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 지트라 전투(1) - 서전의 참패
투우사 작전 실시를 책임지고 있던 제11인도사단은 개전과 동시에 작전 실시가 불가능해지자 지트라 방어에 주력했다. 지트라 방어선은 미완성이었다. 노동력이 부족하여 병사들이 직접 방어공사를 해야 했다. 또한 없는 시간을 쪼개어서 병사들이 훈련한 내용은 방어 훈련이 아니라 대부분 투우사 작전에 대비한 이동 및 공격 훈련이었다. 설상가상으로 이틀 동안 내린 폭우로 참호에는 물이 가득 고였다. 병사들은 투우사 작전에 쓰려고 차량과 기차에 실어두었던 장비를 꺼내와서 철조망을 치고 지뢰를 묻었다. 시간이 없어 땅에 노출된 상태로 전화선을 설치할 수 밖에 없었기 때문에 나중에 통신문제가 발생했다.
제11인도사단은 좌익에 제6인도보병여단, 우익에 제15인도보병여단을 배치하고 제28인도보병여단을 예비로 보유했다. 제6여단은 좌익에 제2/16 펀자브대대, 우익에 제2이스트서레이대대를 배치하여 해안에서부터 지트라 서쪽까지 약 16,500m의 전선을 담당했다. 오른쪽의 제15여단은 도로를 가운데 두고 좌익은 제1레스터셔대대, 우익에 제2/9자츠대대를 배치했다. 제2/9자츠대대의 동쪽은 울창한 정글로 뒤덮인 언덕이었다. 제15여단의 방어선 길이는 약 5,500m 였다. 제1/14펀자브대대는 지트라에서 북쪽으로 15km 떨어진 창글룬에 전진 방어선을 펴고 있었다.
제11사단의 화력지원은 제155야포연대의 2개 포대, 제22산포연대의 2개 포대 및 제80대전차연대의 2개 포대가 맡았다.
(지트라 전투. History of The second World War, The War Against Japan, Vol.1 The Loss of Singapore, P.208-209)
지트라 방어선을 공격한 일본군 선두는 사에키 시즈오 중좌의 수색제5연대였다.(일본군 수색연대는 중대의 집합체로 보병대대 규모이다.) 수색제5연대는 8일 오후 9시 국경 부근의 사다오에서 강행정찰을 나온 제1/8펀자브대대를 만나 가벼운 교전 끝에 물리치고 오후 11시 30분에 사다오를 점령했다. 9일 아침부터 사다오에 제5사단 주력이 도착하기 시작했다. 대부분 차량과 열차로 이동했으며 일부는 자전거를 탔다.
수색제5연대는 오후 3시 30분에 남쪽으로 돌진하여 국경을 넘으라는 명령을 받고 오후 5시 30분에 사다오를 출발했다. 조금 가다보니 국경으로 통하는 모든 다리가 끊겨 있었다. 할 수 없이 전차부대와 차량들은 공병과 함께 뒤따르고 수색제5연대는 도보로 남진하여 밤에 국경에 도착했다.
수색제5연대는 어두운 밤에 배수구를 통하여 몰래 국경을 넘은 다음 제1/14펀자브대대의 전초를 기습했다. 기습을 받은 영국군은 황급히 후퇴했고 일본군은 전초 2개를 추가로 격파하면서 전진했다. 10일 새벽에 일본군 선두가 창글룬에 도착하여 제1/14펀자브대대의 주력과 접촉했다. 제1/14펀자브대대는 야포의 화력지원을 받아 일본군의 진격을 저지했다.
1941년 12월 10일 하루 동안 수색제5연대는 다리를 수리한 후 뒤따라 온 보병제41연대제2대대, 치하 중형전차를 보유한 전차제3중대, 1개 산포중대, 1개 공병소대, 위생대 및 방역급수부 일부를 지원받아 자정에 사에키 정진대를 편성했다. 정진대의 목표는 지트라를 돌파한 후 단번에 남쪽 페락 강까지 진출하는 것이었다.
(97식 中전차 치하. 자세한 내용은 여기로. https://en.wikipedia.org/wiki/Type_97_Chi-Ha)
10일 아침에 지트라 북쪽에 배치된 제1/14펀자브 대대가 일본군과 접촉하자 제11사단장 머레이-라이언 소장은 예비대인 제28여단에서 제1/2구르카소총대대를 떼어내 제15여단에 배속시켰다. 제15여단장 가렛 준장은 제1/2구르카대대를 지트라에서 북쪽으로 3km 정도 떨어진 아순에 배치했다.
제6여단 소속의 제1/8펀자브대대는 8일 오후에 국경을 넘어 싱고라 방면으로 강행정찰을 나섰다가 남하 중이던 일본군 주력과 만나 짧은 교전 후 후퇴하여 페를리스에 주둔 중이었다. 머레이-라이언 소장은 10일 오후 제1/8펀자브대대에게 코디앙 남쪽으로 후퇴하라고 명령했다. 페를리스의 유일한 정규군인 제1/8펀자브대대가 남쪽으로 빠져나가자 페를리스의 술탄이 격렬하게 항의했으나 어쩔 수 없었다.
(케다주 전투 상황. History of The second World War, The War Against Japan, Vol.1 The Loss of Singapore. P.201)
11일 아침 8시에 사에키 정진대의 보병제41연대제2대대가 제1/14펀자브대대를 공격하여 방어선 일부를 점령하고 대전차포 2문을 뺏었다.
일본군은 오전 11시부터 총공격을 실시했다. 영국군은 오후3시까지 버티다가 남쪽으로 후퇴하기 시작했다. 제15여단장 가렛 준장은 제1/14펀자브대대를 지트라 방어선 이남으로 철수시키려 했으나 머레이-라이언 소장은 아순 복쪽 3km 지점에 있는 낭카에서 일본군을 저지하라고 명령했다.
영국군이 철수하자 사에키 정진대는 전차를 앞세우고 추격했다. 오후 4시 30분에 낭카 북쪽에서 일본군이 후퇴하는 제1/14펀자브대대의 꼬리를 잡았다. 선두의 일본전차가 순식간에 제1/14펀자브대대의 후위를 유린하고 대열로 뛰어들었고 수색제4중대의 장갑차가 뒤따랐다. 이어서 트럭을 타고 따라오던 보병이 하차하여 공격했다. 결과는 파멸적이었다. 전차를 본 적이 없었던 제1/14펀자브대대의 병사들은 행군 중에 적의 전차로부터 기습을 받자 공포에 질려 달아났다. 제2대전차포대는 일본전차에게 치명적인 대전차포 10문을 보유하고 있었으나 이동 중이던 대전차포를 방열할 시간도, 정신도 없었다. 대전차포는 1발의 포탄도 쏘아보지 못하고 일본군에게 뺏겼다. 제1/14펀자브대대는 20분 간의 전투로 붕괴했다. 비록 약 200명이 다음날 제15여단에 복귀했지만 전투부대로서 제1/14펀자브대대는 사라졌다. 난리통에 제15여단장 가렛 준장도 실종되었다가 나중에 복귀했다. 제11사단장 머레이-라이언 소장은 제28여단장 카펜데일 준장에게 임시로 제15여단의 지휘를 맡겼다.
제1/14펀자브대대를 순식간에 유린한 일본군은 그대로 남하하여 아순을 방어하던 제2/1구르카소총대대를 덮쳤다. 일본전차들이 강한 저항을 받자 뒤따르던 보병들이 우회하여 측면을 공격했다. 격렬한 전투가 벌어졌으나 영국군은 오래 버티지 못했다. 측면으로 우회한 일본군에게 영국군의 주의가 쏠린 사이 강력한 일격으로 전방이 뚫리면서 도로가 개방되었다. 일단 도로가 뚫리자 전차가 난입하여 영국군 내에 공포와 혼란을 일으켰다. 일본군은 기회를 놓치지 않고 잇달아 영국군 방어선을 점령했으며 잠시 후 영국군은 도망치기 시작했다. 질서있게 퇴각하려는 모든 노력은 물거품이 되었고 일본군은 영국군의 2번째 대대를 제거했다.
일본군은 잠시 숨을 돌리면서 전상자를 수용한 후 남하했다.
그동안 지트라 방어선에서는 어이없는 일이 벌어졌다. 페를리스에 주둔 중이던 제1/8펀자브대대는 전날 철수명령을 받고 남하했다. 대열이 지트라 서쪽 망고이에 접근하자 다리를 지키던 장교가 일본군이라고 지레 겁을 먹고 다리를 폭파해 버렸다. 따라서 제1/8펀자브대대는 대전차포 7문, 야포 4문 그리고 브렌건캐리어 몇 대를 강 건너편에 놓아두고 철수해야만 했다. 당시 영국군 처지에서 전투 한 번 치르지 못하고 이만한 장비와 무기를 잃는다는 것은 뼈아픈 일로서 훈련이 부족하고 사기가 떨어진 영국군의 단면이었다.
11일 오후 8시 20분에 일본전차가 전조등을 밝힌 채 도로를 따라 내려와 10분 만에 제1레스터셔대대의 전초를 유린했으나 제215대전차포대가 선두 전차 2대를 파괴하자 진격을 멈추었다. 대신 일본군은 저격병을 내보내어 동쪽을 맡고 있는 제2/9자츠대대를 저격하면서 방어선을 정찰했다.
그동안 영국군 내에서는 일본군이 이미 지트라 방어선 남동쪽의 부킷 잔탐과 부킷 알루를 점령했다는 헛소문이 돌았다. 임시로 제15여단을 지휘하던 제28여단장 카펜데일 준장은 일본군이 방어선의 오른쪽을 우회하려 한다고 생각했다. 시간이 없다고 생각한 그는 머레이-라이언 소장을 거치지 않고 제6여단장 레이 준장에게 지원을 요청했다. 레이 준장은 제1/8 및 제2/16펀자브대대에서 2개 중대씩 4개 중대를 보내주었다. 카펜데일 준장은 자신의 예비대인 제2/2구르카소총대대를 제2자츠대대의 남쪽인 바타강 다리 동쪽에 배치했다. 그 우익에는 제1/8펀자브대대의 1개 중대를, 다시 오른쪽인 켈루비에는 제2/16펀자브대대의 2개 중대를 배치했다. 부대들은 12일 날이 밝기 전에 이동을 마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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