으나 명중시키지 못했다. 선단은 오후 12시 20분에 무사히 파타니에 도착했다. 움직일 수 없는 아와지산마루는 철수하지 못하고 날이 밝자 다시 몰려온 영국기에 추가로 명중탄을 얻어맞았다. 코타바루 앞바다에서 4일간 불타던 아와지산마루는 12일 밤에 대폭발을 일으키고는 침몰했다.

 

파타니에 도착한 아야토산마루와 사쿠라마루는 사상자를 옮긴 후 다쿠미 지대의 잔여 병력과 무기 및 보급품들을 양륙하기 위하여 9일 오전 1시 30분에 파타니를 떠났다. 문제는 양륙에 사용할 주정이 없다는 것이었는데 9일 아침에 코타바루 앞바다에 돌아오니 주인잃은 주정들이 바다에 떠다니고 있었다. 선원들이 주정들을 끌어모아 1척당 십수척의 주정을 확보하고 오전 7시 30분부터 다쿠미 지대의 잔여병력과 무기 및 보급품 양륙을 시작했다. 양륙 작업 중에 영국기 2대가 나타나 공격을 가했으나 큰 피해를 입히지는 못했다. 오후 3시에 양륙작업을 마친 아야토산마루와 사쿠라마루는 무사히 싱고라로 철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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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개전

 

1941년 10월부터 극동총사령부에는 일본군이 상하이에서 주정을 건조하고 하이난 섬에서는 정글전 훈련을 하고 있으며 남부 인도차이나에 비행장을 건설 중이고 일본선박들은 일본이 지배하는 해역으로 모이고 있다는 소식이 들어왔다.

11월이 되자 상하이에서 만든 주정을 실은 일본선박들이 캄란 만에 모이고 남부 인도차이나에 일본기들이 집결하고 있다는 보고가 들어왔다.

 

1941년 11월 21일에 극동총사령관 브룩포팸 대장은 영국참모본부에 일본의 침공이 확실시되면 투우사 작전을 실행할 권한을 요구했다.

22일에 브룩포팸 대장은 말레이에 군사경계태세 명령을 내렸다. 이에 따라 일부 항공기들이 전투태세에 들어가고 말레이 사령관 퍼시발 중장은 투우사 작전 발령을 위한 절차를 밟았으며 동해안에 배치된 병력들은 2급 준비태세로 들어갔다.

25일에 전쟁성은 브룩포팸 대장에게 투우사 작전은 전쟁내각의 명령이 있어야만 실행할 수 있다고 답변했다.

27일에 브룩포팸 대장은 일본군이 사이공을 떠나면 36시간 만에 싱고라에 상륙할 수 있다면서 전쟁내각의 승인을 기다릴 여유가 없다고 전쟁성에 경고했다. 같은 날 브룩포팸 대장은 하노이 주재 미국영사로부터 일본군이 12월 1일에 사전 경고없이 싱고라에 상륙하려 한다는 첩보를 받았다.

28일에 해군성은 프린스오브웨일스를 타고 콜롬보에 도착한 필립스 중장에게 비행기로 싱가포르로 간 다음 마닐라에 가서 미국, 영연방 및 네덜란드령 동인도제도와 해군 운용에 관하여 협의하라고 명령했다. 같은 날 중국사령관 레이턴 중장은 네덜란드령 동인도제도에게 잠수함으로 싱고라 부근 해상을 정찰해 달라고 요청했다. 브룩포팸 대장은 코타바루에서 290km 떨어진 해상까지 정찰하라고 명령했으며 필리핀의 미군에게 비행기로 마닐라와 캄란 만 사이를 정찰해 달라고 요청했다. 그러나 당시 필리핀의 미군은 워싱턴으로부터 일본을 자극하지 않도록 캄란 만 정찰을 금지하는 명령을 받고 있었다.

29일에 브룩포팸 대장은 미국과 일본의 협상이 실패했으며 일본이 언제라도 필리핀, 태국, 말레이 또는 보르네오를 공격할 수 있다는 보고를 받았다. 제3군단은 명령이 떨어지면 6시간 내로 투우사 작전을 실시할 수 있는 태세를 갖추라는 명령을 받았다. 같은 날 영국참모본부는 브룩포팸 대장이 27일에 보낸 경고에 대한 답신을 보냈다. 참모본부는 일본선단이 크라 지협 쪽으로 항해하는 것만으로 태국을 침공한다고 볼 수 없으며 그 상태에서 투우사 작전을 실시하면 영국이 먼저 태국의 중립을 침범하게 된다고 말했다. 따라서 개전시 미국의 즉각적인 참전이 보장되지 않는 한 투우사 작전은 전쟁내각의 승인을 얻어 실시해야 한다고 답했다.

 

12월 1일에 의용대가 소집되고 말레이 수비대 전체가 2급 준비태세에 들어갔다.

2일에 브룩포팸 대장은 불쾌한 첩보를 받았다. 즉 태국의 친일파들이 코타바루 북방 영국군 바로 눈 앞의 태국령에 일본군이 상륙하여 영국군의 월경을 유도해달라고 일본에 요청했으며 그럴 경우 태국은 즉시 영국에 선전포고할 것이라고 말했다는 내용이었다.

3일에 전함 프린스오브웨일스와 순양전함 리펄스가 싱가포르에 도착했다. 톰 필립스 해군중장이 새로 편성된 동양함대의 사령관이 되었고 8일에 동양함대사령관이 중국사령관의 업무를 넘겨 받으면서 극동 지역의 모든 영국해군 전력은 필립스 중장의 지휘를 받게 되었다.

4일에 브룩포팸 대장은 2일에 받은 첩보에 의거해 일본군이 코타바루에 상륙할 것으로 보이면 투우사 작전을 실시할 권한을 요구했다.

6일에 캄란 만과 사이공에 집결해 있던 일본수송선단이 사라졌다는 보고가 들어왔다. 코타바루를 이륙한 제1호주정찰비행대대의 허드슨 정찰기가 오후 12시 12분에 캄보디아 곶 남동쪽 130km 해상에서 일본제143연대를 실은 선단이 북서쪽으로 향하는 것을 발견했고 이어서 제5사단 주력을 태운 선단을 발견했다. 극동총사령관 브룩포팸 대장은 말레이나 태국으로 향하는 침공선단일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했으나 남부 인도차이나의 카우롱으로 향할 가능성도 무시할 수 없었으므로 투우사 작전 명령을 내리지 않고 대신 말레이 수비대에 제1급 경계령을 내렸다. 말레이 사령관 퍼시발 중장은 오후 3시 15분에 제3군단장 히스 중장에게 전화를 걸어 실행명령이 떨어지면 즉시 투우사 작전을 실시할 수 있도록 제11인도사단을 준비시키고 병력과 물자의 수송을 담당할 기차도 준비시키라고 말했다.

 

(1941년 12월 4일 - 10일 사이 말레이 및 태국만의 작전상황도. http://www.ibiblio.org/hyperwar/UN/UK/RN/BS-14_POW+Repulse/)

 

7일 아침에 카탈리나 비행정 1대가 카우롱 만을 정찰하러 갔다가 일본기에게 격추되었다. 날씨가 나빴으나 연합군은 필사적으로 정찰기를 띄웠다. 오후에 정찰기 1대가 서쪽으로 항진하던 일본상선 2척이 남쪽으로 변침하는 장면을 발견했다. 오후 5시 30분에 정찰기 1대가 코타바루 북방 180km 해역에서 상선 1척과 순양함 1척이 싱고라 방향으로 항진하는 것을 발견했다. 1시간 후에는 또다른 정찰기가 파타니 북방 100km 해역에서 일본구축함 4척이 해안과 평행하게 남하하는 것을 발견했다. 이 모든 정보는 오후 9시가 되어서야 극동총사령관에게 도달했다.  

 

극동총사령관 브룩포팸 대장은 자신이 딜레마에 빠졌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만일 일본군이 싱고라로 향하고 있다면 몇 시간 후인 8일 새벽에는 상륙을 시작할 것이었다. 영국군이 아무리 빨리 움직여도 싱고라에 도달하는 데에는 24시간이 걸리므로 싱고라에 도착했을 때에는 이미 일본군이 상륙을 마친 다음일 것이었다. 만일 일본군이 싱고라를 향하지 않은 상태에서 투우사 작전을 발동하면 영국이 먼저 태국의 중립을 범하는 결과가 될 것이었다. 태국 외무장관은 7일 낮에 태국 주재 영국대사에게 만일 태국이 일본에게 공격을 받으면 영국 측에서 싸우겠지만 일본이 태국을 공격하기 전에 영국군이 태국 국경을 한발짝이라도 넘는다면 태국은 일본 측에서 영국과 싸울 것이라고 경고했다. 결정적으로 브룩포팸 대장은 4일에 요구했던 투우사 작전 실행 권한에 대하여 영국참모본부의 대답을 듣지 못한 상태였다. 

참모본부는 브룩포팸 대장의 요구를 승인했으나 너무 늦었다. 참모본부의 전문은 말레이 시간으로 8일 오전 8시에 극동총사령부에 도착했는데 일본군은 전문이 도착하기 6시간 전에 코타바루에 상륙했으며 8일 오전 7시 30분터는 일본기들이 말레이 북부의 비행장들을 맹폭하고 있었다.

마음을 정하지 못하고 있던 브룩포팸 대장과 달리 말레이 사령관 퍼시발 중장은 7일 오후 11시 20분에 제3군단장 히스 중장에게 전화를 걸어 8일 아침 8시를 기하여 투우사 작전을 실시할 준비를 하라고 명령했다.

 

자정을 넘어 8일 새벽이 되자 모든 상황이 분명해졌다. 오전 1시경 코타바루 비행장을 책임지고 있는 노블 공군중령이 싱가포르의 공군사령부에 전화를 걸어 코타바루 앞바다에 정체불명의 선박이 떠 있으며 포격 소리가 들린다고 말했다. 펄포드 소장은 즉시 정찰기를 띄워 확인하라고 명령했다. 정찰기가 뜨기 전에 코타바루 지역을 담당하던 제8여단장 베르톨트 키 준장으로부터 일본군이 상륙 중이라는 결정적인 보고가 들어왔다. 전쟁이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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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방어태세

 

일본과의 전쟁이 벌어질 당시 말레이 반도의 연합국 공군 세력은 영국, 호주 및 뉴질랜드 공군기로 이루어져 극동공군사령관(Air Commander, Far East) 콘웨이 펄포드 공군소장의 지휘를 받았다. 극동공군사령부는 싱가포르에 있었으며 연합육/공군작전센터(Combined Arrmy/Air Force Operation Center)를 통하여 말레이 사령부와 연결되었다.

 

비행대대는 12개로서 주간전투비행대대 4개, 야간전투비행대대 1개, 폭격비행대대 2개, 뇌격비행대대 2개, 정찰비행대대 2개, 비행정대대 1개였다. 전투기는 미제 버팔로였고 나중에 허리케인이 추가되었다. 야간전투기와 폭격기는 블레넘, 뇌격기는 구식 복엽기인 빌데비스트였으며 정찰기는 허드슨, 비행정은 카탈리나였다. 전투 및 폭격비행대대의 정수는 일선기 16대 예비기 8대였고 뇌격 및 정찰비행대대의 정수는 일선기 12대 예비기 6대였으며 비행정대대의 정수는 일선기 6대, 예비기 2대였으나 정수를 채운 비행대대는 거의 없었다.

 

(브류스터 F2A 버펄로 전투기. 자세한 내용은 여기로 사진 출처 : http://en.wikipedia.org/wiki/Brewster_F2A_Buffalo)

 

일본이 침공했을 때 말레이의 일선기는 158대, 예비기는 88대였다. 1941년 12월 7일 현재 일선기의 배치 상황은 다음과 같다.

 

알로스타 : 제62폭격비행대대(블레넘1 폭격기 11대)

승게파타니 : 제21호주전투비행대대(버팔로 전투기 12대), 제27야간전투비행대대(블레넘1 야간전투기 12대)

코타바루 : 제1호주정찰비행대대(허드슨2 정찰기 12대), 제36뇌격비행대대(빌데비스트 뇌격기 6대)

공케다 : 제100뇌격비행대대(빌데비스트 뇌격기 6대)

쿠안탄 : 제60폭격비행대대(블레넘1 폭격기 8대), 제8호주정찰비행대대(허드슨2 정찰기 8대), 제36뇌격비행대대(빌데비스트 뇌격기 6대)

텡가 : 제34폭격비행대대(블레넘4 폭격기 16대)

칼랑 : 제243 및 제488뉴질랜드전투비행대대(버팔로 전투기 32대)

셈바왕 : 제8호주정찰비행대대(허드슨2 정찰기 4대), 제453호주전투비행대대(버팔로 전투기 16대)

셀레타 : 제100뇌격비행대대(빌데비스트 뇌격기 6대), 제205비행정대대(카탈리나 비행정 3대)

 

(브리스톨 블레넘 폭격기. 자세한 내용은 여기로. https://en.wikipedia.org/wiki/Bristol_Blenheim)

 

예비기는 블레넘 1 및 4 폭격기 15대, 버팔로 전투기 52대, 허드슨 정찰기 7대, 빌데비스트 뇌격기 12대, 카탈리나 비행정 2대였는데 버팔로 전투기 21대는 엔진 밸브 문제로 비행이 불가능했다. 예비기는 원래 비행대대가 보유했으나 자체 정비 능력이 부족했으므로 싱가포르에 집결시켜 관리하다가 손실이 생기면 보충해 주는 방식으로 운용했다.

 

(록히드 허드슨 정찰기. 자세한 내용은 여기로 . https://en.wikipedia.org/wiki/Lockheed_Hudson)

 

조종사의 훈련도는 낮은 편이었다.

전투비행대대의 버팔로들은 1941년에야 도착했기 때문에 숙달할 시간이 부족했다. 일본이 침공했을 때 극동공군사령부는 전투기 조종사들 중 1/4 가량은 작전 투입 기준에 미달이라고 판단했다. 야간전투비행대대의 블레넘1 들은 낡고 정비 상태도 불량했다. 뇌격전투비행대대의 조종사들은 훈련도가 높고 경험도 풍부했으나 복엽기인 빌데비스트는 시대에 뒤떨어진 구식기였다. 경폭격비행대대와 정찰비행대대의 블레넘1 및 4 와 허드슨은 임무에 비해 숫자가 모자랐고 승무원들은 바다 멀리 날아가서 폭격하거나 정찰하는데 익숙하지 않았다.

 

(비커스 빌데비스트 뇌격기. https://en.wikipedia.org/wiki/Vickers_Vildebeest)

 

정수를 채운 비행대대가 거의 없었을 뿐 아니라 버팔로를 제외하면 모든 비행기의 예비 기체가 부족했다. 일선기 158대는 극동공군사령부가 요구했던 일선기 566대는 말할것도 없고 참모본부가 최소한으로 인정한 일선기 336대의 절반에도 못 미치는 숫자였다. 예비기 88대를 더해도 비행기 수는 246대에 지나지 않았다. 

말레이에 투입된 일본 항공력은 일선기 617대, 예비기 182대로 훨씬 강력했다. 실제로 말레이에 투입된 일본 일선기 중 전투기만 204대(육군 168대, 해군 36대)로 말레이의 연합군 일선기 전체보다 30%나 많았다.

 

극동공군사령부 참모의 질적 저하도 문제였다. 유능한 장교들이 유럽 전쟁 때문에 계속 본국으로 불려가는 바람에 극동공군사령관은 팽창하는 사령부 요원을 경험이 부족한 장교로 채우는 수 밖에 없었다. 비행기는 부족하고 그나마 구식기가 많았으며 조종사의 훈련도는 낮은 데다가 참모의 수준까지 떨어지는 말레이의 연합군 공군은 전쟁이 발발하자 일본 육군 및 해군항공대의 상대가 되지 않았다.

 

(1941년 12월 7일 말레이의 부대배치 현황. https://en.wikipedia.org/wiki/Battle_of_Slim_River)

 

일본이 침공했을 때 말레이에는 정규보병대대인 영국, 호주, 인도 및 말레이 대대 31개가 있었는데 이는 보병사단 3개 반에 해당하는 규모이다. 사단은 제9 및 제11인도사단과 제8호주사단이 있었는데 모두 2개 보병여단과 포병을 비롯한 지원부대로 이루어져 있었다. 이외에 2개 예비여단, 싱가포르 방어를 위한 2개 요새여단, 그리고 페낭을 지키는 1개 대대가 있었다. 여기에 더하여 싱가포르를 지키기 위한 고정해안방어부대와 대공포 부대, 비행장 방어대대와 지역 의용대가 있었다. 보르네오의 사라왁에도 1개 대대가 있었다. 전차부대는 없었다.

 

영국군의 보병사단은 완편시 3개 보병여단과 야포, 대전차 및 대공포 부대를 비롯한 지원부대로 이루어졌으며 정원13,700명이고 야포 72문, 대공포 54문, 대전차포 48문을 보유했다. 보병여단의 정원은 2,500명, 보병대대는 800명, 보병중대는 127명이었다.

포병연대의 정원은 670명으로 야포 24문을 보유했고, 포대는 200명 정원에 야포 8문을 보유했다. 대공포대의 정원은 170명으로 대공포 12문을 보유했고, 대전차포대의 정원은160명으로 대전차포 12문을 보유했다. (영연방군의 포대는 미군 포병의 대대에 해당한다.)

 

현지인들로 구성된 부대 중 정규군은 1개 말레이대대가 유일했다. 이들은 인도군과 비슷하게 장교는 영국인 및 말레이인이고 부사관 및 사병들은 말레이인이었다. 이외에 각지에서 편성한 의용군들이 있었는데 전체 병력은 장교 194명, 부사관 및 사병 4,328명으로 1/3 가량은 백인 또는 백인과 현지인의 혼혈이었으며 나머지는 말레이인이나 중국인이었다.

 

정규군과 의용대를 합친 말레이 수비대의 총 병력은 약 88,600명이었다. 19,600명은 영국인, 15,200명은 호주인, 37,000명은 인도인이었으며 16,800명은 현지에서 징집한 말레이인 및 중국인이었다. 31개 보병대대를 중심으로 한 말레이 수비대의 전력은 1941년 8월에 말레이 사령관 퍼시발 중장이 요구했던 바로부터 17개 보병대대와 2개 전차연대가 모자란 전력이었다.

 

말레이 반도는 많은 부분이 정글로 덮여 있었다. 정글은 시야가 제한되고 기동이 어려워서 대규모 병력의 통제가 어려웠다. 따라서 소부대 지휘관의 능력이 중요했다. 또한 포병의 화력 투사와 전차의 기동이 제한되기 때문에 정글전은 주로 보병 사이의 전투였다. 정글전에서 이기려면 낮에는 더위와 습기, 밤에는 낮선 소음과 빛에 익숙해져야 했고 이를 위해서는 정글에서 실전을 경험하거나 오래 훈련을 쌓는 길 밖에 없었다. 그런 면에서 연합군은 불리했다.

 

제3군단의 주력을 이루는 인도사단은 다수의 인도대대와 소수의 백인대대로 이루어져 있었다. 인도대대에는 경험많은 장교와 부사관이 부족했다. 인도자치정부는 중동, 이라크 및 말레이의 병력 수요를 충당하기 위하여 급속히 군대를 확장하여 1941년에는 평화시의 4배로 팽창했다. 이를 위하여 기존 부대에서 경험많은 장교나 부사관을 차출하여 새로 편성하는 부대의 기간 병력으로 삼았다. 이렇게 기존 부대에서 경험많은 장교와 부사관을 빼가는 행위를 '우유짜기'(milking)라고 불렀는데 제9 및 제11인도사단은 말레이에 파견된 이후에도 우유짜기를 당했다. 그렇게 경험많은 장교와 부사관이 빠져나간 자리는 전시 속성 과정을 거쳐 배출된 미숙한 백인 및 인도인 장교와 부사관이 채웠다. 경험많은 병사 또한 우유짜기로 차출되는 경우가 많아 병사는 대부분 기초군사훈련만 마친 상태였으므로 인도대대의 전투력은 약했다.

백인대대들은 대부분 인도나 극동에서 오래 주둔한 경우가 많아 기동전에 약한데다가 경험많은 장교와 부사관들이 우유짜기로 차출되어 전투력이 떨어졌다.

말레이 수비대에는 훈련받은 예비대가 없었다. 따라서 일단 전투가 벌어지자 결원을 보충할 수 없었고 그 결과 부대의 전투력이 급격히 약해졌다.

 

말레이 사령부의 상황도 비슷했다. 유능한 참모는 우유짜기로 중동을 비롯한 다른 지역으로 차출되었고 빈 자리를 미숙한 장교가 메웠다. 전쟁성은 프랑스나 북아프리카, 중동에서 실전을 겪은 장교를 극동에 파견하는 교환복무제를 실시하지 않아 피로써 얻은 귀중한 교훈이 극동으로 전파되지 않았다.

 

말레이 수비대의 병사들은 대부분 전쟁이 발발한 후에 징병되어 기초군사훈련만 마친 상태였으며 정글전 훈련은 거의 받지 못했다. 말레이 사령부에는 훈련참모가 없고 인사참모가 훈련을 담당했는데 1941년이 되자 인사참모는 다양한 국적을 가진 부대들이 도착하면서 갑자기 팽창한 수비대를 관리하는 데만도 일에 깔려 죽을 지경이었다. 따라서 훈련은 뒷전으로 밀리기 일쑤였는데 여기에는 일본군의 실력을 얕본 말레이 사령부의 오만도 한 몫을 했다. 일본에 파견나가 있던 전쟁성의 무관들은 일본육군의 전투력이 강하다고 보고했으나 말레이 사령부는 무시했다. 그들은 무장이 빈약한 중국군에게 고전하고 있는 일본육군의 전투력이 강할 리가 없다고 생각했으며 따라서 시간을 최대한 아끼면서 강하게 훈련해야 한다는 절실함이 부족했다.

 

부대가 조각난 채로 말레이에 도착하여 넓은 지역에 분산 배치된 것도 훈련에 지장을 주었다. 부대들이 분산된 상태에서 야포와 대전차포의 도착이 늦어지고 통신능력도 부족하여 합동훈련을 하기 힘들었다. 실제로 제3군단은 제대로 된 통신부대가 없어 말레이 전투 내내 거의 민간 통신에 의지했다.

 

훈련을 방해한 다른 요인은 민간인 노동자의 부족이었다. 대부분의 노동자가 고무농장이나 주석광산에서 일을 하고 있어서 군에서 노동자를 구하기 어려웠다. 말레이 사령부는 전쟁성에 요청하여 1940년 말에 인도로부터 노무중대 2개를 받았지만 이것으로는 어림도 없었다. 1941년 4월에 전쟁성은 현지에서 노무중대 6개를 편성하는 것을 허가했으나 해협식민지 당국이 반대했다. 해협식민지와의 힘든 협상 끝에 6월에 중국인으로 이루어진 노무중대 1개를 편성했으나 8월이 되자 중국인들이 모두 달아나면서 해체되었다. 무리도 아닌 것이 당시 전쟁성이 허용한 보수는 하루 45센트였는데 이것은 현지 시세로 비숙련 여자의 일당이었다. 건장한 성인 남성이 고무농장에서 일을 하면 숙식 제공과 함께 하루 1.1 말레이달러를 받을 수 있었다. 퍼시발 중장은 인도군 노무중대를 더 보내 달라고 전쟁성에 요청했지만 거절당했다. 전쟁성은 10월에야 비로소 현실에 맞는 급료 지급을 허락했으나 이번에는 감독관들의 급료가 문제였다. 노무중대의 감독관으로는 영어를 할 줄 아는 중국인들이 필요했는데 이런 사람은 일당 2.75 말레이달러 이하로는 구할 수 없었다. 감독관 급료로 일당 2 말레이달러를 고집하던 전쟁성은 11월 19일에야 2.75 말레이달러를 받아들였고 비로소 노동자 모집이 시작되었지만 이미 늦었다. 결국 일본의 침공이 시작되었을 때 퍼시발 중장이 사용할 수 있는 노동자는 1940년 말에 파견된 인도군 노무중대 2개가 전부였다. 아치볼드 웨이벌 장군은 말레이 상실에 대한 보고서에서 만일 퍼시발 장군이 단지 5,000 명의 노동자만 가지고 있었어도 1941년 12월과 1942년 1월의 혼란은 대부분 막을 수 있었을 것이라고 적었다. 노동자의 부족으로 병사들은 훈련할 시간에 자신들의 막사와 방어 시설을 스스로 만들어야 했다.

 

남부 조호르 및 싱가포르의 방어를 담당한 제8호주사단과 제12인도보병여단은 상황이 좀 나았다. 제8호주사단은 호주 본토를 떠나기 전에 일본군이 강철같은 의지와 강인한 체력을 가졌으며 정글전에 잘 훈련된 만만찮은 상대라는 경고를 들었기 때문에 정글전 훈련에 대한 의지가 강했고 더하여 사단장 베넷 소장은 폭넓은 재량권을 얻어 자유롭게 훈련을 실시할 수 있었다. 호주군은 인도군만큼 널리 흩어져 배치되지 않았고 대부분의 야포 및 박격포와 같이 도착했기 때문에 합동훈련을 실시할 수 있었다. 제22호주여단은 일본군이 쳐들어 왔을 때 이미 11개월간 말레이에 주둔하면서 훈련하여 정글전에 익숙해진 상태였다. 1941년 8월에 도착한 제27호주여단은 도착과 동시에 맹훈련에 돌입했으나 훈련 기간이 짧아서 제22호주여단보다는 정글전에 대한 숙련도가 떨어졌다.

 

의용대는 대체로 무장이 약했으며 훈련도 또한 낮았다.

 

말레이 사령관 퍼시발 중장은 제9 및 제11인도사단으로 이루어진 히스 중장의 제3군단에게 북부 말레이의 방어와 투우사 작전을 맡겼다.

제8호주사단은 남부 조호르의 방어를 맡았고 싱가포르 방어는 2개 보병여단이 맡았다. 제12인도보병여단은 사령부 예비로서 1개 대대는 포트 딕슨에, 1개 대대는 싱가포르에 배치했다.

사령부를 쿠알라룸푸르에 둔 제3군단장 히스 중장은 제9사단을 동해안 방어에 돌리고 제11사단으로 투우사 작전을 준비했으며 제28여단은 군단 예비대로 서해안 중부의 이포에 주둔시켰다.

제9사단장 바스토우 소장은 제8여단을 코타바루에, 제22여단을 쿠안탄에 배치하여 비행장을 방어했다. 제9사단 사령부는 군단 사령부와 같이 쿠알라룸푸르에 두었다.

제11사단장 머레이-라이언 소장은 알로스타 북쪽의 태국 국경 지대에 제6 및 제15여단을 배치하여 투우사 작전을 준비했다. 제11사단 사령부는 승게파타니 동쪽의 카케틸에 두었다. 동해안의 파타니와 연결되는 도로가 지나가는 크로에는 1개 대대를 두어 파타니에 상륙한 일본군의 기습적인 남하에 대비했다. 전쟁이 터지면 페낭을 지키던 1개 대대도 크로 방면으로 투입할 것이었다. 크로 방면을 지키는 부대는 크로부대(Kroh column = Krohcol)라고 불렸다.

 

제3군단은 투우사 작전 발동이 늦어져 일본군이 크라 지협에 상륙할 때를 대비하여 예비 계획을 수립했다. 예비 계획에 따르면 주요 방어선은 태국 국경으로부터 30km 떨어진 알로스타 북쪽의 지트라가 될 것이었다. 지트라에는 콘크리트 벙커와 참호를 건설하고 철조망을 쳤다. 그 앞에는 대전차호를 파고 있었으나 완성되기 전에 전쟁이 터졌다.

파타니에서 남하하는 적을 막기 위한 레제 지점(Ledge Position)은 크로-파타니 도로를 따라 태국 영토 내로 50km 정도 들어간 지점이었다. 전쟁이 터지면 크로부대가 재빨리 태국 국경을 넘어 북상하여 레제 지점에서 일본군의 남하를 저지할 것이었다. 이와는 별도로 크로 서쪽 5km 지점에는 도로를 따라 2개 대대가 사용할 수 있는 방어거점을 만들었다.

Posted by 대사(P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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